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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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호

엄마와 꽃

김경화(하몽)

  겨우내 얼었던 강에 얼음이 풀리기 시작할 때쯤이면 엄마는 진달래 나뭇가지며 살구꽃 나뭇가지며 꺾어다가 창턱에 놓아두곤 했다. 며칠 지나면 나뭇가지에는 연둣빛의 새잎이 돋아나고 뒤이어 새끼손톱보다도 작은 꽃망울이 맺혔다. 꽃망울은 조금씩 부풀어 오르다가 하나둘 잎이 벌어지며 피어났는데 어느 날 아침 깨어 보면 밤새 핀 꽃들로 창가가 환하게 빛나곤 했다. 창밖의 산야는 아직 황량한데 집 안에서 먼저 봄을 맞이하는 일은 신비로웠고 어린 마음을 들뜨게 했다.
  봄이 되어 아버지가 마당을 갈아엎으면 엄마는 채소를 심을 이랑을 만들고 한쪽 끝에 작은 공간을 따로 만들곤 했다. 거기에 엄마는 겨우내 건사해 두었던 꽃씨를 뿌리면서 이제 여기에 꽃이 피어날 거라고 했다. 이쁜 꽃을 상상하면서 흙을 덮고 발로 꽁꽁 밟는 일은 무척 즐거웠다.
  엄마의 말은 맞아서 여름이 오면 마당 한 켠의 꽃밭에는 각종 꽃들이 앞다투어 피어나곤 했다. 거의 매일같이 새로이 꽃이 피어나곤 했는데 나는 그게 너무 신기해서 아침에 깨어나면 마당에 뛰어나가 오늘 몇 송이가 새로 피었는지부터 세어 보곤 했다. 엄마는 꽃들을 일일이 짚어 가며 백일홍, 국화, 장미 등 꽃의 이름도 가르쳐 주었고 봉선화가 피면 꽃잎을 짓이겨서 손톱에 물도 들여 주었다. 그때쯤이면 먹지도 못하는 걸 뭐 하러 심냐고 하던 이웃집 장씨 아줌마도 우리 집 마당을 들여다보며 화원(花园) 같다고, 참 이쁘다고 감탄하곤 했다.

  엄마는 미를 아는 사람이었다. 다 고만고만하게 살 때라 우리 집에도 특별한 가장기물은 없었지만 엄마는 찬장에 얹은 소래 하나도 아래위 꽃을 맞추어 반듯하게 얹어 놓는 사람이었다. 시골 아낙네인지라 엄마도 밭에 나가 기음을 매고 돼지풀도 뜯어오고 했지만 늘 파마머리를 곱게 빗어 넘기고 얼굴에는 옅게 분을 발랐으며 항시 단정하고 깨끗한 차림을 하려고 애썼다. 모처럼 쉴 수 있는 농한기가 되면 엄마는 커다란 꽃이 군데군데 박힌 양산치마를 꺼내 입곤 했다. 엄마에게 단 하나뿐인 치마였는데 엄마는 해마다 그렇게 며칠씩 멋내기용으로 입고 다시 장롱에 넣어 놓곤 했다. 엄마 나름의 사치가 아니였을까 싶다.
  자식들이 다 성장해서 각자 밥벌이를 하게 되었을 무렵, 엄마는 연세가 드셨고 기력도 약해졌다. 아버지도 세상 뜬 뒤인지라 집에는 엄마 혼자였다. 혹 기운을 잃고 축 처져 있는 게 아닌가 싶어 걱정하다가 가보니 엄마는 노인 활동실에서 춤추고 노래하고 뒤늦게 글공부도 하면서 노년을 무척 바쁘고 즐겁게 보내고 있었다. 그런 엄마를 마주하자 근심 걱정이 한꺼번에 사그라들었고, 그 무렵 이리저리 세상살이에 치이면서 지치고 상처 입었던 마음마저 위로받는 느낌이 들었다.
  엄마가 돌아가시기 몇 달 전, 치매로 자주 깜빡깜빡하는 엄마를 모시고 모처럼 야외에 바람 쐬러 갔었다.
  “우리 집 마당에 꽃밭이 있었단다. 봄이면 엄마가 꽃씨를 뿌렸지. 여름이면 꽃들이 얼마나 이쁘게 피어났는지 몰라. 꽃송이가 크고 화려한 다리아도 있었고 봉선화도 무더기로 피었지. 봉선화가 피면 엄마가 손톱에 물을 들여주곤 했단다.”
  “맞슴다, 우리 집 꽃밭 참 이뻤지예. 지나가던 사람들이 다 들여다보면서 이쁘다고 감탄하고 그랬잼가.”
  엄마가 고개를 저었다.
  “어릴 때 내가 살던 집, 너희 외할머니가 가꾸던 꽃밭을 말하는 거란다.”
  “외할머니?”
  “그래, 이제 흙에 묻힌 지도 오래됐을 테니 아마 지금쯤은 형체도 없을 게다. 저세상이라는 게 정말 있다면 한 번만 만나보고 싶구나.”
  엄마가 혼잣말처럼 하는 말이었다. 어디선가 돌멩이 하나가 날아와 쿵 하고 가슴을 때리는 것 같았다.
  어렸을 때, 엄마는 옛말처럼 외가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일제강점기였는데 소작농이었던 외할아버지는 소작 조건이 악화되어 도저히 먹고 살기가 힘들어지자 어쩔 수 없이 식구들을 데리고 두만강을 건넜다고 한다. 그 뒤, 두만강 녘의 마을에 정착해서 잘 살다가 엄마가 결혼하고 삼 년 뒤, 외할아버지는 식구들을 데리고 다시 강을 건넜다. 그때까지 엄마의 할아버지 할머니가 생전이었던지라 외할아버지는 부모의 임종은 봐야 한다는 생각에 다시 간 것이었다. 엄마는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삼 일 동안 자리 보존을 하고 누워 울었다고 했다. 그러다가 살아 있으면 언젠가는 만날 수 있겠지, 남편도 있고 애도 있는데 나부터 살아야지 하는 생각이 들어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고 한다.
  “가고 나서 편지가 왔는데 그쪽에서 잘 살고 있다고 하더구나. 그러면 됐지 뭐. 사람은 언제든 헤어지는 거고 어디서든 잘 살면 되는 게다.”
  엄마는 매번 담담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하면서 이야기를 끝냈다. 나는 엄마는 마음이 특별히 너른 사람이거나 천성적으로 낙천적인 사람인가 보다, 아니면 시간이 오래 지났으니 그리움이란 것도 옅어져서 이제는 아무렇지 않은가 보다 하고 생각했었다.

  엄마는 내가 생각하는 그 어느 쪽도 아니었다. 엄마는 명랑함 뒤에 아픔을 묻어 두고 홀로 삭히면서 평생을 살아온 것이었다. 부모 형제를 그리면서, 스스로를 다독이기 위해 외할머니네 마당의 꽃밭을 닮은, 또 하나의 꽃밭을 만들었을 것이었다. 나는 엄마를 돌아보았다. 엄마의 눈길은 저 멀리 산자락과 하늘의 경계 어딘가를 점도록이 바라보고 있었다. 나도 엄마의 눈길이 머문 곳을 아득히 바라보았다. 가없이 펼쳐진 푸른 하늘가 끝자락에 꽃밭이 펼쳐져 있었다. 진달래, 국화, 백일홍도 있었고 봉선화며 다리아도 피어 있었다. 그 꽃들은 엄마가 평생을 다해 껴안고 있던 터질 듯한 그리움이었으며, 세상의 비바람이 엄마의 아이들을 덮칠 때마다 따뜻하게 껴안고 다독여주며 다시 앞으로 나아갈 용기를 주던 하늘이기도 했었다.
  사는 동안, 우리는 많은 것들을 스스로 선택할 수도 없고 좌지우지할 수도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자신에게 닥친 것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살아가는가 하는 마음의 자세, 그것뿐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안으로 샘물처럼 차오르는 충일이 있었다. 그리고 알 수 없는 힘이 발바닥 어딘가에서부터 스멀스멀 올라와 나를 온통 감쌌다. 가을볕이 내려앉아 등이 따뜻했고 가끔 바람이 불어오는 어느 가을날이었다.

필자 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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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화. 1978년 청산리 출생. 중단편소설 60여 편, 수필 다수를 발표했다. 《연변일보》 해란강문학상, 《도라지》 문학상 소설 부문, 《민족문학》년도상, 《연변문학》 소설상 등을 수상했다. 전국 제8차 청년작가창작회의, 2019년 한중일청년작가회의에 참가했다. 로신문학원 41기 중청년고급연수반을 수료했다. 연변작가협회와 중국작가협회 회원이다. 소설집 『적마, 여름 지나가다』, 장편소설집 『눈부신 날들』 등을 출간했다.
* 사진제공_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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