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title_text

2호

해바라기

안경자

   젊은 여자가 일어난다. 통근 기차가 도착할 시간. 이제 남편 안토니오가 돌아오는 시간, 소피아는 자기도 모르게 가지고 온 가방을 부둥켜안고 따라나선다. 조그마한 마을, 조그만 정거장, 기차는 기적을 울리며 들어온다. 사람들이 내린다. 안토니오가 내린다. 젊은 여자, 이제는 안토니오의 아내가 된 그녀가 다가가 소피아가 온 것을 알리는 모양이다. 남편은 그 자리에 굳어 이쪽을 바라본 채 서 있다.
   꿈에 그리던 남편, 죽은 줄 알았던 남편, 이제 살아 있다는 것이 확인된 순간, 이미 남의 남편이 된 안토니오, 두 사람은 먼 거리에서 바라보고만 서 있다. (아! 잊지 못할 소피아 로렌의 표정. 슬픔과 고통과 원망과 미움이 한데 엉켜서 통곡이 터져 나오려는 순간, 아니 눈물도 통곡도 마비된 처절한 저 얼굴!)
   안토니오는 모든 시간이 정지되어 버린 듯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다. 이럴 수가. 이럴 수가……. 한 걸음 한 걸음 아내를 향해 걷는다. 그것은 오래고도 오랜 잠재의식, 아내를 향한 잠재적 그리움의 발동이다. 기차가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과 동시에 소피아 역시 남편 쪽으로 마주 간다. 둘이 와락 껴안는가 하는 순간! 모든 시간이 그대로 멈추고 두 사람의 영혼이 재회의 찬란한 슬픔 속으로 녹아버릴 것을 기대하던 순간! 그녀는 안토니오를 거기 그 자리에 놔둔 채 이제 막 속력을 내기 시작한 기차로 뛰어오른다. 어디서, 도대체 그녀의 어느 구석에서 그런 의지가 튀어나온 것일까? 사람들은 다급하게 그녀를 끌어올리는 데에 전력을 모았고, 마음 없는 기차는 이젠 되었다는 듯 사정없이 달려버린다. 아무 자리에 몸을 던져놓고 그녀는 그제야 통곡한다. 뼛속 깊이서 터져 나오는 오열은 주위 모든 시선을 지워버린다.
   소피아 로렌의 피보다 더 진한, 소리 없는 통곡 소리가 지금도 내 가슴을 친다. 그렇게 해서 그녀는 사랑하는 남편을 거기 놔두고 혼자 돌아온 것이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녀는 반미치광이가 된다. 아무렇게 자기를 던져버린다. 온 동네의 비난 같은 게 다 무어냐. 가족이 무슨 상관이냐. 그녀는 이젠 사는 의미를 상실해 버린 것이다. 삶의 전부이던 그이. 차라리 생사를 모르고 기다리던 때가 행복했다. 하루하루 고통 속 그리움이었지만 그래도 그때는 사는 이유가 분명하게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것도 없지 않으냐.
   전쟁터에서 패잔병이 된 안토니오, 이국땅 눈 속에서 죽어가던 그를 한 여자가 필사의 힘을 다해 구해 주었다. 세월은 그들을 부부로 묶어주었고, 고향에 두고 온 사랑하는 아내를 가슴에 묻은 채 어느덧 한 가정의 가장이 되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잊어버려라. 안토니오를, 그리고 지나간 세월 전부를!’ 그녀는 그래서 그렇게 허무와 동반하여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즈음, 안토니오가 돌아온다.
   처음 전화에서 그녀는 거절한다. 두 번째는 자기도 모르게 주소를 가르쳐주고 만다. 그러곤 까맣게 잊고 있던 장신구들을 찾아낸다. 거울을 들여다본다. 거울 속에는 삭막하고 거친 한 낯선 여자가 보일 뿐. 이윽고 삼라만상이 빗속에서 잠든 한밤중, 전기마저 나가버린 어둠 속, 둘은 재회한다. 촛불은 오히려 마음을 감출 수 있었다. 이제 어쩌란 말이냐? 나더러 어찌하라는 말이냐? 안토니오의 안타까운 눈빛을 더 이상 피할 수 없어진 그 순간, 갑자기 그 사이를 가르는 사정없는 소리, 아가의 울음소리! 도대체 이것은 무슨 숙명의 울림인가? 옆방에서 아기가 엄마를 찾는다. 웬 아기? 아! 그랬구나! 그랬구나! 안토니오는 아기의 방을 나가며 무심코 묻는다.
   “아기의 이름은?”
   그녀는 대답한다. 담담하게. 아주 담담하게.
   “안토니오.”
   아침, 차창으로 안토니오의 얼굴이 비친다. 슬픔이 세월화하여 깊게 자리 잡은 우울한 그의 옆얼굴. 어떠한 즐거운 일에도 웃을 것 같지 않은 그의 얼굴이 한참 보인다. 운명이 만들어놓은 남자의 주름. 이윽고 기차가 움직인다. 그녀는 혼자 그곳에 남는다. 무슨 언어가 만들어지랴. 기차는 사라져 가고 여자는 또다시 통곡한다. 그리고 영화를 보는 우리도 모두 가슴 쓰라린 눈물을 흘린다. 마지막 자막과 함께 노란 해바라기가 하나 가득 밭을 이루고 있는 영화 제목 ‘Girasol(해바라기).’

   며칠 전 채널 9에서 우연히 본 이탈리아 영화였다. 도중에 보기 시작했는데도, 말도 한마디 알아듣지 못하면서도 계속 본 까닭은 너무도 반가운 소피아 로렌과 이름은 생각나지 않았지만 아주 낯익은 전형적인 이탈리아 미남 배우 때문이다.
   밤중에 혼자 울면서 오랜만에 ‘영화’를 보는 기쁨을 가져보았다. 연출가는 배우의 온몸으로 하는 슬픈 연기, 나갔던 전기가 갑자기 들어오게 하는 설정, 자꾸 등장하는 기차와 남자 구두가 주는 의미 등에다 무게를 두었겠지만 평범한 관객은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야 하는 슬픈 운명에 일체감을 느낀다.
   전쟁은 이별을 만든다. 신혼의 신랑을 사정없이 빼앗아 가버리고는 소식은 끊어지고 일생을 기다림 속에 지낸다. 생사도 모른 채 30∼40년을 살다가 할아버지 할머니가 된 후에 이산가족 찾기 캠페인의 힘을 입어 재회하게 된 어느 부부의 이야기는 소설 『에반제린』이 아니라 우리의 현실이다.
   영화 「해바라기」는 슬픔을 안기려고 만든 작품, 우리는 눈물을 흘리며 보고 그 눈물로 인해 가슴은 카타르시스를 얻는다. 비극의 가치는 바로 마음의 정화에 있다고? 그러나 한국 티브이에 보이는 실제의 만남, 그 비극의 현실성은 너무도 처절하여 시청자를 모두 울리게 한 나머지 제작자의 잔인함에 일말의 분노마저 느끼게 한다. 한편 그 실제성 때문에 ‘이산가족 만남’ 캠페인은 더욱 활발해지는 것이고.

   외국에 이렇게 뚝 떨어져 살다 보니 순간순간 ‘잊고 있었구나. 내가! 잊지 못할 것 같았는데…….’ 하는 깨달음이 올 때가 있다. 보고 싶은 얼굴들, 그러나 하루하루의 삶에 지배당하고 보면 그 얼굴들이 묻혀버린다. 가슴 저 밑바닥에서 강물처럼 흐르고 있다가 엉뚱한 시간에 문득 떠오르면서 잊고 있던 자신의 무감각을 한탄하게 하기도 한다.
   나는 늘 마음속에서 편지를 쓴다. ‘요즘은 무슨 생각을 하니? 찻잔을 들고 있는 네가 눈에 보인다. 천천히 꿈꾸듯……. 여긴 그런 거 없어. 그저 바쁘다. 그래서 좋은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속으로 쓰는 편지는 서울의 친구에게 전해지지 못한다. ‘눈에서 멀어지는 것은 마음에서 멀어지는 것’이라는 말을 아직은 인정하지 않는데, 그것은 내 어처구니없는 자존심일 뿐이다. 아니, 자기기만일 것이다.
   이 밤, 편지를 쓰자. 몇 자 글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님을 알리자.

   후기 1: 말도 글도 모를 때 본 영화, 제대로 이해했는지 겁나지만, 한편 이런 식의 영화 감상, 곧 온통 눈치 하나에 의지하여 자기 나름대로 해석하고 그대로 슬픔에 빠질 수도 있지 않으냐 하며 써보았다. 이미그란찌(이민 온 사람)의 배짱이다.

―1983년 8월 8일

   후기 2: 6월 초인가. 실로 7년 만에 티브이에서 「해바라기」를 다시 보게 되었다. 처음 보았을 땐 도중에 본 것이라 스토리의 처음과 끝이 어떻게 맞아떨어지는지 모르는 불안이 있었는데, 이번에 보니 2차 대전 때 이야기, 이탈리아 배경, 소련과 모스크바, 연합군 묘지, 감독과 배우 이름이 스토리의 흐름을 도와 내 기억을 살찌워 주었다. 주인공 이름은 조반나였구나. 안토니오는 마르첼로 마스트로이안니. 옛 원고를 보며 뭐 그렇게 큰 엉터리는 아니었구나! 다시 내 글을 읽으면서 눈물이 도는 나의 감성이 재미있다.

―1990년 6월 8일

필자 약력
안경자 작가 프로필 사진

1942년 서울 출생.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졸업(1961-1965). 1981년 브라질로 이민, 주말한글학교 교장, 국제학교 문학교사, 한인회보 편집장으로 일하고, 재외동포신문에서 ‘기자상’을 수상했다. 재외동포재단 문학작품 응모에서 단편소설 가작이 당선됐다. 『브라질한인이민 50년사』의 문화사, 교육사, 여성사를 집필했다. 2015년부터 인스타그램 ‘@drawings_for_my_grandchildren’에서 남편의 그림에 스토리텔링을 맡고 있다. 이 활동으로 The Webby Awards를 수상했다. 2017년 영주 귀국, 그림편지집 『돌아보니 삶은 아름다웠더라』를 출간했다.
* 사진제공_필자

공공누리로고

출처를 표시하시면 비상업적·비영리 목적으로만 이용 가능하고, 2차적 저작물 작성 등 변형도 금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