디아스포라 깊이읽기
2호
문화냉전시대의 드라마 한류
허혜정
한국전 이후 미국과 맺은 동맹 체제를 통해 세계 냉전 체제로 포섭된 대한민국의 문화 정세는 한류의 출발점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가 아닐 수 없다. 분단국이자 휴전국인 이상 전쟁을 경계하며 강인한 군대를 양성해야만 하는 현실은 군대를 테마로 한 한류 콘텐츠들의 중요한 인자로 작용한다. 따지고 보면 한국전의 참화에서 분단과 관련된 작품들이 많이 태어났다. 영화만 해도 한국전쟁기에 부산, 진해, 대구 등의 피난지로 몰려든 젊은 영화인들에 의해 다큐멘터리류의 기록영화와 전쟁 영화가 많이 제작되었다. 이를테면 「아름다운 서울」(1950), 「서부전선」(1950), 「오랑캐의 발자취」(1951), 「육군 포병 학교」(1951), 「정의의 진격」(1951), 「총검은 살아있다」(1953) 등 전쟁 통에 태어난 작품들이 적지 않다. 당대의 영화인들 중에서도 훗날 칸영화제(47회, 1994) 심사위원으로 위촉될 만큼 명성을 날리던 신상옥 감독은, 대구와 부산을 오가며 가혹한 생존의 진창에 내던져진 양부인 ‘민자’의 삶을 데뷔작 「악야」(1952)에 담아내고 시력을 잃어버린 상이군인의 상처와 삶의 몸부림을 「삼천만의 꽃다발」(1952)로 제작하는 등, 상업 영화와 예술영화, 다큐멘터리에 이르기까지 곤핍한 시대상과 인물들을 사실적인 기법으로 담아내었다.
다난한 현대사를 관통하는 과정에서 전후기의 이념적인 렌즈나 정치성은 탈색되었지만 기본적으로는 세계 냉전 구도의 최전선에 있는 휴전 국가라는 상황에서 한국의 문화 산업은 좀 더 분명한 자본주의적 방식으로 전쟁이나 분단의 문제를 새로이 해석하고 재현할 내적 요구에 직면하게 되었다. 세계화 시대에도 예외적으로 냉전 체제를 지속해 온 한국의 문화 기류는 대중적 흥미와 관심의 대상이자 테마로서 분단을 주목하게 했고 이는 양태가 다양한 한류 콘텐츠 탄생의 배경이 된다. 본격적인 한류의 개막을 예감케 한 영화 「쉬리」에서부터, 세계를 강타한 밀리터리 한류 드라마 「태양의 후예」나 병영의 문제를 바닥까지 파헤친 「D.P.: Deserter Pursuit」(2021) 같은 넷플릭스 드라마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밀리터리 테마들은 한국의 분단 문제를 우회하면서도 그것과 무관하지 않은 감성의 코드를 출현시켰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간에 대중은 분단 상황과 복잡하게 얽힌 콘텐츠의 서사와 캐릭터에 공감하며 한국 특유의 갈등 어린 현실과 가상의 ‘통일’ 시대를 소비했다. 예비역 특수부대원들의 서바이벌 예능 「강철부대」나 병영 체험을 다룬 「진짜 사나이」 같은 예능 콘텐츠도 겉으로는 도드라지지 않지만 냉전 시대의 코드를 밀리터리 오락으로 소비하는 문화 풍토를 조성했다는 점에서 일면 공통점이 있다. 이런 맥락에서 남북문제를 배경에 깔고 있는 콘텐츠가 유행하는 정황이 만들어진다. 2000년대에도 밀리터리 테마를 즐기는 대중의 취향에 호응하여 다양한 대중매체가 서바이벌 콘텐츠를 선보였고 육체 전사들의 경쟁과 도전을 새로운 감성의 모드로 내보이기도 했다. 최근 공개되자마자 넷플릭스 예능 1위를 석권하고 있는 「피지컬 100」 같은 예능 콘텐츠는 극강의 미션을 수행하는 전사들의 육체 표현을 통해 경쟁과 투쟁이라는 한국 특유의 서바이벌 문화 감성을 내보이는 사례로 기억될 만하다.
무엇보다 기존의 분단 문제 재현 방식을 과감하게 탈피한 「사랑의 불시착」의 선풍적인 인기를 상기해 볼 만하다. 남북한 연인들의 로맨스를 다룬 이 드라마의 세계적인 인기는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과 2019년 북미정상회담으로 조성된 남북 간의 평화 무드, 늘 그래왔듯 ‘통일 판타지’를 소비하고픈 한국 대중의 욕망과 북한에 생소한 해외인들의 호기심, 한류에 우호적인 해외 언론의 호응에 힘입은 바 크다. 그런데 도리어 이 드라마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발발과 급격히 도래한 ‘신냉전’의 기류와 맞물려 북한에서 새로운 문제를 부각했다. 「사랑의 불시착」은 북한 당국의 문화 훈령을 충실히 따른 이념적 맥락에서 강력한 항한류의 움직임을 자극하고 강화했다. 물론 항상 북한 당국의 관점에서 보면 ‘한류’는 자본주의의 잔재로서 청소되고 박멸되어야 할 적들의 책동으로 간주되고 철저히 통제되어 왔다. 그러나 한국인과 해외인에게는 문화 산업의 상업주의적 감성과 재미로 소비되는 분단의 테마가, 북한의 주민과는 달리 북한 당국에는 지극히 재미없고 심각하게 받아들여졌다는 점에서 ‘문화 냉전’이라는 코드를 통해 접근해 보아야 할 여러 가지 단면이 있다.
「사랑의 불시착」은 한류 콘텐츠들이 자주 그래왔듯 분단이라는 금선을 넘어 연인들의 생존을 위한 ‘서바이벌’ 코드와 ‘밀리터리’ 포맷을 두드러지게 내보인다. 이는 멜로드라마로서 냉전 체제의 코드와 함께 한류 콘텐츠의 익숙한 재미를 덧입힌다는 점에서도 흥미롭다. 사상전을 수행하는 선전물도 아닌 일개 멜로드라마에 북한이 왜 그렇게 공격적인 반응을 내보이는지 북한의 한류 현상을 살펴보기로 하자.
북한 MZ세대에게 한국 드라마가 큰 인기를 끌어왔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북한 국경 경비대의 청년 군인들이 가장 많이 본 드라마는 「태양의 후예」였다. 군관 아내들까지 “유시진 신드롬”을 앓았다는 「태양의 후예」는 “그렇지 말입니다”라는 대사를 크게 유행시켜1) “남조선에서 인민군대 말투를 베껴”간 것인지 “남조선에서 옮겨온 말”인지 북한에서 난리가 났다. 그래서인지 북한 당국은 강한 전파력을 가진 한류에 대해 “체제를 파괴하려는” 모략 책동을 벌인다고 극렬하게 비난을 쏟아부었다. 북한의 선전 매체 《우리민족끼리》의 논설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극악무도한 도발 행위」에 의하면 “남조선 당국과 영화 제작사들이 허위와 날조로 가득 찬 허황하고 불순하기 그지없는 반공화국 영화와 TV극들”2) 때문이었다. 《메아리》의 논설 「예술적 허구와 상상이 아니라 병적인 동족 대결 의식의 산물」(2020.3.4.)에 의하면 “남조선에서 현실을 왜곡하고 우리 공화국을 헐뜯는 내용으로 일관된 영화와 TV극을 비롯한 반(反)공화국 선전물들이 방영되고 있”다고도 언급했다. 북한이 “용납 못할 도발 행위”라고 성토하는 ‘TV극’의 시기를 따져 보면 “네가 장군님이네?”라는 유행어로 북한을 휩쓴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이 그 대상임을 알 수 있다. 3)
2019년 16부작 드라마로 방영된 「사랑의 불시착」(2019.12.14~2020.2.16)은 북한 MZ세대들에게도 인기를 끌었음은 물론, 이탈리아의 《라리퍼블리카(la Repubblica)》가 “넷플릭스 시리즈의 중심”4)이라고 보도할 만큼 세계적인 화제작이었다. 북한을 잘 모르는 유럽 등지에서도 넷플릭스 랭킹을 휩쓸어 CNN 등 국내외 많은 언론을 탔다. 그저 남북 연인들의 로맨스를 테마로 한 재미있는 드라마일 뿐인데 북한이 극단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은 주인공 윤세리가 리정혁의 부대원들에게 “친절상, 한류사랑상, 일류의 보배상”을 수여하자 표치수가 “니가 장군님이네?” 하고 반문한 대사 때문으로 보인다. 이 말이 북한 청소년들에게 딱 꽂혀 입에 달고 다니자5) 어른들이 틀어막느라 난리가 났을 정도로 「사랑의 불시착」은 북한을 뒤흔들었다. 그래서 “‘남조선 날라리풍’이라고 불리는 ‘한류’”6) 차단 조치로 “청소년 교양 지침”과 한국 드라마풍의 “북조선식이 아닌 이름은 모두 개명하라”는 지시까지 2020년 5월 하달7)되는 지경이었다.
북한이 한류의 전파력을 두려워하는 것은 MZ세대들에게 미치는 영향력 때문일 것이다. 이는 북한에서 MZ세대들의 사상 통제를 위해 한류를 비방하는 보도가 급격히 늘어나고 논조가 더 강경해진 것으로도 입증된다. 가령 BTS와 블랙핑크 등 세계적인 케이팝(K-pop) 그룹들을 거론하며 SM엔터테인먼트 같은 회사가 “혹독한 훈련을 강요”하고 “수익금을 양성비 명목으로” 착취하며 “정치인이나 기업인의 성 접대”까지 강요한다고 비난했다.8) 이미 2005년 북한은 비사회주의 문화 척결을 명분으로 “불법 영상물 단속을 전담”한 ‘109 상무 단속반’을 조직해 “썩어빠진 반동적 자본주의적 사상 문화 침투”인 한류를 통제했다.9) 그럼에도 중국의 ‘방화벽’까지 뚫고 들어가는 한국 콘텐츠의 위력을 잠재울 수는 없었다. 북한에서는 “MBN의 예능 「나는 자연인이다」가 담긴 메모리(USB나 SD카드) 등도 인기를 끌”10)었을 정도로 유행 장르도 점차 다양해졌다. 주민들은 “남조선 CD 알판이나 메모리(USB)”를 소지하기만 해도 ‘노동교화소형’에 처해졌지만, 그 “강도 높은 처벌”11)에도 한류에 빠져들었다. 그래서 북한 당국은 “비사회주의 그루빠”를 조직해 주민들의 미디어를 삼엄하게 검열하고 통제했다. 2020년 “새해 첫 전투 사업으로 텔레비죤(TV), 록화기(DVD 플레이어), 콤퓨터(컴퓨터) 등 영상 기기들에 대한 관리 사업”(《데일리NK》, 2020.1.7.)을 시행해, 개인과 기관의 모든 영상 기기를 ‘완벽 장악’”12)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 메신저를 통해 「편의점 샛별이」 같은 드라마가 몰래 전송된 사례가 적발되었다. “인적 공유”에 의한 한류도 통제될 수 없었다. 2020년 ‘먹방’ 콘텐츠가 인기를 끌면서 “유튜브 채널인 〈백종원의 쿠킹로그〉를 시청한 중국 유학생들이 전파한 ‘백종원 요리법’이 북한 상류층들 사이에서 인기를 누렸다.”13)
콘텐츠만이 아니라 ‘아랫동네’라고 불리는 한국의 라면, 커피 믹스, 전기밥솥 등까지 장마당에서 상류층에 고가로 팔려나갔다. 평양의 젊은이들은 남북 교류의 일환인 평양 공연이 퍼뜨린 유행을 가장 먼저 흡수했다. 유행을 선도하는 북한의 연예 공연단이 “옷은 치마저고리인데 모두가 빠짐없이 바닥과 굽을 높인 구두를 신게 된 것”은 「가을동화」의 여주인공 송혜교가 신은 구두 때문이었고, 2022년 북한에서 ‘윤도현’이 매력적인 남성으로 떠오른 것도 2021년 9월 평양의 ‘류경 정주영 체육관 개관기념 통일음악회’에서 남한 예술단이 했던 공연 때문이었다. 가히 한류의 “소프트 파워”를 실감케 하는 현상이다.
북한 체제에 대한 최대의 위협은 외부의 적이 아닌 ‘MZ세대’14)라고 《아사히신문》의 마키노 요시히로 기자는 진단한 바 있다. 최근 “5개년 경제계획”을 자력갱생으로 달성하기 위해 청년층의 사상 무장을 부르짖어 온 북한 당국은 당에 충성도가 낮은 ‘MZ세대’의 동요를 우려해서인지 2020년 12월 4일 최고인민회의에서 「반동사상문화배격법」이라는 공포법을 통과시켰다. “남조선 영화나 록화물, 편집물, 도서를 류입, 류포한 경우에는 정상에 따라 무기로동교화형 또는 사형에 처하며 집단적으로 그것을 시청, 열람하도록 조직하였거나 조장한 경우에는 사형에 처한다”는 무시무시한 처벌 조항(「반동사상문화배격법」의 제27조)15)이 필요한 이유는 분명하다. 북한판 ‘MZ세대’로 불리는 ‘장마당 세대’는 “혁명의 시련을 겪어보지 못한 세대”(《로동신문》 2021.8.28.)이며 “자본주의 도덕과 서양 문화에 오염되면 일신의 안일과 향락만 추구하는 도덕적 폐인, 정신적 불구자가 되고 종당에는 사회주의 위업에 반기를 드는 혁명의 원수로 전락”할 위험한 세대로 진단된다. 한류를 모르면 소외되는 분위기까지 있는 젊은 세대가 접하는 한류 콘텐츠에서 은연중 드러나는 바깥세계의 실상은 변화에 대한 욕구와 맞물려 체제의 안정성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랑의 불시착」에는 국경 지대의 군인들이 한류 드라마를 보다가 경계에 소홀해지는 장면 등 북한의 이념적 무장을 해제하는 장면과 한류의 실상이 생생하게 재현되어 있어 북한에서 위험한 드라마로 간주될 소지가 있었다. 놀랍게도 이 드라마에 ‘조선영화수출입사’ 출신의 영화감독이었던 탈북 작가 곽문완이 집필에 참여했다고 BBC가 보도했다.16) BBC에 의하면 북한 사정에 밝은 곽문완 작가는 「사랑의 불시착」의 여러 가지 서사적 장치를 제공할 수 있었다. 가령 세리가 북한의 비밀경찰에 발각되었을 때 리정혁이 “남한에서 잠복근무하는 11과 대상 소속 스파이라는 대사를 재빨리 떠올”리는 설정과 병사 김주먹이 「천국의 계단」에 열광한다는 설정은 곽문완 자신이 평양에서 드라마 「올인」을 훔쳐본 한류 체험을 살린 모티프이다. 그래서 “고문과 매타작으로 시작되는 보위부의 취조 방식” 등의 생생한 장면들을 구상한 실제 탈북 작가가 “tvN 드라마 역대 최고 시청률을 기록하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17)를 받는다. 또 “2012년 중국 유학 중 탈북하여 유튜브 채널 「난세 일기」를 운영하는 탈북인 김금혁”18)과 탈북자 유튜버 윤설미도 자문위원으로 참여해 자신들의 경험을 드라마 속 ‘서단’의 캐릭터에 녹여낸 사실도 알려졌다.
물론 드라마적 과장일 수도 있지만 「사랑의 불시착」에는 단속반을 피해 “아랫동네” 물건을 파는 장마당, 질 좋은 한국 화장품을 써보고 싶어 하는 아낙네들 등 한류에 물든 북한 문화가 드러난다. 결코 부정적이지 않은 렌즈로 최고위급 간부층의 자제이자 스위스 유학파인 북한 대위 리정혁의 매력적인 캐릭터와 우직하면서도 순박한 북한 군인들의 군대 문화도 드러난다. 전반적으로 호의적인 재현임에도 북한 당국이 드라마 자체를 지탄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인민 반장이 숙박 검열을 하는 마을이나 수령 찬가를 부르며 등교하는 아이들, 아들이 아버지에게 자아비판을 요구하는 가족 등 감시 사회의 재현을 불사하기 때문일 것이다. 남한의 범죄자를 북한에서 ‘키핑’해주고 짭짤한 돈벌이를 하는 북한의 사업가, 특수대원을 남한에 침투시키는 인민무력부의 공작 실태, 시도 때도 없는 정전 등도 예민한 장면들일 것이다. 패러글라이딩 복장으로 불시착한 윤세리에게 ‘패러글라이딩’을 ‘무동력 활본기’라고 사태를 설명하는 리정혁의 북한 말투며, 남북 간의 이질화한 언어도 맛깔나게 포착된다. 인터넷도 안 된다니 “진짜예요?”라고 되묻는 세리를 통해 북한의 인터넷 사정도 폭로된다.
그런데 드라마에서 남북 간의 문화적 이질성과 심리적 경계심을 부드럽게 지워가는 것이 바로 ‘한류’라는 코드임은 주목할 만하다. 가령 케이팝에 빠진 북한의 젊은 여성에게 세리가 “BTS 뮤직비디오 보고 있었지?”라고 꼬집는 장면이 나온다. 이는 실제로 북한 MZ세대의 세태의 일면을 반영한다. 잘난 체하는 윤세리와 늘 비웃으며 티격태격하는 부대원 표치수가 한류에 밝은 어린 부대원의 설명으로 “아랫동네 말”을 이해하게 되면서 세리와의 기싸움도 누그러진다. 결국 시시콜콜 툭탁거리던 표치수에게 “입이 짧은” 세리가 누룽지를 설탕에 찍어 맛깔스럽게 집어먹는 먹성도 밉지 않게 보인다. 북한의 MZ세대와 감수성이 통하는 세리는 사택에 얹혀살아야 하는 궁색한 처지에서도 기가 죽지 않고 여자를 무시하는 군인들을 어르고 통솔하는 똑부러진 누나 같기도 하다. 저렴한 장마당 옷을 사 입고서도 그 촌스러움을 당당하게 즐기는 세리는 북한의 신세대의 매력적인 표상이 아니었을까 싶다.
드라마에는 “아랫동네 따라 하기”에 그치지 않고 생활 문화의 일부가 되어 있는 한류의 현장인 장마당 풍경이 제시된다. 윤세리의 회사에서 제조한 화장품도 발견된다. ‘Made in Korea’ 딱지를 붙이고 장마당 한 켠에 자리 잡은 아랫동네 물건들은 북한 장사꾼들이 한국 드라마에 나온 물건을 재빨리 양강도 혜산시나 평안북도 신의주시 장마당에 유통시킨다는 언론 보도에 의하면 충분히 개연성 있는 설정이다. 현실에서는 보위부가 “남조선(한국) 상품을 들여온 밀수꾼과 관련자들을 단속하고 처벌”19)해도 중국에서 물건을 떼오는 ‘원거리무역업자’인 ‘달리기 장사’가 드라마에 나온다. 보위부의 추적을 따돌리며 세리를 대한민국으로 탈출시킨 리정혁을 찾아 남한으로 오게 된 5중대원의 반응도 재미있다. 젊은 부대원들은 서울의 마천루에 눈이 휘둥그레지며 남한의 MZ세대 스타일의 옷을 폼 나게 걸치고, 찜질방과 치킨 등 한류 콘텐츠에서 본 소박한 체험을 즐기는 듯하다. ‘고깃국’ 먹을 날을 도무지 기약할 수 없는 MZ세대 5중대원들은 세리의 남한 자택에서 푸짐한 “소고기 파티”를 하며 낙천적인 시간을 누리기도 한다. 이렇듯 드라마에서는 한류 코드가 자주 돌출한다. 실제 현실에서도 “양강도 혜산에 있는 제대군인 가정집에서 방탄소년단의 음악과 한국 드라마 메모리(USB)가 발각되는 사건이 발생”해 “관련자들은 현장에서 체포돼 현재도(道) 보위부 예심과 구류장에 감금”20)되는 일이 일어날 정도로 북한 내에 BTS 열풍이 존재하듯 말이다. 이렇게 한류 코드를 통해 동 세대적 감수성으로 소통하던 인물들의 재현에도 불구하고 「사랑의 불시착」은 ‘서바이벌’을 하듯 북한 탈출을 시도하며 맺어지는 연인들의 로맨스를 미완으로 남겨둔다. 연인들은 군사분계선을 사이에 두고 작별을 하지만 이미 감정적으로는 ‘통일’ 상태에 있는 진실하고 혁명적인 MZ세대의 연인인 것이다.
「사랑의 불시착」를 통해 우리는 동서독의 통일 과정에서 동독인들이 서독 TV를 시청할 수 있었고, 동서독의 공통 문화가 통일의 기폭제가 되었다는 점을 상기하게 된다. 서독의 뉴스를 자국의 뉴스보다 더욱 신뢰한 동독인들은 어쩌면 북한 주민들의 심리와도 그리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저 상상으로 남북 간의 로맨스와 통일을 즐길 수 있는 현실은 냉혹하다. 한반도는 지구상에서 가장 위험한 지정학적 발화점이며, 극단적인 남북한의 문화에는 DMZ 같은 “중간 지대”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세리의 혼란스러운 불시착은 북한의 MZ세대들에게도 남북한의 현실이 동시에 포개진 인식의 중간 지대를 마련해준다. 세계인들에게 당연히 허용되고 모두가 즐기는 한류가 왜 북한 주민에게만 금지되어야 하는지, 북한의 동맹국인 러시아의 언론조차 “주요 음악 장르에서 팝 가수 순위는 한국 보이 밴드 BTS가 이끌고 있으며, 이 그룹은 러시아뿐만 아니라 전 세계 차트에서도 계속해서 지배하고 있다.”21)고 한류 관련 보도들을 숱하게 쏟아내는 현실에서 왜 북한 주민들만 BTS의 음악을 들어서는 안 되는지 묻게 해준다. 전 세계의 모든 최정상 아티스트들 중에서도 무려 유튜브 뮤직비디오 조회 수인 280억 회(2023년 1월 24일 시점)로 부동의 1위로 군림하는 BTS 음악을 왜 북한의 젊은이들이 들을 수 없는가.
세계가 2022년 카타르 월드컵 개막식에서 월드컵 노래 <드리머스(Dreamers)>을 불러 전 세계를 BTS 정국의 열풍으로 들썩이게 하던 무렵에도 북한에서는 「반동사상배격법」의 잔혹한 처벌 조항에 따라 해산 시의 10대 학생 2명이 공개 총살되었다. 「오징어 게임」과 관련된 사태로 알려져 있는데, 왜 전 세계 100여 개 국에서 1위를 석권한 「오징어 게임」을 보는 것이 금지되는가. 어찌하여 케이팝이 담긴 USB를 소지했다고 해서 수용소에 끌려가고 사형까지 당해야 하는가. 그 미친 현실을 반문하게 되는 바로 그 순간이 북한의 MZ세대가 ‘불시착’한 지점일 수 있다. 한류 드라마를 시청하는 주민들에게 심리적인 철조망은 이미 철거되어 있다. 그들은 이미 자유세계의 상상적 이민자일 수 있다. 그래서 「사랑의 불시착」에 빠져든 순간 “네가 장군님이네?”라는 반문이 시작되었고, 한류는 문화 냉전 시대에 ‘불시착’한 통일의 미래일 수 있다.
1) 「‘사랑의 불시착’이 탄생시킨 북한 최고의 유행어. 뿔난 김정은 ‘한국 이름’ 없애라 지시.」, 〈주성하TV〉, 2020년 6월 27일(https://www.youtube.com/watch?v=5ZlY_SH8r9c).
2) 「2020년도 북한내 한류의 변화양상과 향후전망」, 『2021북한문예연감』, 한국문화예술위원회, 2021, 432-433쪽.
3) 「‘사랑의 불시착’이 탄생시킨 북한 최고의 유행어. 뿔난 김정은 ‘한국 이름’ 없애라 지시」, 〈주성하TV〉, 2020년 6월 27일(https://www.youtube.com/watch?v=5ZlY_SH8r9c).
4) Natalia Aspesi, “'Crash landing on you', due Coree e una passione senza frontiere”, la Repubblica, Giugno 2020(https://www.repubblica.it/spettacoli/2020/06/24/news/crash_landing_on_you-300874760/).
5) 주성하, 「핵심을 찌른 ‘니가 장군님이네’ 대사에 열광하는 북한 주민들」, 〈데일리NK〉, 2020년 6월 29일.
6) 「북한 문화예술 동향」, 『2019 문예연감』, 한국문화예술위원회, 2019, 743쪽.
7) 주성하에 따르면 “채린, 자영, 수연, 세나, 혜린, 기주, 호재, 다혜, 효주 이런 이름이고, 중국 드라마에서 나오는 이름도 포함돼 있는데 아영, 위국, 초애, 유평, 단평 이런 이름이 개명 대상”이다.
8) 박정우, 「 『북한경제, 어제와 오늘』 두려운 한류」 (워싱턴) 《RFA》, 2021년 3월 30일.
9) 김준호, 「북, 불법영상물 단속 대폭 강화」, 《RFA》, 2015년 10월 9일.
10) 「북한 문화예술 동향」, 앞의 책, 743쪽.
11) 김현아 통일연구원, 「막을 수 없는 남한문화-한류」, 《RFA》, 2016년 8월 8일.
12) 「2020년도 북한내 한류의 변화양상과 향후전망」, 앞의 책, 433쪽.
13) 위의 책, 428쪽.
14) 박정우, 「“북 체제 최대 위협 미국 아닌 MZ세대”」, 《RFA》 워싱턴, 2021년 9월 1일.
15) 정영, 「[탈북기자가 본 인권] 세계인 열광하는‘사랑의 불시착’ 북한에선 왜?」, 《RFA》 워싱턴, 2022년 2월 16일.
16) 수빈 김, “Crash Landing on You: The defector who brought North-South Korean romance to life Published” BBC Korea, 2020년 2월 22일(https://www.bbc.com/news/world-asia-51526625).
17) 정빛나, 「[탈북 후] “천직 찾아 제대로 안착”…‘사랑의 불시착’ 곽문완 보조작가」, 《연합뉴스》, 2020년 3월 8일.
18) 윤인경, 「사랑의 불시착: 드라마에 등장한 북한 모습은 실제와 얼마나 비슷할까」, 《BBC 코리아》, 2020년 1월 20일.
19) 「2020년도 북한내 한류의 변화양상과 향후전망」, 앞의 책, 431쪽.
20) 위의 책, 432쪽.
21) “Журнал Rolling Stone опубликовал топ-200 рэп-альбомов всех времен”, 《ИЗВЕСТИЯ》(iz.ru), 10 июня 2022.
시인, 문학평론가, 콘텐츠 기획자. 현재 숭실사이버대학교 방송문예창작학과 교수. 1987년 《한국문학》 시 부문 신인작품상으로 등단했다. 1995년 《현대시》 평론 부문에 당선됐다. 199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됐다. 젊은 평론가상, 동국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한국시인협회 사무총장, 인터넷 방송국 멀티포엠 대표를 역임했다. 《시인수첩》, 《국학자료원》, 《서정시학》, 《시와 사상》, 《현대시》, 《K-스토리》 등 다수 문예지 편집위원을 역임했다. 현재 《솟대평론》, 《현대평론》 편집위원으로 있다. 시집 『비 속에도 나비가 오나』, 『적들을 위한 서정시』, 평론집 『에로틱 아우라』, 『현대시와 골룸의 언어들』, 학술서 『처용가와 현대의 문화산업』, 『혁신과 근원의 자리』, 『현대시론 1, 2』 등 다수의 저서를 출간했다.
* 사진제공_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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