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1호
아메리카노
김정애
북한을 탈출한 지 2년이 되는 때에 나는 중국 칭다오에 있었다. 북한과 국경이 맞닿은 연길(延吉)에서 숨어 지내던 나는 아들딸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공안의 감시가 덜한 칭다오로 갔다. 중국 공안이 탈북자들을 잡아갔다는 소리는 우리에게 공포 자체다. 연길에는 조선족이 있어 탈북민들과 말이 잘 통했다. 음식 문화, 생활 문화도 비슷해서 숨어 지낼 수 있지만, 우리에게 북송은 죽음과 직결되는 생사의 갈림길이다. 굶주림을 피해 아들딸을 데리고 간신히 탈출한 나의 앞에는 북송이라는 또 다른 장벽이 있었다. 연길에서 중국 공안은 탈북민에게 있어서 깊은 함정이거나 먹잇감을 노리는 사자와 같은 존재이다.
연길 현지에서 고마운 조선족분을 만나 왕청, 무단장(목단강), 하얼빈(할빈), 칭다오까지 간 나는 나와 동갑이네 집에 파출부로 들어갔다. 한국의 유학생들을 상대로 홈스테이를 하는 한국 사람이다. 사우스코리아 남한 사람과 노스코리아 북한 사람이 중국 땅에서 만난 셈이다. 당시 칭다오에는 글로벌 시대의 부자가 되려는 꿈을 안고 중국으로 진출한 한국 사람들이 10만 명이 넘었다. 같은 말을 사용하는 탈북민들에게는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나는 아침 일찍 출근하여 청소와 빨래, 식사 등 가정의 모든 일을 했다. 월급은 600위안, 당시 환율로 계산하면 나는 한국 돈 7만 5천 원 정도 받았지만 나는 그 돈이 많은지 적은지도 모를 만큼 세상 물정에 어두웠다. 다만 매일 바쁜 일상이 반복되어도 공안에 잡히지 않고 조용히 숨어 지낼 수 있는 것만으로 깊이 감사하며 살았다. 그 집에서 일하면서 한국 사람들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다. 그들에게는 뭔지 모를 거리감이 있다. 주인이 같은 여성이고 같은 언어를 쓰고, 심지어 같은 또래인데도 중국 조선족을 만났을 때보다 더한 거리감이 느껴졌다.
주인 여자가 TV에서 개그 프로그램을 보며 깔깔 웃을 때면 무엇이 그리 우스운지, 왜 웃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한국 사람의 말투와 인상은 분명 연길 조선족의 투박하고 거친 말과 행동보다 따뜻하고 친절했지만 어딘가에서 오는 경계의 분위기는 확실했다. 체제의 탓인가. 그래도 타국에서 한국 사람을 만난 것은 행운이라고 생각되어 나는 주인을 고맙게 생각했다. 우리는 고향이 달라도 한 민족이라는 동질감, 조국을 떠난 사람이라는 공통점, 주인 여자가 나와 동갑이라는 것까지 모두 기쁘게 여기기로 했다. 내가 그 집의 13번째 파출부란다. 주인이 중국에 진출한 지 2년이 채 안 되는 기간에 꽤 많은 파출부가 거쳐 간 것이다. 30대 후반의 주인 여자는 한국에서 명문여대를 나왔다고 한다. 청도에는 비슷한 한국인 여자 친구가 많았다. 처음 그 집 파출부로 갔을때 어떤 사람인지 보겠다며 동물원 구경하듯 친구들이 몰려들었다. 저마다 내 얼굴과 차림새를 흩어보면서 큰 소리로 웃고 떠들었다. 외국 소설에서 본 노예시장 장면이 떠올라 불쾌한 마음에 낯이 뜨거웠다. 첫날에 그렇게 무안을 주던 여자의 친구들은 얼마 지나자 나를 편하게 대하기 시작했다.
*
딩동!
아침부터 현관에서 야무진 초인종 소리가 울린다. 주인 여자의 친구들이 해가 솟아오르자 또 우르르 몰려들었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그들은 늘 이렇게 동네방네의 시끄러운 이야기로 허무한 시간을 보내곤 했다.
창문으로 쏟아지는 눈부신 햇살을 받으며 친구들은 소파에 기대앉아 행복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때 남달리 얼굴이 크고 목소리가 시원한 주인 여자의 친구 경숙이가 현관에 들어섰다.
“아줌마, 여기 커피 갖다주세요!”
“네-!”
여자들이 하나둘 모이면서 방안은 한층 시끌벅적하다. 그들은 남편과의 관계는 어떻고 아이들의 학업문제는 어떻다느니, 시댁과 형제들과의 문제, 환율 추이와 물가 변동에서 마트 이용까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떠들었다. 잡혀갈 걱정이 없는 그들의 모습이 한없이 부럽기도 하고 한편으로 아까운 시간을 무료하게 보내는 모양들이 한심하게 생각되었다. 그런데 그들이 모일 때마다 빠지지 않는 게 있었다. 커피다.
영화의 한 장면을 돌려보듯 여자들은 들어서면서 커피를 찾았고 얘기를 하는 내내 커피 잔을 앞에 놓고 있었다. 외국 소설에서나 보던 신세계적인 풍경이었다. 그렇게 평화로운 그들의 생활에는 항상 커피가 있다. 과연 커피는 무엇일까. 커피에 대한 궁금증은 날이 갈수록 점차 커져 갔다. 커피 맛은 어떨까. 따가운 커피를 호로록 마시는 걸 보면 아마 참기 어려운 꿀맛일 테지. 건강에는 또 얼마나 좋을까.
동방예의지국인 우리나라의 민족정서상 손님에게 제일 좋은 것을 대접하는 풍습으로 치면 커피는 몸에 좋은 것이 분명하다. 북한에서 남자들이 담배를 피우는 것을 보고 그의 경제력을 엿보는 것처럼 한국 사람들도 커피를 그렇게 여기는 걸까. 그렇다고 누구에게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다. 파출부로 일을 시작한 지 몇 달이 지나도 커피에 대한 궁금증은 사라지지 않았다. 아니 점점 커져만 갔다.
그러던 어느 날 주인 여자가 하루 종일 외출한다며 이것저것 시키고 일찍 나갔다. 나는 주인 여자가 있을 때보다 더 깨끗이 청소할 요량으로 일을 시작했다. 그래야 마음이 편하고 좋을 것 같았다. 아침 식사를 한 설거지를 하고 12개 홈스테이 방을 청소기와 물걸레로 닦고 침구류를 정리하고 화장실을 청소하는 데만 오전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쓰레기통을 비우고 세탁물까지 널고 점심을 먹었다. 그날도 나의 식사는 밥과 김치였다.
급히 싱크대에 서서 식사를 마치고 각 방의 책상과 탁자, 장식을 닦기 시작했다. 컴퓨터나 창문, 방구석을 손가락을 그어가며 먼지를 찾아내는 주인 여자의 까다로운 마음에 들려면 깨끗이 닦고 쓸고 또 닦아야 한다. 너무 열심히 한 탓인지 어느 순간 팔다리에 맥이 탁 풀렸다. 조금만 쉬려고 힘없이 방바닥에 주저앉은 나는 주인이 들어오면 만족해 할지 방안을 둘러보았다. 반짝거리는 방바닥과 새것처럼 윤기 나는 소파를 보니 스스로도 만족했다. 그때 탁자 위에 놓인 커피가 눈에 들어왔다. 왠지 그날따라 커피가 먹고 싶었다. 커피에 대한 호기심에 사로잡혀 있었던 나는 커피를 한잔 마시면 힘이 날 것 같았다. 나는 주인 여자의 친구들처럼 따뜻한 물을 채운 머그컵에 믹스커피 하나를 털어 넣었다. 진짜 힘이 날까, 힘이 나는 것이라면 하나로 부족할 것 같았다. 그래, 이왕 먹는 김에 하나를 더 넣자. 생전 처음 맛보는 커피를 싱크대에 서서 쓸쓸히 마신다는 게 조금은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나는 언제면 한국 여자들처럼 까치 다리를 하고 소파등받이에 기대어 커피 맛을 음미할까. 커피를 마시며 행복해하는 까닭을 나도 진정 느끼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파출부다. 엄연하게 따지면 커피도 주인이 몰래 먹는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뜨거운 커피를 급하게 들이켰다. 쓴맛이 입안에 가득 찼다. 커피에 대한 환상으로 가득 찼던 나의 인상이 순간에 찡그려졌다. 까마치(누룽지)처럼 구수한 냄새를 풍기며 나를 유혹했던 커피의 고약한 면이었다. 이렇게 쓴 커피를 눈썹 하나 까딱 않고 마시다니. 아니, 오히려 그들은 웃고 떠들며 좋아라고 마셨다. 충격이었다. 한국 여자들이 참 대단하게 생각되었다. 그래, 원래 몸에 좋은 약은 쓴 법이지. 몸에 좋은 보약이라면 쓴 것은 얼마든지 참을 수 있어. 잠시 후면 힘이 부쩍 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두 개나 먹었으니 곧 기운이 솟고 행복해지겠지.
그러나 웬걸.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30분이 채 되지 않았을 즈음에 가슴이 할랑거리기 시작했다. 심장이 터질 듯 세차게 요동치고 숨이 찼다. 팔다리 근육이 푸들푸들 떨렸다. 이러다가 심한 경련으로 정신을 잃을 것이라는 두려움이 밀려왔다. 주인 몰래 마셔서 벌 받은 것일까. 그래, 커피를 난생처음 마셨으니 반응이 있겠지. 나는 커피 반응을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술을 한 방울도 입에 대지 못하는 체질이니 그럴 수 있지.
그러나 신체의 반응은 점점 심해졌다. 참는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나는 마음을 가다듬으며 덜덜 떨리는 손으로 물을 연거푸 들이켜기 시작했다. 후회가 막심했다. 당장 해독하지 않으면 호흡곤란으로 쓰러질 것 같았다. 한편으로 주인 여자가 알면 당장 쫓아낼 것이라는 불안감까지 겹쳐 혼란스러웠다. 어찌 됐든 한시라도 빨리 해독해야 한다. 그렇게 나는 커피 한 컵을 마시고 물 열 컵을 연신 들이켰다. 다행히 그 난리를 치는 동안에 주인 여자는 돌아오지 않았다. 커피는 술처럼 내 몸에 맞지 않았다. 그날부터 나는 다시는 커피를 마시지 않기로 결심했다. 커피 때문에 숨이 넘어갈지도 모른다는 공포심이 생긴 것이다.
*
나는 그렇게 3년여의 중국 생활을 하다가 고마운 분의 도움을 받아 대한민국에 입국했다. 드디어 세상에 태어나 서른여덟 살이 돼서야 처음으로 진정한 인간의 자격을 얻은 것이다. 이제 더는 배고플 일도, 나를 잡으러 올 공안도, 숨어 살 염려도 없다. 배부르고 발편잠을 잔다는 게 형언할 수 없이 큰 행복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생겼다. 내가 느끼는 남한과 북한의 문화 차이는 생각보다 컸다. 사회주의 집단 체제에서 살아온 우리가 남한의 자본주의를 이해하는 것은 외국생활을 익히는 것만큼 새로웠다. 같은 민족에 같은 언어를 쓰는데 이해를 못한다니 무슨 말이냐고 할 것이다. 하지만 한국에서 외국어와 그 밖에 변형된 생활용어들을 갑자기 다 알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것은 남북한의 서로 다른 두 체제와 생활의 차이에서 오는 문화의 장벽이었다. 대부분의 북한 사람들은 커피는 물론 소시지를 접하지 못했고 머스타드란 말도 쓰지 않는다. 그래서 한국 사람들이 일상에서 그런 단어를 사용하면 나처럼 알아듣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어느 날 교회에서 주일예배를 마치고 모두가 커피숍으로 갔다. 커피에 대한 거부감이 있지만 하루 빨리 어울리며 정착해야 한다는 생각에 그들을 따라갔다. 커피숍에 들어서니 별의별 커피, 차, 디저트 메뉴가 한 눈에 안겨왔다. 메뉴도 잘 모르지만 뒤에 쓴 숫자도 이해할 수 없다. 숫자는 0.8이나 0.9, 1.5 이런 식으로 적혀 있다. 새내기 탈북민이어서 커피의 종류는 모른다 쳐도 그 옆에 숫자의 의미는 알고 싶었다. 나는 조용히 옆 사람에게 귓속말로 물었다.
“저기 적힌 숫자는 뭐예요?”
“아, 그건 가격이에요. 달러로 환산된 것이어서 0.8이면 한국 돈 8000원이라는 뜻이에요.”
나는 꼭 처음 외국에서 와 허둥거리는 이방인 같았다.
“자, 커피 주문받겠습니다.”
그러자 한 사람이 팔을 번쩍 쳐들더니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주변에서 카라멜 마키아토, 카페라테, 캐모마일, 망고 스무디…… 생소한 커피와 차를 연거푸 주문했다. 듣기만 해도 당황스러워 속이 할랑거릴 정도다. 그럼 나는 무엇을 주문하지? 순간 누군가 주문한 아메리카노가 떠올랐다. 그래, 아메리카, 그러면 난 아프리카, 아프리카노!
나는 내가 주문하는 ‘아프리카노’가 얼마일지 몰라 가격표를 살폈다. 한 번 훑고 두 번 훑어보아도 아프리카노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또 옆에 앉은 사람에게 조용히 물었다.
“여기 아프리카노는 없나요?”
내 말을 들은 그는 미간을 찡그리며 어이없이 웃었다.
“뭐라구요? 아메리가노는 있어도 아프리카노란 커피는 원래 없어요.”
“왜요? 아메리카노가 있으면 아프리카노도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지구상에 아메리카와 아프리카가 있고 아시아가 있으면 아프리카노도, 아시아노도 있을 것 같았다. 다 있을 것 같은 대한민국 커피 시장에 아프리카노가 없다는 것은 예상 밖이었다. 사람들은 그저 아무렇지 않게 웃어넘겼지만 나는 망신을 당한 기분이 들었다.
*
그 뒤 회사 생활 1년이 되던 어느 날 나이 많은 실장 언니가 나를 보며 한마디 한다.
“어머? 정애가 이젠 우리말을 알아듣는가 봐.”
“그러게요. 진짜 알아듣네요.”
비로소 내가 회사 생활 1년 만에 동료들과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이다. 직장 동료들도 그런 나를 사랑스러운 눈길로 바라보며 진심으로 기뻐해 주었다. 갓 걸음마를 타는 아기를 보듯이.
김정애, 국제펜 망명북한펜센터 이사장이자 한국소설가협회 중앙위원, 북한연구소 월간지 편집위원, 겨레말 큰사전 편찬위원회 자문위원, 그리고 자유아시아방송(RFA) 기자로 활동하고 있다.
2003년에 탈북하여 2005년에 대한민국으로 입국하였으며, 조선중앙작가동맹 산하 함경북도 작가동맹위원회 문학소조원으로 재직한 바가 있다.
2014년 한국소설가 협회 주최 제41회 공모전과 2019년 서울시인협회 제24회 공모전에서 등단하였다.
* 사진제공_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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