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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호

유년 시절의 추억의 미로에서

김게르만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기억에 변형이 일어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가 먼 유년 시절의 일들은 더 뚜렷하고 화려하게 보지만 지금 안경을 어디에 두었는지는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다. 아마도 감정적인 추억이 머릿속에 넣은 합리적 정보보다 더 소중히, 더 확실히 심장과 마음속에 간직되는 모양이다. 그렇기에 고마움과 동정심보다 모욕과 증오심이 사람들의 기억에서 더 더디게 사라진다.
   나는 어렸을 때 아버지의 낡은 손목시계를 몰래 가지려고 부모의 침실에 들어가 옷장을 뒤적이던 일을 자주 회상한다. 그날 마침 학교에서 시험을 치르게 되어 있었는데 벽에는 시계 대신 레닌의 초상화만 걸려 있었다. 세계 프롤레타리아 수령이 시험이 끝날 때까지 몇 분이 남았는지를 말해 주지 않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시계 옆에 아버지의 여권도 있었지만 서둘러야 했기에 퍼뜩 눈길만 던지고는 부모님의 침실을 속히 빠져나왔다. 학교에 가는 도중에 시계를 어떻게 할 것인지 골머리를 앓았다. 시계를 책상 위에 놓을까, 아니면 바지나 잠바의 호주머니에 넣었다가 이따금 꺼내 볼까, 손에 찰까? 손에 찬다면 왼손에 차야 하나, 오른손에 차야 하나? 학교에 거의 다 도착하면서 나는 글을 쓸 때 시곗바늘의 움직임을 항상 볼 수 있도록 오른 팔목에 차기로 결심했다. 나는 왼손잡이가 아니지만 그때부터 시계를 항상 오른 팔목에 찬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내 아들도 시계를 오른 팔목에 차고 다닌다는 것이다.
   학교에서 집에 돌아온 나는 발끝으로 걸으면서 부모의 침실에 들어가 불도 켜지 않고 옷장의 문을 손으로 더듬어 열고 시계를 제자리에 두었는데, 꺼칠꺼칠한 여권 가장자리가 손에 닿았기에 무의식적으로 그것을 호주머니에 넣었다. 밤에 침실에 들어와 누이들과 동생들이 잠든 후에 불을 켜고 여권을 자세히 보기 시작했다. 연한 갈색의 작은 사진에서 나이보다 좀 젊어 보이는 아버지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성 난에 김, 이름 난에는 중빈이라고 적혀 있었다. 부칭의 난은 줄이 그어져 있었는데 그것은 부칭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생년월일은 1916년 9월 9일. 출생지는 프리모리예 변강 수이푼스키 구역 차피거우 촌. 그때 나에게는 이 촌의 명칭이 낯선 타국 같았다. 나의 동포들을 원동(遠東)에서부터 급히 실어와 정착한 우슈토베와, 1937년 이후에 우슈토베 주위에 나타난 고려인 콜호스들의 명칭이 나에게 정든 이름이다. 나는 ‘도시’의 사내아이였지만, 때로는 촌에서 온 친척들이나 동년배들과 사귀었다. 그들은 ‘프리모레츠’, ‘달니 보스토크’, ‘모프르’, ‘도스치제니예’, ‘오소’ 같은 여러 촌에서 짐마차를 타거나 걸어서 왔다.
   우슈토베 시를 사람들은 보통 ‘고려인의 수도’라고 불렀다. 나의 유년 시절이 흘러간 집은 스탈린의 전권위원 클리멘트 보로실로프의 이름을 딴 거리에 있었다. 이웃은 주로 고려인들이었다. 제미도브, 워론끼브, 수예브, 삼쏘노브, 이 네 러시아인 가족이 긴 거주구에서 소수민족을 이루었다. 기억나건대 후에 한 그리스인 가족이 나타났는데, 그 집에 젖소가 있어서 우리는 날마다 우유를 사러 그 집에 다녔다. 다음에 또 몇 가족이 이사해 왔는데 몰다비아인인지 모르드바인인지 잘 모르겠다. 처음에는 15호 학교, 다음은 261호 학교, 그 후에 다시 15호 학교로 계속 호수를 바꾼 이 학교의 학생들 중 거의 3분의 1이 김, 박, 리, 황 등 짧은 성을 가진 고려인들이었다. 우슈토베의 주위에 콜호스가 10개 가까이 있었는데, 그곳에서는 주로 고려인들이 살면서 벼와 채소를 재배했다. 어렸을 때 나의 기억에는 고려인들이 옛날부터 이 땅에서 거주했으며 주위의 모든 것이 정이 든 우리의 것 같았다. 그런데 고려인들이 비록 여기에 많이 살지만 그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며 어떤 언어로 말해야 하며 무엇을 해야 하는지 스스로 결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이가 차면서 이해하게 되었다.
   어린 시절에 정이 든 카자흐어 명칭이 의미를 잃었다. 후에 나는 우슈토베가 ‘세 개의 산’, 카라탈 강이 ‘검은 버들’, 바스토베 언덕이 ‘산의 머리’를 의미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우슈토베가 세 개의 산을 의미한다면 바스토베 외에 ‘나머지 산 둘이 어디에 있을까?’ 하고 2년 전에야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 고장에 오래 사는 사람들과 향토 연구학자들이 우슈토베 태생인 내게 바스토베 뒤에는 오르타토베가 중간 산이고 멀리 있는 크시토베가 작은 산이라고 알려주었다. 실제로는 높지 않은 언덕에 대한 말인데 카자흐어로는 ‘언덕’과 ‘산’을 ‘토베’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다.
   고려인 콜호스의 몇 가지 명칭에도 그와 같은 사연이 있었다. 러시아어 ‘옥차브리’, ‘자랴 워스토카’, ‘피오네르’, ‘아방가르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두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TOP1)나 MOПP2)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몰랐다. 이 두 러시아 명칭은 생략한 것이었다. 나의 기억에 남은 알지 못하는 ‘페레 토치카’라는 말은 ‘첫 지점’을 의미한다. 카라탈 구역의 지도에는 이런 지점이 19개였는데 강제이주 시에 고려인들을 19개의 지점에 배치했다.
   우슈토베에서 카라탈 강까지 버스가 다니지 않았다. 그러니 먼 길을 걸어서 수영을 하러 갈 사람은 없었다. 물고기잡이를 좋아하는 이들은 자전거나 오토바이를 타고 안주와 술을 가지고 다녔다. 주로 낚시로 잡았는데 금지된 방법으로 잡는 사람들도 있었다. 당시에는 여러 가지 물고기가 많았다. 마린까3), 사잔4), 수다크5)는 큰 물고기였고, 그 외에 꼬치고기, 체바츠키6)와 같은 작은 물고기들도 잡혔다. 한번은 우리 아버지가 풀베기 철에 계산원7)으로 일했을 때 온 일주일을 어른들과 함께 강변에서 살았다. 아저씨들은 큰 낫으로 높이 자란 풀을 베었는데 나에게는 그 낫이 날카로운 검으로 보였다. 하루 작업이 끝나면 그들은 카드도 놀고 담배도 피우면서 추잡한 우스갯소리도 했다. 풀베기꾼 팀에는 물고기잡이를 아주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를 표트르라고 불렀는지 아니면 티모페이라고 불렀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일이 끝나면 그는 손수 만든 낚싯대를 들고 강변으로 서둘러 갔다. 물고기들은 마치 마술에 취한 듯 그의 낚싯대로 모여들었다. 다른 아저씨들도 물고기를 잡아보려고 강변에 나갔는데 움직이지 않는 낚시찌를 30분간 바라보다가는 싫증이 나 더이상 참지 못해 투덜거리면서 강변을 떠났다. 나는 심심해서 한 두어 번 고기잡이 애호가 아저씨 곁에 앉아 고기를 잡는 것을 보았다. 그는 땅속에서 파낸 굵은 회색 지렁이들을 가지고 요술을 피우는지 유리통 안에 있던 지렁이들이 가느다란 진한 갈색 아스피드들로 되었다. 그래서 아저씨가 그것을 아주 조심스럽게 낚싯바늘에 끼워 침을 몇 번 뱉은 후에 강물에 던졌다. 보통 낚싯바늘이 가라앉도록 나사못을 이용하는데 표트르-티모페이 아저씨는 납을 이용했다. 낚싯대는 길고 바르고 깨끗이 닦은 것이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병마개를 찌로 사용했는데 표트르-티모페이의 찌는 짙은 적황색 줄이 그려져 있었다. 한번은 강변에 앉아 있다가 내 쪽으로 빨리 움직이는 뱀을 보았다. “뱀!”이라고 내가 소리치자 표트르-티모페이는 한순간에 내 곁에 달려오더니 배를 끌어안고 웃는 것이었다. “이것은 뱀이 아니라 우즈란 말이야! 우즈는 큰 지렁이나 다름없어, 독도 없고 물지도 않아! 대가리 아래의 노란 줄을 보고 알 수 있어!” 그 아저씨가 말했다.
   첫 낟가리에서 풀을 다 베자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그곳에는 검정 야생 딸기가 가득했다. 나는 이틀 동안 그 딸기를 실컷 먹었다. 온 주일 피를 흡수하는 모기들이 우리를 못살게 굴었다. 오직 마사하늬8)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었다. 그 천막을 나뭇가지에 걸거나 장대에 고정했다. 아저씨들이 다 풀을 베러 나간 후에 나는 그 천막 속에 누워 마인 리드의 무시무시한 소설 『머리 없는 기수』를 읽었다.
   이 지역을 제티 쉬라 하는데 제티는 일곱을 의미하며 쉬는 조선말과 같이 물을 의미한다. 그런데 카자흐어에서는 조선말과 달리 쉬가 강, 호수, 샘도 의미할 수 있다. 그래서 제티 쉬가 세미레치예9) 라고 번역되며, 일리, 추, 악수, 카라탈, 렙시, 텐테크, 꼭수를 아우른다. 그런데 일리, 카라탈, 비옌, 악수, 렙시, 바스칸, 사르칸드가 지역의 일곱 강을 이룬다는 의견도 있다.
   그런데 나의 기억에는 카라탈이 아니라 글라브늬가 유년 시절의 강으로 남았다. 수년이 지난 후에 글라브늬가 골로브늬 아릐크10)를 의미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골로브늬 아릐크는 카라탈 강물을 우슈토베 주위의 논에 공급하는 역할을 했다. 불도저로 모래가 섞인 점토지를 너비 5∼6미터, 깊이 1.5∼2미터로 판 수로로 카라탈 강의 흐린 물이 흘러들어와 논밭에 분배되었다.
   글라브늬는 많은 우슈토베 사내아이들의 유년 시절 기억에 뚜렷이 남은 곳이다. 여름방학이면 온종일 물장난을 치면서 수로에서 나오지 않았다. 무더운 날씨에는 어른들도 강에 뛰어들었다. 날마다 이웃의 아이들 중 누가 ‘꿉, 꿉!’ 가자고 소리쳤다. 수영을 하러 가자는 말이다. 그러면 우리 거리의 아이들이 무리를 지어 달려가서 흐린 물속에 풍덩 뛰어들었다. 그런데 건너편 연안까지 가서 수면에 나타나기가 쉽지 않았다. 물결이 세차서 떠내려가니 10미터 가까이 물 밑에서 수영을 해야 했다. 그러면 차지 않은 물에서도 입술이 파랗게 되며 이가 덜덜 떨리고 피부는 오이처럼 푸피리스키로 덮였다. 그러면 우리는 수로 곁에 있는 도로에 엎드려 흙을 손바닥으로 옆구리에 끌어모으고 누워 있었다. 몸을 좀 덥힌 후에 온몸, 발과 손, 머리에 흙 반죽을 붙인 채 다시 흐린 물에 뛰어들었다.
   글라브늬에서 물에 빠져 숨진 일은 기억에 오직 한 번만이 남았다. 한번은 ‘물에 빠져 죽었다’는 소리가 거리를 뒤흔들었다. 모두 다 강변으로 달려갔다. 사람들 사이로 땅에 누워 있는 러시아 청년을 보았다. 그는 스쿠버 마스크를 썼는데 시체 곁에 산소통이 있었다. 우리는 이런 장비를 영화에서만 볼 수 있었다. 당시에 텔레비전은 우슈토베의 어느 집에도 없었다. 물에 빠져 죽은 청년은 10학년생이었다. 그는 해원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먼 나라 항해를 꿈꾸었다고 한다. 그는 부모에게 아콰마린복을 사달라고 졸라댔다. 산소가 없어지자 거기에 공기를 넣었다. 아마도 무엇이 잘못된 모양이었다. 후에 말하는 바에 의하면 큰 압력으로 나온 공기가 그의 폐를 파열시켰다는 것이다.
   어린아이나 술에 취한 아저씨들이 죽을 뻔한 일은 있었다. 그러나 흐린 물을 많이 삼킨 자들을 강변에 끌어내어 물을 토하게 하여 모든 일이 다 무사히 끝났다. 맏누나의 이야기에 의하면 내가 5∼6세 때에 나를 죽음에서 구했다는 것이었다. 내 머리가 물속에 잠긴 것을 보고 ‘도와달라!’고 소리쳤다. 다행하게도 곁에 용택이라는 이웃집 청년이 있었다. 외눈으로 태어났지만 수영 선수와 같이 든든한 신체였다. 그 청년이 물속에 뛰어들어 나를 꺼냈다. 그러니 나는 다시 태어난 셈이다. 머리가 센 그의 아버지의 나이를 분간할 수 없었다. 두 아들을 데리고 아내가 없이 사는 그를 사람들은 이상하게 보았으며 ‘마법사’라고 하면서 무서워했다. 그의 집이 글라브늬 연안의 거리 끝에 있었다. 큰 발코니를 채 짓지 않고 벽에 회칠을 하지 않았으며, 콘크리트로 만든 높고 넓은 출입구, 보통이 아닌 정원이 이상하게 보였다. 다른 고려인의 텃밭에서는 홍당무, 토마토, 오이, 고추가 자라고 있었는데 그의 집 주위에는 사과나무, 앵두나무, 배나무, 포도, 벚나무, 잣나무, 홉이 자라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우슈토베의 일반적인 집에 맞지가 않았다. 용택의 아버지는 이상한 미소를 짓고 입술을 움직이면서 거리를 다녔으며 누구와도 말을 하지 않았다. ‘용택이 빠빰두(당신이 용택이 아버지입니까)?’ ̄우리는 동년배 부모들과 고려말 방언으로 이렇게 인사를 했다 ̄하는 우리의 인사에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곁을 지나가면서 그는 갑자기 흰 머리칼이 엉클어진 머리를 부자연스럽게 거의 180도로 돌려 마치 보이지 않는 사람이 서 있는 듯이 한 2초 동안 보고는 다시 머리를 되돌려 가던 길을 계속 가곤 했다.
   용택의 아버지는 생활에 큰 변동이 있을 사람, 자신이 앓거나 친척들이 앓고 있는 사람들에게 옛날 책이나 콩으로 점을 쳤다고 한다. 그는 운명을 예언한 대가로 돈이나 선물을 받았다. 한번은 우리 아버지에게 무슨 일이 기다리는지 알아보기로 했다고 한다. 점쟁이는 아버지에게 아들이 셋이고 딸이 셋인데 아들 하나가 큰 사람이 된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나를 그런 사람이 될 자식으로 선택했다. 그래서 맏형에게도, 남동생에게도 아버지는 엄격하게 대하시지 않았다. 나는 일주일에 한 번 아버지 앞에 차렷하여 서서 공부를 하지 않으면 사람이 되지 못한다는 그의 장황한 말을 들었다. 공부하여 지식을 얻는 것이 내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8학년 때까지 나는 우리 학교의 작은 도서관에 있는 책을 다 읽었다. 큰사람은 되지 못했지만 학자는 되었다고 본다. 그런즉 꿈이 실현된 것이다. 학교에서 내 별명이 ‘교수’였으니까.
   글라브늬 수로를 따라 도시를 전야(田野)와 갈라놓은 경계선이 지나갔다. 수로가 끝나는 곳에는 여러 해를 두고 명아주, 갈대, 우엉, 감초, 나리새 등 야생초들이 자랐다. 가을에 우리는 모닥불을 피워 감자를 구워 먹으면서 초원에서 화재를 일으켰다. 때로는 초원에서 체첸 사내아이들이 양을 방목했는데 웬일인지 그 애들과 친해질 수 없었다. 그런데 한 두어 번 그 애들에게 먹을 것을 준 일이 기억난다. 대신 그들이 안장, 말고삐, 등자가 있는 말을 우리에게 주었다. 그래서 우리가 그 말을 타고 놀 수 있었다. 고려인 아이들 중에서 말을 타고 달릴 용기가 있는 아이가 없었다. 그런데 나는 왜 그런지 말을 타고 바람이 귀를 스치는 소리를 들으며 넓은 벌판을 달리고 싶었다. 그때부터 나는 말을 타고 싶어 흰 얼굴에 주근깨가 많은 체첸 아이가 있는 초원을 여러 번 갔다. 그 애를 술탄이라고 불렀다. 술탄은 고삐가 없이 몸을 오른쪽과 왼쪽으로 번갈아 움직이면서 무릎으로 말의 옆구리를 치면서 소리를 지르며 말을 어떻게 몰 수 있는지 가르쳐주었다. 술탄과 나눈 우정이 한번은 내 생명을 구원했다. 고려인들보다 7년 늦게, 즉 1944년에 캅카스에서 카자흐스탄으로 강제이주된 체첸인들은 싸움질을 잘하는 것으로 소문났다. 그들이 도시에 나타날 때면 자주 충돌이 생겼다. 한번은 제티 쉬 영화관 앞에서 일어난 다툼으로 싸움판이 벌어질 수 있었다. 그때 나를 본 술탄이 체첸어로 무엇이라고 말하니 체첸 아이들이 나를 놓아주었다.
   말이 났으니 말인데 글라브늬 수로를 따라가는 거리가 때때로 ‘거리와 거리 간’ 싸움판으로 변했다. 싸움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보로실로프 거리에 사는 우리 아이들 중 누가 이웃 프룬세 거리에 사는 아이들을 목소리 높여 비난했다. 학교, 영화관, 경기장, 즉 어느 곳에서든 관계없이 그 애를 근거 없이 노엽혔다는 것이다. 우리는 떼를 지어 글라브늬 수로로 갔다. 거기에서는 이웃 거리 아이들이 논쟁을 ‘판정’하려고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 처음에는 서로 모욕하면서 상스러운 욕설을 퍼붓다가 어느 쪽에서 흙덩어리가 날아오면 양쪽에서 돌을 던지면서 싸움이 시작된다. 누구에게서 피가 흐르고 고함 소리가 날 때까지 돌덩이가 계속 날았다. 아지마스카가 달려나와 자기 거리에 살든지 다른 거리에 살든지 가리지 않고 개구쟁이들에게 욕설을 퍼붓기 시작하면 제각기 자기 거리로 도망쳤기 때문이다.
   때로는 거리 싸움이 주먹 싸움으로 넘어가기도 했다. 그러나 주먹 싸움은 입술이나 코가 터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공개하지 않은 규칙에 따라 잔인하게 굴지 말며 ‘넘어진 자를 때리지 말라’는 원칙을 철저히 지킨다. 칼을 대거나 발로 차는 것도 금지되어 있다. 패하는 측은 ‘어디 다음번에 보자!’고 위협하면서 글라브늬를 떠났다.
   글라브늬 수로는 우리 거리에서 바스토베 쪽으로 500미터까지 가다가는 갑자기 고려인 이주민 콜호스 ‘레닌스키 푸치’ 쪽으로 직각으로 돌았다. 이 콜호스가 후에 ‘프라우다 지’ 벼 재배 솝호스로 개칭되었다. 그래서 굽이돌이의 연안을 콘크리트하고 물을 조절하기 위해 수문을 설치했다. 바로 이곳에 수로의 계단이 있었고, 물이 수문을 밀고 나왔다. 1940∼1950년대에 물이 제분소의 금속 날개를 돌렸다. 후에 제분소를 철거했을 때 수문에 큰 날개들이 멈춘 채 남아 있었는데, 그 날개 아래의 거칠어진 물속에 꼬치고기들이 많았다. 아이들과 아저씨들은 가제로 물고기를 퍼냈는데 비늘이 없는 검은 물고기를 한 번에 몇십 마리씩 잡아냈다. 그것으로 고양이를 먹였으며 국도 끓이고 굽거나 말리기도 했다.
   우리 거리의 건너편에는 콜호스의 사과밭이 있었는데 나뭇가지로 엮은 울타리로 사과밭을 막아놓았다. 그런 울타리로 사과밭을 막아보았자 소용이 없었지만, 우리는 콜호스의 소유물을 훔치려고 하는 이를 베르단 총으로 무자비하게 쏘는 악한 사람으로 소문난 수위를 무서워했다. 우리 거리에 안톤이란 아이가 살고 있었는데 그 애는 거짓말을 잘했다. 그러나 어떤 때는 그의 말이 진실로 울리니 우리가 그 말을 믿었다. 안톤의 말에 의하면 아직 익지 않은 사과를 품속에 감춘 것을 콜호스 수위가 발견했다는 것이다. ‘망할 자식, 당장 그 자리에 서지 못할 거야, 쏠 테야!’ 수위의 무서운 경고를 들은 안톤은 쏜살같이 도망쳤으나 엉덩이에 맞은 굵은 소금이 녹지 않아 반나절 아뤼크의 물에 들어가 앉아 녹였다고 이야기했다. 안톤은 이 거짓 이야기를 수차 하면서 무서웠던 장면을 이야기할 때는 눈을 부릅떴으며 소금 총에 맞았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바지까지 벗으려고 했다. 원래 안톤에게는 배우의 재능이 있었다. 아주 그럴듯하게 이야기하니 거짓말인 줄을 알면서도 그의 말을 믿는 척했다.
   그런데 결국에는 사과를 훔쳤다. 다만 다른 방법으로 훔쳤다. 이것은 ‘레닌스키 푸치’ 콜호스 과수원에서 플랜지가 없는 마차와 당나귀 달구지에 익은 사과를 싣고 가는 이른 가을에 먼지가 푸석푸석한 길에서 있었던 일이다. 뚜껑이 없는 나무 상자들에 들어 있는 향내 나는 붉은 사과들이 ‘나를 먹어보지!’ 하고 우리를 놀려대는 것 같았다. 우리 중 누가 그런 꾀를 궁리해 냈는지 모르겠지만 그것을 실행하는 데는 모두 참여했다. 길을 따라 돌을 깔아놓고 그것을 흙으로 덮어놓았다. 앞뒤의 차축을 연결하는 나뭇대가 돌이 깔린 곳에 가까워졌을 때에 용기 있는 아이가 회초리로 당나귀 옆구리를 치자 우리가 모두 ‘이랴, 빨리 가자!’ 하고 소리쳤다. 그 결과 우리가 꾀를 부려 만들어놓은 장애물에 상자들이 뒤흔들리면서 위에 있던 사과들이 도로의 먼지 속에 굴러 떨어졌다. 우리는 그것을 대수 닦고 입에 넣었다…….
   이미 상기시켰듯이 글라브늬 수로가 끝나는 곳부터 너비가 1킬로미터쯤 되는 초원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어릴 때는 그 초원이 더 넓은 것 같아서 그곳에 잘 가지 않았다. 원족(遠足)에 온종일 미리 준비했다. 먹을 것도 가지고 성냥, 낚싯대, 사내아이들의 ‘무기’인 새총도 가지고 갔다. 녹채에 대해 별도로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초원이 끝나면 아뤼크가 또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물을 모으는 저수지였다. 벼를 심었던 논의 물을 그곳으로 보냈다. 그러면 논에는 비옥한 진흙과 침전물이 남았다. 그래서 저수지의 물은 맑고 푸른 색을 띠었다. 이 수로의 양쪽과 수로에는 잎사귀가 날카롭고 뿌리와 줄기 사이가 찌르는 갈대들이 자랐다. 피가 흐를 정도로 베인 일이 있어서 우리는 저수지에서 수영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갈대숲에서 바스락거리는 사향쥐들이 우리를 놀라게 했다. 아이들의 소리가 온종일 들려오는 글라브늬 수로와 달리 고요한 저수지에서는 각종 새들이 서식했다. 참새, 제비, 스트리즈11)들이 모기를 잡으려고 떼를 지어 날아다녔고 물 위에서는 오리들이 떠다녔다. 우리 지방에는 새들이 다양했다. 여기에는 노래하는 새들, 까마귀, 참새, 오디새, 메추리, 뻐꾹새들이 서식했고, 하늘에는 먹이를 노리는 매들이 빙빙 돌았다. 우리는 미리 준비해 둔 작은 돌로 새들을 쏘았다. 그런데 새가 그 돌에 맞았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새잡이는 보통 병을 쏘아 산산조각 내는 것으로 끝났다.
   수로의 흐린 물에서 오랫동안 수영을 하고 도로의 흙에 누워 있으면 어떤 아이들은 손등, 어떤 아이들은 뺨이 불그스름하고 거칠게 텄다. 온 여름 우리는 전쟁판에 나갔다 온 것처럼 그런 ‘상처’를 가지고 다녔다. 학교에 갈 무렵에라야 시내 목욕탕에 가서 그것을 없앴다. 처음에 피부를 따뜻한 비눗물에 오랫동안 불렸다가 대마 수세미로 문질렀다. 만일 터진 곳이 없어지지 않으면 흑해 연안에서 사다가 우슈토베 시장에서 파는 경석으로 문질렀다.
   시장은 항상 거주지의 중심이 되었다. 우슈토베 시장도 예외가 아니었다. 시장은 문자 그대로 도시의 중간에 있었다. 어릴 적에는 시장이 아주 큰 것 같았는데 수년이 지난 후에 시장이 아주 작은 것을 보고 놀랐다. 시장의 한끝에서 다른 끝까지 어른 걸음으로 2분이면 갈 수 있었다. 일요일이면, 고려인 아이들인 우리는 짤막한 다리로 걸어서 사람들을 뚫고 시장을 돌아다니면서 몇 번씩 멈추면서 무엇을 파는지, 어른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들으려고 애썼다. 앞문으로 들어가 뒷문으로 나오려면 30분이면 충분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시장이 그렇게 크게 보였다.
   보통 날에는 집 없는 개들이 시장을 돌아다녔으며, 드문드문 판매자들이 앉아서 졸거나 말공부를 했다. 그런데 일요일이면 시장이 전혀 달라졌다. 일요일의 시장은 어린 우리들의 명절이었다. 부모들은 우리에게 낡은 돈으로 1루블리를 주었는데, 1961년 화폐개혁 이후 그것이 20코페이카였다. 그 돈이면 충분했다. 시장의 대문 앞에 앉아 있는 아메12)에게서 신문에 말아놓은 갈색 엿을 하나 사고 유리컵으로 퍼서 역시 신문 봉지에 쏟아주는 해바라기 씨를 살 수 있었다. 아매의 곁에 참전 상이군인들이 앉아 있었다. 그들은 볼 모양이 없는 알루미늄 컵을 들고 있었는데, 동정심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다 동전을 던져주었다. 그런 장애자들 중에는 쇤 목소리로 전쟁 시기의 노래를 부르는 가르모니스트들13)도 있었다. 우리는 해바라기 씨를 까먹으면서 그 노래를 들었다. 껍질은 그 자리에 내뱉었다. 해바라기 씨는 땅에 수북이 쌓여 모전(毛氈)을 이루었다. 남은 해바라기 씨를 들고 우리는 영화관으로 갔다. 영화표를 사고 사이다도 한 컵 사 마셨다. 공부를 잘하고 품행이 좋으면 부모들에게서 추가로 20코페이카를 ‘상금’으로 받았다. 그것으로 여름에 아이스크림을 사 먹었다. 영화관의 간이식당에서 내장을 넣은 피로스키, 단 빵, 병에 든 사이다, 과자와 사탕을 팔았지만, 그것은 5월 1일이나 11월 7일 명절에라야 살 수 있었다. 그것은 명절이면 부모들이 새로 1루블리를 주었기 때문이다.
   어떤 영화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데 나는 조선 영화를 1980년 말에 처음 보았다. 유년 시절에 본 영화는 소소한 부분까지 다 기억에 남았다. 같은 영화를 여러 번 구경했기 때문이다. 주로 소련 영화를 보여주었는데 그중에는 전쟁에 대한 영화가 많았고 희극 영화도 있었다. 그런데 모든 관람자에게 가장 인기 있는 것은 노래와 춤이 많고 가슴이 터질 듯한 슈제트14)로 된 인도 영화였다. 영화관 안에서는 흐느끼는 소리가 자주 들렸으며 때로는 그것이 일제히 울음소리로 변했다. 고려인 아줌마들은 ‘아이구, 기차다!’ 하면서 혀를 탁탁 쳤다. 마치 영사막에 나타나는 장면이 자기에게나 식구들에게 관계되는 것처럼 말이다. 많은 관람자가 울어서 벌겋게 된 눈으로 영화관을 나오는데, 그중에는 신체가 든든한 러시아 남자들도 있었다.
   나의 고향 도시 우슈토베에서 생활의 다른 중심은 철도역이었다. 도시가 바로 이 철도역부터 시작되었다. 투르크시브-투르케스탄-시비리 간선철도 건설 시기에 이 역이 나타났다. 이 역은 대피선로들이 있는 분기역이었다. 아마 분기역은 화물열차와 여객열차들이 급행열차들을 먼저 보내거나 한 열차에서 차량을 떼내어 다른 열차에 연결하기 위해 필요했던 모양이다. 역외에 차량 수리소, 양수장, 학교, 종합진료소, 병원이 철도에 소속되어 있었다. 우슈토베에서 오래 살았거나 자란 사람들은 젤도르시콜라15), 젤도르볼니차16)라는 명칭을 기억하고 있다.
   시비리와 원동 쪽으로 가는 모스크바 열차나 알마아타 열차가 역에 들어설 때면 플랫폼이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열차가 15분, 심지어는 30분까지 서 있었으니, 기관사들은 브레이크를 점검했으며 차에 석탄을 싣고 물을 주입했다. 객차를 따라 고려인 아줌마들과 러시아 여성들이 삶은 계란, 감자, 피로스키, 사과, 절인 채소를 권했다. 사내아이들도 곁에 있으면서 어머니들을 도왔다. 어머니들이 부르면 즉시 달려가 웨드로와 유리통을 받아 차가 떠나기 전에 필요한 객차를 찾아 갖다주었다. 우리보다 나이가 있는 처녀총각들은 화려한 옷차림을 하고 플랫폼을 빈둥거리면서 담배를 피우며 객차에서 내다보는 시선을 잡으며 일부러 높이 웃기도 했다. 어떤 때는 사람들 속에 소매치기들이 있었는데, 푸른 제복을 입은 경찰들이 그들을 주의 깊게 감시했다. 소매치기를 붙잡을 때도 있었다.
   역에는 레스토랑이 있었다. 어릴 때에는 그곳이 우리에게는 금지된 곳 같았다. 레스토랑에서는 우리의 생활과 다른 생활이 흐르고 있었다. 사람들도 우슈토베에서 사는 사람들과 달랐다.
   출장을 왔거나 휴가를 온 사람들, 친척들을 찾아온 사람들, 기차를 놓친 사람들, 협잡꾼들이 레스토랑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들은 보드카와 맥주라고 하는 누르스름하고 흐린 액체와 안주를 먹었다. 머리에 레스로 만든 코코스니키를 쓴 몸이 뚱뚱한 접대원 아줌마들이 열심히 요리를 날랐다. 레스토랑의 음식도 우리가 집에서 먹는 것과 달랐다. 시래기 장물도, 국시도, 모르코브17)채도 없었다. 소련의 레스토랑의 메뉴였다. 폴타바식 코틀레타, 캅카스식 사슬리크, 우즈벡식 플로브, 우크라이나의 국시나 보르시였다. 1960년대에 소련의 곳곳에서 레스토랑의 생활이 똑같았다. 실내에는 벨로모르 담배와 프리마 시가레타의 연기가 자욱했고 심한 욕설을 하고 다투기도 했다. 많은 경우에 행동이 가벼운 여자 때문에 싸웠다. 나는 레스토랑의 이런 생활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저녁 차로 알마아타로 가는 어머니를 바래다 주기 위해 역에 자주 나갔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알마아타에 가서 여러 가지 물건을 사서는 가격을 좀 올려서 고려인 콜호스에서 팔았다. 소련 시대에는 이것을 투기로 간주했으며 감옥에 갇힐 수도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자식 여섯을 먹여 살려야 했다. 어머니는 큰 배낭을 두 개 어깨에 걸고 또 손에도 두 개 들었다. 일생을 가정, 남편, 살림살이에 바친 불쌍한 나의 어머니는 여러 가지 물건을 몇 톤이나 날랐는지 모르겠다! 그런 물건이 콜호스에 없었다. 1917년 시월혁명의 해에 태어난 나의 어머니 허가이 올리가에 대해서는 차피거우 한인촌에 대해 쓰면서 상기시켰는데, 어머니에 대해 따로 책을 쓸 수 있다. 알마아타 시 공동묘지에 어머니의 비석이 서 있는데, 우리 아버지의 유해가 묻힌 곁에 어머니가 안치되어 있다.
   미로에 들어간 자는 출로를 보지 못하고 나오려고 애쓴다. 나는 추억에서 출로를 찾지 않는다. 나는 장난감 만화경의 천연색 무늬처럼 바뀌며 신속히 영원으로 날아가는 우슈토베 유년 시절의 새로운 그림을 계속 보면서 미로에서 헤맨다…….

각주

1) 태평양 혁명가

2) 로동자 원조 국제단체

3) 잉어의 일종

4) 잉어의 일종

5) 농어의 일종

6) 작은 농어

7) 카라탈 강 연안에서 누가 풀을 얼마나 베어 콜호스에 바쳤는지 계산했다

8) 가제로 만든 천막

9) 강이 일곱 개라는 뜻

10) 수로

11) 제비를 닮은 새

12) 할머니를 의미하는 고려말 방언

13) 러시아 손풍금 음악가

14) syuzhet

15) 철도 소속 학교

16) 철도 소속 병원

17) 당근

필자 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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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파라비 카자흐스탄 국립대학교의 아시아연구소 소장이자 극동연구부 교수이다.
미국 미시간 대학교, 훗카이도 대학교, 건국대학교 등 여러 대학교의 초빙교수를 역임하였다.
여러 민족 화합을 도모한 각종 기고 및 저술활동의 공로가 인정되어 카자흐스탄 비를리크 공로훈장을 받았으며 제18회 KBS 해외동포상을 수상하였다.
고려인 4세로 고려인 후학을 양성하며 대표저서로는 『나는 고려사람이다』, 『한인 이주의 역사』 등이 있다.
* 사진제공_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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