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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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호

황새 보금자리, 아우칸

박미하일

나는 어디에서 왔을까? 나는 마치 어디 먼 나라에서 온 것처럼 나의 어린 시절에서 왔다네.
―생텍쥐페리

   나의 유년 시절은 전쟁 이후 힘겨운 시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내 인생에서 분명 가장 빛나는 시간이었다. 어린 시절 풍경들은 마치 어제 있었던 일처럼 지금도 선명하게 떠오른다. 우리 대가족은 우즈베키스탄에 있는 아우칸이라는 마을에 살았다. 타슈켄트에서 15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마을이었다. 아버지는 MTS(모터 트랙터 스테이션)에서 기술자로 일하면서 농기계, 트럭, 트랙터, 콤바인 등을 수리했다. 마을에 전문가가 부족한 탓으로 아버지는 제분소 일까지 도맡아 했다. 가을 무더위 속에서 추수를 하고 나면, 제분소는 밀과 벼를 탈곡하느라 밤낮으로 작업이 한창이어서 아버지는 이른 아침 집을 나가 밤늦게 귀가하고는 했다. 어머니는 가정주부였고, 어린 우리에게는 각자 맡겨진 일이 있었다. 형들은 우물에서 양동이에 물을 길어오고 장작을 팼으며, 나는 매일 닭장에서 달걀을 거둬왔다.
   내 나이 여섯 살 때였다.
   옆집에 사는 내 친구 아르카시는 팔 한쪽이 없었는데, 왼쪽 어깨부터 팔꿈치까지만 하릴없이 남아 있었다. 녀석의 아버지인 클리마 페트로비치 씨한테는 말 세 마리가 끄는 달구지가 있었는데, 어느 날 건초를 나르다 달구지가 하천에서 뒤집히면서 아르카시가 넘어져 팔을 다친 것이다. 팔은 오랫동안 치료해도 낫지 않았고, 결국 병원에서 절단해야만 했다.

   내 기억에 이른 봄이면 황새들이 날아들었다. 하늘에서 날고 있는 황새를 제일 먼저 알아본 아르카시는 성한 오른팔을 흔들면서 “황새다! 황새가 왔다!” 하며 좋아서 외치고는 했다. 나와 아르카시는 황새를 보러 달려갔다. 황새들은 마을 끄트머리나 급수탑 꼭대기, 기중기나 백양나무 고목 상단부에 둥지를 짓고 짝을 지어 살았다. 날개는 절반쯤 검은색에, 가슴과 등은 흰색, 다리와 부리는 빨간색이었다.
   난 황새들을 그려보고 싶었다. 이 막중한 작업을 위해 나는 상자 쪼가리를 찾아냈고, 엄마 손가방에서 립스틱을 슬쩍했다. 내가 그린 황새는 목과 다리가 너무 짧아서 볼품없었고, 그에 비해 마른 가지가 달린 나무는 큼지막하게 그린 것 같다. 학교에 다니는 형들한테 색연필을 달라고 해도 됐을 텐데 난 왜 굳이 엄마 립스틱을 가져간 걸까? 말할 것도 없이 그 대가로 난 엄마한테 흠씬 두들겨 맞았다. 립스틱은 비싼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엄마는 아버지와 함께 아주 드물게 읍내로 장을 보러 가거나 극장에 영화를 보러 갈 때만 입술에 그걸 바르고는 했다. 당시 나는 화가 단단히 난 엄마가 내 그림을 내다 버릴 줄 알았는데, 엄마는 그러지 않고 벽에 걸어주었다. 집에 돌아온 아버지가 내 작품을 봤다.
   “새하고 나무가 똑같이 빨간색이야? 어떻게 그럴 수 있냐?”
   아버지는 이렇게 말하더니, 그길로 읍내에 다녀와 색연필과 스케치북을 사다 줬다.
   립스틱으로 그린 내 그림을 아르카시가 무척 맘에 들어하길래 녀석에게 줬다. 그랬더니 녀석이 조각칼로 뽕나무 가지를 잘라 만든 호루라기를 답례로 줬다. 무릎으로 가지를 눌러 가면서 한 손으로도 호루라기를 깎아 만들 수 있다니!
   아르카시한테는 베라라고 하는 쌍둥이 여동생이 있었다. 베라는 우리 집에 자주 놀러 와서 내 여동생 레나와 같이 인형놀이를 하고는 했다.
   아르카시 말고도 로즈바이, 스쵸파, 아키프, 아노피, 이고르 등등 난 친구가 많았다. 아우칸에는 여러 민족이 살고 있었고 그래서 친구들도 출신이 다양했다. 로즈바이는 우즈베키스탄 출신이고, 아르카시와 스쵸파는 러시아인, 아키프는 아제르바이잔 출신, 안드레이는 독일인, 아노피는 크림 지역 타타르인, 이고르는 나처럼 고려인이다.
   우리 마을에는 고려인 가족이 많았다. 당시에는 여기에 사는 고려인들이 다 어디에서 온 건지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나중에 성인이 되어서야, 소련에 있는 고려인들이 다들 전에는 러시아 연해주 지역에 살고 있다가, 1937년에 정부에 의해 우즈베키스탄을 비롯한 중앙아시아 여러 지역으로 이주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리 가족사를 보면, 내게 먼 조상뻘 되는 분이 19세기 중엽에 조선 땅을 떠나 연해주에 자리 잡았다고 한다. 러시아 황제인 알렉산드르 2세가 지배하던 시절이었다.

   우리 마을 맞은편에 펼쳐진 들판에는 토끼풀이 한가득이었고, 그 옆으로는 백양나무 오솔길이 나 있었다. 한쪽은 녹색, 다른 쪽은 은색으로 칠한 듯한 나뭇잎들은 바람이 불면 바스락 소리를 내면서 햇빛에 반짝이고는 했다. 우린 다들 백양나무 길에서 놀았다. 달리기 시합을 하거나, 숨바꼭질을 하기도 했고, 둠박이나 접시 놀이도 했다. 우린 둠박 놀이를 제일 좋아했다. 그 놀이를 왜 둠박이라고 하는지는 모른다. 둠박은 원에 있는 돌을 맞춰서 원 밖으로 나가게 하는 놀이다. 각자 막대기 하나와 작고 둥근 조약돌 다섯 개씩을 갖고, 그 조약돌을 둥그렇게 그린 선 안에 무더기로 쌓아놓는다. 그러고는 5, 6미터 떨어진 곳에서 막대기를 원이 있는 쪽으로 던져 돌무더기에 가장 가깝게 던진 사람이 제일 먼저 치게 되어 있다. 돌을 가능한 한 많이 선 밖으로 쳐내는 사람이 이긴다. 다섯 개를 쳐냈으면 자기 것 다섯 개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고, 만일 세 개밖에 쳐내지 못했을 때는 일곱 개 조약돌 가진 사람한테 손가락 딱밤을 두 대 이마에 맞는다. 한마디로 말해 둠박은 수완과 판단력이 필요한 놀이였다. 우린 접시 놀이도 했는데, 진흙으로 얇고 둥근 빵을 만들어, 축축한 채로 손바닥에 놓고는 뒤집어서 땅에 힘껏 내리친다. 내리치기 전에 ‘포신 포스, 요린 포스’ 하고 외치는데, 이 승리의 구호는 로즈바이가 생각해 낸 거다. 내리치고 나면 빵 한가운데에 구멍이 생기는데, 그 구멍이 더 큰 사람이 이기는 거다. 이 놀이를 하고 나면 우린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온통 진흙 범벅을 하여 엉망진창이 되고는 했다.
   여자애들은 ‘제기’라고 하는 자기들만의 놀이를 하고는 했다. 제기는 낡은 양말 쪼가리에 콩을 넣어서 만든 거다. 이 제기를 발로 차서 가능한 한 오래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는 놀이였다.
   우리끼리는 러시아어로 말했다가 우즈베키스탄어로 말했다가 그랬는데, 이런 일은 우리한테는 일상적인 것이었다. 로즈바이만 하더라도 우리 집에 놀러 왔을 때는 우리 엄마랑 한국어로 유창하게 대화를 나누고는 했다. 나 역시 로즈바이의 할머니와 우즈베키스탄어로 얘기할 수 있었다. 그 친구 집에 놀러 가면 마당에서 할머니에게 이렇게 물어보고는 했다.
   “비비존, 맨 로즈바이가 켈딤. 우 우이다미(할머니, 저 왔어요. 로즈바이 집에 있어요)?” 그럼 할머니는 대부분 이렇게 대답한다.
   “조크. 카에르가 케티시니 빌메이만(녀석은 집에 없어. 어디 갔는지 모르겠구나).”
   우즈베키스탄어는 아제르바이잔어나 크림-타타르어와 비슷했기 때문에 아키프나 아노피 집에 가도 그 가족들이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독일 출신인 안드레이 집에 갔을 때 독일어를 들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안드레이는 자기 부모님과 늘 러시아어로만 말했다. 우리 마을 고려인들이 쓰는 한국어는 온전한 한국어라고는 할 수 없었다. 그 말에는 선조들이 19세기 중엽에 고향을 떠나 러시아 연해주에 살면서 썼던 오래된 사투리 흔적이 있었다.

   앙그렌 강가에 있는 마을 뒤편의 유다 숲에는 집시촌이 있었다. 집시들은 판잣집이나 방수 천막 등에서 기거하며 음식을 해 먹고는 했다. 그들은 대부분 떠돌이 생활을 했으며, 남자들은 임시직으로 먹고살았고, 여자들은 카드점을 치며 돈을 벌었다. 늙은 집시 사르바르는 당나귀가 끄는 이륜마차를 몰고 일주일에 한 번 우리 마을에 들렀다. 그는 큰 소리로 “샤라-바라! 샤라-바라!” 하고 외치면서 아우칸을 돌아다녔는데, 그 소리를 들은 아이들은 집에서 거리로 뛰쳐나와 마차를 에워싸고는 했다. 사르바르가 자기 요술 가방을 열면, 거기엔 잘 쌓아올린 반짝이는 구슬들, 만화경, 찻잔, 머그컵, 인형, 피리 등 없는 게 없었다! 물건들은 대부분 사르바르가 직접 만든 것이었다. 내가 제일 좋아한 것은 새나 동물 모양을 따서 진흙으로 만든 피리였다. 사르바르는 자기 물건들을 빈 병과 맞바꿨다. 구슬 하나는 병 한 개, 피리는 병 두 개, 만화경은 병 세 개 등등 뭐 이런 식이었다. 그는 빈 병들을 읍내로 가져가 수거하는 곳에 주고서 돈을 좀 받고는 했다.
   우리 집에서는 빈 병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나중에 사르바르 물건들과 맞바꿀 요량으로 그것들을 한 켠에 쌓아두었다.
   늙은 집시는 그을리고 길쭉한 얼굴에 주름이 쭈글쭈글했고, 시커먼 수염이 덥수룩했으며, 큼지막한 매부리코에 화가 몹시 난 듯한 눈매를 하고 있어 무섭게 보였기 때문에 우리 꼬맹이들은 처음에 그를 두려워했다. 하지만 차차 그에게 익숙해지자 사르바르가 천성적으로 착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그 노인이 동네 꼬맹이들 이름을 전부 다 알았다는 것이다. 그는 늘 회색 바지에 색 바랜 체크무늬 셔츠, 다 헤진 초록 민소매 차림에 구깃구깃한 중절모를 쓰고 있었다.
   마을 뒤편 강 쪽으로 난 샛길에서 마차에 앉아 집시 노래를 부르는 구부정한 노인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이듬해 내 삶의 전환기를 맞이했는데, 내가 학교에 다니게 된 것이다.
   학교는 내게 새로운 세상,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었다. 선생들은 읽고 쓰는 것을 가르쳐줬고, 무엇이 좋고 나쁜지 깨닫게 해줬다. 나는 세상에 우리 마을과 읍내 말고도 무수히 많은 마을과 도시, 많은 나라와 바다, 강 등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서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나는 학교에서 아르카시와 한 책상을 썼다.
   4학년이 되어서는 학교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기 시작했다. 나는 닥치는 대로 정신없이 읽어나갔는데, 처음에는 얇은 애들 책을 읽다가, 나중에는 내용을 다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두꺼운 책을 읽어 내려갔다. 다른 친구들도 도서관에 다니기 시작했다. 차츰 아르카시와 나는 여행과 모험 관련 책들을 좋아하게 되었고, 우리는 쥘 베른과 알렉산드르 벨랴예프 작품에 빠져 있었다. 그러다 아르카시는 점차 동물과 새, 곤충 등의 삶에 관한 문학작품에 흥미를 갖기 시작했다. 여행과 모험에 대한 나의 관심은 계속 이어졌다. 그러다 이후 나는 낭만주의 작가 알렉산드르 그린 작품에 빠지게 됐다.

   어느 날 읍내에서 우리 마을로 영사기가 들어왔다.
   밝은 금발 머리의 웃음 띤 운전사인 알렉세이가 영사기 기사를 겸했다. 아우칸에는 널찍한 공간이 없었기 때문에 아버지의 제분소에서 영화를 틀기로 했다. 아버지는 일꾼들에게 판자로 자그마한 벤치를 스무 개 만들도록 지시했다.
   아이들은 영사 기사가 준비하는 것을 신기해하며 지켜봤는데, 우선 그는 검은 인조가죽으로 덮인 상자들을 트럭에서 전부 제분소로 옮겼고, 큰 애들이 그를 도왔다. 그러고 나서 알렉세이는 상자에서 장비들을 꺼내 탁자에 나란히 설치했는데, 커다란 릴 두 개가 있는 프로젝터를 제일 위에 설치했다. 밑에 있는 릴은 비어 있고 위쪽에 있는 릴에 필름이 있었다. 다음으로 그는 벽에 하얀 스크린을 걸어놓고는 코드를 밖으로 가지고 나와 발전기 모터에 연결했다.
   저녁에 사람들이 와서 제분소를 가득 메우자, 알렉세이는 발전기를 돌려 장비 조명을 켰다.
   바로 그날 저녁 알렉세이가 틀어준 영화는 여객선을 배경으로 한 희곡 뮤지컬 「볼가, 볼가」였다.
   그때부터 영사기는 매주 우리 마을에 왔고, 마을 사람들은 마치 명절처럼 옷을 깨끗하게 차려입고서 영화를 보러 오고는 했다. 알렉세이는 「전함 포툠킨」, 「알렉산드르 넵스키」, 「시월의 레닌」, 「트랙터 기사들」, 「발레리 치칼로프」, 「마센카」,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는가」, 「나스레딘의 여행」, 「우리 도시의 사내」, 「마을 여선생」, 「쿠투조프」, 「옛날 옛적에 소녀가」, 「전후 저녁 여섯 시」 등 굉장히 다양하면서도 흥미진진한 작품을 가져오곤 했다.
   영화가 상영되는 동안 필름이 찢어진 적도 있었지만 누구 하나 투덜대지 않았고, 알렉세이가 프로젝터를 손보는 동안 다들 참을성 있게 기다리고는 했다.
   영사기와 제분소 영화 상영은 우리 어린 시절에 있어서 무척 특별한 일이었다. 알렉세이가 영화를 보여준 그 수많은 저녁 가운데 하나를 어떻게 묘사할 수 있을까? 마을 사람들은 일을 마치고서 말끔하게 차려입고 제분소를 가득 채우고는 했다. 제분소 안에서는 밀가루 냄새가 났다. 앉을 자리가 없는 사람들은 벽 쪽에 쌓여 있는 밀 포대 위에 그냥 자리 잡고 앉았다. 제분소 오른편으로는 높고 길쭉한 나무 마루가 있었는데, 거기에는 커다란 홈통과 이런저런 다양한 기구들이 있었다. 마루 밑으로는 큼직한 쇠바퀴가 달린 장치들이 있었는데, 그 바퀴에는 넓은 벨트가 장착돼 있었다. 제분소 작업이 한창일 때는 여기 있는 것들이 죄다 작동하는 거다. 바퀴가 돌아가고 벨트가 회전하고 바닥이 살짝 울리는가 하면, 사람들이 고함치듯 주고받는 얘기 소리가 허공에 걸려 있고는 했다. 꽉 찬 밀 포대를 힘센 장정들이 어깨에 가뿐히 둘러메고 홈통이 있는 데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서는 포대 속에 든 것을 거기에 쏟아부었다. 그러면 나무 깔때기처럼 생긴 곳에서 맛있는 냄새가 나는 밀가루가 나와 깊은 통으로 쏟아져 내렸다.
   그러는 사이 영사 기사는 영화 상영을 위한 막바지 준비를 마치고 있다. 사람들은 벤치에 앉아 기다리면서 알곡을 까먹고 있기도 하고, 아낙들은 집안일을 상의하느라 얘기를 주고받고 있기도 했다.
   위쪽에는 지붕 밑에 있는 서까래에 야생 비둘기들이 앉아 있었는데, 걔네들은 조용히 앉아 우리를 유심히 지켜보고는 했다.
   마침내 영사 기사인 알렉세이는 장비가 있는 데로 가서 프로젝터를 작동하기 전에 이렇게 외친다.
   “친애하는 관객 여러분! 오늘은 전쟁과 사랑에 대한 아주 생생한 영화를 보여드리겠습니다!”

   여름이 되면 나 같은 아이들은 헤엄칠 줄 몰랐기 때문에 얕은 강에서 자맥질이나 할 뿐이었다. 우리는 강 깊은 곳으로는 갈 엄두도 못 냈고, 건너편 기슭으로 못 가는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에 비해 우리 형들을 비롯해 좀 큰 애들은 물속으로 뛰어들어 잠수해서는 능숙한 손놀림으로 강의 빠른 물살을 헤치고 눈 깜짝할 새에 건너편 기슭에 닿고는 했다. 형들은 나한테 어떻게 헤엄치는지 가르쳐주지 않았다. 때가 되면 내가 알아서 익히게 될 거라고 여기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내가 물에 빠져 죽을 뻔한 적도 있었다. 하루는 아이들과 얕은 물에서 장난을 치다 제방 쪽으로 갔는데, 갑작스레 깊은 곳에 빠지게 돼서 비명을 질러댔다. 급물살에 휩쓸려 밑으로 가라앉으며 허우적대고 있는데 제방을 따라 뛰어오는 사람이 보이더니 그가 나한테 손을 내밀었고, 난 그 손을 덥석 잡았다. 나를 건져준 그 사람은 카림이었다. 서른 살이던 카림은 마른 몸매에 그을린 데다 순진해 보이는 눈빛과 애들처럼 천진난만한 표정의 젊은이였다. 그는 마른 체구임에도 불구하고 체력이 좋으면서 유연했고, 모래 위에서 물구나무서기, 재주넘기, 여러 가지 복잡한 동작 등 다양한 체조를 선보였다. 그럴 때마다 우린 입을 헤벌린 채 그를 바라보고는 했다. 그는 읍내에 살았지만 우리를 자주 찾아왔다. 내 기억에 그는 사람들을 도와주러 오고는 했다. 전에 농장에 불이 난 적이 있었다. 우리 꼬맹이들이 불이 난 곳으로 뛰어가 보니 구조 대원들 사이에 카림도 있었는데, 그는 외양간에서 소들을 몰아내고 있었다. 어떤 날은 우물에 빠진 아이를 구해 내기도 했다. 단연 돋보인 일은 불난 집의 문을 도끼로 부수고 그 집 할머니를 구한 것이었다. 바로 내 경우만 보더라도 물에 빠진 나를 그가 구해 줬는데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강에서 그 일이 있은 이후 카림은 나뿐 아니라 다른 애들한테도 헤엄치는 것을 가르쳐줬다. 그는 하루 만에, 아니 더 정확히 말해서 강에 우리하고 같이 있었던 한 시간 만에 다 가르쳤다. 그는 허리까지 차는 물에 들어가 우리 코흘리개들한테 차례로 팔을 휘젓는 법을 가르쳤는데, 강아지처럼 바둥거리는 게 아니라 팔을 제대로 저으면서 동시에 발도 움직이도록 가르쳤다.
   카림은 다른 날에는 다이빙도 가르쳐줬다. 그는 다이빙할 때 어떻게 하면 다치지 않을 수 있는지 우리가 알아듣기 쉽게 잘 설명해 줬고, 직접 시범을 보여주기도 했다.
   마른 구릿빛 몸매, 장난스러우면서 천진난만한 표정, 순진한 눈빛. 이게 바로 내가 기억하는 카림이다.

   조용한 여름밤이면 이따금 아버지는 마당에 있는 평상에 앉아 대나무 피리를 불고는 했다. 그 구슬픈 가락을 듣고 있노라면 아버지 선조의 고향이었을 한국이라고 하는 머나먼 나라의 곡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 기억에 그 피리는 아버지가 우리 집 앞에서 자라는 대나무를 깎아서 만든 것이었다. 대나무가 무성히 자라 숲을 이루고 있었는데, 집 앞 대나무를 어디서 가져다 심었는지는 나도 모른다. 마을에서 대나무가 있는 집은 우리 집밖에 없었다. 로즈바이 누이인 툴쿤이 대나무 뿌리를 얻으러 왔을 때, 아버지가 양파처럼 생긴 뿌리를 파내고는 어떻게 심어야 하는지 자세히 설명해 주던 것이 생각난다. 나중에 로즈바이 집에 놀러 갔을 때, 마당에서 태양을 향해 뻗어 있는 푸른 대나무 순을 볼 수 있었다.
   그런 대나무로 아버지는 피리를 만든 것이다.
   고려인들 가운데 집안에 결혼식이라든지 아이 돌잔치 등이 있는 사람은 으레 아버지에게 피리 연주를 부탁했고, 아버지는 단 한 번도 그걸 거절한 적이 없었다.
   아버지는 자동차나 트랙터, 콤바인 등의 엔진에 있어서 정통한 기술자였기 때문에 직장에서 높이 평가받는 분이었다. 집에 있는 책장에는 기술 관련 책들이 많았고, 탁자에는 개략적인 것들을 적어놓은 공책이 쌓여 있었는데, 거기에 적힌 아버지 필체는 무척 꼼꼼했다.
   아버지는 이 세상에 착한 사람들만 있다는 듯이 사람을 아주 잘 믿고는 했는데, 가끔은 이런 성격 때문에 비싼 대가를 치러야 할 때도 있었다. 한번은 우리 집에 잘 모르는 사람이 왔는데, 그는 이웃 마을에 사는 형네를 찾아가는 길이라면서, 거기에 추레한 차림으로 가는 게 창피한데 마땅히 입을 만한 옷이 없다며 푸념을 늘어놓았다. 그러자 아버지는 잠시 생각하는가 싶더니 옷장에서 재킷을 꺼내왔다. 모아놓은 돈으로 얼마 전 산 옷이었다. 아버지는 찾아온 사람에게 그 옷을 건네주면서 나중에 집으로 돌아갈 때 돌려달라고 했다. 그 사람은 재킷을 입고 떠났고, 이후로 그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사람들에 대한 자신의 무분별함을 아버지는 일을 하면서 충당했다. 아버지가 만졌다 하면 그게 무엇이든, 걸상이든 벤치든, 아니면 그냥 도마든 간에 거기에는 그의 솜씨와 노련함, 애정이 담겼다.
   하지만 내 생각에 아버지는 진정 화가였다. 아버지는 시간 날 때마다 수채화를 그렸다. 도화지가 아닌 합판에 그렸는데, 작은 톱으로 합판을 그리 크지 않은 정사각형이나 직사각형으로 자르고는, 가장자리와 표면을 사포로 처리한 다음 수지를 발랐다. 합판의 반질반질한 표면에서 물감이 번지지 않고 고르게 칠해졌다. 아버지가 어떤 그림들을 그렸던가? 산과 소나무, 강 등이 담긴 풍경이었다. 옅은 안개 속에 푸른 산들을 배경으로 하고, 좀 더 가까이에는 소나무와 오솔길들이 보이고, 앞에는 강이 흐르고, 그 강 너머에는 쓰러진 나무가 방치된 채로 있던 그림이 생각난다. 분명 머나먼 한국이었으리라. 아버지가 한국에 가본 적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는 왜 그렇게 한국을 그리워했을까? 조상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생생하게 여겨져, 자신이 상상한 풍경을 그림으로 표현하고 싶었던 걸까? 피리로 불던 그 가락들은 어디에서 들은 걸까?
   이사를 자주 하는 바람에 아버지의 수채화들과 대나무 피리를 잃어버린 게 너무나 안타깝다.
   그나마 엄마가 그린 꽃 그림은 하나 갖고 있다. 엄마도 그림을 잘 그렸는데, 특히 야생화를 즐겨 그렸다.
   우리 일곱 남매는 모두 부모님의 화가적 유전자를 물려받았다. 하지만 이후 우린 각자 자기 직업을 갖게 됐다. 아나톨리는 군인이 됐고, 알렉산드르는 체스 선수, 아파나시는 가라테 트레이너, 스베틀라나는 번역가가 되었다. 화가가 된 것은 게라심과 옐레나와 나 이렇게 셋이다.

   엄마는 해마다 메주를 만들었다.
   보통 밭에서 콩이 무르익는 가을에 이 일을 하고는 했다. 내가 형들과 여동생 레나와 함께 사이좋게 무리 지어 이른 아침부터 콩을 수확한 어떤 날이 떠오른다. 우린 각자 바구니를 들고 있었다. 콩을 전부 거둬들이고 나면, 엄마는 그걸 커다란 대야에 넣고 씻은 다음, 마당에 차양을 치고서 화덕에 불을 지폈다. 화덕에는 솥이 두 개 놓이는데, 하나는 크고 또 하나는 작은 것이다. 작은 솥에는 물을 가득 붓고 큰 솥에는 그보다는 적게 붓고서 위에 체를 얹고 체 위에 베보자기를 두 겹으로 깐 다음, 씻어놓은 콩을 여기에 전부 다 옮겨 넣고 뚜껑을 덮는다. 그 상태로 콩을 오랫동안 찐다. 그러고는 엄마가 콩을 작은 대야에 옮겨 담아 좀 식혀놓으면 형들하고 내가 그것을 고기 분쇄기에 넣고 돌린다. 덩어리진 것을 갖고 엄마는 묵직한 원뿔 모양들로 빚어서는 볏짚으로 묶어서 벽 위쪽에 걸어놓았다. 우리 집 벽이란 벽에는 못이 잔뜩 박혀 있고 거기에는 콩으로 만든 원뿔이 걸려 있었는데, 그걸 메주라고 불렀다. 몇 달 지나면 메주가 마르고 딱딱해지면서 곰팡이가 가득 핀다. 그럼 엄마는 메주를 풀어서 솔로 닦아낸 후에 절구에 넣고 빻은 다음, 커다란 법랑 냄비에 넣고 물을 붓는다. 메주가 부드러워지면, 엄마는 그걸 커다란 나무주걱으로 저으면서 소금을 넣었다. 그렇게 해서 어둡고 서늘한 곳에서 오래 보관할 수 있는 된장을 만들었다.
   엄마는 채소국을 끓일 때 항상 된장 한 숟가락을 넣었다. 그런가 하면 또 마늘과 간 후추를 첨가해서 된장을 해바라기 기름에 튀기기도 했다. 난 된장 튀긴 걸 무척 좋아해서 빵에 발라 먹기도 했고, 아르카시와 다른 애들한테 권하기도 했다. 된장이 엄청 쌉쓰름했을 텐데도 애들은 다들 엄청 좋아하면서 먹었다.
   아우칸에 있는 고려인 가정에서는 집집마다 된장을 만들었다.

   아우칸에서 결혼식은 특별한 행사다. 우리 같은 애들한테는 접대 음식을 실컷 먹을 수 있는 구실이 되는 날일 뿐 아니라, 사람들의 흥을 관망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로즈바이의 누나인 툴쿤이 결혼식을 올렸다. 신랑이 아우칸 사람이어서 결혼식은 그 사람 집 마당에서 치러졌다.
   소련이 승리한 독일 파시스트들과의 세계대전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이기도 해서 아우칸 사람들은 하나같이 가난하게 살고 있었다. 국가는 강건해졌고, 삶도 나아졌다. 굶어 죽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지만, 모든 게 부족했다. 누구네 집에 경사가 생기면 그 누구도 모른 척하지 않고 가서 손을 보탰다. 티끌 모아 태산이라는 말도 있듯 할 수 있는 한 도와줬다.
   엄마는 옥양목을 떠와서 툴쿤의 결혼 예복을 지었다.
   금반지는 신혼부부에게 애초부터 가당치 않았지만, 눈치 빠른 아우칸 사람들은 신랑신부를 위해 구리관으로 반지를 만들어 금처럼 반짝거리도록 연마했다.
   우즈베키스탄 결혼식에서 대표적인 접대 음식은 커다란 솥에서 만든 필라프라는 볶음밥이다. 여기에는 쌀밥과 양고기, 당근, 양파 등이 들어간다. 옛날에는 필라프를 남자들만 요리했다고 한다. 필라프를 요리하는 것이야말로 진짜 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필라프에서 풍기는 그 아찔한 냄새는 또 어떻고!
   하객들이 모였고, U자형 탁자의 상석에는 멋지고 아름다운 신랑신부 루스탐과 툴쿤이 앉았다.
   루스탐은 마을의 트랙터 기사였는데, 집단농장 위원장은 축사를 하고 나서 신혼부부에게 자그마한 카펫과 돈을 선사했다.
   그러고는 식사가 시작되었다. 읍내에서 온 예인들이 연주를 시작했다. 그들은 수르나이와 카르나이를 연주했다. 작은 피리인 수르나이로 연주자들은 전통음악 소리를 냈고, 이 미터쯤 되는 긴 나팔인 카르나이를 들고 있는 연주자는 하늘을 향해 힘껏 불었는데, 엄청 날카로우면서 크게 울부짖는 듯한 소리는 마을 너머 저 멀리까지 들릴 정도였다. 귀가 멍할 정도로 우렁찬 카르나이와 가늘고 부드러운 수르나이가 묘하게 어우러졌다.
   아우칸에서는 한국식 혼례도 치러졌다. 한국식 혼례 역시 우즈베키스탄 결혼식과 마찬가지로 분위기가 흥겹다. 단지 카르나이와 수르나이 대신 한국 전통 북을 치고 대나무 피리를 분다. 하객들에게 접대하는 음식도 필라프 대신 미역국과 시래깃국, 네모난 두부, 국수 등이었다. 탁자에는 채소로 만든 갖가지 주전부리들이 놓여 있었다. 우리는 찹쌀과 꿀, 콘플레이크로 만들어 달콤하면서도 바삭한 ‘카추르’와 떡 등을 먹었고, 쌀로 만든 달달한 음료인 식혜를 마시기도 했다.

   마을에 전기가 들어왔고, 등잔들은 창고로 들어갔다. 집집마다 불이 들어왔을 때 얼마나 좋던지! 이제 더 이상 밤마다 등잔을 닦아내고 등유를 채워 넣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전기를 들여오기 위해서는 할 일이 아주 많았다. 우선 일꾼들이 마을 뒤편에 발전소를 짓고서 집들이 있는 거리마다 전신주를 세웠다. 그러고는 설치 기사들이 전신주를 타고 올라가 전신주들 사이로, 그리고 전신주에서 집으로 전깃줄을 늘어뜨렸다. 우리 아버지는 매일 저녁 여섯 시에 오토바이를 타고 발전소로 가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서는 유류 탱크에 든 디젤 수위와 구조 등을 확인해 본 다음, 시동을 걸고 발전기 엔진을 연결했다. 아버지가 발전기에서 나는 소리를 잘 들어보고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 확인하고 나서 벽에 있는 스위치를 켜자마자 전신주에 있는 전등들이 밝혀지고 아우칸 집집마다 창문이 환해졌다. 낮에는 마을에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뭘까? 다들 알다시피 낮에는 환하기 때문이지.
   어쨌든 딸깍 하는 스위치 소리가 나면 불이 켜진다는 사실이 얼마나 마법처럼 여겨지던지!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어둡던 방이 스위치를 켜면 환해진다니! 이 모든 것은 사람이 애써 일한 결과가 아니겠는가! 인간은 빛나면서도 유익한 것들을 얼마나 많이 만들어냈는가! 하지만 만들어내지 않았다면 좋았을 것들 역시 또 얼마나 많은지!

   내가 학교에서 좋아하던 과목은 역사와 지리, 러시아어, 문학이었다. 하지만 가장 좋아하던 것은 미술이었다. 나는 틈나는 대로 그림을 그렸다. 아버지는 합판으로 된 자그마한 가방을 만들어줬는데, 손잡이는 가죽으로 돼 있고 쇠로 된 자물쇠도 달려 있었다. 난 그 가방 안에 연필과 수채 물감, 구아슈 물감 등을 넣어 다녔다.
   우리 미술 선생님인 콘스탄틴 세르게예비치 보로노프 씨한테는 접이식 다리가 달린 목재 화판이 있었다. 나로서는 그런 화판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거였다! 콘스탄틴 세르게예비치 보로노프 씨는 진짜 화가여서 화판을 둘러메고 자연을 그리러 가는 일이 잦았다. 가끔 나를 데리고 갈 때도 있었다. 나는 그가 작업하는 것을 넋 놓고 보고는 했는데, 팔레트에서 물감을 섞으면 화폭에 근사한 자연이 탄생하는 것을 보는 것이 얼마나 좋았던지! 콘스탄틴 세르게예비치 씨는 침울한 성격에 말수가 적은 사람이었고, 자녀 없이 아내와 둘이 살고 있었다. 나는 선생님이 사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늘 재미있었고, 벽에 걸린 선생님 그림을 보는 것도 좋아했다. 하지만 선생님이 나를 집으로 부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한번은 선생님한테 나를 제자로 받아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었는데, 마치 못 들은 것처럼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선생님이 가끔이나마 자신이 야외에서 작업하는 것을 볼 수 있게 해준 것만으로도 만족했다.
   우리 친분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어느 봄날, 선생님은 아내분과 함께 갑자기 짐을 싸서는 아우칸을 영영 떠나버렸다. 하지만 찡그린 얼굴이 환하게 변해 가면서 두 눈을 반짝이며 풍경화를 그리던 화가의 모습은 내 기억 속에 간직돼 있다.

   하루는 아버지가 나를 일터에 데려가겠다고 했다. 우린 수리할 트랙터가 차양 밑에 대여섯 대 세워져 있는 집단농장의 어떤 부서로 갔다. 그러고는 삼륜 모터사이클을 탔는데, 아버지가 핸들을 잡고 난 사이드카에 앉았다.
   일터에 도착해 아버지는 트랙터 한 대를 반나절에 걸쳐 수리했다. 저녁 먹을 시간이 가까워지자 우린 개울가 버드나무 그늘에 자리 잡고 앉았다. 아버지 조수인 트랙터 기사 가푸르가 풀밭에 신문을 깔고서 보따리를 풀어 포도와 사과, 냄새 좋은 빵, 구운 통닭을 꺼내 놨다. 야외에서 이렇게 화려한 식사를 하다니! 우리가 식사를 하는 동안 한켠에서는 모닥불 위에서 주전자가 설설 끓고 있었다. 주전자는 불에 그을려 아주 시커멨다. 가푸르가 헝겊으로 손잡이를 잡고서 주전자를 불에서 내려 땅바닥에 놓고는 뚜껑을 열고 찻잎을 넣은 후 잠시 기다렸다가 찻잔에 따라주었다.
   나는 그렇게 맛있는 차는 처음이었다.
   우린 나무 그늘에 앉아 차를 즐겼다. 아버지와 가푸르는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그러고 나서 가푸르가 나를 보고 짓궂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아버지에게 말했다.
   “티모페이 아카(우즈베키스탄에서는 존경의 의미로 대화 상대 이름에 ‘아카‘라는 단어를 덧붙인다. 아카는 ‘형’이라는 뜻이다), 티모페이 아카, 댁의 아드님은 자라서 대단한 인물이 될 것 같아요! 틀림없어요!”
   그러자 이 말을 들은 아버지가 말했다.
   “대단한 사람은 필요 없어. 그저 좋은 사람이 되면 좋지.”
   “맞는 말이에요! 그렇게 될 거예요! 자, 한번 보세요! 위대한 사람이 좋은 사람이죠! 다른 사람을 방해하지 않으면서요.”
   그 두 사람은 러시아어와 우즈베키스탄어를 번갈아 쓰면서 계속 대화를 이어 나갔다.
   나는 맛있는 녹차를 마셨다.
   그때부터 나는 물을 아주 많이 마셔댔다. 하지만 잔뜩 그을린 그 주전자에서 따라 마신던 차 맛을 결코 잊을 수 없다.

   우리 마을에서 가장 힘세고 큰 사람은 에르가시였다. 사람들 얘기로는 키가 2미터 20센티미터라고 한다. 그게 진짜인지 아닌지 나로서는 알 수 없지만, 우리 꼬맹이들에게 에르가시는 옛날얘기에나 나오는 정말 거인처럼 보였다. 그의 모친은 키도 크지 않고 그저 평범한 중년 여자였다. 두 사람은 마을 변두리에 있는 단출한 흙집에서 살았는데, 에르가시는 집에 들어갈 때 항상 몸을 구부정하게 숙여야 했다.
   마흔 살 정도 된 에르가시는 늘 같은 ‘차판’을 입고 다녔다. 우즈베키스탄 가운인 차판은 수건 같은 것으로 허리를 동여맨 옷이다. 그는 추비체이카라고 하는 우즈베키스탄 전통 모자를 쓰고 칼로시라고 하는 큼지막한 고무신을 신고 있었다. 마치 도끼로 찍어낸 듯한 거친 표정의 얼굴은 잔뜩 그을려 있었고 까만 눈동자는 푹 꺼져 보였다.
   에르가시는 매일 아침 자신이 일하는 제재소가 있는 시내로 걸어가 저녁에 돌아오고는 했다. 3킬로미터 되는 거리를 뒤뚱거리는 걸음걸이로 느긋하게 걸어갔다 걸어오는 것이다. 먼지투성이 길바닥에 거대한 자국을 남기면서. 그 발자국 하나에 내 발이 다섯 개는 들어갈 수 있었다.
   에르가시는 누구에게도 나쁜 짓을 하지 않았지만, 어쩐지 우리 꼬맹이들은 그를 무서워해서 그가 보일 때마다 여기저기로 도망가고는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린 에르가시와 정면으로 딱 마주쳤다. 휴일에 아이들과 같이 찾아간 읍내 시장에서였다. 우린 시장 입구 계단에 앉아 씨를 까먹고 있었다. 그러다 우리 가운데 누가 갑자기 외마디 비명을 질렀고 같이 앉아 있던 애들이 바람처럼 사라져버렸는데도 나는 무슨 일인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고개를 들어 보니 곁에 거인 에르가시가 있었다.
   “도와줘 친구!”
   이렇게 말하면서 에르가시는 큼지막한 손바닥을 내 어깨에 얹더니 거칠게 숨을 쉬면서 계단 두 개를 간신히 지나 아스팔트로 발을 내디뎠다. 물론 그는 도움이 필요한 것은 아니었고, 그저 친근함의 표시로 내 어깨에 손을 얹었을 뿐이다. 바로 그 순간, 난 멀어지는 에르가시를 보면서 그가 전혀 무서운 사람도 아니고 우리 모두 괜히 그를 겁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여름에 나는 폐렴에 걸려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었다. 내가 누워 있던 읍내 병실에는 나 말고도 사내아이 몇 명이 더 있었다. 간호사 두 명이 우리한테 약을 주거나 주사를 놓으면서 교대로 우릴 돌봐주고 있었다.
   그중 한 명은 땋아 내린 긴 금발에 엄청 예쁜 푸른 눈을 가진 간호사였는데, 이름이 리다였다.
   그녀가 비번일 때면 난 우울해져서 나뭇잎이 바스락대는 자작나무나 줄무늬 잠옷을 입은 채 마당을 거닐고 있는 환자들을 창문으로 내다보고는 했다.
   난 베개 밑에 자그마한 공책과 연필을 놔두고 있다가 잠이 오지 않는 고요한 시간에 그림을 그리고는 했다. 주제는 구름, 나무, 집, 개울, 새 등등 그냥 떠오르는 대로였다. 우리 마을과 백양나무 오솔길, 황새 따위를 그리기도 했다.
   하루는 리다가 와서 내 침대가에 앉더니, 내가 공책에 그린 것들을 보여 달라고 했다. 그녀는 공책을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유심히 들여다보더니 그림들이 무척 마음에 든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걸 다 가져가도 된다고 말했더니, 리다는 사양하면서 그럼 백양나무 오솔길 그림 하나만 가져가겠다고 말하며 조심스럽게 뜯어갔다.
   트럭을 모는 사내 하나가 이따금 리다를 찾아왔는데, 그녀는 쉬는 시간에 마당에 있는 벤치에 그와 함께 앉아서 얘기를 나누고는 했다. 그녀 웃음소리는 맑고 쾌활했다.
   어느 날 듣자 하니, 리다가 사내에게 복숭아가 먹고 싶다고 말하자, 사내는 지금 날이 변덕스러워서 복숭아가 자라지 못하니 대신 다음에 사과를 갖다주겠다고 말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난 나날이 회복되어 갔고, 이내 완전히 건강해졌다. 아버지가 나를 집으로 데려갔고, 난 아우칸의 일상으로 돌아갔다. 아침마다 수탉이 울었고, 하늘에는 흰구름이 떠갔고, 오솔길에는 내가 없는 동안 더 커진 백양나무 이파리가 사그락거렸다. 옆집에 사는 아르카시와 로즈바이, 혹은 다른 누가 찾아와 같이 산책을 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나는 복숭아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아서 마음이 편치 않았다. 트럭 운전사 그 녀석이 요즘 복숭아가 나지 않는다고 리다에게 한 말은 거짓말이었다. 내가 집단농장 밭에 가보니 울타리 너머로 보이는 나무들에 바알갛게 익어가는 싱싱한 복숭아가 달려 있었다.
   난 리다를 위해 어떻게 해서든 복숭아를 손에 넣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시장에 가서 사는 게 가장 손쉽겠지만, 부모님께 돈을 달라고 할 수는 없었다. 남은 방법은 하나, 밭으로 기어들어가는 것뿐이었다. 이것에 대해서는 아르카시에게도 로즈바이에게도, 다른 그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았다.
   나는 시간을 정하고 나서 우리 마을이 모두 잠든 한밤중에 집을 나섰다. 사방에 정적이 감돌고 하늘에는 달이 떠 있었는데, 그 시간치고는 너무 환하게 빛난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을 끄트머리로 가서 밭으로 가는 길을 어렵지 않게 찾았지만, 난 그 길로 가지 않고 졸졸거리는 냇물이 있는 쪽으로 갔다. 도랑을 뛰어넘자 ‘두발’이라고 하는 우즈베키스탄 방식의 토담이 이내 보였고, 그 뒤편으로 어두침침해진 밭이 보였다. 두발은 높아서 내 손이 닿지 않았다. 거인 에르가시한테는 그걸 뛰어넘는 게 일도 아니겠지. 토담 위로 나뭇가지가 살짝 보이는 곳이 있었다. 난 뛰어올라서 가지를 움켜잡았다. 가지가 휘기는 했지만 부러지지는 않았다. 난 학교 평행봉에서 하듯 잡아당기면서 두발 위에 올라섰다. 어둠 속에서 과일 향이 났지만 그건 사과 냄새였고, 복숭아나무는 토담에서 좀 더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나는 밭을 잘 가늠해 보고는 뛰어내렸다. 가슴이 쿵쾅거렸다. 난 경비가 사나운 개를 데리고 밭을 지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두려움보다 더 강한 어떤 감정이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했다. 나무에 무사히 타고 올라가 보니 복숭아가 주렁주렁 달린 것이 보였다. 나는 그것들을 따서 셔츠에 넣고는 갔을 때와 같은 방법으로 돌아왔다. 여전히 고요했고, 하늘에서는 달이 비추고 있었다. 우리 집 마당으로 들어서서 헛간으로 가서는 복숭아를 전부 짚더미 아래에 숨겨두었다. 소리를 내서 가족들을 깨울까 봐 겁이 났기 때문에, 헛간에 그냥 남아서 짚더미에 누워 낡은 옷을 덮고는 잠을 청했다.
   아침이 되자 첫닭 울음소리에 일어났다. 마당에 있는 화덕에 불을 지피고 닭들한테 물을 주고 밀도 몇 움큼 던져줬다. 내가 밤중에 집단농장 밭에 다녀온 일은 가족 중 누구도 알아채지 못했다. 엄마만 오늘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냐고 놀라서 물어봤을 뿐이다. 읍내까지 걸어가서 한적한 시간에 맞춰 병원에 도착했다. 당직은 리다였다. 복도에 있는 그녀 탁자에는 갓 달린 램프가 타오르고 있었고, 리다는 몸을 숙인 채로 잡지에 뭘 쓰고 있었다. 순간 더럭 겁이 났다. 그녀에게 다가가 복숭아가 담긴 봉지를 건네기가 두려웠다. 하지만 리다가 먼저 나를 알아채고 뒤돌아보면서 쾌활하게 외치며 나한테로 왔다.
   “아, 미샤 너구나! 무슨 일이야? 여긴 왜 왔어?”
   “이거 주려고요.”
   난 이렇게 말하면서 봉지를 내밀었다.
   “정말? 와, 내가 좋아하는 복숭아네!”
   리다가 뭐라고 더 말했지만, 난 곧바로 도망쳐 나온 바람에 뭐라고 했는지는 듣지 못했다. 보나 마나 그녀는 복숭아를 어디서 났는지 물어볼 텐데, 그녀에게 거짓말을 할 수는 없을 테니까.

   우리 마을에서 텔레비전이 있는 집은 집단농장 대표인 루스탐 굴랴모비치 나자로프 씨네와 교장인 미트로판 바실리예비치 리 씨네 이렇게 두 집뿐이다. 자주는 아니지만 이따금 우리 꼬맹이들은 저녁이 되면 텔레비전을 보러 몰려가곤 했는데, 너무 엄해서 무서운 교장 선생님 댁이 아니라 농장 회장님 댁으로 곧장 갔다. 그럴 때마다 안주인은 퇴근해서 쉬고 있는 나자로프 씨한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조용히 앉아서 보라고 지시하고는 했다. 그 집에 있는 텔레비전은 작았는데, 거실 탁자에 놓여 있었다. 우린 거기에 착 달라붙어서, 흑백 화면에 못 박혀 어떤 영화라도 봐야 그 집을 나오고는 했다.
   하루는 국가에서 대단히 중대한 발표를 텔레비전을 통해 알릴 거라는 소식이 마을에 퍼졌다. 루스탐 나자로프 씨는 아우칸 남녀노소가 모두 모인 마당으로 텔레비전을 가져다 놓았다. 이내 텔레비전 화면에 방송 전파를 타고서 섬광이 번쩍이더니 우주복을 입은 남자 얼굴이 보였다.
   “우주에 간 최초의 인물! 우주비행사 유리 알렉세예비치 가가린!”
   아나운서 목소리가 들렸다. 세상에 이런 일이! 마당에 있던 사람들은 환호하고 서로 부둥켜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고는 바로 식탁이 차려졌고, 마을 사람들이 다들 내올 수 있는 음식을 가져와 잔치가 시작됐다. 잔치 분위기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특이했다.
   유리 가가린의 초상화가 마을 집집마다 걸렸다.
   모든 사건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기억에서 지워지기 마련이지만, 가가린의 비행은 잊을 수가 없다. 우주에 발을 디딘 인간의 업적과 그 일이 일어났던 1961년 4월 12일을 지구상 모든 사람이 기억할 것이다.

   이듬해 우리 가족은 타지키스탄의 작은 도시 쿠르간-튜베로 이사했다. 난 여기에서 학업을 이어갔고, 수업이 끝나면 일주일에 세 번 ‘젊음의 궁전’으로 미술을 배우러 갔다. 내가 화가가 될 거라는 사실과 그 길을 가기 위해 넘어야 할 장애물이 많다는 사실을 이제 난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유년 시절이 끝나고 성인의 삶이 시작되었다.
   나의 유년 시절은 저 멀리 푸르른 어디이다.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감동적이면서 포근한 장면이 보인다. 하얀 황새들이 날아다니는 아우칸 마을, 백양나무 길, 어릴 때 즐기던 놀이들, 당나귀가 끄는 마차를 타고 이 마을 저 마을 다니면서 낭랑한 목소리로 “샤라-바라!” 하고 외치던 집시 사르바르, 영사 기사 <알렉세이와 제분소에서 본 영화, 삶은 콩으로 원뿔 모양을 빚던 엄마 손, 떫은 메주 냄새, 고요한 밤에 들려오던 아버지 피리 소리, 회색 가운 차판 차림의 거인 에르가시, 내 친구들……. 삶은 우리를 모두 세상 여기저기로 흩어지게 만들고, 그중 몇몇의 소문을 듣게 되기도 하겠지. 아르카시는 대학교수가 된 생물학자, 로즈바이는 두타르를 연주하면서 우즈베키스탄 노래를 하는 유명한 가수가 되고, 이고르는 축구 선수가 됐다가 코치가 되고…….
   유년 시절의 푸르른 저편은 사라지고, 신비하기만 한 미지의 푸른 저편이 앞에 놓여 있다. 내가 엄마 립스틱으로 그린 나무 그림이 내 미래 운명을 결정지어 난 화가가 되었다.
   나는 한참 어렸을 때부터 책 읽기를 좋아했고 점차 러시아 고전문학 등에 빠져들게 됐는데, 특히 작가 알렉산드르 그린의 작품은 나로 하여금 작품을 쓰도록 독려한 작품이기도 하다. 그렇게 해서 회화와 문학, 이 두 예술은 평생 내 삶의 길잡이가 되었다.

2022년 8월 청주에서

번역정보

번역: 전성희 (러 → 한)

필자 약력
박미하일 작가 프로필 사진

1949년 우즈베키스탄에서 태어나 1970년 타지키스탄 두샨베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현재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거주하며 활동하고 있다. 러시아어로 작품을 쓰는 작가로 1976년 처음 문단에 등장했다. 러시아작가동맹위원. 러시아예술가동맹 위원을 역임했다. 작품으로는 장편소설 7편, 중편소설 8편, 30여 편의 단편소설과 2편의 무대연극이 있다. 한국어로 번역돼 서울에서 나온 소설 작품으로는 『해바라기 꽃잎 바람에 날리다』(1995), 『발가벗은 사진작가』(2007), 『밤, 그 또 다른 태양』 (2012), 『개미도시』(2015), 『헬렌의 시간』(2017), 『사과가 있는 풍경』(2018), 『밤은 태양이다』(2019), 『예올리』(2020) 등이 있다. 발렌찐 까따예프 문학상(2001, 2007), 한국 펜클럽 및 재외동포재단 문학상(2001), KBS 예술문학상(2007), 쿠프린 문학상(2010) 등을 수상했다. 모스크바, 서울, 파리, 알마티 등에서 개인 미술전시회를 열었다. 독일에서 단편소설 3편(1996), 캐나다에서 시 작품 4편(2003년), 중각에서 단편소설 2편과 중편소설 1편이 출판되었다. 이문열 장편소설 『사람의 아들』(2004), 윤후명 장편소설 『둔황의 사랑』(2011), 박경리 장편소설 『토지』(2016) 등을 러시아어로 번역했다.
* 사진제공_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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