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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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징검다리

김길호

  해바라기와 같은 함박웃음 속에 삿포로라면 정식을 맛있게 먹고 있는 가족들을 옆자리에서 바라보는 배유상의 심기는 불편했다. 다시 맥주를 스스로 따라 마셨다.
  “아버지, 글쎄 홋카이도까지 와서 한국 음식을 먹어야 합니까? 무엇 때문에 여기까지 여행을 왔습니까?”
  “그래요. 집에서도 그렇고 오사카 이쿠노에서도 언제나 먹는 한국 음식인데 왜 그 식당에 가야만 합니까?”
  “아이들 말이 맞아요. 모처럼 비싼 여행비 지불하면서 홋카이도까지 왔는데 유상 씨 생각을 도저히 이해 못하겠어요.”
  딸 미송이와, 아들 윤구, 그리고 아내 희영이가 마치 준비했던 대사처럼 말했다. 배유상은 가족들의 자신 있고 논리에 맞는 빗발친 항의에 궁색한 변명을 찾기에 골몰했다. 그렇지만 얼른 떠오르지 않았다.
  “음식이 그리워서가 아니라 사람이 그리워서 그래.”
  “사람이 그립다니? 그럼 알고 있는 사람 가게예요?”
  논리적인 딸 미송이가 잽싸게 파고들었다.
  “아는 사람은 아니지만 한국 사람 가게라서 그래.”
  “아버지 말씀, 조금은 이해하지만 오늘 이 경우에는 이해 불능입니다. 한국 사람 가게라면 얼마든지 있지 않습니까?”
  아들 윤구가 끼어들었다.
  “나도 너희들의 말을 이해는 한다, 그런데 낯선 곳에서 한국인 가게를 보니 반갑거든. 너희들도 같은 마음이라고 생각해. 안 그래? 그래서 이왕이면 그곳 주인과 얘기도 나누고 싶어서 그래.”
  “한국 음식점이라서 반드시 주인이 한국 사람은 아니잖아요?”
  딸이 말했다.
  “가령. 유상 씨 말대로 한국 사람이 주인이라면 그 주인과 무슨 말을 나누죠? 주인에게 있어서 우리는 지나가다 들른 한 사람의 손님에 불과해요. 유상 씨는 흔치 않은 여행 갈 때마다 언제나 그런 말을 하는데, 이것저것 묻는 그 말이 유상 씨는 같은 동포로서 친절함에서 하는 말이라도 그분께는 부담스러운 일일지도 몰라요.”
  아내의 말에는 빈정의 조미료가 약간 흩뿌려져 있었다.
  배유상 가족은 2박 3일 일정의 패키지 여행으로 어제저녁 홋카이도에 도착했다. 오늘 오후는 저녁까지 자유 시간이었다.
  내일 아침은 다른 일행들과 함께 몇 군데를 둘러보고 저녁 비행기로 오사카로 돌아가는 일정이었다. 그들은 삿포로 시내를 돌아보다가 저녁을 먹기 위해 식당을 찾았고, 이내 ‘아리랑’이라는 식당을 발견했다. 유상은 반가워서 그 식당에 가자고 했는데 가족들의 항의성 반대에 부딪혔다.

  그러나 유상은 가장이라는 권위를 내세워 가족의 의견을 무시했다. 몇 년 전 오키나와에 갔을 때도 공교롭게 똑같은 아리랑 식당이 있었다. 그때도 반가워서 그 식당에 가자고 했을 때, 오늘 같은 상황이 일어났다. 결국 가족의 반대에 부딪혀서 가지 못했지만 지금도 가끔 그 식당이 떠오른다. 어떤 사연이 있어서 오키나와라는 멀고 먼 곳에서 아리랑이라는 간판을 달고 식당을 하는지 알고 싶었다. 지금도 그때 그 식당을 들르지 못한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소설가라는 얄팍한 호기심에서 그들의 삶을 들추려는 의도적인 생각보다 본능적으로 그들은 누구인가를 알고 싶은 것뿐이었다.
  한국 요리나 향토 요리의 먹거리 차원이 아닌, 사람이 그리웠다. 물론 낯선 여행지까지 가서 그곳의 향토 요리를 외면하는 자신의 고집스러움의 부조리를 스스로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자신의 속마음을 이해 못하는 가족이 야속했다. 유상은 혼자서 아리랑 간판이 있는 음식점을 향해 걸어갔다. 가만히 서서 쳐다보던 가족이 소걸음으로 따라왔다. 유상은 아리랑 식당 앞에서 절망의 신음 소리가 자신도 모르게 새어 나왔다.
  ‘정기휴일’이라는 팻말이 식당 앞 유리문에 흔들거리고 있었다. 잔뜩 찌푸린 모습으로 따라오던 가족들도 예기치 않은 이 상황에 잘 됐다는 반가움보다 놀라운 표정이 역력했다.
  “아버지. 다음에 또 여행 갔을 때 한국 식당이 있으면 꼭 같이 가겠습니다.”
  이번 여행을 제안한 딸 미송이가 묘한 위로의 말과 함께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유상은 체념하고 가족과 삿포로 향토 요리 전문점이라는 식당에 들어갔다. 식당 안은 온통 삿포로산 음식과 재료로 넘쳐나고 있었다. 라면에서 해산물, 맥주까지 삿포로였다. 유상도 가족들과 삿포로라면 정식과 삿포로 맥주를 주문해서 같이 먹고 있을 때, 휴대폰 벨이 울렸다. 유상은 휴대폰 뚜껑을 열었다. 한국에서 온 전화인데 낯선 번호였다.
  “여보세요. 배유상입니다.”
  “배유상 씨, 오래간만입니다. 저, 이상호예요. 그동안 별고 없으시죠?”
  “아이구, 선생님. 정말 오래간만입니다. 어쩐 일이십니까?”
  유상은 주위를 살펴보았다. 5시쯤을 지나고 있었다. 이른 저녁이라 손님은 우리와 다른 한 곳밖에 없어서 그냥 앉아서 전화를 받기로 했다.
  “지금 전화 괜찮으세요?”
  “네. 괜찮습니다.”
  “내가 배 선생님한테 부탁이 하나 있어서 그래요. 내가 지난 2월에 오사카 갔을 때에 김재동 선생님한테 우리 누이동생에게 송금 부탁한다고 일본 돈 십만 엔을 드렸어요. 그런데 지금까지 소식이 없는데 한번 알아봐 주세요. 직접 전화하고 싶지만 재촉하는 것 같아서 미안해서 그래요.”
  “선생님. 누이동생이라면 북한 원산에 계신 동생이십니까?”
  유상은 주위를 둘러보면서 조용히 말했다.
  “그래요. 알아봐 주시겠어요?
  “네. 잘 알았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김재동 선생님한테 확인하고 바로 연락 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지금 가족들과 홋카이도에 여행 왔기 때문에 오사카 돌아가서 연락하겠습니다.”
  “아, 그래요? 여행 중에 죄송해요. 즐거운 여행 되기 바라고 부탁해요. 그럼 전화 끊을게요.”
  “누구세요?”
  휴대폰 뚜껑을 닫고 호주머니에 넣을 때 아내가 물었다.
  “지난 2월에 김재동 선생님과 서울에서 오신 소설가와 식사했다는 말 기억 나? 그때 오셨던 이상호 선생님이었어.”
  “무슨 일로 전화 왔어요?”
  “응, 김재동 선생님께 말 좀 전해 달라는 얘기였어.”
  “바로 김재동 선생님한테 전화하면 되는데 왜 유상 씨한테?”
  “책 때문에 몇 차례 전화해도 안 나와서 나한테 전해 달랬어.”
  유상은 적당히 둘러댔지만 아내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한국 말 잘하십니다. 어디서 오셨습니까?”
  주인이 새로운 손님에게 주문을 받고 음식을 갖다 주고 오다가 유상에게 물었다. 유상의 한국 말 전화를 옆에서 흘러 듣고 있었던 것 같았다.
  “한국 말 아십니까?”
  유상이 깜짝 놀라서 되물었다.”
  “네. 조금 압니다.”
  주인이 웃으면서 말했다. 건장한 체구에 윤곽이 뚜렷한 얼굴로 40대 중반의 호감 가는 인상이었다.
  “저는 한국 출신이고 오사카에 살고 있습니다. 어제 가족들과 홋카이도에 여행 왔다가 이곳에 왔습니다. 내일 오사카로 돌아갑니다.”
  “그렇습니까. 우리 식당에 와주셔서 고맙습니다. 저는 초등학교와 중학교는 조선학교를 나왔습니다. 그래서 우리말을 좀 합니다.”
  또렷한 그의 발음이지만 조총련 특유의 억양이 강하게 배여 있었다.
  “이렇게 동포가 하는 식당에서 만나서 반갑습니다. 배유상이라고 합니다. 저의 아내와 가족입니다.”
  유상은 손을 내밀고 악수를 청했다. 그도 재빨리 손을 내밀고 굳게 잡았다. 그리고 우리말을 인사 정도밖에 모르는 가족에게 주고받은 대화를 일본 말로 말하고 나서 주인을 소개했다. 가족 모두가 식사를 하다 말고 머리를 숙이고 인사를 했다. 주인은 카운터에 있는 식당 명함을 갖고 왔다.
  “본명은 장승지인데, 일본 이름은 하세카와 마사루라고 합니다.”
  삿포로 식당이라는 소박한 이름의 식당 명함에 쓰여 있는 일본명 이름 밑에 장승지라고 한자를 써서 주면서 주인이 말했다.
  “죄송합니다. 저는 명함을 잊어버리고 갖고 오지 못했습니다.”
  유상은 메모지를 꺼내서 이름과 주소, 전화번호를 적어서 주면서 말을 이었다.
  “이렇게 만나서 인사를 나누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사실은 가까운 곳에 있는 아리랑 식당에 가고 싶었는데 쉬는 날이었습니다. 그런데 삿포로 음식을 전문으로 파는 동포 분을 만나니 정말 반갑습니다.”
  유상은 가족들과 나눴던 말들을 일본어로 들려주면서 말했다.
  “그랬었습니까. 아리랑 식당은 저의 형님이 하는 식당입니다.”
  “네? 형님이 하신다고요?”
  놀란 것은 유상만이 아니고 옆에서 듣고 있던 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저의 부모가 불고기 전문으로 하는 아리랑 식당을 하다가 형님한테 물려주셨고, 저는 삿포로 일본 음식을 전문으로 하는 식당을 하게 되었습니다.”
  부모님 고향은 경상북도 의성군이라고 했다. 일제시대에 고향에서 결혼을 하고 같이 일본으로 건너와서 탄광에서 일하다가 해방 후에도 계속 일본에 살았다. 여러 직업을 전전하다가 어머니 요리 솜씨가 좋아서 한국 음식 식당을 하다가 불고기 전문 식당으로 바꿔서 40년이 지났다고 했다.
  조총련 활동은 적극적으로 하지 않았지만 동포들과 교류를 위해서 가입했다가 장승지가 고등학교 졸업하는 해에 국적을 한국으로 바꾸었다, 약 30년 전이지만 지금도 조총련 동포들과 사이좋게 지낸다고 했다. 이념으로 조총련을 택한 것도 아니고 이웃들이 조총련이니까 같이 활동했는데 고향에 가기 위해서 조총련을 나왔다고 덧붙였다.
  “다른 곳에 체인점으로 아리랑 식당을 할까 그러다가 저는 일본 요리를 전문으로 하고 싶어서 일본 요리학교에 들어가서 일본 요리를 배우고 여기저기서 수련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 가게를 열었습니다. 아리랑 식당 체인점을 했으면 형님 가게와 가까운 곳에서 못했을 텐데 일본 음식점이니까 가능했습니다. 손님들도 요리가 다르니까 아리랑도 가고 여기도 번갈아 옵니다.”
  그는 지나온 삶의 단편들을 곧게 뻗은 철로처럼 시원스럽게 들려주었다.
  “전문 요리의 일본 식당을 하겠다고 결심한 발상이 아주 신선합니다. 그리고 부모님 고향에는 자주 가십니까?”
  “네. 부모님과 함께 자주 갔었습니다. 지금은 80대 고령이시니까 1년에 한 번 성묘를 위해서 가고 있습니다.”
  저녁 시간이어서 손님들이 점점 불어났다. 식사도 마치고 더 이상 이야기를 나눌 수 없었다.
  “잘 먹었습니다. 여러 이야기 즐겁게 들었습니다. 언제 기회가 있으면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네. 고맙습니다. 저도 오사카에서 오신 동포를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즐거운 여행 되시기 바랍니다.”
  “아버지. 우리 말대로 삿포로 전문 식당에 들어가서 잘됐지요. 아버지 소원대로 동포를 만나서 얘기도 했으니까. 한국 식당이니까 한국 사람이고 일본 식당이니까 일본 사람이라는 고정관념도 버려야 하겠어요.”
  딸이 자기네 덕분이라고 공치사했지만 사실이었다.
  “설마 아리랑 식당과 형제일 줄이야. 아주 사이 좋은 가족들인가 봐요.”
  아내가 잔잔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응, 나도 같은 생각이야.”
  주홍글자와 같이 재일동포들에게 숙명처럼 덧씌워진 삶의 고통스러운 흔적을 그에게는 찾을 수 없었다. 그러한 삶이 단층과 같이 쌓이면 쌓일수록 재일동포의 삶이 훈장처럼 빛나는데, 삿포로 번화가의 상점가에서 식당을 경영하는 그의 모습에는 그와는 달리 여유로움이 넘치고 있었다.

  한국에서 온 한 통의 전화로 예기치 않았던 만남을 낯선 홋카이도에 남기고 오사카로 돌아온 유상은 바로 김재동 시인에게 전화를 했다.
  “아, 그 건인가? 실은 나도 연락이 없어서 마음에 걸리고 있었지만 다시 알아보겠네.”
  김재동 시인의 말이 무거웠다.
  배유상은 이상호 소설가를 서울과 오사카에서 세 번 만났었다.
  1996년 서울에서 열린 ‘한민족문학인대회’ 때 만난 것이 처음이었다. 일본, 미국, 러시아, 중국 등 세계 17개국에 흩어져 사는 한민족 문학인들 약 100여 명과 국내 문인 약 1,000여 명이 10월에 5박 6일 일정으로 한데 모였다. 일본에서는 21명이 참가했는데 오사카 지역 추천은 배유상이 담당하여 김재동 시인을 추천했다. 도쿄에 사는 일본 담당자인 선배 시인으로부터 김재동 시인은 조선적이며 언제나 한국에 비판적인 그는 참가하지도 않을 텐데 왜 추천했느냐고 항의성 문의도 왔었다. 배유상은 비록 참가하지 않더라도 한국 문학의 정보를 알려주는 좋은 기회여서 추천했다고 했다.
  배유상은 약 20여 년 전에 오사카문학학교에 1년간 다닐 때부터 김재동 시인을 알았다. 그때 김재동 시인은 문학학교에서 시 창작의 강사였는데, 같은 재일 제주인으로서 가깝게 지냈었다. 이러한 관계도 있어서 어떤 망설임도 없이 조선적이고 한국에 대해 비판적이었지만 추천을 했었다.
  서울 한민족문학인대회에서 김재동 시인 앞으로 초청장이 왔다. 초청장을 받은 김재동 시인은 깜짝 놀랐다. 도쿄에 사는 선배 소설가에게 물어도 자기는 모른다고 했다. 이때에 영사관에서 배유상한테 연락이 왔다. 초청장을 한국에서 보냈다는데, 추천한 배 선생이 김재동 시인에게 연락해서 만나게 해달라는 요청이었다. 배유상은 추천은 했지만 설마 한국에서 초청장이 올 줄은 전혀 예상도 못했기 때문에, 김재동 시인에게도 말하지 않았었다. 어떻게 해서 자기한테 초청장이 오게 됐는지 김재동 시인은 전혀 몰라서 궁금했는데, 배유상의 연락으로 알게 되었다.
  김재동 시인은 원산 출신으로 어머니 고향 제주에서 살다가 4・3사건 때 일본으로 건너왔다. 그후 반세기 가까운 세월이 흘러서 나이 70이 다되는데도 한번도 한국에 간 적이 없었다. 김재동 시인과 만난 영사관 담당자는 그동안의 사정을 이해하고 임시 여권을 발급했다.
  그래서 약 50년 만의 귀국 속에 한민족문학인대회에 참가하게 되었다. 이 대회에서 같은 원산 출신인 이상호 소설가와 알게 되어서, 세 살 아래인 이상호 소설가와 형님, 아우 하면서 의기투합했다. 대회 기간 중에 이상호 소설가는 김재동 시인을 별장에까지 초대했었는데 배유상도 같이 갔었고, 일본에서 간 일행만 모인 간담회 자리에도 이상호 소설가는 참석했었다.
  그후 반년이 지난 2월에 이상호 소설가는 도쿄 출판사에 자신이 쓴 작품 번역 출판을 협의하러 왔다가 오사카에 왔었다. 이때에 배유상은 김재동 시인의 연락을 받고 저녁 식사를 같이 했었다. 그때에 배유상은 몰랐었지만 이상호 소설가가 원산에 사는 누이동생에게 일화 십만 엔을 보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김재동 시인은 조총련 사람들과 밀접한 교류를 나누는 장준식 교수를 소개하고 같이 식사하면서, 그 자리에서 장준식 교수에게 직접 그 돈을 전했다. 이상호 소설가는 더 많은 금액을 전하려고 했지만 처음이니까 주위가 만류해서 십만 엔만 받았다고 했다. 장 교수는 3 월에 평양에 가는 아는 사람에게 전했는데 그 사람은 다시 평양에 사는 아는 사람한테 돈을 맡기고 부탁했고, 아직까지 연락이 없다는 것이었다.
  장준식 교수는 교토의 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데 재일동포 문화 행사 모임에서 김재동 시인으로부터 소개를 받고 배유상도 알고 있었다.
  “이상호 씨는 나에게 묻는 것이 거북해서 자네한테 연락한 것 같은데 아직 평양에서 연락이 없다고 전해 주게.”
  “네. 잘 알았습니다. 그럼 제가 이상호 선생님께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배유상은 홋카이도에서 전화 받은 3일 후에 이상호 소설가에게 전화를 했다.
  “여보세요. 오사카 사는 배유상이라고 합니다. 이상호 선생님 댁이십니까?”
  “네. 그렇습니다. 선생님 이야기 남편으로부터 들어서 잘 알고 있습니다. 반갑습니다. 전화 바꾸겠습니다.”
  “여보세요. 배유상입니다. 김재동 선생님께 전화해서 잘 들었습니다.”
  배유상은 김재동 시인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자세히 전했다.
  “본인이 가서 직접 전하지 못하고 인편에 인편을 거치고 또 동생 분이 원산에 살고 계시기 때문에 늦어지는 것 같습니다.”
  “그래요? 사실 북한 가족에게 송금하는 것이 아주 쉬울 때도 있지만 무척 어려울 때도 있어서 배달 사고가 나기도 합니다. 중국에 아는 분을 통해서 보냈을 때는 쉽게 전달이 됐는데, 미국에 사는 동포에게 부탁했을 때는 1년이 지나도 동생한테 전하지 못해서 해결이 안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일본이면 수월하지 않을까 해서 김재동 선생님께 부탁을 했었지요.”
  모처럼 북한에 사는 동생한테 보낸 돈이 제대로 전달이 안 돼서 걱정하는 이상호 소설가가 안타까웠다. 다른 곳이면 바로 당사자들에게 전화를 하여 확인할 수 있지만 블랙홀 같은 북한이고 보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게 아주 어렵고 부탁하기 곤란한 일이어서 김재동 선생님께 말씀 드렸는데 많은 부담을 주고 말았네요, 김재동 선생님한테 죄송하다는 말과 기다린다는 말씀 잘 전해 주세요.”
  동생한테 갈 돈이 크고 작은 금액이든 간에 제대로 안 가서, 설령 배달 사고가 나더라도 어느 누구에게 잘잘못을 따질 수가 없었다. 비공식으로 부탁한 그러한 어려움을 들어준 것만도 고마운 일이었다. 그게 잘 안 되었다고 어떻게 나무랄 수 있단 말인가. 좋은 소식이 아니어서 전하는 배유상도 우울했는데, 힘 없는 이상호 소설가의 주눅들은 말이 배유상 귓가에서 떠나지 않고 맴돌고 있었다.
  “네.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그런데 선생님, 틀림없다는 보장은 없지만 동생에게 보내는 송금을 제가 한번 주선해 보겠습니다.”
  배유상은 자신도 모르게 불쑥 꺼낸 자신의 말에 흠칫 놀랐다.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말이었다.
  “예? 배 선생이 해주신다는 말씀입니까?”
  배유상 못지않게 이상호 소설가도 놀랐다.
  “네, 제가 아는 사람을 통해서 노력해 보겠습니다.”
  “그렇게 해주신다면 아주 고마운 일인데 부탁해도 괜찮을까요?”
  반신반의 속에 그 목소리는 아까와는 달리 생기가 넘쳤다.
  “그럼 부탁하겠습니다. 그런데 돈을 보내 드려야 할텐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많은 금액이 아니면 제가 부담했다가 나중에 선생님께 받겠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빠른 시일 내에 전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금액은 전과 다름없이 일화 십만 엔을 부탁하겠습니다.”
  “그러면 동생 댁 주소 등 인적사항을 적고 팩스로 보내 주시기 바랍니다.”
  배유상은 팩스 번호를 알려주고 전화를 끊었다. 북한 원산에 사는 누이동생의 주소와 이름이 적힌 내용이 오 분도 걸리지 않고 총알처럼 들어왔다. 사전에 준비하고 보관해 두었던 자료인 것 같다고 배유상은 생각했다.

  배유상은 김재동 시인에게 이상호 소설가와 전화로 나눈 이야기를 죄송하다는 말도 빠트리지 않고 전했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누이동생한테 보낼 수 있도록 하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괜히 성과는 없고 소문만 무성할 것 같았다. 이상호 소설가에게 자신도 모르게 큰소리는 쳤지만 누구에게 어떻게 부탁하면 좋을지 솔직히 막막했다. 조선적을 가진 사람이 북한에 가는 인편에 북한에 있는 일가 친척들에게 돈을 부탁해서 보냈다는 이야기나 여러 물건도 우편으로 보내고 있다는 말은 단편적으로 듣고 있었지만 송금에 대해서는 자세히 말하는 것을 꺼리고 있었다.
  우선 배유상은 아는 사람 중에 조선적을 가진 사람에게 송금할 방법을 들어보았다. 자기들도 그런 이야기는 들은 적이 있지만 실제로 해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배유상은 조총련 산하 단체 ‘재일본조선문학예술가동맹위원회’ 문학부 모임에 가서 부탁했다. 문학부에 속한 오사카 맹원들은 한 달에 한두 번 일본의 공공회관을 빌려서 작품 합평회를 열고 있었다. 배유상은 일본 《마이니치신문》에 이 모임을 소개한 기사를 읽고 참가했었다. 참가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우리말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오사카에서 우리말 문학 모임은 어디에도 없었다.
  한국어로 소설을 쓰고 있는 배유상은 처음에는 호기심에서 찾아갔지만, 그들에게도 한국에서 교육을 받은 한글 세대인 배유상의 존재는 신선했다.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조총련 학교를 다니고 조선말을 능숙하게 하지만 일본이라는 외국에서 배운 조선어는 한계가 있었다. 물론 남북한의 문법과 표기법은 뚜렷하게 다르지만 단어의 의미 등은 거의 같기 때문에 작품평과 더불어 새로운 우리말 공부 시간이 되기도 했다. 조총련 산하 단체의 문학부라는 조직이어서 마음 한구석에는 걸림돌이 되는 부분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우리말 작품을 읽고 평을 하면 그들은 진지한 자세로 듣고 있었다. 그들의 작품은 모두 시였지만 수준은 어른이 읽는 동시와 같은 내용이었다. 이러한 평을 솔직히 말하면 생활 용어를 일본어로 사용하는 자신들과 태어났을 때부터 한국어를 사용했던 배유상 씨와는 다르다고 했다. 그러면서 작품에 차이가 있는 것은 당연하다고 볼멘 합창과 같은 항의도 종종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작품이 부당하게 일방적으로 혹평을 받고 있다면서 작품과 자존심을 동시에 묶어서 불만을 나타냈다. 배유상은 그러한 반론에 물러서지 않았다. 그러면 여러분이 쓴 작품을 여러분이 생활 용어로 사용하는 일본어로 번역해 보면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러한 갈등 속에서도 개인적으로 팩스나 이메일로 작품을 읽어서 평가해 달라는 사람도 있어서 배유상을 신뢰하는 사람도 많았다. 합평회의 또 하나의 즐거움은 단골 이자카야(선술집)에 가서 마시는 뒤풀이 시간이었다. 저녁 7시부터 시작해서 밤 9시 전에 합평회를 마치고 마지막 지하철이나 전철이 끊길 때까지 화제는 럭비공처럼 사방으로 튀었다. 교사, 미용사, 요리사, 은행원, 회사원, 트럭 운전수 등 다양한 직업인들의 모임이어서 더욱 그랬다.
  “오늘은 여러분에게 부탁이 있습니다.”
  건배 제창을 마치고 8명이 모인 자리에서 배유상이 둘러보면서 정색을 하고 말했다.
  “드문 일이네요. 배 선생님이 진지한 얼굴로 부탁이 있다니?”
  문학부장을 맡고 있는 차윤영 씨가 미소를 띠면서 말했다. 그는 조총련 초등학교 교사인데 배유상보다 여섯 살 아래인 40대 초반이었다.
  “한국에 있는 분으로부터 북한에 살고 있는 누이동생에게 송금 의뢰를 받았습니다. 그 돈을 전해 줄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우리들 중에 누가 가는 사람이 있으면 갖고 가서 바로 전해 줄 수 있지만 요즘은 가는 사람이 없어서 좀 힘들 것 같습니다. 공화국 어디 사시는 분입니까?”
  배유상과 동연배인 조총련 중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다가 정년 퇴직한 한문희 씨가 말했다. 그녀는 조총련 오사카 문학부를 이끄는 리더이면서 가끔 배유상에게 작품평 해달라고 팩스나 이메일로 작품을 보내 오는 사람이었다.
  “원산에 살고 있는 분입니다.”
  배유상은 서울 사는 이상호 작가 누이동생이라고 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이상호 소설가에 대해서는 일본 동포 사회라기보다 조총련에서 문학 활동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반체제 작가로 잘 알려져 있었다. 배유상은 그들과 가끔 이러한 자리에서 그에 대해서 얘기를 나눈 적도 있었다.
  “원산이라면 만경봉호가 정박하는 항구이니까 가는 사람이 있으면 전하기 쉽지만 요즘은 단체 수학여행 가는 것도 줄어 들어서 우리 중에 가는 사람이 없으면 좀 힘들 것 같습니다.”
  한문희 씨가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다른 사람들의 의견도 마찬가지였다. 그러고 보니 배유상이 이 모임에 참석한 후에 그들 속에서 북한에 갔다 온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북한에 인편으로 송금하는 것을 가볍게 생각은 안 했었지만 주위에서 북한을 가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사실에 약간 놀랐다. 이러다가 송금을 못 할지 모른다는 불안감도 쌓이기 시작했다. 원산 누이동생에게 송금하겠다고 선뜻 나선 자신의 경솔함보다 인편으로 보내는 이러한 예가 드문 사실로 인한 어려움이 짜증스러웠다. 한국에도 종종 인편으로 돈을 보내는 경우가 있는데 2,3일이면 가는 사람을 만나서 얼마든지 보낼 수 있었다.

  며칠 간 어떻게 할까 생각하다가 배유상은 이쿠노 조총련 사무실에 전화를 걸었다. 한국에 사는 사람으로부터 북한에 있는 형제에게 송금 의뢰를 받았는데 의논하고 싶다고 했다. 전화 대응을 한 위원장의 애매모호한 응답에 불안감을 느끼면서 처음으로 조총련 사무실에 가서 만났다.
  “돈을 갖고 가는 것은 잘 아는 사람에게 맡겨야 하는데 공화국에 가는 사람들 중에 그러한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사정은 이해하지만 지금 사정은 그렇습니다. 언제 그러한 사람이 있으면 연락 드리겠습니다.”
  위원장의 말에 이해는 하지만 사무적인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언제까지 기다리란 말인가. 배유상은 그럼 연락 기다리겠으며, 만나 주셔서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나왔다.
  그는 정말 초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쿠노 조총련 사무실은 두 군데 있는데 재일동포가 가장 밀집된 여기에서도 어렵다고 하니 절망적이었다.
  배유상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알아보겠다는 협조성보다 들어서 흘려버릴 마지못한 안타까움들이 역력했다.
  이렇게 다시 며칠이 지났다. 배유상은 이것이 어쩌면 마지막 카드가 될는지 모른다면서 수화기 번호를 눌렀다.
  “여보세오. 조총련 오사카 본부입니까?”
  배유상은 자신도 모르게 약간 긴장되었다.
  “네, 그렇습니다.”
  젊은 남자 목소리였다.
  “수고하십니다. 저는 일본에 살고 있는 재일동포입니다. 한국에서 아는 분이 북한에 있는 형제에게 송금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담당자님이 계시면 바꿔 주십시오.”
  “네,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잠시 후,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전화 바꿨습니다.”
  굵은 허스키 목소리였다. 배유상은 똑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그렇습니까. 송금액은 얼마나 됩니까?”
  “개인으로 보내는 생활비이니까 그리 많지 않은 금액입니다. 일화 십만 엔입니다.”
  “많지 않으시다니, 적지 않은 금액입니다. 보낼 수 있습니다.”
  상대방은 질질 끌지 않고 간단한 일상처럼 시원스럽게 말했다. 배유상은 전신이 후끈 달아올랐다. 천만대군 아니, 구세주를 만난 것 같았다.
  “보낼 수 있다니 반갑고 고맙습니다. 저는 배유상이라고 합니다. 제가 돈과 받을 사람의 주소와 인적사항을 모두 갖고 있습니다. 오늘이라도 당장 뵙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실례지만 어디 살고 계십니까?”
  상대방이 침착하게 물었다.
  “이쿠노에 살고 있습니다.”
  “저도 이쿠노에 살고 있는데 오늘은 회의가 있습니다. 그럼 내일 저녁 이쿠노에서 만나기로 하면 어떻겠습니까?”
  “좋습니다. 장소를 말씀해 주시면 내일 찾아가겠습니다.”
  “혹시 ‘삼천리’라는 카페 아십니까? 아신다면 내일 저녁 6시에 그곳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저는 현명준이라고 합니다.”
  그는 어떤 망설임도 없이 정해진 예정 사항처럼 말했다. 삼천리 카페라면 조총련 사람이 운영하는데 크고 조용한 분위기의 가게여서 배유상도 몇 번인가 가본 적이 있었다.
  “삼천리 카페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내일 저녁 6시에 그곳에서 뵙겠습니다. 저는 검은 안경을 끼고 있고 손가방을 들고 가겠습니다.”

  다음 날, 배유상은 5시 50분에 삼천리 카페에 갔다. 사방을 두리번거리는데 안자리에서 손을 드는 사람이 있었다. 배유상은 그 앞으로 다가갔다.
  “어제 전화를 했던 배유상입니다.”
  배유상은 머리를 숙이고 선 채로 인사했다.
  “현명준입니다.”
  일어섰던 현명준도 인사를 하면서 명함을 꺼냈다.
  “저는 동포가 경영하는 회사에 다니고 있습니다.”
  배유상도 가방을 의자에 두고 명함을 꺼내서 서로 교환하면서 자리에 앉았다. 배유상은 명함을 들여다보았다. 현명준은 조총련 오사카 본부 부위원장이었다. 종업원이 물컵을 갖고 왔다. 둘은 커피를 주문했다.
  “바쁘신데 이렇게 만나 주셔서 반갑습니다. 돈을 송금할 수 있다니 더욱 기뻤습니다.”
  배유상은 앉은 채 다시 머리를 숙였다.
  “저도 만나 뵙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그런데 배 선생님은 운이 참 좋습니다. 일 주일 후에 만경봉호가 일본 니가다항에서 원산으로 갑니다. 그 배에 우리 직원이 가는데 그 직원에게 갖고 가도록 하겠습니다.”
  “예? 이번 출항하는 만경봉호 편에 부칠 수 있다니 그게 사실입니까?”
  현명준의 자신에 넘치는 말과 미소가 갑자기 열풍이 되어 배유상의 전신을 감싸고 맴돌았다. 이렇게 간단히 해결되다니 믿어지지 않았다.
  만경봉호가 일본과 북한을 왕래한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북한과 일본 사이가 악화될 때면 언제나 운항을 중지해야 한다고 인질처럼 거론되는 만경봉호였다. 그럴 때마다 혐오감을 느꼈던 그 만경봉호와 자신의 거리감이 이렇게 가까워질 줄은 지금 이 순간까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네, 이번에 가는 만경봉호로 갖고 가서 틀림없이 전달하고 올 것입니다.”
  그는 여유로운 미소 속에 다시 강조하고 있었다. 종업원이 주문한 커피를 갖고 왔다.
  배유상은 가방에서 파일을 꺼냈다. 봉투에 든 돈 십만 엔과 받을 사람의 이름과 주소가 적힌 편지지가 들어 있었다.
  “원산에 있는 이분이 받을 사람이고, 이곳이 주소입니다.”
  “네, 잘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보내는 사람의 주소와 이름이 필요합니다. 한국 주소는 필요 없고 배 선생님의 주소와 이름이 좋습니다.”
  “네.”
  배유상은 자신의 주소와 이름을 적은 것과 원산 주소를 적은 것을 현명준에게 주었다.
  “죄송합니다. 보내는 사람과 받는 사람의 관계도 적어야 합니다.”
  배유상이 쓴 주소를 확인하고 현명준이 말했다.
  “아, 그렇습니까.”
  배유상은 관계를 지인이라고 썼다.
  “지인이면 좀 곤란합니다. 아무리 지인이라 할지라도 십만 엔이면 큰돈인데 선뜻 내놓지 못할 금액입니다. 친척이라고 쓰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형제라면 그렇고 사촌 형제라면 어떻습니까?”
  배유상은 지인을 지우고 사촌 형제라고 썼다. 배유상은 나오는 웃음을 참았다. 이상호 가족과 갑자기 사촌 형제가 되는 순간이었다.
  “이것은 송금할 십만 엔입니다.”
  배유상이 돈 봉투를 현명준 씨 앞에 내밀었다. 현명준은 봉투 속의 돈을 꺼내서 세기 시작했다.
  “십만 엔 맞습니다. 잘 받았습니다.”
  현명준은 말을 마치고 명함 한 장을 꺼냈다. 그는 명함 뒤에다 ‘배유상 씨로부터 송금용으로 십만 엔 잘 받았습니다.’라고 적었다. 그리고 오늘 날짜를 기입하고 배유상에게 주면서 말했다.
  “이것은 십만 엔 수령증으로 대신하겠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인편으로 돈을 송금할 때에는 신청서와 금액을 써서 공화국에 먼저 신청을 해야 합니다. 남조선처럼 마음대로 만나지 못합니다. 그래서 만날 날짜를 정해서 지정한 장소에서 돈을 전합니다.”
  배유상은 수령증을 받으며 그의 익숙한 행동과 모든 것이 처음 듣는 말이어서 호기심 가득한 시선으로 현명준을 쳐다보았다.
  “만경봉호는 원산에서 약 10일간 정박했다가 다시 니가다로 옵니다. 그때에 또 연락 드리는 것이 인편으로 돈을 부쳤을 때의 관례입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까지 제가 전혀 몰랐던 일들이어서 정말 놀랐습니다. 이렇게 빨리 일사천리로 해결될 줄은 몰랐습니다. 그런데 수수료는 얼마입니까?”
  배유상이 걱정스럽게 조용히 물었다.
  “수수료는 없습니다.”
  현명준이 배시시 웃으면서 말했다.
  “이렇게 어려운 일을 해주시는데 수수료가 없다니 그게 사실입니까?”
  배유상은 놀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공화국 인민을 위해서 보내는데 무슨 수수료가 필요합니까? 커다란 물건도 아니고 봉투 한 장 전하는데 말입니다.”
  현명준의 얼굴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은 채 맴돌고 있었다.
  “그게 정말 사실이라면 제가 그 보답을 무엇으로 갚아야 하겠습니까?”
  배유상은 은근히 불안스러웠다.
  “아무것도 필요없으며 그런 걱정 마시고 저의 연락만 기다리시면 됩니다.”
  그러면서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잘 알았습니다. 그럼 지금 나가서 같이 식사라도 하시면 어떻습니까?”
  배유상은 계산 명세서를 갖고 일어서면서 말했다. 여러 번 사양하는 현명준을 데리고 가까운 한국 불고기집으로 갔다.
  배유상은 불고기와 맥주를 주문하고 나서 지금까지 여러 군데 부탁해도 안 됐기 때문에 큰 결심을 하고 조총련 본부에 전화한 것을 말했다. 그는 배유상이가 부탁했던 모든 사람들을 다 알고 있었다. 그는 본적지가 경상북도인 2세였다. 조총련 중학교 교사였는데 30대부터 조총련 조직에서 일을 했고 나이가 48세라면서 문학부 맹원들은 거의 자기 제자라고 했다.
  그들은 공화국에 가는 사람 중에 아는 사람이 설령 있다고 하더라도 소개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했다. 몇 사람의 손을 거쳐야 해서 그 불편과 도중에 부탁한 돈이 제대로 전달이 안 되었을 때의 문제의 심각성을 알기 때문에 자기도 그랬을 것이라고 했다. 이러한 일은 극히 드물지만 가끔 일어난다고 했다. 그렇지만 조총련 본부 차원에서는 다르다고 했다.
  “이러한 것을 본부가 외면하면 누가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배 선생님 겁도 없이 조총련 본부에 전화 잘했습니다. 하하하.”
  과장이 정제된 솔직한 그의 말에는 자신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배유상은 현명준과 헤어진 후, 달성감에 젖어 있었다. 바로 이상호 소설가에게 연락하고 싶은 충동이 날마다 자신의 감정을 유혹했지만 간신히 억제했다. 처음에는 난감하기 짝이 없었던 일이 갑자기 쉽게 풀렸지만 다시 현명준 부위원장으로부터 연락이 오기까지는 예측 불가능한 일이었다. 들뜬 마음에서 바로 전했다가 제대로 전할 수 없는 문제가 일어났을 때의 낭패감의 충격이 두려웠다. 배유상은 캘린더에 적힌 날짜와 날마다 치열한 눈싸움을 벌이면서 현명준의 연락을 기다렸다.

  “배유상 선생님이십니까? 현명준입니다.”
  “네! 현명준 부위원장님. 배유상입니다!”
  “저의 직원이 공화국에 갔다 왔습니다. 부탁받은 돈은 잘 전하고 왔습니다.”
  현명준 부위원장과 만난 후로 꼭 한 달 만이었다. 잘 전했다는 말에 그동안 팽팽했던 긴장감이 고무줄처럼 맥없이 끊어졌다.
  “지난번 만났던 삼천리에서 내일 저녁 만나고 싶습니다. 시간 괜찮습니까?”
  “네, 괜찮습니다.”
  “그럼 내일 저녁 6시에 삼천리에서 기다리겠습니다.”
  “네. 잘 알았습니다. 부위원장님 정말 고맙습니다.”
  배유상은 송수화기에 공손히 머리를 숙이고 전화를 끊었다.
  다음 날 저녁, 두 사람은 삼천리에서 만나서 반갑게 악수를 했다.
  “우리 직원 동무가 임무를 잘 수행해서 왔습니다. 이것이 그 영수증이고 증거입니다.”
  서로 커피를 주문하고 나서 현명준 부위원장이 가방에서 봉투를 꺼내고 배유상에게 주었다.
  “열어보아도 괜찮습니까?”
  “괜찮습니다.”
  현명준 부위원장이 열어보라고 손짓을 했다. 배유상은 조심히 봉투 속에 들어 있는 것을 꺼냈다. 사진 3장과 영수증이 들어 있었다.
  “사진은 돈 받은 누이동생 본인 사진 한 장과 그분의 아들과 찍은 사진 한 장, 그리고 세 사람이 찍은 사진은 돈을 전한 우리 직원 동무입니다.”
  배유상은 현명준 부위원장의 설명을 들으면서 확인했다. 영수증은 조그마한 메모지에 연월일을 적고 십만 엔 잘 받았습니다. 이상호 누이동생 이순미라고 적혀 있었다. 배유상은 사진과 영수증을 다시 봉투 속에 넣었다.
  배유상은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뭉클했다. 부탁받은 일이 원만히 잘 되었다는 안도감의 감정만이 아니었다. 왜 이 사람들은 이렇게 쉽게 만나고 오는데 그토록 만나고 싶은 오빠는 송금하는 것까지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돌고 돌아서, 겨우 전하게 되었는지 그 부조리의 감상이 동시에 일어났다.
  “일반적으로 인편으로 돈을 부쳤을 때는 이렇게 본인 자필의 영수증과 사진을 찍고 와서 의뢰인에게 전합니다. 그게 가장 확실한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현명준 부위원장이 웃으면서 말했다.
  “정말 무엇이라고 감사 말씀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 사진과 영수증을 바로 한국으로 보내겠습니다.”
  배유상은 갖고 온 선물을 현명준 부위원장에게 주고 나서, 오늘도 식사를 사양하는 그를 데리고 한국 식당에 갔다. 식사를 마친 배유상은 귀가 도중에 편의점에 들러서 사진과 영수증을 복사했다. 밤 9시를 넘고 있었다. 그는 이상호 소설가에게 사진과 팩스를 보내고 나서 전화를 걸었다.
  “아니! 배 선생, 이거 어떻게 된 영문입니까? 지금 누이동생 사진과 영수증을 보았습니다.”
  이상호 소설가가 약간 흥분된 어조로 물었다.
  “네. 그렇게 되었습니다.”
  배유상은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자세히 설명했다.
  “그래서 저는 갑자기 북한의 인적사항에서는 선생님의 사촌동생이 되었습니다. 북한 덕분으로 선생님이 형님이 되었습니다. 선생님. 영광입니다.”
  “아, 정말 배 선생과 앞으로 그렇게 해요, 나도 좋은 사촌 두어서 기쁘네요.”
  두 사람은 서로 크게 웃다가 이상호 소설가가 말을 이었다.
  “그래도 그렇지, 배 형이 그동안 연락 한 번 없기에 무척 어려운 줄 알았는데 그 속에서도 큰일을 했네요. 정말 고맙습니다.”
  배 선생이라는 호칭이 가까운 사이를 나타내는 배 형으로 바뀌면서 이상호 소설가의 목소리는 기쁨에 넘치고 있었다.
  “선생님께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김재동 선생님께는 당분간 이 말은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김재동 선생님께 부탁한 송금 건이 아직 해결 안 되었으니 마음에 걸려서 그렇습니다.”
  “그건 걱정 마세요. 일부러 김재동 선생님한테 얘기 안 해도 좋을 것 같으니 다음번에 얘기하지요. 그런데 돈을 갚아야 하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어요?”
  “네, 인편이나 아니면 언제 만날 기회가 있을 때 주시면 됩니다. 오늘 빨리 전한다고 팩스로 보냈지만 우편으로 사진과 영수증을 다시 보내겠습니다.”
  “네. 그렇게 하겠어요. 배 형, 그럼 우편물 기다리겠습니다. 정말 고마워요!”
  “네. 저도 기쁩니다. 그럼 전화 끊겠습니다.”
  배유상은 송수화기 저편에서 들려오는 이상호 소설가의 반가움에 들뜬 여운을 음미하면서 자신이 새삼 대견스러웠다.
  다음 날, 배유상은 사진과 영수증 원본을 등기우편으로 이상호 소설가 앞으로 발송하고 복사한 것도 따로 파일 속에 넣어서 보관했다.
  그 후 약 10일이 지나서 이상호 소설가는 서울에서 온 인편에 배유상이 지불했던 십만 엔을 보내왔다. 그리고 두 달이 지나서 장준식 교수가 평양 가는 인편에 보내서 표류하던 돈을 누이 동생이 받았다는 전화가 이상호 소설가로부터 왔었다. 누이동생이 겨우 허락을 받고 평양에 가서 받았다면서 그 비용도 무시 못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리고 이상호 씨는 5일 후에 장준식 교수와 김재동 시인에게 폐를 끼쳐서 죄송하다고 인사차 오사카에 왔다 갔다.

  “배 형, 배 형이 부탁한 송금 루트가 배달 사고도 없고 원산 가는 만경봉호니 전하기도 쉬워서 가장 안전합니다. 다시 부탁합니다.”
  오사카에서 만나서 5개월 정도 지났을 때 이상호 소설가로부터 배유상한테 온 전화였다. 배유상은 다시 조총련 현명준 부위원장에게 연락해서 누이동생에게 돈을 송금할 수 있었다. 이상호 소설가는 송금액에 식사 같이 하라면서 더 보냈지만 그건 괜찮다고 그 돈까지 누이동생에게 송금했다.
  그것은 자신에게도 보람 있는 일이어서 무시 못할 식삿값이지만 스스로 부담해야 한다고 어떤 의무처럼 느끼고 있었다.
  송금은 해를 거르면서 일 년에 두 번 정기편처럼 보내는 동안 해마다 원산 누이동생으로부터 연하장도 이상호 소설가와 배유상에게 왔었다. 그때마다 배유상은 복사해 두고 원본은 꼬박꼬박 한국으로 보냈다.
  한 달 걸려서 오는 연하장을 볼 때마다 연민의 정이 전신을 싸고 돌았다. 빛바랜 낙엽처럼 누런 모조지의 봉투와 편지지는 새해를 축하한다는 인사를 침식하고 있었다. 결코 자기 혐오감만이 아니었다. 남북의 우열의 차원을 떠나 허리 잘린 한반도에서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의 혐오감이고 연민의 정이었다. 그래서 배유상은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연하장을 보낼 수가 없었다.

  이렇게 흐르던 어느 해 11월 말, 이상호 소설가로부터 홋카이도 삿포로에 분단문학의 강연과 심포지엄에 초대받아서 내일 간다고 전화가 왔다. 그때 오사카에 들르고 싶지만 공식 일정을 마치고 한국에서 오는 제자들 10명과 합류하기 때문에 아쉽지만 가지 못한다고 했다. 한국어 통역 없이 진행되는 행사여서 일본어를 모르는 제자들과 같이 와도 의미가 없으니까, 행사가 끝나서 오기로 했다면서 2박 3일이라고 덧붙였다.
  배유상은 몇 년 전에 들렀던 재일동포가 경영하는 삿포로 식당이 문득 떠올랐다. 그는 이상호 소설가에게 그 식당에서 선생님 전화 받은 것을 말하면서 꼭 가보시라고 권했다.
  3일 후였다. 공식 일정을 마친 이상호 소설가는 제자들과 지금 그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있다면서 주인을 바꿔 주었다. 너무 반가웠다. 서로 잊혀져서 가물거리는 기억들을 퍼즐처럼 맞추면서 그날을 되살리면서 즐거워했다.
  그해 12월도 며칠 남지 않은 28일, 배유상 앞으로 택배 하나가 배달되었다. 홋카이도 삿포로 식당에서 연말 선물로 보내온 것이었다. 냉동 택배라는 빨간 글자가 큼직하게 붙어 있었다. 배유상이 상자를 조심히 열기 시작했다. 홋카이도 특산품 연어가 편지 봉투와 함께 들어 있었다. 그는 봉투 속의 편지지를 천천히 꺼내서 읽기 시작했다.

  배유상 선생님께.
  몇 년 전 우연히 저의 식당에 오셨던 인연으로 한국에서 오신 이상호 선생님들과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 저는 식당 주인으로서가 아니라 한 사람의 일행으로 참가해서 즐거운 시간을 같이 했습니다.
  선생님들은 저의 식당만이 아니고 형님이 경영하는 아리랑 식당도 가셨습니다. 이상호 선생님의 고향 원산 이야기와 파란만장의 인생 이야기도 잘 들었습니다. 배유상 선생님도 잘 아시겠지만 연어는 알에서 부활해서 망망대해로 떠났다가 다시 보금자리로 돌아오는 귀소 본능을 갖고 있습니다. 이상호 선생님을 비롯한 우리 모두 그렇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이상호 선생님을 소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가족의 행복과 축복의 새해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편지 끝에는 식당의 고무인이 찍혀 있었고, 장승지라고 자필로 한국 이름이 쓰여 있었다.

필자 약력
김길호 프로필 사진.jpg

1949년 12월 제주시 삼양 출생. 1973년 병역을 마치고 도일했다. 1979년 《현대문학》 11월호에 단편소설 「오염지대」을 소설가 이범선이 초회 추천했다. 1980년 오사카 문학학교 1년 수료(본과 52기)했다. 1980년 《문학정신》 8월호에 단편소설 「영가」를 소설가·시인 김동리가 완료 추천했다. 1996년 일본 중앙 일간지 《산케이신문》 주최 ‘한국과 어떻게 사귈 것인가’에 오피니언 1위로 입상했다. 2006년 소설집 『이쿠노아리랑』을 발간했고, 2007년 중편소설 「이쿠노아리랑」으로 제16회 해외한국문학상(한국문인협회)을 수상했다. 2015년 해외민주평화통일자문위원회 자문위원을 맡았고, 2018년 해외민주평화통일 자문회의 대통령 표창장을 수상했다. 2020년 재일대한민국 민단 오사카이쿠노남지부 지단장을 역임하고 2023년 9월 해외민주통일자문위원회 자문위원을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