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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호

일본 풍토기

평론: 김동윤

4‧3 난민의 신념과 실천:
김시종 시집 『일본 풍토기』

김동윤(제주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1.

   지난 6월 23일 오후, 90대 중반의 김시종(1929- ) 시인이 지팡이를 짚고 제주국제공항에 나타났다. 제주에 사는 외조카 부부가 김시종 내외 일행을 마중 나왔다. 그들이 향한 곳은 다호마을에 있는 김시종 부모의 산소였다. 노 인은 무덤에 엎드려 마지막일지 모를 인사를 올렸다. 공원 개발 사업으로 인해 산소 인근은 파헤쳐지는 중이었다. 이장이 불가피한 상황인지라 그는 주치의의 만류를 무릅쓰고 노구에 제주 방문을 감행했던 것이다. 사실 그가 2003년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한 것은 전적으로 성묘를 자주 다니겠노라는 결단에 따른 것이었다. 그때부터 여러 차례 다녀가긴 했지만 이번의 경우 코로나19 등으로 인해 꽤 오랜만의 발길이었다. 김시종은 이장 예정지 방문, 제주문학관 행사 참석 등의 제주 일정을 마치고 26일 오사카행 비행기를 탔다.
   김시종은 4‧3 항쟁에 연루되어 1949년 초여름 밀항했다. 오사카에서 재일조선인으로서 풍찬노숙의 삶을 시작한 그는 1950년부터 여러 매체에 일본어로 시를 발표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지평선(地平線)』(1955) 이후 『일본 풍토기(日本風土記)』(1957), 『니이가타(新潟)』(1970), 『이카이노 시집(猪飼野詩集)』(1978), 『광주시편(光州詩片)』(1983), 『화석의 여름(化石の夏)』(1999), 『잃어버린 계절(失くした季節)』(2010), 『등의 지도(背中の地図)』(2018) 등의 시집을 냈는데, 이들 중 『등의 지도』만 빼고는 모두 한국어로 번역되었다. 『일본 풍토기』는 초기 시집임에도 불구하고 2022년에야 곽형덕에 의해 번역되었다. 사실 이번에 번역된 『일본 풍토기』(소명출판, 2022)는 1957년에 간행된 시집만이 아니라 미간행본 『일본풍토기』 2권까지 포함된 것으로, 1956년에서 1961년 사이의 작품 59편이 수록되어 있다. 김시종의 재일 생활 7-12년에 해당하는 시기이자,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이던 시기의 작품들이다.

2.

   외가인 제주에서 해방을 맞은 김시종은 남로당 연락원으로서 4‧3 항쟁에 참여했다. 주로 삐라 살포 활동을 하던 그는 1948년 5월 말 제주 우체국 화염병 투척 미수 사건에 가담했다가 구사일생하여 쫓기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도립병원, 미군기지 텐트, 탑동의 헛간, 외숙부네 구덩이, 사촌 집 고방 등지를 전전하며 1년간의 도피 생활 끝에 그는 일본으로 탈출함으로써 4‧ 3 난민이 되었다. 제주에서 떠날 때 아버지의 마지막 전언은 “설령 죽더라도, 내 눈이 닿는 곳에서는 죽지 마라. 어머니도 같은 생각이다”1)였다. 시집 『일본 풍토기』에는 “야음을 틈타 울타리를 잘”라낸 아버지를 뒤로 하고 “홀로 거리로 날개 쳐 나아간/아들”(「가출」) 김시종의 젊은 시절이 여러 겹으로 비틀리면서 녹아 있다.
   4‧3 항쟁 당시 봉기 주체들은 ‘탄압이면 항쟁’이라면서 ‘단선반대 통일독립’을 외쳤다. 항쟁에 혼신을 다했던 김시종은 난민이 된 후에도 혁명 활동의 기억 속에 하루하루를 살아갔다. “봄은 우리의 것이었다”(「우리들은 하루를 싸워 이겼다」)라는 표현은 제주 섬을 뒤흔들었던 항쟁의 봄을 염두에 둔 것으로 짐작된다. 첫 시집 『지평선』에서도 그는 “봄은 불꽃처럼 타오르고 진달래가 숨쉬고 있습니다”(「봄」)라며 열정적이었던 항쟁의 기억을 소환한 바 있다. 불행히도 혁명의 좌절은 대학살의 비극으로 이어지고 말았다. “휘익/펼친 로프에/영겁/질름질름 울혈(鬱血)하는 것은/의형 김(金)이다. (……) 흘러내린 바지 위에 얼룩져/제주도 특유의 뜨뜻미지근한 계절풍에 용해돼 갔다”(「나의 성 나의 목숨」)는 상황은 학살과 관련된 상상력의 산물이다. 고래가 죽을 때 남근이 발기된다는 사실을 의형의 죽음에 접목하는 가운데 특별경비대 대장의 일본도(刀)에 그것이 잘려 나가는 장면을 형상화한 것이었다. 이는 4·3 항쟁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가해졌던 처참한 폭력이 친일 세력의 준동과 관련됨을 암시하는 한편, 그것은 또한 친일파를 중용한 미군정 정책의 문제점을 지적한다고 할 수 있다.
   오사카 일각에서 매립지를 대규모로 파서 엄청난 양의 쓰레기를 묻어 버린 일이 있었는데 그 대량 쓰레기의 대부분은 어족(魚族)이었던 모양이다. 그 장면을 목격한 김시종은 “참치가 등신대”임을 말하면서 인간에 대한 대량 학살을 연상시키고 있다. “백주대낮의 공공연한 학살을/이 눈은 끝까지 지켜봤다”면서 “나는 이전에도/이러한 장례식을 알고 있다./탄 사체는 분명히 검게 그을렸는데/시대는 산 채로, 목숨을 끊고 사라졌다”(「처분법」)고 입술을 앙다물고 있다. 그런 무자비한 학살로 인해 숭고한 혁명의 시대는 사라지고 말았다는 장탄식이 아닐 수 없다. 4‧3 항쟁 시기의 대학살은 일상에서도 환기된다. 「제초」에서는 당시의 초토화 작전이 떠올려진다. “낫/이 있냐고?/ 당치도 않은 소리!/기세 좋은 무성한 여름풀은/그 정도로 꺾이지 않아/(……)/ 휘발유를 뿌린다./그리고/불을 붙여서/조금 떨어진 곳에서/어깨에 맨 분사기로/호스를 향하면 된다./불은 그렇게 다루면/한층 커진다”에서 보듯, 낫으로는 쉽게 제거되지 않는 여름풀을 ‘근절’하기 위해 ‘휘발유’를 뿌려 불태우는 방식이 동원되는 장면이 제시된다. “대한민국을 위해 온 섬(제주도)에 휘발유를 뿌리고 불태워 버려야 한다”던 조병옥 경무부장의 발언이 어렵지 않게 떠올려진다. 실제로 굴에 숨었던 어린이와 노약자 등 40여 명의 주민을 학살하고 휘발유를 뿌려 시신을 유기한 일(선흘리 목시물굴 학살 사건)도 있었다.

3.

   목숨 걸고 탈출하여 난민이 된 김시종은 4‧3의 기억을 그 저변에 묵직하게 간직한 가운데 재일조선인으로서의 나날을 꾸려갔다. 그는 일본 공산당 입당에 이어 재일조선통일민주전선(민전) 등에서 활동하면서 새로운 실천을 도모하게 되었다. “내게 어제까지/그곳의 길모퉁이는 내 흔적을 감추기 위해서만 존재했다./그러므로 내 진보와 도망이라 함은 언제나 샴쌍둥이다”(「종족 검증」)라고 했듯이, 밀항(도망)으로 난민이 되었어도 좌절하지 않고 혁명적 실천(진보)은 계속한다는 신념을 견지했다. 물론 그것은 냉엄한 성찰에 기반한 것이었다.
   김시종은 “내 도피는/여기서 완전히 끝났다”라는 인식 아래서 “필사적인 종(鐘)”(「이카이노 이번지」)으로서 직면한 현실에 과감히 부딪쳐 소리 내고자 했다. 어쩌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는 막다른 골목길”(「25년」)에서 좌절할 수도 있었겠지만 미완의 꿈을 향한 필사의 행보는 꾸준히 이어졌다. 밀항자를 가두는 일본 정부를 향해 “이보시오./제대로 다시 태어난 일본이라면/감방을 열어라!”(「감방을 열어라!」)고 외치기도 했다. “같은 말을/계속 되풀이해/그렇게/같은 몸짓으로/십 년이 지났다./십 년을 울었다”(「흰 손」)면서 원폭 피해 고아의 고통도 노래했는데, 이는 그가 고아의 상황에 자신을 의탁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4‧3 항쟁은 통일 독립을 위한 혁명이었다고 믿는 그에게 분단된 남과 북은 그 어디도 온전한 조국이 아니었다. “이승만이/싫고/한국을 좋아할 수 없”는 처지면서도 한국과 일본의 축구 경기에서 그는 “‘조선’이 이기길 바랄 뿐”(「내가 나일 때」)이라고 현실을 초월하는 발언을 한다. 여기서의 ‘조선’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아닌 통일된 조국을 미하는 것임은 물론이다. 그는 “일본에 온 것은 그저 우연한 일이었다./요컨대 한국에서 온 밀항선은 일본으로 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라면서 일본에 동화되는 것을 경계하는 가운데 언제나 조국을 생각했다. 그는 폭력으로 4‧3을 진압한 남선(南鮮)이 싫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 북선으로 가고 싶지 않다”라고 했다. 그것은 “한국에서 홀어머니가 미라 상태로 기다리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심지어 심지어/나는 아직/순도 높은 공화국 공민으로 탈바꿈하지 못했다!”(「종족 검증」)는 진술에서 보듯이, 북한을 온전히 지지하지 않는다는 데 더 큰 원인이 있었다. 한국전쟁 후 박헌영과 임화 등의 남로당 핵심들이 미제 간첩으로 숙청되는 상황을 김시종으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이다. 김시종은 결국 조선총련과 충돌하면서 자신의 위치를 재정립하는 험난한 길을 택함으로써 더 큰 성취의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시집에 수록된 작품들이 창작되던 기간에 그의 부모가 세상을 모두 떠났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아버지는 1957년 9월에, 어머니는 1960년 4월에 타계했다. 『일본풍토기』 1권의 「후기」에서는 “‘한국’이라는 격절된 세계에서, 외동아들인 내 보살핌을 전혀 받지 못하고 돌아가신 아버지께, 애오라지 이 옅은 사랑이나마 담긴 시집을 바친다”라고 밝히고 있음에 비춰볼 때, 『일본풍토기』 2권이 제대로 간행되었다면 어머니의 부고 관련 메시지가 명기되었을지도 모른다.
   김시종은 아버지의 부고를 접한 후 “한 시간 거리의/바다에 가로막혀/바짝 말라 버린 엄니가 말합니다./우두커니/ 천정을 우러러보며/그저 기다리고 있을 뿐인 자식이 있답니다”(「두 개의 방」)라고 적었다. 아버지와 사별한 뒤 김시종은 ‘바짝 말라 버린’ 어머니를 떠올린다. 홀로 된 어머니는 만날 수 없는 아들을 그저 기다리고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비행기를 타면 한 시간 남짓에 건널 수 있는 바다지만 ‘4‧3 공산폭동론’이 견고하던 당시로선 도저히 넘을 수 없는 차단된 공간이었으니, 아들의 성묘는 불가능하다. 「비와 무덤과 가을과 어머니와」에서 보면, 아버지의 산소는 여전히 외롭다. “무덤이 젖는다./무덤이./아버지의.//집은 늘어서도/옴폭옴폭/어머니는/그 안에 눕는다.//살아 있는/미라./오 이 나라(남조선)는/그 얼마나/멀리까지 내다보이는/무연고 무덤인가.//어머니여./산이 부옇게 흐립니다./바다가 부옇게 흐립니다./그 아득한/너머가/들판입니다”라는 부분에서 그의 하염없는 눈물을 읽을 수 있다. 어머니는 더욱 바짝 말라 ‘미라’처럼 되어버렸기에 제대로 관리되지 않는 아버지 무덤 옆에 안장될 날이 가까워졌음이 감지된다. 눈물이 그치지 않으니 산도 바다도 부옇게 흐릴 수밖에 없다. 아버지 무덤에 성묘할 수 없고 노모를 만날 수 없는 상황에서 느끼는 아득함은 절망적이다. 조국의 현실도 그만큼 흐리고 어둡다.
   미라 같던 어머니 역시 기어이 별세했다는 소식이 전해져 온다. “한국 제주도 우체국에서 보낸/항공우편”의 봉투를 열면서 김시종은 그것을 ‘한국산 관’으로 인식한다. “엎드려서/옻을 먹고/산 채로/미라가 된/어머니의/칠십여 년에 걸친/고별의 편지”가 도착한 것이다. 어머니는 향년 72세였다. 아들은 “멀다./끝없이 멀다./달을 향한 길이 열려도/거리를 궁구할 수 있는 날은/영원히 오지 않으리./어머니여”라며 지척의 제주 섬이 달보다도 더 멀다는 현실에 처절하게 탄식한다. 그러나 “언젠가 부화할/때 묻지 않은 푸름을 바친다./어머니의/저주와 사랑에 얽힌/변전하는 땅에서/요격 미사일에 쫓기는/비행기 모습처럼/아버지의 고향/원산을 생각한다”(「밝힐 수 없는 거리의 깊이에서」)라는 데서 보면 그는 결코 좌절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푸른 희망이 언젠가는 껍질을 뚫고 새로이 펼쳐질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김시종이 부모를 그리워함은 혁명의 기억과 성찰에 맥락을 같이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그가 한없이 부모를 그리워하고 성묘조차 못하는 안타까움을 노래하고 있는 모습은 특정한 개인사로 읽어서는 안 된다. 약 1만 명으로 추정되는 4‧3 난민의 역사가 김시종 문학의 상상력으로 갈무리되어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4.

   수십 년 세월이 흘러 2001년 김시종은 문경수의 사회로 김석범과 대담을 했고 그것이 『왜 계속 써왔는가 왜 침묵해 왔는가』(2007)로 출간되었다. 이 책의 제목을 보면 4‧3 항쟁에 대해 김석범은 계속 써온 반면, 김시종은 계속 침묵해 왔다고 인식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오해다. 단지 김시종은 4‧3의 정당성 훼손과 강제 송환에 대한 염려로 인해 자신이 4‧3 활동가였음을 발언하지 않았던 것이었을 뿐, 4‧3에 대해 말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이 시집뿐만 아니라 첫 시집 『지평선』에서 이미 「봄」 등에서 확인된 바 있거니와 『일본 풍토기』 2권과 비슷한 시기에 창작된 『니이가카』에서는 더 짙은 4‧3 항쟁의 그림자를 읽을 수 있다. 김시종은 지난 6월 24일 제주에서 열린 국제문학 포럼(‘불온한 혁명, 미완의 꿈: 김석범과 김시종’)에 참석하여 지금까지 자신을 지탱케 한 것은 4‧3 항쟁 때의 신념과 열정이었음을 토로했다. 그런 일련의 과정을 볼 때 4‧3 난민의 성찰과 확장 과정을 보여주는 김시종 문학의 앞자리에 우뚝한 일본풍토기야말로 세계 문학의 전범으로 평가되기에 충분하다고 믿는다

참고자료

1) 김시종, 윤여일 옮김, 『조선과 일본에 살다』, 돌베개, 2016, 223쪽.

필자 약력

1964년 제주도 출생. 제주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문학평론가. 저서로 『문학으로 만나는 제주』, 『작은 섬, 큰 문학』, 『소통을 꿈꾸는 말들』, 『제주문학론』, 『기억의 현장과 재현의 언어』, 『4·3의 진실과 문학』, 『우리 소설의 통속성』, 『신문소설의 재조명』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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