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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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호

표지에세이 「꽃이 필 때면 - 가을」

임은지(Tracy Lim)








50cmx40cm,  장지에 채색화,  2022

가을

임은지(Tracy Lim) (미국 출생‧스위스 거주, 1986~)

바람이 멈추지 않네…



동양화, 특히 한국화의 채색화는 언뜻 보기에 단순해 보일지라도 여러 전통적인 과정을 거쳐서야 비로소 색을 입힐 수 있습니다. 장지에 초벌 채색을 입힌 뒤 두 겹, 세 겹째 다른 색을 입히더라도 그 아래 처음 칠했던 색이 없어지지 않고 자연스럽게 표면으로 올라오는 우아함이야말로 한국적 채색화의 매력입니다. 이렇게 드러나는 색으로 이전에 칠한 색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마치 인생과 같지요. 시간이 덮어 흐려진 기억처럼 알아보기 힘든 색도, 긴 세월이 지났음에도 그 존재감을 선명히 드러내며 여러 겹의 칠을 뚫고 스스로를 알리는 색도 있습니다. 한 겹 한 겹 색을 캔버스 위에 올리는 과정은 과거의 기억을 회상하는 것과도 비슷합니다. 물감이 쌓이며 잊혀지는 기억, 새로운 의미로 다가오는 기억, 지우고 싶어도 지워지지 않는 기억도 있습니다.

학부 시절 동양화를 전공하며 동양화의 주요한 재료인 장지를 접했고, 한국 전통 장지의 매력에 빠져버린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습니다. 한국화는 보는 이에게 최후에 드러나는 완성작만이 아니라 한지 위에 그림을 그리기 위해 밟아가는 모든 과정이 수련과 같이 중요합니다. 자연의 바람으로 오랜 시간 종이를 말리고, 종이가 마르기를 기다리며 보내는 시간이 모두 그림을 연구하고 공부하는 시간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색을 스며들게도 하고 종이 위로 번지며 퍼져 나가게도 하는 장지와 사랑에 빠지게 되었기에 제 작품에서 장지는 빠질 수 없는 요소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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