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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 디아스포라의 존엄성과 정체성

2024. 6. 1. 7호

트레이시 임 作 「꽃이 필 때면」 140cmx120cmx2cm, 장지에 채색화, 2022

표지에세이 보기 편집자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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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탈북문학에 나타난 유랑서사와 정체성

민유민 한국

1. 집단 존재의 행로, 탈북 디아스포라   오랜 시간 디아스포라(diaspora)는 ‘이산’ 혹은 ‘분산’을 의미하는 용어로 사용되어 왔다. 1990년대 들어 국제 이주, 망명, 난민, 이주 노동자 개념과 더불어 민족 공동체, 문화적 차이, 정체성 등을 아우르며 다양한 분야로 확장되었다. 특히 디아스포라는 “이동이 잦아진 세계, 소속감과 소외감, 고향과 타지, 정치적 포용과 사회적 배제의 세계”1)라는 양면성을 내포하며 디아스포라(인)의 존재 증명에 관한 질문을 던져 왔다.   윌리엄 사프란(William Safran)은 디아스포라를 ‘국외로 추방된 소수 집단 공동체’2)라고 정의하고, 디아스포라에 관해 다음과 같이 여섯 가지를 제시했다. (1) 특정한 기원지로부터 외국의 주변적인 장소로의 이동, (2) 모국에 대한 집합적인 기억, (3) 거주국에서 수용될 수 있다는 희망의 포기와 그로 인한 거주국 사회에서의 소외와 격리, (4) 모국을 후손들이 결국 회귀할 진정하고 이상적인 땅으로 보는 견해, (5) 모국에 대한 정치·경제적 헌신, (6) 모국과의 지속적인 관계 유지를 들었다. 이 내용을 살펴보면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개인과 이주민 집단, 그 문화적 공간, 집합적 기억 등은 결국 강제성을 지니지 않더라도 “주류 사회로부터 소외될 수밖에 없는 소수자이자 주변인”3)으로 디아스포라를 규정한다는 것이다. 또한 떠나온 모국을 회귀할 이상적인 땅으로 본다는 점이다. 이들의 정체성은 이방인의 운명을 타고난 것으로, 이곳과 저곳을 떠돌며 흩어져 거주하는 유랑 형태의 삶을 집단적 형태로 드러낸다. 즉, “국민으로 편입되지 못한 파편과 같은 처지이며 민족과 민족 사이에 낀 틈새적 존재”4)이면서 세계 어느 나라에 속할 수 있다는 점에서 특수한 상태에 놓인다. 이와 같은 이중의 정체성을 전 지구적으로 뚜렷한 양상으로 보여온 ‘탈북 디아스포라’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탈북+디아스포라(인)’는 본국을 스스로 떠나왔다는 ‘탈북’이라는 행위가 더해져 디아스포라가 지닌 기존 개념에서 특수한 성질이 내포된 의미로 확장된다. 이들의 탈북은 극심한 생존 위기에 처한 북한 주민들이 모국을 탈출하는 행위에서 비롯된 것으로, 불합리한 상황을 ‘탈북한다’라는 행동 양식으로 북한의 현실을 전적으로 표출해 왔다. 탈북민, 탈북 난민 등으로 불리며 국제 사회에 흩어져 거주함으로 탈북 디아스포라(인)를 표상하고 있다.   북한은 사회주의권 국제 경제 체제의 붕괴 등의 요인으로 경제적 위기에 처함과 더불어 폭우와 장기적 기근으로 인한 경작의 어려움, 산림 황폐화 등으로 식량 부족 사태에 빠졌다. 자체 존립이 어려워진 상황에 놓인 김정일 정권은 김일성 사망 이후 혹독한 경제난을 이겨내고 민심의 이탈을 막기 위해 ‘고난의 행군’이라는 강령을 선포했다. 그러나 이미 1990년대부터 차별적 미공급으로 인해 식량난을 겪은 북한 주민들은 생존을 위해 자국을 탈출해야만 했다. 탈북은 생존권 위협에 처한 상황에서 자발적으로 북한을 떠나오면서 시작됐다. 탈출의 개념으로 출발한 탈북 현상은 이후 체제에 대한 회의, 한류 문화의 영향이 겹치면서 1990년대 중반 이후부터 대량 탈북 현상으로 이어졌다.   첫 탈북 장소인 중국에서 탈북민은 불법체류자의 신분이 되며, 강제 송환의 위험에 처하게 된다. 중국은 북한과 ‘중국-북한 범죄인상호인도협정(일명 밀입국자송환협정, 1960)’과 ‘국경지역 업무협정(1986)’, 그리고 1998년 1월 1일부터 적용된 ‘길림성변경관리조례’를 협약한 바 있다. 이에 따라 중국은 양자 조약인 ‘밀입국자 송환협정’에 따라 강제 송환 원칙을 지키고 있다. 탈북민은 강제 송환된 이후 종교 접촉 혹은 남한행 목적이 밝혀질 경우 목숨이 위태로워질 수 있다. 이처럼 탈북민은 국제 사회에서 난민의 범주에 속하나 중국에서는 국제적 보호도 받지 못하고 있다. 유엔 난민기구(UNHCR)는 ‘2022 글로벌 동향 보고서’를 통해 전 세계에서 난민 자격으로 살아가는 탈북민 수가 260명이라고 발표했다. 이 외 망명을 신청한 후 대기 중인 북한 주민을 127명으로 집계했다. 이 수치는 중국 내 탈북민과 한국에 정착한 탈북민은 포함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 수치보다 훨씬 더 많은 탈북민이 보호받지 못한 채 살아갈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뚜렷한 이주 양상을 보이는 탈북민은 어떤 집단에서의 난민보다도 더 실체적이고 수적으로도 우세한 형태를 갖췄다. 공간으로는 중국, 서방 국가, 남한 등으로, 집단적 이주 양상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국제 사회에서 난민의 형태에 처한 탈북민은 체류 국가에서 일시 또는 장기 거주하기에 불안정한 유랑 상태에 처해 있다. 언제든지 본국으로 송환될 수 있는 강제성과 탈북민 개인에게는 고향을 스스로 떠나온 ‘뿌리 뽑힌 자’의 소외와 불안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탈북민은 북한 체제의 불합리성을 정면으로 맞서는 존재로, 탈북을 통해 ‘집단 존재의 행로’를 국제 사회에 적극적으로 보여 주는 탈북 디아스포라 현상을 낳고 있다. 2. 탈북 문학의 디아스포라적 상상력   탈북민은 탈북 체험이라는 삶의 극한 양상을 지속적인 형태로 보여 왔다. 탈북민은 한민족이자 같은 문화와 언어로 소통할 수 있다는 공통분모를 갖췄다. 특히 남한에 오면 정착을 위한 보호를 받는 민족이다. 이들은 생존 극복의 한 방법이자 인간답게 살고자 하는 권리 회복을 위해 모국을 스스로 떠나왔다. 탈북 디아스포라는 이주와 분산의 의미를 넘어 탈북과 유랑의 양상에 더 의미를 둔 것으로, ‘어쩔 수 없이 불합리한 사회를 떠나옴’에 관한 구체적인 사실성에 근거한다. 더욱이 탈북민은 ‘인간이 인간으로부터, 나아가 소속된 국가로부터 보호받지 못하는가’에 관한 근원적인 질문의 최전방에 서 있다. 그리하여 탈북 디아스포라는 모국 탈북과 타국 도착, 유랑과 이주, 갈등과 화합, 정착과 상생 등의 분산과 응집의 양면성, 그리고 이들의 정체성까지 포괄된 의미여야 한다. 이들을 재현한 탈북 문학은 인간 근원에 관한 질문을 던지고 탈북 디아스포라 성격을 단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북한 체제의 불합리성을 비틀어 재현하고, 인간 본연의 삶의 가치와 의미를 구현하는 탈북 디아스포라의 문학적 상상력이 자리한다.   탈북 문학은 탈북과 탈북민의 삶을 소재로 한 작품으로, 탈북 디아스포라를 단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기록물이다. 더욱이 통일 문제와 탈북 디아스포라의 양상을 적극적으로 반영하는 동시에 통일 이후 새롭게 생겨날 문제를 진단하고 대비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탈북 문학은 시, 소설, 아동문학의 분야에 폭넓게 확장되고 있다. 그 중심에 가장 조직적인 구조 속에 디아스포라 현실을 여실히 형상화한 소설이 있다. 탈북 작가는 북한의 현실을 과감히 드러내 모순된 사회를 꼬집기도 하고, 남한 작가는 탈북 과정이나 남한 정착 이후의 상황을 위주로 주목한다.   북한 사회를 직접적으로 체험한 탈북 작가와 탈북을 소재로 한 남한 작가의 소설 내용을 살펴보면, (1) 북한의 현실을 비판적인 시각으로 재현, (2) 제3국에 거주하는 탈북민과 남한에 정착했으나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는 탈북민 인물을 다채롭게 형상화, (3) 남파 간첩, 망명자, 행방불명자 등과 같은 생존하지만 존재하지 않은 인물로, 경계인으로서의 처지를 밝히는 소설 등이 있다. 작중 인물이 처한 상황을 기준으로 하면 (1) 유랑 중인 상태, (2) 제3국에 정착해서 사는 상태를 다룬 소설5)로 구분할 수 있겠다. ▲ 왼쪽부터 황석영 『바리데기』, 강영숙 『리나』, 조해진 『로기완을 만났다』   대표적으로 탈북 후 불법체류자의 신분으로 중국에 머물다 인신매매 피해를 보고 영국에 정착한 ‘바리’라는 인물을 그린 황석영의 『바리데기』(2007), P국을 향하다 제3국을 유랑하며 살인과 유기, 매춘과 인신매매 등의 고난을 겪는 강영숙의 『리나』(2006), 국제 사회에 탈북 난민의 삶을 타인의 시선으로 추적하는 조해진의 『로기완을 만났다』(2011), 중국에서 불법체류자로 지내며 갖은 고난을 겪는 ‘충심’이라는 인물을 그린 정도상의 『찔레꽃』(2008) 등을 들 수 있다. 이 가운데 탈북 디아스포라(인)의 유랑 형태와 정체성을 단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대표적인 작품이 『바리데기』, 『리나』, 『로기완을 만났다』이다. 이 소설 속 인물들은 경계와 경계 사이에 선 자, 뿌리 뽑힌 자,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탈영토화된 공간에서 생존한다.   『바리데기』와 『리나』는 소녀라는 인물 유형을 내세워 유랑 서사, 난민 소녀 서사, 이주 매춘 서사라는 소설적 구조를 긴밀하게 조직화하고 있다. 바리와 리나를 통해 제3국을 유랑하며 임금 착취, 인신매매, 폭력 등의 고난을 겪거나 불법체류자의 신분으로 정착하지 못한 채 탈영토화된 공간을 표류하는 탈북 디아스포라(인)의 삶을 단적으로 형상화한다. 특히 『로기완을 만났다』는 탈북 난민 ‘로기완’을 통해 진정한 정체성 찾기와 회복을 의미화한 소설이다.   황석영의 『바리데기』는 생명수를 찾는 문제 해결 서사 형식을 갖춘 바리공주 설화를 바탕으로 바리의 역경을 극복해 나가는 성장기 유랑 서사를 담아내고 있다. 탄광촌에서 탈출 이후 겪는 매춘과 인신매매, 자본의 병폐를 담은 강영숙의 『리나』는 제3국을 유랑하는 여성 탈경계인의 인권 유린 현장을 형상화해 낸 시대적 산물로 중요한 가치가 있음을 시사한다. 특히 리나는 이곳저곳의 탈영토화된 공간을 유랑하며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는 정체성을 지닌다. 이 두 소설은 제3국에서 여성의 몸으로 살아내야 하는 소녀 서사라는 점에 주목한다. 열두 살의 바리와 열여섯 살의 리나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유랑 서사는 탈북 디아스포라에 나타난 여성 문제와 인권 유린 문제를 통해 탈북 과정에서 참혹하게 파괴되는 여성성을 형상화한다.   조해진의 『로기완을 만났다』는 시사 주간지 《H》에 실린 “어머니는 저 때문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살아야 했습니다”라는 탈북민에 관한 기사를 보고 벨기에로 떠나 로기완의 삶을 추적하는 남한 작가의 시선이 담겨 있다. 이 소설은 타인의 존재를 온전히 받아들이고 공감하게 되는 순간, 본인의 삶까지도 이해하게 되는 위로의 서사가 펼쳐진다. 3. 유랑 서사에 나타난 디아스포라 공간   『바리데기』의 바리는 북한 청진에서 지방 관료의 일곱 딸 중 막내로 태어나 열두 살이 되던 해 외삼촌의 탈북으로 가족과 헤어진다. 샤먼의 기질까지 타고난 바리는 ‘북한(청진-무산-부령-움집)-중국(연길-대련)-영국(런던)’이라는 공간을 이동하며 고난과 시련을 경험한다. ‘미이 언니’의 인신매매 소식, 밀입국 과정에서 벌어진 강간, 영국에서 팔려 간 ‘샹 언니’ 등을 통해 여성의 몸은 자본으로 ‘교환할 수 있는 육체’이자 ‘팔리는 돈’이라는 비참한 현실과 여성 인권유린 문제를 여실히 보여 준다.6) “ 바루 너 같은 아아들 팔아먹구 산다 이거야. 나가 너이 언니 행방을 찾았구나! 예에? 미이 언니를…… 어디서요? 소룡 아저씨는 벌써 오래전 일이라면서 용정(龍井)에서 술집을 한다는 어느 후배에게서 소식을 들었다고 했다. 너이 아부지 직위를 대주구 무산서 온 체네를 찾는다구 기랬댔는데 소식이 왔구나. 나는 젓가락을 놓고 벌써 의자에서 반쯤 일어서고 있었다. 찾아가 만납시다! 기쎄 말 좀 더 들어보라. 내가 그냥 내버려두었갔나. 미이 언니는 두만강을 건너자마자 인신매매를 하는 사람들에게 걸린 모양이었다.7) ”   인용문은 바리가 열다섯 살 되던 해에 중국인 부부(샹 언니와 쩌우 형부)를 따라 다롄으로 이동하기 전, 미꾸리 아저씨와 나눈 대화이다. 미꾸리 아저씨는 돈 때문에 인신매매가 성행한다는 것을 바리에게 알려 준다. 중국인 부부가 빚에 쫓기게 되자 바리는 그들과 함께 영국 런던으로 밀항한다. 성적 착취는 밀항선에서도 일어난다. “ 담배를 한 대씩 나누어 피우고 나서 선원들이 샹 언니를 통로 쪽으로 끌고 나가 옷을 벗긴다. 샹 언니가 허우적거리며 저항하자 남자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주먹으로 얼굴을 몇 대 후려치고 언니가 축 늘어진다. 다른 선원들이 내려온다. 그들은 서로 잡담을 하면서 발가벗긴 언니를 돌려세우기도 하고 눕히기도 하면서 여러 짓을 벌인다. 선원들이 완전히 실신해버린 샹 언니를 내버려두고 사라진다.8) ”   인용문은 영국 런던으로 밀항하는 배 안에서 벌어진 성적 착취 현장을 바리가 목격하는 장면이다. 폭력과 성 착취만이 난무하는 세계를 단적으로 제시한다. 열여섯 살 가을, 영국에 도착한 바리는 차이나타운 뒷골목에서조차 여성의 몸은 자본(돈)임을 절실히 깨닫는다. 나아가 비자도 노동허가증도 없이 체류하고 있는 영국이라는 공간은 바리의 뿌리 없음의 상태를 여실히 드러낸다.   디아스포라 공간에서 바리는 전 지구적인 자본주의 체제 아래 유랑하며 소외된 자를 대변한다. 소련의 붕괴와 나라님의 죽음, 폭우와 기근으로 꽃제비가 속출하는 고난의 행군 시기의 북한, 인신매매와 매춘이 성행하는 중국, 상품화된 몸으로 자율성을 박탈당하는 밀항선과 영국, 다국적 이주 노동자들의 공간인 램버스 구역의 연립주택, 9·11 테러 사건, 중동과 아프리카의 분쟁, 영국의 지하철 테러, 미국 주도의 대테러 전쟁 등의 공간과 사건을 배경으로 탈북 디아스포라(인)의 소외된 삶이 조명된다.9)   『리나』의 주인공 리나는 탄광 지역 노동자인 부모의 큰딸로 태어났다. 키가 작고 갸름한 얼굴에 노란 여드름이 난 열여섯 살 소녀이다. 탄광촌에서 P국으로 향하는 스물두 명의 탈북자 행렬 속에 끼여 탈북한 열여섯 살의 리나가 제3국으로, 다시 국경을 넘나드는 서사를 담고 있다. 탈영토화된 공간인 ‘탄광촌-국경-화공약품 공장-마약과 관광의 도시-창녀촌 시링-경제자유구역인 공단 지대-국경’의 여정은 노동 착취와 폭력, 인신매매와 강간이 성행하는 인권 유린 체험장을 극적으로 제시한다고 볼 수 있다. “ 네모반듯한 남자는 50명의 공장 노동자들을 그렇게 채찍 하나로 다스렸다. 여자들은 노동자들이 맞을 때마다 두 눈을 가리고 울었다. “도대체 여기가 어딘지 누가 우리말로 얘기 좀 해주세요, 제발!” 남자는 툭하면 배배 마른 노동자를 한 명씩 공장 구석으로 끌고 가서 흠씬 때렸고, 맞은 사람들은 고무공처럼 튀어 드럼통에 붙은 사다리로 원숭이처럼 재빠르게 올라가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일했다. 조금이라도 반항의 기미를 보이면 고무통에 모아둔 인분을 강제로 먹였다.10) ”   인용문은 스물두 명의 탈출 과정에서 신혼인 여자와 관리직 출신의 여자, 리나와 할아버지가 끌려간 화공약품 공장에서 벌어지는 폭력적인 일상의 한 장면이다. 특히 ‘화공약품 공장’과 ‘창녀촌 시링’은 소수자들의 인권 유린 문제와 자본의 횡포가 난무하는 공간이다. 국경에서 국경으로, 도시에서 도시로 넘나드는 과정에서 자본은 탈북을 돕는 속임수와 여성을 사고파는 인신매매의 연결로 표출된다. 소설 후반에는 공단의 폭발로 제대로 된 보상도 받지 못한 채 리나는 병든 몸을 이끌고 북쪽 유목민의 나라로 달린다. 경계 안과 밖, 국경과 국경, 사이와 사이, 이곳과 저곳 등의 자발적 국경 넘기는 소설에서 원형적 플롯의 형태로 제시된다. 결국 정착하지 못한 채 탈영토화된 공간을 누비는 리나를 통해 탈북 디아스포라(인)의 삶과 정체성을 상징화했음을 알 수 있다.   『로기완을 만났다』의 주인공 로기완은 탈북 난민으로, 어머니의 죽음으로 생존을 도모한 인물로 그려진다. 20세에 159센티미터의 단신, 47킬로그램의 몸으로 ‘연길-벨기에-영국’으로 이동해 북한을 떠나왔다. 이 소설에 제시된 탈북 디아스포라 공간은 살고자 탈북을 자처한 로기완의 생존 유랑 서사가 담겨 있다. “ 쏘비에트 연방과 중국의 지원감소, 동유럽 공산주의의 붕괴로 인한 무역량 감축, 무분별한 비료 사용에 의한 토지 황폐화와 연료 부족이 가져온 농업 기계화의 실패, 그리고 오랜 기간 지속된 미국의 경제제재와 무역적자는 마치 정교하게 맞물린 톱니처럼 연동하면서 로의 조국으로부터 재앙에 대비할 수 있는 여유를 앗아간 것이었다. 그러나 1995년은 시작에 불과했다. 홍수는 그다음 해에도 그 가난한 나라를 찾아왔고 1997년에는 해일과 가뭄이, 1988년에는 태풍이 국가 전역을 휩쓸고 지나갔다. 소위 ‘고난의 행군’이라 불리는 이 기간 동안 아사한 북한 주민은 대략 이삼백만 명으로 추정된다.11) ”   인용문은 북한의 재앙적 현실을 여실히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아사자가 속출하는 가운데 살고자 북한을 탈출한 로기완의 생존 본능을 엿볼 수 있다. 로기완은 탈북 후 연길에서 교통사고를 당한 어머니의 시신을 4,000달러에 팔아 항공권과 남한 국적의 위조 여권을 만들어 벨기에에 도착한다. 그러나 한국 대사관으로부터의 거절로 한국으로 갈 수 있다는 희망이 좌절되고 고아원에서 만난 엘렌 원장과 박의 도움으로 난민 자격을 얻는다. 하지만 여러 사회적 혜택과 정착민으로서 안정감을 뒤로한 채 수용소를 탈출한 필리핀 여성 라이카를 따라 영국행을 선택한다. 4. 다문화 주체와의 화합과 정체성 회복   이곳에서 저곳으로의 거주 장소 이동은 역동적인 정체성의 변화를 가져온다. 아시아, 아프리카, 동유럽, 런던으로의 공간은 소속집단 내에서 문화적 화합과 상생을 이뤄 낸다. ‘이동-접촉-교류-갈등-융합-상생’의 과정을 거쳐 세계 질서 속에서 다문화 주체로 자리한 탈북 디아스포라(인)의 재현 양상을 살펴볼 수 있다.   『바리데기』의 바리는 주변부에 있는 다문화 주체의 상처와 슬픔을 헤아리고 현실에 침착하게 적응해 나가는 인물로 제시된다. 중국에서 일을 소개해 주는 미꾸리 아저씨, 샹 언니, 손톱 미용 업소를 소개해 주고 여권을 구해 준 상하이 반점의 루 아저씨, 잠자리와 일자리를 제공해 준 통킹 네일쌀롱의 탄 아저씨, 할머니처럼 친절하고 희망을 이야기하는 압둘 할아버지, 바리와 결혼한 파키스탄 출신으로 영국 국적을 소유한 알리 등을 통해 다문화 이주자들과의 화합을 제시한다. 이러한 다문화적 주변부와의 연대는 국제사회에서 약소국 시민으로 위치한 탈북 디아스포라(인)의 생존 방식을 엿볼 수 있다.   『리나』의 주인공 리나는 거침없고 당돌한 성격으로 유쾌 발랄한 입체적인 인물이다. P국으로 들어갈 기회를 거부하고 새로운 장소를 이동하며 능동적으로 디아스포라적 삶을 살아가는 인물상으로 그려진다. 또한 봉제공장 언니와 아랍계 혼혈 꼬맹이, 반벙어리인 삐와 할머니, 클럽 퍼즐의 점박이와 후배, 굶주림에 떨고 있는 네 명의 남자아이 등 주변 소수자의 화합과 연대를 통해 대안적 가족을 형성하는 등 탈영토화된 공간에서 디아스포라(인)의 복합적인 면모를 단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로기완을 만났다』의 로기완은 1987년 5월 18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함경북도 온성군 세선리 제7작업반에서 태어났다. ‘이니셜 L’로 소설에 등장하는 ‘로’, 바로 로기완이다. 그는 “무국적자 혹은 난민으로 명명되었으며, 신분증 하나 없는 미등록자나 합법적인 절차 없이 유입된 불법체류자”라는 등 “그 누구와도 현실적인 교신을 할 수 없는 유령 같은 존재”로 그려진다. 그런 그가 난민 자격을 포기하고 필리핀 여성을 따라 유럽행을 택한 것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국제사회에서 뿌리 없이 유랑하는 근원에서 벗어나 “살기 위하여, 외롭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는 탈북 난민의 정체성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문학 작품 속에서 탈북 디아스포라 현상과 이들의 정체성 양상은 인물 유형과 공간적 이동에 따라 다채롭게 재현되고 있다. 이처럼 탈북민은 인류사에서 디아스포라 양상을 가장 현대적으로 증명하는 존재이며, 북한의 현실을 객관적으로 드러냄과 동시에 분단 국가의 비애를 현재진행형으로 여실히 증거하고 있다. 각주 1) 빈 코헨·올리비아 셰링엄, 최영석 옮김, 『다름과 만나기』, 앨피, 2019, 31쪽. 2) William Safran, “Diasporas in Modern Societies: Myths of Homeland and Return”, Diaspora: A Journal of Transnational Studies 1(1), 88-99쪽 참조; 정은경, 『디아스포라 문학』, 이룸, 2007, 15쪽에서 재인용. 3) 정은경, 같은 책, 16쪽. 4) 서경식·서민정·김용규·이용일, 『경계에서 만나다: 디아스포라와의 대화』, 현암사, 2013, 10쪽. 5) 박덕규, 「탈북 디아스포라 이해와 자아 회복의 의미」, 박덕규·이성희 엮음, 『탈북 디아스포라』, 푸른사상, 2012, 326쪽 참고. 6) 김민숙, 「탈분단시대의 탈경계인의 유형과 특수성」, 《한국문화기술》 27, 2019, 15쪽 참고. 7) 황석영, 『바리데기』, 창비, 2007, 113쪽. 8) 같은 책, 140쪽. 9) 김민숙, 「탈경계인의 유목서사와 정체성」, 《한국문화기술》 30, 2021, 61쪽. 10) 강영숙, 『리나』, 문학동네, 2011, 55쪽. 11) 조해진, 『로기완을 만났다』, 창비, 2011, 100쪽.

이쪽과 저쪽을 넘어 탈경계의 자유로움을 향하는 이들

박재인 한국

장마당세대 탈북청년들이 찾은 자기서사 1. 탈북 MZ들, ‘새로운 나’로 살기 위한 위험한 모험 압록강 사이에 둔 북한 혜산과 중국 창바이 [© 아시아뉴스통신]   목숨을 걸고 분단의 경계를 넘어서는 이들은 어떤 존재인가. 이를 탐구하는 작업에 중요한 변인 가운데 하나는 ‘세대’ 문제이다. 고난의 행군 시기(1990년 후반부터)에 기아와 극빈을 경험하고 생존하기 위해 탈출했던 1세대, 이들의 도움으로 이주한 2세대, 그리고 자발적 동기로 탈출한 3세대는 각각 다른 이유와 기억, 희망을 품고 탈북의 과정을 겪었다. 이들 각각은 서로 다른 탈북 동기와 과정을 경험했기에 한국에서 혹은 제3국에서 저마다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다.   요즘 필자가 만나는 3세대 탈북민 특히 20대 청년들은 이전 세대 사람들과 달랐다. 이전 1세대는 소금 한 줌만 있었어도 탈북하지 않았다고 한탄했었고, 2세대는 탈북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가족과 함께 살기 위해서 이곳에 왔다고 했다. 그런데 3세대에게 탈북 동기를 물었을 때 대답이 놀라웠다. “ “다른 삶을 살고 싶어서요.” ”   북에서의 자신을 지우고 새로운 ‘나’로 살기 바랐다는 말은 청소년기에 겪을 수 있는 자연스러운 고민이겠으나, 탈북이 결코 쉬운 문제는 아니어서 도대체 어떤 사연으로 이러한 무서운 다짐을 하게 되었나 마음이 무거워지기도 했다. 세부적인 이유는 다양했지만, 공통점은 북에서 더 나은 삶을 기대할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미래가 보이지 않았다는 것, 그것이 어린 나이에 고향 땅을 떠나온 이유였다.   자발적 동기로 탈북한 3세대는 흔히 말하는 장마당1)세대이다. 고난의 행군 시기 이후 국가의 배급이 아닌 시장에서 벌어온 돈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경제 방식으로 변화하면서2) 북한에서는 많은 것들이 달라졌다. 경제난에 뚫린 밀수의 통로들로 ‘자본의 힘과 외부 세계의 문물이 밀려 들어와 사람들의 생각과 생활 방식들을 바꾸어 놓았다. 이러한 변화를 두고, 장마당 세대는 ‘비사회주의’적 의식과 생활양식을 공유하는 세대3)라고 말하기도 한다. 젊은 세대의 변화는 북한의 사회적 문제가 될 만큼 커졌다.4) 압록강 [© 픽사베이]   그런데 미래가 보이지 않았다는 막막함은 단순히 가난과 낙후된 생활 환경 때문만은 아니었다. 지독한 가난과 그것의 대물림, 가정불화와 가정폭력, 학업 중단 및 청소년기 방황과 탈선 등 여러 갈등이 축적되면서 이 불행의 끝이 보이지 않았다고 했다. 그리고 이들이 미래를 꿈꾸는 일을 막고 있는 장애 요소 중 하나는 ‘토대’적 한계이다. 토대는 북한에서 성분이라고도 불리는 사회 계층 제도5)로, 이 제도에 의해 좋은 성분과 나쁜 성분으로 사람이 구분되고 사회적 행위가 제한되며 직업과 학업에 차별이 가해진다. 또 제1대의 기본 군중으로의 이동이 거의 불가능하며 연좌제와 같이 적용되는 지점도 있어서, 개인의 의지와 노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삶의 장애물이 되기도 한다. 필자가 만나 본 탈북청년들은 대체로 이 문제로 고민했었다.   이렇게 지쳐 갈 때쯤 이들 앞에 놓인 하나의 해결 방안은 ‘탈북’이었다. 처음에는 중국에 가서 돈을 많이 벌어야겠다고 생각했다가, 불법체류자로 오래 버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한국행을 결정했다고 했다. 혹은 탈북을 주선한 브로커에게 후불제를 약속하고 곧장 한국으로 온 친구들도 있었다. 김정은 정권 이후 탈북이 어려워졌다고만 들었는데, 최근 한국에 온 친구들은 이전보다 몇 배의 돈이 들 뿐이지 탈북이 어려운 것은 아니라고 했다. 그만큼 국경 근처의 10-20대들에게 탈북의 길은 손을 뻗치면 닿은 곳에 노출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부모들이 주선하여 탈북을 준비해 준 경우도 있었다. “ 제가 학교를 안 갔어요. 친구들은 학교에 가고 저는 장사를 했죠. 돈도 꽤 벌었어요. 그때는 자신감이 있었죠. 나는 이렇게 능력이 있다. 그런데 친구들이 졸업을 하니까, 갑자기 내 처지가 보이는 거예요. (……) 엄마가 준비해 줬어요. 거기(북쪽)서는 미래가 안 보이니까. 엄마가 보기에도 막막하니까.(2000년생 탈북 청년) ”   이 친구의 경우는 어린 시절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고 돌아가시면서, 집안의 가장이 되어 장삿길에 뛰어들었다고 한다. 어머니는 꽤 연약한 분이셔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어린 딸이 생계를 책임졌다는데, 어린 딸에 의지해 사는 어머니가 보기에도 이 소녀가 그렇게 사는 것보다 탈북의 길이 더 낫다고 판단했나 보다. 아직 성인도 되지 않은 딸을 홀로 먼 길, 그리고 위험한 길로 떠나보내려고 했던 어머니가 참 애처로웠다. 다행히 어머니의 소망처럼 이 친구는 소녀 가장의 짐을 벗고서 자기 꿈을 위하여 달려가는 대학생이 되었다.   이렇게 당사자뿐만 아니라 그 가족들도 탈북 청년들의 삶이 달라지기를 소망했다. 그것은 의식주 충족을 넘어선 삶의 질에 대한 것이다. 고등교육을 받고 사회적으로 존중받는 사람이 되길 바라는 것과 같이, 탈북청년들은 한국에서는 삶의 질을 높일 기회를 제공받기를 바랐다. 2. 편견과 배제의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살아갈까: 동화와 비동화, 혹은 그 사이   이들이 원하는 다른 삶은 ‘삶의 질을 높일 기회의 장’이라면, 사실 남한 사회는 그러한 이상과 소망에 어울리는 공간은 아니다. 경쟁은 심하고, 삶의 만족도를 위한 비용은 더 부담스러우며, 경제적 분배와 사회문화적 차원의 동등한 참여의 기회도 그리 공정하게 이뤄진다고 할 수 없다.   게다가 탈북민을 향한 따가운 시선도 무시할 수 없다. 한국 사회에서 차별과 배제를 경험한 탈북민은 꽤 많다. 이념적 편견이나 경제난민이라는 시선 등 직업과 학업 공간에서부터 개인적 공간까지 탈북민을 공격하는 말과 행동들은 가지각색이다. 2018년쯤 한 초등학생이 탈북민을 보고 ‘머리에 뿔이 났느냐’고 물었다. 반공 교육과 거리가 먼 어린 세대에게도 마음의 장벽은 너무 단단하게 세워져 있었다. 이에 탈북민들은 이 ‘탈북민 꼬리표’를 없앨 수만 있다면 그러고 싶다고 말한다. 삶의 닻을 찾아 [© 필자 제공] 강남을 찾아서 [© 필자 제공]   2012년부터 탈북민과 문학치료 상담을 해오면서 필자는 탈북민을 향한 한국 사회의 편견과 배제 문제를 회피해 왔다. 그리고 연구 논문이나 보고서를 작성할 때, 탈북민을 향한 남한 주민의 편견을 없애야 한다거나 남한 주민을 대상으로 한 교육이 필요하다는 식의 발언을 기록하지 않으려고 했다. 왜냐하면 이 문제는 사회구조적 차원의 ‘분단 문제’라고 판단했기 때문이고, 이 사안에 굉장한 무력감을 느꼈다. 그런데 ‘다른 삶을 살고 싶다’는 탈북청년들을 만나고 이제는 더 이상 이 문제로부터 도망갈 데가 없다고 생각했다.   문학치료는 사람에게 스토리 형식의 인지와 감정 도식이 존재한다고 전제하고, 감상‧토론‧창작 등 문학 행위에 사람의 심리가 나타나며 역으로 문학 행위로 사람의 심리가 변화할 수 있다고 보는 상담 방법이다. 문학치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어떤 문학 작품으로 대화를 나누는가에 있다. 탁월한 작품은 내담자 내면에 숨어 있던 진짜 문제를 드러내게 하거나, 새로운 정신적 도식으로 내담자의 내면에 안착하여 그의 삶을 바꿔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문학치료에서는 『삼국유사』에 나온 「비형랑도화녀」를 상담 자료로 활용했다. 이 작품은 죽은 진지왕(신라 25대 왕)의 아들로 태어난 반귀반인(半鬼半人)의 비형이 귀신을 부리는 능력으로 인간 사회를 이롭게 하고, 여우로 변한 귀신 길달을 처단함으로써 축사(逐邪)의 신격으로 거듭났다는 내용의 옛이야기이다. 국문학계에서는 진지왕 폐위(사회적 죽음)라는 역사적 사실을 ‘죽은 영혼’으로, 폐위된 왕의 자손들을 ‘반귀반인’으로 형상화한 것이라고 해석한다.6)   이러한 비형이 여우가 된 길달을 물리치자, 신라 사람들은 아래의 노래를 지어 첩사(帖詞)로 붙여 귀신을 쫓고는 했다고 한다. 그리고 신라에서 비형을 모시는 신앙이 아주 유행했다고 전해진다. “ 성스러운 임금의 넋이 아들을 낳았으니, 비형랑의 집이 여기로세. 날뛰는 온갖 귀신들이여, 이곳에는 함부로 머물지 마라. ”   이 노래는 인간의 영역과 귀신의 영역을 철저하게 구분 지으며, 비형에게 인간 사회의 소속이 명확하게 부여된 상황을 나타내고 있다. 비형을 통해 인간 사회와 귀신들의 소통이 이뤄지다가 그것이 다시 중단되었다는 점에서, 이러한 분열과 통합, 재분열의 서사가 삼국을 통일한 신라시대의 중요한 역사적 사건으로 꼽혀 기록되었다는 점이 의미심장하다.   비형의 서사는 분단 구조 속 북한 출신으로 남한에 살고 있는 탈북민들의 생애와 유사한 면이 많다. 비형이 죽은 진지왕의 아들로 왕족으로서의 사회적 권위가 박탈되어 있었다는 점은 남한에서 북을 정상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탈북민들을 이념과 경제적 문제로 차별하는 사회적 상황과 유사하다. 그리고 ‘귀(鬼)’라는 절반의 정체성으로 인간 세상에 이롭게 활용하는 장면은 이들이 남한 사회에 진출하는 상황과 유사하고, 신라 사람들에게 축사의 신격으로 추대되는 장면은 탈북민의 성공과 지위 상승을 떠올리게 한다. 또, 진평왕(신라 26대 왕)이나 신라시대 사람들의 모습은 이들의 소속을 결정짓는 중심 집단의 형상이며, 탈북민들이 중심 집단의 편견과 배제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고 때로는 정치적으로 이용될 가능성이 있는 상황과 유사하다. 그리고 비형, 길달, 귀신 무리는 소수 집단 내의 다양한 입장과 행보를 대변하기도 한다.   이 작품의 문학적 형상들은 단순한 이주민의 이야기가 아니라, 원래 함께 있었는데 그 존재성이 부인되고 상황에 따라 그 존재성이 이리저리 밀쳐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았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필자는 이 작품이 탈북민들에게 ‘나를 밀어내는 세상에서 어떤 존재로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사유를 자극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필자는 이 문학치료에서 탈북 청년들이 ‘비형’과 같이 남한 사회를 이롭게 하여 사회적 지위를 확보해야 한다는 식의 목표를 세우지 않았다. 다만 비형을 중심으로 일어나는 일련의 사태에 대해 탈북 청년들은 어떠한 감정을 느끼고, 어떠한 생각을 하는지 알고 싶었다. 그리고 작품의 표면에 나타나지 않으나, 인간과 귀신 사이에서 고민했던 비형 혹은 길달의 속내에 공감할 수 있을지가 궁금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비형의 선택보다 더 자기 삶에 기능적인 서사를 상상해 내길 바랐다. 그것이 바로 ‘탈’경계인7)으로 자기 서사이다. 적응 모델이나 도덕적 규범을 한정하지 않았고, 중심 집단의 입장에서 비롯된 획일화된 윤리관에서 탈피하여 특별한 사유를 할 수 있기를 바랐다. 분단의 경계를 넘어, 이쪽도 저쪽도 아닌 자신만의 기준과 판단으로 ‘나의 세상’을 구축해 가는 내면의 이야기를 찾아내길 바랐다.   그렇게 2021년 겨울 일곱 명의 탈북 청년을 만나, 이 작품을 가운데에 두고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8) 이들은 모두 20대이며, 김정은 정권 이후에 탈북하여 남한에 왔다. 현재 남한에서 대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 필자의 좁은 생각으로는 이들이 자기 삶을 어떻게 꾸려 나가야 하는지 고민이 많을 것이고 ‘탈경계의 자기서사’를 찾는 일에 앞장설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여 대학생들로만 참가자를 모집했다.   그리고 이들에게 개인사를 묻지 않고, 주로 작품 속 상황이나 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가장 먼저 한 질문은 “이 작품이 어떤지 소감을 말해 주세요”였다. 예상했던 대로 탈북 청년들은 비형의 서사에 몰입하고 흥미를 느꼈다. 그리고 비형의 처지에 깊이 공감했다. “ (비형이) 차별받았었는데 나중에는 되게 뭐 누가 막 부적으로 쓸 만큼 되게 훌륭한 사람이 됐다는 게. 그러니까 뭔가 비하받고. 저희가 지금 탈북민이라고 하면 좀 낮게 보고 좀 그렇게 하잖아요.(탈북 청년 1) 일단은 인간이랑 귀신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출세도 못하는 것이 안타깝고. 귀신도 인간인데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살아가는 부분이 마음에 안 들어요. ‘차별’ 그런 것들이 떠올라요.(탈북 청년 3) ”   탈북 청년들은 텍스트에 기술된 내용 그 이상을 상상하며, 자신의 경험을 넣어 비형의 감정과 입장에 공감했다. 그리고 ‘차별’ 문제를 거론했다.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운명 때문에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천대받는 상황에 대해 공감한 것이다.   그리고 연구자는 두 번째 “이 작품에서 특별히 마음에 들었던 것과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 있나요?”라고 질문했다. ‘비형의 성공’에 대하여 참여자들의 반응은 두 갈래로 갈렸다. 비형의 성공을 긍정하는 반응과 그것에 의혹을 품는 반응이었다. 특히 비형의 행보에 의혹을 품는 경우는 ‘길달 처단’에 대한 것이었으며, ‘정말 길달이 잘못한 것일까, 그것을 지켜본 귀신 무리는 동의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구심을 표현했다. 절반 이상이 비형의 성공은 인정하지만 길달을 처단한 행보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했다. “ 그럴 때마다 하는 얘기가 항상 북한 사람들은 다 저래, 그러니까 여기도 분명히 그랬을 거야. (필자: 비형이 나서서 처단을 하는 까닭도 있었지 않았을까?) 그렇죠. 그래야 나머지 사람들이 피해를 안 보니까.(탈북 청년 1) 옛날에 탈북 초창기에는 지원을 엄청 해주었다고 들었어요. 그러니까 (탈북민들이) 일을 안 하고 흥청망청, 그런 모습들을 보이니까 지원을 대폭 줄였어요. 그런 부분에서는 더 열심히 사는 모습을 보여야 나중에 오는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끼칠 것 같은데. 그런데 이 사람(길달)이 잘못했다고 죽일 정도로 잔인하고 냉철하게 보는 것은 안타까워요. 슬플 것 같아요.(탈북 청년 3) 다른 이야기로 풀어 보면 어떤 정착해 있는 국가에 있는데 다른 이민 무리가 들어온 거예요. 그 무리에서 대표 격의 인물이 있었겠죠. 근데 그 사람이 주도하에 기존 세력들하고 잘 맞아서 이해관계가 맞아서 이제 그래서 잘 살기로 했는데 그중에 한 명이 사고를 친 거죠. 그러니까 이 사람들(원주민들)이 해도 되는 건데 굳이 내가(이주민이) 본보기를 보이는 거죠.(탈북 청년 4) ”   탈북 청년들은 탈북민 일부의 행동으로 전체가 오해받는 안타까운 상황들을 들어서 ‘비형-길달-귀신들’의 관계를 해석하기도 했다. 이렇게 이들은 자기 경험을 바탕으로 이들의 관계를 더욱 분석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경계인으로서 그 사회적 관계에 얽혀 있는 복잡한 요인들을 바로 보고, 자신들이 남한 사회에서 탈북민으로 살아가면서 느꼈던 감정과 인식들을 담아 중심 집단과 소수 집단의 관계, 그리고 소수 집단 내의 다양한 입장들을 입체적으로 사유했던 것이다. 나침반 [© 픽사베이]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일곱 명의 탈북민이 저마다 각각 다른 인물에 더 무게를 두고 이 사태를 해석한다는 점이었다. 이들은 (1) 비형의 입장에서, (2) 길달의 입장에서, (3) 귀신 무리의 입장에서 이 사태를 바라보고 자신만의 해석 방식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 해석 방식은 자신의 삶에 대한 서사와 닮아 있었다.   첫째, 비형 입장에 몰입한 탈북 청년은 비형의 성공을 옹호했다. 자신도 스스로 무언가를 이뤄 내면 나중에 이 사회에서 인정받을 수 있겠다며, 이 작품에서 비형이 귀신을 보는 것이 오히려 능력으로 인정받아 성공했다는 이야기가 마음에 든다고 했다. 이 참가자는 자신에 대해서 말할 때 “꼭 성공하고 싶다”는 강한 열망을 내세웠고 로스쿨 입학을 위해 노력하는 중이다. 그리고 자신이 “실수하는 것에 대한 관대함이 없다”고 하고, 그것이 때로는 갈등을 야기한다고도 인정했다. 이렇게 강한 동화의 의지, 성공의 의지가 강한 청년이었다.   둘째, 길달에 공감한 참가자는 길달에 대해 “어차피 본성을 잃지 못했을 거였다”며 ‘여우’로 변한 길달이 본성을 따라간 것으로 해석했다. 그리고 이를 처벌한 비형이 나쁘다며, 혹시 길달을 질투해서 벌인 일일 수도 있다고 추측했다. 길달에 특별한 공감력을 표현한 그는 탈북을 후회하는 참가자이다. 탈북을 후회하면서, 일상생활 속에서 갑자기 눈물을 흘리는 등 괴로워하다가 환각과 불안 증세로 정신 건강 진료를 받은 바 있다. 당장이라도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현실에 괴로워했다. 그래서 누구보다 길달을 옹호하고 비형을 비판하는 반응을 표출했던 것이다. 또한 그는 탈북민 집단 내에서 심한 갈등을 경험한 적이 있는데, 아마도 그의 길달과 비형의 관계에 대한 해석 방식은 자신이 탈북민 집단에서 경험한 불편함과 관련된 듯했다.   마지막으로 가장 많은 참가자가 ‘귀신 무리’에 공감했다. 대표적인 사례를 보면, 한 참가자는 작품에서 중심 집단과 소수 집단의 관계를 눈여겨보며 그 안의 정치적인 문제를 지적하고, 비형의 선택이 “장기적으로는 비형도 위험해질 수 있는 나중에 충분히 자기 발목을 잡을 만한 일”이라고 분석했다. 이는 누구보다 귀신 무리 입장에서 비형의 행보를 평가한 것으로, 비형의 길달 처단 사건이 소수 집단 내 혼란과 갈등을 야기할 것으로 전망했다.   그는 남한 주민과 탈북민 중 특별한 소속감이 부여되는 일을 거부했고, 평범한 삶을 추구하는 성향이었다. 그리고 탈북민들의 남한살이에 대해서 특별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 사실상 탈북민들이 지금 가지고 있는 힘이라는 것 자체가 없잖아요. 굳이 힘이라는 게 필요하지는 않지만. 근데 제가 생각하기에는. 그냥 좀. 그냥 개 개개인이 자기 정착을 잘해서 잘 살면 그것만으로도 하나의 힘이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 지금은 사실 어느 편에 서거나 아니면 자기 의견을 낼 때가 아니라 그냥 조용히 지내면서 밉보이지 않아야 되는 때라고 생각하는데 그냥 그렇게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왜냐하면 지금은 딱히 이용하기 너무 좋잖아. (……) 우리는 가진 힘이 없잖아요. 근데 나중에 우리가 잘 살고 이해관계로 얽혀 있는 사람들이 많으면 (……) 막 무력행사가 아니라 힘이 있다는 모습만이라도 보여 주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으니까 해서 그냥 이제 지금은 좀 조용히 있어야 되는 시기라고 생각하거든요.(‘귀신무리’에 몰입한 탈북 청년) ”   이렇게 그는 점진적인 성장을 소망하고 있었다. 그는 탈북민들의 무리한 동화 추구나 눈에 띄는 일탈의 문제들을 바라보면서, 깊이 있게 사유한 결과로 평범과 인내의 길을 선택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비형-길달-귀신무리’의 입장에 몰입한 탈북 청년들은 각각 다른 삶의 서사를 가지고 있었다. 탈북에서 출발하여 동화와 비동화, 혹은 그 중간 어딘가에 서서 자기 삶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바라보고 있는 상태였다. 어떤 것이 더 좋은 삶의 서사일지 필자 역시 아직은 잘 모르겠다. 3. ‘진짜 나’로 살기 위한 정신적 탐색의 여정들   비형의 이야기로 한참 이야기를 나눈 후, 필자는 작품과 현실 세계를 연결하며 ‘이 사회의 편견과 배제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고 했다. 덧붙여 탈북민과 관련된 사회적 이슈들(정치적 선동 문제나 탈남 현상 등)을 거론하며 탈북민들의 행보에 다양한 의미가 붙는 상황에서, 고등교육을 받고 있는 탈북민으로서 여러분이 어떻게 대처해 나갈 생각인지를 물었다. “ 억지로 쓰는 왕관은 사양합니다.(탈북 청년 4) ”   MZ세대의 성향을 드러낸 답변이 돌아왔다. 자신들이 원하지도 않는 자격과 지위를 부여하며 선도적인 역할을 강요하지 말라는 일침이었다. 개인주의적 특성을 드러낸 것일 수도 있고, 이전 세대를 바라보면서 집단주의의 한계를 직접 체감했기 때문에 집단이 개인에게 부여하는 기대에 거부감을 드러낸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고무적인 점은 ‘남한 출신’인 필자의 눈치를 보지 않고 당당하게 자신의 솔직한 심정을 표현했다는 것이다. 탈북민 전체를 위해서 소수의 일탈은 경계해야 하고 우리가 모범 사례를 만들어 가겠다고 답변을 하고 말았으면 그만이었을 수 있다. 그런데 탈북 청년이 필자의 눈치를 전혀 보지 않고 자신의 소신을 밝혔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참 맞는 말이기도 했다. 필자는 상담자에게 금지된 개인 삶에 대한 개입이었다고 반성했고, 이들의 차가운 답변에 오히려 정신이 바짝 들었다.   탈북 청년들은 진짜 자유롭게 자신들의 생각을 말했다. “ 어차피 여기 있다가 견디기 힘들어서 가는 사람들 뭐 그런 사람들이 욕할 건 못 되죠. (여기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힘든 세상이었고 그냥 나랑 잘 안 맞는 거면 갈 수도 있잖아요. 그리고 굳이 그런 것 때문에 우리가 단체로 욕먹는다고 해서 사실 나한테 직접적으로 와닿는 건 없어요.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어요.(탈북 청년 4) 근데 그 사람이 솔직히 거기서도 경험해 보고 여기서도 많은 걸 경험해 봤잖아요. 경험해 봤음에도 다시 돌아갈 생각을 한 거는 진짜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뭔가 있으니까 넘어갔을 건데. 그 사람에 대해서 그렇게 막 비난하거나 그러는 건 아닌 거 같아요. 북한에서 선전물이 필요했을 수도 있잖아요. 협박을 당했을 수 있고.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이 비난받을 이유는 없어요.(탈북 청년 5) ”   이들의 말은 윗세대들이 만들어 놓은 분단의 벽을 뛰어넘는 인권에 대한 생각, 한쪽으로 쏠린 편협한 정의가 아닌 상황적 특수성을 고려한 윤리적 판단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자기가 살고 싶은 세상은 자신이 선택할 수 있다는 ‘자유’에 대해 이야기했다. 또 탈북 청년들은 남한 주민들의 편견과 차별에 대해서도 감수해야 한다고 했다. 남한 주민들이 굳이 탈북민을 이해해 줘야 하는 의무도 없고, 남한 주민에게 꼭 필요한 일도 아니라면서 그 시선의 변화를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상대의 입장을 고려한 현실적인 판단이었고, 주류 집단의 시선에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는 소신이었다.   또 남한 사회에 동화되지 않는 탈북민에 대해서 ‘존중’해 줘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탈북민들이 여기 왔다고 해서 꼭 여기에 맞춰서 생활하기보다는 자신이 살아왔던 방식대로 살아가면서 남에게 피해만 주지 않으면 된다고 했다. 이렇게 이들은 ‘만들어진 동화 의식’의 문제점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맹목적인 동화 의식은 남한 사회 중심 집단을 향한 의존성을 야기할 수도 있으며 또 그 허상의 빈 곳이 어느 순간 갈등으로 표출될 수 있다는 진실을 알기에 ‘맹목적인 동화’가 정답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 존재에 대한 자부심의 발언도 있었다. “ 가끔씩은 저는 (남한) 친구에게 “너희는 분단된 나라에서 살았지. 난 통일된 나라 양쪽 다 살아 봤다” 이렇게도 이야기해요.(탈북 청년 7) ”   북과 남에서 양쪽에서 살아봤던 자기 경험은 소중하다는 발언이었다. 남한 사회에서 북한 출신자로서 경험한 ‘경계선’을 넘어선 생각이 여기 있었다. 이는 맹목적인 동화나 좌절된 일탈 의식이 아닌, 양쪽 사회를 모두 경험한 특별한 존재로서의 그 특수성을 보유하면서 자기 삶에 대한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고 만족하는 사유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분단 [© 픽사베이]   지난날 우리의 전통 사회에서는 ‘이주’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농경사회의 문화적 관습으로 정착의 삶을 긍정했고, 이주는 불행한 운명으로 평가했다. 이를 떨쳐내고 이주의 생애를 마냥 긍정하기는 쉽지 않다. 특히 탈북민에게 붙은 꼬리표인 이념의 문제, 경제적 난민이라는 프레임 등은 이들이 이주 사건을 더욱 불행하게 여기게 만든다. 그래서 이전 세대는 북한 체제에 대한 비난으로 표출하는 경우가 많았고, 소수 탈북민의 일탈에 대해서도 자신과의 선 긋기를 강조하거나 강한 처벌 의식을 드러내면서 남한 주민을 의식하는 발언을 많이 하는 편이었다. 이들은 분단 구조 속에서 자기 정체성이나 삶의 가치를 온당하게 평가할 수 없었던 상황이었기도 하고, 중심 집단으로의 동화 이외에 다른 길을 상상하기 어려웠을 수 있다.   반면, 탈북을 ‘선택’하는 새로운 세대들은 자기 삶에 대한 행복과 자율성 추구가 우선시되는 집단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남한 사회의 편견과 배제 문제, 이 사회가 나를 경계 밖으로 밀어내는 상황에서 나는 어떤 존재로 살아갈 것인가로 더욱 복합적인 사유를 할 수밖에 없다. 맹목적인 동화가 행복을 보장하지 않을 것이라는 현실적 판단이나 경계 안팎으로만 자신을 한정하지 않는다는 자율적 의지, 그리고 탈북민 내에서도 다양한 삶의 방식이 존재하며 모두 존중되어야 한다는 사유가 가능했던 까닭도 탈북을 ‘선택’할 수 있는 이들의 특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제 인간 사회에서 ‘이주’는 불행의 원인이 아니라, 행복하고 능동적인 삶의 조건으로 부상했다. 이주를 선택한 새로운 세대는 정체성을 고정된 실체로 보지 않고, 여건과 환경에 따라 선택하는 전략으로 활용하고 있다. 탈북 청년들도 특정 가치에 매달리지 않고 자기 삶에 기능적인 정체성을 선택하여, 자신의 진짜 인생 이야기를 만들어 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다만 그 길이 외롭고 힘들어도 무너지지 않도록 응원하는 것이 필자가 할 수 있는 작은 일이다. 각주 1) 북의 민간에서 운영하는 시장을 말하는데, 고난의 행군 시기에 배급제가 붕괴되면서 북한 주민들이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 형성된 민간 시장이다. 돈주(자본가)의 팽창, 밀수업 증가 등 문제를 낳았기도 했지만 최근까지 북한 주민들이 생계를 유지할 유일한 길로 알려져 있다. 2) 강원철, 「북한 장마당 세대의 통일의식 변화에 관한 연구」, 고려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2016. 3) 김성경, 「북한 청년의 세대적 ‘마음’과 문화적 실천: 북한 ‘사이(in-between) 세대’의 혼종적 정체성」, 《통일연구》 19, 2015, 5-39쪽. 4) 김정은은 2021년 4월 노동당 제6차 세포비서 대회에서 “지금 새세대들의 사상‧정신 상태에 심각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오늘날 청년 교양 문제는 당과 혁명, 조국과 인민의 사활이 걸린 문제로 더는 수수방관할 수 없는 문제”이며 “지금 청년 세대가 고난의 행군 시기에 자라다 보니 사회주의 우월성에 대한 경험과 표상이 부족해” “잘못된 인식”을 가지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리고 갖가지 청년 교육 정책이 나타났다(강동완‧유판덕, 「북한 일용품 포장지를 통해서 본 북한 사회: 개별 일용품 특징과 정치, 경제, 사회적 함의를 중심으로」, 《통일문제연구》 34(1), 2022, 41-71쪽). 5) 이 사회 계층 제도는 사람을 3대 계층과 56계 부류로 분류하며 별도의 25개 성분으로 구분한다. 『2022년 북한인권백서』에 따르면, 사람을 ‘출생 당시 경제적 조건, 가정의 계급적 토대, 본인의 사회정치적 생활 경위, 역사 발전의 특수성과 계급관계’ 등의 조건을 따라 계급을 분류한다(통일연구원, 『2022 북한인권백서』, 통일연구원, 2023). 6) 박일용, 「한국 고전문학에 나타난 인귀교환(人鬼交驩): 「도화녀 비형랑(桃花女 鼻荊郞)」의 정치·신화적(政治·神話的) 함의를 중심으로」, 《일본학연구》 50, 2017, 79쪽. 7) 여기에서 ‘경계’ 혹은 ‘탈경계’라는 용어는 윤보영의 연구를 참조하여 적용했다. 그는 경계인(marginal man) 개념을 사용하여 탈북민이 남한에서 경험하는 사회화의 의미를 해석하고, “두 문화가 자신에게 강요하는 규범을 벗어나 자신만의 기준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탈경계’ 의미를 제시한 바 있다(윤보영, 「경계인 이론을 통한 남한 정착 북한이탈주민 이해에 관한 연구」, 《사회과학연구》 22(3), 2015, 187-216쪽; 윤보영, 「경계/탈경계의 단계별 유형화를 위한 시도: 자율적 삶을 추구하는 북한이탈주민에 대한 사례연구」, 《북한연구학회보》 20(2), 2016, 63-92쪽). 8) 지금부터 소개하는 문학치료 내용은 이미 학술 논문으로 발표한 바 있다(박재인, 「『삼국유사』 「비형 이야기」를 통해 본 탈북 청년들의 (탈)경계인으로서 자기서사」, 《문학치료연구》 63, 2022, 103-147쪽).

'탈북인' 이야기가 아닌 '삶'의 이야기

이상숙 한국

소설 『로기완을 만났다』와 영화 〈로기완〉 1. 삶에 대하여   조해진의 소설 『로기완을 만났다』1)는 방송작가 김이 탈북인 로기완을 찾아 브뤼셀로 떠나는 것으로 시작된다. 김 작가는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의 사연을 방송으로 내보내고 시청자들의 성금으로 그들을 돕는 프로그램에서 작가로 일하고 있다. 우연히 본 시사 잡지에는 “벨기에에서 유령처럼 떠도는 탈북인” 두 명의 이야기가 있었고 그중 한 명인 ‘이니셜 L’이 로기완이었다. 신경섬유종을 앓는 소녀 윤주의 사연을 기획하고 있던 김 작가와 제작진은 방송 시기에 맞춰 수술을 늦추는 결정을 한다. 온 가족이 함께 모이는 명절에 방송하는 것이 시청률도 높고 성금도 많이 들어올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어려운 상황에도 늘 밝은 모습으로 김 작가를 따르는 윤주를 위한 선의의 결정이었지만 수술이 지연된 사이 윤주의 종양은 악화되었고 윤주가 받아야 할 수술은 한쪽 귀를 잃을 수도 있는 위험한 수술이 되어 버렸다. 이 충격에 김 작가는 도망치듯 한국을 떠나 브뤼셀로 온다. 손끝에 이유 없이 불편하게 남아 있던 로기완의 한 문장이 자신을 그곳으로 이끌었다고 김 작가는 생각한다. 여권은커녕 명함이나 주소 등 자신을 증명할 그 어떤 기록도 없이 브뤼셀에 도착한 탈북인 로기완처럼 그의 행적을 따라가는 김 작가 역시 외롭고 막막했고 고통스러웠다. 난민 단체에서 일하는 전직 의사 박은 김 작가에게 3년 전 로기완의 일기를 건네준다. 로기완의 일기에 적힌 로기완의 행적을 짚어 가며 이니셜 L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 조해진 『로기완을 만났다』   로기완은 1987년 5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함경북도 온성군 세선리 제7작업반에서 태어났다. 로가 다섯 살 때 그의 아버지는 탄광에서 죽었고 유일한 가족이었던 어머니와 함께 북한을 탈출하여 연길에서 숨어 지냈다. 성인 남자 로기완은 중국 공안의 눈에 띄어 송환될 수도 있어 집에서 숨어 지내야 했고 어머니는 밖에 나가 온갖 일을 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그러다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어머니가 죽었다. 로기완은 어머니의 장례도 제대로 치르지 못하고 오히려 그 시신을 병원에 넘긴 돈을 받아 들고 연길을 떠나 북한 이탈 주민에게 난민의 지위를 인정하는 벨기에로 왔다. 그리고 공항에서 헤어진 브로커의 말 한마디에 의지해 ‘국제기구가 많아 함부로 사람을 잡아가지 않을 곳, 여러 곳에서 온 난민이 많아 난민심사를 받을 수 있는 곳’ 브뤼셀로 왔다.   인민학교 시절 북한에 닥친 소위 ‘고난의 행군’ 시절에 겪은 기아와 자연재해, 탈북 후 송환의 두려움에 떨며 숨어 지내는 생활, 어머니의 시신을 넘기고 받은 돈으로 살아야 하는 상황, 난민 지위를 얻기 위해 자신의 고향과 조국이 얼마나 참혹한 곳이었는지를 설명하고 불행한 운명의 격랑을 헤치고 어떻게 이곳까지 왔는지를 증명해야 하는 시간, 잘 곳 없이 떠돌다 공원 벤치에 쓰러진 브뤼셀 생활까지. 로기완이 겪은 고통은 탈북인이 아니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 소설은 북한의 참상과 탈북 과정에서 그들이 겪은 참혹함에 초점을 두지 않는다. 김 작가가 탈북인 로기완의 행적을 따라가고 있지만 김 작가를 이끈 것은 로기완의 고통스러운 ‘탈북기(脫北記)’가 아닌 그의 말 “어머니는 저 때문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살아야 했습니다”(124쪽)였다. 김 작가가 따라간 것은, 3년 전 겨울 브뤼셀에서 보낸 로기완의 살기 힘든 고통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럼에도, 그래서’ ‘살아야 하는’ 삶의 이야기였다. 2. 미안함에 대하여   김 작가는 윤주에 대한 미안함과 죄책감을 견디지 못하고 홀연히 떠나왔다. 윤주의 얼굴도 목소리도 보고 들을 자신이 없었고 윤주의 힘든 시간을 지켜볼 용기도 나지 않았으며 힘든 수술 과정에 함께 있어 줄 힘도 없었다. 윤주와 보낸 따뜻한 시간, 윤주를 도울 수 있다는 뿌듯함은 사라지고 후회와 자책만이 남았다. 자신을 갉아먹는 후회와 자책에 갈피를 잡지 못하고 휘청이던 김 작가는 같이 방송을 제작하던 피디이자 연인인 재이와의 관계도 어그러뜨리며 “로기완에 대한 글을 쓰겠다”며 도망치듯 한국을 떠나왔다. ‘나 때문에 윤주의 삶은 더 불행해졌다’는 사실을 직면할 수도 그것을 해결할 수도 없었기에 그저 떠나온 것 같지만 사실 몇 년 전 ‘불편하게 김 작가의 손끝에 남아 있던’ 로기완의 “어머니는 저 때문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살아야 했습니다”라는 말이 김 작가를 이끌었던 것이다. 로기완의 일기를 넘기며 그의 시간을 따라가고 있지만 그 과정에서 김 작가는 탈북인 로기완의 고통스러운 삶이 아니라 ‘그래도, 그럼에도, 그래서 살아야 하는’ 도저한 삶의 모습을 찾고 싶었을 것이다.   어머니의 목숨값으로 받은 돈이 떨어지자 로기완은 노숙자로 떠돌다 공원에서 쓰러진다. 로기완을 발견한 경찰은 그를 고아원으로 데리고 간다. ‘고난의 행군기’ 못 먹고 자란 그는 성인임에도 어린애같이 작았기 때문이다. 한동안 고아원에서 힘들었지만 로기완은 누구보다 부지런하고 성실한 모습으로 ‘그래서, 그래도 살아야 하는 삶’을 살았다. 오랜 도전 끝에 난민 지위도 받고 임시 숙소에, 임시 일자리나마 얻으며 안정된 생활을 했고 마음을 나누는 여자 친구 라이카도 만나게 된다. 불법체류자였던 라이카를 영국으로 보내고 자신도 어렵게 얻은 난민 지위를 포기하면서까지 라이카를 만나러 영국으로 떠난다. 로기완의 일기가 끝날 무렵 김 작가는 드디어 윤주에게 전화를 건다. 매일 밤 윤주에 대한 미안함으로 괴로워하면서도 도저히 전화를 걸 수 없었지만 로기완의 힘겨운 삶을 함께 되짚어 온 김 작가는 이제 ‘그래도, 그래서 살아야 하는 삶’을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늦어진 수술로 잃어버린 윤주의 오른쪽 귀는 매일 밤 김 작가에게 찾아와 가슴을 파고들었지만 윤주와 나눈 짧은 통화는 김 작가에게 이제는 돌아가 윤주와 함께 살아갈 힘을 준다. “ 침묵이 흐른다.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바로 그 순간이다. 미, 안, 해. 미, 안, 해. 들은 걸까. 언니. 그 애가 나를 부른다. 그리고 이어진, 그 애의 목소리. 그 목소리가 실어다 준 여린 문장 하나를 듣는 순간 나는 스르르 주저앉고 만다. 윤주가 들려준 그 문장 역시 즉흥적인 것은 아닐 것이다. 오랫동안 그 애도 나처럼 그 문장을 입안에 숨겨 두고 틈틈이 꺼내어 연습해 오지 않았을까. (……) 윤주가 흐느끼기 시작한다. 괜찮아, 윤주야, 나는 정말 괜찮아. 시간은 느리게 흘러가고 있다. 너의 오른쪽 귀는 내가 영원히 안전하게 보관하고 있을게. 그 귀가 끝내 하지 못한 말, 그 말을 듣기 위해 나는 살아갈 터이다. 그러나 윤주야, 너는 이제 네 앞의 괴물과는 싸우지 마. 그건 승패가 없는, 이겨도 진 것과 같은 소모적인 게임일 뿐일 테니.2) ”   어린 윤주는 김 작가에게 “잘 지내요, 언니?”라고 먼저 묻는다. 그리고 미안함에 먹먹해하는 김 작가에게 “충분하다”고 말해 준다. 김 작가의 진심을 알고 있으니 괜찮다고, 충분히 미안해했으니 괜찮다고 그리고 나는 여전히 김 작가를 ‘언니’로 생각하고 있다고. 윤주는 “여전히 나를 외롭지 않게 하는, 내 혼란과 불안이 모두 이해되고 있다는 환상을 심어주”었고 김 작가는 이에 위안을 받는다. 서로에게 미안함으로 괴로워했지만 여전히 서로 사랑하고 있음을 알고 위안받는 두 사람. 그 위안은 삶의 의지로 이어진다. 김 작가는 윤주에게 “런던에서 그 사람을 만나고 나면 곧바로 서울로 돌아가겠다고, 이번엔 늦지 않겠다고, 너무 늦어버려서 네가 나를 필요로 할 때 또 그렇게 외면하며 지나가버리는 일은 없도록 하겠”노라고 빠르게 말한다. “미, 안, 해.”에서 시작된 일이다.   우리는 생활에서 “미안”이라고 자주 말하지만 “미, 안, 해.”라는 말은 그리 쉽게 나오는 것이 아니다. 오랜 시간 자책과 후회 속에 허우적대다 겨우겨우 꺼내는 힘겨운 용기이다. 생각해 보면 그것은 꽤 여러 겹의 감정이 섞인 말이다. ‘내가 잘못한 것을 알고 있다, 후회한다, 앞으로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나의 잘못으로 네가 힘들었다는 것을 내가 알고 있다. 너의 고통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그에 공감한다, 너의 고통에 나의 마음이 아프다, 네가 아프니 나도 아프다, 너와 내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너와 내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사랑한다.’ 미안한 마음이 크다는 것은 그래서 괴로웠다는 것은 그만큼 사랑한다는 뜻이다. 사랑했기에 미안한 것이고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은 그 사랑을 고백하는 것이며 사랑을 고백했기에 그들은 다시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3. 사랑에 대하여   3년 전 로기완의 난민 신청을 도왔던 박은 로기완의 흔적을 찾아온 김 작가에게 자신의 아파트를 내주는 호의를 베푼다. 그는 프랑스에서 의사 생활을 하다 은퇴해 이제는 브뤼셀에서 난민 단체에서 봉사자로 일하고 있다. 로기완처럼 탈북인인 그는 난민을 신청한 사람이 진짜 북한 주민인지를 판별하는 일을 한다. 로기완도 그렇게 만났다. 탈북 후 어머니를 잃은 로기완처럼 박도 탈북 후 어머니를 잃었고 아내를 만나 결혼한 후 온갖 고생 끝에 의사가 되었다. 아내가 죽은 후 그는 의사를 그만두었다. 로기완에게서 젊었을 적 자신의 모습을 본 것인지 박은 로기완이 난민 지위를 얻을 수 있도록 힘껏 도왔고 로기완은 그에게 자신의 일기를 맡길 정도로 둘은 친한 사이가 되었다.   박은 김 작가도 돕는다. 로기완 찾기에 진심으로 몰두하는 김 작가에게 자신이 가지고 있던 로기완의 일기를 건네고 김 작가가 괴로움에 빠져 허우적대는 모습을 조용히 지켜본다. 윤주와의 통화를 마치고 환한 얼굴이 된 김 작가에게 위로의 말을 건넨다. “때로는 미안한 마음만으로도 한 생애는 잘 마무리됩니다.”(180쪽) 박은 이미 김 작가의 고통을 알고 있었고 그 고통이 자신이 겪는 고통과 다르지 않은 ‘미안함’에서 나온 것임도 알고 있었다. 말기 암으로 고통받는 아내를 보다 못해 아내의 요청대로 안락사를 도운 자신도 그 미안함과 자책에서 벗어 나오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아내는 늘 자신에게 한 치의 관용도 없이 엄격했다. 그래서 존엄한 생의 마무리를 원하는 아내의 요청을 거부할 수 없었고 그런 아내의 안락사를 돕는 행동은 아내에 대한 크나큰 사랑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를 알면서도 그는 여전히 고통스러웠다. 아내의 마지막이 어땠는지 아프지는 않았는지 평화로웠는지 들은 바 없고 지금도 여전히 그때를 상상할 힘도 용기도 없었기 때문이다. 미안한 마음이 한 생애를 마무리하고 위로할 수 있다는 말은 김 작가만을 향한 말은 아니다.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 “하긴, 내가 이미 말한 적이 있지요. 김 작가나 그 사람이나 스스로에게 한 치의 관용도 베풀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말이오” “그러셨죠” “그러고 보니…….” “…….” “닮았군요, 눈매도, 입매도, 여기저기, 아주 조금씩, 사실…… 그 사람도 글을 쓰고 싶어했지. 늘 작가가 되고 싶다고 했어.” “…….” 내 어깨에 닿았던 박의 팔이 스르르 내려온다. 잘못 본 것일까. 박의 눈동자에 습기가 어렸다고 생각한 순간, 박은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내게 다가와 예상치 못한 간절한 목소리로 말한다. “부탁을 하나…… 들어주겠소?” “말씀하세요.” “생각보다 괜찮았다고, 그리 고통스럽지 않았다고 한번, 말해주겠소?” (……) 박은 심하게 떨리던 두 손으로 내 얼굴을 감싼다. 뜨거운 손이었다. 마치 자신이 완성한 조각품을 만져보는 예술가처럼, 혹은 지금 막 떠나온 육체를 애틋하게 지켜보는 한 줌의 영혼처럼 박은 천천히 내 얼굴을 정성스럽게 매만지기 시작한다. 눈가와 입가, 그리고 턱선과 양쪽 뺨을 어루만지는 그의 손길에서 나는 한 생애를 느낀다. 한 사람의 인생이 그 손길에 모두 들어 있다. “……고생했소. 평생을 고생이 많았지.” 박의 그 말에,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나는 두 팔을 벌려 박을 안는다.3) ”   박은 자신과 닮은 로기완과 아내와 닮은 김 작가를 도왔다. 그리고 자신을 스스로 도왔다. 김 작가를 통해 아내의 마지막 모습이 고통 없이 자연스러웠으며 평화로웠음을 믿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래도, 그래서의 삶’을 살아갈 것이다. 이 소설은 탈북인 로기완의 이야기가 아니라 미안함과 삶 그리고 사랑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박은 김 작가에게 영국에 있는 로기완의 주소를 알려 준다. 김 작가는 영국으로 건너가 작은 식당에서 일하며 라이카와 행복하게 살아가는 로기완을 만난다. 로기완에게 일기를 돌려주고 박이 언젠가는 로기완을 찾아올 것이라는 말을 전해 준다. 이렇게 서로 닮은 세 명은 만나고 이어지고 연결된다. 4. 영화 〈로기완〉 ▲ 넷플릭스 영화 「로기완」 © 넷플릭스   소설 『로기완을 만났다』가 출간된 지 13년이 지난 2024년 영화 〈로기완〉이 넷플릭스 오리지널 콘텐츠로 공개되었다.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으며 주인공의 이름 또한 로기완이지만 영화는 많은 부분이 각색되어 있었다. 영화의 등장인물에는 김 작가도 없고 박도 없다. 소설에서 가져온 것은 ‘탈북인 로기완이 브뤼셀에서 삶을 살아내고 사랑하는 이를 만나 새로운 삶을 위해 떠난다는 것’ 정도이다. 소설이 영화로 이동할 때 많은 부분 달라지는 것은 장르 문법상 당연하다. 소설은, 김 작가가 로기완의 이야기를 좇아 브뤼셀에 왔고 그곳에서 로와 박, 자신의 이야기를 찾아가는 액자 구성으로 관찰자와 상상하는 전지적 작가 시점을 넘나들지만, 영화 〈로기완〉은 로기완과 마리의 사랑에 초점을 두고 있으며 화자이자 관찰자는 카메라일 뿐이다.   로기완이 탈북자이고 난민 지위를 얻어 정착할 곳을 찾아 브뤼셀에 온 설정은 소설과 같고 마리가 로기완의 지갑을 훔치며 둘이 만나게 되는 것은 온전히 영화의 설정이다. 영화에서 마리가 “그것이 우리 어머니 목숨값이다”라는 로기완의 말에 갑자기 사랑에 빠지고 태도가 달라지는 것은 조금 부자연스러워 보이기도 한다. 그래도 이해가 전혀 안 되는 것은 아니다. 마리는 사격 선수였지만 어머니의 안락사를 아버지가 도왔다는 것을 안 이후 사격 도박과 마약에 빠져 방탕하게 살고 있었다. 어머니의 안락사를 도운 아버지를 용서하지 못하고 반항하지만 사실은 어머니의 간병에 지쳐 고통에 눈감고 싶었던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고 미워하고 있었다. 때문에 어머니의 죽음에 크게 반응한 것이다. 자신과 화해하지 못하고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는 마리는 로기완이 보여 준 삶의 의지에 감동하여 자신도 정상적으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마리는 로기완에게 훔친 돈을 돌려주기 위해 위험한 도박에 참여하고 그곳에서 빠져나와 로기완에게 돌아오려 하지만 조직은 그런 마리를 추적한다. 소설에는 없는 내용이다. 영화에는 장면을 채울 볼거리와 풍부한 에피소드, 스토리를 가진 등장인물들이 필요하다. 인물 간의 갈등과 긴장을 위한 자극적 설정은 상업 영화의 필수 요소이기도 하다.   소설이 김 작가의 시선을 통해 세 사람이 만나고 연결되고 ‘그래도, 그래서 살아가는 삶’을 보여 주었다면 영화는 탈북인 로기완과 마리의 사랑을 더 부각한다. ‘네가 훔친 돈이 어머니의 목숨값’이라는 말에 마리는 로기완에게 돈을 돌려줄 생각을 한다. 마리의 마음속에 있던 어머니에 대한 미안함과 자책감 때문이다. 서로 사랑하게 된 두 사람은 잠시 행복한 시간을 보내지만 그 평화와 행복은 길지 않았다. 곤경에 처한 마리를 구하기 위해 로기완은 어렵게 마련된 난민 심사장을 떠나 마리를 구해낸다. 마리를 비행기에 태워 보내며 둘은 평소 꿈꿔 오던 마다가스카르에서 만나자고 약속한다. 한참 후 힘들게 얻은 난민 지위를 버리고 로기완은 마다가스카르로 가 마리를 만나며 영화는 끝난다.   소설의 중심축이었던 미안함과 생의 의지는 축소되고 둘의 사랑이 부각되며 영화가 끝나는 것이다. 관객들은 “탈북인으로 갖은 고생을 하여 얻은 난민의 지위를 로기완이 너무 쉽게 포기하는 것 같다”, “어려운 상황에서 사랑이라니 뜬금없다”라는 반응도 보였다. 특히 소설을 읽고 영화를 본 사람들은 ‘사랑이 로기완 이야기의 핵심이 아닌데’ 하는 아쉬움을 표할 수도 있다. 소설보다는 영화에서 탈북 후 로기완의 힘든 상황이 더 자세히 더 자극적으로 그려지기는 했지만, 영화 역시 탈북인의 고난 서사가 주제는 아니다. 로기완은 자신의 고향과 조국을 떠나 뿌리뽑힌 자, 불행한 과거 외에는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것이 없는 자이다. 어렵게 받은 난민 지위는 벨기에를 떠나면 사라지는데 그것을 포기하고 소설에서는 여자 친구 라이카를 따라 영국으로 가서 불법체류자로 살아가는 것을 선택하고 영화에서는 마리를 만나러 마다가스카르로 간다. 사랑을 선택한 것이다. 고난의 아이콘 탈북인 로기완에게 사랑은 비현실적이고 뜬금없고 개연성 없는 선택인가?   그렇지 않다. 인간은 무엇으로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가. 여권, 주민등록, 난민 체류 허가서인가? 이 중 로기완이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가 북한을 떠날 때 그를 증명할 서류는 모두 버렸다. 그럼 로기완은 존재하지 않는 사람인가?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그야말로 뿌리 뽑힌 자인가? 그러나 로기완은 존재하는 사람이며 누구보다 살아야 하는 이유가 분명한 사람이다. 서로를 증명할 유일한 혈육인 어머니는 없지만 어머니가 남긴 말과 어머니가 남긴 돈은 그를 살아가게 하는 기회이자 이유이다. 어머니의 사랑, 어머니에 대한 사랑, 어머니에 대한 미안함은 로기완을 살아 있는 사람으로 존재하게 했다. 살아 있다는 것, 살고자 하는 의지야말로 가장 명료한 살아 있음의 증명이다. 김 작가가 윤주를 걱정하고 미안해하는 마음, 김 작가를 위로하고 다독이는 윤주의 밝은 마음, 아내를 존엄하게 지켜주었던 박의 선택, 그럼에도 괴로워하는 박의 마음, 난민 지위를 포기하면서까지 라이카를 따라간 소설 속 로기완, 마리를 구하기 위해 난민 심사장을 박차고 나간 영화 속 로기완, 마리를 만나기 위해 또 자신을 증명해 준 벨기에를 떠나는 영화 속 로기완. 이들은 선택에는 모두 사랑이 있었다. 사랑하는 이들이 있고 그들과 함께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뿌리내림이며 존재 증명이기 때문이다. “ 로기완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덥석 내 손을 잡아준다. 체온이 있는, 진짜 두 손으로. 그 손이 이끄는 대로 나는 식당 안으로 들어선다. 홀 안쪽에서 앳된 인상의 여자가 삐죽 고개를 내밀더니 금세 달려와 나를 빈 테이블로 안내한다. 라이카는 차를 준비하러 다시 주방으로 들어갔고 지금 내 앞에는 로기완이 앉아 있다. 살아있고, 살아야 하며, 결국엔 살아남게 될 하나의 고유한 인생, 절대적인 존재, 숨 쉬는 사람. 오늘 나는 그에게, 이니셜 K에 대해 해줄 이야기가 아주 많다.4) ”   난민증도 여권도 없지만 로기완은 체온이 있는 두 손을 가진 진짜 사람이고 라이카와 함께 있어 행복한 사람이다. 내 앞에 앉아 있고 살아 있고 살아야 하며 결국에는 살아남을 사람이며 그것이 절대적인 존재, 숨 쉬는 사람, 자신만의 인생을 사는 사람이다. 이를 확인한 김 작가는 이제 이니셜 L에 대한 이야기를 마칠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의 이야기인 ‘이니셜 K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독자들은 지금까지 이니셜 L의 이야기를 들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이니셜 K, 이니셜 P에 대한 이야기를 함께 들었다. 이들의 이야기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 소설의 마지막 문장 “오늘 나는 그에게, 이니셜 K에 대해 해줄 이야기가 아주 많다”는 이 소설의 첫 문장 “처음에 그는, 그저 이니셜 L에 지나지 않았다”와 이어진다. 마치 뫼비우스의 띠와 같다. 이렇게 끝난 이야기가 소설로 쓰였고 우리는 방금 그 소설을 다 읽은 것이다. 그것은 탈북인의 고난의 서사가 아닌 사랑으로 살아가는 사람의 삶의 이야기였다. 각주 1) 조해진, 『로기완을 만났다』, 창비, 2011. 2) 같은 책, 181쪽. 3) 같은 책, 187쪽. 4) 같은 책, 194쪽.

박탈된 존엄과 추방당한 정체성

조춘희 한국

탈북시를 사유하는 한 방식 1. 유령: ‘로기완들’은 안녕하신지요?   벌써 십여 년 전, 조해진의 소설에서 ‘처음’ 만난 ‘로기완’은 낯설었다. 실제 인물이 아님에도 그가, 브뤼셀을 떠나 영국 어딘가에 라이카와 살고 있을 것만 같은 기이한 믿음이 생겼으며, 또는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고 간절하게 바랐었다. 살다가 문득 그리워지는 유년기의 벗처럼, 혹은 기억 너머에 두고 온 아득한 추억의 편린처럼 그의 안부가 궁금해지고는 했다. 때로는 그가 이국의 고아원 구석진 자리에 혼자 쪼그리고 앉아 마른 울음으로 통곡하고 있을 것만 같은 환상에 시달리기도 했다. 이처럼 소설에서 만난 그를, 이후에도 상념과 환영으로 종종 불러냈다. 소설 속 김 작가가 그러했듯이, “처음에 그는, 그저 이니셜 L에 지나지 않았다.”1) 그러나 이방인의 감수성에 공감하기 위해 애쓰는 김 작가의 여정에 동행하면서 로기완은 소설 밖으로 나와 실재가 되었다. 로기완을 만나고 몇 해가 지난 후, ‘백이무’의 시를 만났다.2) 현실 어딘가에 실존하는 백이무 시인의 존재는 소설 속 로기완의 좌표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허구적 인물로서의 로기완과 실존하는 시인의 좌표가 중첩된다는 사실은 비극이다. 자신의 정체와 그 실존함을 밝힐 수 없는 존재라는 데서 백이무는, 로기완이 된다. 허구적 인물이지만 실재할 것이라는 믿음이, 반대로 실재하지만 자기 은폐가 불가피한 존재의 허구적 인물-되기에 동조하게 했다. 이런 이유로 오랜 시간 로기완과 백이무는 필자의 세계에서 동의어로 인식되어 왔다. 이들 존재가 좌정한 비-존재적 좌표는 비국민이자 무국적자로서의 위태로운 정체성을 증거하며, 국적성으로 무장한 국민 내부자로서는 이들과 끝끝내 공감 불능의 좌표에 대치해 있음을 재독케 했다.   “그저 이니셜 L에 지나지 않”는, 개별적 존엄성과 이름이라는 정체성이 박탈된 그들을 우리는 손쉽게 ‘탈북민(북한이탈주민)’이라는 집단성으로 규정해 왔다. 이들 탈북민은 실체가 모호한 존재, 혹은 스스로 유령화-되기를 선택한 비존재들로 호명된다. 북한의 실상에 대해 모르지 않지만, 그렇다고 ‘제대로’ 알고 있다고 자신할 수도 없다. 북한 사회에 대한 보도나 재현은 정치 담론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으며, 게다가 그곳 주민들의 존재적 고유성이나 삶의 개성은 소거된 채 전파되는 탓에 추상적 이해에 그친다. 상황이 이러하니 혹여 탈북민의 고통에 공감한다고 말한다면 이는 교만이요, 오만의 소지가 있다. 솔직히 오늘을 살아가는 국적성 내부의 우리는 탈북민뿐 아니라 무수한 타자들에 무관심하다. 그러니 탈북민에 대한 공감은, 우리 사회에 만연한 무관심과 더불어 특정 집단에의 차별과 혐오를 뚫어 내야 한다는 점에서 불가능에 가깝다.   주지하다시피 오늘의 세계 질서는 초국적 이동성을 보장한다. 그럼에도 햇수로 분단 80년이 된 남북은 여전히 이념의 벽을 높이고 있다. 지척에 있어도 갈 수 없는 영토라는 표상은 남북의 고립과 대립을 강화할 뿐이다. 단절의 시간이 길었던 만큼 공동의 역사를 기억할 경험적 주체, 즉 분단과 한국전쟁으로 인한 이산을 경험한 세대가 모두 사라지고 나면 단절의 감각마저 통각되지 않을 공산이 크다. 안타깝게도 통약불가능한 좌표에 팽팽하게 대치한 채 긴장감이 고조된 상태에서는 지속가능한 어떤 유의미한 교류를 기대하기 어렵다. 그렇기에 더욱 로기완‘들’이나 백이무‘들’을 환기하는 상상적 소통이나마 절실하다. 물론 개별성이 삭제된 채 탈북민이라는 집단성으로 호명되는 한계가 있지만, 이들이 처한 난민적 정체성을 사유함으로써 공감의 단초를 마련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이때 “냉전의 산물인 동시에 북한 전체주의의 현재를 증험”3) 하는 탈북민이라는 좌표는 존엄한 개인을 소거하고 이들을 경계해야 할 위험한 집단으로 규정한다는 점에서 극복해야 할 정체성의 요건으로 수렴된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탈북시4)를 탐사하는 일은 이들을 다시 개별적 고유성으로 발견하는 작업과 닿아 있다. 탈북의 감수성을 형상하는 탈북민의 경험적 시편은 시적인 것의 발화이자 증언이다. 즉 이들의 목소리는 북한의 실상을 고발하는 언어인 동시에 탈북민의 정체성을 재구축하는 데 입각한다. 재북과 탈북 경험을 발화하는 탈북 작가들의 시를 통해 유령으로 떠도는 로기완과 백이무들의 안부를 묻고자 한다. 도처의 당신들, 안녕하신지요? 2. 박탈: 존엄성이 거세된 영토   분단국가에서 태어난 우리에게 북한은 금기의 장소로 규정된다. 반공과 통일 담론을 동시에 학습-당한 세대에게 북한은 명확한 실체이기보다 독재 체제가 표상하는 상상적 공포로 인식되어 왔다. 가령 반공 담론의 세뇌는 북한 주민을 괴물의 형상으로 상상하게 했으며, 이들을 향한 적대화는 공포를 조장하고 이를 기반으로 폭력적 혐오를 심화했다. 돌이켜보면 소련의 해체(1991)와 동구권의 몰락, 그리고 김일성의 죽음(1994)으로 이어지는 1990년대 초반에는 이러한 공포와 통일에 대한 기대가 공존했었다. 강력한 반공 이데올로기와 통일의 필연성이 공생했던 모순의 시대를 지나는 동안 남한은 경제성장을 기반으로 자유민주주의와 자본 체제를 강화했으며, 북한은 김정일 세습으로 정권 안정을 꾀했지만 동구권 사회주의의 몰락으로 세계적 고립이 심화되었고 이로 인한 경제난과 자연재해가 중첩되었다. 오늘날 북한 사회에 대한 주요 이미지는 소위 고난의 행군기(1994-1999)라 불리는 당시의 기아와 아사 실태에서 조형되었다고 볼 수 있다.    “ 밧줄을 감을 자리가 있었더냐/ 아가의 빼빼 마른 몸에/ 수갑이 채워지더냐/ 거밋발같이 가느다란 두 손목에// 열한 살이라고는 하지만/ 너의 키는 일곱 살에 머물러 있었고/ 너의 몸은 살이 없어/ 삭정이처럼 바삭이 말라있었다// 한줌같은 너의 작은 몸을/ 구렁이같은 밧줄로 휘감고/ 총탄을 박아넣은 원수들아// 그 자들은 네가/ 살인을 했다고만 믿는다/ 그 자들은 모른다/ 굶어 죽어가는 자의 정신이/ 과연 어떤지/ 네가 왜 그 짓을 했는지// 그 자들은 먼저 굶어죽은/ 너의 부모동생 생각해본 적 없다/ 배고픔에 시달려 11년을 살아온/ 너의 분노 헤아려 본 적 없다// 고작 11년을 살아오는 동안/ 가난이 고문한 혹독한 굶주림/ 그것의 몸부림 때문에 더는 더는 달랠 길이 없어/ 끝내 너의 뇌는 정신을 잃어버렸다// 굶음으로/ 죽음으로/ 끝내 부서져버린 아가야/ 이렇게밖에 살지 못할 명(命)/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한(恨)이라도 남기지 않을 걸/ 너의 죄는 그 땅에 태어난 죄다 ―김수진, 「어린 사형수야」 전문5) ”   굶주림과 아사, 그리고 그로 인한 참담한 비극에 대한 탈북 작가들의 기록은 전술한 1990년대 중후반의 경험에서 기인하며, 이들 시편은 탈북시의 주제 유형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열한 살이”지만 고작 “일곱 살” 정도로 보이는 육체를 통해 “어린 사형수”의 “살인”이 “그 땅에 태어난 죄”로 인한 “혹독한 굶주림”의 결과임을 알 수 있다. 스무 살 로기완이 “159쎈티미터의 단신, 47킬로그램의 마른 몸”6) 탓에 어린아이로 오인해 고아원으로 보내졌듯이, 또한 동생의 “키는 158센티미터, 몸무게는 36키로그램의 강영실(영양실조)”7) 이었다는 이가연 시인의 회고에서도, 굶주림은 이들의 육체적‧“정신”적 발육 부진을 초래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이때 김수진의 시적 발화 방식이나 주제 유형은 백이무의 시와 많은 부분 유사하다. 특히 부언을 부기함으로써 시의 목적을 “증언이나 고발의 르포르타주의 좌표”8) 에 위치시킨다. 알다시피 이를 통해 사건의 사실성과 진실성을 강화하고 북한의 실태와 그 참상을 전 세계에 알리는 데 복무한다.   김수진은 시 「꽃 같은 마음씨」9) 에서 굶주린 부부가 “죽 한 공기”를 두고 서로 양보하다가 “늙은 꽃제비”의 “배고픔”에 “죽그릇”을 나누는 마음을 “가난 속에서도 타버리지 않는/ 꽃 같은 마음씨”라고 말하거나, 「꽃제비 아이들의 의리(義理)」에서도 “옥수수 한 이삭”이나 “시래기 한 조각도” “서로에게 베”푸는 꽃제비 아이들에게서 “죽음 속에서도 살아남은” “의리”를 발견한다. 그러나 대다수 탈북 작가들의 시편에서 굶주림은 범죄나 죽음, 반인륜적 선택들로 귀결된다. 예컨대 백이무의 시에서는 굶주림이 야기한 보다 잔혹한 실상을 형상한다. 시 「최후의 몸부림」10) 에서는 “앞마을 굶어죽은 늙은이와/ 뒷마을 얼어 죽은 늙은이를/ 서로 바꿔치기 해 먹었다는 이야기”나 “웃집의 굶어죽은 애기와/ 아랫집 앓아 죽은 애기를/ 역시 맞바꾸어 먹었다는 이야기”를 통해 “사람이 사람을 먹어야 사는/ 그 처절한 최후의 몸부림” 곧 “더는 사람이 아”닌 인륜을 저버린 “인육이야기”에서 생존 자체가 스스로의 존엄을 위반하는 비극적인 서사를 다룬 바 있다. 결국 지독한 굶주림에 시달리다가 되레 “죽음이 곧 해방이”(백이무, 「해방」)라는 좌절로 귀결되는, ‘살아남음’의 혹독함을 목격하게 된다. “ 오늘은 또/ 뭘 자기비판해야 하노/ 죄진 일 없어도/ 죄를 무덤처럼 쌓아야 하는 모임/ 새벽부터 마음이 불편하오/ 그 놈의 주(週)생활총화 때문에// 또 누구를 꼬집어/ 죄를 만들어야 하노/ 죄 없는 죄 만들어서라도/ 남을 꼭 꼬집어야 하니/ 네 마음 내 마음 다 불편하오/ 그 놈의 호상비판 때문에// 장작 패듯 나를 실컷 두드리다가/ 남도 실컷 물어뜯어야 하니/ 너도 나를 배신/ 나도 너를 배신/ 사랑하는 마음은 버리고/ 미워하는 마음만 쌓이게 하니/ 배신만을 만드는 세상 ―김수진, 「생활총화」 부분11) ”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서 “스파이단은 제도적으로 아이들을 소야만인으로 개조해 당의 강령에 조금이라도 반발하지 못하도록 만든다.”12) 오세아니아는 독재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증오를 세뇌하고 서로를 향한 염탐과 고발을 일상화한다. 마찬가지로 “굶으면서도 만세를” 강요했던 독재 체제는 “더러운 정신병 바이러스”(김수진, 「세뇌(洗腦)」)를 세뇌했다. 시 「생활총화」에서도 주민들을 통제하기 위한 북한 체제의 폭력성이 잘 드러난다. “죄 없는 죄”라도 만들어서 “장작 패듯 나를 실컷 두드리”고 “남도 실컷 물어뜯”는 상호 감시 체계를 강화함으로써 서로를 “배신”하게 만든다. “생활총화”의 원리는 “사랑하는 마음은 버리고/ 미워하는 마음만” 축적해 종국에는 타자와 자신마저 배신하게 만듦으로써 개별적 존엄성을 박탈하는 데 있다. 이처럼 굶주림과 독재 체제는 존재의 존엄성을 훼손한다. “자유를 말하는 내 입술이 지지리도 어색하다”(도명학, 「결박된 자유」)는 도명학 시인의 고백에서 억압되고 통제된 자유에 대한 감수성이 드러나며, “탈출, 방랑, 수감, 치욕, 죄인, 죽음”이라는 단어 대신 “따스함, 온정, 사랑, 풍요”와 같은 “단어들과 친숙”하고 싶고, “독재가 없는 세상에서/ 사랑으로” “인간으로 태어나고 싶다”(송시연, 「진정 사람」)는 간절한 바람에서는 그간 탈북민들이 “자신을 굴종에 유기”하는 “독재의 사슬에” “세뇌”되어 있었음을 독해할 수 있다. 그렇기에 독재 체제를 비판하고 북한의 실상을 고발하는 탈북시의 언어는 “자유를 잃”고 “불행하게 사는 것에 익숙해진 사람들”(송시연, 「세뇌」)의 분노이며, 절박한 증언이다. 3. 탈주: 북한 이탈과 위태로운 정체성   탈북민은 굶주림과 억압의 체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탈북을 결행한다. 이는 북송이나 죽음과 같은 위험에도 불구하고 생존과 존엄성 회복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지가 된다. 국경을 이탈한다는 것은 ‘국민-아닌-(비)존재’로 정위하게 된다는 의미이며, 허상으로나마 소속되었던 기왕의 정체성을 횡단한다는 뜻이다. 무국적자-되기는 자기 정체성을 스스로 박탈함으로써 세계 속 유령으로 자신의 좌표를 재구상하는 일이다. 이때 탈북은 자발적인 탈주로 보이지만, 실상 살아남기 위한 최후의 결단으로 이해해야 한다. 탈출 성공을 장담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안정적인 재영토화 또한 기대하기 쉽지 않은, 그야말로 자신을 불확정성 속으로 밀어 넣는 일이다. 그렇기에 탈국경은 탈정체성과 무정체성으로의 진입을 의미하며, 이름-없음 혹은 이름의 은폐와 삭제는 스스로를 믿을 수 없는 위험한 존재로 낙인한다. 그럼에도 폭력과 착취의 영토로부터 자기-추방과 자기-박탈을 감행하는 것은 살아남기, 그리고 제대로 실존하고자 하는 강렬한 열망의 표출로 볼 수 있다.    “ 속이 가득 앉은 하얀 김장 배추와/ 빨갛게 고추로 물든 양념감을 보니/ 또 가슴이 알알해 납니다/ 저 북에서 사시는 어머님/ 그리고 동네사람들과 친구들/ 김장독을 제대로 채우고 있는지// 소금이 부족해 바닷물 길어다/ 배추포기 아닌 퍼런 겉잎을 절구어/ 고춧가루 양념은 생각도 못하고/ 허연 배추를 그대로 김치라 부르는 사람들// 올해 김장은 어떻게 하냐고/ 윗동네 북한에다 소리쳐 물었어요/ 마주 오는 대답은 또 슬퍼요/ 어제나 오늘이나 달라진 게 없다고/ 울먹이며 하소연이 날아왔어요 ―김수진, 「김장을 담그며」 부분13) ”   시 「김장을 담그며」는 탈북시의 유형화를 탈피하고, 시적 화자의 서정적 목소리를 인상적으로 형상하고 있다. 탈북 작가의 경험적 감수성이 서정적인 시적 발화로 구상된 수작이라는 점에서 탈북시가 지향해야 할 일 방향을 제시한다고 평가할 수 있다. “속이 가득 앉은 하얀 김장 배추와/ 빨갛게 고추로 물든 양념감을 보니” 문득 “저 북에서 사시는 어머님/ 그리고 동네사람들과 친구들”은 “김장독을 제대로 채우고 있는지” 염려스럽다. “올해 김장은 어떻게 하”는지 굶주림은 나아졌는지, 세세한 사연들과 안부 또한 궁금해진다. “내가 사랑했던 조국”은 독재로 점철된 “거짓”의 영토였지만 “그래도 미워할 수 없”는 “고향”(김수진, 「내가 사랑했던 조국」)이기에, “아픈 고향을 두고 떠나온 슬픔”이며 “그리움”(김수진, 「그리움」)이 간절할 수밖에 없다. 탈북민은 북한 체제로부터 자기-추방을 감행함으로써 새로운 정체성을 추구하지만, 그리움의 무게는 재영토화한 정체성을 위태롭게 한다. 나아가 이러한 그리움은 혼자 떠나왔다는 죄책감을 가중한다는 점에서 탈북민의 정신적 외상을 심화시킨다. 가령 지현아는 “나 살기 급급하여/ 고사리 같은 너희들의 손을/ 외면”할 수밖에 없었던, 그렇게 “살아남은 것이/ 후회”된다고 고백한다. “너희들의 신음소리 요란한 그곳을/ 뒤로하고/ 자유를 쫓아왔”다는 죄책감에서 이제야 겨우 “누려보는 자유”(지현아, 「미안하다, 얘들아」)지만 이마저도 온전히 향유할 수 없는 탈북민의 처지와 그 심사를 착목하게 된다.    “ 주춤하지 말아라/ 네가 살아온 세상은/ 언어를 그릴 수 없는 세상이었다/ 거기에는 단 한 사람의 언어만 있기에/ 죽음 같은 침묵만이 역사를 그렸다// 주춤하지 말아라 붓아/ 골고루 외쳐라 빠짐없이/ 침묵이 타서 재가 되어버린/ 이천삼백만의 애절한 외침을/ 한 마디도 놓치지 말아라/ 한 사람 한 사람의 아픔을/ 목숨같이 다독여주라// 붓아 무디어지지 말라/ 더 날카로와지라/ 더 용기 있게 파헤치라/ 진실의 무덤을/ 그 목소리/ 통일에 보태지게 ―김수진, 「붓아 무디어지지 말라」 부분14) ”   끝으로 이 시는 탈북 작가의 사명을 상기시킨다. “주춤하지 말아라 붓아/ 골고루 외쳐라 빠짐없이/ 침묵이 타서 재가 되어버린/ 이천삼백만의 애절한 외침을/ 한 마디도 놓치지 말아라”는 다짐은 생존자인 탈북 작가에게 공통으로 독해되는 책무이다. 독재자의 “언어만” 허용되었던 세상에는 “죽음 같은 침묵만” 있을 뿐, 각자의 목소리로 발화할 “언어를 그릴 수 없”었다. 말할 수 없는 존재, 언어를 박탈당한 존재들의 사투를 기억하고 “진실”을 “더 날카롭게” “더 용기 있게 파헤치라”는 명령은 억압당한 존재들의 분노이다. 때문에 탈북시는 작가 “혼자서 쓴” 시가 아니라 “독재의 칼에 맞아 굶주리며 스러져 가는 북한 인민들이 함께 목 놓아 울며 쓴 글이”15)다. 이런 측면에서 탈북시는 증언 문학을 지향한다. 즉, 탈북시의 목적은 북한의 실상을 폭로하고 독재 체제를 고발함으로써 인권 유린의 참혹함으로부터 북한 주민들을 구출하는 데 있다. 탈북시는 북한 사회의 실태를 고발하고 탈북민의 고통을 환기한다는 점에서 공감의 계기를 제공한다. 더불어 “꽃제비의 소원은/ 언제나 텅 빈손을 내밀어/ 남에게서 받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두 손 가득 무엇인가 듬뿍 쥐여/ 언젠가 남에게 주고 싶”(백이무, 「꽃제비의 소원」)다는 바람처럼, 탈북민은 일방적인 수혜만을 기대하지 않는다. 독립적인 주체가 되어 도움을 나눌 수 있는 세계시민으로 정위하기를 희망한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월경은 그간 자신을 규정해 온 국적성이라는 정체성으로부터 탈출한다는 의미이다. 이는 결국 스스로 무국적자-되기를 선택했다는 점, 그리고 재국민화를 시도한다는 점에서 또 다른 실존적 혼란이 불가피하다. “나의 선택이 아니라 부모님의 선택 때문에 태어난 고향이 북한이라는 죄 아닌 죄로” “같은 한국말을 하는데도 이방인 취급을 받는 것은 쉽게 받아들이기 힘들었”다는 이수빈 작가의 토로에서 한국에서의 정체성 역시 위태롭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완전한 한국인이 되기 위해”16) 역사를 공부하고 있다는 그의 고백을 통해 이식-되기의 고단함과 분투가 드러난다. 이방인의 내국인-되기는 국적성 내부자에게는 요구되지 않는 동일화를 위한 부단한 투쟁을 요청한다는 점에서 이미 차별적이다. 적어도 탈북은 생래적으로 주어진 국적성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능동적 투쟁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4. 이산: ‘아주 심기’를 위한 도정   갈무리하면, 트랜스내셔널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다양한 이유로 이산과 이주를 선택한다. 예컨대 자발적 이민의 경우 자신의 국적성을 기반으로 합법적 이동을 감행하는데, 이는 자유의지에 기인한 능동적 지향의 일환이다. 그러나 대다수 탈북민들의 월경은 경제적 궁핍과 독재 체제로부터의 도피라는 점에서 생존적‧제도적 차원의 자기-추방의 성격을 띤다. 험로를 이겨내야 하는 ‘아주 심기’를 위한 여정은 녹록지 않지만 자신의 재영토화를 발굴하고 개척한다는 점에서 충분히 가치 있는 투쟁이다. 소설 속 로기완에게로 돌아가서, 그는 어렵게 획득한 난민 지위를 포기하고 스스로 불법체류자-되기를 선택한다. 그간 구상되어 온 무국적 난민에 대한 상상이 일종의 시혜적 관계로 정형화되었다면, 로기완은 일방적으로 도움을 요청하는 위치가 아니라 능동적인 무국적자로서의 좌표를 제시한다. 국적성에 부합하는 지위를 버리고, 실존의 근거를 스스로 규정하는 적극적 난민-되기는 국적성과 무국적성을 정의해 온 기왕의 논리를 균열한다. 이처럼 아주 심기는 국적성의 획득만으로 완수되지 않는다. 외려 주체로서의 자기 인식과 자발적 결정을 통해 삶을 영위할 수 있는지가 새로운 영토에서의 정주 요건이 되어야 할 것이다. 더불어 힘겹게 탈북에 성공해 대한민국 국적성을 획득했지만, 다시 탈남하는 탈북민들이 많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탈북민에게 한국이 최종 정착지가 되어주지 못하는 현실은 탈북자 정책과 우리 안의 차별에 대한 성찰을 요청한다. 탈북민의 정착 지원금을 현실화하고, 심리적 안정과 새로운 연대를 희망할 수 있는 지속가능한 창구가 필요하다. 탈북민이 낯선 이방인의 좌표에 고립되지 않도록 내국인과 일상을 교류할 수 있는 생활 환경의 변화 또한 모색해야 한다. 이처럼 정착 지원 정책의 다각화와 재국민화를 위한 제반 환경이 공생과 공존을 지향한다면 낯섦이 야기하는 차별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탈북문학의 성과가 축적되고 있는 현재 시점에서, 문학의 국적성이 제기하는 탈북문학의 위상에 대한 검토 또한 필요하다. 서경식은 “만주 간도에서 태어나 일제 강점기에 후쿠오카에서 옥사”한 윤동주 문학의 국적성을 예로 들면서 한국문학의 범주에 대해 성찰한 바 있다. 그는 “분단과 이산이라는 현실을 살고 있는 조선 민족의 문학을 ‘한국’이라는 한 국가에 한정”할 수 없기에, “근대 이후 조선 민족의 경험에 뿌리내린 문학”을 통칭하여 “‘민족 문학’”으로 규정한다. 궁극적으로 “문학의 ‘보편성’을 특정 국가에 묶어둘 수는 없”17)기에 국적성으로 문학의 귀속을 규정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고 보았다. 마찬가지로 재북 작가 ‘반디’18)의 위상이나, 제3국에 스스로를 은닉한 백이무 시인의 존재를 통해서도 국적성에 근거한 일국 문학사의 한계를 독해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탈북문학을 한국문학의 범주로 볼 수 있는가에 대한 이견은 무의미하다. 적어도 탈북문학의 국적성에 대한 논의가 기왕의 문학/문단 헤게모니에서 규정되고 차별화되는 것은 경계해야 할 것이다.   주지하는 것처럼 한민족이라는 공통성은 남북의 이념 대립으로 인해 동일성의 요건에서 탈각했다. 이런 상황에서 한글은 유일하게 이념적 분열을 이겨낸 정체성의 요건이다. 한글이 보증하는 언어 정체성은 우리의 짐작보다 강력하다. 역설적이게도 『1984』에서 통치의 효율성을 위해 조형되는 신어 정책은 언어에 투사된 동질화의 원리를 간취하게 한다. 즉 “신어의 고안 목적은 영사의 신봉자들에게 걸맞은 세계관과 정신 습관에 대한 표현 수단을 제공함과 동시에 영사 이외의 다른 사상을 갖지 못하도록 하는 데 있다.”19) 낱말을 없애 사고를 제한하고, 표현의 다양성을 억제함으로써 언어는 명령을 하달하는 통치 수단으로만 기능하게 된다. 언어 표현의 다양성이 억압된다는 것은 개별자로서의 개성과 존엄성 또한 박탈된다는 의미이다. 이때 한글이라는 언어 정체성이 남북민을 잇는 소통과 공감의 매개가 된다는 사실은 중요하며, 남북의 생산적인 미래를 기대할 수 있는 요건이라는 데 있어서도 긴요하다. 다만 이러한 언어 정체성이 폭력적이고 일방적인 동일화를 지향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예컨대 이북 방언에 내재한 개성은 탈북민의 실존적 존엄을 증거함에도, 탈북민이 문화어나 이북 방언을 삭제하고 표준어로 글쓰기를 한다는 것은 생래적 언어에 투사된 고유한 정체성을 외면한다는 의미이기에 안타깝다. 서정은 언어 정체성과 밀접하게 연관되는 만큼 탈북시에서 이북의 언어미학을 추구하는 것 역시 긍정적으로 고려해야 할 것이다. 각주 1) 조해진, 『로기완을 만났다』, 창비, 2011, 7쪽. 2) 백이무 시인은 두 권의 시집 『꽃제비의 소원』(글마당, 2013)과 『이 나라에도 이제 봄이 오려는가』(글마당, 2013)에서 1990년대 중후반 고난의 행군기 북한의 기아 실태와 수용소의 실상을 폭로한 바 있다. 이에 대해서는 조춘희, 「탈북난민과 증언으로서의 서정」, 《배달말》 64, 2019, 340-379쪽 참고. 3) 조춘희, 「동아시아 이주와 탈북난민」, 부산대학교 인문대학 기획, 『동아시아의 어제와 오늘』, 부산대학교출판문화원, 2021, 54쪽. 4) 탈북시는 ① (작가의 소속 및 국적성 무관) 탈북을 소재로 다룬 작품, ② (소재 무관) 탈북민이 쓴 시, 그리고 ③ (탈북 작가) 탈북 경험을 형상한 시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세 번째 경우에 국한하고자 한다. 이 글의 논의는 2000년대 이후 발간된 탈북 작가의 시집을 망라했으며, 시 전문 인용은 주제 형상화와 시적 미학이 돋보이는 김수진의 작품에서 선정했다. 5) 김수진, 『天國을 찾지 마시라 국민이여 우리의 대한민국이 天國이다』, 조갑제닷컴, 2015, 31-32쪽. 해당 시에는 “옥수수 5킬로 때문에 살인을 저지른 열한 살 꽃제비 소녀를 총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로 시작하는 장황한 부언이 붙어 있다. 이는 해당 시적 발화가 살인이라는 범죄 행위보다 이를 야기하고 방조하는 굶주림의 실상을 고발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6) 조해진, 같은 책, 9쪽. 7) 이가연, 『엄마를 기다리며 밥을 짓는다』, 시산맥사, 2015, 107쪽. 8) 조춘희, 「탈북난민과 증언으로서의 서정」, 359쪽. 9) 김수진, 『꽃 같은 마음씨』, 조갑제닷컴, 2016, 38쪽. 10) 백이무, 「최후의 몸부림」, 김성민 외, 『엄마 발 내 발』, 예옥, 2018, 68-70쪽. 이 글에서 시의 출처를 별도로 밝히지 않은 인용 시는 해당 시선집에서 발췌했다. 11) 김수진, 앞의 책, 71-72쪽. 12) 조지 오웰, 정회성 옮김, 『1984』, 민음사, 2003, 39쪽. 13) 김수진, 앞의 책, 95-96쪽. 14) 김수진, 『天國을 찾지 마시라 국민이여 우리의 대한민국이 天國이다』, 155-156쪽. 15) 김수진, 「황당한 북한 이야기」, 『꽃 같은 마음씨』, 127쪽. 16) 이수빈, 『힐링 러브』, 북마크, 2012, 17쪽; 14쪽. 17) 서경식, 서은혜 옮김, 『시의 힘』, 현암사, 2015, 160쪽; 161쪽; 164쪽. 18) 재북 작가 ‘반디’의 출현은 실존의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폐쇄적인 북한 사회 내부에도 체제에 저항하는 목소리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놀라움을 야기했다. 국경 밖으로 반출된 그의 작품(소설집 『고발』(다산북스, 2017)과 시집 『붉은 세월』(조갑제닷컴, 2018))은 발간 당시 전 세계적으로 반향을 일으킨 바 있으며, 그의 존재만으로도 재북의 좌표에 대해 탐구하는 계기가 된다는 데 주목해야 한다. 19) 조지 오웰, 앞의 책, 414쪽.

너머의 새 글

너머의 한 문장

태어난 곳을 일러 고향이라 하지만

죽어 묻힌 곳을 무엇이라 부르는가

김병학 「 선배를 이국땅에 묻으며 」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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