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를 넘는 작가들
5호
그레이스 조, 전후 이민자 정체성과 트라우마 탐색하기
이명원
(출처: ©출판사 글항아리 제공)
사회학자인 그레이스 조는 뉴욕시립대의 스태튼 아일랜드 대학의 사회학·인류학 교수이다. 논픽션 『전쟁 같은 맛』(글항아리, 2023)에서 그녀는 가족의 이야기를 담아낸다. 그녀의 아버지는 상선 회사의 직원으로 한국을 방문했다가 부산의 미군 기지촌의 한 바에서 호스티스로 일하고 있던 저자의 어머니를 만난다. 1972년에 그레이스 조의 가족은 결혼한 부친의 고향인 워싱턴 주의 농촌 마을로 이주하는데, 당시는 베트남전쟁이 한창이던 시점이었기 때문에, 그녀의 어머니는 ‘전쟁 신부’와 같은 아시안 차별에 따른 편견 어린 시선을 극복해 나가면서 미국에서의 새로운 삶을 구축해 가고자 한다.
그레이스 조 자신이 사회학자로서 전쟁과 젠더, 제국주의와 폭력, 이주와 정체성의 문제를 학문적으로 탐색한 기반에는 『전쟁 같은 맛』에서 서술되듯, 조현병으로 격심한 고통을 겪다가 60대의 이른 나이에 심장마비로 죽음을 맞았던 어머니의 감춰진 트라우마에 관한 이해와 이민자의 정체성을 둘러싼 삶의 투쟁을 이해하려 했던 실존적·학문적 동기가 투영되어 있다. 이 책의 제목에서 ‘전쟁 같은 맛’이라는 표현은 그레이스 조의 어머니가 ‘분유’를 혐오하면서 무의식적으로 뱉어낸 표현이다. 그 안에는 어머니의 유년기와 청년기의 트라우마로 강하게 삼투되어 있는 한국전쟁의 상흔, 그리고 미국의 원조 경제, 생존을 향한 어머니의 투쟁과 그것의 불가피한 결과로서의 기지촌에서의 고통이 혼효되어 있다.
『전쟁 같은 맛』에서 그레이스 조는 이민 1.5세대로서의 스스로의 정체성 구축의 과정을 고백한다.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의 과정에서 ‘가해 주체’였던 미국이 ‘구원의 주체’로 자처하면서 아시안계 이민자들을 내부적으로는 차별·배제하고자 했던 위선과 이중사고, 거기에 깃들어 있는 뿌리 깊은 인종주의적 편견과 폭력이 세밀하게 서술된다.
화자인 ‘나’와 ‘어머니’의 성장과 쇠락이라는 비대칭적 상황을 이중주처럼 전개해 나가는 것이 이 책의 플롯이다. 기억에 대한 교차 편집의 방식으로 ‘나’의 ‘현재’와 어머니의 ‘과거’를 왕복한다. 그러한 과정에서 아시안계 이민자로서의 끈질긴 어머니의 생명력이 부각되는 한편,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없는 인종주의적 편견과 차별에 노출되어 자아가 찢겨 버리는 ‘나’의 고통스러운 성장의 드라마가 펼쳐진다.
그레이스 조가 성장의 드라마를 펼쳐나가는 장면에서, 이 책은 돌연 어머니의 조현병 발병과 이에 따른 역성장의 이상 징후를 분출한다. 문득 이계(異界)의 낯선 목소리를 듣고, 맥락 없이 중얼거리는가 하면 완벽한 침묵의 세계로 이행하고, 활동성을 봉쇄하고 고립된 일상을 비타협적으로 고수하는 어머니의 조현병이 심각화되는 것이다.
이러한 어머니의 상황과 고통을 이해하기 위해 ‘나’는 한국에서의 어머니의 ‘과거’를 향해 공감적 탐색을 거듭해 간다. 이 과정에서 기지촌에서 일했던 어머니와 아버지의 만남을 추론해 내지만, 그것을 단지 개인사적인 차원으로 축소하지 않고 전쟁과 젠더라는 구조적 차원에서의 동학(動學)을 해명하는 학문적 작업과 연결한다. 그레이스 조에게 어머니의 ‘개인적 삶’은 미군이 개입된 참혹한 전쟁을 겪은 지역에서의 여성들의 보편적 전후(戰後) 체험의 탐색이라는 의미를 띠고 있다.
그레이스 조의 『전쟁 같은 맛』이 섣부른 트라우마 극복을 역설하지 않고, 그것의 내적 구조를 공감적으로 이해하는 ‘작업’과 ‘활동’, 그리고 ‘대화’에 중심을 두고 있다는 점은 매력적이다. 이를 가능케 하는 것이 유년기 어머니의 ‘혀’의 감각, 그러니까 ‘신체화된 기억’으로서의 한국 음식 만들기다. 잊혔거나 억압되었던 한국 음식을 어머니와 딸이 함께 만들어 가면서, ‘전쟁의 맛’ 이전에 ‘기쁨의 맛’이 있었다는 실존적 감각이 회복된다. 이는 상실된 고향을 회복하려는 실존적 기투에 가깝다.
그레이스 조의 논픽션은 감동적이다. 타자는 바깥에 있지 않고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존재라는 것을 이 책은 잘 알려준다. 타자와의 조우가 결국 자기를 이해하는 과정의 일부라는 것 역시 우리는 이 책을 읽으면서 알게 된다.
문학평론가. 1970년 서울 출생. 1993년 《문화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지은 책으로 『타는 혀』, 『해독』, 『연옥에서 고고학자처럼』, 『두 섬: 저항의 양극, 한국와 오키나와』 등이 있다. 상상비평상, 성균문학상, 한국출판문화상(저술상) 등을 수상했다. 현재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