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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호

수세인트마리 운하여

문인귀

   나는 1968년 5월 28일 김포를 떠나 일본 하네다 공항을 거쳐 알래스카로, 알래스카에서 밴쿠버로 가 이민 수속을 마치고 토론토(Toronto)를 거쳐 수세인트마리에 도착했다. 내가 4년 만에 민주를 다시 만나게 된 곳은 캐나다의 온타리오주와 미국의 미시간주 사이에 걸쳐 있는 수세인트마리(Sault Ste. Marie)라는 동명(同名)의 두 도시가 마주 보고 있는 수록스(Soo Locks)라 불리는 운하가 있는 곳이다.
   두 도시 사이를 비집어 흐르는 세인트 메리라는 강을 이용해 두 나라가 1798년에 운하(Sault Saint Marie Canals)를 만들었다. 그러나 1812년에 시작된 두 나라의 전쟁으로 1814년에 이르러 운하가 파괴됐고, 그 후 40년이 지난 1855년이 되어서야 운하가 재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물 높이가 다른 두 호수가 만나는 곳에는 강이 생긴다. 높낮이를 고르기 위해 강을 이루는 물의 생리는 흘러야만 높이를 고르기 때문이다.
   오대호 중 수면이 가장 높은 것은 슈피리어호(Lake Superior)로, 인접한 휴런호(Lake Huron)보다 23.6피트(약 7.2미터)나 높다. 이 거대한 슈피리어 호수를 품고 있는 대륙의 지하자원을 운반하기 위해서 운하를 만들어 인위적으로 물 높이를 같게 했다. 하지만 한겨울에는 약 4개월 동안 운하를 닫아둔다. 혹한으로 생기는 결빙 때문이다.


   나는 민주와의 만남의 고비를 1968년도, 1964년도, 1962년도, 아니, 그보다 더 오래전부터 시작된 일들로 거슬러 이어놓고 지금도 그 일들로 나란히 우리의 눈높이를 맞추며 이제는 구부정해 가는 손가락들을 얽어 둘이 손깍지를 하고 걷는다. 주름이 늘어가는 마른 손등을 서로 쓰다듬어 따스함을 보태며 ‘오래됨’에 만족하며 살고 있다.
   생각하면 금방 엊그제 일처럼 생생하게 떠오르는 우리의 60년 세월, 그 자잘한 셀 수 없는 입자들로 엮인, 그때나 지금이나 가벼워짐이 없는 우리의 찰진 파워는 여전하다.
   손을 맞잡고 길을 나서면 먼빛에 비치는 사람들마저 밝은 눈빛과 함께 미소를 보내온다. 그들의 눈길은 건너오는 족족 우리의 가슴을 툭툭 건드려 준다. 그러한 그들을 향해 우리도 눈웃음을 보내며 자랑스러움을 느끼는 우리, 그게 그리도 좋다.


   민주는 1964년 5월에 가족과 함께 한국을 떠났다. 그날부터 4년을 우리는 오도 가도 못하는 결빙 속에 갇혀 지내야만 했다.
   내가 민주를 처음 본 것은 민주가 중학교 1학년 때였다, 그때부터 우리가 시쳇말로 사귀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러나 나름대로 우리는 적당껏 서로를 따랐고, 그러다가 결국 민주가 고등학교 2학년생일 때 나는 민주를 향해 못 견디는 가슴을 털어 보이고 말았다. 그러고는 1년 남짓 사람들 눈을 피해 버스 데이트나 골목길을 도는 정도로 아쉬움만 잔뜩 채우는 만남을 나누다가 나는 군에 입대했고 민주는 E여대 1년을 마치고 캐나다로 떠나게 되었다.
   민주가 한국을 떠나던 날을 전후해서 나는 서울 모처에 있는 군 특수부대에서 석 달 동안 훈련을 받게 되었다. 그것은 우리에게 천행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민주의 집은 훈련소에서 불과 15분 거리였으니 우리는 거의 매일 저녁 면회실에서 마주 앉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민주는 떠나기 전날 저녁에 내가 좋아하는 복숭아 통조림을 사 들고 왔다. 우리는 면회실에서 ‘마지막의 간식’이라며 웃었지만…… 결국은 부대 입구 초소 옆에서 마지막 포옹을 했다. 자꾸 돌아보며 깜깜한 밤길로 들어가는 민주 모습을 떠올리며 밤을 새우면서 아침 일찍부터 떠나야 하는 시간을 세고 셌다. 그럴수록 나는 평정심을 잃어가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점심시간이 되었다. 나는 가깝게 지내는 훈련 동료 몇에게 말했다.
   “나, 지금 탈영할 거다. 오늘 X초소 담당이 누구누구냐. 밤 점호 전에는 돌아올 테니 알아서들 해달라.”
   나는 내 점심과 저녁 식권을 그들에게 넘기고 일단은 학생 대장실로 갔다. 부사관이 물었다.
   “무슨 일이냐?”
   “외출 허락을 받으러 왔습니다.”
   “훈련 중에 외출을 하겠다? 무슨 관보라도 왔나?”
   “관보는 아닙니다. 김포공항만 다녀오면 됩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안 돼! 너 그 여학생 때문이지? 여자들이 그렇게 멀리 떠나가면 마음 바뀐다. 이 순진박이야.”
   부사관이 낄낄 웃었다. 예상한 답이라 나는 ‘물러갑니다!’를, 마치 엿 먹으라는 듯 크게 외치고 돌아서는데 학생 대장이 불러 세웠다.
   “무슨 일이 있는가?”
   부사관이 나와 민주 사이를 봐온 터라 대신 설명을 했다.
   “문 상병이 사귀는 여학생이 오늘 캐나다로 떠난답니다.”
   학생 대장이 웃으며 말했다.
   “너, 지금 어디에 와 있는 줄 알고 있나?”
   “예네.”
   “그런데?”
   학생 대장은 나를 한참 쳐다보더니 부사관에게 말했다.
   “문 상병 성적이 어떤가?”
   “지금까지 전체 1등입니다.”
   “직업군인도 아닌데? 너, 그러면 하사관 하는 게 어떤가?”
   “싫습니다.”
   “왜?”
   “제대하는 대로 민주를 만나러 가야 합니다.”
   “그러면 외출 못한다. …… 그런데 말이야, 만약 네가 1등으로 졸업하는 것을 포기한다면 외출을 허락하지.”
   부사관이 따라붙었다.
   “넌 1등을 해봤자 아무 짝에도 못 써먹어. 지금 2등이 박○○ 하사인데, 네가 양보하면 박 하사는 진급하는 데 도움이 된다.”
   나는 귀가 번쩍했다.
   “1등 필요 없습니다! 꼴등 해도 좋습니다. 지금, 외출만 허락해 주십시오.”
   “김 상사, 문 상병 외출시켜라. 귀대 시간은 내일 아침 8시다.”


   나는 그길로 반도호텔로 갔다. 그때는 김포공항 가는 사람들을 위해 지금의 롯데호텔 자리에 있던 반도호텔 앞에서 버스가 운행했다. 사람들이 완전 인산인해였다. 내가 반도호텔에 온 것을 민주는 보지 못했다. 내가 도착하는 순간 민주는 식구들과 함께 택시에 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많은 전송객이 버스로 몰려갔다. 나도 뛰어가 어렵사리 버스를 탈 수 있었다.
   내가 공항에 나타난 것은 민주에게 충격이었다. 가족들을 피해 어렵사리 다가왔다. 우리는 약간 후미진 곳으로 갔다. 서로 입을 다문 채 그저 바라만 보는 것으로 시간을 보내자고 약속이라도 한 듯 쳐다만 보았다. 아니, 말할 틈이 없기도 했다. 사람들이 돌아가면서 사진을 찍는 바람에 민주는 내 곁에 오래 머물 수가 없었다. 결국, 탑승 수속 시간이 되었다. 한 떼의 사람들이 민주의 가족을 따라 걸어갔다. 나는 그들 틈에 끼어 자꾸 돌아보며 가는 민주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따라갔다.
   이제, 마지막 관문. 비행기표와 여권을 가진 사람과 빈손인 사람들이 이렇게도 철저하게 나뉘는구나 싶게 가슴 에이는 순간이 되었다. 가족들 맨 뒤를 따라가던 민주가 수속을 마치는 순간 돌아봤다. 나는 사람들을 헤집으며 민주 앞으로 나아갔다. 내가 이르자 가지고 있던 꽃다발을 내밀었다. 사람들이 조용해졌다. 나는 꽃다발과 함께 민주를 끌어안았다. 아니, 민주를 깊숙이 호흡했다. 그러고는 어서 들어가라고 등을 다독이며 밀어주었다. 나는 고개를 떨구고 계단을 내려가는 민주의 하이힐 굽 소리를 듣고 있었다. 한참은 더 가야 할 텐데 갑자기 하이힐 소리가 그쳤다. 나는 급히 그 통제선을 넘어 문 안쪽으로 밀고 들어섰다. 급작스러운 나의 동작에 놀란 공항 직원 둘이 나의 양팔을 낚아챘다. 반쯤 들이민 나를 민주는 계단에 서서 올려다보았다. 결국엔 직원들이 나를 밀쳐내고 출입문을 닫았다.


   우리는 그렇게 떨어져 4년을 지냈다. 그동안 1주에 한 번씩 편지를 주고받았다. 이렇게 편지를 주고받는 일은 우리를 연결하는 유일한 물리적인 수단이었는데, 그것도 호랑이보다 더 무서운 민주 부친에게 우리의 기가 찬 편지들이 들켜 민주 집안이 발칵 뒤집히고 만 것이다. 그동안 내가 보낸 선물은 강제 반송되어 왔다. 완고한 부친의 반대는 날이 갈수록 강해졌다. 그러나 민주의 극한 투쟁은 마침내 캐나다 독립 100주년 기념으로 1967년 동양인 이민을 허락한다는 이민법 개정이 해결해 주었다. 민주는 이민국으로 달려가 나를 배우자로 초청했다. 그때 민주는 간호대학 졸업반이어서 수입이 있었기 때문에 다행이었다.
   민주가 이민국에 들고 간 서류 중 우리 두 사람이 약혼한 사실에 대한 유일한 물증은 떠나기 전 둘이서 사진관에서 찍은 사진 한 장이었는데 그 사진이 물증으로 인정받았고 나는 최초의 한국인 배우자 초청에 의한 이민자가 된 것이다.
   내가 수(Soo)에 도착한 다음 날 우리는 예의 그 약혼 사진을 들고 이민국으로 갔다. 민주는 이민관 말대로 나와 함께 확인을 시켜주려고 한 것인데 이민관은 민주가 찾아온 것을 보고 배를 쥐고 웃었다. 이민 신청을 할 때 민주가 가지고 간 나에 대한 서류라고는 둘이서 찍은 사진 한 장이었으니 너무 어이가 없었지만, 설명하는 민주의 당당한 모습과 우리의 관계는 충분히 감동적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는 알 수 없어도 신청서에 허가한다는 사인을 하면서 내가 도착하거든 데려와 사진과 대조 확인을 해야 한다고 농담했다는 것이다. 지금 같아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일 것이다.


   토론토에는 다음 날 아침 8시에 도착했다. 민주가 기다리는 수로 가는 비행기 편 환승은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내가 옮겨 탄 비행기는 소형 프로펠러 비행기였다. 옆자리에는 말쑥하게 정장을 차려입은 백인 신사가 앉았다. 나는 속으로 제발 말 좀 걸지 말아달라고 빌었지만, 아니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대뜸 어디서 오는 것이냐고 물어왔다. 무조건 나는 외워둔 말을 했다.
   “I can not speaking English.”
   “Oh, yes, your speaking is no problem at all.”
   토론토에서 수까지 한 시간 반을 타고 가는 동안 그는 줄곧 말을 걸었다. 나는 더듬거리며 대꾸를 했지만, 우리가 나눈 대화의 요지는 다음과 같은 간단한 내용이었으나 덕분에 비행시간이 엄청 짧은 것 같았다.
   “어디서 오느냐?”
   “한국에서 온다.”
   “사우스 코리아냐 아니면 노스 코리아냐?”
   “코리아다. 우리는 코리아라고 부르며 북한은 노스 코리아라 부른다.”
   “우리 옆집에 박재영이라는 한국인 버섯 박사가 산다. 그 집에 가는가?”
   “아니다. 나는 민주라는 약혼녀한테 간다. 그녀는 지금 간호대 학생이다.”
   “아, 그러는가. 나는 메디컬 닥터이다.”
   비행기가 고도를 낮추기 시작했다. 내다뵈는 풍경은 온통 청빛 아니면 녹색뿐이었다. 맑은 하늘과 푸른 호수와 온통 녹색으로 짙게 덮인 숲들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벌겋게 헐벗은 산만 보이던 한국의 마지막 땅이 떠올랐다.


   짐을 찾아 끌고 민주가 나와 있으려니 하며 출구 쪽을 두리번거리는데 민주는 보이지 않았다. 무슨 소린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 공항 확성기에서 계속 떠들고 있었다. 동석했던 신사가 출구를 향해 나가다가 먹먹하게 서 있는 내게 왔다.
   “지금, 공항 안내방송이 너를 찾고 있다. 따라오라.” 하며 나를 데리고 데스크로 갔다. 공항 직원이 전화기를 건네주었다. 민주였다.
   “저예요! 민주. 불안해서 죽을 뻔했어요.”
   반울음의 외침이었다. 원래 토론토 도착이 전날 밤이었는데 밴쿠버에서 동양인 이민자가 몰리는 바람에 지연되어 많은 사람이 환승에 차질이 생겨 나도 스케줄이 꼬였기 때문이다.
   “어제부터 공항에서 전화 오기만 기다리고 있었어요. 공항이 가까우니까 20분 후면 도착할 거예요. 꼭 그 자리에 계셔야 해요.”
   “으응.”
   실로 만 4년을 노려온 해후. 이럴 땐 가슴만 벅차는가 싶었다.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공항 직원에게 전화기를 돌려주고 밖으로 나왔다. 시골 공항은 안팎으로 한산했다. 기후는 한국과 비슷한 5월이었다. 부웅- 부웅- 어디선가 굵은 뱃고동 소리가 들려왔다. 전혀 움직임이 없는 공항 입구에 짙은 감청색 세단 한 대가 들어오고 있었다. 차는 곧바로 내 앞으로 와 멎었다. 뒷문을 열고 민주가 뛰쳐나왔다. 민주가 내 가슴에 자신을 던졌다. 내 얼굴이 온통 그녀의 머리카락에 덮여버렸다. 왜 이제 왔냐며 쿵쿵 가슴을 쳐대는 민주, 나는 아무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안겨 흐느끼는 민주의 어깨너머로 차 안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운전석에는 민주 여동생이 앉아 있고 옆에는 민주 어머니가 웃고 계셨다. 나는 민주의 등을 다독이며 말했다.
   “인제 그만……, 어머니께 인사드려야겠어.”
    민주 어머니는 여전히 부드럽고 따뜻한 미소로 반겨주셨다. 다행이다 싶었다.
   “오랜만이구나. 고생했다.”
   경희가 헤헤거리며 말했다.
   “인제 형부라고 불러야겠네요? 여전히 멋있으셔요.”
   모두 웃었다.
   “이 세단은 언니가 지난달에 샀어요. 형부 오면 선물한다고.”
   민주를 돌아봤다. 가늘게 눈을 뜬 채 조용히 웃고 있었다. 깎지를 한 손가락들에 힘을 주었다.
   집으로 가는 길에 수록스에 들를 수 있었다. 마침 길이가 220미터가 된다는 초거대 화물선이 운하를 지나는 작업 중이었다. 그런 장관이 없었다. 물 높이가 다른 호수들이 수면을 고르고 있는 것이다. 상상을 초월한 크기의 화물선을 슈피리어 호수로 옮기기 위해 물을 채우고 있었다. 나라가 다르고 언어가 다르고 문화가 다른 곳에서 민주와 나의 높이가 새롭게 시작하는 한 높이를 위해 채워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2023년 1월 초, 우리 부부는 괌(Guam)에 다녀왔다. 돌아오는 길에 공항에서 생각지 않은 일이 발생했다. 난처했다. 그러나 공항에서 만난 이지라는 항공사 직원을 만나 이지(easy)하게 일을 풀 수 있었다. 아내가 이지에게 말했다. 어쩌면 이토록 분에 넘는 도움을 주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이지가 그랬다.
   “좋으신 분들을 만나면 그렇게 되는가 봐요.”
   우리 두 사람이 손깍지를 하고 걸으며 먼빛에 보던 그 사람은 그곳에도 있었다. 정말 그럴 만한 눈길을 받을 수 있는 나머지 생을 우리는 살아야겠다.

필자 약력
문인귀 작가 프로필 사진

1968년 캐나다 이주. 1994년 「창조문학 신인상」 시, 「한국소설」 소설 등단. 미주한국문인협회회장 역임. 「시와 사람들」 시창작교실 창립. <미주문학상> <동주문학 해외작가특별상> <풀꽃 해외 시인상> 수상. 시집 「눈 하나로 남는 가슴이 되어」 「떠도는 섬」 「낮달」 디카시집 「잎들은 뿌리를 기억하고 있다」 출판. <미주한국일보> <캐나다한국일보> ‘이 아침의 시’ 집필.
* 사진제공_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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