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아스포라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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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호

팔레스타인에서 온 연인

평론: 김수우

길과 장미, 그 우주의 겹:
마흐무드 다르위시의 시를 따라가며

김수우

   모든 존재는 오래된 선택들이 적층한 서로 다른 무한대의 겹으로 중첩해 있다. 입자와 파동으로 된 보이지 않는 단면들이 내재와 초월로 겹을 이루며 삶을 구축하고 있다는 말이다. 한 장면에 주름진 풍경들은 무한한 신비와 함께 가장 적나라한 생명의 현장이 된다. 동시에 작동하는 다차원의 가능성은 거친 세상을 푸른 이랑으로 만든다. 다르위시1)의 시편들에는 이 중첩의 힘이 리좀을 이루며 꿈틀거린다. 유랑이 만든 존재의 지형들이다.
   유랑은 다르위시의 영혼을 관통하는 뿌리이며 시간의 겹을 생성하는 줄기이다. 망명자의 시선과 그 작품 속에 고스란히 현현하는 디아스포라의 시학은 존재론적 근원과 동시에 보편 세계를 입체적으로 제시한다. 이스라엘의 제국적 폭력을 다룬 초기 작품들은 1971년 해외로 망명하면서 유랑의 언어로 펼쳐졌다. 소련, 이집트, 레바논 등을 떠돌면서 억압의 쇠사슬에 맞서던 시인의 저항시들은 망명 후반기에 생존의 일상을 응시하는 팔레스타인 민족의 새로운 감수성을 입는다. 1995년 귀국 이후 심화된 시적 사유는 내적 유랑이라는 지평선을 열었다. 그 여정에서 길은 무수한 중첩을 보여주며, 그 안에 겹을 이룬 그리움은 다르위시 문학의 심연이 되었다. 그에게 시는 문명의 역사와 팔레스타인의 역사와 개인의 역사가 중첩하는 길의 세계였다.

오솔길 안에는 아직도 오솔길이 있어. 오솔길 안에는 충분한 떠남의 여지가 남아 있어
강을 건너기 위해서 우리는 많은 장미꽃들을 강에 던져 버려야 할 게야. 그 어떤 미망인도
우리에게 돌아오기를 좋아하지 않지. 자 거기로 가자 …… 거기 말 울음소리 북쪽으로.
자네는 우리가 새로운 생각을 낳을 만한 단순한 무엇을 잊지는 않았겠지?
여보게, 어제에 대해 말 좀 해보게. 그럼 나는 비둘기 울음소리에서 내 모습을 볼 수가 있고
산비둘기의 고리를 잡든가, 아니면 버려진 무화과나무에서 피리를 찾을 수 있을 게야……
내 그리움은 무엇에나 신음하고 내 그리움은 나를 조준해, 죽이려고 아니면 죽으려고
오솔길 안에는 아직도 우리가 걷고 또 걸을 오솔길이 남아 있어. 질문들은 나를 어디로 데려가려는 거지?
나는 여기서 왔고, 또한 나는 저기서 왔지. 그런데 나는 여기도 저기도 없네
나는 갈릴리의 한 장미에 도달하기 전에 많은 장미들을 던져 버려야 할 게야.


「오솔길 안에도 아직도 오솔길이」2) 전문

   오솔길 안에는 우리가 걷고 걸을 오솔길이 또 있다. 긴 유랑 끝에 그가 우리에게 남긴 ‘오솔길의 오솔길’은 존재의 지층을 확장해 주는 은유이다. 여기서도 왔고 저기서도 왔지만 여기에도 저기에도 없다. 그저 언제든 떠나야 하는 오솔길의 오솔길 앞에 존재는 놓인다. 모든 사건은 기실 무한한 지질층을 이루며 도도히 흘러가는 중이다. 동시에 존재하며 부재하는 시간과 공간, 그 속에 굽이치는 방향과 깊이를 우리는 생명이라고 부른다. 무위와 유위, 실재와 환(幻)의 겹을 타고 흐르는 묵시적인 현장에서 잃어버린 조국과 정의를 위하여 함께 발걸음을 맞춘 동반자는 그리움이다. 집착과 두려움을 꿰뚫고 직진하는 그 무엇, 그리움은 끊임없이 그를 좇고 그를 조준한다. 죽이려는 것과 죽으려는 것이 중첩하는 길의 유구한 흐름은 그리움이라는 어떤 본성을 선물했을 것이다. 도착과 출발은 사방으로 첩첩이 밀고 당기고 내치고 품으며 아득하게 흘러간다. 그 하염없음. 그 층층함, 그 겹겹의 비의.
   그 무수한 경계 속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품었던 많은 장미를 던져 버리는 일이다. 강을 건너려면 아름답다고 믿는 장미를 버리는 학습이 필요하다. “갈릴리의 한 장미에 도달하기 전에 많은 장미들을 던져 버려야 할” 거라는 선언은 유랑이 곧 새로운 장미를 찾아가는 길임을 보여준다. 그 소중한 겹겹의 꽃잎들을 놓고서야 한 송이 새로운 장미를 얻는 법. 새 장미 역시 비의를 함유한 거대한 적층 그 자체가 아닌가. 시인이 온몸으로 겪은 디아스포라의 실존도 몸과 영혼이 겹을 이룬 장미 한 송이였다. 폭력과 맞서면서 단단해진 오솔길들은 이미 대자연과 경험적 일상 속의 중첩을 보여준다. 이 장미는 시적 언어의 본질을 성찰하는 데에도 매우 유효하다.

아무렴 그래야지.
나는 꼭 그래야 해……
시인에겐 새로운 선택이 있어야 해
그리고 새로운 노래들도
나는 신화와 노예들의 유적을 여는 열쇠를 지니고
방향(芳香)과 고추 그리고 옛 여름의
땅굴을 통과하고 있다
또한 나는 별들을 빨아들이며 주사위 놀이를 하는,
한 노인의 모습에서 역사를 본다

아무렴 그래야지
나는 죽음을 거부해야만 해,
비록 나의 신화들이 죽어간다 해도
폐허 속에서 나는 빛과 새로운 시를 찾을 것이다
아…… 이전에 그대는 알았는가
내 사랑아, 사전 속의 글자는 어리석다는 사실을
이 모든 낱말들이 어떻게 살아 있는지!
어떻게 성장하는지? …… 어떻게 커 가는지?
우리는 아직도 이들에게 추억의 눈물과
은유들…… 그리고 설탕을 먹이고 있다!

아무렴 그래야지……
나는 장미를 거절해야만 해
사전, 혹은 시집으로부터 오는 장미를
장미는 농부의 팔뚝에서, 일꾼의 손아귀에서 움튼다
장미는 전사(戰士)의 상처에서 움튼다
그리고 바위의 이마에서……

「장미와 사전」3) 전문

   그에겐 유랑도 문학도 새로운 차원의 장미를 발견하는 방식이었다. 이는 주체와 객체로 분리되어 끊임없이 대상화되고 도구화된 주변 세계가 어떻게 역사 안에서 회복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시인이 새롭게 선택한 새로운 노래들은 신화와 노예의 유적을 여는 열쇠가 되는 것이다. 그는 사전이나 시집에서 오는 장미를 거부한다. 농부의 팔뚝에서, 일꾼의 손아귀에서, 전사의 상처에서, 바위의 이마에서 움트는 장미를 강조한다. 역사에서 소외되고 혹사당한 민중을 향한 길을 고민하는 것이다.
   장미는 이 시집 전반에서 다양한 은유로 나타나는데, 버려야 할 장미와 피워내야 할 장미가 겹을 이룬다. 꽃잎과 꽃잎, 그 틈의 떨림과 울림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장미는 그가 추구하는 진리이며, 역사이며, 빛과 새로운 시이며, 조국이다. 하지만 우리가 인식하는 사전적 언어, 설탕을 먹인 논리로 해석하는 장미들과는 다르다. 장미는 고된 노동과 강인한 상처에서 오는 언어인 것이다. 바위의 이마에서 피는 장미를 상상해 보라. 장미의 꽃잎은 그의 온 곳과 갈 곳, 그 겹을 암시한다.

나는 거기서 왔다. 내게는 추억들이 있다. 사람들이 태어나듯 나도 그렇게 태어났다. 내게는 어머니와 창문이 많은 집이 있다. 내게는 형제들과 친구들, 그리고 창문이 차디찬 감옥이 있다. 내게는 바다갈매기들이 낚아채 간 파도가 있다. 내게는 나만의 풍경이 있다. 내게는 자라나는 풀이 있다.
 내게는 언어의 가장 먼 곳에 달 하나와 새들의 양식, 그리고 영원의 올리브나무가 있다. (……)
 나는 법칙을 깨기 위해 피의 법정에 적합한 모든 말을 배웠다.
 나는 모든 말들을 배웠다. 그리고 오직 하나의 어휘를 조립하려고 그 말들을 해체했다
 그것은: 조국……

「나는 거기서 왔다」4)에서

   나는 끝까지 먼 이 길을, 먼 이 길을, 가겠소

   나는 심장이 멈출 때까지 먼 먼 먼 이 길을 가겠소 (……)

   말 울음소리 그 지붕 위에 그대들을 위해 나는 서른 개 환유의 창을 내겠소, 그대들이 또 하나의 여정에 들어가기 위해 하나의 여정으로부터 나올 수 있도록.

「나는 이 길을 가겠소」5)에서

   온 곳을 기억한다는 것은 갈 곳을 안다는 말이다. 우리 문명이 갈 길을 잃은 것은 온 곳을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다르위시의 이러한 깨달음은 조국을 향한 의식을 확장하면서 내적인 유랑을 이룬다. 언어는 달과 새들의 양식, 영원의 올리브나무를 표현하기에는 너무 멀다. 하지만 그는 현실 법칙과 싸우기 위해 필요한 말을 배웠고, 그가 해체하고 조립한 어휘는 ‘조국’이다. 그 모든 중첩, 겹과 틈은 ‘조국’이라는 깊은 뿌리가 있었다. 그는 ‘창문 많은 집’, ‘바다갈매기들이 낚아채 간 파도’ 등 경험적으로 조국을 형상화하는데, 그 모든 겹은 결코 관념이 아니라 너무나 지극한 현실임을 보여준다. 그렇게 선택한 어휘, ‘조국’은 실존의 출발점이면서 동시에 모든 유랑의 도착점이 된 것이다.
   길의 상상력은 모든 시편에서 지속적으로 반복되고 있다. 보이지 않는 것들이 어떻게 존재를 구성하는지 길 위에서는 더 투명해진다. 다르위시에게 길은 은유나 상징이 아니라 매 순간 선택해야만 하는 극명한 현실이었다. 그에게 길은 그 보이지 않는 실체의 한 표상으로 모든 은폐를 파고드는 힘이었다. 그는 언제든 길 위에 있었고, 길을 선택해야 했고 사랑해야 했고, 길과 투쟁해야 했다. 심장이 멈출 때까지 가야 하는 ‘먼 먼 먼’ 길은 생의 여정을 그만큼 지난한 고통으로 바라본다는 말이리라. 하지만 그 먼 길을 통해 이방인 의식이 존재의 본질임을 확인했다고 할까. 역사는 그를 고통과 고독, 그리움으로 밀어붙였다. 하지만 그는 시를 통해 인간이 걷는 길이 광막한 역사 그 자체가 되는 존재의 비의를 발견한다. 말 울음소리 있는 지붕 위에 서른 개 환유의 창을 내는 일은 “또 하나의 여정에 들어가기 위해 하나의 여정으로부터 나올 수 있도록” 하는 겹의 다면성을 보여준다. 우리의 위치를 재확인하는 그 창문들은 조국을 확장하며 관계의 회복을 향한다.

나의 조국은 당신의 이마, 그러니 내 말 좀 들어주십시오
나를 그냥 내버려두지 마십시오
울타리 뒤
잡초처럼,
내쳐진 비둘기처럼
나를 그냥 내버려두지 마십시오
가련한 달로
나뭇가지 사이에서 구걸하는 별로
나를 그냥 내버려 두지 마십시오 (……)
만약 당신이 내 것이라면
당신이 나의 돌들 나의 올리브나무들
나의 창문들…… 나의 진흙을 미칠 듯이 사랑하기에!
나의 조국은 당신의 이마, 그러니 내 말 좀 들어주십시오
나를 그냥 내버려두지 마십시오!

「나를 그냥 내버려두지 마십시오」6)에서

   관계에 대한 요청은 자신을 증명하는 방식, 폭력에 대응하는 방식이기도 했다. “나를 그냥 내버려두지 말라”는 당부는 전 지구적인 위기에 당면한 지구의 모든 생명이 우리에게 보내는 극진한 메시지가 아닐까. ‘나를 내버려두지 말라’는 표현은 ‘너를 내버려두지 않겠다’는 중첩된 존재들의 절대 약속이기도 하다. “나의 조국은 당신의 이마”라는 고백에서 그 간절함이 선명해진다. 서로의 이마에서 서로를 발견할 때, 당신이 나의 돌들, 나의 올리브들, 나의 창문이라고 고백할 때 내 안의 광활한 타자성이 드러난다. 그렇게 그는 겹의 인연을 강조한다. 보이지 않은 뒤의 미세한 단면을 감지할 때 우리는 비로소 관계를 맺을 수 있음이다. 겹은 그의 오래된 유랑에서 나온 지혜이고, 그 둔중한 여운은 결국 타자에게로 나아가는 길목인 것이다.
   진짜 장미는 어떻게 피는가. 그가 던지는 물음의 결론이다. 겹과 틈을 읽는 유랑은 길을 만든다. 아니, 길이 겹과 틈을 짓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겹과 틈은 내 안의 타자를 찾아간다. 무수한 떠남과 도착. 그 틈에서 우리가 읽어내는 것은 관계이다. 겹겹의 틈, 틈틈의 겹. 타자의 고통을 향해 나아갈 때 겹과 틈, 그 길은 나비의 날갯짓이 된다. 어떠한 선택도 무한대의 바람이 되어 생명의 소용돌이를 만드는 것이다. 별에서 온 원자들이 우리 몸으로 모였다가 다시 흩어진다는 건 과학의 진실이다. 인간은 필멸이라도 인간을 구성하는 원자는 불멸이다. 그래서 다른 존재 안에서 나를 발견하고, 내 안에 중첩하는 타자들이 나의 기원(起源)이며 우주의 겹을 이룬다. 그 나선의 춤, 길은 결국 타자에게서 출발하여 타자를 향해 열리는 게 아니겠는가. 붉은 장미의 겹겹 꽃잎처럼 은폐를 파고들면서 말이다.

참고자료

1) Mahmoud Darwish(1941~2008): 팔레스타인 민족시인. 1971년 이스라엘 점령지가 된 고향을 떠나 튀니지, 카이로, 니코시아, 레바논, 파리 등을 떠돌며 창작·정치 활동을 했다. 오랫동안 팔레스타인해방기구에 가담해 활동하면서 잦은 감금과 투옥을 당했다. 1995년 팔레스타인으로 돌아왔다. 『날개 없는 새』, 『올리브 잎새들』, 『팔레스타인에서 온 연인』 등 시집과 산문집 30여 권을 출간했다.

2) 마흐무드 다르위시, 송경숙 옮김, 『팔레스타인에서 온 연인』(도서출판 아시아, 2007), 103쪽.

3) 같은 책, 35-36쪽.

4) 같은 책, 108쪽.

5) 같은 책. 102쪽.

6) 같은 책, 55쪽.

『팔레스타인에서 온 연인』 작품 정보

저자: 마흐무드 다르위시  번역: 송경숙  출판: 도서출판 아시아  출간: 2007.11.7.

필자 약력
김수우 작가 프로필 사진

1995년 《시와시학》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뿌리주의자』 외 다수, 『호세 마르티 평전』을 비롯한 산문집 10여 권, 번역시집 『호세 마르티 시선집』을 발간했다. 부산작가상, 최계락문학상을 수상했다.
* 사진제공_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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