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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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호

우리가 그곳에 머물 수 없는 이유

금희

   소파가 죽었다.
   일매 언니가 말했다. 따듯한 유자색 봄볕이 창가에 머문 오후, 커피는 반쯤 마셨고 내 앞 A4 용지 위에 크고 작은 영수증들이 차곡차곡 붙여지고 있을 때였다. 장부는 일매 언니가 적었다. 촘촘하고 긴 정교한 네모 칸 안으로 30도가량 눕힌 소수점 달린 수들을 그녀는 노련한 회계사처럼 예쁘게 적어넣었다. 일본에서도 장부 정리 비슷한 일을 했을까. 그것에 관해서는 물은 적이 없었다.
   “아침에 자연이 학교 보내고 자명이 도시락 싸서 들렀는데, 마당에서부터 왠지 기운이 묘하더라고.”
   초봄에 씨를 뿌렸을 화분엔 상추가 파릇파릇 자랐고 수년을 자래운 너부죽한 잎의 알로에들은 통통하니 물기가 올라 있었는데 어떻게 열고 나갔는지 마당을 마주한 베란다 문 바깥, 작은 나무 같은 알로에 사이에 소파가 한 무더기 낡은 이불처럼 엎뎌 있었다. 이상하게 평화롭고 고요한 아침 마당이었다. 다행히 자명이가 집 안에 자고 있었기 망정이지 혼자였더라면 그 순간을 감당할 엄두가 나지 못했을 거라고 그녀는 머리를 흔들었다.
   “딴 건 몰라도 난 털 가진 짐승은 싫어, 징글징글 무섭단 말이야.”
   ‘털 가진 짐승’이란 말에 나는 며칠 전 그녀의 위챗 모멘트에서 본 적 있는 길고 무거운 금빛 털을 가진 골든레트리버를 떠올렸다. 지치고 피곤한, 무엇에 이끌려 허공에 시선이 머무는 듯한 녀석이었다. 그 곁에는 덩치가 상당히 많이 차이 나는 작은 몸집의 점박이 고양이 한 마리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렌즈를 바라보고 있었다. 예기치 않은 사정으로 돌보기 어려워져서 이들을 입양할 의향 있는 분들을 찾는다는 문구가 사진 아래에 간단히 박혀 있었다. 나도 그 사진을 여러 그룹 채팅방에 올려주었고, 그중 한 채팅방에 있는 친구네 이웃 아줌마가 달래(점박이 고양이)를 안아갔다.
   “뭣이? 이름이 뭣이라고?”
   아들딸 모두 출가 보내고 적적하던 차 키워온 고양이 한 마리가 있어 녀석에게 친구 삼아주고 싶다고 연락을 해온 아줌마였다. 아줌마는 ‘달래’라는 조선식 발음을 번지기 어려워 ‘달라이?’ ‘라이라이?’라고 연신 혀를 곱씹었다. 결국 아줌마는 녀석을 ‘라이’라고 부르기로 했다고 알려주었다. 소파와 달래, 주인을 잃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두 녀석을 한꺼번에 데려가려는 사람은 없었다. 길고 푹신한 털 자체를 두려워하는 일매 언니로서는 소파를 데려가 주는 것이 훨씬 고마운 일이었겠지만 솔직히 소파는 너무 컸고 좀 늙었다.
   엄마의 기척을 듣고 작은방 침대에 자고 있던 자명이 나왔다고 했다. 아빠가 중국으로 돌아온 후부터 아빠 집으로 오면 늘 머물곤 하던 작은방이었다. 그 아이는 이미 싸늘해진 소파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고는 녀석이 자주 놀던 큰방 아빠의 침대에서 얇은 시트를 걷어 내왔다.
   “그때 보이더라, 거 참, 자명이는 제 애비 정말 많이 닮았더라고.”
   장부는 끝냈고 커피도 다 마셨다. 일매 언니는 괜찮다는 듯, 진짜 괜찮다는 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 비장하지도 처연하지도 않은 미소였지만 내게는 그것이 삶의 아픔의 강도를 부러 약하게 표현하고 받아들이고자 하는 그녀의 생존 방식으로 느껴졌다.
   우리는 20분가량 카페 의자에 더 앉아서 곧 있을 애들의 졸업 파티와 3년 동안의 중학교 생활에 대해 부분적인 기억들을 나눴다. 일매 언니의 큰아들 자명이와 우리 집 수연이 한 반이 아니었더라면 나와 그녀도 별로 더 가까이 지낼 만한 건덕지(이유)를 찾지 못했을 것이다. 한때 수연에게 고백 편지를 여러 번 띄운 아들의 성장통에 관해서 일매 언니는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소파가 죽었고, 아빠의 침대보로 소파를 감싸 안았다는 얘기를 듣고 나니 왠지 이후에는 자명을 좀 더 너그럽게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 영수증과 장부 사진을 두루 찍어 담임선생님께 보내고 나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모두 마무리가 되었다. 아이들의 졸업과 더불어 이렇게 우리들의 인생도 한 단락 정리가 되었구나 하는 감이 들었다. 내게 가볍게 손을 흔들어 보이고 늘어진 버드나무 가지 너머에서 신호등을 기다리고 선 일매 언니의 뒷모습은 여전히 곧고 매력이 있었다. 지난해 동창 모임 때 25년 만에 일매 언니를 만났다는 오빠의 눈에도 저렇게 보였을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일매 언니와 나는 꽤 오래 아는 사이, 한동네 출신으로서 더 다정한 관계로 이어질 가능성이 다분히 있었지만 또 그렇게 되기에 어려운 부분이 있어서 여태 미적지근 심심한 사이로 지내왔다. 고등학교 중퇴 후 6, 7년 정도 일을 하다 결혼하고 남편을 따라 일본으로 이주했던 언니가 다시 중국으로 돌아온 것은 큰아들 자명이가 초등학교 4학년, 만 10살이 되던 해였다. 수연이와 한 반은 아니었지만 준수하게 생겼고 피아노 잘 치는 ‘일본 애’가 우리 학급으로 전학해 왔다는 소문은 금방 들었다. 조선어가 많이 어눌하고 중국어는 거의 알아듣지 못한다는 남자애가 일매 언니의 아들일 것은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한 학기가 거의 지나면서 학부모 사이에 퍼진 소문이 좀 더 명확해졌는데, ‘일본 애’가 아니라 일본에 거주하던 조선족 가정에서 태어난 ‘중국 애’이며 현재는 남편과 헤어진 엄마가 홀로 애들 둘 데리고 친정이 있는 중국으로 돌아온 사정이라는 것이 입빠른 학부모를 통해 알려졌다. 방학식을 하는 날 강당 한쪽 구석진 자리에 앉은 일매 언니를 보고 그녀가 바로 풍문 속의 ‘일본 애’ 엄마라는 것을 확인하면서 나는 뭐라 콕 집어 말하지 못할 복잡한 심경을 느꼈다. ‘새옹지마’라는 성구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굳이 오빠한테 일매 언니 이야기를 해줄 필요는 없었다. 그래도 나는 아내와 공식적인 이혼 수속을 끝낸 오빠의 술기운 풍기는 목소리를 전화 이편에서 들을 때마다 가끔씩 일매 언니의 근황에 관해 수다를 떨고 싶은 충동을 감지했다. 일매 언니도 이혼했고 이제 중국에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는다면 오빠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수연이와 자명이가 중학교로 진학하고 한 반이 되어 부득불 더 가까운 거리에서 살아가게 되었을 때 어느 날 나는 결국 지나가는 수다처럼 가볍게 그녀 얘기를 해버리고 말았다. 이렇게 오랜 세월이 흐른 마당에 굳이 지뢰밭을 피하듯 일부러 회피할 만한 일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생각나지, 일매 언니? 그럼, 오빠 동창 친구(호칭이 애매하긴 했다). 그 언니네 아들하고 우리 수연이 지금 한 반이다? 세상 참 좁지.”
   오빠는 한두 번 더 확인하고 컹컹 건기침을 깇다가 다소 놀라고 들뜬 목소리로 답했다.
   “그러게, 돌고 돌아서 원래 자리로 돌아온 느낌이네. 중학생 아들이라, 키가 많이 크겠다.” 말이 난 김에 더 자세히 알고 싶어 했으므로 나는 오빠한테 일매 언니가 이혼하고 먼저 애들 데리고 중국 들어왔는데 지금은 전남편도 들어와 따로 마당이 딸린 빌라를 사고 작은 상가 하나를 구매해 화장품 가게를 차렸다는 내용을 전했다. 일매 언니는 그보다 좁고 낡은 아파트에서 애들과 노모를 돌보는 한편 간간이 일본어 과외를 하면서 생계에 보탠다는 얘기를 듣고 오빠는 안쓰러워했다.
   “정일매, 걔 진짜 똑똑하고 멋있는 애였는데…….”
   참 오빠는 속도 없냐고, 혼자 산다는 얘기 들으니까 왜 미련이 생기냐고 나는 농담 삼아 찔러주었다. 어릴 때는 이해할 수 없는 세절들이 많았지만 마흔이 넘은 지금 돌이켜보니 오래 전 그 둘 사이에 벌어진 것이 무엇이었는지 대충 해석이 되었다. 오빠는 허허 약간 허탈하고도 바보스럽게 웃었다.
   일매 언니 때문만은 아니었겠지만 그 후 오빠는 고향 도시에서 열리는 동창 모임에 참여하려는 쪽으로 생각을 바꿨다. 그 두 사람은 지난해 여름 2박 3일로 진행된 동창 모임에 꼬박 참여했고 저녁에는 몇몇 친구들과 따로 만나 양꼬치를 먹고 노래방에서 옛 노래를 불렀다. 오빠는 일매 언니가 챙겨온 해장 약을 다른 남자 동창이랑 나눠 먹었고 일매 언니는 오빠가 여자 동창들을 위해 사온 핸드크림 선물을 기쁘게 받았다. 둘은 서로 위챗을 추가했지만 눈치로 보아 그 뒤로는 별반 연락을 하지 않고 지내고 있었다. 일매 언니의 전남편이 갑작스레 고인이 된 지금 이후로도 대충 그렇게 지내지 않을까, 하는 것은 나의 모호한 직감이었다. 다른 시나리오는 없겠지, 없는 것이 좋은 거겠지, 일매 언니와 헤어지고 돌아오면서 나는 군데군데 뜯겨나가고 색이 많이 바래 혼잡하고 모호해진 기억 속의 편린들을 뒤져보았다. 40년 전의 고향 동네였다.

   일매 언니네는 동네의 동쪽 변두리, 동서로 길게 뻗은 마을의 삼분지 일 지점을 관통하는 강 동편에 살았다. 늦게 이사 온 집들이 강 서편에서 자리를 잡지 못해 동편 낮은 언덕 쪽으로 삶터를 마련해 나간 것이었다. 조선집들만 모여 사는 서편과 달리 동편에는 한족, 만족이 조선집들과 섞여 살았고 한족 집들이 키우는 거위, 돼지, 양과 젖소 같은 가축들 때문에 그쪽 동네에서는 항시 퀴퀴한 배설물 냄새가 맡아졌다. 우리 아버지와 일매 언니네 아버지는 사이가 좋았다. 호도거리제가 실시된 후 개방이 되어 각기 동네를 떠나기 전까지 한 그룹이 되어 농망기 일을 서로 도왔다. 일매 언니네 할아버지는 함경북도 출신이었고 아버지네 본가는 경상남도여서 사투리를 약간 다르게 쓰기도 했지만, 동네가 워낙 이주민 2세대가 주류인 데다가 위만(만주국) 시절부터 조선 팔도에 본적을 둔 이들이 사면팔방에서 모였던지라 이미 팔도 억양과 사투리가 모두 혼잡해졌으므로 그런 것은 우정을 쌓는 데 방해가 되지 않았다. 일매 언니네 집에서는 우리 집 김치가 맛있다고 했고 우리 집에서는 일매 언니네 입쌀 밴새(만두)를 좋아했다.
   일매 언니는 ‘딸 셋 둔 집안의 막내라면 얼굴 볼 필요도 없이 데려간다’는 그 셋째 딸이었다. 하지만 아직 어려서였던지 내 기억으로는 그 집 큰언니가 가장 예뻤고, 남자애들처럼 깍둑 깎은 짧은 머리에 늘상 추리닝 운동화 차림으로 다니던 일매 언니는 내게 예쁘다는 인상을 준 적이 없었다. 오빠는 일매 언니와 잘 놀았다. 성격이 많이 다른데도 죽이 잘 맞아서 여름에는 산판과 강가를 떠돌며 풀잎과 진흙으로 가정 세간을 만들어 소꿉장난을 했고, 겨울에는 얼음을 지치거나 구들 위에 틀어박혀 머리를 맞대고 그림책을 보곤 했다. 자라면서는 아무래도 성별이 다르다 보니 사이가 뜸해지다가 중학교부터는 다른 이성 친구들처럼 거리를 웬만히 두고 지낸 것 같다.
   오빠는 공부를 잘했고 중학생이 되면서 키가 훌쩍 커버려 여학생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연애편지를 여러 번 받았고 선생님께 불려 가 본인과는 상관없는 일이며 자신은 공부에만 신경 쓰겠노라 다짐을 드린 적도 있었다고 나는 엄마와 아버지의 대화 속에서 전해 들었다. 일매 언니는 그 시절 살이 좀 쪘다. 머리카락은 여전히 짧은 커트였고 얼굴에는 여드름이 군데군데 났는데 다행히 다리가 길어 나팔바지 청바지가 잘 어울렸다. 여성스러운 이미지는 그때까지 확연히 드러나지 않아 일매 언니는 남학생들이랑 스스럼없이 장난을 치고 다녔다.
   시원한 바람이 부는 여름밤, 창가나 마당에서 하품을 참으며 기다리다 보면 짜르릉 자전거 소리들이 대문 바깥에서 들렸다. 사춘기 소년·소녀들의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밤바람에 실려 동네 골목에서 퍼져나갔다. 오빠네 또래의 중학생들이 밤 자습을 마치고 돌아온 것이었다. 가로등도 없는 밤길을 40분 남짓 달려오는 동안 남자아이들은 본능적으로 여학생들을 대열의 가운데 자리에 머물도록 지켜주었다. 때로 그들은 도중에서 장난질했고 악의 없는 욕설을 서로 퍼붓기도 했다. 나는 그들이 담장 곁에 잠깐 자전거를 멈춰 세우고 서서 땅을 디디지 않은 다른 다리로 곁에 선 친구에게 망아지처럼 발길질하는 모습을 지켜보곤 했다. 일매 언니는 또래 중에서 유일하게 강 동편에 사는 여학생이었는데 남학생들이 번갈아 그녀를 동편 마을로 이어지는 다리까지 배웅했다. 내가 본 것만 해도 오빠가 바래다준 횟수가 가장 많았다. 오빠는 다리 건너 일매 언니네 집으로 굽이 트는 골목까지 배웅해 주고 돌아왔다. 때로 어떤 골목길에서 학교를 중퇴한 한족 남자애들이 휘파람을 불었기 때문이었다. 일매 언니네 부모들은 오빠가 참 인정이 많다고 칭찬하곤 했다.
   1990년대가 오고 중국의 개방 시대가 시작되면서 일매 언니네 부모도 다른 여러 집 어른들처럼 출국 붐을 탔다. 친척 방문과 여행 비자를 받아 몇 개월 만에 한 번씩 돌아오기를 반복하다가 나중에는 계획한 수만큼 통장을 채우기까지 돌아오지 않기로 했다. 몇 년만 고생하면 곧 전보다 훨씬 풍요롭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일이 그때는 가능해 보였다. 막 스무 살이 되어 도시로 나가 일을 하고자 하는 큰딸과 공부에 취미를 붙이지 못하는 둘째 딸, 아직 철이 덜 든 천방지축 막내딸을 일매 언니네 부모는 시대와 운명이라는 큰 흐름에 잠시 맡기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일 년이 지나고 반년이 더 지나자 동네에서는 그 집 맏이와 둘째가 도덕적으로 평판이 그다지 좋지 않은 상대와 연애와 실연을 반복하고 있다는 소문이 두루 돌았다. 무작정 도시로 나가 일을 해보겠노라 떼를 쓰는 딸을 둔 조신한 엄마들은 일매 언니네 두 딸을 예로 들어 훈시하기 좋아했다. “너도 정춘매네처럼 살 거야?!”
   일매 언니네와 친분이 있는 우리 부모님은 처음엔 그녀들을 안쓰럽게 여겨 얼굴을 볼 수 있을 때마다 이리저리 에둘러 권했지만, 나중에는 차차 실망감을 느꼈는지 들려오는 소문에 큰 반응을 보이지도, 이웃들 앞에서 이렇다 할 평판을 하지도 않았다.

   오빠는 고등학교에서도 여전히 성적이 좋았고 그 학년에서 청화대나 북경대를 기대할 수 있는 유망주자로 선생님들의 이목을 받았다. 체격도 훨씬 좋아지고 어깨도 벌어져서 늠름한 청년이 되어가는 그는 우리 집안의 자랑이자 머잖은 장래의 희망이었다. 학교가 멀어 기숙사에 든 오빠를 볼 수 있는 것은 5.1절이나 10.1 국경 휴가, 방학 기간이었다. 중학교 때 함께 밤 자습을 다니던 친구들은 방학에 자주 모였다. 어떤 날은 부모님의 허락을 받아 청년들처럼 집에서 친구들끼리 음식을 준비해 단출한 파티를 열기도 했다. 우리 부모님도 다른 집 어른들처럼 종일 집을 비워주곤 했지만 나는 그 모임의 방해 요소가 될 수 없다는 이유로 은근슬쩍 그중에 끼어 있기를 좋아했다. 그즈음의 일매 언니는 머리를 어깨까지 길렀고 다리가 더 길어지고 가슴이 더 커진 데다가 살은 딱 보기 좋을 정도로 많이 빠졌다. 여드름이 사라졌고 뽀얗고 탱글탱글한 피부가 드러났다. 나는 일매 언니의 또렷해진 이목구비를 보면서 언제 그녀의 눈과 코와 입술이 저렇게 조화롭고 예뻤던가 속으로 놀랐다. 이제 그녀는 얼굴도 보지 않고 데려간다는 그 셋째 딸로서 명실상부했다.
   깔깔거리는 웃음과 남학생들에게 던지는 짓궂은 농담은 그대로였다. 그녀의 솔직한 표현과 명랑한 어투는 늘 모임의 분위기를 즐겁게 만들었으며, 나는 오빠가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는 그녀를 기분 좋은 시선으로 바라본다는 것을 여러 번 발견했다. 일매 언니는 트로트나 유행 가요도 구성지게 부를 줄 알았다. 빈 맥주병을 들고 유연한 댄스 동작을 곁들이면서 그녀가 노래를 부르면 모임의 분위기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나는 일매 언니가 자유롭고 멋지다고 생각했지만 우리 부모님은 그렇게 여기지 않았다. 그들은 일매 언니의 성적이 계속하여 미끄러 떨어지는 것을 주목했고 그 집 언니들의 빈번한 연애 소문을 언짢아했으며 이젠 많이 달라진 일매 언니 부모님의 가치관의 변화를 긍정적인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게 지금 제정신이야? 딸들을 계속 이대로 두다간 무슨 일 벌어질지 모르는데, 이런 걱정보다는 아직도 돈 버는 일이 더 중요한 건가?” 아마 이것이 멀어진 옛 친구에게 드러내놓고 말하지 못한 우리 부모님의 속마음이었을 것이다.
   고3 두 번째 학기 초, 일매 언니는 학교를 그만두고 둘째 언니가 일하고 있는 노래방에 취직했다. 선생님과 친구들이 여러 번 권했지만 그녀는 교실 책상 앞에서 한 무더기 교과서와 씨름하기보다는 화려한 미러볼 불빛이 돌아가는 노래방 룸에서 열심히 노래를 부르고 술을 마시는 쪽을 선택했다. 일매 언니의 선택은 사실 우리와 크게 상관있는 일이 아니었지만 대입 시험을 두 달 남겨둔 시점에서 무단결석한 오빠가 밤차를 타고 일매 언니의 노래방까지 찾아간 사건이 벌어지자 그것이 꼭 그렇지도 않다는 것이 드러나게 되었다. 오빠는 그곳에서 하룻밤 머문 뒤 다시 학교로 돌아왔지만 기분이 많이 처져서 선생님과 부모님의 기대에 한참 못 미치는 대학을 가고 말았다.
   일매 언니의 이름은 그 뒤 한참 동안 우리 집에서 꺼리는 대상이 되었는데, 아들에게 유난히 기대가 컸던 부모님의 심경을 생각하면 그럴 만도 했다. 다행히 오빠가 대학교를 다니는 동안 확연히 달라진 삶의 환경 때문인지 두 사람은 많이 멀어진 것 같았고 거의 잊고 지내는 듯 싶기도 했다. 오빠는 열심히 공부를 했고 배드민턴 동호회에 들었으며 간간이 친구들과 미팅을 나가 다른 학교 여대생들과 사교무를 췄다. 일매 언니는 노래방을 그만두고 호텔에 취직했는데 더 이상 손님들과 춤을 추거나 술을 마시지 않고도 꽤 많은 돈을 벌 수 있다고 했다. 좋은 일이었다. 이제 우리 모두에게 평안하고 형통한 일들만 벌어질 것처럼 생각되었다.

   자명이와 수연이가 중학교 1학년, 첫 학부모 회의에서 만나 담임선생님께 학부모 위원회의 회계와 출납을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은 날, 나와 일매 언니는 함께 걸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어차피 우리 집 아파트와 일매 언니네 낡은 단지는 모두 학교와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집에만 오면 방에 박혀 핸드폰 들고 있는 애들 얘기를 하다가 그전과 많이 달라진 사람들의 생활 방식과 고향 동네서 살다 떠난 이들의 근황에 관해 이런저런 수다를 떨었다. 일매 언니가 내게 한국에서 사는 게 어땠냐고 물었다. 불고깃집, 국밥집의 서빙으로도 일하고 학원 강사로도 출근한 적 있는 나는 우리와 기본 뿌리는 같지만 꽤 달라진 한국의 언어 양태와 삶의 방식과 사회체제와 그에 적응해야 하는 보편적인 어려움과 난제와 한계에 대해 보고 깨달은 것을 두서없이 나눴다. 자연이까지 대학에 들어가면 일매 언니는 한국 생활도 고려해 보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려, 언니. 언니는 일본서도 십여 년을 살았으니 한국 생활 역시 잘 적응할 수 있을 거야. 이제는 사람들이 사는 게 전 같지 않으니, 그냥 그때그때 형편에 따라 어디든 떠나갈 수도 있는 거잖아.”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람은 언제든 어디로 갈 수 있다’는 요지는 내 마음을 약간 쓰리게 했다. 왜 인간은 영원히 그곳에 머물지 못하고 어디로 떠나야만 하는 걸까.
   “근데 언니, 이런 얘기 이제 나눠도 되나? 일본에선 왜 돌아온 거야?”
   그 말에 일매 언니는 그러게나 말이다, 하는 표정으로 스윽 웃었다.
   “많이 외로웠어. 자명이 아빠가 존심이 강해서 조선족으로 사는 걸 되게 민감하게 생각했는데, 그러다 보니 일본인도 아니고 중국인도 아니고 조선족도 아닌 삶을 살더라고. 기대한 만큼 벌이도 안 됐고, 그렇다 할 희망도 보이지 않던 데다가 주변 관계마저 편안하고 자유롭지 못했으니 그 사람 멘붕이 올 만도 했겠지. 한마디로 그곳에서 정착하는 삶에 실패한 거지 뭐.”
   그때는 본인도 여유가 없어 깨닫지 못했는데 돌이켜보니 전남편은 이미 마음에 병이 났던 것 같다고 일매 언니는 말했다. 부모님이 시급 간부였고 애지중지 키워온 막내아들이라 실력보다는 허영이 심했는데 일본 사회에서 겪는 차별 대우와 혼자 가정을 부양해야 하는 데서 오는 부담감이 그를 많이 힘들게 한 것일 수 있다는 것이 일매 언니의 뒤늦은 진단이었다.
   “나중에는 점점 이상하게 변하더라고. 집에 돌아오면 애들을 보지도 않고 혼자 침대에 누워 티브이를 멍하니 보다 잠들지 않나, 주말이면 식구들 다 데리고 가던 소풍도 귀찮아하질 않나, 이웃집 사는 화교 부부 들을까 봐 거실에서도 조선말을 못하게 하질 않나, 심지어 회사에서 아무런 통고도 받지 못했는데 조만간 중국에 돌아가 지사를 맡을 거라는 망상을 혼자 하고 있더라고.”
   같은 회사 다니는 시누를 통해 여러 번 확인했지만 전남편의 확신은 근거 없는 것으로 판명이 됐다. 그의 망상증은 더욱 심해져서 일본식으로 이름을 바꾼 아이들조차 매일 어떤 이에게 감시당하고 있다는 의심에 시달리기까지 됐다. 급기야 아내와 아이들에 대한 물리적인 괴롭힘이 시작됐고 더 이상 중재할 수도 감당할 수도 없게 된 시누의 묵인하에 일매 언니는 이혼을 제안했다. 네 사람이 누워 뒹굴기에 좁은 다다미방과 천장이 경사진 작은 화장실과 여러 회사원의 가정이 공용하는 기다란 복도에서 분주히 돌아치며 일상의 외로움과 허전함을 겨우 삭히고 사는 일매 언니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 일매 언니는 뭘 하려고 일본에 갔던 것일까.
   일매 언니한테서 그런 얘기를 듣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부모님이 잠깐 중국에 돌아왔다. 오빠는 이미 이혼했고 딸아이는 아내가 데려갔는데 그 뒤 술을 자주 마시면서 건강 관리에 소홀하더니 결국 심혈관 수술을 받게 된 것이었다. 오빠의 결혼 생활은 그다지 조화롭지 않았으며 마찰기와 권태기를 지나면 아이를 봐서라도 좋아질 줄 소망했던 부부 사이는 종시 나아지지를 못했다. 좋은 날도 있었고 행복해 보이는 시절도 없지 않아 있었지만 무심한 남편에게서 다정함과 배려를 원하는 아내의 요구는 점점 무리하게 표현되었고, 그런 아내를 감당하지 못해 회피하려고만 한 남편으로 인해 두 사람 사이의 갈등과 불신의 골은 점점 깊어갔다. 좀 더 인내심을 가지고 현명하게 처사했더라면 잉꼬부부까지는 아니라도 무던히 괜찮은 사이의 부부가 될 수도 있음직했지만, 두 사람은 그쯤에서 서로 손을 놓기로 했다. 이혼증을 받으러 정부 청사에 들른 날, 둘은 수년 만에 같이 시장을 돌고 공원길을 산책하고 맛집을 찾아 냉면과 탕수육을 먹었다. 오빠는 그 뒤 한참 아팠고 나은 다음 한동안은 잠시 축구 도박에 빠지기도 했으며 정신을 차린 후 부모님의 건의에 따라 이혼녀 두셋을 만나보기도 했다. 그는 이제 승진에 관심이 없었고 새롭게 가정을 이루는 일에도 적극적이지 않았다. 그가 우리 집안의 자랑이자 희망이던 때가 언제 있었던가 싶었다.
   “근데 오빠랑 맞선 본 여자들이 어딘지 모르게 ‘그 누구’ 닮았던데?” 언젠가 일상 수다를 주고받다가 내가 꺼낸 말이었는데 오빠 스스로는 여태 감지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그런가? 난 모르겠는데. 그렇게 말하니까 그런 거 같기도 하고.”
   인간이란 도대체가 구원받을 길 없이 집요하고 속절없다고 오빠는 나지막이 개탄했다. 그것은 오빠가 절반의 인생이란 대가를 들임으로 갑자기 획득한 허망한 깨달음이었다.

   일매 언니가 우리 집에 들른 마지막 오후가 생각난다. 대학을 졸업한 오빠는 천진의 삼성 회사에 취직이 됐고 착실한 성품과 뛰어난 이해력으로 지사장의 주목을 받고 있던 즈음이었다. 이제 마땅한 배필을 찾아 가정만 이룬다면 과히 바랄 것 없는 안정적인 삶이라고 우리 부모님은 생각하고 있었다. 연애를 하고 결혼을 준비하기에 마침 합당한 연령이기도 했다. 오빠는 부모님의 생각이 틀리지 않다고 여겼지만 회사 내에서 상대를 고르는 것을 원치 않았다. 우연히 오빠 얘기를 들은 큰아버지네 이웃집 아줌마가 잘 아는 참한 처자라고 소개를 해왔는데, 마침 아가씨가 천진 호텔에 출근하고 있던 차라 두 사람은 선을 보았다. 훤칠한 키와 날씬한 몸매를 가진 성글성글한 아가씨였다. 둘은 그 후로 자주 주말에 만나 밥을 먹고 영화를 보고 쇼핑을 했다. 여자 쪽의 부모님이 천진에서 작은 국밥집을 경영하고 있었고 그분들은 오빠를 준사윗감으로 인정한 눈치였다. 그렇게 사귄 지 반년이 넘어가고, 드디어 설을 맞아 인사차 두 사람이 같이 고향에 있는 부모님 집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오빠가 여자친구를 데리고 왔다는 소식은 금세 동네 안에 퍼졌다. 부모님의 친구들은 공식적이거나 비공식적으로 우리 집안의 준며느릿감을 보러 왔다. 이참에 약혼식 삼아 음식을 준비하고 친한 이웃들을 초대해 인사드리자는 제안까지 나왔다. 오빠의 여자친구가 제안을 더 반기는 눈치였다. 그녀는 우리 식구들 앞에서 오빠의 팔짱을 스스럼없이 끼기를 좋아했다. 그녀의 환한 얼굴로 인해 우리 집안이 더욱 밝고 명쾌해진 느낌이었다. 오빠의 휴가가 길지 않았으므로 부모님은 음식 초대를 초사흗날로 생각하고 서두르고 있었다. 소식을 들은 오빠의 친구들이 선수를 쳐서 우리 집으로 들이닥친 것은 그 전날 점심이었다. 곧 그들을 위해 섭섭지 않게 풍성한 상이 차려졌고 간만에 만난 친구들은 오빠를 축하함과 더불어 그간의 회포를 풀었다. 부모님은 예전처럼 조용히 자리를 비켜주었고 나는 그들을 시중들기 위해 남아 있었다. 방 안은 덥고 떠들썩했다. 오빠의 친구들은 서로 잔에 술을 붓거니 작커니 하느라 창문 바깥으로 그림자가 언뜰거리는 것을 보지 못했다. 정주간 문을 열고 바람막이 커튼을 젖히며 현관으로 훌쩍 들어서는 이가 일매 언니인 것을 제일 먼저 알아본 사람은 부엌에서 그릇을 닦고 있던 나였다. 몇 년 새에 일매 언니는 더욱 예뻐졌다. 이제 그녀의 아름다움은 단지 유행에 맞게 입은 옷이나 길게 늘어뜨린 찰랑찰랑한 파마머리에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었다. “오랜만이다, 잘 있었니?” 하고 내게 싱긋 웃어 보일 때 그 부드러운 미간과 감수성 어린 눈매와 자제하는 듯한 입술의 조용한 움직임 같은, 더 깊은 내면에서 그녀만의 매혹적인 아름다움이 풍겨 나오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나는 왠지 위험과 불안감을 느꼈다.
   나는 일매 언니가 술기운에 기분이 많이 들떠 있는 친구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문지방을 넘는 것을 보았다. 처음 얼마 동안은 원래의 분위기가 그런대로 유지되는 듯하기도 했다. 하지만 오빠의 말소리가 점점 작아지는 것과 일매 언니의 농담이 더 자주 들리는 것을 느끼면서 슬그머니 걱정이 되었다. 드디어 술이 부족하다는 친구들의 부탁이 왔고 나는 잠시 그 자리를 떠나 편의점에 다녀왔다. 친구들 서너 명은 먼저 돌아갔고 남은 친구들이 좀 더 진지한 분위기 속에서 얘기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작정하고 온 것이 아닐 수도 있었겠지만 일매 언니는 결국 그날의 술자리를 망쳐버리고 말았다. 그녀는 본능적인 직감으로 자신을 내내 주목하는 오빠 여자친구의 예리한 시선 속에서 오빠에게 이렇게 물었다고 했다.
   “나 여태 너 잊은 적 없는데. 내가 흔들면 너 흔들릴래?”
   그 말에 오빠는 아무 대답을 하지 못했는데 약간 숙인 얼굴에서 그의 눈동자가 못나게 흔들린 모양이었다.
   우리 부모님은 일매 언니를 오래 미워했다. 일매 언니가 오빠와 여자친구 사이에 끼어들었을 뿐 아니라 훗날 그들이 공식적으로 헤어진 뒤 온 가족의 비난을 무릅쓴 오빠가 그녀를 향해 전속으로 달려갔을 때 오히려 언제 그랬냐 싶게 도망을 다녔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정말 오빠를 ‘흔들기’ 위해 나타난 존재인 것 같았다. 누구를 탓할 수 있을까, 흔든다고 흔들리는 아들을 보고 부모님은 꿀 먹은 벙어리 노릇을 할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은 결국 각자 결혼하고 가정을 이뤘다. 오빠는 남방 도시로, 일매 언니는 일본으로 떠나갔다. 그들의 결혼은 좀 성급했고 결과도 좋지 않게 끝났다. 이미 지나간 일이지만 말이다.

   소파가 죽기 열흘 전, 중학생 졸업 시험이 금방 끝났다. 아이들 졸업 파티에 쓸 큰 케이크와 선생님들의 선물도 준비해야 하고 장부도 맞춰봐야 해서 일매 언니와 날짜를 잡았는데 당일 오전에 갑자기 일이 생겼다고 하루 더 미루자는 연락이 왔다.
   “미안, 내가 지금 정신이 없어서…….”
   휴대폰 속에서 일매 언니의 숨소리가 약간 거칠게 들려왔다. 주위에서 짜증스럽게 빵빵거리는 경적이 소란스러웠다. 일매 언니는 병원으로 가는 길이라고, 진단을 받고 치료에 들어가면 반나절쯤 시간은 낼 수 있을 거라 말했지만 이틀 후 내가 다시 연락해서 물었을 때 하루만 더 미루자고 얘기했다.
   “언니 사정이 그러면 다른 엄마한테 부탁해 놔도 돼요, 무리하지 말고.” 누가 아픈 건지 얼마나 아픈 건지 묻기가 그래서 내가 말했다. 그 말에 일매 언니는 하-,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아니 괜찮아. 오늘 장례식 끝났으니까.”

   이튿날 일매 언니는 나보다 먼저 쇼핑몰에 도착했고 우리는 코로나 기간 주인이 몇 번 바뀐 새 가게에서 선생님들의 선물을 골랐다. 1층 케이크 전문점에서는 반 학생들 모두의 이름을 새겨넣을 만한 크기의 케이크를 주문했다. 크림 색깔이 환상적인 과일 케이크였다. 그간 점점 목을 죄어온 졸업 시험의 중압감을 털어버리고 히히호호 깔깔거리며 케이크 조각들을 나눌 아이들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 우리는 쌀국수 한 그릇씩 시켜 먹고 그 자리에서 장부를 맞췄다. 요 며칠 힘들었겠다고, 언니 정말 대단하다고, 그냥 넘어가기엔 그래서 내가 한마디 했다. 일매 언니는 따듯한 유리 물컵을 두 손으로 감싸고 어, 괜찮아, 무심하게 대답했다. 뇌출혈로 119에 실려간 사람은 자명이 아빠, 전남편이었는데 일본에 있는 시누를 부를 새도 없고 자기 몸 겨우 가누는 시어머님이 맡을 수도 없어서 일매 언니가 간 것이었다. 그날 저녁으로 수술실에 들어갔고 이튿날 중환자실에서 잠깐 의식 회복할 겨를도 없이 그대로 돌아갔다고 했다. 병원에 머물 이유도 장례식장에서 기다릴 친척도 없었다. 일매 언니의 전남편의 마지막 길은 갑작스럽고도 신속하게 마무리가 됐다. 나는 집으로 돌아오면서 속으로 어쩌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돌봐줄 사람도 없는데 오래 아프다 돌아가기보다는 현실적으로 그게 낫지 않는가. 생각은 그렇게 했지만 마음은 쓸쓸했다.
   언니 혹시 내가 도울 게 뭐 있을까 하는 말에 일매 언니는 전남편이 키우던 소파와 달래의 입양 소문을 부탁했다. 자명이가 아빠의 골회함을 안고 교외로 나가 뿌리고 왔다고 했다. 일매 언니는 산기슭 도로변에 세운 택시 안에서 훤칠하고 곧게 자란 아들이 여동생을 데리고 숲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마지막 한 구간은 오빠가 어디까지 다녀왔는지 자연이도 몰랐다. 까마귀 소리가 무섭다며 그 아이는 혼자 도망쳐 나와 일매 언니의 품에 안겼다. 일매 언니는 그 숲속의 아늑하고도 상큼한 공기가 참 좋았다고 말했다.

   “나도 너 올린 사진 봤지.”
   애들이 졸업하고 나면 나는 일매 언니를 자주 볼 수 있을까. 3년 동안 한 학급 부모로서 간간이 만나던 인연도 이제 희미해지겠지, 하는 생각이 길 건너 저편으로 사라지는 일매 언니를 잠깐 좇았다. 저녁, 간만에 오빠가 먼저 연락이 왔는데 두서없이 주밋거리다가 내가 위챗에 올린 사진 얘기를 꺼내는 것이었다.
   “그 털이 긴 커다란 개. 그 녀석은 어떻게 됐니?”
   오빠는 달래보다 소파가 마음에 걸렸다고, 어제 꿈에 소파가 숲속 파란 잔디밭에서 뒹구는 모습을 봤다고 했다.
   “난 털 가진 짐승은 싫어. 징글징글 하단 말이야. 근데 왜 그 녀석은 안 그럴 거 같은 거야. 노망인가? 그렇겠지? ”
   오빠는 왜 끝까지 이렇게 못났을까. 그 순간 내 마음 한 부분이 펑 뚫리면서 허공중에 조각조각 내려앉는 것 같았다.
   “그려, 노망이지. 소파는 좋은 데 갔어. 제 주인 따라간 거지. 이제 더 이상 외롭지 않을 거야.”
   아하, 그럼 됐어. 그래, 잘됐네, 어쩌면……. 오빠는 어색하게 웃었다. 전화를 던지고 싶은 마음이 불쑥 들 정도로. 그러니까 오빠나 정신 차리고 살아! 나는 속에서 터져 나오는 소리를 겨우 참았다.

   방학이 끝나고 새 학기가 시작되면 나는 고등학생 학부모가 되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3년은 수연 일생에서 가장 처절한 공부와의 싸움이 시작될 것이다. 나는 수연이 대입 시험을 치르고 학교 지망 선택을 내고 부푼 가슴으로 대학에 들어갔다가 드디어 불안과 초조와 비교와 경쟁의 세파 속에 합류되는 모습을 지켜보겠지. 일본이나 한국이나 다른 나라에 이민 간 친구들은 그들의 비교적 괜찮거나 그렇지 않거나 하는 근황을 가끔 전해 왔다. 여기서 사는 사람들의 삶도 마찬가지였다.
   어느 날 친구가 보내온 달래의 사진에 점박이 작은 고양이 네 마리가 조롱조롱 녀석 곁에 붙어 있었다. 나는 여러 번 망설이다가 그 사진을 일매 언니에게 보내줬다. 일매 언니는 참 고맙다고, 자연이가 사진을 보고 간만에 좋아했다고 문자로 답했다. 엄마를 닮아 똑 부러지고 멋있는 데다가 성적도 뛰어난 애라고 했다. 자명이가 예비군인 훈련생으로 들어갔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렇게 멋진 사내가 되어 있는 것은 사진을 보고야 확인할 수 있었다. 반팔 군복을 입은 자명이는 친구들과 어깨걸이를 하고 있었는데 어딘지 멀리 이끌린 듯한 시선은 왠지 낯설지 않았다.

필자 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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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중국 지린 장춘에서 출생해, 현재 장춘에 거주한다. 2010년 로신문학원을 수료하고 단편 「개불」로 《연변문학》을 통해 등단했다. 중단편소설집 『슈뢰딩거의 상자』(2013), 『세상에 없는 나의 집』(2015), 장편 『천진시절』(2020)이 있다. 《연변문학》 소설 대상, 《도라지》 소설 대상, 《민족문학》상, 9회 백신애문학상, 34회 신동엽문학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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