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머의
새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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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호

헛묘 외 1편

김시종

헛묘1)

불어오는 바람조차 몸을 숙인 채 숨죽인다.
헤치고 들어간 산골짜기의
들길 안쪽에서는.

여기가 불타버린 마을의 터였다니
도저히 상상조차도 할 수 없다.
그저 잡초만 무성하고 정적이 후끈한 열기에 녹아내린
냉이가 왜일까
작은 하얀 꽃이 마구 흩어져 있을 뿐이다.

그래도 바람은 머리 위를 빗겨 스치고,
목이 터질 것 같은 아비규환도
그렇게 쉬어서 날아간 걸까.

구석자락 덤불 속에 숨듯이
두 헛묘는 말없이 조용히 누워 있다.
견딜 수 없는 분노를 어떻게 참고
인연 있는 누군가가 둘을 나란히 모셨는가.

한라2)도 못 보고
바다도 바라볼 수 없는
아니 4.33)의 땅이면 어디에나 있을 터
어딘지도 모르는 외진 땅이었다.
산 길을 헤치고 당신만 오로지
다다를 수밖에 없는 조용한 곳이다.

굉연히 쏟아지는 빗줄기 무덤을 떠올렸다.
겨울이 되면 필시 눈도 쌓이겠지.
어둠을 틈타 행방을 감춘 채
더는 만나 뵐 수 없었던
아버지, 어머니의 무덤도
이 산길을 굽이쳐 내려갔던
산기슭 마을의 외진 깊숙한 곳이다.


웃다

기억에는 기억을 멀어지게 만드는
기억이 있다.
긴 세월 동안 뒤섞이고 쌓여서
그 순간순간이 또 다른 장면으로
변하기도 해서,
잠들 수 없는 밤의 모처럼의 잠을
방해하고 만다.
돌이켜 보면 또다시 똑같은
쫓기며 숨은 부들부들 떠는 꿈이다.

나한테는 기도할 수밖에 없는 마음의 짐이
씻을 수 없는 죄가 되어
웅크리고 있다.
혼자서 아버지를 묻은 어머니의
깊은 슬픔의 어둠 속에
합장을 한다.
줄지어 선 나를 숨겼기 때문에 당한
숙부의 억울한 죽음의 신음을 견디고
묵념을 한다.
동시에 나를 이끌어 입당까지 시킨 그가
찌부러진 얼굴로 숨이 끊어진 무참한 모습에
눈을 감고, 입술을 깨문다.

공양은 아니다.
기억에 시달리는 나를 위한
합장이다.
그래도 잠들지 못하는 밤은 있고
거듭 뇌리에 스쳐오는 것은
무언가의 그늘에서 떨고 있는
소년의 얼굴을 한 나 자신이다.
세월이 지나가면서 아득해지는 게 아니라
기억을 멀리하는 기억에 현기증이 나
기억 속에 4.3이 하나 하나
분해된 것이다.

여자가 웃고 있다.
요기에 홀린 귀신 같은 표정으로
눈가를 치켜 뜨고 웃고 있다.

참혹한 살육의 4.3 속
장비도 장엄한 토벌대 군경에게
양손을 크게 벌리고
껄껄 키득키득 웃기 시작한다.
부풀은 젖가슴도 하얗게 보이는
흘러내린 치마에 맨발의 여자.
마을 전체가 불타버려 젖먹이까지도 총격을 당한
교래리4)의 학살에서 혼자 남겨진
세 아이의 어머니가 그녀다.

백부의 제삿날 성내5)로 나왔기에
구제된 목숨.
살아남아 정신이 나간
메마른 목숨.
어떠한 기억도 그녀 앞에서는
웃음의 잔향으로 흩어진다.
미쳐 웃을 수밖에 없는 비탄함이 웃고 있다.
혼자 살아남은 나를 웃는 거다.
아무리 깨어 있고
귀를 파도
꿈은 전혀 나이를 먹지 않는다.

각주

1) 학살당한 장소의 동맹이 하나 또는 뭔가의 유품을 시체 대신에 묻어둔 묘.

2) 한라: 제주도 한라산, 1995미터.

3) 4.3 : 1948년 4월 3일 발발한 제주도의 4.3사건

4) 옛날 조천시의 중산간 지대에 있었던 100호 정도의 마을부락

5) 옛날 도청 소재지였던 제주시의 중심 시가지

번역정보

번역 : 김환기 (일 → 한)

필자 약력
김시종 작가 프로필 사진

김시종, 1949년 일본으로 건너가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재일의 틈새에서』로 1986년 제40회 마이니치 출판문화상, 『원야의 시』로 1992년 오구마히데오상 특별상과 2011년 『잃어버린 계절』로 제41회 다카미준상을 수상하였으며 2022년 제 4회 아시아문학상을 수상하였다.
디아스포라의 삶을 사는 시인으로 알려진 그는 현재까지도 활발한 작품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다.
* 사진출처_ⓒ연합뉴스/김시종 시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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