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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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호

소설 써서 봉변당한 이야기

성우제

   이 이야기는 소설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현실에 있을 법한 사람들이지, 진짜 현실 속의 사람들이 아니라는 얘기다. 하지 않아도 될 말을 굳이 하는 이유가 있다. 나는 소설을 소설로 읽지 않는 사람들 때문에 곤욕을 치른 적이 있다. 지금부터 하려는 이 이야기는 내가 겪은 바로 그 일에 관한 것이다. 참 미안한 말이지만, 소설에서 자꾸 현실을 불러내려는 사람들은 이 소설을 읽지 말기 바란다. 부탁이다.

   내가 캐나다에 살러 온 때로부터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것이 자연스럽겠다.
   우리 가족이 캐나다로 이민을 온 것은 1999년 5월이었다. 2000년을 코앞에 두고 Y2K라는 밀레니엄 버그 때문에 전 세계가 떠들썩하던 즈음이었다. Y2K가 문제를 일으키면 금융, 보안, 교통 분야 등에서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이 벌어질 것이라고들 했다. 심지어 핵 단추가 잘못 눌려서 3차 세계대전이 터질 수도 있다고 걱정하는 사람까지 생겨났었다.
    Y2K 때문에 모든 나라들이 IT 기술자들을 확보하려고 애를 썼다. 고급 인력을 단기간에 양성하는 것은 불가능하니, 인력을 충원하는 가장 빠르고 효과적인 방법은 다른 나라에서 사람들을 빼오는 것이었다. 이민 정책에 관한 한 세계에서 가장 앞서 가는 캐나다가 그 일을 아주 잘했다.
   2000년을 전후해 캐나다 정부는 이민을 신청하는 IT 기술자와 엔지니어들을 특급 대우하며 거의 모셔 가다시피 했다. 기술만 있으면 다른 것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다. 이민 희망자라면 이민 영사와 반드시 인터뷰를 해야 하는데, 기술자들에게는 그 성가신 과정을 아예 면제시켜 주었다. 영주권은 몇 개월 만에 바로 나왔다. 초고속이었다. 영주권이 너무 빨리 나오는 바람에, 신청자들이 오히려 당혹스러워 할 정도였다.
   일을 급하게 추진하다 보면 헐거운 구석이 생겨나게 마련이다.
   나는 대학에서 외국 문학을 전공하고 다큐멘터리 방송 작가로 6년, 대기업 사보 편집자로 7년을 일한 전형적인 ‘문돌이'였다. 그런 내가 까다롭기로 소문난 캐나다 이민 관문을 어렵지 않게 통과할 수 있었던 것은 Y2K로 인해 이민 정책이 다소 느슨해졌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나는 Y2K 덕을 톡톡히 본 셈이다.
   자식 교육을 명분으로 이민을 신청하고, 일단 캐나다에 살러 오는 데까지는 성공했으나 막상 와서 보니 먹고 살 일이 참 막막했다. 남들도 다 사는데, 나도 그렇게 되겠거니 하는 생각으로 온 것이 얼마나 무모한 일이었나 하는 것은 이곳에 와서야 알았다. 돈 안 되는 문학을 전공하면서도 취직 걱정 한 번 안 하고 대학을 다녔던 그런 ‘무대뽀 정신’이 습관처럼 아예 몸에 밴 것 같았다.
   기술이 있는 사람들은 척척 취직들을 했다. 기술 하나 없는 나는 어느 곳 하나 비벼볼 데도 없었다.
   내 앞에는 선택지 세 개가 놓여 있었다. 하나는 2년제 대학에 들어가 공부하고 취직하기. 또 하나는 자영업에 곧바로 뛰어들기. 마지막은 한국으로 돌아가기. 공부를 다시 하기에는 서른아홉이라는 나이가 조금 애매했다. 솔직히 말하면 학교 공부는 하기 싫었다.
   그렇다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비장한 마음으로 수많은 환송회를 하고 떠나온 터라, 창피해서라도 돌아가기는 어려웠다. 결국 남는 건 자영업밖에 없었다.
   십수 년 전 미국 뉴욕으로 건너가 세탁소를 하는 대학 서클 선배가 있었다. 전화를 했다.
   “형, 나, 토론토로 살러 왔는데요, 자영업을 해야겠는데, 뭘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좀 도와줘요.”
   “온다더니, 결국, 왔냐?”
   선배는 다짜고짜 “몸부터 만들어야겠구먼”이라고 했다.
   몸을 만들라기에, 나는 헬스클럽에라도 나가라는 줄 알았다.
   “몸은 왜 만드는데요?”
   선배는 목소리를 깔고 큰 가르침을 주듯이 말했다.
   “장사라는 건 말이다, 자기 몸을 움직여서 돈을 버는 거야. 몸으로 일해서 너하고 네 와이프 두 사람 인건비를 가져가는 거지. 근데, 너, 몸으로 하는 일, 그거 절대 만만하게 보지 마라. 큰 코 다치는 수가 있어.”
   그러고는 내가 몸 쓰는 일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으니, 거기에 맞게 몸을 만들라고 했다.
   내가 한국에 있을 적에는 몇 번을 물어봐도 오라 마라 어떤 말도 하지 않던 사람이었다. 그랬던 선배가 대책 없이 캐나다로 건너온 내가 한심하고 딱해 보였던지 조목조목 구체적인 지침을 주었다.
   “내 말대로만 해. 그러면 최소한 망할 일은 없어.”
   선배가 ‘내 말대로 하라'는 것의 내용은 내가 하고 싶은 업종을 일단 정하고, 그런 가게를 찾아가서 일을 배우라는 것이었다. 그럴싸했다. 그 선배의 말이 진짜로 큰 가르침이었다는 것은 나중에 가서야 알았다.
   “일 하는 가게를 몸 만들고 공부하는 학교라고 생각해. 돈에는 연연해 하지 말고. 적은 돈이라도 주면 그저 고맙습니다 하고 받아. 장학금이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 장학금 받아 가며 일 배운다고 생각하면 고달픔도 덜 하고.”
   그러고는 다소 놀라운 말을 덧붙였다. “너는 무경험자라서 그런 일자리 구하는 것도 아마 쉽지 않을 걸? 그러면 그냥 무작정 가서 돈 안 받고 경험 삼아 일하겠다고 해.”
   선배의 말을 일단 믿고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최소한 망할 염려는 없다’, ‘굶지는 않는다'는 말이 큰 위로가 되었다.
   그래서 찾아간 곳이 토론토 최남단 다운타운에 있는 샌드위치점이었다.
   한인 신문에서 ‘남자 헬퍼 급구'라는 광고를 보고 전화했더니 “샌드위치점에서 일한 적 있어요?”라고 물었다. 당연히 없다고 했다. 그래도 일단 와보라고 했다.
   그 가게는 우리 아파트가 있는 토론토 북쪽에서 버스와 지하철을 갈아타고 1시간쯤 가야 하는 곳에 있었다. RBT 은행 본사인 40층짜리 빌딩 지하에 있다고 했다. 처음 가보는 다운타운이라 물어 물어 겨우 찾아갔다.
   지하로 내려가니 푸드코트가 나타났다. 나로서는 처음 보는 대형 푸드코트였다. ‘브루클린'이라는 샌드위치점은 서남쪽 코너에 있었다. 한국인 부부가 운영하는 가게였다. 일하는 사람도 여럿 보였다.
   여자 주인은 냉정하게 말했다.
   “우린 경험이 있는 사람이 필요한데요, 배달이 아주 중요하거든요. 일하던 사람이 갑자기 그만 두는 바람에 사람이 급히 필요해서 쓰는 거니까, 정신 똑바로 차리고 하세요. 일주일간 일 하시는 거 보고 나서 최종 결정할게요. 페이는 미니멈부터 시작해요. 2주에 한 번씩 체크로 나가고요.”
   미니멈은 최저 임금을 뜻했다. 미니멈이든 최저든 나는 돈을 받으며 일을 배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했다. 선배한테서 미리 말을 듣기를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로서는 식당 일을 하는 것도 처음이거니와, 외국 샌드위치 가게에서 외국 손님을 상대로 일을 하는 것도 당연히 처음이었다. 배달과 설거지, 채소 깎기 등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일이 낯설었다. 샌드위치점에서 남자가 하는 일은 ‘주방 뒷일’이라고 불렸다.
   식당은 아침 7시부터 오후 3시까지 영업을 했다. 아침 손님도 있었지만 점심 때가 가장 바빴다. 배달 매출도 만만치 않게 컸다. 브루클린은 푸드코트 15개 식당 가운데 손님이 가장 많이 몰리는 곳이라고 했다.
   하루 8시간을 뛰다시피 하며 몸을 움직였다. 하루 하루가 훌쩍 지나갔다. 일을 시작한 지 3개월 만에 체중 6킬로그램이 빠졌다. 몸은 이렇게 만들어지는 것 같았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배운다는 생각을 할 겨를도 없었다. 그곳에 나가 일을 하는 것 자체가 나한테는 공부였다. 일은 그렇게 온몸으로 배우고 익혔다.
   나는 7시 출근을 하자마자 커피를 내리고 베이글을 구웠다. 아침 장사는 나 혼자서 했다. 그 일이 마무리되면 11시께부터는 가게 주변 여러 빌딩을 돌아다니며 샌드위치 배달을 했다. 캐나다 회사들은 직원들에게 샌드위치를 제공해 가며 회의를 하게 했다. 점심시간을 활용한 회의였다. 신문사 편집회의 자리에 배달을 해준 적도 있다. 노동 강도가 대단히 세다는 느낌이 들었다.
   배달 주문은 늘 많았다. 샌드위치와 음료수를 실은 전용 카트(한국으로 치면 철가방)를 밀며 거리를 뛰어다니다시피 했다. 배달을 마치면 점심 손님들을 맞는 아주머니들을 뒤에서 지원하면서 짬짬이 설거지를 했다. 장사를 끝내고 2시 넘어 늦은 점심을 먹을 때까지 잠시도 쉴 틈이 없었다.
   점심 손님이 몰려드는 11시 30분께부터 2시까지는 가게가 말 그대로 북새통이었다. 손님들은 계속 밀려와서 가게 앞에 10미터 이상 줄을 섰다. 아주머니들은 샌드위치바(안이 들여다 보이는 냉장고 위에 4미터짜리 긴 도마를 올려놓은 작업대)에 서서 “넥스트(다음 손님) ~", “넥스트 ~" 하며 소리를 질러 댔다. 손님이 주문을 하면 샐러드를 퍼서 빵에다 넣고 종이로 싸 주었다. 재료가 떨어지면 내가 뒤에서 부리나케 가져다가 통에 채웠다.
   점심 장사를 마치고 나면 면으로 된 흰색 유니폼이 땀에 젖었다. 정신없이 바쁜 것이 한가한 것보다는 훨씬 덜 힘들다고 했다. 사장이나 종업원이나 마찬가지였다. 처음에는 그 말을 수긍하기 어려웠으나 내 가게를 시작하고 나서 그 의미를 비로소 알게 되었다.
   가게에서 일하는 사람은 여자 넷에 남자 둘, 모두 여섯 명이었다. 주인 부부 두 사람, 그리고 나머지 네 명은 모두 종업원이었다. 종업원은 캐나다에서 헬퍼라고 불렸다.
   여사장인 제시카는 나하고 동갑이었고, 남자 사장인 제임스를 비롯한 나머지 사람들은 두세 살이 많았다. 서로 영어 이름을 부르기도 했지만 가게 안에서는 “언니"라는 호칭이 가장 많이 들렸다. 내가 출근을 해서 인사를 하자 헬퍼들은 모두 영어 이름으로 자기 소개를 했다.
   “린다예요. 반가워요.” “난 헬렌.” “나는 데보라예요.”
   “저는 아직 영어 이름이 없습니다.”
   “괜찮아요. 우린 그냥 미스터 마라고 부를게요.”
   살갑게 말을 붙이는 린다라는 이가 나이가 가장 많아 보였다.
   “우리는 영어 이름으로 불러 줘요. 여긴 캐나다니까.”
   아무리 영어 이름이라고 해도, 나보다 나이 많은 여성들을 이름으로만 부르기가 어려웠다. 누님이라고 하기도 쑥스러웠다. 나는 여자 사장 제시카가 하는 것처럼 이름 뒤에 ‘언니'를 붙여 부르기로 했다. 몇 번 부르니까 금세 익숙해졌다.

   브루클린의 메뉴는 스무 가지가 넘었다.
   베이컨, 양상추, 토마토를 빵에 넣어 주는 BLT도 있었고, 슈니첼이나 햄, 터키브레스트, 로스트비프를 넣어서 만드는 샌드위치도 있었다. 가장 많이 팔리는 메뉴는 튜나, 에그, 치킨 샐러드를 빵에 넣어 주는 샌드위치였다. 세 가지 메뉴가 매상의 80퍼센트 이상을 차지했다. 아주머니들은 아침 7시에 출근해 11시까지 주방에서 줄창 세 가지 샐러드만 만들었다. 샐러드의 인기 비결은 그들의 손맛이었다.
   제시카의 남편인 남자 사장 제임스는 보면 볼수록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초등학생 때 부모를 따라 캐나다로 건너온 이민 1.5세라고 했다. 그는 나이로만 어른일 뿐 철없는 어린아이 같았다. 점심 손님이 몰려들어서, 다른 사람들이 정신없이 바빠도 그는 딴전을 피우며, 남의 일인 양 멀거니 쳐다보기만 했다.
   그는 손님한테 돈을 받고, 나중에 돈 세는 일만 했다. 일이 조금 지체되어 손님이 기다리기라도 하면 손님들 앞에서 갑자기 소리를 질러 댔다. “사장님 때문에 심장 떨려 일을 못하겠다"며 그만두겠다는 데보라를 미셸이 통사정 해서 주저앉힌 것도 여러 번이었다.
   제임스는 10시에 느긋하게 출근했다. 다른 사람의 유니폼이 땀에 젖고 더러워져도, 제임스의 것만은 늘 뽀송뽀송하고 깨끗했다. 음식과 관련해 그가 하는 일이라고는 수프 끓이기 딱 한 가지였다. 꼴랑 그거 하나 하면서도 힘들어 죽겠다며 늘 생색을 냈다.
   손님이 몰려들기 직전, 제임스는 반드시 밖으로 나가 담배를 피고 들어왔다. 담배 냄새 나면 음식 더러워 보인다고 제시카가 아무리 타박을 해도 그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제시카는 오른손으로 왼쪽 가슴을 팡팡 치며 자기 탓을 했다.
   “내 탓이요, 내 탓이요. 어이구, 캐나다에서 온 신랑감이라고 해서 홀라당 넘어간 년이 바보지, 누구 탓을 하겠어.”

   나는 방송 작가로 일을 할 때부터 남의 인생사에 늘 관심이 많았다. 사장 부부가 어떻게 만나 결혼을 했는지, ‘언니'들은 또 어떤 과정을 거쳐 캐나다에 살러 오게 되었는지 퍽 궁금했다.
   야무지고 똘똘한 제시카가 어떤 연유로 저런 철부지 같은 남자에게 ‘홀라당 넘어’갔는지 궁금했다. 대놓고 물어볼 수는 없었다.
   그런데 사실 내가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언니들은 일을 하면서 앞으로 별반 달라질 것이 없을 자기 인생을 한탄하고 맞장구를 치며 서로를 위로했다. 내가 가만히 있어도 그들의 인생사는 술술 내 귀로 흘러들어 왔다.
   제임스는 전날 과음을 하면 결근을 했다. 한 달에 한 번씩은 있는 일이었다. 그날은 메뉴에서 수프가 사라졌다. 속이 상한 제시카가 말없이 부루퉁해 있으면 언니들이 돌아가면서 위로를 했다.
   “얘, 제시카야. 그래도 애들 아빠는 바람은 안 피잖니.”
   “사장님이 그래도 사람은 착해. 우리 신랑, 얼마나 못되게 구는지 잘 알잖아?”
   “바깥에서 큰 사고는 안 치니까, 그만하면 괜찮은 거야.” 마음이 조금 풀리면 제시카는 푸념을 하곤 했다.
   “아이고, 언니들. 차라리 밖에 나가서 바람이라도 피면 좋겠네. 매일 몸이 파김치가 돼서 자는데, 밤엔 또 얼마나 못 살게 구는지 알아? 무슨 일이 있어도 일주일에 두 번은 꼭 해줘야 돼.” 이런 말이 나오면 언니들은 “와, 부럽다", “대박", “미스터 마는 몇 번?” 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이런 말들을 하면서도 샐러드를 만드는 그들의 손놀림은 잠시도 쉬지 않았다.
   점심 장사를 마치고 주방에 둘러앉아 우리끼리 밥을 먹는 시간에도 대화가 쉴 새 없이 이어졌다. 이야기의 대부분은 남편들을 욕하는 것이었다. 골프에 미쳐서 속상하다는 둥, 축구 하다가 이빨이 깨지는 바람에 목돈이 들어갔다는 둥 언니들의 불평 불만은 끝이 없었다. 제임스는 이 자리에 끼지 못하고 빙빙 겉돌았다.

   점심시간보다 더 깊고 걸쭉한 이야기들이 오가는 시간은 따로 있었다. 분기별로 한 번씩 하는 회식 자리였다. 브루클린에는 나 같은 신참이 들어와서 첫 임금을 받으면 ‘한 턱 쏘는’ 전통이 있다고도 했다. 내가 처음으로 출근한 날 “ 다음 주 금요일?” 하며 언니들은 즐거워 했다. 술 자리에는 꼭 끼고 싶어 하는 제임스 사장을 못 오게 하려고 가게에서 ‘회식' 소리는 절대 입에 올리지 않았다.
   브루클린 언니들이 그러는 이유가 있었다. 제임스가 참석하면 분위기가 썰렁했다. 혼자 술 먹고 혼자 취하고, 또 혼자서만 말했다. 재미도 없고 늘 횡설수설이었다. 회식에 제임스가 나오면 언니들은 밥만 먹고 서둘러 일어나기에 바빴다.
   제임스를 피해, 회식은 가게에서 멀리 떨어진 토론토 서쪽의 한국 식당에서 주로 했다. 언니들은 소주 1병(혹은 맥주 5병)과 안주를 묶은 메뉴인 콤보를 좋아했다. 술은 늘 소주였다. 조금이라도 독한 것을 마셔야 ‘뭣 같은 세상'을 견딜 수 있다고 했다. 맥주는 노래방에 가서 주로 마셨다. 회식 자리에서 언니들은 끊임없이 웃고 이야기했다. 역시 남편들에 대한 내용이 가장 많았고 ‘왜 나는 남편 복이 이다지도 없을까?’ 하고 푸념했다. 그 자리의 유일한 남자인 나한테는 돌아가면서 이런 소리들을 했다.
   “미스터 마. 마누라한테 잘 해. 그래야 복 받아.”
   “마누라 말 잘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겨요.”
    그즈음 나는 떡이든 뭐든 복 받을 일 좀 생기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민이라고 와서, 몸을 만들고 공부를 한다고 하지만 그 기간이 1년을 넘어가면서 여러모로 힘들고 기운이 빠졌다. 여기저기 몸도 아프고 특히 허리가 많이 안 좋았다. 몸 아픈 것보다 마음 불편한 것이 더 견디기 힘들었다.

   주말이면 나는 나와 비슷한 처지의 한국 사람들과 자주 어울렸다. 나처럼 이민 붐을 타고 캐나다로 건너온 내 연배 사람들이었다. 취직을 한 사람도 있었고, 벌써 장사를 시작한 사람도 있었다. 나보다 몇 년 빨리 온 어떤 사람은 한인 주간지 만드는 일을 했다. 그 집에 놀러 갔다가 팩스 기기 옆에 쌓여 있는 보도자료들을 우연히 넘겨보게 되었다.
   그중 하나가 눈에 쏙 들어왔다. 한국의 해외동포재단이라는 기관이 해외 동포들을 대상으로 주최하는 문학상 공모였다. 장르는 시, 소설, 산문, 체험 수기, 네 개 부문.
   상금과 부상이 눈길을 끌었다. 장르별로 대상과 장려상 수상자 두 사람에게 상금을 각각 500만 원, 200만 원씩 지급하고, 한국행 왕복 비행기 표와 세계한민족축전 행사 기간에 숙식을 제공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상을 받으면 기분 전환은 확실하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보도자료를 술에 취해 읽어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그것이 내 눈에 띈 게 우연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상이 8개나 되는데 그중 하나야 못 받겠나?’ 하는 자신감이 있었다. 나는 한국에서 글을 다루며 밥벌이를 하던 사람이었다.
   여러 날이 지나도 흥분은 가시지 않았다. 출퇴근 길에 지하철 안에서 메모를 해가며 무슨 글을 쓸 것인가 궁리했다. 먼저 장르부터 정해야 했다.
   시나 산문 같은 짧은 글은 나에게 불리했다. 밑천이 한눈에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런 글들은 소질을 타고나야 쓸 수 있다고 나는 예전부터 믿고 있었다.
   과거 한국에서 내가 했던 일들과 연관시켜 보면 체험 수기가 그중 가장 만만해 보였다. 그러나 이민 온 지 2년도 안 된 내게, 심사위원들의 심금을 울리는 구구절절한 사연이 있을 리 만무했다.
   이것 빼고 저것 빼고 하니, 결국 남는 것은 소설밖에 없었다. 소설은 내가 잘 쓸 자신이 있거나 나와 잘 맞아서가 아니라, 다른 장르의 글을 쓸 수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것이었다. 내가 캐나다에서 해야 할 일로 자영업을 선택한 것과 똑같은 경우였다.
   대학 시절 ‘소설이란 무엇인가’라는 소설론 강의를 들은 기억을 떠올렸다. 그때, 소설에 대해 내 나름대로 생각한 것이 있었다.
   ‘소설은 형식이고 뭐고 없어. 무슨 내용이든 그냥 쓰면 되는 거야. 잡탕이라고 생각하면 돼.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어가면 되는 거지, 형식이고 플롯이고 따질 게 뭐 있나.’
   그냥 그렇게 가볍게 생각하기로 했다. 가볍게 생각하니 자신감이 조금 생겼다. 뻥을 치든 구라를 풀든 재미있게만 쓰면 나로서는 만족할 것 같았다.
   캐나다 이야기를 써야 할 테니, 내가 일한 곳을 소설의 배경으로 삼아야 했다. 뻥을 쳐도 경험 없이 칠 수는 없었다. 샌드위치점을 무대로 하되, 이야기를 가공해 꾸미면 되는 일이었다. 뼈대는 정했으니, 거기에 살을 붙이는 일만 남았다. 가장 먼저, 기구한 사연을 지닌 주인공부터 만들고 기둥을 세우듯 이야기의 중심에 박았다. 그 기둥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 가면 소설이 될 것도 같았다.

   그때 그렇게 썼던 소설 내용을 아래에 요약한다. 소설 전체를 읽고 싶은 독자라면 검색을 해보기 바란다. 「굳세었다 오봉희」를 찾으면 온라인상으로도 읽을 수 있다. 아래 요약본도 짧지는 않고, 또 읽을 만하니 굳이 찾아 읽는 수고는 하지 않아도 된다.


   단편소설 「굳세었다 오봉희」 요약

   소설의 등장인물은 실제 배경처럼 모두 여섯 명. 오봉희 여사는 샌드위치점 ‘퍼블릭가든' 여자 사장인 미셸과 띠 동갑이다. 미셸은 마흔이고 오봉희는 쉰두 살이다. 다른 인물은 오봉희의 동료 로사와 수잔. 로사는 미셸보다 한 살, 수잔은 세 살 더 먹었다.
   어느 날 봉 언니(오봉희는 영어 이름 대신 봉 언니로 불렸다)한테 일생일대의 사건이 벌어졌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미셸과 로사, 수잔 모두 입을 모아 말했다.
   “언니 축하해. 부러워 죽겠네.”

   오봉희 사건의 전말은 이랬다.
   그들이 일하는 샌드위치점에 오는 손님 중에서 언제부터인가 백인 남자 하나가 눈에 띄기 시작했다. 백인치고는 크지 않은 170센티미터쯤 되는 키에, 배와 엉덩이가 앞뒤로 툭 불거져 나온 뚱뚱한 남자였다. 나이는 50대 중후반쯤 돼 보였다. 검은색의 가느다란 뿔테 안경을 쓰고 밝은 색 캐주얼 복장에 늘 멜빵을 하고 다녔다. 옷과 안경은 고급스럽고 세련돼 보였다.
   그는 하루에 두 번씩 퍼블릭가든을 찾아왔다. 아침과 점심 식사 모두 퍼블릭가든에서 해결하는 단골은 더러 있었지만, 그 백인 손님은 유난히 눈에 띄었다. 아침에는 커피와 베이글 ‘스페셜 메뉴’를 주문했다. 베이글은 펌퍼니클만 먹었다. 그 손님 때문에 잘 팔리지도 않는 펌퍼니클 베이글을 늘 준비해 두어야 했다.
   점심은 6.99달러짜리 ‘참치 샐러드 콤보’만 주문했다. 그 손님이 눈에 띄었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푸드코트 손님들은 보통 음식을 테이크아웃해서 자기 사무실이나 근처 공원에 가서 먹는다. 푸드코트 식탁에 앉는 이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 안경 쓴 백인 손님처럼 가게 바로 앞에 앉아서 가게를 정면으로 쳐다보며 식사를 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느긋하게 커피까지 마셔 가며 날마다 1시간 가까이 그렇게 앉아 있다가 갔다. 퍼블릭가든 사람들이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 같았다.
   눈치 빠른 미셸과 로사가 그의 시선이 어디로 향하는가를 바로 알아챘다. 그의 눈길은 봉 언니한테로 가 있었다.
   미셸이 그의 신상을 알아냈다. 그와 반갑게 인사를 하는 단골 손님에 따르면, 그 백인 남자 손님은 캐나다 동부에서 가장 큰 신문인 《토론토타임스》 편집국의 간부였다. 신문사는 바로 옆 빌딩에 있었고, 퍼블릭가든 손님 중에 그 신문사 사람들도 많았다. 배달 주문도 자주 해서 퍼블릭가든에는 신문사가 ‘큰 손님'이었다.
   두어 달쯤 지나, 그 남자가 샌드위치점에 와서 하는 특이한 행동이 하나 더 생겨났다. 그는 샌드위치 주문을 오로지 봉 언니한테만 했다. 줄을 섰다가 자기 차례가 되어도 봉 언니 앞이 아니면 “먼저 가세요" 하고 뒷사람에게 순서를 양보했다.
   몇 번 그런 경우를 겪다 보니, 그가 주문할 차례가 되면 봉 언니가 자리를 옮겨 그에게 바로 갔다. 다른 언니들이 봉 언니의 등을 떠밀어서 시작된 일이다.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통성명을 했다. 봉 언니의 영어가 아무리 짧아도 그 정도는 할 수 있었다. 남자 이름은 피터라고 했다.

   내가 퍼블릭가든에서 일을 시작할 무렵에는 봉 언니라는 사람이 가게에 없었다. 캐서린 언니가 일을 그만 두자, 다른 사람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봉 언니였다.
   어느 날 가게에 출근을 했더니 처음 보는 사람이 유니폼을 막 입는 중이었다. 인상이 좋아 보였다. 퍽 단정하고 품위가 있어 보였다. 염색하지 않은 반백의 머리를 반들반들 윤이 나게 뒤로 빗어 넘겨 쪽을 찌듯 묶었고 갸름한 얼굴에 속눈썹이 길었다. 웃으면 두 눈이 일자로 그린 듯이 가늘어졌다. 동양 미인이 바로 저런 인상이겠거니 하는 느낌을 주는 사람이었다.
   내가 가게에 들어갔을 때 그이는 미셸과 대화를 나누던 중이었다.
   “언니, 언니가 일할 수 있다고 해서, 나오라고는 했는데, 난 정말 걱정돼. 언니, 정말 괜찮겠어?”
   나는 여자 주인이 무슨 걱정을 저리 하나 싶었다. 그 다음날, 아침 배달 준비 때문에 1시간 일찍 출근했더니 미셸이 나에게 그 언니에 관한 이야기를 자세히 들려주었다.
   미셸의 첫 마디는 “1년 전에 팔자 고친 언니”였다.
   이야기를 들어 보니 맞는 말이었다.

   봉 언니의 남편은 아내에게 폭력을 휘두르던 사람이었다. 외도하고, 무시하고, 투명인간 취급하는 것까지는 참아 넘길 수 있었으나, 술에 취해 아이들 앞에서 자기를 때리고 집안 물건을 부수는 행동은 용서하기가 어려웠다.
   어느 날 남편이 캐나다로 이민을 간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했을 때 봉 언니는 속으로 많이 기뻐했다. 캐나다 사는 지인이 금형 기술자가 급히 필요하다며 연락해 왔다고 했다. 남편은 그 방면의 기술자여서 영주권 얻기가 수월하다는 말도 들었으나, 그러거나 말거나 봉 언니는 어떻게든 한국을 빨리 벗어날 수 있기만을 빌었다. 외국에 나가 살면 남편도 달라질 것이고, 무엇보다 숨통이 조금 트일 것 같았다.

   캐나다살이를 시작하면서 남편은 자기를 불러들인 사람한테 가서 몇 달 일을 하는 것 같더니, 어느 날부터 출근을 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 생겼느냐고 물어보면 “말하면 네가 알아?” 하며 짜증을 냈다.
   매월 첫날, 아파트 월세를 내는 날이 되어도 남편은 나 몰라라 했다. 남편은 일할 생각을 아예 접은 것 같았다. 그는 “골프 피가 한국의 4분의 1밖에 안 된다"고 희희낙락하며 골프장에 나가 거의 살다시피 했다.
   골프장이 문을 닫는 겨울이 되자 남편은 여기는 심심하고 돈벌이도 할 수 없으니 한국으로 돌아가자고 했다. 봉 언니는 단호하게 반대했다. 결혼 이후 처음으로 자기 주장을 강하게 내세웠다. 가고 싶으면 당신 혼자 가라고 했다. 돈은 봉 언니가 벌겠다고 했다. 혼자 벌어서는 생활비에 턱없이 모자랐지만 가진 돈을 전부 까먹는 한이 있어도 한국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한국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예전 생활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했다. 생각만 해도 끔찍했고 죽기보다 싫었다.
   캐나다에 와서는 최소한 맞고 살지는 않았다. 가정에서 폭력을 휘두르면 경찰이 바로 들이닥친다는 소리를 남편도 들어서 잘 알고 있는 듯했다.
   무엇보다 중고등학생인 두 아들이 캐나다 학교 분위기를 좋아했다. 아이들을 생각해서라도 이곳을 떠날 수는 없었다.
   샌드위치점에 돈을 벌러 나갔던 봉 언니는 거기서 미셸을 동료로 만났다. 미셸이 남편과 함께 자기 가게를 차려 나가면서 봉 언니한테 도와 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렇게 해서 미셸네 가게에서 오랫동안 일을 해온 터였다. 캐나다에서 나온 신랑감과 선을 봐서 결혼하고 20대 초반에 캐나다로 건너온 미셸은 봉 언니를 친언니처럼 따르며 의지했다.
   특이한 단골 손님인 피터가 샌드위치점에 나타난 것은 봉 언니가 퍼블릭가든에서 일을 한 지 5년이 넘어갈 즈음이었다. 봉 언니의 남편은 여전히 놀기만 했다. 봉 언니는 아이들이 대학 공부를 마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결단을 내릴 마음의 준비는 늘 하고 있었다.
   피터를 보면 봉 언니도 은근히 기분이 좋았다. 그에게 존중 받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봉 언니는 말없이 예의 바르게 다가오는 피터에게 샌드위치를 ‘스페셜’로 만들어 주었다. 봉 언니가 참치 샐러드를 꾹꾹 눌러 담고 거기에 상추도 몇 장 더 얹어 만든 샌드위치는 다른 것보다 곱절은 커 보였다.
   한 번은 샌드위치를 건네주던 봉 언니의 손끝이 피터의 손에 살짝 닿았다. 두 손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종이에 싼 샌드위치를 주고 받으면서 자연스럽고 은밀하게 이루어지는 접촉이었다.
   아무리 은밀하다 한들 다른 언니들이 그것을 모를 리 없었다. 미셸이 그냥 모른 척 지나가자고 해도, 성질 급한 로사는 참지 못했다.
   “언니, 그분 되게 착해 보이던데, 따로 만나서 커피라도 마셔 봐. 뭐, 어때. 친구처럼 지내면 되지.”
   어쩐 일인지 평소 말이 별로 없는 수잔까지 가세했다.
   “그래요, 언니. 그 아저씨, 사람 좋아 보여요. 매너 있고 점잖잖아요. 친구로 잘 지내 봐요. 남사친, 여사친, 이런 걸로요.”
   봉 언니는 남사스럽다며 펄쩍 뛰었으나 그런 소리가 싫지는 않은 표정이었다.
   “영어도 못하는 내가 어떻게 친구를 해?”

   피터는 계속 샌드위치점을 찾았고 봉 언니는 평소처럼 샌드위치를 싸주었다. 아침에 오면 주방에서 나와 가볍게 눈인사를 했다. 두 사람 사이에 무엇인가가 진행되고 있었다. ‘동생'들이 아무리 추궁을 해도 봉 언니는 씩 웃기만 했다.
   두 사람의 관계가 드러나고, 또 두 사람이 극적으로 맺어진 사건은 아이러니하게도 봉 언니 남편 때문이었다. 어느 날 오후 50대 중반으로 보이는 한국인 남자가 퍼블릭가든에 나타나 욕설을 섞어 소리를 질러 댔다.
   “야, 오봉희, 이 쌍년, 지금 어디 있어? 엉? 당장 나와. 서방이 시퍼렇게 살아 있는데, 네가 바람을 피워? 야, 내가 모를 줄 알아? 어디 있어, 빨리 나와. 안 나와? 이 뭣 같은 화냥년아.”
   눈앞에 있다면 마치 패대기라도 칠 기세였다. 마침 봉 언니는 점심을 먹고 화장실에 가 있었다. 급히 화장실로 뛰어간 로사 덕분에 봉 언니는 뒷문으로 빠져나갈 수 있었다.
   “언닌 몸 안 좋다구 발쎄 나갔는디유. 머언 일로 그러셔유? 머언 일 있간디유?”
   그래도 안면이 있는 미셸이 능청을 부려가며 봉 언니 남편을 일단 의자에 붙들어 앉혔다. 두 사람은 동향이었다.
   자리에 앉아서도 봉 언니 남편은 여전히 큰 소리로 말했다.
   같은 교회 다니는 누군가가 전해 주었다고 했다. 다운타운의 커피점 팀호턴스에서 봉 언니가 중년 백인 남자와 커피 마시는 것을 보았는데, 두 사람 사이가 심상치 않아 보였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 보니, 남편 눈에도 아내가 달라 보였던 모양이다. 늘 어둡고 우울해 보이던 아내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이눔의 여편네, 눈에 보이기만 해봐라, 다리 몽뎅이를 작신 부러뜨릴 테니까. 오봉희 년, 내일부터 출근 안 합니다. 그런 줄 아슈.”
   남편은 악다구니를 퍼붓고 자리를 떴다.
   남쪽 호숫가까지 한참을 걸어갔던 봉 언니는 피터의 신문사가 있는 빌딩으로 터덜터덜 되돌아왔다. “갈 곳이 없다”는 봉 언니의 말에 피터는 아무 것도 묻지 않고 손을 내밀었다. 그 길로 봉 언니는 피터가 사는 집으로 들어갔다. 피신이자 사랑의 도피였다.
   피터는 십수 년 전에 아내와 사별하고 다운타운의 콘도(아파트)에 혼자 살고 있었다. 남쪽으로 난 큰 창으로 온타리오 호수가 바다처럼 내다보이는 3베드룸 고급 콘도였다.
   봉 언니가 미셸네 가게에 다시 나올 수 있었던 것은 1년이 지나는 사이에 두 가지 일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봉 언니가 피터의 집에 들어간 직후, 두 청년이 퍼블릭가든에 와서 주인을 찾았다. 봉 언니의 두 아들이었다.
   “미셸 아줌마, 우리 엄마한테 전해 주세요. 우리는 잘 지내고 있다고요. 대학 졸업하면 바로 취직도 할 거니까, 우리 걱정 마시고, 엄마 행복 꼭 찾으시라고, 우리는 언제나 엄마 편이라고, 언제나 엄마를 응원한다고 전해 주세요. 이제, 엄마는 엄마만 생각하면 돼요. 엄마한테 연락하기가 어려워서 아줌마를 찾아왔어요.”
   이 말을 전해 들은 봉 언니는 그저 눈물만 쏟았다. 가장 큰 마음의 짐을 내려놓은 듯했다. 그 사이에 벌어진 다른 일은 봉 언니의 남편이 어떤 여자와 살림을 차렸다는 사실이다. 두 사람은 봉 언니가 피터를 만나기 훨씬 전부터, 골프를 치며 만나온 사이라고 했다.
   그렇게 봉 언니는 일상을 되찾으며 새로운 삶을 살기 시작했다.

   내가 썼던 문학상 응모작 「굳세었다 오봉희」는 바로 이런 내용이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오봉희라는 인물만큼은 재미있게 만들어 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외동포재단에 소설을 보내고 나서 나는 그것을 한동안 잊고 지냈다. 막상 쓰고 보니, 이게 소설이 되겠나 싶어서 자신감도, 기대감도 거의 사라지고 없었다.
   빵과 커피에 관심이 생겼던 나는 제시카네 샌드위치점에서 나와 베이커리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폴란드 출신 베이커에게 야단을 맞아 가며 빵 굽는 일을 새로 배우느라 나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집으로 전화가 왔다.
   “해외동포재단인데요, 소설 부문 대상을 받으셨어요. 축하합니다.”

   캐나다에 살러 온 지 2년 만에 큰 상을 받고 한국을 방문했다. 꿈만 같은 일이었다. 나는 달콤한 일주일을 한국에서 보내고 토론토로 돌아왔다.
   내가 없는 사이에 토론토에서는 난리법석이 벌어지고 있었다. 내가 쓴 소설 「굳세었다 오봉희」가 《한인동포신문》에 사흘에 걸쳐 연재되었고, 집으로 전화가 쉴 새 없이 걸려 왔다고 했다. 축하 전화가 아니라 항의 전화였다.
   토론토 한인 동포가 해외동포문학상을 받았다는 사실은 기사화되어도 문제 삼을 일이 아니다. 그런데 글쓴이의 동의도 구하지 않고 소설 전체를 신문에 게재하는 것은 문제였다.
   그 문제만으로 끝났다면야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수도 있었다. 문제는 그로 인해 다른 종류의 큰 사달이 났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의외로 심각했다.
   나와 친하게 지냈던 브루클린 ‘언니'들이 돌아가며 우리 집으로 항의하는 전화를 해왔다. 내가 한국에 가 있는 사이에 그들의 전화를 받고 응대하느라 아내는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내가 나서서 해명을 해야 했다.
   “이건 그냥 소설이거든요. 지어낸 이야기요. 가게에 봉 언니 같은 사람이 없잖아요.”
   무슨 말을 해도 바로 반박이 들어왔다.
   “그게 왜 지어낸 이야기야, 사람들이 나더러 내 얘기라던데. 사람들이 나한테 그렇게 말하더라니까?”
   “언니는 소설 읽어 보셨어요?”
   “안 그래도 기분 나쁜데, 그걸 내가 왜 읽어?”
   “읽어 보고 내 이야기인지 아닌지 판단해 보시라고요. 언니하고는 상관없는 얘기가 대부분이라니까요?”
   “아니, 그러게, 왜, 내 얘기를 하면서 나와 상관도 없는 얘기를 썼냐고. 내 얘기도 아닌데, 사람들이 내 얘기라고 믿잖아.”
   “그렇게 믿는 사람들이 잘못이지, 제가 잘못한 건 아니잖아요. 소설이란 게 원래 지어낸 얘기라고요. 저는 지어낸 얘기로 상을 받은 거고요.”
   “아니, 난, 미스터 마처럼 배운 게 없어서 그런 건 잘 모르겠고. 그러게, 왜, 내 얘기를 지어내서 쓰냐고. 나, 미스터 마, 사람 그렇게 안 봤는데, 정말 이렇게 뒤통수 칠 줄은 몰랐네.”
   절망스러웠다. 브루클린 사장인 제시카도 전화를 해왔다.
   “미스터 마, 뭐, 나는 우릴 소재로 소설 쓴 거까진 그래도 이해해요. 소설은 소설이니까, 뭐. 나도 예전에 소설 많이 봤고, 뭐, 박완서도 좋아하고 그랬거든요. 근데, 소설 썼다고 신문에까지 그렇게 내는 건 아니죠. 문학상 상금 받고, 신문에 내서 또 돈 벌고. 언니들 팔아서 그렇게 돈 벌고 싶었어요? 이건 진짜 아니죠.”
   “아이고, 진짜 오해십니다. 저도 신문이 그걸 실어서 엄청 당황했어요. 저는 한국에 가 있어서, 신문에 나온 줄도 몰랐고요, 제 허락도 받지 않고 일방적으로 신문에서 실은 거예요. 저한테 물어봤으면 백퍼 반대했을 거고요. 그리고 신문에 실렸다고, 제가 돈 받는 거 아니에요. 돈 받은 적 없어요.”
   “에이, 신문에 글이 실렸는데 돈을 안 받아요? 그걸 누가 믿어요. 거짓말까지 하는 걸 보니 미스터 마 다시 봐야겠네요. 우린 친군 줄 알았는데, 암튼 이번에 실망 많이 했어요. 어떤 언니는 지금 변호사 알아본다고 하니까, 그렇게 알고 계세요.”
   대화를 하면 할수록 절망스러웠다. 일단 내가 돈을 받고 신문에 전재했다는 오해라도 풀어야 했다. 《한인동포신문》에 연락해 사정을 설명하고 ‘작가의 동의 없이 소설을 게재했다'는 한 줄만 사고(社告)로 내달라고 부탁했다. 전화를 받은 편집국장이라는 사람은 곤혹스러워 했다.
   내 목소리가 높아졌다.
   “아니, 그 아주머니들이 화가 난 건요, 소설 때문이 아니라 《한인동포신문》에 크게 실려서 그렇게 된 거라니까요? 그러니까 신문에서 그 정도는 해줄 수 있는 거 아닙니까?”
   “저야 당연히 그렇게 해드리고 싶죠. 저도 작가한테 먼저 물어보자고 했는데, 사장님이 이런 건 빨리 실을수록 좋다며 강행하셔서요. 사고에 대해서는 사장님 하고 직접 말씀 나눠 보시죠. 바로 전화 드리라고 할게요.”
   편집국장이라는 사람은 아무런 권한도 없는 것 같았다. 10분쯤 후에 전화가 왔다.
   “저, 《한인동포신문》 사장 방맹효임다. 에, 또, 먼저, 해외동포상 수상을 동포 대표 신문사 사장으로서 동포들을 대신해, 먼저 축하드리고요., 에, 우리 신문에서, 축하하는 뜻으로다가 대대적으로 소설을 소개한 것에 대해 무슨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고요?”
   편집국장이 내 뜻을 전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내가 처한 곤혹스러운 상황을 설명하고 사고를 내달라고 부탁했다.
   “에, 또, 우리 신문사가 마광기 씨를 동포 사회에 널리 알려 준 게 있는데, 그런 사고를 내라고요? 에, 또, 우리한테 먼저 고맙다는 인사부터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답답했다.
   “말씀을 그렇게 하시면 안 되죠. 남이 쓴 글을 지면에 실을 때는 허락을 받아야 하지 않습니까?”
   “에, 또, 저작권은 마광기 씨가 아니라 해외동포재단에 있는 걸로 아는데요? 에, 저, 물론 동의를 얻었고요.”
   “해외동포재단 누구한테요? 동의해 준 사람 이름이 뭔가요? 게재 요청이 오면 저와 먼저 상의를 해달라고, 제가 동포재단 담당자한테 부탁하고 왔는데요.”
   방 사장은 갑자기 목소리를 높이더니 딴소리를 했다.
   “거, 젊은 사람이 말야, 응? 좋은 말로 좋게 좋게 말하면 알아 들어야지, 매너 없이 왜 이렇게 답답하게 굴어? 응? 거, 젊은 사람이 말야, 앞뒤가 꽉 막혔구먼. 엉? 그거 수준도 한참 떨어지는 걸 그래도 상 받았다고 그렇게 크게 실어 주고 유명하게 만들어 줬으면 고마워 할 줄 알아야지, 말이야. 거, 참, 젊은 사람이 말이야, 말이 되게 많구먼. 나는 고맙다고 인사하려고 전화한 줄 알았네.”
   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냥 전화를 먼저 끊었다.
   시간이 지나자 해프닝은 잠잠해졌다. 서울로 상을 받으러 갈 때만 해도, 나는 토론토로 돌아와서 언니들한테 단단히 한턱 쏘려고 했었다. 소설의 단초나 뼈대는 되었으나, 내용 자체는 그들의 이야기가 아닌 만큼 언니들이 그렇게 화를 내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따지고 보면 언니들을 분노케 한 것은 소설의 내용이 아니었다. 그것은 《한인동포신문》에 전재된 내 소설을 읽은 주변 사람들의 말이었다.
   “이거 니네 가게 얘기지? 와, 그런 일이 다 있었어?”
   “네가 진짜로 그랬어? 용감하네.”
   “그 언니, 정말 한국에서 맞고 살았대? 여기선 안 맞았고?”
   소설을 실제 일어난 일이라 여기고 물색없이 떠들어 댄 사람들이 브루클린 언니들을 제대로 ‘빡치게' 했다. 남의 말 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저런 말 한마디 한마디가 언니들의 가슴에 비수처럼 꽂혔다. 토론토 한인 사회가 좁디좁은 데다, 별 화제젯거리도 없는 곳이다 보니 이런 유의 말들은 쉽게 빨리 퍼졌다. 나는 언니들이 속상해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해프닝이 그렇게 끝나는 줄 알았다. 시간이 지나면 언니들을 만나 어찌됐든 내 불찰로 마음을 다치게 해서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고 싶었다. 무엇보다 그들과의 관계를 회복해 예전처럼 함께 놀고 싶었다. 그까짓 소설보다 내가 토론토에 와서 만난 첫 직장 동료들과의 관계가 나에게는 훨씬 더 소중했다. 내가 언니들을 모시고 한국 식당에서 소주 콤보를 대접할 날이 곧 오겠지 싶었다. 그들은 그만큼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그런 작은 기대마저도 산산조각 내버리는 사건이 벌어졌다.
   첫 번째 사건이 일어난 지 두 달쯤 지난 어느 날 여자 사장 제시카가 집으로 전화를 해왔다. 나는 이제는 화가 풀려서 연말에 한턱내라고 전화를 했나 싶어 반갑게 전화를 받았다.
   뜻밖에도, 제시카의 목소리는 화가 나서 벌벌 떨렸다.
   “미스터 마, 이게 뭐냐고, 씨. 지금 우릴 두 번 죽이겠다는 거야, 뭐야, 이게.”
   제시카는 나에게 처음으로 반말을 하며 퍼부어 댔다.
   제시카는 흥분을 해서 횡설수설했다.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듣고 보니 제시카가 그렇게 화를 낼 만했다. 오늘, 한국식품점에 갔다가 한인 주간지를 집어 들었는데, 거기에 내 소설 「굳세었다 오봉희」가 또 대문짝만 하게 실려 있더라는 것이다.
   제시카는 내 이름까지 불러 가며 따져 댔다.
   “도대체 마광기 씨는 우리를 언제까지 팔아먹을 작정이에요? 그래도 우린 마광기 씨한테 서운하게 한 적 없다고 생각하는데, 우릴 또 팔아서 이렇게 이름 얻고 돈 벌고 해도 되는 거예요? 이거, 너무 하는 거 아녜요?”
   급기야 그녀는 울먹였다.
   “나도 모르는 일이에요. 진짜예요."
   내가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귀에 들리는 것 같지 않았다.
   수화기에서 갑자기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나하고 말도 몇 번 섞은 적 없는 제시카 남편 제임스였다. 그는 어눌한 한국말로 내게 협박을 했다.
   “얌마, 너, 여기서 수(Sue, 고소) 당하면 거지 되는 거 알지? 임마. 꼼짝 말고 기다려, 너 곧 거지 돼, 인마.”
   한국식품점으로 가서 문제의 주간지를 펼쳐 보았다. 여러 무가지 중에서 그나마 읽을 거리가 있는 《퓨처코리아》라는 주간지였다. 발행인도 한 다리 건너면 아는 사람이었다. 그 주간지는 ‘송년 특별 기획’이라며 내가 쓴 소설을 두 면에 걸쳐 게재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내가 《퓨처코리아》에 투고를 한 모양새였다.
   발행인에게 바로 전화를 했다. 이제는 화낼 기운도 없었다. 힘없는 목소리로 저간의 사정을 설명하고 그에게 부탁을 했다.
   “내가 유명해지고 싶어서, 돈을 벌려고 신문에 냈다고, 샌드위치점 언니들이 화가 많이 났어요. 어떻게든 화를 풀어드려야 할 텐데, 방법이 이것밖에 없네요. 제 동의 없이 글을 실었다는 확인서 하나 써주시고요, 다음 호에 사고도 그렇게 내주세요.”
   그는 《한인동포신문》 사장과는 달리 선뜻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방맹효 씨와는 결이 다른 사람이었다. 그는 나를 직접 만나 사과하고 확인서를 전달하고 싶다고 했다.
   나를 만나자마자 그는 말했다.
   “내가 욘세대 국문과를 나왔는데 말이죠, 시인 마광우하고 동기고요.”
   속으로는 ‘그래서요?’라는 말이 맴 돌았으나 입으로는 “아, 그러시군요?”라는 말이 흘러나왔다.
   그는 나더러 “광우 하고는 한 집안이겠네요”라고 했다. 그 말에는 대꾸도 안 하고 나는 그에게 물었다.
   “「굳세었다 오봉희」가 두어 달 전에 《한인동포신문》에 이런 식으로 실렸었는데, 모르셨어요?”
   그는 몰랐다고 했다.
   “게재해도 되는지 저한테 전화해서 물어보기라도 하지 그러셨어요?”
   “전화하면 허락을 안 해줄 거 같아서 그냥 실었어요. 글이 재미있어서요. 어쨌든 미안하게 됐어요.”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이 정중하게 사과를 하고, 또 확인서까지 써 주었으니 내가 더이상 요구할 것은 없었다. 그는 언제 한번 만나서 소주를 사고 싶다고 했다.

   그와 헤어지자마자 나는 바로 다운타운으로 차를 몰았다. 도심은 썰렁했다. 크리스마스와 1월 1일 사이에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휴가를 가는 바람에 도시 자체가 텅 빈 느낌이 들었다. 푸드코트에 가보니 문을 연 가게는 하나도 없었다.
   나는 《퓨처코리아》 발행인이 쓴 확인서와 내가 쓴 편지를 브루클린 출입문 아래로 밀어 넣었다. 언니들 주려고 사서 들고 간 케이크 네 개는 전달할 방법이 없었다.
   돌아서는 발걸음이 몹시 무거웠다. 언니들 주소라도 알면 케이크를 들고 찾아가겠지만 한 사람도 알지 못했다. 내가 가진 연락처라고는 가게 전화번호밖에 없었다. 나로서는 더이상 어찌해 볼 방법이 없었다. 경위야 어찌 됐든 나로 인해 언니들의 마음이 또 상했다니 정말로 미안했다. 이제는 언니들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나로서는 그들과의 관계가 그렇게 깨진 것이 무엇보다 아쉽고 가슴 아픈 일이었다.
   나는 언니들과 오래도록 만나고 싶었었다. 함께 회식도 하고 노래방에 가서 놀고 싶었다. 그들과 함께한 시간은 그만큼 유쾌하고 유익했다. 이민 초창기, 내가 가진 이민 스트레스를 풀어 주고, 나에게 일을 가르쳐 준 고마운 사람들이었다.
   이듬해 1월초 나는 토론토의 온라인 커뮤니티에 글을 하나 올렸다. 제목은 ‘절필 선언’. 내용은 ‘나는 더이상 소설을 쓰지 않겠다’였다. 내 데뷔작은 그렇게 나의 마지막 작품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세상사 어찌 변할지 누구도 알 수 없다. 절필을 선언한 내가 이렇게 두 번째 소설을 쓰고 있으니 하는 말이다.

   다시 한 번 분명히 말한다. 이것은 소설이다. 소설은 소설일 뿐, 오해하지 말자!

필자 약력
프로필_성우제.jpg

성우제. 캐나다사회문화연구소장. 《시사IN》 편집위원. 1989년 시사주간지 《시사저널》(현 《시사IN》)에 창간 멤버로 입사해 13년 동안 기자로 일했다. 그중 11년을 문화부에서 보냈다. 2002년 캐나다 토론토로 이주했다. 17년째 자영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한국의 일간지와 시사주간지 등 여러 매체에 기고해왔다. 재외동포문학상을 두 차례(소설 및 산문 부문) 수상했고, 『느리게 가는 버스』, 『딸깍 열어주다』, 등 단행본 6권을 냈다. 2023년 4월 『캐나다에 살아보니 한국이 잘 보이네』가 가장 최근에 펴낸 책이다.
* 사진제공_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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