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야기

title_text

7호

3부 ‘패밀리 데이’의 호마(HoMA)

홍기돈

  하와이에서는 하와이대학교를 친근하게 ‘UH’라고 부른다. 하와이에 도착해서 ‘UH 방문교수 신분증’을 서둘러 만들었다. 도서관 출입을 위해서였다. UH 해밀턴도서관에 처음 가서 두리번거리는 나의 행색에서 영락없는 초짜 티가 났는가 보다. 아시아계와 태평양계의 혼혈로 짐작되는 직원이 다가와서 필요한 자료를 묻더니 한국학 도서가 있는 곳으로 안내해 주었다. 신분증을 확인하는 절차는 어떠한 것도 없었다. 외부인의 도서관 출입을 막는 국내 대학과는 반대 상황이라 신선한 충격이 느껴졌다. 주머니 속에서 만지작거리던 ‘UH 방문교수 신분증’을 지갑에 끼워 넣으려니 문득 지역 사회에서 대학교의 역할이 떠올랐다. 지역 사회에서 대학교가 나름의 권위를 행사하려면 이 정도의 여유는 발휘해야만 하는 게 아닐까.
  ‘UH 방문교수 신분증’ 덕을 톡톡히 본 것은 호놀룰루미술관(Honolulu Museum of Art, HoMA) 방문 때였다. HoMA는 매달 셋째 주 일요일을 ‘패밀리 데이’로 지정하여 어린이를 위한 다양한 행사를 진행한다. 하와이에 거주한다는 증명만 할 수 있으면 이날 HoMA는 전 가족 무료입장이다. 우리 가족은 패밀리 데이에 HoMA를 네 번 찾았다. HoMA가 소장하고 있는 미술품은 5만여 점 된다. 그러니 네 번의 방문이 그리 많았던 것은 아니다. HoMA 전시관은 여러 디아스포라가 공존하는 하와이 사회를 반영하는 듯 대체로 지역 단위로 나뉘어 있다. 국가와 지역 전시관만 꼽더라도 한국관, 중국관, 일본관, 인도관, 인도네시아관, 필리핀관, 미국관, 동남아시아관, 태평양·아프리카·고대 라틴아메리카·북미관이 있다. 그 외에 종교, 시대 및 유파에 따라 분류된 전시관도 있다.


‘패밀리 데이’ HoMA에서는 어린이를 위한 다양한 행사를 진행한다.

  특정 민족 문화의 고유성은 다른 나라 문화와의 비교를 통하여 선명하게 드러나는 법이다. HoMA를 둘러보다 보면 자연스럽게 민족 간 문화 차이를 생각하게 되는데, 일본관의 ‘일본 미술 속 동물들’ 전시는 그런 점에서 흥미롭게 다가왔다. 『이솝 우화』 등장 동물이 그러하듯, 그려졌거나 조각된 전시관의 의복 입은 동물들은 인간의 속성 및 의례를 표현한다. 예컨대 도사 미쓰노부(土佐光信, 1434-1525)의 두루마기 그림 「익살스러운 동물들(Frolicking Animals)」의 한 부분을 보면, 두꺼비는 불상처럼 좌정해 있고, 원숭이가 승려인 양 주문을 외고 있다. 염주를 굴리고 불경을 들여다보는 토끼, 여우들은 장례 치르는 가족·친지 그리고 원숭이의 보조자가 아닌가 싶다. 설명에 따르면, 이와 같은 유형은 도사 미쓰노부 이후 일본 미술에서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도사파의 창시자 도사 미쓰노부는 궁정화가였다는데, 조선 미술에서는 이와 같은 경향이 출현하기 어려웠을 성싶다. 성리학 세계관에 근거하여 이상 세계의 이념을 표출하는 방안으로 산수화(山水畵)에 매진했으니, 그처럼 완고한 세계관에는 동물이 끼어들 여지가 없었으리라는 것이다.


도사 미쓰노부의 긴 두루마기 그림 <익살스러운 동물들>의 일부.

  전근대에 축적한 전통은 소멸되지 않을 경우 변형을 거쳐 근대 세계로 이월된다. 정치소설 『인류공격 금수국회』(1885), 사토 구라타로(佐藤藏太郞)의 『금수회의 인류공격』(1904)은 일본의 그러한 예술 전통 속에서 출현했을 터이다. 2011년 서재길 국민대 교수는 1908년 발간된 안국선의 『금수회의록』이 『금수회의 인류공격』의 번안소설임을 밝혀냈다. 서언(序言)이 번역 수준인 데다, 표지·삽화가 유사하고, 『금수회의록』에 등장하는 여덟 동물은 『금수회의 인류공격』의 마흔네 마리 동물에 포함되며, 여러 대목에서 표현이 비슷하다는 지적이었다. 서재길 교수의 주장은 학계에서 동의를 확보했고, 『금수회의록』은 창작소설에서 번안소설로 조정되는 형편에 처했다. 급박하게 이식한 문화가 제대로 뿌리 내릴 리 없다. 『금수회의록』 이후 우리가 변변한 우화 서사물을 가지지 못한 이유는 아마 여기에 있지 않을까 싶다. 달리 말하자면, 일본의 ‘지브리 영화’ 같은 서사물을 평지돌출로 이해하기는 곤란하겠다는 것이다.
  기실 한국문학사에도 우화소설은 등재되어 있다. 조선 후기 민중들이 창작·향유했던 「서대주전(鼠大州傳)」, 「서동지전(鼠同知傳)」, 「녹처사전(鹿處士宴會)」, 「두텁전」, 「토끼전」 등이 사례이다. 이들 우화소설은 봉건 사회의 이념, 윤리, 권위를 풍자하고 모순을 폭로했던바, 건강한 민중성이 기저에 흐르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조선 후기 성장했던 민중 의식은 근대로 진입하는 동력으로까지는 작동하지 못했다. 그와 함께 우화소설 또한 흐름을 이어 나가지 못한 채 단절되고 말았다. 우리가 미술관이나 박물관에 가는 까닭은 그렇게 끊어진 길이랄까, 우리 안에 감추어진 어떤 면모를 찾아보는 데 있지 않을까.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선 사람은 일상에서 당연하게 배제하고 누락해 온 사항들을 돌아볼 수 있는 사람이리라, 고 나는 생각한다.

필자 약력
홍기돈 프로필 사진.JPG

제주 출생. 1999년 《작가세계》 신인상을 수상하면서 문학비평가로 등단했다. 중앙대학교에서 1996년 ‘김수영 시 연구’로 석사학위를, 2003년 ‘김동리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평론집 『페르세우스의 방패』(백의), 『인공낙원의 뒷골목』(실천문학), 『문학권력 논쟁, 이후』(예옥), 『초월과 저항』(역락), 연구서 『근대를 넘어서려는 모험들』(소명출판), 『김동리 연구』(소명출판), 『민족의식의 사상사와 한국근대문학』(소명출판), 산문집 『문학의 창에 비친 한국 사회』(삶창) 등이 있다. 2007년 제8회 젊은평론가상(한국문학가협회 주관)을 수상했으며, 《비평과 전망》, 《시경》, 《작가세계》 등에서 편집위원을 역임했다. 2008년부터 가톨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