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아스포라 깊이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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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스포라 깊이읽기

너의 낯섦은 나의 낯섦

평론: 손남훈

계시적 신비로 세계의 해방을 노래하는 시적 열정

손남훈

   아도니스(본명 알리 아흐마드 사이드 에스베르, 1930- )는 시리아에서 태어나 레바논을 거쳐 현재는 파리에 거주하면서 인습적인 아랍 시에 일대 혁신을 추구하는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아랍과 이슬람의 전통이 보인 종속적이고 억압적인 종교·정치·사회·문화 등에 대한 전면적인 거부와 함께 인간이 응당 지녀야 할 자유와 해방의 정신을 올곧게 노래하며 다가올 미래를 예비하는 선지자적 면모를 보인 시를 쓰고 있다. 마치 세례 요한이 도래할 신의 첩경을 닦으려 했듯, 아도니스는 시의 신비와 계시 속에서 인류를 위한 보편적 지평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아도니스 시의 면모는 잘 알려진 시시포스 신화를 원용한 다음의 시편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나는 물 위에 글을 쓰기로 맹세했다
나는 시시포스와 함께 짊어지기로 맹세했다
그의 육중한 바위를.
나는 시시포스와 함께하기로 맹세했다
열(熱)과 불꽃을 견디고
눈이 먼 안공(眼孔)들에서
마지막 깃털을,
풀과 가을을 위해
흙먼지의 시를 쓰는 그 깃털을 찾으며.

나는 시시포스와 함께 살리라 맹세했다.
―「시시포스에게」 전문

   제우스로부터 바위를 영원히 밀어 올리는 형벌을 받은 시시포스는 알베르 카뮈에 의하면, 인간이 숙명적으로 안고 있는 부조리 그 자체를 의미하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시시포스가 자신이 받은 형벌을 어째서 그토록 묵묵히 수행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시시포스는 도시를 건설하고 지혜로 신들까지 속인, 그리스 신화의 수많은 인물들 중에서도 오이디푸스와 더불어 가장 인간다운 인간이라 할 수 있다. 신들이 정해 놓은 속박과 굴레를, 오직 자신의 능력만으로 극복하려 했던(심지어 죽음마저도) 이였기 때문이다.
   제우스는 지혜와 달변으로 신들을 속인 시시포스에게 직핍한 육체적 형벌을 가함으로써 억누르려 했다. 시시포스는 이를 달게 받아들임으로써, 다시 말해 신의 저주를 온몸으로 수행함으로써, 역설적으로 또 다른 방식의 신에 대한 거부를 실현하려 했다.
   아도니스가 “나는 시시포스와 함께하기로 맹세했다”며 “글을 쓰기”를 굳건히 자기 다짐할 때, 그것은 아랍과 이슬람의 저 보수적이고 견고한 종교와 전통의 ‘말씀’들에 대한 시시포스식 거부가 된다. 아랍에 한정하지 않고 범지중해적인 뮤즈를 자신의 시편으로 끌어오는 전설과 신화에 대한 상상력은 그의 시가 보편성을 확보하는 하나의 계기가 되기도 한다.
   어쨌든 그는 세상 모든 것이 부질없이 사위어 드는 “열과 불꽃”에 맞서, 쓰기만 하면 금방 사라져 버리는 “물 위에 글을 쓰기”란 불가능한 것을 알면서도, 되레 불가능하기 때문에 또다시 도전하고 밀어 올릴 수밖에 없는 “육중한 바위”와 같은 것이 시 쓰기임을 고백한다. 그럼에도 그가 이러한 ‘부질없는’ 과정을 시시포스와 함께하는 이유는 언젠가 비상할 그 흔적을 안겨주는 “마지막 깃털”을 거기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이러한 열정은 종교의 그것과 닮아 있기에 시인의 시 쓰기는 행동이자 혁명이며, 또한 의지적 결단과 동의어가 된다

나는 심연 속으로 다가가는데
그것을 보는 것에 무지합니다
나는 그것을 보는 게 두렵습니다
나는 다가갑니다
내 노래가 다른 노래들처럼 된다는
기쁨으로 충만한 심연 속으로.
그것은 이 눈먼 세상을 이끌어 갑니다
내가 죄가 된다는,
죄 없이 살아 있는 죄인이 된다는 기쁨으로.
―「심연」 전문

   시인은 “이 눈먼 세상” 속에서, 그리고 자신의 “무지”함 때문에 “심연”을 “보는 게 두렵”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눈먼 세상과 자신의 무지로 인해 심연이라 지칭할 수밖에 없는 “기쁨으로 충만한” 그 무엇을 향해 “다가”간다. 그것은 세상이 시인을 정죄하는 결과를 낳고야 마는 것이지만, 되레 눈먼 세상의 정죄는 “죄 없이 살아 있는 죄인이 된다는 기쁨”을 주는 것이기에 시인은 이를 감수하고자 한다. 실상 눈먼 세상을 “이끌어” 가는 것은 “심연”이고, 그 심연에 다가가고, 심연을 노래하며, 심연의 심연 됨을 알리는 것은 오직 시인의 시편들로만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시시포스가 자기 처벌을 통해 혁명과 저항을 형상화하는 존재라면 심연을 향하는 시인의 종교적 열정은 자신을 정죄하는 세계의 허위와 위선에 맞선 고투의 의지로 형상화된다.
   선진 자본과 고루한 보수적 이익 집단에 의해 벌어지는 탐욕과 전쟁으로 눈먼 아랍의 오늘, 시인은 심연밖에 보지 못하는 “무지”에 맞서, 시를 통한 자기 결단의 과정을 써 내려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아랍과 아랍을 넘어선 세계를 향한 시인의 순수한 자기 열정, 즉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길과 집이 나를 사랑한다
그리고 집에 있는 붉은 항아리 하나
물이 그것을 연모한다.

이웃이 나를 사랑한다
그리고 들판이, 타작마당이, 불이.

노동에 시달리는 팔뚝들이 나를 사랑한다
세상살이가 즐거워도, 즐겁지 않아도.
그리고 내 형제의
그의 처진 가슴의 갈가리 찢겨 흩어진 조각들
이삭과 계절이 그것을 감춘다.
홍옥수(紅玉髓) 하나
피가 그것을 보고 부끄러워한다.
내가 존재했던 이래 사랑의 신(神)은 있어 왔다-
내가 죽으면 사랑은 무얼 할까?
―「사랑」 전문

   “길”이 삶의 과정이고 “집”이 그에 대한 목적이라면, “나”가 행하는 모든 행위의 과정과 목적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묶인다. 그런데 사랑의 주체는 꼭 “나”만이 아니다. “물” 또한 “붉은 항아리”에 담겨 사랑을 하며, 타자(“이웃”)와 나를 둘러싼 세상(“들판”, “타작마당”, “불”)과 심지어 “노동”마저 “나를 사랑”하고 나 또한 이를 인식하고 있다. 내가 대상을 사랑하듯, 대상들 또한 나를 사랑한다. 세상은 사랑의 공동체다. 문제는 내가 대상의 사랑을 느끼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의 깨어짐을 본다는 데 있다.(“갈가리 찢겨 흩어진 조각들”) 그럼에도 나와 타자 간의 사랑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니 시인은 질문을 바꾼다. 사랑의 주체이자 대상인 ‘나’가 사라진다면? “내가 존재했던 이래 사랑의 신은 있어 왔다”고 했으니, 그 신은 항상 나를 사랑할 것이다. 사랑의 주체든 대상이든 사랑은 오직 사랑이다. 사랑은 신이며, 신이 곧 사랑이다. 우리는 이 시에서 사랑에 대한 믿음이 보편적인 지평으로 고백되는 경지를 감동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불에 그을린 나무 가면을 써 다오
불과 신비의 바벨이여.
나는 훗날 오실 신을 기다리니.
화염의 옷을 걸치고
바다의 폐(肺)에서, 석화(石花)에서 훔쳐 온
진주로 치장하신 그분을.
나는 곤혹스러운 신을 기다리니.
분노하고 통곡하고 고개 숙이고 빛을 발하는 그분을.
미흐야르여,
그대의 얼굴은
훗날 오실 신을 예고한다오.
―「예견」 전문

   이 시에서 고유명사로 호명된 미흐야르는 1,000여 년 전 시인이며, 페르시아에서 태어나 조로아스터교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고매한 정신의 높이를 형상화한 시편들을 생산하는 한편, 비판자들로부터 인위적이라는 비판을 받았다고 한다. 이는 아도니스가 걸어간 삶의 이력과 현 보수적 아랍 지식인들의 아도니스에 대한 비판에 그대로 상응한다고 볼 수 있다. 그의 시편에서 미흐야르가 간간히 호명되는 이유가 동일시 가능한 이력과 작품 경향에 있을 것임은 명약관화이다.
   아도니스는 신이 사라진 자리, 고대 도시 “바벨”을 신의 처소를 예비하는 장소로 지목한다. 시인은 그곳에서 “훗날 오실 신을 기다리”고 “분노하고 통곡하고 고개 숙이고 빛을 발하는” 신을 형상화한다. 그 신은 1,000여 년 전 슈우비야 시인이었던 미흐야르가 보고자 한 신이며, 신과 함께 사라져 버린 모든 우월주의와 권위주의, 억압, 전쟁, 파괴와 절망으로 점철되어 버린 아랍의 현 상황에 대한 비판과 부정, 혁명을 “예고”하는 신이다.
   시인 아도니스가 사라져 버린 신이자 도래할 신의 처소로 바벨을 예정하고, 아랍인의 우월적 지위를 지키려 한 아랍 무슬림에 맞서 페르시아계 무슬림들이 자신들의 유구한 역사와 문명을 내세우며 평등주의를 주창한 슈우비야 운동의 시인 미흐야르를 호명한 것은 그저 자민족 중심주의를 전제한 민족적 울분을 도래할 신의 권위로 대체하고자 한 시도가 아닌 것이다. 시인은 환상과 계시 속에서, 죽음과 절망만을 낳은 현시대의 불화와 전쟁을 끝내고 다시 도래할 미래의 평화를 향해 기투하는 태도를 의지적으로 재현함으로써 희망과 축복의 메시지를 전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것이 사랑이 아니라면, 다른 이름은 무엇이겠는가?
   주지하다시피, 성경에서 바벨은 유다왕국을 멸망시키고 유대인을 70여 년간 포로로 데려간 탓에 부정과 저주의 도시로 기록되어 있다. 대문자 디아스포라가 원토 회복을 꿈꾼 피정복민들의 정복 국가와 도시에 대한 저주를 기록함으로써 강렬한 적대 의식을 보인다면, 이 시에서 아도니스는 배타적 민족주의를 넘어 타자와 타자가 손 맞잡는 그날이 도래하기를 간절히 기원하는 화해와 포용의 디아스포라 의식을 보여 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을 위한 자리는 없다. -그들은
지상(地上)의 몸을 덥히고,
우주를 위해 그 열쇠들을 만든다,-

그들은 세우지 않았다
자신들의 전설을 위한
계보도, 가문도,-

그들은 전설을 썼다
태양이 자신의 역사를 기록하는 식으로,-

자리는 없다······
―「시인들」 전문

   시인이 신의 자리를 예비하고 사랑으로 충만한 희망과 축복의 메시지를 내린다고 해서 그것이 “자리”를 탐하거나 스스로를 “세우”기 위한 것은 아니다. 시인은 우주의 비밀을 여는 “열쇠들을 만”들고 “전설을” 쓰지만 그것은 시인의 시인됨을 마치 “태양이 자신의 역사를 기록하는 식”과 같이, 자기 증명하는 것일 뿐이다. 그러한 시인의 순수성이 서구의 이기와 고루한 아랍의 보수주의에 맞선 아랍의 고전적이면서 동시에 현대적인 정직한 문학적 대응 방식이자 정치적 응대의 태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가장 디아스포라적이면서 또한 가장 세계 문학적인 그의 시편과 활동들이 많은 이들의 호응과 비판을 불러오는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어쨌건, 세계의 곳곳을 인식하고 상황을 예의주시하며 표피적 사건 너머 심연의 자리를 탐색하여 도래할 신의 처소를 예비하고자 하는 아도니스의 시편은 필명이 뜻하는 바대로 죽음과 재생, 희생과 부활의 드넓은 스펙트럼을 자유롭고 풍부한 어휘와 형식으로 신비적이고 계시적으로 표현하여 오늘날 아랍 시문학의 선두 주자로 우뚝 설 수 있게 해주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필자 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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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부산일보》 신춘문예에 평론으로 등단했다. 비평 계간지 《오늘의 문예비평》 주간과 편집위원을 역임했고 현재 시 계간지 《신생》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부산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부교수로 재직 중이다. 비평집 󰡔루덴스의 언어들󰡕 외 다수의 저서가 있다. orpeus@pusan.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