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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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호

북한 여자 은옥 씨

김유경

1.

  북한 여자 은옥 씨를 처음 만난 건 중국 칭다오에서였다. 당시 나는 남동생과 함께 칭다오 명인광장에서 크지 않은 중국어 학원을 운영하고 있었다. 중국에 체류 중인 한국인 유학생과 일반인을 대상으로 중국어를 가르치고, 중국인에게는 한국말을 가르치는 학원이었다. 한국에서 중국어 학원 강사 경력이 있는 남동생 준호가 제 역할을 잘해 주어 학원은 그런대로 잘 굴러갔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혈육이라곤 준호와 나, 달랑 남매뿐인데 둘 다 독신이었다. 나는 일을 좋아하고 애초에 결혼에 관심이 없었지만, 준호는 이혼한 상태였다. 결혼한 지 5년이 지나도록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 아이를 무척 바랐던 올케는 부부 동반 불임 검사를 요구했고, 그 결과 준호가 무정자증임이 밝혀졌다. 부부 사이는 멀어졌고 올케의 요구로 이혼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준호는 이혼의 아픔을 잊으려 나를 따라 칭다오로 왔다. 칭다오에 중국어 학원을 차리게 된 데는 준호 입김이 많이 작용했다. 한 번 실패하자 다시 결혼할 생각이 없다고 했다. 한 번뿐인 인생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 투자하고 신나게 살아보겠노라 했다.
  결혼에 관심이 없다는 공통점으로 우리 남매는 일에만 몰두했고, 비교적 죽이 잘 맞았다. 중국에서 돈을 많이 벌어 한국에 작은 빌딩 하나 사고 학원을 차리자는 게 우리의 목표였다. 오십 중반까지 일하고 남매가 세계 일주를 하면서 한량처럼 살자고 여담으로 말했다.
  그날 나는 준호와 함께 차를 타고 조선족이 많이 모여 사는 이촌(李村)으로 갔다. 학원 청소를 담당했던 중국인 아줌마가 고향으로 갔기에 청소 아줌마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전화로 직업소개소에 부탁했고 맞춤한 대상이 나타났다는 연락을 받았다,
  이촌 시장 안에 기다란 3층 건물이 있었는데 2층 끝 방이 조선족이 운영하는 직업소개소였다. 소개소에 들어서니 몇 명의 아줌마들이 소파에 앉아 있었다. 소파를 경계로 칸막이를 치고 안쪽 책상 앞에서 업무를 보던 소개소 여사장이 나를 반기며 마중나왔다. 그리고 소파 끝자리에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는 여자를 손으로 가리켰다.
  “아줌마, 이분이 아줌마를 채용할 학원 원장님이세요.”
  파마한 검은 머리를 뒤로 묶은 여자가 살며시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수그렸다. 보통 키에 호리호리한 몸매였다.
  “안녕하십니까. 김은옥이라고 합니다.”
  조선족 억양과는 좀 다르게 악센트가 강하지 않은 부드러운 말투였다. 첫인상이 마음에 든 건 쌍꺼풀진 적당한 크기의 눈에 비낀 선함이었다. 두 손을 모으고 미소 띤 얼굴을 반쯤 숙인 은옥 씨는 말없이 서서 나의 선택을 기다렸다. 소개소 사장이 서둘러 설명했다.
  “전화로 말씀드렸지만, 이 아줌마 나이는 마흔다섯 살이고요. 목단강 쪽 깊은 시골에서 농사짓던 아줌마라 마음이 착하고 순진해요. 일은 물론 잘하지요. 척 봐도 성실한 사람인 게 알리지 않나요?”
  소개소 사장이 누누이 언급하지 않아도 굳이 아줌마를 거부할 생각이 없었다. 다만 시골 농사꾼이라는 말은 선뜻 실감 나지 않았다. 아줌마에게는 농군 특유의 단순함이나 투박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화장기 없는 동그스름한 얼굴은 피부가 희고 이목구비가 오밀조밀한 게 나이보다 동안으로 보였다. 공손한 표정에서 교양이 느껴졌고 진중해 보이는 차분한 눈빛은 단아한 기품을 풍겼다. 농군이라기보다 실험 기구가 가득한 연구실에 어울릴 법한 이미지였다. 신분을 확인하고 싶어졌다. 여자의 신분증을 요구하자 소개소 사장이 손을 홰홰 저으며 말했다.
  “글쎄 가방을 날치기당했지 뭐예요. 신분증은 공안에 가서 차차 내기로 하고 날 믿고 이 아줌마 써보세요. 자 봐요. 우리 사무실이 이전과 달리 반짝반짝 빛이 나지 않나요? 이 아줌마가 가방을 잃어버리고 여관에 들 돈이 없어서 사무실에서 이틀 자게 했는데 이렇게 깨끗이 쓸고 닦고 했더라고요. 묵은 때를 다 씻어냈어요. 손끝이 정말 여물었어요. 일단 써보세요.”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고 소개료를 지급한 뒤 은옥 씨에게 가자고 말했다. 은옥 씨가 정중히 고개를 숙여 소개소 사장에게 인사하고 내 뒤를 따랐다. 소개소 건물 밑에 차를 세우고 대기하던 준호가 우리를 발견하고 차 시동을 걸었다. 나는 조수석에 앉고 은옥 씨가 차 뒷좌석에 앉으며 준호에게 인사했다. 듣기 좋은 나긋한 억양이었다. 차가 한창 달릴 때 나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목단강 어디에서 살았고, 무슨 농사를 지었냐고 물었다. 은옥 씨는 대답 없이 머뭇거리더니 잠시 차를 세울 수 없냐고 했다. 할 말이 있노라 했다. 더욱 호기심이 동했다.
  길옆에 차를 세우자 은옥 씨가 품속에서 자그마한 수첩 크기의 증명서 같은 걸 꺼내어 내밀었다. 겉면 아래쪽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민 국경통행증”이라고 한글과 중국 글로 적혀 있고 위쪽으로는 북한 국장으로 짐작되는 도장이 찍혀 있었다. 나는 가슴이 서늘해지는 걸 느끼며 동생을 바라보았다. 준호도 무척 놀란 표정이었다. 우리는 동시에 부르짖었다.
  “아줌마는 북한 사람인가요?”
  은옥 씨가 고개를 끄덕이며 여전히 차분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전 북한 국경 도시에서 살았는데, 증명서를 떼고 중국 친척 집에 돈 벌러 나왔어요. 그런데 친척이 있는 시골에서는 돈벌이가 마땅치 않았어요. 친척 집에서 어물거리는 새에 들어갈 날짜가 훌쩍 지나버렸지요. 이대론 안 되겠다 싶어 칭다오로 나왔어요. 결국, 불법체류자가 되었고요. 그보다는 중국에 와서 한국에 대해 알게 되었고 북한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심경의 변화가 생겼습니다. 앞으로 저는 줄을 잡아 한국에 가려고 합니다.”
  은옥 씨의 긴말을 우리는 넋 빠진 사람처럼 멍하니 듣고만 있었다. 칭다오에 온 지 2년 가까이 되도록 북한 사람은 처음 보았다. 언론에 출연하는 탈북민을 본 적이 있지만, 실물로 보기는 처음이었다. 준호가 헛기침을 지으며 침묵을 깼다.
  “실례지만 북한에서 무슨 일을 하셨는가요?”
  “북한에서는 사범대학 혁명역사 교원이었어요.”
  “혁명…… 역사요? 그럼 대학교수였다고요? 그런데 왜?”
  준호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네, 대학 교원이지만 노임 배급이 제대로 나오지 않고 살기 어려워, 방학을 이용해 중국에 돈 벌러 나왔어요. 남편은 고난의 행군 시기 전염병으로 사망하고 아들 하나 있는데 올해 대학에 입학했습니다. 제가 한국에 자리 잡으면 아들을 데려갈 생각입니다. 이게 저의 실체입니다. 차마 거짓말을 이어갈 수 없어서 사실을 말씀드립니다. 이런 저라도 허용하시고 일을 시켜주시면 열심히 하겠습니다.”
  은옥 씨는 할 말을 자분자분 다 하고 처분을 기다리듯 고개를 수그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나와 준호는 눈짓을 교환하고 차에서 내렸다. 어찌할지 의논해야 했다. 탈북자를 채용하는 데는 위험이 따랐다. 만약 발각되면 거액의 벌금을 물어야 했고, 학원 운영에 지장을 받을 수 있었다. 그렇다고 인정상 이미 우리 차에 올라탄 은옥 씨를 무작정 내치기가 그랬다. 보아하니 오갈 데 없어 소개소 신세를 진 듯싶었다.
  인상이나 북한에서 직업으로 보나 성실하게 일할 건 분명해 보였다. 뭔가 마땅치 않으면 쉽게 일을 그만두는 한족이나 조선족 아줌마보다는 낫지 않을까, 싶었다. 갈 데 없고 변덕을 부릴 만한 처지가 아니니 오히려 일에 더 열중할 수 있다는 타산이었다. 한국으로 들어가기 전까지 일을 시켜보자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다. 차에 오르니 은옥 씨가 긴장한 눈빛으로 흘깃 우리를 바라보았다. 준호가 시동을 켜고 나는 안전띠를 매며 가볍게 말했다.
  “그래요. 같이 일해봐요. 대신 북한 사람이라는 거 절대 티 내거나 말하면 안 돼요. 밖으로 나돌지 말고요. 학원 건물 안에 아줌마가 잘 수 있는 자그마한 방이 있으니 숙식은 거기서 해결하시고요.”
  은옥 씨 얼굴에 확 화색이 피어났다.
  “고맙습니다. 정말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근데 북한에서 대학교수 하신 분을 아줌마라고 불러도 될는지요. 청소 일은 해보셨는가요?”
  준호가 고개를 기웃거리며 묻자 은옥 씨가 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전 아줌마라는 호칭이 좋아요. 그리고 아줌마가 청소할 줄 모르면 그게 더 이상한 거 아닌가요?”
  “그럼 됐습니다.”
  준호와 나는 동시에 대답했다.

  며칠을 지내보니 은옥 씨의 성실함과 꼼꼼한 일솜씨는 기대 이상이었다. 은옥 씨가 오고 나서 학원은 하루가 다르게 윤택이 났다. 여태 그렇게 열심히 일하는 청소 아줌마는 없었다. 청소는 티가 안 나는 일인데 온종일 밀대와 빗자루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수강생들이 돌아가면 학원 교실마다 다니며 깨끗이 쓸고 닦기를 반복했다. 내가 다 미안할 정도였다. 청소하는 와중에 교탁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기는 모습을 언뜻 보았다. 북한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때를 떠올리는 듯했다. 은옥 씨는 우리의 당부대로 학원에 드나드는 사람들과 될수록 부딪치지 않으려 했고, 밖에 잘 나가지 않았다. 일주일에 한 번 가까운 마트에 가서 쌀이며 라면 등 밑반찬을 사 오는 외에는 주로 학원 안에서 맴돌았다.
  어느 날, 은옥 씨가 내가 다가서는데 알아차리지 못하고 창문 너머로 중국어 강의를 정신없이 듣고 있었다. 밀대를 손에 쥔 채 선생의 발음을 집중해 듣고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중국어 성조를 따라 발음해 보고 있었다. 인기척을 내자 당황하여 얼른 창문에서 물러났다. 중국어를 배우고 싶냐고 물었더니 언제 한국으로 갈지 기약이 없고, 중국에서 당분간 살려면 중국어를 배워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다고 했다. 열심히 일해주어 호감이 있던 차라 나는 선뜻 초급반 오후 수업을 듣도록 허용했다. 학원비는 받지 않는다고 했다. 은옥 씨는 얼굴에 홍조를 띠며 기뻐 어쩔 줄 몰라 했다. 감사하다고 청소는 절대 지장 없이 하겠노라고 했다.
  은옥 씨가 초급반 공부를 시작한 지 며칠이 지나 한족 선생이 저 아줌마는 누구냐고 물었다. 먼 친척이라고 적당히 둘러대자 엄지손가락을 내밀며 학원생 중 제일 열심히 공부한다고 했다. 몇 달이 지나자 은옥 씨는 어지간한 중국어 대화가 가능했다. 한족 학생들이 지나가며 뭔가를 물어보면 서툴지만 대답할 수 있었다.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솟도록 매일 계단을 박박 닦아내는 은옥 씨를 보면서 나는 따뜻한 신뢰의 감정을 느꼈다. 처음 본 북한 사람이라는 경계심이 슬그머니 사라졌다. 당시 청소 아줌마에게 최고로 줄 수 있는 급여는 중국 돈 천칠백 원이었다. 나는 백 원을 더 얹어 천팔백 원을 주었다. 급여를 받아 들 때면 은옥 씨의 선한 눈에 물기가 번지곤 했다. 당연히 받을 급여인데 일한 만큼 대가를 주어 고맙다고 했다. 북한에서 평생 대학 교원을 하면서 자신의 노동력의 가치를 몰랐다고 했다.
  어느 날, 우리가 사는 아파트 도우미 아줌마가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하루 세끼 밥하고 청소 빨래해 줄 가사도우미를 당장 구해야 했다. 집에 들이는 도우미는 신중해야 했다. 직업소개소에 오는 아줌마들은 주로 지방에서 올라온 사람들이라 파악하기 힘들었다. 전에 일하던 가사도우미는 친구한테 소개받은 지인의 친척이었다.
  준호와 나는 논의 끝에 은옥 씨를 집에 들이기로 합의했다. 물론 은옥 씨가 동의하는 조건에서였다. 몇 달 안 되지만 은옥 씨에 대한 믿음이 생겼고, 그만큼 파악한 대상을 찾기 힘들었다. 나는 은옥 씨를 따로 만나 우리의 의사를 전했다. 은옥 씨는 잠시 생각하더니 원장 선생님 요구라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했다. 다만 음식이 북한식이라 맛을 장담할 수 없다고 했다. 대신 한식 만드는 방법을 열심히 배우겠노라 했다.
  며칠 후부터 은옥 씨는 학원 근처에 자리 잡은 우리 집에서 가사도우미로 일하게 되었다. 명인광장에 자리 잡은 우리 집은 지은 지 얼마 안 되는 새 아파트였다. 한국 건설회사에서 지어 구조가 한국식이었다. 거실과 부엌이 나란히 있고, 거실에서 수직으로 뻗은 긴 복도를 사이에 두고 양옆에 방이 두 개씩 있는 40평 아파트였다. 서울에서 이 정도 집에서 살려면 엄청난 돈이 있어야 했지만, 중국이기에 싼 가격으로 집을 분양받았다.
  집이 커서 청소하고 빨래하고 하루 세끼 밥까지 하자면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 가사도우미 급여는 이천 원이었다. 몇 년 동안 가사도우미가 여러 번 바뀌었지만, 지금껏 만족한 사람이 별로 없었다. 청소를 잘하면 음식이 별로고 음식이 그런대로 맞으면 청소를 깨끗하게 못했다. 촌에서 올라온 아줌마는 비싼 비단 블라우스를 세탁기에 돌려 망가뜨리고, 한국에서 들여온 가전제품을 다룰 줄 몰라 고장을 일으킨 적이 있었다. 은옥 씨가 북한에서 왔기에 그런 실수를 할까 봐 우려되었다.
  하지만 은옥 씨를 가사도우미로 들인 건 대만족이었다. 가전제품 다루는 법을 한번 알려주었는데 실수 없이 아주 잘 다루었다. 옷의 원단을 설명해 주고 손세탁을 주문했더니 손색없이 해주었다. 겉옷은 물론 속옷까지 깨끗이 빨고 매번 다림질했다. 그렇게 세심하고 정성스레 일해준 가사도우미는 여태껏 없었다. 집 안 구석구석 청소를 잘하는 건 물론이고 음식 솜씨까지 괜찮았다.
  내가 한식 요리책을 사주자 은옥 씨는 뛸 듯이 반가워했다. 짬짬이 공부하더니 한식을 제법 잘했다. 은옥 씨가 만든 음식은 식당 요리처럼 자극적이지 않고 담백하여 질리지 않았다. 준호와 나는 점심에 식당이 아니라 집에 가서 밥을 먹었다. 은옥 씨는 시장에서 부식물이며 상품을 사면 영수증을 꼭꼭 제출했다. 과일이며 간식이며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마음대로 사 먹으라고 하면 그냥 웃을 뿐 한 푼 허투루 쓰지 않았다.
  내가 화분을 좋아해 베란다에 수십 개 가득 사들여 놓았지만, 미처 돌보지 못해 엉망이었다. 마치 폐가의 화원 같은 베란다를 은옥 씨가 말끔히 정리했다. 바닥의 묵은 먼지를 닦아내고 죽은 화분이나 가지를 정리하고 화사한 화원을 만들었다. 은옥 씨가 들어와 집안이 정갈하고 깔끔해지니 집에 대한 애착이 더 생기는 듯싶었다. 은옥 씨는 북한에서 대학교수였지만 전혀 티를 내지 않았고, 겸손하고 검소했다. 알아서 집안일을 척척 해주는 은옥 씨는 우리에게 최고의 도우미였다.
  어느 날인가 내가 감기에 걸려 열을 펄펄 내며 앓자 은옥 씨는 밤새워 내 침대 머리를 지키며 찬 수건을 이마에 갈아댔다. 내가 입맛을 잃자 매끼 음식을 바꾸어 대며 애를 썼다. 특히 아플 때 은옥 씨가 써준 잣죽은 정말 최고였다. 고향에서 환자에게 잣죽을 먹이면 입맛을 돌리고 회복에 도움이 되었다고 했다. 나는 고질적으로 위가 약했다. 그걸 알게 된 은옥 씨는 시장에서 창출이며 단너삼 뿌리, 백출, 대추 등 약초 몇 가지 사서 매일 약초차를 끓여 주었다. 북한에서 배운 민간요법이라고 했다. 은옥 씨가 끓여준 약초차를 몇 달 마시자 정말 위가 편안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가사도우미로 들어왔을 뿐인데 우리 집 일에 그토록 지극정성을 쏟는 은옥 씨가 신기했다. 욕심 같아선 은옥 씨가 오랫동안 우리 집안일을 해주었으면 싶었다. 하지만 한 치 앞을 모르는 게 인생이라고 했다.

2.

  어느 날부터 준호가 수업이 비는 짬 시간이면 어디론가 다녀오곤 했다. 오후 두 시간 정도 공백이 있는데, 이전에는 교사실에서 책을 보거나 다른 일을 했다. 처음엔 무심히 생각했지만 매일 반복되기에 어디에 다녀오냐고 물었다. 잠시 바람을 쐬러 공원에 다녀온다고 했다.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한 달이 넘도록 그 시간이면 계속 바깥출입을 하기에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혹시 몰래 처리해야 할 일이 생겼나, 무슨 안 좋은 일이 생긴 건 아닐까 하는 위구심이 들었다.
  어느 날 뒤를 슬금슬금 따라가 보았다. 놀랍게도 준호는 학원을 나서자 공원이 아니라 꼿꼿이 집으로 향했다. 다음 날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굳이 나에게 숨길 필요가 없는데 왜 공원에 다녀온다고 거짓말을 했을까. 누나까지 속이면서 매일 그 시간에 집에 가서 무엇을 하는 걸까. 슬그머니 호기심이 동했다.
  어느 날, 나는 작심하고 뒤를 밟았다. 여느 날처럼 준호는 꼿꼿이 집으로 향했다. 학원에서 걸어서 5분 남짓한 거리에 우리 집이 있었다. 한 걸음 떨어져 엘리베이터를 타고 9층 집 앞에 도착한 나는 잠시 숨을 가다듬었다. 이상야릇한 긴장감이 나를 휩쓸었다. 준호가 매일 이 시간이면 집에 오는 이유가 더욱 궁금했다. 왠지 은옥 씨가 떠올랐지만, 그러지 않기를 바라며 고개를 흔들었다.
  나는 출입문 비밀번호를 누르고 살며시 집 안에 들어섰다. 현관에 신발을 벗고 거실에 들어서던 나는 흠칫 걸음을 멈추었다. 복도 맨 끝방이 나의 침실이고 맞은편이 준호 방, 부엌 쪽 방이 은옥 씨가 쓰는 손님방이고 맞은편은 서재였다. 그런데 은옥 씨가 쓰는 방 쪽에서 거친 숨소리와 새된 비명이 들려왔다. 듣기 민망한 비명이 점점 높아지고 무언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발끝걸음으로 거실에서 나와 신발을 꺾어 신고 도망치듯 집을 나왔다.
  설마 했던 일이 벌어졌다. 은옥 씨는 준호보다 나이가 다섯 살 더 많았다. 연상이 문제가 아니었다. 준호가 무슨 생각으로 은옥 씨와 깊은 관계를 맺었는지 알 수 없었다. 수업 시간이 가까워지자 준호가 학원에 나타났다. 내가 뒤를 밟은 줄 모르는 준호는 천연덕스러운 표정이었다. 오히려 내가 머쓱하여 눈길을 피했다. 그냥 모르는 체해야 할지, 무슨 생각이냐고 물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한국이나 중국이나 남녀가 가볍게 연애하는 건 흔한 세태였다. 섹스 파트너라는 말도 있었다.
  하지만 그 대상이 은옥 씨이기에 신중해졌다. 불법체류자의 불안한 신분이 가장 걸렸다. 그동안 은옥 씨가 엄청난 성실성을 보여주었고, 신뢰가 쌓였지만 어디까지나 가사도우미 한에서였다. 은옥 씨가 무슨 생각으로 준호와 관계를 맺었는지 우려되었다. 이전에는 미처 눈치채지 못했는데, 알고 보니 은옥 씨의 태도에서 이전과 다른 모습이 보였다.
  은옥 씨는 분명 사랑에 취한 여인의 모습이었다. 매끼 요리에서 깊은 정성이 느껴졌고, 자기가 차린 음식을 맛있게 먹는 준호를 바라보는 눈길이 너무나 애틋했다. 준호가 맛있다고 한마디 칭찬하면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소녀처럼 수줍어했다. 은옥 씨 마음은 진심이 분명했다. 두 사람의 관계를 몰랐을 때, 은옥 씨가 한국 영화를 보면서 고개를 기웃거렸다.
  “한국에서는 남녀가 깊은 관계를 맺었는데 저렇게 쉽게 헤어질 수 있나요?”
  “북한은 다른가요?”
  내가 되묻자 은옥 씨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북한에서는 엄청난 책임감을 느껴요. 특히 처녀와 총각인 경우, 무조건 책임지려는 문화가 있어요. 남녀가 하룻밤을 같이 보내면 만리장성을 쌓는다는 말이 있잖아요. 단순한 일이 아니죠.”
  그때는 무심히 한 대화였지만, 의미가 새로워졌다. 어쩌면 은옥 씨가 준호와의 관계를 그 정도로 신중하게 생각할 수 있었다. 만약 은옥 씨가 준호에게 끝까지 책임지라고 매달린다면, 이건 가볍게 볼 문제가 아니었다. 별의별 안 좋은 상상이 다 떠올랐다.
  며칠 후, 나는 은옥 씨에게 밖에서 저녁을 먹겠노라 알리고 준호와 함께 주변의 음식점으로 갔다. 나의 의도를 모르는 준호는 오랜만에 누나와 술 한잔하게 되었다고 좋아했다. 나는 술을 마시기 전에 다짜고짜로 무슨 생각으로 은옥 씨와 사귀냐고 물었다. 준호가 화들짝 놀라며 눈을 치떴다.
  “누나가 그걸 어떻게 알았어?”
  “기침과 사랑은 감추지 못한다는 거 몰라?”
  준호가 얼굴을 붉히며 피식 웃었다.
  “사랑은 무슨, 내가 쉽게 사랑에 빠질 사람이야? 그냥 서로 외로운 처지를 위로하는 거지. 쑥스러우니 모르는 척해 줘.”
  “그건 네 생각이고, 은옥 씨는 너에 대해 진심인 거 같던데?”
  내가 다그쳐 묻자 준호가 미간을 찌푸리며 손을 홱 내저었다.
  “그 여자가 어떻게 생각하든 무슨 상관이야? 난 아무런 약속을 하지 않았어.”
  “은옥 씨에 대한 애정이 없으면서 매일 만나는 건 좀 그렇지 않니?”
  “촌스럽게 왜 이래? 남녀가 꼭 사랑해야 만나? 필요에 의한 만남이 얼마나 많은데”
  “글쎄 한국이나 중국 출신이라면 별생각 안 해. 하지만 은옥 씨는 북한 여자야. 문화나 생각이 우리와 달라. 아니, 우리가 북한 문화를 모른다는 말이 더 맞지. 너 그러다 발목 잡히지 않겠니?”
  “발목을 잡히다니? 은옥 씨가 설마 결혼이라도 요구한다는 거야?”
  “그럴 수 있잖아.”
  “무슨 권리로? 그 여자 불법체류자잖아. 중국 사람과 결혼한 탈북 여성이 아이를 낳고도 국적을 취득 못해 불법체류자로 산다고 들었어. 하물며 한국 사람인 나와 결혼을 꿈꾼다고? 교수까지 했다는 여자가 아무렴 그 정도 생각이 없겠어?”
  “은옥 씨 처지가 각박하니 더더욱 너한테 매달릴 수 있다는 거지. 예를 들면 만리장성을 쌓았으니 무조건 책임지라든지, 한국에 데려다 달라든지, 이런저런 요구를 할 수 있잖아. 대가를 바랄 수 있잖아.”
  언젠가 은옥 씨가 한 말을 떠올리며 나는 등이 달아 말했다. 그 순간에는 은옥 씨에 대한 그동안의 믿음이 하얗게 바래고 의심과 억측만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준호가 심중한 표정을 지으며 생각에 잠기더니 머리를 저었다.
  “아니야. 내가 보기에 은옥 씨는 그렇게 영악하거나 타산적인 사람이 아니야. 그냥 나를 좋아하는 거 같았어.”
  “그런 여자이니 더 신중하자는 거지. 내가 보기에 은옥 씨는 나이에 비해 순수하고 특히 이성 문제에서 엄청 고지식해 보였어.”
  준호가 한쪽 입귀를 올리며 실소했다.
  “누나도 참, 지금 나나 은옥 씨 나이가 몇인데 순수를 운운해? 고지식한 여자가 내가 요구하자 바로 응했겠어? 나는 강요한 적이 없어.”
  “그거야 은옥 씨가 너에 대한 좋은 감정을 품었기 때문에, 너의 요구를 사랑으로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상대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착각할 수 있잖아.”
  “암튼 우린 서로가 아무런 약속을 하지 않았다니까. 사랑한다는 말조차 안 했다고.”
  “말만 사랑의 약속인 줄 아니? 눈빛이나 몸으로 한 행위도 일종의 약속이 될 수 있어. 이건 가상의 시나리오인데, 만약 은옥 씨가 공안에 붙들리는 안 좋은 상황이 오면 벌금을 무는 건 물론이고, 너와 애인 관계라고 우기면 문제가 복잡해지지 않을까? 우리 지금 자리 잡는 단계야. 무리수를 두면 안 되잖아. 왜 하필 은옥 씨야? 나 너무 신경 쓰여.”
  준호의 이맛살이 미간으로 깊게 모였다. 당시 나나 준호의 생각은 전적으로 우리의 이익에 근거하고 있었다. 북한 사람이 외국인보다 더 낯설게 여겨지고 편견과 불신이 가득했다. 은옥 씨가 가사도우미 일을 잘해준 건 고맙지만, 그렇다고 그 이상 깊이 엮이는 건 불편했고 불안했다. 아무리 아쉬워도 은옥 씨를 우리 집에서 내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준호와의 관계를 알아버린 이상 매일 얼굴을 맞대며 같이 밥을 먹는 상황이 몹시 껄끄러웠다. 하지만 일을 잘한다며 급여까지 올려준 은옥 씨를 갑자기 자를 명분이 없었다.
  “결자해지라고, 네가 해결해. 은옥 씨와의 관계를 깔끔히 정리하란 말이야. 아무리 생각해도 더 끌면 안 될 거 같아.”
  나의 단호한 말에 준호가 눈을 내리깔고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 후, 아침에 일어나 식탁에 앉던 나는 은옥 씨를 보며 깜짝 놀랐다. 아침을 차리는 은옥 씨의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은옥 씨가 밤에 많이 운 게 분명했다. 준호도 어지간히 놀란 눈치였다. 전날 오후에 준호가 은옥 씨에게 관계를 정리하자는 이야기를 했다고 들었다. 은옥 씨는 아무 대답 없이 준호의 말을 듣기만 했다고 했다. 저녁을 먹을 때까지 얼굴이 좀 굳어졌을 뿐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나는 의외로 상황이 쉽게 정리되는 거 같아 마음을 놓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은옥 씨는 왜 밤새 울었을까. 준호를 많이 좋아해서 헤어지는 게 가슴 아파서일까. 아니면 북한에서 대학교수였던 자신이 타국에서 희롱당했다고 여겨 억울해서였을까. 속생각을 말하지 않아 정확히 알 수는 없었다. 다만 은옥 씨 마음이 많이 상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 나나 준호에게는 은옥 씨 마음을 돌볼 생각이나 여유가 없었다. 그냥 깨끗이 감정을 정리해서 우리에게 부담이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은옥 씨에게 이별을 통보한 다음 날부터 준호는 집에 들어오지 않고 밖에서 지냈다. 사귄 지 불과 한 달 남짓이 됐는데 이별을 그토록 충격적으로 받아들이는 은옥 씨가 부담스러웠기 때문이었다. 나 역시 은옥 씨를 마주보기 어색해져 눈길을 피했다. 썰렁한 며칠이 흘렀다. 나는 소개소 사장에게 가사도우미를 구해달라고 부탁했다. 어쩐지 은옥 씨가 알아서 나갈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서먹한 며칠이 지나 은옥 씨가 일을 그만두겠다고 먼저 말했다. 당시 상황에서 은옥 씨가 약자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당장 거처할 곳이 없는 불안정한 신분으로 어디를 갈지 걱정되고 미안했다. 하지만 잠시 생각일 뿐 다행으로 여겼다. 은옥 씨의 처지에 대한 동정보다 만약의 경우 오게 될 불이익을 피하는 게 더 중요했다. 대신 그동안 일한 보수를 섭섭지 않게 치러주었다. 어디로 가느냐 앞으로 어떻게 하겠느냐 따위의 외교적인 말은 하지 않았다.
  은옥 씨는 그동안 감사했다는 인사를 담담히 하고 돌아섰다. 몇 개의 옷가지에 간단한 생활용품이 든 가방을 메고 돌아서는 은옥 씨의 가녀린 뒷모습은 몹시 처량해 보였다. 국적이 없이 정처 없이 떠다니는 부평초 같은 은옥 씨의 삶이 애잔해 보였다. 하지만 은옥 씨를 보호할 힘이나 의지가 나에게는 없었다. 그렇게 몇 달간 맺어졌던 짧으면서 진한 인연이 미련 없이 툭 끊어져 버렸다.

3.

  그 후, 나와 준호는 중국에서 5년간 학원 운영을 더 하다가 사업을 접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사이 청소 아줌마나 가사도우미가 여러 명 바뀌었지만, 은옥 씨만큼 깐지고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은 찾지 못했다. 그럴 때마다 가끔 은옥 씨를 떠올렸다. 지금 어디서 살고 있는지, 한국에는 들어갔는지, 직업소개소 사장 말이 우리 집에서 나간 후, 은옥 씨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고 했다.
  한국에 들어와 비교적 일이 잘되었다. 강남은 아니지만, 학군이 괜찮은 서울의 한 지역에 학원을 차릴 수 있었다. 준호는 학원 일 하는 짬짬이 재테크에 관심을 두었다. 심지어 나 몰래 우리가 공동명의로 산 아파트를 담보로 대출까지 끌어 비트코인에 투자했다. 다행히 운 좋게 비트코인 투자는 대박이 났다. 고점에 올랐을 때 빠르게 환전하여 중국에서 벌어온 돈보다 훨씬 많은 자금을 얻을 수 있었다. 마침 학원 건물주가 매물을 내놓아 괜찮은 가격에 건물을 통째로 매입했다. 드디어 준호와 나의 꿈 하나를 이루었다.
  빌라 3층까지 학원으로 쓰고 4층은 준호의 주거 공간으로 사용했다. 우리 둘이 살던 아파트에는 나 혼자 살았다. 둘 다 결혼하지 않아 가정 살림 같은 덴 관심이 없었고 집 청소는 도우미 아줌마를 썼고 식사는 주로 주변 식당에서 해결했다. 우리의 생활은 비교적 만족했다. 월세에 전전긍긍하지 않자 여유가 생기고 학원은 더 잘되었다. 시간이 없어 여가 생활을 잘 누리지 못하는 대신 통장에는 돈이 차곡차곡 쌓여 갔다. 어쩌면 오십 중반쯤부터 세계여행이나 하면서 살자고 했던 여담이 현실로 될 수 있었다. 하지만 평생의 탄탄대로는 없었다. 불행은 눈썹 위에서 떨어진다더니 일하는 재미로 정신없이 살던 와중에 뜻밖의 불행이 찾아왔다.
  어느 날인가 준호가 수업하면서 손가락 힘이 풀리며 분필을 떨어뜨렸다. 얼마 후에는 학원 계단을 오르다 갑자기 다리가 접혀 굴렀다. 자꾸 손 맥이 풀린다고 했고, 어딘가 말이 어눌해지는 게 느껴졌다. 처음엔 피곤이 누적되어 나타난 일시적 증상으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하지만 수업 시간에 무슨 말을 했던지를 잊어버리고 멍하니 서 있는 증상이 나타나자 더럭 겁이 나고 소름이 돋았다. 준호가 아직 젊고 비만이 아닌데 설마 심혈관 계통에 문제가 생긴 것일까, 아니면 신경 계통에 병이 왔을까. 막연한 불안에 일단 병원에 가보기로 했다.
  급하게 종합병원에 예약하고 정밀 검사를 받았다. 동생은 상상을 초월하는 뜻밖의 병에 걸렸다. 근위축성측삭경화증이라는 일명 그 무서운 루게릭병이었다. 진단을 듣고 나는 루게릭병 환자처럼 다리가 맥없이 접히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준호의 병이 언제부터 진행되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이미 근육 경직, 자세 불안정 증상이 뚜렷이 나타나고 있었다. 아직 오십이 되지 않은 동생이 그 무서운 루게릭병에 걸리리라고 상상이나 했던가.
  본인의 절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병 진단을 받은 날 준호는 집안의 가장집물을 부술 수 있는 건 다 부숴버렸다. 난장판이 된 집 안에서 손에 피가 흐르는 준호를 부둥켜안고 소리 내어 울었다. 병과의 긴 싸움을 벌여야 했다. 준호는 일단 학원 일을 그만두고 치료에 들어갔다.
  우선 숙소를 내가 살던 아파트로 옮겼다. 당장은 생활에 크게 지장이 없는 상태여서 집에서 내원하며 치료를 받았다. 낮에는 가사도우미가 어지간한 심부름은 해주었다. 저녁부터는 내가 동생을 돌봐야 했다. 낮에는 학원 일을 하고 밤에는 준호 시중을 들자니 곧 지쳤다. 하지만 내색할 수 없었다. 요양보호사를 들이고 싶었지만, 준호가 반대했다. 이를 악물고 자신이 알아서 치료하겠노라 했다. 아직은 남의 손에 자기 육체를 의존하기 싫어했다. 힘든 대로 준호의 요구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준호의 의지와 달리 루게릭병은 불치병으로 근본적인 치료제가 없었다. 승인받은 약물은 릴루졸과 에다라본 고작 두 가지인데 평균 수명을 몇 개월 연장하거나 질병 진행을 얼마간 지연시키는 정도의 효과를 가지고 있었다. 환자마다 진행 과정이 달랐는데 준호의 경우는 이상하게 진행이 빨랐다. 병원에서는 진행을 늦추기 위해 리루텍정이라는 약을 처방해 주었다.
  일 년쯤 지나자 준호는 다리를 끌고 비틀거리며 겨우 걸었고 자세가 왼쪽으로 기울어져 옆에서 부축해야 했다. 얼굴이 무표정해지고 수면 장애와 소변 장애가 나타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자율신경계통 증상까지 나타났다. 저혈압에 우울과 불안 증상이 생기고 환각에 시달렸다. 누나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 혼자서 밤에 주방에 물 뜨러 나왔다가 물컵을 바닥에 떨어뜨려 유리 파편에 피를 흘렸다. 그날 준호는 유리 파편으로 팔목을 그었다. 다행으로 손에 힘이 약해 대형 사고는 없었다. 그 후 물컵이며 그릇을 모두 플라스틱으로 바꾸었다.
  도저히 나의 힘으로 감당이 안 되어 요양보호사를 들이자고 준호에게 말했다. 다행히 순순히 응했다. 첫 면접을 본 요양보호사는 나이 육십 세 정도 되는 여성분이었다. 인상이 좋아 보이고 급여 합의가 순조롭게 이루어져 집에 들였다. 그분은 자식들이 다 출가하고 남편이 먼저 돌아가셔서 우리 집에 상주할 수 있었다. 요양보호사를 들이니 나는 한결 편했다. 하지만 그 안정감은 오래가지 못했다.
  병이 진행되면서 신경이 예민해지고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준호는 낮과 밤이 바뀌었다. 소변이 잘 나오지 않아 밤에 열 번 넘게 화장실을 드나들어야 했다. 환각 증상에 물건을 던지며 소리를 질렀다. 숟가락을 잡을 수 없어 요양보호사가 떠먹여 주어야 했는데, 받아먹기조차 힘들어지자 밥사발을 엎었다. 분노 충동 조절 장애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평시에 유순하고 교양 있었던 준호지만 불치의 병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한 달 만에 요양보호사 아주머니는 못 하겠다며 포기했다.
  그렇게 일 년 반 사이에 요양보호사 여섯 명이 바뀌었다. 준호의 병세보다 우울증이 더 문제였다. 우울증 약을 먹었지만, 이전과 달리 한없이 무기력해지고 나와 눈길을 마주치지 않았다. 요양보호사가 몸이나 얼굴에 손을 대지 못하게 괴벽을 부렸다. 굴러서라도 저 혼자 몸을 씻으려 했다. 수염이 꺼칠하게 돋았고 핏기 없는 얼굴은 바싹 말라 번들거렸다. 밥을 먹지 않으려 하니 갈수록 몸이 말라갔다. 준호는 마치 죽음으로 가는 굴을 한없이 파는 모양새였다.
  더는 걷지 못하게 되자 휠체어를 주문했다. 요양보호사에게 매일 밖으로 데리고 나가 햇볕을 쫴달라고 부탁했지만, 준호가 움직이지 않아 산책할 수 없었다. 여섯 번째 요양보호사마저 더는 자신이 없다고 했다. 요양보호사도 사람인지라 어느 정도 정서적으로 소통하며 일해야 하는데, 준호는 요양보호사에게 조금도 곁을 주지 않았다. 마치 차가운 얼음 사람이 옆에 있는 느낌이라고 했다. 나는 다른 요양보호사를 구할 때까지만 일해달라고 사정했다.
  하는 수 없이 일곱 번째 요양보호사를 구하려 요양나라 사이트에 또 신청서를 올렸다. 이번에는 준호의 증세를 자세히 썼다. 우울증으로 요양보호사를 힘들게 할 수 있으니 자신 있는 따뜻한 분을 모신다고 했다. 대신 급여는 높게 책정했다. 요양보호사 사이에 소문이 났는지 선뜻 지원하는 이가 없었다. 긴 병에 효자 없다고 나는 어느새 준호에게 짜증을 내고 있었다. 그러니 아무리 요양보호사가 직업이라지만 남이야 오죽하랴.
  하루가 지나 겨우 한 분이 준호의 요양보호사를 하겠다고 나섰다. 너무 반가워 서둘러 프로필을 보던 나는 흠칫 놀랐다. 이름이 김은옥이었다. 나이 54세, 요양보호사 경력 8년, 나이가 내가 알고 있는 북한 여자 김은옥 씨와 같았다. 중국에서 헤어질 때 은옥 씨 나이 45세였고, 그때로부터 정확히 9년 세월이 흘렀으니 딱 들어맞았다. 설마 내가 알고 있는 그 은옥 씨는 아니겠지, 동명인이겠지, 하고 나는 수락을 했다.
  다음 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학원 근처 커피집에 들어섰다. 학원 일정이 바빠 점심에 면접 시간을 정했다. 염치없는 생각이지만 내가 아는 북한 여자 은옥 씨였으면 하는 바람이 슬그머니 생겼다. 은옥 씨라면 누구보다 준호를 잘 돌봐줄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만약 은옥 씨라면 거절하지 않을까? 정말 은옥 씨라면 중국에서 모질게 굴었던 우리의 입장을 너그러이 이해해 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내가 커피를 주문하고 자리에 앉는데 건너편 자리에 앉아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는 여인이 보였다. 무척 낯익은 얼굴이었다.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유순하고 단아한 얼굴이며 단정한 몸가짐이 틀림없는 북한 여자 은옥 씨였다. 은옥 씨도 나를 발견했다. 우리는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나 멍하니 서로를 바라보았다. 내가 은옥 씨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뚫어지게 나를 쳐다보는 은옥 씨 입이 쉽게 다물어지지 않았다.
  “원장 선생님이 어떻게 여기에? 전 일자리 면접 때문에 왔는데요.”
  나는 말없이 전화를 꺼내 일곱 번째 요양보호사로 저장된 번호를 눌렀다. 이어 은옥 씨 핸드폰이 울리고 나의 번호가 떴다. 은옥 씨 입이 더 벌어졌다.
  “그럼 원장 선생님이 환자분 보호자이신가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앉았다.
  “놀라지 마세요. 그 환자는 은옥 씨가 알고 있는 내 동생 준호예요.”
  “뭐라고요? 아니 어떻게? 그렇게 멋지고 젊은 준호 씨가 어떻게?”
  갑자기 은옥 씨가 얼굴을 싸쥐었다. 입술을 꼭 깨물었지만, 손바닥 밑으로 흐르는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나는 그만 은옥 씨 손을 당겨 잡으며 함께 눈물을 쏟았다.
  “미안해요. 용서해 주세요. 그때 은옥 씨를 인정머리 없이 내치는 게 아니었는데 그때는…….”
  내가 더 말을 잊지 못하는데, 은옥 씨가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순수하고 선한 미소가 얼굴에 퍼졌다.
  “아니에요. 그때 원장 선생님 배려로 제가 잠시 안정을 찾았고, 급여를 높여주셔서 그 돈으로 한국으로 빨리 들어올 수 있었어요.”
  “그럼 그때 바로 한국으로 들어오신 건가요?”
  우리는 면접이 아니라 지나온 회포를 풀었다. 은옥 씨가 이리 반갑고 가깝게 느껴질 줄은 생각 못했다. 그때 쌓았던 서로에 대한 신뢰감이 고스란히 되살아났다. 은옥 씨는 다른 직업소개소에 일자리 얻으러 갔다가 우연히 탈북민을 한국으로 보내는 중국인 브로커를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한국으로 가는 여덟 명의 탈북민 대열에 합류하게 되었다.
  은옥 씨는 그 시점에 원장 선생님 댁에서 나오게 된 게 오히려 기회였다고 했다. 아니면 준호에 대한 미련 때문에 쉽게 중국을 떠나지 못했을 거라고 했다. 모든 건 운명이라고 했고, 당시 원장 선생님 심정을 이해한다고 했다. 탈북민 누구나 타국에서 불신과 오해, 편견을 받으며 모험의 길을 거쳐 한국으로 온다고 했다. 나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려 애쓰는 은옥 씨가 고맙고 믿음직스러웠다.
  “실례지만 은옥 씨는 북한에서 대학교수였는데 왜 요양보호사를 하세요? 다른 길이 있었을 텐데.”
  은옥 씨가 특유의 선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북한에서 혁명 역사를 전공했던 제가 한국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어요. 게다가 아들을 한국으로 데리고 와야 했고, 대학 공부를 새로이 시켜야 했어요. 저의 사회적 성취보다 돈이 더 급했어요. 제 나이에 가장 빠르게 진입할 수 있는 일이 요양보호사였지요. 저는 원래 남을 잘 도와주는 성격이어서 어쩐지 천직 같더라고요.”
  은옥 씨는 한국에 정착한 지 2년 만에 아들을 무사히 한국으로 데려왔다. 북한에서 대학을 다니던 아들은 일 년간 수능을 준비하여 지방 의대에 합격했다. 지금 의대 5학년생이라고 했다. 은옥 씨는 자신의 인생이 그만하면 성공한 셈이라고 말했다. 자신과 아들이 한국으로 왔고, 아들이 이 땅에 든든히 뿌리내렸기에 자신의 인생은 충만하다고 했다.
  “저는 직업의 귀천을 별로 따지지 않는 사람이에요. 무슨 일이든 최선을 다하면 애착이 생기죠. 이젠 이 분야의 베테랑이 되었고, 그동안 좋은 분들을 만나 충분한 보수를 받으며 행복하게 일했어요. 근데 원장 선생님이 높은 급여를 제시했더라고요. 저는 치매 환자를 2년 돌본 경험이 있어요. 호호, 제 어필이 너무 길었나요?”
  “아니요, 정말 대단하시고 훌륭하세요. 진심으로 감탄해요. 은옥 씨와 우리는 보통 인연이 아닌 듯싶어요. 마치 운명처럼 제가 가장 어려울 때 이렇게 앞에 나타나 주어 정말 고마워요. 이 기회에 은옥 씨한테 진 마음의 빚을 갚고 싶어요.”
  “아이고 별말씀을 다 하세요.”은옥 씨가 손사래를 쳤다. 아들은 대학 근처에서 자취하고 있어 우리 집에 거처하며 준호를 돌보는 데 지장이 없었다.

4.

  우선 은옥 씨를 준호에게 보여주어야겠다는 생각으로 곧장 우리 집으로 안내했다. 준호의 반응은 예상보다 격했다. 은옥 씨의 얼굴을 알아보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더니 나를 쏘아보았다. 이어 휠체어를 몰고 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가버렸다. 당황하여 은옥 씨를 쳐다보자 밝게 웃으며 괜찮다고 말했다. 준호를 철저히 환자로 대하고 있었다. 내일 준비해 가지고 올 수 있냐고 묻자 그렇게 하겠노라 했다. 은옥 씨를 보내고 준호 방문을 두드렸다. 방에 들어서자 준호가 거칠게 쏘아붙였다.
  “누나 지금 뭐 하자는 거야? 무슨 생각으로 저 여자를 내 앞에 데려온 거야?”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 요양나라 사이트에 요양보호사를 구한다고 신청했는데 은옥 씨가 허락했어. 오늘 면접 보는 장소에서 우리가 알던 은옥 씨라는 걸 알았어. 정말 우연이야.”
  “우연히든 뭐든 이 꼴로 저 여자 보살핌 받기 싫단 말이야. 쪽팔리니까.”
  “너 설마 은옥 씨한테 남은 감정 있어?”
  “무슨 소리야? 그냥 저 여자가 너무 싫다고!”
  강경한 준호의 반발에 나는 슬며시 화가 치솟았다. 하지만 참아야 했다.
  “너의 힘든 마음을 누나는 충분히 이해해. 하지만 조금만 현실적으로 생각하자. 차라리 은옥 씨인 게 다행이라고 난 생각해. 내가 보건대 은옥 씨는 우리에 대한 앙금이 없어 보였어. 그냥 널 환자로만 대하더라. 이젠 경력 8년 차 베테랑 요양사야. 은옥 씨 성품은 이미 겪어서 알고, 은옥 씨가 거절하면 했지, 우리가 마다할 이유는 없잖아. 우리에게 솔직히 은옥 씨한테 몹쓸 짓한 빚이 있잖아.”
  고개를 떨구고 씩씩거리던 준호가 풀이 죽은 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싫단 말이야. 미안해서. 그때 은옥 씨는 내가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왕자인 양 존중해 주고 극진히 대접해 주었단 말이야. 솔직히 그런 존중은 난생처음 받아봤어. 그런데 난 그 순수한 마음을 우롱하고 짓밟았어. 은옥 씨가 북한 여자라고 업신여기고 함부로 대했다고, 내가 무슨 염치로 그 여자의 도움을 받아들이겠어?”
  처음 듣는 준호의 고백에 놀랐다. 그때는 막연하게 느꼈는데 은옥 씨가 준호를 어떤 마음으로 대했는지 비로소 알게 되었다. 은옥 씨의 감정은 사랑 그 이상의 경이로움이었다고 준호는 말했다. 북한 사람들에게 한국이 무한한 동경의 대상이듯 준호를 경애했다고 했다. 준호의 교양 있는 태도며 잘생긴 외모에 깊이 빠졌다고 했다. 실제 준호는 백팔십이 넘는 키에 훤칠 미남이었다. 관계를 정리하자고 말했을 때 은옥 씨는 그 어떤 시비를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나이에 가슴 설레게 해주어 고맙다는 말만 했다. 준호의 말을 들으며 나는 은옥 씨에게 더 미안해졌다. 하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었다.
  “그렇다 해도 은옥 씨 선택을 따라주는 게 맞지 않을까? 은옥 씨가 널 돌봐주겠다잖아. 솔직히 우리로서는 은옥 씨만큼 너를 진심으로 잘 보살필 수 있는 요양보호사를 찾기 힘들 거야. 응?”
  준호가 어눌한 발음으로 목멘 소리를 질렀다.
  “이런 모습 쪽팔린단 말이야.”
  나는 준호를 그러안고 어린애에게 하듯 등을 토닥였다.
  “칭다오에서처럼 또 신세 지자. 은옥 씨같이 좋은 사람 쉽지 않아. 대신 우리 고마운 마음을 충분히 보여주면 되잖아. 은옥 씨가 이렇게 우리 앞에 나타난 건 어쩌면 운명일지 몰라. 그러니 더는 고집 부리지 마. 준호야.”

  다음 날부터 은옥 씨는 준호의 담당 요양보호사가 되었다. 은옥 씨는 아예 짐을 싸 들고 우리 집으로 들어왔다. 기어코 준호 씨 병 증상을 늦추겠노라 다짐했다. 밤새 무슨 생각을 했는지 준호는 어린애처럼 고분고분해졌다. 처음엔 은옥 씨의 눈을 바로 보지 못했다. 그럴수록 은옥 씨는 정중한 자세로 준호를 조심히 다루었다. 은옥 씨가 집에 들어오자 나는 준호에 대한 걱정을 탁 놓아버렸다. 바라는 거 이상 잘해 줄 거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치 가족을 들인 듯 편했고 든든했다. 준호 때문에 늘 불안하고 전전긍긍했던 수년의 고달픔이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은옥 씨가 들어오면서 가사도우미가 필요 없게 되었다. 은옥 씨가 준호 먹을 음식을 만들며 때 식을 담당했기 때문이었다. 청소 도우미를 따로 들이자고 했지만, 은옥 씨가 반대했다. 크지 않은 집에 무슨 도우미를 둘씩이나 들이겠냐고 하면서 북한과 달리 청소기가 있어 청소하기 힘들지 않다고 했다. 대신 나는 청소 도우미에게 주려 했던 급여를 은옥 씨에게 더 얹어 주었다. 그걸 바라고 맡은 건 아니라고 민망해했다. 그 마음이 진심이라는 걸 당연히 믿었다.
  은옥 씨가 들어오고 나서 준호의 기분이 눈에 띄게 좋아졌다. 수염을 깎고 머리는 늘 시원하게 손질해져 있었다. 북한에서 이발소로 갈 시간이 없어 종종 아들의 머리를 깎아주었다면서 이발을 곧잘 했다. 준호가 그렇게 나가기 싫어하던 산책을 매일 한 번씩 나갔다. 은옥 씨는 짬만 나면 마사지해 주었는데, 준호는 기꺼이 몸을 맡기고 잠이 들었다. 밤이면 준호 침대 밑에 잠자리를 펴고 누워서 환자의 일거수일투족에 신경을 썼다. 이전에는 요양보호사가 자기 방에서 자다가 준호가 핸드폰으로 신호를 보내면 도와주러 나오곤 했다. 같은 방에 요양보호사가 있는 걸 준호가 싫어했다. 하지만 은옥 씨에게 모든 걸 허락했다. 몸을 씻고 대소변을 볼 때도 은옥 씨가 하자는 대로 했다.
  은옥 씨는 준호의 식단에 비상한 주의를 돌렸다. 단백질과 비타민이 풍부한 음식을 만들려 애를 썼고, 매일 인터넷을 뒤지며 병 관련 공부를 했다. 준호가 음식을 넘기기 힘들어하자 이유식처럼 삶은 소고기에 아보카도 오일, 두유와 우유, 바나나 등을 갈아 적당한 온도를 만들어 정성스레 먹여주었다. 병원에 주기적으로 데리고 가 약을 타고 치료에 도움이 되는 방법을 알아 왔다. 병원에서 소변 통을 달아주자 청결에 더 신경을 썼다.
  준호가 더는 화장실에 들어가 목욕을 할 수 없게 되자 그릇에 물을 담아서 방으로 들어가 수건으로 정성스레 닦아주었다. 머리도 방에서 감겨주었다. 그 모든 손길이 얼마나 부드럽고 정성스러운지 불면증으로 밤에 잠을 자지 못하는 준호는 머리를 감으면서 졸았다. 준호의 몸 신경이 거의 굳어져 버렸을 때는 욕창이 생길세라 거구의 몸을 수시로 움직여주었다. 유순한 미소를 잃지 않고 늘 밝은 표정으로 집 안에서 어른거리는 은옥 씨는 준호는 물론 나에게 비타민 같은 존재였다. 은옥 씨를 보면 무거웠던 마음이 가벼워지고 자꾸 의지하고 싶어졌다.
  어느 날 준호가 고개를 끄덕여 나를 찾았다. 은옥 씨가 눈치 있게 얼른 자리를 피해주었다. 준호는 나의 귀에 대고 변호사를 불러달라고 했다. 나는 쏟아지는 눈물을 감추려고 고개를 외로 틀고 응, 하고 대답했다. 아마 유언장을 남기려는 거 같았다. 빌딩과 아파트 절반은 준호의 재산이었다. 주식과 현금 자산이 수억이 넘었다. 준호의 요구대로 나는 다음 날 변호사를 불러주었다. 준호가 변호사에게 어떤 유언장을 남겼는지 몰랐지만 별로 개의치 않았다. 나는 이미 재산에 대한 욕심이 없어졌다. 젊은 나이에 쓰러진 준호를 보면서 인생의 무상함을 뼈아프게 느꼈고, 오늘 건강하게 잘 사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걸 도를 트듯 깨달았다.
  언제부터인가 준호가 호흡곤란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럴 때마다 은옥 씨는 준호의 입에 자신의 입을 대고 빨아 호흡을 안정시키곤 했다. 병원에서 입원을 권고했지만, 준호는 완강하게 거부했다. 하는 수 없이 병원에서 간호사가 찾아와 인공호흡기를 달아주었다. 동시에 영양제 주사를 달았다. 시간이 갈수록 준호에게 달리는 기구가 많아졌다. 준호에게 남은 신경은 이제 눈과 귀뿐이었다. 은옥 씨는 준호의 눈빛이 말하는 의도를 귀신같이 알아맞혔다.
  짬이 생기면 은옥 씨는 부드럽고 낭랑한 목소리로 유머책을 읽어주었다. 때로는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럴 때면 준호의 눈이 웃는 듯했다. 은옥 씨는 준호가 졸 때 같이 졸고 깨어나면 같이 일어났다. 그렇게 3년 가까이 되는 긴 세월 동안 준호의 분신처럼 옆을 지켰다. 그 어떤 효부도 은옥 씨처럼 하지 못할 거라고 나는 단언했다.
  어느 날, 준호는 자듯이 조용히 눈을 감았다. 안정되고 편안한 표정으로, 은옥 씨는 준호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슬피 울었다. 장례를 지낼 때 나의 요청으로 가족 상주 자리에 서 있었다. 은옥 씨 두 눈이 장례 내내 칭다오에서 준호와 헤어질 때처럼 퉁퉁 부어 있었다.
  장례를 지내고 유산 정리를 할 때 변호사가 유언장을 보여주었다. 유언장에는 빌딩과 아파트는 누나에게 남기고 주식과 현금 3억 원은 은옥 씨에게 남긴다고 했다. 주식까지 하면 약 6억 원 상당의 유산이 은옥 씨에게 갔다. 전혀 아깝지 않았다. 은옥 씨로 인해 준호가 마지막을 편히 보내게 되었고, 나 역시 정서적으로나 생활적으로 큰 도움을 받았다. 은옥 씨가 우리에게 베푼 정은 값을 따지기 힘든 은혜였다.
  지금 나는 탈북 여성의 중국 출신 자녀들에게 한국말을 가르치는 후원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은옥 씨를 통해 탈북민에 대한 이해와 관심을 가졌고, 중국에서나 한국에서나 약자인 그들을 조금이나마 돕고 싶었다.
  북한 여자 은옥 씨는 이제 나의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다. 가족이 되었다는 말이 더 맞았다. 은옥 씨는 내가 세상에서 가장 믿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나의 긴급 연락처에는 은옥 씨가, 은옥 씨의 긴급 연락처에는 내가 저장돼 있었다. 친가와 외가 쪽으로 사촌이 몇 되지만 급할 때 찾는 건 오로지 은옥 씨뿐이었다. 나는 북한 여자 은옥 씨를 진심으로 신뢰하고 좋아하고 있었다.
  

필자 약력

북한 조선작가동맹 맹원으로 활동하던 작가로 2000년대 중반 한국에 정착하여 지금까지 꾸준히 소설 창작을 하고 있다. 2012년 첫 장편소설 『청춘연가』(웅진지식하우스)를 발표하여 대중과 문단의 주목을 받았고, 2016년 발표한 장편소설 『인간모독소』(카멜북스)는 프랑스에서 불어판으로 번역·출간되었다. 2023년 발표한 소설집 『푸른 낙엽』(푸른사상)는 올해 초 진중문고에 선정되었고, 일본 홋카이도 신문사와 번역·출판 계약을 맺었다. 올해 5월에 소설집 『누드 스케치』를 출간했다. 이 소설은 남북통합문화 콘텐츠 창작지원 공모에 선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