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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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호

포기한 적 없는 성장

레민하

  2022년 2월 24일 목요일,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 전쟁―전쟁을 일으킨 쪽에서는 특별한 군사 작전으로 줄여 말하는 사변―이 발발했다.
  금요일, 국제학교의 기숙사에서 주말에 집으로 돌아와 쉬는 막내아들 단남이 조만간 수업에 새로운 친구가 있을 거라고 알렸다. “누구?” “선생님이 여학생 한 명이라고 했어요. 새로운 친구는 러시아에서 독일로 왔어요.” 그다음 주 금요일, 집으로 돌아온 단남은 이어 알렸다. “친구는 독일 사람이에요. 독일어를 반 친구들과 다름없이 말하죠. 러시아에 있을 때 독일 학교에서 공부했기 때문이래요. 그리고 친구 집은 분명 부유한 게 틀림없어요. 친구 부모는 모스크바에서 큰 회사를 한대요. 친구 아버지가 독일에 새 집을 샀다고 해요.”
  단남의 새로운 반 친구는 유럽 대륙에서 또다시 벌어질 거라고는 의심하지 않았던 엄청난 전쟁을 피해 첫 번째로 도망쳐 온 사람들 중 한 명일 것이다. 선진국 시민이기 때문에, 사는 게 마음 같지 않을 때 머물러 있거나 여기저기로 떠나거나 하는 것을 쉽게 선택해서 실행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들은 운 좋은 이민자들이다. 그들은 수십 명에서 수백 명, 그리고 지금에 와서는 백만 명으로 증가한, 전쟁을 피해 독일로 도망쳐 온 다른 우크라이나 사람들과는 다르다. 저들은 불가피하게 자진해 이주한 사람들이다. 그들 각각에게 떠날 것이냐 머물 것이냐 하는 선택은 사느냐 죽느냐의 선택인 것이다.

  전쟁이 일어나고 두 번째 맞은 토요일에 브란덴부르크 성문에서 열린 반전 시위에 참가한 후, 우리 부부는 베를린역에 갔다. 우크라이나에서 폴란드를 거쳐 우크라이나 난민들을 싣고 온 열차들이 도착해서 독일 전역으로 옮겨질 곳이다. 기차역의 양 끝 모두에 경찰과 자선 단체들이 영어, 독일어, 우크라이나어와 러시아어로 접수처, 안내소, 배치소를 설치했다.
  기차역 위층 전체는, 난민들을 싣고 온 기차들이 도착했다 가는 곳으로, 사람들로 꽉 차 붐비는데도 수많은 나날이 원래 그랬던 것처럼 전혀 소란스럽지 않았다. 거대한 벌집 주변같이 조용한 소리만 들렸다. 마치 다른 삶이 이곳 일상의 바쁘고 시끄러운 삶을 대체하는 것 같다. 근무 중인 한 자선 단체의 직원이 우리 부부에게 도착했다 나가는 열차 숫자에 근거해서 현재 대략 4천 명의 우크라이나 사람들이 기차역에서 다른 지방으로 갈 기차 편을 기다리고 있다고 알려 주었다. 금주 내내 낮이고 밤이고 할 것 없이 줄곧 그랬다고 한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기차역 광장에 주저앉아 있다. 몇 명이나 되는지 모르겠다. 무척 붐빈다. 7년 전 우리 부부가 일했던 곳, 베를린 난민센터 모습과 똑같다. 그때는, 내전 중인 시리아와 중동 국가 몇 나라에서 넘어온 백만 명의 난민들이 튀르키예를 거쳐, 그리스를 거쳐, 세르비아를 거쳐, 헝가리를 거쳐, 수많은 다른 유럽 국가들을 거쳐, 도로를 통해, 바닷길을 통해, 기차로, 자동차로, 맨발로 쏟아져 들어왔다.

  7년 뒤, 유럽에 속한 한 나라의 국민들도 독일로 쏟아져 들어온다. 시리아, 이라크 난민들이 나타났던 7년 전처럼 우르르. 수치를 살펴보아도 백만 명이나 된다. 난민들은 시리아나 이란, 이라크처럼 다른 대륙에서 이리로 건너왔다. 대부분은 남자들로, 젊고, 기운이 넘쳤다. 그들이 독일의 난민 수용소에 도착했을 때는 무척 생기가 돌아 웃었고, 새로운 나라에서 새 삶에 재빠르게 적응했다. 그 생활이 임시방편적일지라도, 그것만으로도 충분했으며, 주택, 사회 보장금, 의료보험, 학습과 노동 조건이 인간의 삶에 걸맞은 것이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에서 온 난민의 물결은 다르다. 드물게 남자가 있거나, 또는 노인 한 사람, 또는 열서넛 정도의 소년 몇 명뿐이다. 나머지는 전부 여자와 어린아이다. 극히 소수의 사람들만 여행용 가방을 끌고 있다. 어린애들 모두 누울 유모차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애들은 할머니나 어머니 혹은 형, 누나의 품 안에서 움츠리고 있다. 일곱 살 정도의 어린아이 하나는 할머니 둘과 동행 중이다. 더러운 천 마스크를 쓴 어린 사내아이는 분명 며칠 내내 길에서 벌벌 기며 마스크를 바꾸지 못했을 것이다. 아이 앞에는 지퍼가 고장 난 배낭이 있고, 그 안에 빈 병 몇 개가 돌출되어 나와 있다. 두 할머니가 가지고 있는 물건들이 더 많아 보이는데, 손잡이가 있는 야자실로 된 주머니 두 개에 들어 있다.
  이후에도 나는 당혹감이 가시지 않았다고 말한다. “나는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고, 이런 광경 역시 예상하지도 않았다.” 나에게는 주머니에 넣은 초콜릿 반 봉지가 있었고, 독일 보건부 규정에 따라 코로나19 감염 예방용 FFP2 마스크 몇 개와 베를린 주변을 다닐 지하철표 몇 장을 구입할 정도의 잔돈만을 가지고 있었을 뿐이었다. 어린아이가 고개를 들어 쳐다보며 또렷하게 고맙다는 말을 했을 때, 내 눈물이 흘러내렸다. 러시아어로. 두 할머니처럼. 나는 그 고맙다는 말 때문에, 그리고 그들이 하리코프(Kharkov)란 말을 반복했기 때문에 그들이 러시아어로 말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이제 막 버리고 온 도시 이름을 여전히 러시아어로 부른다.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는 원하지 않고, 원하지 않고, 원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그들에게 더 많은 질문을 할 만큼 언어 능력을 갖추고 있지 않지만 확신건대 저 우크라이나어로 하르키우(Kharkiv)라 불리는 도시에는 그들의 피붙이 남자들, 여자들이 남아 있고, 그들의 남편, 그들의 아들과 딸이 남아 있고, 어린아이의 부모가 남아 있을 것이다. 나는 어린아이가 부모에게서 갑작스럽게 떨어져서뿐만 아니라 친구들도 다 잃어버려서 어리둥절하며 두려워하고 있다고 확신한다. 순식간에 다 잃었다. 전쟁 때문에.

  우리 부부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두 세력 간의 위임된 전쟁이었다가 내전으로 변한 미국-베트남 전쟁 중 태어난 베트남 세대이다. 북베트남에 살던 우리 세대는 방공호에서 자라 왔다. 은신처나 참호에서 포탄을 피해 전장으로 나가지 않아도 되어서, 우리 세대는 2, 3년 먼저 태어난 사람들보다는 운이 좋다. 어린 시절 고향인 도시를 떠나 피난을 가야 했다. 전쟁 후에는 식량, 식품, 종이, 잉크, 펜, 생활용수, 천 같은 모든 평범한 삶에 필요한 최소한 여건이 전부 부족했지만 쓸데없는 자부심은 남아돌았던 것으로 기억에 남았다. 미 제국주의와 전쟁에서의 승리는 평생 정신적인 소지품이 되어서 어떤 식으로도 놓아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심적으로 공감은 많이 하지만 나는 강조컨대, 울지 않을 것이다. 만일 그 느낌 때문이 아니라면, 어린 시절로 끌려 되돌아가는 느낌 때문이 아니라면. 그 시절, 사람들은 나의 베트남을, 나의 하노이를 포탄으로 석기시대로 되돌려 놓겠다고 위협했다. 우리 할머니는 지금 여기 우크라이나 아이들처럼 어린 손주들을 데리고 공포에 질려 도시를 떠나 시골 마을로 가 이전에는 알지도 못하던 사람들의 좋은 인심과 친절에 의탁했다.
  벌써 반세기가 지났지만 새로운 곳에서 막막하던 느낌을, 식구들이 그립고 허전한 느낌을, 그 나날들의 두려운 느낌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그럼에도, 나는 다름 아닌 바로 내 나라 안에서의 이민자였을 뿐이었다. 나는 한숨을 내쉰다.

  굶주림 아니면 전쟁, 어떤 이유로 이민하든, 이 국가에서 다른 국가로 간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얘기다. 자신이 살아남았다고 안도하고 몇 분 후에, 이민자 개개인은 수만 가지 형태의 어려움에 맞닥뜨려야 한다. 언어로 인해, 문화로 인해, 거주 여건에 의해……. 거주 시한은 이민자에게 엄청난 압력이다. 자신이 떠나온 고향에, 언제 다시 사람들이 살 수 있고 안심하며 되돌아갈 수 있을지 아무도 모른다. 전쟁이 난 후에는 끝이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은 다시 건설될 수 있다. 그러나 흔적은 사라지지 않고, 많은 경우에 있어 간단히 아직 터지지 않은 포탄 한 발, 남아 있는 조용한 지뢰 하나가 되살아나 평화로운 시기에 갑작스레 폭발한다. 가난했다고 해도 끝이 있을 수 있다. 만일 고향이 홍수로, 가뭄으로 천지가 격노하는 곳이 아니라면. 그리고, 내전이 필수적인 것이 아니라면. 고향을 사랑하는 것이란 그런 것이다. 그러나 수많은 이민자들에게, 고향은 위협적인 곳이 되었고, 멀리 심지어는 영원히 떠나기를 바라는 곳이 되었다. 그러나 이민자도 자신이 도달한 나라에서 임시로 몸을 피할 수 있게 될지, 얼마나 오래 기거할 곳을 찾게 될 수 있을지 모른다. 발급받은 소지 문서 위에 적힌 짧은 거주 시한은 잔인한 놀림과 별다를 것 없을 때도 많다. 그걸로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기도 어렵고, 일자리가 없으면 임시 거주 기간을 연장할 수도 없다. 멀리 있는 고향도 마찬가지이다. 사람들은 떠났다가, 애가 타게 그리워 돌아오지만, 동시에 돌아가야 할 때는 두렵다. 경제적인 이유로 개발도상국에서, 같은 의미로 가난하고 어떤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국가에서 온 난민에게는 이곳에 사나 저곳에 사나 절망적이기는 마찬가지다. 하루라도 독일 같은 선진국에 머물 수 있게 된다면, 그날은 굶주리지도 않고 춥지도 않은 날이라면, 다를까? 전쟁 난민에게는, 전쟁이 끝난다는 것이 고향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시한이다. 무너지고, 황폐하고, 지뢰가 놓여 있을 고향 집. 누가 원할까?

  수많은 연구에 의하면, 이민자들이 어떤 새로운 지역에서 6년 정도 살게 되면 그들 대다수가 영원히 그곳에 머물고 싶어 한다고 한다. 그들은 고향에 있는 가족들의 삶에 대해 크게 의식하면서 바로 그 자신의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자신에게는 타향에서 생존을 위해 수입에서 조금을 남기고 대부분을 가족을 돌보기 위해 송금하고, 가족들이 그들이 겪었고, 벗어났던 삶보다 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게 준비한다. 1975년 베트남 전쟁이 끝난 후 떠난 베트남 보트 피플이 그런 사람들이다. 합법적인 루트든 불법적인 루트든 현재 한국이나 선진국에 있는 베트남 노동자들이 그런 사람들이다. 스물일곱 살 시리아 청년 아크마드는 7년도 더 전에 몇 나라를 거쳐 독일에 도착한 수많은 시리아 사람들 중 한 사람이다. 음악가로, 기독교를 믿는 시리아의 소수 민족으로,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성당에 속한 여학교의 교장으로 실직했고, 남동생 한 명과 여동생 한 명이 있다. 아크마드가 홀로 바다를 건너 튀르키예에 이르렀다 독일에 도착하기까지 여러 국가의 영토를 굽이굽이 거치는 여정이 더 있었다.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할지, 그의 고향에서 내전 중이라 그 덕분에 추방의 위협도 없고, 학업과 일의 제한도 없는 우대 조건으로 여기에 살게 되었다.
  “그래도 저는 일을 할 겁니다. 이번 언어 과정을 마치면 바로 일을 할 거예요.” 아크마드는 가녀린 손가락이 있는 두 손바닥을 폈다. “저는 식당에서 음식 나르는 일을 찾아보려고 해요. 그러면 직업 훈련을 할 시간이 들지 않으니까요. 저는 제 동생이 저처럼 독일로 오는 길을 찾을 수 있게 충분한 돈을 벌어야 해요.” 아크마드의 말에 따르면 아크마드의 남동생 역시 피아니스트이고 무척 재능이 많아서 시리아에 내전이 벌어지기 전에 독일 유학 장학금을 받은 적이 있다고 한다. 마크마드는 자신이 벌어서 보낼 돈으로 남동생이 독일로 건너와서 이 땅에서 직업을 가지고 살게 되면, 그다음 두 형제가 어머니와 여동생을 데려올 방법을 찾으려고 기대하고 있다.
  아크마드의 바람과 인생 계획은 합법적인 노동 협력 프로그램에 근거해서 이 독일에 도착하지 않은 이민자들에게는 낯설지 않다. 떠나온 나라와 대륙이 각기 다른, 이곳에 사는 수많은 전쟁으로 인한, 빈곤으로 인한 이민자들의 바람과 인생 계획이다. 우리 부부의 옛 이웃인 파벨 역시 그렇다. 파벨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러시아 붉은 군대에게 잡혀 석방되어 돌아오지 못하고 시베리아에서 수감되어 있었던 독일 병사의 아들이다. 반세기도 더 지나, 아버지의 불행은 아들의 행운이 되었다. 파벨은 러시아인 어머니처럼 러시아어를 잘했고, 독일어는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러나 독일이 통일된 이후, 독일 출신에게 주어진 특별한 귀향 프로그램에 의해 독일에 오게 되었다. 러시아에서 오르간 연주자였던 파벨은 새로운 직업 훈련을 받고 목수가 되었다. 산부인과 의사였던 아내는 시립 병원의 간호보조사가 되었다. 나이 든 부부는 2주에 한 번씩 물건을 상자에 싸서 역시 의사인 딸의 주소로 보낸다. 남편이 수 대를 걸친 정통 러시아인이라 처부모를 따라올 수 없었다. 그녀가 노령의 부모에게서 받는 상자는 무척 특별했다. 몽땅 먹거리이다. 소시지, 훈제 고기, 통조림, 스파게티, 각종 건빵, 비스킷, 초콜릿. 파벨 부부는 두 살 먹은 손주가 초콜릿 때문에 너무나 신나 하고, 아이 부모는 독일에서 부모가 보내 주는 식품들이 아이를 쉽게 키울 수 있게 도움이 되어서 기뻐한다고 말한다. 우리 부부는 전적으로 의아하게 생각한다. 소련은 우리 대학생 시절 베트남에 비하면 천당이었다. 그런데 그 천당 사람이 또 다른 천당을 찾아가야 한다. 그리고 거기에서, 솔직히 말하면, 저 천당에 살고 있는 가족을 도울 수 있어서 기뻐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쫓겨나 독일 출신 남자의 자손이라 독일로 귀환할 수 있었고, 러시아어만 구사할 수 있어 동향인이라고 볼 수도 있는 키르기스스탄에서 온 이반 가족은 분리되었다. 서른한 살 먹은 딸의 가족은 남편이 장인 장모를 따라 귀환할 권리를 누리지 못해 추방되었다. 그들은 귀환을 위해 독일 정부에서 발급한 항공권을 사양하고 구입할 수 있고 얻을 수 있는 중고 물건들을 실은 조그마한 밴을 타고 스스로 돌아올 길을 찾았다. “그 애들은 마을에서 그 차로 벌어 생계를 꾸릴 수 있어요.” 1년 뒤, 이반의 아내는 큰 손주가 마을 학교에서 공부하는 데 적응을 못하고, 귀환 후에 낳은 손녀는 폐렴에 걸렸는데 주립 병원이 너무 멀어서 죽었다고 이야기한다.
  그것은 비극이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파벨이나 이반의 가정 형편은 합법적인 루트로 독일에 오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에게는 꿈과 같다. 다시 헤어진다 해도 그들은 옛 고향과 새로운 고향 두 나라 모두에서 모여 만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가는 길에서 비용을 치르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전쟁과 빈곤 때문에 지나가는 길 위에서 너무나 많은 일들이 벌어진다. 속임수를 당하고, 강도를 당하고, 강간을 당하고, 살해당한다. 새로운 땅에 도달했을 때 그런 것들을 다시 얘기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어떤 것도 기억 속에서 흘러갔다 사라지지 않지만 돌아보지 않고, 다시 언급하지 않고, 기억에 박힌 것들을 재생할 방법을 찾지 않거나 혹은 다른 사람 이야기하듯 그런 일들을 다시 말하고서 웃어 버리는 것은 심신의 자기방어 기제이다. 견딜 수 있는 한계치에 이른 고통이 어떻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심리학자들도 이런 점을 이해할 것이다.
  누가 합법적으로 독일에 온 이민자이고 불법적인 이민자인가는 쉽게 알아챌 수 있다. 달리 말하자면, 더 실질적이고 더 잔인하게 말하자면, 어떤 외국인이 이곳에 초대된 손님이고 초대되지 않은 손님인지 쉽사리 구분할 수 있다. 공공장소에서 그들의 풍채만 봐도, 그들의 눈빛만 봐도 알 수 있다. 폭력, 전쟁, 빈곤에서 도망쳐 독일에 이제 막 도달한 이민자들은 보통 우울하고, 당혹스러운 눈빛이다. 그런 모양새는 자신과 같은 사람들 무리 속에서 갈 때야 좀 덜어지는데, 비참한 같은 처지 역시 자신감을 되찾게 하는 힘이다. 그 자신감은 적응에 따라, 새로 배우는 업무와 언어에 따라 점차 회복되지만 동시에 임시 서류 기간 연장의 주기에 따라 뜯겨 나간다.
  시간이 가면서 새로운 인도적인 정책이 공포될 것이다. (많은 경우에 이민자 관련 정책은 노동 시장에 미치는 영향과 독일 정부의 이민자 송환에 있어서 무력함에 의해 공포된다. 전쟁 때문에, 정치 체제 때문에 생명의 위협이 있는 곳으로 이민자를 추방해서는 안 된다.) 이민자들에게 장기 체류권이 발급되면 새로운 삶을 실제로 살게 될 것이다. 새로운 이민자 세대는 화합의 단계로 갈 것이고, 현지인들처럼 똑같이 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모두가 이런 인도적인 조항들을 누리게 되지는 않는다. 대부분은 추방령에 맞부딪친다. 독일에 살고 있다고 하더라도, 공부를 하고 있거나 일을 하고 있더라도, 추방되어 가난, 위험, 불안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고향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라는 불안 속에서 평범하게 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론은 언제나 충분한 설득의 모양새를 하고 있다. 실제로는 이민자들에게 가장 힘든 화합은 문화적 화합이다. 문화적 화합이란 현지 문화와 이민자가 들여온 문화가 양쪽 모두로 변화, 보탬, 보충되는 것이다. 어떤 쪽에서부터 문화를 용해하거나 스스로 용해하려는 모든 노력 역시 불가하다. 여기서는 제어력, 전통, 습관의 관성 및 무수히 많은 이민자들의 초기 여건이 다민족을 받아들이려는 추세를 가지고 있는 국가에서 만들어 내는 수많은 문화적 게토는 아직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역방향으로는 현지 민족주의자 집단의 극단적인 추세이다. 이는 비단 독일이기 때문이 아니라 많은 선진국의 문제이고, 그 결과는 조용하게 뭉쳐져 생각지도 못했던 많은 방식으로 터진다. 나는 이런 점을 생각할 때 겁이 난다고 말한다. 자신이 살고 있는 독일 사회에는 생존권처럼 자유를 수호할 때 안전하게 감찰하는 정치적 시스템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고, 독일인이 자신의 화려하고 어두운 역사에서 많은 것을 배운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모든 극단적인 민족적 관점 앞에서는 늘 염려가 된다. 그러나 나는 웃는다. 두려운 것은 두려운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불안은 서서히 타오르는 불구덩이 같고 순식간에 폭발하기 때문이다. 무심결이든 조작되었든 하찮은 이유 하나 때문이다. 이라크 전쟁, 시리아 내전 아니면 현재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 전쟁 같은 현대전은 어떠한가? 남편 응이아는 결론을 내린다. 민족정신이 없다면 세상은 인간적인 로봇의 것이라고. 민족정신이 없다면 예술도 없고, 문학도 없다고. 나는 신나서 민족정신이 없다면 국가 간 국경이 없을 것이라고 평론을 하지만 응이아에게 반박을 당하니 지겨워졌다. “인간이 이 지구상에서 정처 없이 다닐 자유가 있을 거란 착각은 하지 말아. 이런 게 살해, 강탈하는 자유이고, 다시는 인간이 회귀를 허락해서는 안 되는 부족의 통치라고. ISIS의 검은 깃발들을 생각해 봐. 저 자칭 이슬람 국가라는 놈들이 얼마나 많은 나라의 국경에서 흔들었는지.”
  우리 부부의 논쟁은 매일 벌어지고 쉽게 공통의 목소리를 찾을 수 있다. 문화 간 전쟁의 근원인 종교적 신념의 절대화는 버리고 민족의 발전으로 되돌아오자. 문화의 발전은 민족의 발전에 기인한다. 맞다! 그러나 실상은 민족적일수록 세계와는 더 멀어진다. 이 세계는 민족성에 앞서 인간성이 필요하다. 인간은 인간성 안에서 서로 만나야만 한다. 그러나 실상은 이 지구 위 수많은 곳에서 살고 있는 인간은 충돌하고, 비인간적인 전쟁을 일으킨다. 그리고 그 전쟁들은 평화롭게 살고자 이민자들이 찾는 바로 그곳에서 다른 형식과 정도로 벌어진다. 베트남에서 종결된 지 50년이 다 돼가는, 미국-베트남 전쟁이라 불리는 은폐된 내전은 현재 베트남에서 여전히 살아가고 있는 베트남인들에게는 마치 수많은 흔적을 남기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여기, 독일에는 남과 북 양쪽에서 온 베트남 사람들 공동체 사이에 그리고 그 전쟁 이후에 온 사람들과 간극이 있다. 보트 피플 공동체에 속하는 남베트남인들은, 남부를 침략, 강점하고 그들이 국민이었던 베트남 공화국이라 불렸던 한 국가를 지워 버린 북쪽을 용서할 수 없는 것 같다. 문화와 노동 협력 협약에 따라 북베트남에서 독일로 온 사람들은, 수십 년 전부터 있는 베트남의 언론 정책 때문에 1975년 이후 자기 동포들이 겪은 바다를 탈출하는 길 위의 아픔을 거의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들이 그들을 해방시켰다고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한쪽은 패자로 정치적 난민 자격으로 독일에 와 국가의 모든 지원 정책과 함께 영주권을 즉시 누릴 수 있어 ‘뒤틀린 베트남 교포’라 놀림을 받고 질시를 받는다. 한쪽은, 패자들이 독일에서 임시 거주권을 얻기 위해 기를 써야 하는 동포들을 ‘공산주의자 새끼’라 부른다.
  이 독일에는 적지 않은 한국인이 있는데, 나는 전부 남한 사람들만 만난다. 그들은 수십 년 전 독일 연방공화국과 의료 협력 프로그램에 따라 독일에 왔다고 얘기한다. 그들은 직업이 있고 좋은 일자리가 있어서 무척 안정적인 삶을 산다. “왜 여기에는 남한 사람들만 있을까?” 어떤 사람이 궁금해한다. 응이아는 북한 사람은 여기까지 올 수 없다고 말한다. “무슨 수로 사람들이 영수를 숭배하는 모든 것이 폐쇄적인 사회에서 탈출할 수 있겠어? 국가는 유일한 일당 통치하에 있고, 국경은 중국과 러시아에 접해 있는데. 남한으로 넘어가는 건 전쟁 때 베트남 사람들이 벤하이강1)을 건너갔던 것과 다를 게 뭐야. 등 뒤에서 총을 쏴 죽기가 쉽지.” 그게 이 독일에 북한 사람들 공동체가 없는 핵심적인 이유일까? “북한 사람들이 더 있다고 하면, 한국 사람들 공동체가 1975년 이후 독일에 있는 베트남 사람들 공동체와 다를까?” 나는 묻는다. “그러기가 쉽지. 어찌 되었건 승자와 패자가 있을 테니까.” 해답 중 하나이다. 수십 년이 지나도 이곳에 사는 베트남인 공동체 양쪽의 간극은 여전히 좁아질 기미가 없다.

  다른 민족 공동체에서도 역시 그러하다. 응이아는 어떤 거리 양쪽 보도에 서서 함께 같은 색 깃발을 흔들며 서로를 타도하는 구호를 외치는 두 무리의 광경을 본 적이 있다는 얘기를 한다. 거리 양쪽 끝과 그들 사이에는 독일 특수 경찰이 질서를 유지하며 시위가 좋게 성공적으로 진행되게 보장하고 있었고, 한 독일 경찰이 응이아에게 서로 대립 중인 시리아인 공동체 두 곳이라고 설명을 해줬다. 모두들 난민이면서 아사드 대통령이 이끄는 시리아 통치에서 벗어나 탈출한 편과 아사드를 지지하는 편이 대치하고 있었다. 다르면서도 다르지 않은 것은 러시아 전쟁, 푸틴 숭배를 지지하는 무리와 그 전쟁을 반대하며 우크라이나의 평화를 요구하는 무리가 등록하는 시위이다. 어느 편의 시위로 많은 사람들이 모였을지 떠올리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그 점이 다른, 강렬한 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조용한 것보다 못하다는 뜻이 아니다. 법률권이 확고한 국가에서 충분히 오래 살지 않았다면 자유의 뜻이 얼마나 풍부하고 신성한지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곳에 오래 산 자유를 찾아 목숨을 건 이민자들이라도 자유가 모두를 위한 것이고, 어떠한 개인 혹은 공동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확실히 이해하지는 못한다. 응이아는 자유가 없다면 살기 어렵지만 자유와 더불어 살아가는 것을 안다는 것 역시 쉽지는 않다고 말한다. 나도 남편에게 동의한다. 자유란 사람이 자연스럽게 갖게 되는 값비싼 선물이고, 자유란 뭔가를 하고 싶다고 하는 것이 아니며, 무엇보다도 우선 그리고 종국에 자유는 책임이다. 우리 부부 모두의 생각에는, 수많은 이민자들이 자유로운 땅에 오기 전에 그 점을 이해하지 못하고, 와서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데, 스스로 만든 공동체 문화의 게토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찌 알겠는가? 독일 같은 국가의 대내 이민자 정책이 생활 여건을 아무리 좋게 해 준다고 해도 완벽할 수는 없다. 대다수 이민자들에게,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자유인데 그들은 마지막에 의식을 한다. 왜냐하면 각자가 아직 고향에 살고 있는 가족, 피붙이에 대해 구체적인 수많은 책임과 대면하기 때문이다. 주중에 쉬는 날 없이 이 독일에서 꽃집, 식당, 네일 숍같이 소규모의 수많은 사업장에서 수많은 베트남 사람들이 일하고 있고, 손님을 잃을까 진료를 받으러 가는 것조차 꺼린다는 것에 놀랄 것도 없다. 다른 이민자 공동체 역시 별반 다르지 않다. 모두들 달려들어 일하고, 먼저, 고향을 떠나는 방도를 찾기 위해 빌렸던 빚을 갚을 돈을 마련하고, 나중에 그 힘겨운 여정을 따라 피붙이들이 차례로 올 수 있게 송금할 돈을 마련한다. 사람마다 더 좋은 다른 생애 구간에 들어서기를 희망하며 두려워하면서 생명을 건다. 체류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해 추방령에 직면하면 이민자들은 거리낌 없이 불법적으로 거주하고 불법적으로 일하는 것을 받아들인다. 그들의 삶은 진짜가 되지 못하고, 그들이 벌어들여 생명을 구하는 금전일 뿐이며, 진짜 삶이기를 희망할 뿐이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나는 1년도 더 전에 베를린역 광장에서 만났던 할머니 두 명과 함께 난리를 피해 도망쳐 온 예쁘장한 사내아이가 가끔 떠오른다고 말한다. 지난 1년 동안 독일로 온 백만 명이나 되는 우크라이나 사람들의 대부분인 아녀자와 아이들은 지금껏 없었던 좋은 난민 정책을 누리게 되었다. 아이는 분명 여기에서 1년간 학교를 다녀 독일어를 잘할 것이다. 그러나 그 아이를 데리고 온 두 할머니들은 확실히 아직도 새로운 언어에 어리둥절할 것이다. 고령이라 배울 수 없는 것이 아니다. 그들과 같은 이민자들은 공부를 할 만큼, 새로운 삶을 향유할 만큼 마음이 편안하지 않다. 그들이 자식들과 재회했을까? 성장한 연령의 우크라이나 남자들은 조국 수호를 위해 남아 있어야 했다. 나는 그 아이의 아버지가 아직 살아 있을지 그리고 산 자와 죽은 자로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지면 그 아이는 어떻게 살지 자문한다.

  여전히 수시로 실시되어 발표하는 사회학적인 연구들에 따르면, 우크라이나에서 전쟁 때문에 이주해 온 사람들의 3분의 2 이상이 독일에서 장기간 살기를 원한다고 한다.
  연방의 가장 최신 통계는 2023년에 300만 명 이상의 이민자들이 독일에 난민 신청을 했다고 한다.
  ……이민이란 인류의 삶 속에 수천 년 있었던 실체이다. 인류의 역사는 이민의 발걸음을 따라 형성, 변천되었다. 그 적지 않은 발걸음은 피, 눈물의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 냈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고, 창조주가 부여한 불가침한 필수 권리가 있는데, 그중 생명, 자유, 행복 추구권이 있다.” 이 선언은 미국에서 쓰이고 낭독했을 때부터 인간에 대해 원래 가치를 지니고 있는데, 그것이 사실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갈망이기 때문이다.
  반전의 정신과 행동으로 베트남 남부에서 1975년 이전에 유명했던 음악가 찐 꽁 썬(Trịnh Công Sơn)은 나중에 평화 속에서 발이 묶여 있었는데, 1975년 이후에 다시 해외를 갈 수 있었고, ‘자유란 가는 것이다’라고 비탄스럽게 말했다.
  이 세상에 무수한 이민자들처럼 ‘간다’는 것은 가장 평범한 삶을 살기 위한 자유가 없기 때문이고, 무명인 것조차 받아들여, 폭력과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그 이유 때문에 이민자의 삶으로 자신의 몸을 내던졌을 때, 그들에게는 자유가 얼마 주어지지도 않고, 새로운 땅의 문화적 게토들 속에서 그들은 숫자가 되고 계속해서 포박된다.
  그 점은 사람보다 더 똑똑한 스마트 제품들을 만들어 내기에 어느 때보다 인간이 똑똑하다고 여겨지는 바로 이 21세기에도 날마다 벌어진다.

  2023년 4월 3일 베를린

각주

1) 1954년 제네바 협정에 따라 남북 베트남을 가르는 비무장지대 위도 17도에 위치한 베트남 중부의 강.

번역정보

번역 : 최하나 (베 → 한)

필자 약력
프로필_레민하.jpg

레민하. 1962년 출생. 하노이 사범대학 어문학과 졸업. 10여 년간 문학 교사로 재직하다 1994년 독일로 이민을 가 베를린에 정착했다. 베트남어로 미국과 베트남에서 출판된 약 20권의 단편소설집, 에세이집이 있다.
* 사진제공_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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