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를 넘는 작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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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호

김용익, 예술의 영토를 찾아 떠돌았던 영원한 이방인

정주아


▲ 1948년 미국 켄터키대학 시절 김용익 © 통영예술의향기

  김용익(金溶益, 1920-1995)은 미국에서 영문 소설을 발표해서 작가로 데뷔한 이채로운 이력을 지닌 작가다. 이민진, 이창래 등 모어를 영어로 하는 한국계 작가들과 달리 그는 학습한 영어로 소설을 썼다. 어휘의 정확성이나 표현의 밀도 면에서 문학어가 일상어와 다를 수밖에 없다는 점을 고려하면 감탄할 만한 일이다. 과연 그의 회고에는, 작가 등단이란 어림없으니 포기하라던 룸메이트와 내기를 했다거나, 부족한 영어 어휘를 외우며 식당 서빙을 하다 해고당했다거나 하는 험난한 유학 생활에 관한 이야기가 많다. 그런데 동시에 이런 궁금증도 생겨난다. 그는 왜 그리 어려운 길을 걸었던 것일까, 왜 하필 미국에서 작가가 되려고 했을까? 학습한 외국어로 소설을 썼다는 점만 놓고 본다면, 김용익의 사례는 이미륵이나 강용흘 등 이민 1세대 작가들과 같은 경우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미륵과 강용흘은 식민지가 된 고국을 떠나온 망명자의 처지에서 다스릴 길 없는 향수를 담아 소설을 썼다. 김용익이 도미한 것은 한반도가 해방된 이후인 1948년, 그가 28세 되던 때이다. 정치적으로 혼란스럽기는 했으나 한국인이기에 차별받고 쫓기던 시절은 끝났다. 그러므로 굳이 미국에서 영어로 소설을 써서 작가로 데뷔한 그의 선택을 두고 이채롭다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김용익은 1920년 경남 통영에서 태어났다. 일본 유학 시절에 영문학을 공부했고 귀국한 뒤에는 부산대에서 영어영문학과 강사로 일했다. 영어에 친근하다는 것이 미국행에 용기를 주었던 것일까. 1948년에 그는 미국 플로리다 남부대학에서 소설 창작 공부를 시작했다. 1953년에는 아이오와 대학교 대학원 창작부에서 수학하며 “The Wedding Shoes”(「꽃신」)를 써서 꿈을 이루었다. 물론 그 준비 과정이 순탄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적어도 단편은 하나 남기고 이 나라를 떠나겠다”는 오기 덕에 작가가 되었다고 회고한다. 영어로 소설을 써내는 것이 심리적으로도 마뜩잖았던 정황도 있다. ‘영어로 소설을 쓰는 데 있어서 저항감도 많았다’고 고백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영어로 소설을 쓴다는 것이 마냥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았다는 뜻이겠는데, 이를 보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도래한 문화 냉전기에 영어가 누렸던 언어제국주의적 권력에 미혹된 것만은 아니었던 셈이다.
  당시 김용익의 내면 풍경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의 주요 작품들이다. 「꽃신」은 꽃신을 사느니 고무신을 사고 남은 돈으로는 고기를 먹겠다는 시대적 변화 속에서 살길이 막막해진 꽃신 장수의 이야기다. 그는 꽃신을 쓸모없는 사치품으로 취급하거나, 효용을 다했으니 헐값에 팔라는 세간의 풍조에 분노한다. 딸에게 손수 만든 꽃신을 신겨 성대한 혼사를 치르는 것이 꿈이던 그는 전쟁의 폭격으로 딸을 잃는다. 생계를 위해 피난지 부산의 시장에서 좌판을 벌이고 남들의 비웃음을 감당하며 꽃신을 팔던 그는, 딸에게 주려던 꽃신 한 켤레만은 끝까지 팔지 않은 채 쓸쓸히 죽는다. 첫 작품이자 대표작인 「꽃신」에 압축적으로 나타난 것처럼, 김용익의 소설은 세상에서 이해받지 못한 채 도태되는 장인(匠人)의 운명을 연민 어린 시선으로 그린다. 1958년에 발표된 후속작 “From Below the Bridge”(「변천(變遷)」)에 등장하는 ‘갓쟁이’ 또한 꽃신 장수와 같은 처지이다. 영악하고 악착같은 세상의 흐름을 따르지 못하고 혹은 따르지 않고, 자신의 피조물을 슬프게 바라보는 장인들이 곧 예술가와 같은 부류라는 사실을 알아채기란 어렵지 않다.
  김용익의 고향인 경남 통영에는 김용익과 그의 형인 김용식(金溶植, 1913-1995) 두 사람을 기리는 기념관이 있다. 저명한 외교관이었던 김용식은 일본 강점기에 일본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한 수재였다. 이들의 아버지는 매일 새벽마다 어린 아들의 손을 잡고 산봉우리에 올라 아들의 입신양명을 빌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63년에 발표된 소설 “From Here You Can See the Moon”(「밤배」)는 어려서부터 수재로 소문난 장남을 편애하는 아버지 때문에 상처받은 차남의 이야기이다. 글공부보다는 그림에 소질이 있었던 차남은, 예술적 자질을 인정받기는커녕 밥벌이는 그른 한심한 한량인 양 취급하는 가족과 이웃들의 시선에 위축된다. 허구적으로 가공된 소설이기는 하지만, 돈벌이와 무관한 예술적 재능을 아직은 받아들일 여유가 없었던 한국 사회의 모습은 사실일 것이다.

옛날에는 부산에 있는 형을 만나고 늘 밤배로 돌아왔었다. 형에게서 얻은 돈으로 화구를 사 가지고.
“그게 뭐꼬? 물감하고 붓하고 도화지라고? 나도 니 같은 형님이 있었으믄 얼마나 좋겠노. 아무 일 안 해도 그림이나 자꾸 그리고 있으믄 안 되나?”
그 말이 듣기 싫어서 일부러 나는 밤배를 탔었다.
―「밤배」, 『꽃신(김용익 소설집 1)』, 남해의봄날, 2018, 98쪽.

  고향 땅과 가족을 떠나 미국으로 향하는 작중 차남의 모습은 작가 김용익을 닮아 있다. 그에게 미국은 장차 예술로도 먹고 살 수 있음을 증명해야 하는 도전의 땅이자 기회의 땅이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예술적 자질을 인정하는 데 인색했던 해방 직후의 고향은 김용익의 예술적 인정 욕구를 자극했을 뿐만 아니라 문학 창작에 있어서도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김용익의 또 다른 대표작으로 평가받는 “Blue in the Seed”(「푸른 씨앗」)은 배타적인 시골 마을로 이주한 ‘푸른 눈의 한국인’ 소년에 대한 이야기다. 남들과 달리 푸른 눈을 가진 소년은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한다. 작가가 미국에서 활동하며 ‘검은 눈의 서양인’이 되고자 했음을 염두에 둔다면, 향촌에 섞여 든 ‘푸른 눈의 한국인’이란 작가의 처지를 정확히 뒤집은 설정이라 할 수 있겠다.
  다수 집단에서 배제되어 고립된 존재들을 향한 따뜻한 시선은, 한국과 미국을 떠돌아다니는 노마드의 감각과 세상이 뭐라든 예술가로 살고자 했던 자기 연민이 뒤섞인 지점에서 나온다. 28세 때에 한국을 떠난 이후, 그는 십 년 뒤에 귀국해서 잠시 대학 강단에 섰다가 45세 되던 해에 다시 미국으로 떠났다. 청년기를 제외하면 한국에 체류한 기간은 대학 강단에 섰던 1958년에서 1965년까지, 불과 7년여에 불과하다. 시민권을 얻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가 미국에 안정적인 거처를 마련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미국의 예술 단체에서 작가에게 후원하는 온갖 재정 지원 프로그램이나 거주지 제공 프로그램을 이용하며 떠돌아다녔다.
  김용익의 미국행은 생존 경쟁과 이데올로기 다툼만이 최고의 관심사였던 가난한 땅에 태어난 예술가 지망생의 자발적인 망명으로 요약된다. 몸도 마음도 외롭고 가난했던 예술가 지망생에게, 우방국의 지식인을 포용하고 재정적 지원을 제공했던 문화 냉전기의 미국은 기회의 땅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정작 영어로 창작하는 일에 대해 김용익은 “고독과 향수의 표현으로, 한국말로 써서는 발표할 길도 없어 영어로 썼다”고 괴로움을 토로하고는 했다. 그의 예술가적 영혼이 형성된 고향 땅을 제재로 다루는 동안 영어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오직 모어로만 살릴 수 있는 표현들이 너무 많이 생겨났다. 이에 김용익은 영어로 발표했던 소설을 손수 한국어로 다시 써서 출판하는, ‘이중어 창작’이라는 희귀한 작업을 반복했다. 독자들에게는 낯선 작업이기는 하겠지만 그 다시 쓰기의 의미를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것은 피조물을 보다 완벽하게 만들어 내려는 꽃신 장인의 집념과 다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참고자료

김용익, 『꽃신(김용익 소설집 1)』, 남해의봄날, 2018.

김용익, 『푸른 씨앗(김용익 소설집 2)』, 남해의봄날, 2018.

최일남·김용익 인터뷰, 「최일남이 만난 사람―재미작가 김용익씨, 작가는 진실을 말해야 한다」, 《신동아》, 1983.9, 424-438쪽.

김민영, 「김용익 문학의 서지 연구」, 고려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석사학위논문, 2010.

정주아, 「‘선택적’ 디아스포라의 세대와 미국―재미작가 김용익·김은국과 문학적 영토의 선택」, 『국제어문』 99권, 2023.12.

필자 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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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가로 현재 계간 《창작과비평》 비상임편집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강원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