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머의
새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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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호

시월의 안개 외 1편

최지인

시월의 안개

신의 자비와 축복이 함께하길

나는 그대의 종을 거부하오
꺼지지 않는 불길에
한 줌 재가 될지언정

거리에서
경봉에 두들겨 맞고
최루탄 가스에 휩싸이는
불타는 도시

 *

떠난 이가 그리운 날에는
우두커니
돌을 씹었다

세상을 내다본다는 게
얼마나 허무맹랑한 생각인 건지

우리는 사랑을 말할 때
취하지 않으려고
공갈 맥주를 마시네

자네는 일을 줄이고
글을 써야지

그것은
드라마 같은 일이고

폭염과
쓰러진 이주 노동자

목숨보다
귀한

스타디움
환호하는 사람들

 *

모든 인류를 위하여
여럿이 모여
여럿으로

잘 봐, 이 모든 것은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걸 뜻하지

천년 전 어느 날
이렇게 잠들었던 거 같아

너는 베란다에 쪼그려 앉아
너희 부모가
나무 의자에 포개어
사랑하는 장면을 숨죽이고
지켜보았지
그들은 꿈에도 몰랐지
알았다면 네가 변했다는 걸
진작 알았겠지

*

아버지
나의 아버지……

당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당신의 영혼이 빠져나가고 있다

의정부 공장은 불탔다
젊은 당신과 어린 나는
그곳 공터에서
두발자전거를 타며 시간을 보내곤 했는데

잿더미가 되기 전이다

나의 자랑 나의 기쁨
너는 내 곁에 없지만

죽음에서 죽음으로 건너갈 뿐
멈출 순 없어

목에 걸린 죽음을
뱉어내려는 안간힘

아버지
나의 아버지……

 *

깊어진다고 믿는 사람만이
깊어질 수 있다는 믿음

한 번도 사랑한 적 없는 것들을
사랑하기로
허무해지지 않게

우리가 기꺼이 잊어버린 것들
네 목소리를 뒤로하고

신발들
나란히 놓여 있다



성장의 끝

 세상의 죄를 짊어진 지구의 고양(羔羊)이여
 하늘과 땅에는 인간의 것으로 상상하는 것보다 무궁한 것이 있나니

이산화탄소 농도
해수면 상승
해양 산성화
플라스틱과 오염 물질
멸종하거나 사라질 위기에 처한 생물들
녹아내리는 빙하
점점 넓어지는 사막지대
사나워지는 폭풍
그 밖의 유산
분단되고 점령당한 지역
뒤바뀐 세계

앞날을 예고하는
자연과 감로탱화(甘露幀畵)의 아귀(餓鬼)
목구멍이 바늘귀만큼 좁지만
창자는 태산 같아서
발가벗은 몸
텅 비어 있고


필자 약력
최지인 작가 프로필 사진

2013년 《세계의 문학》 신인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제10회 조영관 문학창작기금을 수혜하고 제40회 신동엽문학상을 수상했다. 시집 『나는 벽에 붙어 잤다』, 『일하고 일하고 사랑을 하고』, 동인 시집 『한 줄도 너를 잊지 못했다』를 펴냈다. 창작동인 ‘뿔’과 창작집단 ‘unlook’에서 활동 중이다.
* 사진제공_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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