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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밭, 여름사람

문태준

풀밭

봄이면 오빠는 풀밭으로 들어가요
비가 오면 푸른 비옷을 입고 안개가 끼면 안개의 밀짚모자를 써요
풀밭에는 풀과 풀꽃이 많아요
내 오빠도 여러해살이풀
오빠는 풀밭에서 나오지 못하지만
이제 굳이 그럴 필요도 없어요
잠이 들면 오빠는 외가닥 풀벌레 소리를 내요

여름사람

그의 살갗은 매미 울음소리 같은 껍질 그의 목소리는 퍼붓는 억수 같은 음성 입은 옷은 늘어나
헐렁헐렁하고 구멍이 나고 빨아도 빨아도 땀 냄새는 다 빠지지 않았지 그는 여름 내내 날마다 밭을
받았어 큰 흙덩이의 거친 밭이었지 저녁이 오면 괭이 같은 발을 씻고, 물외냉국에 찬밥을 말아 뜨고,
여름 모기장 속으로 들어가 한숨을 길게 놓았어 그러곤 홍자색 꽃망울 같은 눈을 꼭 감았지

필자 약력
문태준_프로필.jpg

1994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수런거리는 뒤란』, 『맨발』, 『가재미』, 『그늘의 발달』, 『먼 곳』, 『우리들의 마지막 얼굴』, 『내가 사모하는 일에 무슨 끝이 있나요』, 『아침은 생각한다』 등이 있다. 노작문학상, 소월시문학상, 목월문학상, 정지용문학상, 박인환상 등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