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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스포라 한글 문예지의 어제와 오늘

2024. 9. 1. 8호

표지에세이 「꽃이 필 때면 - 가을」 50cmx40cm, 장지에 채색화, 2022

표지에세이 보기 편집자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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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남·북·일이 교차하는 재일 우리말 문예지

김계자 한국

1. 일본에서 해방을 맞이한 우리말글살이   일본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온 우리 민족은 해방 직후에 문학자의 모임을 조직하고 문예지를 발간하여 탈식민과 새로운 민족문학의 창출을 도모했다. 그런데 초기의 문예지는 아직 변변한 인쇄 기술이나 우리말1) 활자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수작업으로 발간된 경우도 있고, 현재 서지의 상세 사항을 확인하기 어렵거나 원문을 확인할 수 없는 경우도 많다. 이 글에서는 박경식과 송혜원, 우노다 쇼야(宇野田尚哉)의 선구적인 연구 성과2)에 의지하여 우리말 문예지 발간의 주요 흐름을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해방 직후에 제일성(第一聲)으로 발간된 우리말 문예지에 《고려문예(高麗文藝)》(1945년 11월-1946년 7월)가 있다. 동시대 뉴스와 시, 평론 등 지면 구성은 간단하지만, 일제 치하에서 억눌린 우리 문화에 대한 갈구가 해방과 함께 분출된 모습이 ‘문화’를 거듭해서 강조한 창간사에 잘 나타나 있다. 시 전문지 《조선시(朝鮮詩)》의 간행도 확인되는데, 원문은 2호(1946년 3월)만 확인 가능하다(朴慶植, 388-400쪽). 편집인 길원성의 시와 시론을 비롯하여 창작시를 주로 싣고, 소설과 희곡도 한 편씩 게재했다. 「편집후기」에 “詩를 써서 살고 詩를 써서 죽으려는 熱情과 希望만은 겨우 그 慘憺한 絶望의 絶頂까지 가슴속에서 북밫이며 사라지々않엇다”고 일제강점기의 참담한 시간을 견뎌 온 민족 시인의 정신에 찬가를 보내고 있다. 해방 공간의 혼란은 조국으로 귀환하지 못한 60만 재일 사회에 어려움을 가중했지만, 그럼에도 우리말 활자에 와락 덤벼들어 붙들고 놓지 않으려는 생생한 목소리가 전해지는 듯하다. 2. ‘재일조선문학회’와 본격적인 우리말 문예지 발간   본격적인 우리말 문예지 발간은 ‘재일조선문학회(在日朝鮮文学会)’(1948년 1월-1959년 6월)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재일조선문학회’는 ‘재일본조선문학자회(在日本朝鮮文学者会)’(1947년 2월 창립)가 개편된 조직으로, ‘재일본조선문학회(在日本朝鮮文学会)’로 불리기도 했다. 기관지로 일본어판 《조선문예(朝鮮文芸)》(1947년 10월-1948년 11월)를 발간하다 우리말 기관지《조선문예》(1948년 3월)를 창간했다. 그러나 《조선문예》뿐만 아니라 뒤이어 창간된 《우리文学》(1948년 8월)과 《봉화》(1949년 6월)도 후속 발간으로는 이어지지 못한 채 끝나고 말았다.   이와 같이 우리말 문예지 발간이 순조롭지 못한 데에는 당시의 재일 사회에 대한 탄압이 있었다. 1945년 10월에 결성된 ‘재일본조선인연맹(在日本朝鮮人連盟, 이하 조련)’은 일본 각처에 조선학교를 세워 민족 교육을 실시하며 대중적 지지 기반을 넓혀갔는데, 일본에서 사회주의 운동이 퍼질 것을 염려한 연합국 최고사령부(General Head Quarters, GHQ)가 1948년 초에 조선학교 폐쇄령을 내렸고, 이에 항의하여 4월에 오사카(大阪)와 고베(神戸)를 거점으로 우리말을 지키기 위한 한신(阪神) 교육 투쟁이 거세게 일었다. 마침내 조선학교 폐쇄령은 철회되었지만, 1949년 9월에 조련이 강제 해산을 당했다. 이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우리말 신문 《해방신문(解放新聞)》이 정간 처분을 받았고, 우리말 작품의 인쇄와 유통도 어려워졌다.   1951년에 조련의 후속 단체로서 ‘재일조선통일민주전선(在日朝鮮統一民主戰線)’이 결성되었고, 우리말 기관지 《군중(群衆)》(1951년-1952년)이 간행되는 가운데 정체되었던 재일조선문학회의 재건이 이루어졌다. 1952년 말에는 문학, 미술, 음악, 무용, 연극, 영화의 전문 단체 여섯 개로 구성된 ‘재일조선문학예술가총회(在日朝鮮文學藝術家總會)’가 결성되는데, 재일조선문학회도 여기에 편입되어 활동을 이어갔다. 이윽고 1953년 7월에 한국전쟁 휴전협정이 조인되어 다소 안정된 분위기를 되찾고 우리말 문예지 발간이 이어지는데, 재일조선문학회의 기관지 《조선문학》(1-2호, 1954년 3월-1954년 5월)과 후속 잡지 《조선문예》(3-9호, 1956년 11월-1958년 3월)가 발간되었다. 편집인 남시우를 비롯하여 허남기와 김민의 글이 자주 실렸고, 시와 소설, 에세이 등의 창작과 함께 문학회 관련 회의 내용 보고도 실렸다. 재일문학연구자 송혜원은 재일조선문학회를 일본에서 지속적으로 활동한 최초의 민족 문학 단체로 자리매김했다.3) 3. 일본 각지에서 발간된 우리말 서클지   재일조선문학회의 우리말 기관지 《조선문학》에는 서클 운동에 대한 내용이 눈에 띈다. 1950년대 일본에서는 서클 문화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4) 서클 운동은 아직 공산주의 사상으로 조직화되지 않은 소수의 아마추어들이 중심이 되어 정치 운동의 기반을 넓힐 목적으로 활동하는 문화 운동을 가리킨다. 각 지역에서 운동에 동참하는 사람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기관지 성격의 ‘서클지’에 담아 운동의 저변을 확대해 간 소비에트 문화 정책 운동이 일본 사회에 들어온 형태라고 할 수 있다. 같은 시기에 재일 사회에서도 서클 운동이 활발히 전개된 것을 《조선문학》 창간호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데, “현재 각처에서 조선문학의 써-클(동인 조직을 포함한)이 조직”되고 “재일조선인 문학 운동의 새로운 전기(轉機)”를 맞이했다고 평가하면서 일본 문학자들과의 공동 전선을 강화해야 한다고 적고 있다. 당시의 서클지가 재일 사회의 대중적인 논의의 장이었으며, 나아가 다른 지역의 문학자들과 교류하는 연대의 장이었음을 알수 있다. 《진달래》 8호(1954년 6월)   서클지의 가장 대표적인 예는 ‘오사카조선시인집단(大阪朝鮮詩人集団)’의 《진달래》(1953년 2월-1958년 10월)이다. 시 같은 것은 써본 적이 없는 재일 청년들의 문화 투쟁의 장이 열린 것이다. 《진달래》는 김시종 시인이 편집 겸 발행을 맡았고, 시 창작과 비평, 르포르타주 등의 내용을 실었다. 일본어 글이 다수이지만, 우리말 작품도 실려 있는 것으로 봐서 표현 언어에 특별히 제한을 두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오사카의 재일조선인들이 지역별로 회합을 갖고, 모임이 끝난 한밤중에 다시 모여 경찰의 눈을 피해 등사판 종이를 긁어 매호 발간해 간 이른바 풀뿌리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다. 오사카 외에도 전국 각지에서 재일 서클지가 발간되었는데, 《대동강(大同江)》(가와사키), 《거센 파도(荒波)》(후쿠오카), 《청구(青丘)》(나고야)가 남아 있고, 특히 우리말로 발간한 서클지에 《수림(樹林)》(도쿄), 《신맥(新脈)》(도쿄), 《포뿌라》(고베), 《산울림》(아이치) 등이 있다. 그 외에 《시노다야마(信太山)》(오사카)처럼 조선인과 일본인이 함께 서클 활동을 전개한 기록도 남아 있다. 《조선문학》 창간호의 「편집후기」에서 “그동안 무엇보다도 우리들을 채쭉질한 것은 지역의 써-클동무들이다. 동무들이 밤낮으로 애써 키워내는 써-클기관지를 손에 들 때마다 우리는 몇 배로 힘을 돋구었다”며, “무엇보담도 써-클동무들의 좋은 벗으로 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고 다짐하는 내용이 있는데, 각 지역의 서클 운동을 연결하는 거점으로서 기능한 재일조선문학회의 취지가 나타나 있다. 4. ‘오무라조선문학회’의 우리말 작품   《조선문학》의 제명을 바꿔 후속 발간된 《조선문예》에서 특기할 만한 것은 5호(1957년 1월)에 특집으로 실은 ‘오무라조선문학회’의 작품이다. ‘오무라조선문학회’는 일본 규슈(九州)의 나가사키(長崎) 현에 있는 오무라수용소(大村収容所)에 수용된 사람들을 중심으로 활동한 서클 운동 단체인데, 수용소 내에서 주로 북한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주도하고 도쿄의 서클 조직과 연계하여 기관지 《오무라문학(大村文学)》(1957년 7월)을 발간했다. 그런데 《오무라문학》은 일본어로 발간된 문예지이고 필진에도 일본인이 섞여 있는 반면에, 《조선문예》에 특집으로 실린 작품(시 4편, 수필 2편)은 모두 재일조선인이 우리말로 창작한 작품이다. 그중에서 정헌성의 시 「오무라 수용소의 하늘」은 두 잡지에 모두 실렸는데, 발간 시기가 《조선문예》(5호)가 《오무라문학》(창간호)보다 빨랐기 때문에 정헌성이 먼저 우리말로 쓴 시를 《오무라문학》이 창간될 때 일본어로 번역하여 전재(轉載)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문예》의 특집에는 오무라조선문학회가 성립된 초기의 정황과 《오무라문학》 발간에 이르는 과정이 언급되어 있다.   정헌성의 시 「오무라 수용소의 하늘」에는 “그곳은 일제와 피어린 싸움의 마당/ 탄압과 박해위해/ 오각별 공화국 깃발 내세우고/ 우리를 석방하라/ 자유를 달라/ 울분에 끓은/ 불꽃같은 넋시가/ 밤 하늘에도/ 별처럼 치솟는 곳”으로 수용소의 인권 탄압에 저항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오무라수용소는 일제강점기 이래 일본 사회에 저항 운동을 펼친 사상범이나, 제주 4·3 항쟁 혹은 한국전쟁 때 밀입국한 사람들을 강제 송환하기 위한 임시 수용소였는데, 수용자를 범죄자로 처우하고 탄압하여 인권 문제가 논란이 된 곳으로 악명이 높다. 정병수는 수필 「단결된 우리의 힘」에서 수용소 동포들이 벌인 운동을 “구체적 행동으로 실천하는 귀한 마당”이며 “남북의 평화적 통일을 달성하기 위한 민족적 단합 사업”이라고 평가했다. 김윤호의 「大村 수용소 동지들과 나」에도 수용소 내에서의 민족 교육 사업과 문학 운동에 힘쓰고자 하는 서클 활동이 그려져 있는데, 기관지 《오무라문학》 창간을 탄압하는 당국에 맞서 “끝까지 싸워 간행을 쟁취하리라”는 다짐도 보인다. 5. 재일 문학 창작 방법과 표현 언어의 문제   《조선문예》 7호(1957년, 발간 월 불명)와 8호(1957년 11월)에는 재일 문학의 창작 방법과 표현 언어를 둘러싼 논쟁과 토론 내용이 실렸는데, 논란의 핵심에 김시종의 문학이 있었다. 김시종은 일제강점기에 식민 교육을 받고 자란 일본어 세대로, 17세 때 맞이한 해방은 지금껏 일본어로 형성해 온 인식의 질서가 모조리 바뀌는 경험이었다. 이후 우리말을 다시 배우고 사회주의 운동에도 관심을 기울였는데, 해방 공간의 혼란 속에서 제주 4·3 항쟁에 관련되어 당국의 탄압을 피해 일본으로 밀항해 오사카에 살았다. 이러한 김시종이 주축이 되어 오사카에서 대중적 표현 기반을 획득한 서클지 《진달래》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1955년에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在日本朝鮮人総連合会, 이하 조총련)’가 결성되었고 재일조선인은 조선노동당의 지도를 직접 받는 상황으로 바뀌었다. 그에 따라 문학 창작에서 내용적으로는 북한의 교조적인 사상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게 되었고, 표현 언어도 ‘조선어’로 제한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주로 일본어로 문학 활동을 하고 있던 김시종에게 비난이 쏟아진 것이다.   《조선문예》 7호에서 허남기는 「김시종 동무의 일본문 시집 『지평선』에 관련하여」라는 글을 통해 “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서 있는 발의 위치고 각도에 있다”고 하면서, “국어가 아닌 다른 민족의 언어로써 할 때는 일각이라도 잊어서는 안 될 문제”라며 일본어로 창작하는 김시종을 비판했다. 김시종의 첫 시집 『지평선(地平線)』(1955)이 시기적으로 조총련이 결성된 무렵에 나온 데다가, 당시 주목받고 있던 오사카 조선 시인 집단의 서클지 《진달래》의 중심에 김시종이 있었기 때문에 비판이 쏠린 것이다. 허남기에 이어 홍윤표도 「누가 詩를 쓰는가―한 지역 써-클의 문제점에 대하여」에서 《진달래》 소속 회원 대부분이 일본에서 나고 자란 20대 청년들이어서 “일본적 요소가 너무도 많은 세대들”이라고 지적하고, “시의 발상 그 자체가 국어가 안이라 일본어로서바께 끄집어 내지 못하는 것은 국어를 모른다는 문제 뿐만이 안일듯하다”며, “국어 습득과 전통성의 계승”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조선문예》 8호에는 재일 문학의 표현 언어를 둘러싸고 재일조선문학회 회원들이 토론한 내용이 실렸다. 먼저 김시종이 자신에게 가해진 비판에 대하여 “일본어로 쓰는 작품들의 경향의 일면성만을 지적하고 있다”고 반박하자, 남시우는 일면적으로 평가한 것은 시정하겠으나 일본어로 창작하는 사람들이 조선어 작품에 대하여 좋지 못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며 응수했다. 일본어로 쓰는 것과 조선어로 쓰는 것이 서로 대치되고 있는 양상인데, 표현 언어가 작품의 내용과 창작자의 사상으로 연결되어 날카로운 설전이 오갔다. 김한석은 《진달래》에 실린 작품들에 대하여 “재일 동포들의 생활 모습, 또는 조국에 대한 감정을 옳바로 그려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류랑민적인 감정으로 페시미쓰틱한 작품들을 창작하는 데 그치고 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우리 문학 집단과 조직과의 옳바른 련계를 파괴하는 원인을 초래한다”고 조총련의 방침을 따르지 않는 일본어 창작을 비판했다.   그런데 내면으로 침잠하는 서정성을 부정하고 집단적인 결속과 연대를 다져야 한다는 논조는 기실 《진달래》의 취지이기도 한데, 일본어로 쓰면 감상적이고 조선어로 쓰면 주체적이라는 식의 이분법적 논의로 전화된 데에는 당시의 시대 상황이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조국이 남과 북으로 분단되고 재일 사회도 민단과 조총련으로 나뉘어 갈등이 있었는데, 한국전쟁의 포화가 멈춘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서 조총련이 결성되었고, 북한의 주체사상과 ‘조선어’ 글쓰기가 직결되는 조총련의 방침에 따라 일본어로 글을 쓰는 행위는 마치 조국을 배반하는 친일로 간주된 경향이 있다. 이러한 조총련의 경직된 사고가 오히려 우리말 글쓰기를 경원시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김시종은 “작품을 쓰기 이전에 튼튼한 사상성을 가져야 한다는데 나는 반대한다”며 사회주의 사실주의에 대한 인식의 문제를 지적했다. 그리고 “「진달래」의 시인들은 처음부터 무슨 고상한 목표를 앞에 내걸고 시를 쓰기 시작한 것은 아니다. 자기에게 더욱 충실하며 그 앞에 제기되는 고민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쓰기 시작했다. 그런 점에서 재일조선 청년들이 놓여 있는 위치를 더욱 명백히 할 필요가 있으며 그 평가와 방향성을 밝혀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조총련의 경직된 사상과 이념보다는 재일 청년들의 실존적 현실과 고민을 문학에 담아야 한다는 김시종의 생각이 잘 나타나 있다. 6. ‘조선어’의 제한된 틀에서 벗어난 시지(詩誌) 《불씨》   재일 문학의 표현 언어 논란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 잡지에 《불씨》(1957년 1월, 8월, 11월)가 있다. 3호 발간에 그친 단명한 잡지이지만, 《조선문예》(8호) 지상에서 재일 문학의 표현 언어 토론회가 펼쳐졌던 바로 그때 ‘조선어’ 쓰기 방침에 저항이라도 하듯 2호까지 ‘조선어’로 발간하던 것을 3호에서는 일본어판으로 발행한 것은 상징적이다. 《불씨》 2호(1957년 8월)   《불씨》 3호의 「편집노트」를 보면 일본어판 발간에 기탄없이 비판해 달라는 당부와 함께, 재일 문학 《불씨》 2호(1957년 8월) 중에서도 특히 시 분야에서 ‘재일’의 역사적이고 문학적인 의미 내용을 깊이 있게 파고드는 새로운 기운이 나타나고 있다고 말했다. 즉, 안일한 노스탤지어의 서정이나 관념적인 슬로건을 타파하려는 움직임이 있고, 경멸과 조소의 대상이었던 ‘반쪽발이(半日本人)’ 재일 2세의 문제에 진지하게 임하는 모습이 보인다는 설명이다. 조국 지향의 1세대와는 달리, 일본 정주의 현실 속에서 정체성 문제가 화두가 되고 있는 재일 2세대를 주목한 것이다. 서클지로 시작한 《진달래》가 점차 소수 문예 동인지 성격으로 변모한 것도 이러한 재일 사회의 변화를 말해 준다. ‘재일’이라는 말이 본래 전후 일본 사회에서 집단으로 소환된 개념이고, 일본 사회에 대한 대항적 의미를 생래적으로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재일의 언어가 반드시 ‘조선어’로 ‘조국’을 대리해야 하는 것은 아닐 터이다. 《불씨》 3호의 일본어판은 ‘조선어’ 대신에 일본어를 선택했다는 양자택일의 접근보다는, ‘조선어’의 틀 속에 한정된 동시대의 경직된 사고를 벗어나려는 재일 사회의 주체적인 의미 표명으로 봐야 할 것이다. 7. 재일조선인 ‘귀국 사업’과 남·북·일을 잇는 재일 문학   1960년대 재일 사회의 조직 개편과 문예지 발간의 중심 이슈는 재일조선인 북한 ‘귀국 사업(The Repatriation Project)’이었다. 귀국 사업은 1959년 12월 14일에 일본 니가타(新潟)에서 북한의 청진을 향해 첫 배가 출항하여 1967년까지 88,467명의 재일조선인이 북한으로 건너갔고, 3년여 기간 중단되었다가 1971년에 재개되어 1984년까지 약 25년간 총 93,339명이 북한으로 이주한 일을 가리킨다. 한국에서는 ‘북송’으로 알려져 있는데, 대다수가 한반도의 남쪽이 고향인 재일조선인이 북으로 이주한 것이기 때문에 엄밀히 말해 ‘귀국’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여기에서는 당시 국제사회의 문서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던 ‘귀국(repatriation)’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결국 이 사업으로 재일 사회 구성원의 약 15퍼센트가 북으로 이주했고, 여기에는 일본 국적을 가진 아내나 자식들도 6천여 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귀국 사업 당시의 기록이 재일 문예지에 남아 있다.   해방 직후부터 1950년대까지 재일 문학의 중심에 있던 ‘재일조선문학회’는 1959년 6월에 ‘재일본조선문학예술가동맹(在日本朝鮮文学芸術家同盟, 이하 문예동)’으로 개편되었는데, 문예동은 조총련 산하의 다양한 문화 예술 단체가 연합한 조직이다. 우리말 기관지로 《문학예술》과 《조선문예》를 발간했는데, 《문학예술》은 중앙 기관지이고 《조선문예》는 가나가와(神奈川) 지부에서 발행한 것이다. 귀국 사업이 시작되었을 때 사업에 대한 지지와 독려를 위해 귀국을 둘러싼 재일조선인의 동시대적 상황과 목소리를 생생하게 담아냈다. 특히 《문학예술》 창간호의 목차에는 귀국선의 모습을 삽화로 그려 넣어 귀국 사업의 고양된 분위기를 표현했다. 《문학예술》 창간호(1960년 1월) 표지와 목차   위의 《문학예술》 창간호를 보면, 첫 페이지에 조총련 초대 의장 한덕수의 「공화국 대표 환영가」를 싣고, 이어서 「권두언」에 “일제의 가혹한 착취 밑에 오랜 세월을 이국 땅에서 신음하던 재일 동포들의 력사상에 새로운 페지가 시작된다”고 적었다. 그리고 「편집후기」(김민)에 “배는 줄곳 조국에로 향하고 동포들은 더욱 조국을 향하여 가슴을 펴고 일어선다. 오늘의 현실은 고생스러우나 우리의 앞길은 영광에 찼다”, “귀국 운동이 더욱 전진 될 새해에 우리 「문학 예술」도 더욱 발전 시켜야 할것이다”고 흥분된 어조로 귀국의 감격을 전했다.   「귀국시초」 면에 ‘귀국’의 감격을 노래한 시도 다수 실렸는데, 허남기는 「조선과 일본과의 사이의 바다」에서 조국 상실자의 아픔과 귀국의 감격을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 거기 놓여있는 것은/ 현해탄/ 거기 놓여있는 것은/ 동해 물결/ 거기 놓여있는 것은/ 조그마한 바다에 불과하건만// 그러나 우리와/ 조국과의 사이는/ 그러나 이 현실의 일본과/ 조선과의 사이는// 너무나 멀다/ 너무나 넓다// 조국이여 우리에겐 당신의 목소리가 들리고/ 우리에겐 당신의 가슴의 고동까지 뚜렷히 울려오는데// (……) // 지난날 우리 가슴에서 조국을 빼앗고/ 지난날 우리 손아귀서 논밭과 고향을 빼앗고/ 사람으로서의 일체의 권리마저 강탈해간 그놈들이/ 아직 죽지 않고 살아 남아// 조선과 일본과의 사이의 바다를/ 한없이 멀게만 할랴고들고/ 리를 언제까지나/ 조국 상실자의 위치에 얽어매 둘랴고 발광한다// 조국이여 우리가 웨치는 소리가 당신의 가슴을 울리고/ 당신이 부르는 말씀이 이렇게도 가깝게 들리는데// (……) ”   허남기의 시는 일제강점기 이래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일본에 사는 재일조선인을 “조국 상실자”라고 하면서 조국으로 돌아가는 재일조선인의 격정적인 감정을 노래했다. 그런데 리수웅의 소설 「아버지와 아들」을 보면, 귀국 문제를 놓고 공화국으로 빨리 돌아가자는 아들과 조국이 통일되면 돌아가자는 아버지의 의견이 엇갈려 갈등을 빚고 있는 상황이 그려진다. 결국 조국의 통일을 위해서라도 귀국을 서둘러야 한다는 아들의 말에 아버지가 수긍하며 귀국을 결심하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나지만, 분단된 조국의 현실과 전쟁에 대한 경계심을 드러내는 아버지의 발언을 통해 ‘귀국’을 둘러싼 재일조선인의 복잡한 속내를 엿볼 수 있다. 일제강점기에 한반도의 남쪽에서 일본으로 건너와 분단과 전쟁을 겪은 재일 1세대가 북으로의 귀국을 앞두고 분단된 조국을 바라보는 심경이 투영되어 있다.   한편, 김민의 「바닷길」에는 당면한 귀국 사업이 또 하나의 ‘귀국’에 대한 기억을 불러내고 있는 것이 흥미롭다. 김민의 소설은 징용으로 일본에 강제 동원된 조선인을 태운 일본 해군 수송선 우키시마마루(浮島丸)호가 1945년 8월 24일에 아오모리(青森) 현을 출발해 부산으로 향하는 도중에 교토 마이즈루(舞鶴)항에 정박했을 때 폭발하여 침몰한 사건을 그리고 있다. 폭발의 원인이나 피해자 파악 등 지금까지도 진상이 규명되지 않은 사건을 언급하며 희생된 동포의 넋을 기리고 있다. 북한 귀국 사업이 시작되었을 때 나온 이 소설은 해방 직후 한반도의 남쪽으로 귀국했던 기억을 불러내어 1960년대에 한반도의 북쪽으로 귀국 아닌 귀국을 해야 하는 재일조선인에게 ‘귀국’이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 보게 한다. 재일조선인의 귀국에 대한 열망 속에는 해방 이후에도 이어진 일본에서의 차별받고 힘든 삶을 청산하려는 기대와 함께 분단된 조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현실적인 문제, 그리고 해방 직후 심해(深海)로 유실된 귀국의 기억이 중첩되어 재일조선인의 디아스포라적 삶의 초상이 담겨 있다.   안타깝게도 귀국 사업 초반에 일본의 미디어까지 합세하여 ‘지상의 낙원’으로 선전했던 북한의 허상이 귀국자를 통해 조금씩 일본에 알려지면서 귀국자 수는 급감했는데, 여기에는 「한일협정」(1965) 체결 전후의 한일 관계의 변화와 고도 경제성장을 구가하던 일본 국내 사정의 변화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이 한일·북일 간의 변화에 영향을 받아 1960년대 재일 우리말 문예지 발간에도 달라진 양상이 나타났다. 조총련 산하의 문예동 오사카 지부 기관지 《문예활동》(1960년 7월)과 도쿄 본부 기관지 《군중문예》(1964년 5월)가 창간되는 한편, 조총련과 관련 없이 한국과 민단에 연계된 우리말 종합 문예지 《한양(漢陽)》(1962년 3월-1984년 3월)이 발간되었다. 한반도의 남북 분단이 재일 사회의 분단으로 이어진 형국이지만, 관점을 달리하면 어느 하나의 조직과 방침의 제한된 틀에서 벗어나 우리말에 좀 더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는 자장이 만들어진 측면도 있다.   이상과 같이 해방 직후부터 1960년대 초까지의 우리말 문예지가 재일 사회의 치열한 삶의 투쟁을 기록해 왔다고 한다면, 이후의 문예지는 비교적 안정된 분위기에서 재일 사회의 현안과 다양한 지향점을 보여 주고 있다. 식민과 냉전의 시대를 지나며 한반도의 남과 북, 일본을 연결해 온 재일 사회의 기록과 기억을 통해 남·북·일(南·北·日)을 아우르는 포괄적인 층위에서 분단과 이산을 넘어 교류와 소통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이 중요하다. 각주 1) 재일 사회는 한반도의 남과 북, 일본이 교차하는 공간이기 때문에 ‘한글’ 대신에 세 지역을 아우르는 통칭으로 ‘우리말’을 사용한다. 단, 동시대의 문헌 인용이나 문맥을 반영하는 경우에는 ‘조선어’나 ‘재일조선인’ 등 ‘조선’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2) 朴慶植 編, 『在日朝鮮人関係資料集成〈戦後編〉: 朝鮮人刊行新聞・雑誌(3)』第10卷, 不二出版, 2001; 宋恵媛, 『「在日朝鮮人文学史」のために: 声なき声のポリフォニー』, 岩波書店, 2014; 宇野田尚哉 編, 『在日朝鮮文学会関係資料 一九四五~六〇』全3卷, 緑蔭書房, 2018. 3) 宋恵媛, 「解説」, 宇野田尚哉 編((1卷), 2018), ii쪽. 4) 宇野田尚哉 外, 󰡔「サークルの時代」を読む─戦後文化運動への招待─󰡕, 影書房, 2016.

재미 한인 모국어 문학잡지의 새로운 정체성 수립을 위해

박덕규 한국

남·북·일이 교차하는 재일 우리말 문예지 --> 1. ‘지금-여기’의 재미동포 모국어 문학잡지   미국에 사는 한인 동포 수는 200만 명 이상, 최대 260만 명에 이른다.1) 1900년대 초 하와이로 가서 오아후섬 등 여러 지역 사탕수수농장 노동자가 된 이들로부터 시작한 한인 이민 역사는 이제 120년을 넘겼으며, 1982년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에 ‘Korea Town’이 지정돼 구역 표지판을 세운 것도 40년이 넘었다. 한인들은 미국 내 거의 모든 주에 흩어져 사는데, 그중 한국산을 파는 가게나 음식점 등이 늘어선 한인 밀집 지역도 여러 곳이다. 한인을 고객으로 하는 카페, 마트, 주유소, 백화점, 호텔, 약국, 병원, 종교 시설, 기타 크고 작은 회사, 나아가 한국어 신문사나 방송국까지 있는 도시도 있다. 이들 한인 인구 중 모국어를 구사하는 이가 얼마나 되는지 조사한 기록은 찾기 어려우나 이민 시기, 인구 분포, 혼혈 정도 등을 따져봐서 50퍼센트는 된다는 것이 중론이다. 이들의 모국어 문학 활동은 이런 문화와 인구를 바탕으로 하는바, 그 중심에 문학잡지가 자리한다.   잡지는 특정한 인구 집단이 필요로 하는 정보를 일정한 기간을 두고 정기적으로 집적해 간행하는 인쇄물이다. 그중 문학잡지는 문학작품과 더불어 다양한 문학 정보를 수록하면서 담론을 생성한다. 특히 이민자들의 모국어 문학잡지는 지속적인 발표 지면으로서 문학의 개별적·집단적 성장에는 말할 것도 없고, 이민자의 정체성 회복이나 창조적 자긍심 고취, 민족적 소속감 공유에 기여한다. 또 모국 문화와 언어의 수용·보존·전파·전승 등의 사회문화적 효과를 가져다주기도 한다. 반면, 이 일은 그들의 현지 적응을 늦추는 역효과를 낳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는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민지에서 모국어 문학잡지를 발간해서 소통하고 연대하는 일은 보다 특별하게 이해해야 한다.   2024년 현재 미국(북미)에서 발행하는 문학잡지는 25여 종인 것으로 집계된다.2) 그러나 이 수치 자체나 미국 이민 아닌 옛 소련 지역 중앙아시아 및 중국, 일본 등의 예에 견주어 ‘많다’는 것 등에 큰 의미를 둘 것은 없다. 미국은 지난 세기 동안 국제 패권국으로 자리매김하면서 다인종 사회를 표방해 국가 규모를 크게 확대한 나라다. 이런 주류적 배경에서 한인들은 주권을 상실한 나라의 유민으로서 ‘유민 감성’, ‘향수’, ‘국권 회복 의지’ 등을 모국어 활동으로 표출하고 집단화했다. 이때 한글이 강력한 구심력이 되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겠다. 또 특유의 응집력이나 개척 정신 등도 큰 동력이었을 것이다. 이후 광복을 맞은 조국은 6·25 전쟁을 겪어 분단국이라는 민족적 약점을 안은 채로 미국과 전면적인 교류 상태를 유지했다. 1960년대 후반부터 재미동포가 급증하고 모국어 문화도 그만큼 활발해지자 이를 토대로 여러 매체들이 생겨났다. 1980년대 들어 본격적인 의미의 문학잡지들이 연이어 창간되면서 ‘미주 한국문학’이라는 범주를 특정할 수 있게 되었다. 3)   인류는 21세기 들어 인터넷의 보급과 더불어 유무형의 제품을 생산·소비, 제조·공유, 수요·공급을 각각 즉각적인 관계로 일원화하는 글로벌 사회를 구축했다. 문학의 글로벌화 역시 이런 변화와 함께한다. 100년 이상 양과 질에서 깊이를 더해 온 한국 근대문학은 세계문학의 수요와 평가 대상으로 자리 잡고 있다. 20세기 중앙아시아, 중국, 일본 등에서 전개한 재외 한인문학은 이런 국제적·문화적 변동 과정에서 크게 쇠퇴한 반면 미국에서는 적어도 양적으로는 그런 기미가 없다. 국내와 교류하는 내용도 많고 다양해져서 지역·장르 등에서 이전보다 훨씬 다채로워졌다. 코로나19 이후 원격 교류까지 크게 확대돼 기획·편집·제작 등 여러 면에서 발간도 순조롭다. 한편 이주자로서의 고립감이나 정체성 혼란 같은 이민 정서는 이전에 비해 한결 덜해졌다고 할 수 있다. 지금 이들은 대부분, 어쩔 수 없는 상태로 모국을 떠나 살면서 현지의 주류적 세계로 진입하지 못한 채 모국을 향한 그리움과 애국 정서를 모국어로 표출하며 공유하던 시기의 그들과는 분명히 다른 상태에 놓인 셈이다. 이들의 문학, 이들의 문학잡지는 이 새로운 상황에 부딪쳐 나가야 한다. 2. 국권 회복의 의지와 이민 정서의 표출   당연한 것이지만, 재미동포의 모국어 문학이 이민사 초기부터 전문적인 문학잡지로 지면을 확보했을 리 없다. 1904년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동포의 지식계발과 자주독립을 위한다는 취지’로 출범하며 창간한 《신죠신문(新朝新聞)》의 예로 이를 엿볼 수 있다. 이 《신조신문》은 국문 표기로 동포 사회의 정보 전달, 지식 고취, 조국 독립 의지 표현 등을 담은 다양한 글을 실었다. 이듬해 경영난으로 폐간할 때까지 수기(手記) 등사판으로 1년여 동안 월 2회 발간을 지속했다. 이 신문에 문학작품이 실린 기록이 남아 있는데 실제 어떤 규모와 형태인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다만 같은 시기, 재미동포 이민시의 최초로 보이는 「이민선 타던 전날」(이홍기, 1905)4) 등을 통해 그 유형을 짐작할 수 있다.   문학과 매체는 불가분의 관계인바, 한국문학사가 바로 이를 잘 증명해 왔다. 1908년 《소년》에 이어 《태서문예신보》(1918), 《개벽》(1920), 1920년 전후 《창조》·《백조》·《폐허》·《금성》 등은 시, 소설, 평론 등의 분야에서 주목할 만한 글을 선보이며 한국 현대문학의 형태와 방향을 잡은 매체다. 이와 직접 비교할 바는 아니지만 재미동포 사회에서도 이와 같은 기능을 한 매체가 몇 있다. 대표적인 것이 1913년 하와이에서 시사교양 증진과 주권 회복을 도모하기 위해 발행한 월간 국문 잡지 《태평양잡지》다. 정치·종교·교육·과학·문학 등을 망라한 종합지의 성격으로, 문학란에 이민자의 처지를 감안한 흥미 본위 번안소설을 중심으로 전래설화 스토리를 살린 장편소설 및 창작소설, 애국계몽을 표방한 창작시 등을 실었다. 재정난으로 도중에 12년간 휴간하는 풍파를 겪으면서도 1930년 12월까지 발행했고 모국어 문학의 주요 발표 지면으로 기능했다.5)   이어 주목할 매체는 1909년 2월 10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교민 단체인 ‘국민회’ 기관지로 창간한 《신한민보(新韓民報)》다.6) 처음부터 ‘민족의 대변기관’을 자처하며 주 1회 수요일마다 발행했다. 국권회복운동 관련 논설과 기사를 비롯해서 국내외 동포 소식을 폭넓게 실었고,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을 비판하는 내용도 빼놓지 않았다. 문학 분야는 이민 과정과 그 어려움, 항일 정서, 민중 계몽 의지 등을 담은 시·창가·민요·한시·한문 산문·시조·개화 가사·소설 등을 실었다. 특히 소설 분야에서는 국내 창작물과는 달리 검열이 없는 상태에서 식민지 현실을 묘사하고 항일 정신을 담는 등의 자유로움을 누렸고, 국내 신소설류에서 보이던 봉건적 가치관을 벗어나 달리 자유연애 등 새로운 풍속을 스토리화하기도 했다. 또 장인환·전명운 등 두 의사(『兩義士合傳』)와 안중근 의사(『大東偉人安重根傳』) 등 항일 애국 투사를 다룬 전기물에 대한 남다른 관심을 보인 것도 특기할 만하다. 《신한민보》는 재정 부족 등 여러 사정을 겪으며 몇 차례 휴간하기도 하지만 광복 이후까지도 존속해 한인들의 권익을 옹호하는 매체로 기능하면서 문학에서 애국주의에 입각한 낭만적 정서를 거듭 드러냈다.   1925년 한인 유학생들이 결집해서 창간한 《우라키(The Rocky)》도 재미동포 모국어 문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지면으로 기록할 만하다. 통상 재미동포 이민 역사를 하와이 노동자로부터 설명하는데 시기를 앞당겨 1882년 한미수호조약 이듬해 방미해 유학생이 된 유길준과 몇 년 사이 윤치호·서재필·서광범 등으로 이어진 유학·망명파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이후 유학생은 1910년 30명에 이르렀고, 1919년에는 77명, 그 이후 수백 명이 되는 과정에 유학생 집단 ‘북미학생총회’를 결성했다. 로키산맥을 뜻하는 말인 ‘우라키’는 ‘R’ 발음을 의식해 ‘우’라는 말을 앞에 붙여 원음에 가깝도록 표기했다. 연간 잡지로 1933년 총 7호로 종간하기까지 종교철학·교육·사회과학·자연과학·문예 등 다양한 분야를 수렴했는데 이중 문학작품은 시 29편, 수필 37편, 소설 6편, 평론 12편 등과 설명 58편, 논설·연설 69편, 번역을 포함한 기타 63편 등이었다. 《우라키》는 문학을 특별히 전문화해서 수렴한 잡지라 할 수는 없고, 종간호에 가까울수록 문예란도 줄어들었다. 그러나 고국에 대한 향수, 새로운 문화와의 가치 대비, 미국에서의 차별 등 다채로운 정서와 가치관을 드러낸 작품들로써 그 시대 한인들 특히 유학생들의 내면을 표출하는 문학 지면으로 기능을 수행했다.   《신조신문》에서 《우라키》에 이르는 여러 종의 매체는 대체로 종합지 성격이었고 문학을 할애했지만 목적성이 강했다. 일부 한글문학의 현장성과 변화 과정을 드러낸 자료적 측면 외에 한국문학사에서 새롭게 인식할 만한 내용은 드물었다. 문학작품이라는 의미에서 그것은 감정의 표출, 주제의 나열, 흥미 본위의 서술 등의 단계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내용은 1924년 “아시아로부터의 이민을 금지하고 동구로부터의 이민자 수에 할당량을 설정한” 이민법 개정으로 수십 년간 한인 인구의 유입이 크게 늘지 않은 것이나, 열악한 환경에서도 미주 전 지역의 한인들이 조국 광복 운동을 후원하는 과정에서 정신을 결집하고 실질적인 홍보 기능까지 담당해야 했던 시대적 요구와 더불어 이해해야 바람직하다. 도리어 국권 상실의 시기에 척박한 이민지에서 그 회복을 위한 굳건한 의지를 중심으로 진솔한 이민 정서, 모국에 대한 향수 등을 드러내 식민지 시대 한인 디아스포라의 면면을 집단적으로 실증하면서 민족정신과 ‘한글문학’에 대한 자긍을 유지했다는 점에서는 재삼 평가를 받아야 할 것이라고 본다. 3. 한국문학의 새로운 현장으로서의 미주문학   재미동포 한인 문학이 크게 달라진 것은 1965년 미국 이민법 개정 이후다. 이때부터 한인 이민이 급격히 늘어나기 시작해 1970-1980년대에는 연평균 2만 명을 상회했다. 그런 만큼 거주 지역도 넓어졌고 여러 주에 걸쳐 인구 밀집 지역도 나타났다. 국내 언론사로서 현지 법인으로 설립한 《미주한국일보》(1969), 《미주중앙일보》(1974) 등은 로스앤젤레스를 거점으로 전 지역 한인 밀집 도시로 외연을 넓혀가면서 ‘문예공모전’ 등을 개최해 모국어 문학 활동의 촉매가 되고 그 자체로 문학 매체 기능을 담당했다. 이런 배경에서 재미동포 사회에서 보다 진전된 문학잡지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재미동포 중 소위 전문 작가라 할 만한 문인들의 작품만으로 지면을 채운 첫 사례는 1973년 12월 창간한 《지평선》이다. 김진춘, 김시면, 김병현, 석진영, 정용진, 박영숙, 고원, 마종기, 황갑주, 최연홍 등 시인들이 함께한 동인지로 총 4호까지 결실을 남겼다. 시 장르로 한정했고, 그나마 1, 2호는 타자기 활자 상태의 수공업 제본이었다. 그러나 모국에서 등단 시인으로 활동한 시인들이 참여해 높은 문학적 수준을 유지한 점, 2호 이후 이들 중심으로 1975년 『재미시인선집』까지 발간해 문학 전문 매체의 가능성을 연 점 등 의의가 상당하다.7)『재미시인선집』은 활판 인쇄 제본이고 요즘 말하는 ‘선집’이 아닌 ‘공동시집’으로서 이후 시기 여러 ‘공동시집’의 모태가 되었다.   《지평선》과 『재미시인선집』으로 촉발된 전문 작가들의 움직임은 1982년 미주한국문인협회(Korean Literary Society of America)의 창립과 《미주문학》의 창간이라는 결실을 낳았다. 미주한국문인협회는 미주 전역 한인 문인들을 대상으로 한 범문단 단체로 로스앤젤레스에 본부를 두고 캘리포니아 주정부의 인가를 받아 출범했다. “미주에 거주하는 문인들이 올바른 문학의식을 가지고 한국문학으로 한국문화를 계승하는 한편 교포사회에 필요한 정신적 풍요로움을 문학을 통해 공급”(협회 ‘설립취지문’에서)한다는 취지에 미국, 캐나다의 한인 문인 총 100여 인이 함께 뜻을 합했다. 이들은 소위 ‘등단 문인’으로 이전의 동호인이나 애호가 집단과는 성격이 달랐다. 1982년 9월 2일 창단식을 가졌고 초대 회장으로 모국 문단의 소설가·언론인 출신 송상옥을 선출했다. 그해 12월 이 협회 기관지로 창간한 《미주문학》은 이후 재미동포 사회에서 보다 공적이고 집단적인 의미에서 ‘미주문학’의 구심점이 되었다. “   우리가 태어나서 이만큼 살아올 때까지 우리의 思考를 지배해 온 것은 母國語다. 우리는 母國語로 생각을 하며, 온갖 오묘한 감정표현도 母國語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 여기서 태어나 이곳 언어로만 살아온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가 한국인을 부모로 하여 태어난 이상, 그의 부모가 사용하는 言語를 한갓 먼 他國語로 취급할 수가 있을 것인가. 그들도 결국 돌아갈 곳은 母國의 文化圈 이외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   흔히 말하는 문학의 세계성이란 별다른 뜻이 아니다. ‘가장 한국적인 문학’이야말로 세계문학에 그대로 이어진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는 세계문학에의 하나의 디딤돌로 《미주문학》을 감히 내놓는다.   여기 몇 사람으로 시작한 《미주문학》의 탄생은 두말할 여지도 없이 하나의 큰 사건이다. 그 성과가 앞으로 어디까지 미치게 될지 속단할 수는 없지만, 중요한 출발이란 점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미국이라는 이상한 땅에서, 母國語로 표현되는 우리의 문학이 앞으로 어떤 빛깔과 모습의 꽃으로 만개될지 지켜보며, 끊임없이 보살피고 가꾸면서, 아울러 깊이와 폭을 넓히며, 우리는 이왕 시작한 이 작업을 꾸준히, 그리고 묵묵히 계속할 뿐이다. - 송상옥, 「세계 문학에의 디딤돌로」(권두언)에서 ”   《미주문학》 창간호는 이 단체 결성의 산파역을 한 것으로 알려진 전달문의 「두 개의 바다」를 비롯해 총 20인의 시를 앞세웠고, 송상옥·김광주·서승해의 단편소설, 최백산 외 12인의 수필, 오영민·황영애의 동화, 이사주·장소현의 희곡, 최금산·김명환·강달수의 평론 등 북미권 전 지역 문인 필진과 문학의 전 장르를 아우르는 구성으로 뒤를 받쳤다. 연간지로 시작했다가 2002년 제19호부터 모국 정부로부터 연간 1,000만 원 정도의 발간지원금을 받게 돼 계간지로 전환했고, 미주문학상과 신인상, 한글 백일장, 모국 문인 초청 특강과 문학 캠프, 세미나와 시화전 등 직접 주관한 연례행사를 통해 모국어 문학의 발굴·확산에 기여한 내용을 포함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모국 지원금은 중단됐지만 그만큼 자생력이 생겨 2010년 봄호로 제50호, 2022년 가을호로 제100호를 넘겼으며 2024년 가을호로 통권 108호가 된다. 창간호 162쪽이던 분량은 그사이 매호 300쪽에 달하고, 101명 회원이던 주소록은 총 400명을 넘어섰다.   재미동포 나아가 재외동포 이주사에서 미주한국문인협회와 《미주문학》은 ‘일대 사건’이라 할 수 있다. 다른 대륙 재외동포 문단에서는 없었던 규모와 전문성이라는 점, 북미권 전 지역의 한인 사회를 아우르는 대규모 집단이라는 점, 동포 사회에서 문학적으로 가장 앞선 인적 자원들이 핵심을 이루었다는 점, 창립 후 상당 기간 이러한 규모와 전문성을 심화하고 확산해 오면서 이민 사회에서 모국 문학의 새로운 현장으로 자리해 왔다는 점에서 바로 그렇다. 그 의미는 간단히 ‘미주 한인 문학사는 《미주문학》 이전과 이후로 구분할 수 있다’는 말로 정리할 수 있겠다.   《미주문학》 이후 미주 문단은 주목할 만한 다수의 문학 전문 잡지로 더욱 풍성해졌다. 1983년 《미주크리스찬문학》(미주크리스찬문인협회), 1987년 《외지(外地)》(재미시인협회) 등은 문인 단체 결성과 더불어 창간한 종합문예지다. 1988년에 창간한 《문학세계》는 단체 없이 미주 전역 문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종합문예지로 출범했다. 그 외에 1985년 동인지 《신대륙》, 같은 해 시카고의 동인지 《백양목》, 1986년 종합문예지 성격의 《객지문학》, 같은 해 북미권 시선집 『바람의 노래』 등도 이어졌다.   1990년대에는 특히 지역적 확장이라는 의미에서 주목할 만한 문학잡지의 등장을 보았다. 즉, 1989년 창립한 미동부한국문인협회의 《뉴욕문학》(1991), 1991년 워싱턴문인협회의 《워싱턴문학》과 애틀란타한인문학회의 《한돌문학》, 1995년 오렌지문학회(오렌지글사랑)의 《오렌지문학》과 샌프란시스코문인협회의 《샌프란시스코문학》, 1996년 시카고문학회의 《시카고문학》 등이 각각 뉴욕, 워싱턴, 애틀란타, 오렌지카운티, 샌프란시스코, 시카고 등의 거점으로 창간했다. 이 외에 1997년 해외문학회의 《해외문학》, 1999년 재미수필가협회의 《재미수필》, 그 밖에 《해외한국시》(1993), 《미주기독교문학》(1996), 《한뿌리》(1997), 《四海》(1999) 등이 창간의 줄을 이었다.   이어 2000년대는 《미주동백》(시사랑동백회, 2000), 《미주아동문학》(미주한국아동문학가협회, 2002), 《오레곤문학》(오레곤문인협회, 2002), 《예지문학》(시카고예지문학회, 2004), 《미주시학》(미주시인협회, 2005), 《달라스문학》(달라스한인문학회, 2005), 《애틀란타시문학》(《한돌문학》의 후신, 애틀란타문학회, 2006), 《시애틀문학》(시애틀문학회, 2007), 《버클리문학》(버클리문학협회, 2013), 《미주가톨릭문학》(미주가톨릭문학협회, 2016), 《미주한국소설》(미주한국소설가협회, 2018), 《한솔문학》(달라스한솔문학회, 2019), 《미주시조》(미주시조시인협회, 2022), 《K-Writer》((재)나무달, 2022) 등으로 이어졌다.8) 4. 구심(球心)과 향일(向日)에 원심(遠心)과 향월(向月)을 더하는 상상력   모국어 매체는 모국어 집단의 삶을 재조정하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 재미동포 사회의 모국어 문학잡지는 이민지 미국에서의 모국어 생활에 상당한 동력을 제공하고 있다. 재미동포의 정체성 유지와 자부심 고취, 개별적 창의력 개발과 실현, 모국 문화의 인문학 자양 수급, 커뮤니티를 통한 연대 강화 등 유무형의 이익도 발생한다. 한국문학사는 모국어 문학의 확장과 관련한 새로운 현장 자료를 얻고 함께 담론을 도출해 왔다. 그러나 이제 재미동포 사회는 전체적으로 장기 상주하는 인구수가 늘어나지 않고 있고 문인 집단 자체도 고령화하고 있다. 모국과의 유대와 소통이 원활해지면서 이민자로서의 감성적 체험의 폭도 날로 좁아 드는 상황이다. 이런 변화에 문학잡지의 기획과 발간 형태 나아가 그 내용 등에서 대응하고 있는 기미는 아직 잘 느껴지지 않는다.   이와 관련해 중앙아시아, 중국, 일본 등에서 유지해 온 기존 재외동포 모국어 문단이 와해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들 나라의 새로운 교역지대에 생겨나는 작지 않은 규모의 모국어 집단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런 변화는 21세기형 모국어 문단의 새로운 열림을 기대하게도 한다. 실제로 호주나 유럽, 동남아시아 등 세계 여러 곳의 기존 모국어 문단은 이렇듯 20, 21세기 형태가 공존하는 상황에 직면하고 있다. 재미동포 모국어 문단 역시 이런 공존을 의식하면서 새로운 변화를 모색해야 할 때라고 본다.   이를 위해서는 한국문학의 전통과 이민문학의 현장에서 모두 재미동포 모국어 집단을 여전히 20세기형 디아스포라로 바라보는 시각을 교정하면서 새로운 담론을 생성하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한국문학과 재미동포 모국어 문학은 서로 ‘초국가적 장거리 민족문학’9) 으로서의 한글문학이다. 재미동포 모국어 문학은 그동안 한국문학의 전통과 현장에 대한 고립과 단절을 모국을 향하는 구심(球心)과 향일(向日)의 정서로 극복하려 했다. 이를 바탕으로 이제 모국과 손쉽게 소통하고 연대하는 초국가적 장거리에서 원심(遠心)과 향월(向月)을 아우르는 상상력을 요청한다. 모국어 문학잡지의 개안과 분발을 기대한다. 각주 1)  재외동포는 「재외동포의 출입국과 법적지위에 관한 법률」에 따라 ‘해외 거주자로서 대한민국 국적을 소지한 적이 있는 사람과 그 직계 혈족’으로(종래는 3대까지) 규정되며, 이중 재미동포 수는 2023년 기준 262만 명으로 집계됐다(외교부). 2)  이형권, 「미주문학의 발전과 한글 문예지의 역할」, 《너머》 제4호, 한국문학번역원 웹진, 2023. 9. 1. 참조. 3)  재미동포 모국어 문학의 전개와 현황에 대한 전반적인 설명은 박덕규 외, 󰡔미주 한인문학(해외 한인문학 창작현황 자료집 1)󰡕(한국문학번역원, 2020)을 저본으로 했다. 4)  하와이 한인문학동인회 엮음, 『하와이 시심 100년』, 관악, 2005. 5) 《태평양잡지》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전해수, 「하와이 이주와 태평양 잡지」(《너머》 제6호, 한국문학번역원 웹진, 2024. 3. 1.)를 참조했다. 6) 《신한민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남기택, 「미주의 디아스포라 한글 문학」(《너머》 창간호, 한국문학번역원 웹진, 2022. 11. 14.)을 참조했다. 7) 《지평선》을 동인지로서 1940년대 초 만주에서 발행한 󰡔재만조선인시집(在滿朝鮮人詩集)󰡕 이후 ‘해외동포 문단의 두 번째 결실’로 평가하기도 하는데, 이는 이전 일본 도쿄에서 나온 《창조》(1919) 등을 감안해 조정할 필요가 있다. 8)  이형권의 앞의 글에서 ‘미주 문단의 한글 문예지’를 정리하면서 미주 권역을 넓혀 캐나다의 《캐나다문학》(캐나다한인문인협회, 1977), 아르헨티나의 《로스안데스문학》(재아르헨티나문인협회 1996)까지 포괄했다. 9)  홍용희는 「한인 문학의 창조적 소통을 위하여」(《너머》 제4호, 한국문학번역원 웹진, 2023. 9. 1.)에서 ‘속지주의’의 논의 차원을 넘어 ‘장거리 민족주의’ 개념의 ‘상상의 공동체’를 설명하고 있다.

고려인 잡지 문학: 기로에 선 문예지에서 세대교체에 따른 맞춤형 플랫폼으로

이은경 한국

1. 서론: 러시아 문예지의 전통과 고려인 잡지 문학   러시아와 중앙아시아에 거주하는 한국 동포들은 자신을 ‘고려 사람’이라고 일컬으며 민족적 자존감과 긍지를 지켜왔다. 이런 그들을 하나로 묶는 데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것이 여러 가지 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신문과 잡지 문학이었다. 그 이유는 이들이 새롭게 정착했던 타지의 생활환경과 사회적 분위기에서 비롯된다.   러시아는 문학의 역사가 깊은 곳인 만큼 이들에게 미친 영향 또한 적지 않았다. 신문과 잡지는 러시아 근대문학을 태동시킨 연단이었다. 이들 매체는 문학의 양식과 미학, 재생산 방식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일종의 사회 제도나 다름없었다. 특히 잡지의 시대로 불리던 18세기 중반에는 근대 계몽사상을 전파하는 문학을 소개하고 유통하고 독서와 글쓰기를 훈육하는 공격적 장치로 활용되었다.1) 이런 러시아 문예지 전통은 러시아 땅에 정착한 한인들의 삶에도 영향을 미쳤다.   구한말에서 1920년대 초까지 극동에서는 동포들에게 항일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시대정신을 견인하는 다양한 한글 매체들이 성행했다. 그중에서도 1923년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창간된 한글 신문 《선봉》은 고려인의 역사와 사회문화, 고려인 문학에 대한 구체적 증언이라는 점에서 역사적으로도 문학적으로도 의의가 깊다.   1923년 3월 1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3·1운동 제4주년을 기념하여 《삼월일일》이라는 신문이 발간됐다. 이후 신문은 제4호부터 《선봉》으로 제호가 바뀌었고, 1938년에는 《레닌기치》로, 그리고 1991년에는 《고려일보》로 변경됐다. 시대별로 달라진 제호처럼 이 신문은 시대적 이데올로기와 긴밀하게 연동하면서 고려인 디아스포라의 삶을 다각적으로 조명했다. 또한 선구적 문예지로서 역할도 담당했다. 이 지면을 통해 고려인 작가들은 다양한 문학작품을 선보이며 자신들의 삶을 그려냈다.   고려인 잡지 문학이 러시아의 환경에서 발원했다는 것은 내용과 실천 방식에서 증명된다. 러시아 작가들은 잡지 지면을 통해 여러 사회 문제를 놓고 격론을 벌였다. 잡지의 이런 성격은 때로는 진보적이거나 혁명적이었고 또 때로는 관제언론의 역할을 자처하며 보수 이데올로기를 이끌었고, 또한 세속문학을 무기로 독자층으로부터 대중성을 확보해 나가는 등 다양한 모습을 제시했다. 러시아 잡지 문학은 교훈성, 비판성, 사회성이라는 강한 특징과 함께 사회의 능동적인 역할을 담당해 나갔다. 《선봉》, 《레닌기치》, 《고려일보》가 정치적 이데올로기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던 점, 그리고 고려인 디아스포라의 중심축이었다는 점에서 러시아 잡지 문학으로부터의 영향을 충분히 엿볼 수 있다. 2. 한글 문학장을 제시한 고려인 잡지 문학   《선봉》 시기는 소련 정치 이념에 충실할 수밖에 없는 소수민족으로서의 고려인 사회를 보여준다. 《선봉》에 실린 문학 작품들은 주로 ‘3·1운동’과 ‘항일 민족 운동’이 주를 이뤘고, 산업현장에서의 육체적, 정신적 헌신과 계몽운동, 남녀평등 등 고려인 사회의 삶과 가치를 주제화했다. 대중을 공론의 장으로 끌어들여 사회 이상을 설파하고 계몽해 나가는 데 앞장서면서, 동시에 고려인 작가들의 한글 작품을 널리 소개했으며 한국어의 바른 표기법이 확립될 수 있도록 어문학자들을 후원했다. 《선봉》이 문예지로서 지위를 얻는 데에는 1938년 연해주로 망명해 온 포석 조명희의 역할이 컸다. 투고자가 부족해서 존폐 위기를 겪던 문예란에 조명희는 직접 운율과 리듬이 뛰어난 풍부한 내용의 작품들을 선보이며 지면의 위상을 높였다. 「짓밟힌 고려」, 「볼셰비키의 봄」, 「십월의 노래」, 「맹세하고 나아서자」, 「여자 공격대」, 「‘오일’ 시위운동장에서」, 「조선의 놀애들을 개혁하자」 등 《선봉》에 실린 조명희의 작품은 정치적 이데올로기와 고양된 파포스가 특징으로, 조선적 민족주의와 소련적 사회주의의 결합체라는 평가를 받았다.2) 그러나 《선봉》에 실린 시, 소설, 평론 등의 작품들은 형식이나 내용 면에서 한국적 정서와는 거리가 상당히 멀었다. 당시는 당 이념으로부터 온전히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래서 《선봉》 시대가 소수민족인 고려인 사회에서 실질적인 ‘고려화’ 정책이 쉽지 않았던 만큼 고향과 민족 정서를 적극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토양은 아니었다는 지적도 있다.3)   1938년 5월 15일 카자흐스탄에서는 《선봉》을 기반으로 4면짜리 타블로이드판 신문 《레닌기치》가 창간된다. 스탈린의 강제 이주와 더불어 시작된 이 시기는 한층 강력한 소비에트 전체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레닌기치》는 1954년 1월 1일부터는 주 5회에 걸쳐 7,000부를 발행했으며 지면 확대와 함께 ‘문예지란’이 활성화되면서 한글문학이 점차 꽃피우기 시작했다. 1980년대까지 기존의 1세대 작가들과 신예작가들의 참여로 다양한 작품이 실렸고 1958년에서 1990년 사이에 출간된 한글문학 단행본만도 15권에 이를 정도였다.   신문 발행 기간이 길었던 만큼 작품 주제도 시기별로 크게 구분되었다. 강제 이주 직후인 1938년부터 1954년 스탈린이 사망하기 전까지는 사회적으로 경색된 분위기 속에 소련 정치 이념을 찬양하는 주제의 작품들이 주종을 이뤘다. 그 이후부터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등장하는 1985년까지의 시기에는 고려인 문학이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한다. 니키타 흐루쇼프의 해빙기와 고르바초프 서기장의 개혁기가 열리면서 고려인 사회는 주체적인 목소리를 점점 띠기 시작한다. 가장 특징적인 현상은 이전에는 전혀 등장할 수 없었던 스탈린 정치의 부조리와 강제 이주 역사가 이들의 작품 속에 등장한다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고르바초프 서기장이 취임한 1985년부터 소련이 붕괴하는 1991년까지의 시기는 개혁·개방의 분위기가 두드러졌다. 이와 함께 1990년 한·러 수교로 조국과의 적극적인 소통이 가능해진 고려인들은 민족정체성을 회복하고, 자유의 목소리를 담아내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 시기 고려인 문학은 아이러니하게도 정점에서 쇠퇴를 맞이하기에 이른다. 세대교체가 제대로 이뤄지지 못한 탓이었다. 이는 자연스럽게 한글문학 지형이 좁아지는 결과로 이어졌다. 한글세대들의 고령화와 더불어 후속세대를 배출해 내지 못하면서 고려인 문학은 찬란했던 걸음을 멈추고 만다.   1991년 《레닌기치》는 시대의 선언과도 같은 또 한 차례의 변신을 꾀한다. 제호를 《고려일보》로 바꾸고 이제 그들이 정착한 땅의 이데올로기가 아닌 편집인과 발행인, 구독자의 민족적 정체성을 선포하고 그것에 더욱 충실해질 것임을 천명했다. 《고려일보》는 수필과 소설, 평론이 간간이 소개되기는 했으나 앞서 《선봉》이나 《레닌기치》에 비해 문예란이 상대적으로 많이 축소됐다. 이 시기 특징적인 것은 고려인 작가의 작품뿐 아니라 한국 현대문학도 소개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고려일보》 시기 문학작품의 주요 주제는 고향과 역사적 조국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에게 고향은 조국(한국)과 더불어 돌아갈 수 없는 연해주 지역이었다. 기억과 그리움을 모티프로 삼은 수많은 작품이 등장했고, 연해주를 상징하는 ‘바다’는 고려인 작가들이 즐겨 사용하던 이미지 중 하나였다. 《고려일보》는 한국과의 교류·협력과 소통의 공간으로 기능하면서 한국의 고전과 전래동화, 문학작품, 한인 디아스포라의 작품을 소개했다. 3. 위기의 고려인 디아스포라 한글문학   고려인 잡지 문학은 모국어와 한글문학으로 민족 얼을 계승하고자 했던 선각자들의 의지로 어느덧 100여 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아이러니하지만 고려인 잡지 문학의 최대 위기는 소련 붕괴 이후 오늘날에 이르는 30여 년의 지난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정치적 외압이 사라지고 경제적 어려운 시기도 잘 극복했지만, 현재 고려인은 또 다른 시대의 큰 파도를 넘고 있다.   스탈린 시대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한 고려인 가운데 소련 붕괴 이후 정치적·경제적 이유에서 연해주로 재이주하는 경우가 많았다. 여기에 더해 중앙아시아 국가 대부분이 독립 이후 러시아어 대신 자국어 우선 정책을 펼침으로써 이들의 이주에 영향을 미쳤다. 결국 배타적 민족주의의 대두로 고려인들은 생활에 큰 불편함을 느끼고 다시 러시아로 재이주하기에 이른다. 소련 시민으로 살던 이들에게 이는 큰 시련일 수밖에 없었다.   러시아와 중앙아시아 거주 고려인은 현재 50만 명에 달한다. 인구 비율은 전보다 줄었지만, 이것이 고려인 디아스포라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지는 않다. 문제는 오늘날 이들이 과거와는 사뭇 다른 정체성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고려인 1, 2세대만 하더라도 모국어, 즉 한국어에 대한 사랑이 남달랐다. 그들은 비록 몸은 타국에 있어도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고자 했으며 이런 민족의식의 일부로 한글 매체를 탄생시키고 이어왔으며 온갖 어려움에도 굴하지 않았다. 정규교육은 러시아어로 이뤄졌지만, 가정에서는 한국어를 사용했고, 고려인 학교에서 한글 공부는 아주 중요한 과목이었다. 현대 한국인의 눈으로 보면 중앙아시아 고려인이 사용하는 독특한 한국어 억양과 어휘가 낯설 수 있다. 그러나 카자흐스탄에서 활동한 고려인 시인 스타니슬라브 리는 고려인들의 한국어가 독특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문맹과 무지에서 비롯된다고 설명한다. 그는 고려인들이 대한민국에 살지 않아서 현대 한국어를 모를 뿐, 러시아로 이주해 올 당시였던 조선 후기의 언어를 유창하게 사용하고 있다고 자부한다. 4)   이들 스스로 ‘고려 말’, ‘고려 사람’이라고 명명한 것 역시 우리가 고려인이라고 부르는 것과 달리 ‘순수 한국어’를 고집하는 민족정신에 기인한다. 그러나 3세대에서 4세대, 5세대를 점차 거치면서 고려인들은 한국어를 잊어가고 있다. 한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던 세대들이 사라지고 적절한 교육 지원마저 이뤄지지 못해 한국어 습득이 늦어지면서 신세대 고려인들은 한국 문화와 정체성을 받아들이는 데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들은 러시아식 교육과 러시아 문화의 세례를 받은 고려인으로서 이전 세대와는 다른 가치관과 문화를 가진 사람들이다. 한국어 교육과 보존에 대한 강한 열망보다는 세계 속에 한국의 위상이 높아짐에 따라 자신이 그곳과 연결되어 있음을 느끼는 정도에 불과하다. 한류의 영향으로 K-팝, K-드라마에 매료되는 세대이지, 과거처럼 현지에서 출간되는 한글 매체를 공유하는 세대가 아니고 한국어로 읽고 쓰는 세대가 더는 아니라는 점에서 기존 세대들과 확연한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 한국인과는 다른 정체성에 대한 고민은 어찌 보면 그 이전부터 존재해 왔음을 스타니슬라브 리의 「고려 사람」이라는 제목의 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 칠십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고려 사람에게는 성(姓)과 외모만이 남았을 뿐이다. 러시아어로 말하고 생각하고 타민족에게서 가장 좋은 것(문화)를 흡수하고 흉내를 냈다. 잃어버린 것에 대한 견디기 힘든 슬픔은 남아 있지만, 이마저도 모두가 다 그런 것은 아니었다…… 많은 이들이 마치 우리가 고유한 민족성을 잃어버리고 큰 피해를 입은 사람들인 것처럼 생각하는 듯하다. 우리는 낯선 얼굴을 한 사람이다. 나는 또다시 그곳오랫동안 가보지 않던저녁 황혼 속에은하수가 흐르고쑥 냄새 나는 매운 연기가 피어오르는 그곳.저 멀리 나 역시친척들과 지인들과 둘러앉아집중하며 숨을 죽인 채노인들이 나누는 얘기에 귀를 기울이네아아, 가난과 고난의머나먼 길이젊은 나의영혼에 드리워져 있네쓰라린 말들할아버지의 미소그리고 꺼져가는 모닥불…… 5) ”   그러나 스타니슬라브 리처럼 한국어를 이해하고 민족적 정체성이 작품 속에서 중요하게 작동하는 고려인 작가들이 점차 줄고 있다. 스타니슬라브 리는 탁월한 문학적 재능으로 카자흐스탄을 넘어 러시아에까지 활동 영역을 넓힌 아주 드문 경우이다. 고려인 작가 대다수가 민족정체성, 고향에 대한 그리움, 한국적 소재만으로 해당 국가의 문학 중심으로 들어가기에는 주제와 소재에서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오히려 재능 있는 고려인 중견작가와 신진작가 중에는 한국어와 한국적 정체성을 전혀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러시아 또는 중앙아시아적 소재를 갖고 러시아식 문체로 글을 쓰는 사람이 점차 늘고 있다. 이들은 한국어를 거의 구사하지 못하고 러시아어에 능통한 러시아 작가 또는 중앙아시아 작가로 활동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세대 변화로 인해 고려인 독자층을 대상으로 하는 한글 매체가 안은 미래의 과제가 간단치만은 않다. 독립을 위해 앞장서고, 낯선 외부 환경 속에서 민족적 단결을 외치고 자존감을 이어오던 과거와는 달리 오늘날 대다수 고려인이 러시아어 매체로 전환한 가운데 《고려일보》는 2016년부터 4면에 걸친 간지 형태로 한글판을 싣고 있다. 한국어로 읽지 못하는 세대들이 등장한 만큼 러시아어를 통해서라도 민족적인 것을 이어가려는 결단이 필요했음을 알 수 있다. 이들 매체는 러시아어로 발간되기는 해도 과거와 마찬가지로 민족 전통의 수호자 역할을 이어오면서 동시에 세대교체에 따른 맞춤형 플랫폼으로 거듭나고 있다. 4. 맞춤형 플랫폼으로의 모색, 그리고 역사적 조국과의 거리감   이런 점에서 《고려일보》 창간 100주년을 맞아 2023년부터 2024년 현재까지 6호가 발간된 잡지 《키스토리(KISTORY)》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65쪽 안팎 분량의 컬러판 러시아어 잡지인 《키스토리》는 고려인 중에 괄목할 만한 성과를 일군 과거와 현재 인물의 인터뷰, 한국 소식, 다양한 한국 문화와 전통, 언어 표현 등이 주된 내용을 이룬다. 아쉬운 점은 고려인 작가의 글을 한 편씩 싣던 잡지의 코너마저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만큼 한국과 연결할 수 있는 고려인 작가층이 그리 두텁지 않음을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물론 전 세계적으로 공통된 현상이기는 하지만 문자 세대의 퇴장과 함께 순수문학의 지면도 점점 사라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대신 영화와 연극 등 시각 매체 중심의 문화란이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키스토리》 창간호는 첫 페이지에 스타니슬라브 리의 시를 실었고 뒤이어 카자흐스탄과 한국에 관한 다양한 소식으로 지면을 채웠다. 《키스토리》 제2호의 마지막 부분에는 시집 《판소리의 메아리》(2014)를 통해 「처용가」와 「서동요」 등을 선보이고, 「고구려가(歌)」 등 한국 역사와 문학을 소재로 한 시들을 꾸준히 발표해 온 우즈베키스탄 출신 시인 류드밀라 지니나-초이(최)의 「고려 사람에 관한 생각」이라는 시가 실렸다. 그녀의 시는 이전의 고려인 작가들이 묘사하던 역사적 조국과 달리 새로 정착한 땅을 고향으로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사뭇 다른 느낌을 전한다. “ 나는 내 민족, 나의 영원한 민족에 대해 노래하고 싶어요. 그들의 드라마를 멋진 전설로 만들고 싶어요…… 그들은 은하수보다도 더 오래된 지혜를 가진 사람들이랍니다. 새끼 곰 단군은…… 어미를 잃었어요. (……) 수많은 고되고 명예로운 노동을 고려 사람은 여러 세대에 걸쳐 겸손하게 이어왔습니다. 돈도 칭찬도 아닌 위대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이름으로 그 사랑은 우리 아이들을 이방인으로 여기지 않는 이 땅과 이곳 사람들을 향한 사랑입니다. 우리는 영원히 뗄 수 없는 사이가 될 것입니다. 이보다 더 아름다운 사랑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6) ”   이 시에서 고려인들은 어미를 잃은 새끼 곰 단군으로 묘사된다. 새로운 땅에 잘 정착해서 살아온 고려인들의 삶에 자부하면서 물욕이 우선이 아닌 그저 수고했음을 칭찬하는 칭호만으로도 감격하고 살아왔음을 전한다. 이 시에는 한국 역사와 고려인 역사 간의 차이에서 비롯된 몇 가지 오해와 거리감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전쟁에 휩싸이고 일본인을 증오하며 살았던 조국의 사람들과 달리 고려인들은 그저 일하면서 겸손히 사랑으로 세대를 이어왔음을 강조한다. 더불어 그들이 사는 땅이야말로 진정한 고향이며 자신들을 포용해 준 이웃 민족들이 사랑의 대상이라고 선포한다. 이 시의 마지막 부분에서 아름다움에 대한 찬사는 물신주의가 팽배한 세계에 대한 승리처럼 울려 퍼진다.   과거 1, 2세대 고려인 작가들이 조국과의 연계를 노래했다면, 새로운 세대는 조국인 한국에 대한 낯섦과 이질감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이 대목에서 역사의 과정을 다르게 밟아왔다는 이유에서 곱지 않은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멀리하는 조국에 대한 원망과 섭섭함마저 느껴진다. 이들에게 한국의 이미지는 더는 이상적이지 않다. 조상의 나라가 있었기에 한 뿌리임을 여전히 느끼고 있을지라도 역사의 다른 길을 걸어왔다는 이유로 먼 남이 되어버린 서글픈 현실을 그린다. 그런 가운데 삶을 잘 살아왔다는 자부심과 정신적 우월감이 웅장하게 울린다. 5. 결론   고려인 잡지 문학은 고려인 디아스포라 공동체 삶의 궤적을 총체적으로 보여준다. 새로운 터전에서 뿌리내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던 노력과 애국적 열정, 조국을 향한 그리움이 얼마나 열정적이었는지를 보여준다. 전 세계적으로 공통 현상인 문자 세대의 소멸이라는 요인 외에도 한글 작가 세대가 퇴장하면서 새로운 세대들로 전환되지 못했던 것이 고려인 문학의 치명적인 쇠퇴를 불러올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고려인 공동체에 대한 한글 지원과 러시아어로 글을 쓰는 고려인 작가들에 대한 지속적 관심, 사라져가는 고려인의 언어(조선 후기 언어)에 대한 보존이 시급하다고 생각한다. 또한, 고려인이 역사적 조국인 한국에 한 걸음 더 가깝게 다가갈 수 있게 해주는 한국문학 소개와 번역 사업 등이 더 활발하게 이뤄지길 기대한다. 각주 1) 강수경, 「18세기 러시아 여성잡지와 여성의 독서: 월간유행, 부인용 문고(Модное ежемесячное издание, или Библиотека для дамского туалета)(1779)를 중심으로」, 《러시아학》, 제19호, 2019, 1쪽. 2) 우정권 편저, 『조명희와 『선봉』』, 서울: 역락, 2005, 11-59쪽. 3) 김환기, 「구소련권 고려인 디아스포라 문학의 형성과 전개양상: 『선봉』/『레닌기치』/『고려일보』를 중심으로」, 《동악어문학》 제82집, 2020, 54쪽. 4) Станислав Ли, Заметки на рисовом зёрнышке(Алматы, 2024), с. 9. 5) Там же, с. 8. 이은경 옮김. 6) Людмила Зинима-Цой, “Дума о корё сарам”, 《Kistory》 № 2, 2023, с. 66-67. 이은경 옮김.

재중 한글 문예지의 어제와 오늘

천춘화 중국

코리안 디아스포라 문학의 형성과 발전에 있어서 한글 문예지는 사뭇 중요한 역할을 발휘해 왔다. 특히 조선족 문학의 생성과 발전 과정에서 그 역할은 더욱 중요하다. 재중동포라 불리기도 하는 ‘조선족’은 재미교포, 재일교포, 고려인 그리고 기타 지역에 산재해 있는 해외동포들과는 달리, 중국 내에 민족학교를 가지고 있고, 민족어 교육을 진행할 수 있는 교육·문화적 환경을 갖추고 있다. 따라서 조선족 문학의 형성과 발전은 기타 코리안 디아스포라 문학과는 조금 다른 역사·문화적 맥락을 가지고 있으며, 그 기원은 멀리 식민지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 이민 문단과 동인지 《북향》 조선인의 중국 동북 이주는 19세기부터 시작하여 식민지 시기 내내 꾸준하게 이루어졌다. 그중에서도 본격적인 이주는 한일병합조약을 전후한 1910년 즈음부터 시작하여 1945년 해방 무렵까지 이어졌다. 초기에는 오늘날의 연변(延邊)에 해당하는 간도(間島) 지역으로의 개인적이고 산발적인 이주가 이루어지다가, 식민지 말기로 접어들면서는 동북 전 지역으로의 집단 이민이 추진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간도는 만주 조선인 사회의 중심지로 자리 잡았고, 용정(龍井)은 간도의 서울로 거듭났다. 조선족 문학의 전신인 재만 조선인 문학은 용정에서 발원했으며, 이는 용정의 위상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진다. 무엇보다도 용정은 조선인 이민의 첫 동네였다는 점에서 유서 깊은 고장이다. 1877년 평안북도의 이재민들이 오랑캐령을 넘어 간도로 이주했고, 그들이 제일 처음 자리 잡은 지역이 육도구(六道溝)였다. 그 후 1886년, 이 지역에서 여진인들이 사용하던 우물이 발견되면서 조선인 정진이 ‘용두레 우물’의 용(龍) 자와 우물 정(井) 자를 따서 ‘용정(龍井)’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지었다. 1)이렇게 ‘용정’은 ‘육도구’라는 옛 명칭을 제치고 새로운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했으며, 1900년에 이르면 청나라 관방에서도 ‘용정’이라는 이름을 공식적으로 상용하기에 이른다. 용정의 또 하나의 부동의 위상은 만주 조선인 사회의 교육 중심지라는 사실이다. 오늘날의 용정시는 ‘용정촌’과 ‘명동촌’을 중심으로 확장된 행정구역이다. ‘용정촌’이 조선인 이민의 첫 동네였다면, ‘명동촌’은 만주 조선인 사회의 교육 중심지였다. 1899년 종성에서 이주한 김약연 일가를 비롯한 25세대가 터를 잡고 형성한 ‘명동촌’은 그 첫 시작부터 남달랐다. 그들은 교육을 위한 학전(學田)을 공동으로 경작했고, ‘동쪽을 밝힌다’, 즉 ‘조선을 밝게 한다’라는 의미에서 동네의 이름을 ‘명동(明東)’이라 지었다. 2)간도 최초의 민족교육 기관이었던 서전서숙(瑞甸書塾)이 명동촌에서 첫 출발을 알린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을 것이다. 그 후 서전서숙은 근대식 교육기관인 명동학교로 발전했고, 용정은 점차 명실상부한 만주 조선인 사회의 정치, 경제, 문화, 교육의 중심지로 거듭났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용정은 3·13 반일 시위의 근원지가 되었고, 간도조선공산당 사건의 중심지로 거듭났으며 나아가 이민 문학의 발원지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이민 동네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말이라지만 문단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썩 후인 1930년대에 들어서이다. 일부 산발적인 기록에서 한글 일간지 《간도일보(間島日報)》와 《만몽일보(滿蒙日報)》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지만, 오늘날 그 실물을 확인할 길은 없다. 현재 우리가 접할 수 있는 대표적인 자료는 상기의 두 일간지가 합병되어 새롭게 출발한 《만선일보(滿鮮日報)》가 거의 유일하며, 문예지로는 동인지 《북향(北鄕)》이 전해진다. 《북향》 2호 목차 (출처: 오케이서적 제공) 《북향》은 북향회(北鄕會)의 동인지였고, 간도에서 발행된 최초의 순수 문예지였다. 용정의 젊은 교사들이 주축이 되어 만들어진 문학지였으며, 그 출발에는 이주복과 안수길이 있었다. 당시 안수길은 일본 유학 중에 부친의 병환으로 간도의 집에 돌아와 있었고, 광명중학교 영어 교사였던 이주복이 그 시기 안수길의 집에서 하숙을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가까워졌고, 그들은 “간도는 한국 사람들의 제2의 고향이다, 여기에 우리의 문학을 이룩해 보자” 3) 라는 뜻에서 ‘북향회’라는 동인회를 발족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안수길이 직장 문제로 용정을 떠나고, 이주복이 가족을 용정으로 불러들여 하숙을 그만두게 되면서 북향회의 발족은 예정대로 추진되지 못했다. 안수길의 회고에 따르면, 그가 용정을 떠나 있는 사이인 1933년경 이주복의 주선으로 북향회가 용정에서 정식으로 발족하였고, 그 구성원은 주로 용정의 중학교들에 재직 중인 젊은 교사들이었다고 한다. 초창기 멤버 중에는 모윤숙도 포함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이주복이 학생들을 데리고 프린트물 형식으로 발행하다가 후에 본격적인 동인지로 출발하게 되는데 제1호가 발행된 것이 1935년 10월이었다. 북향회는 용정에서 동인지를 준비하는 한편 문예 강연회를 개최하는 등 만주 조선인 문학 건설을 위해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북향회 멤버에는 이주복을 비롯하여 김국진, 박영준, 강경애, 안수길 등이 포함되어 있었고, 유실된 《북향》 제1호 목차에 따르면 안수길이 루쉰(魯迅)의 단편소설 「고향(故鄕)」을 번역해서 실었고, 이학인의 단편소설 「인간동지」, 박영준의 수필 「해란강」, 강경애의 시 「이역의 봄」이 함께 게재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에서 알 수 있듯이 《북향》은 논설, 논문, 단편소설, 수필, 시, 번역소설 등으로 다양하게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북향》은 1935년 10월부터 1936년 8월까지 겨우 4호를 발행하고는 폐간되었다. 훗날 《북향》의 영인본이 용정시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 문화총서로 발간된 《일송정》 제2기-제4기에 순차적으로 공개되었다. 북향회는 자발적으로 결성된 순수 문학 단체였고, ‘북향’이라는 그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국땅에 민족문학을 발전시키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 무엇보다도 문예지 《북향》은 만주에서 만들어진 최초의 한글 문예지라는 데에 중요한 의미가 있으며, 《북향》의 발간은 만주 조선인 문단의 존재를 확인시켜 줌과 동시에 그 발전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소중한 자산으로 남았다. 《북향》 폐간 후 재만 조선인 문단은 신경(현재의 長春)의 《만선일보》 학예면으로 이동해 지속적인 활동을 펼쳐갔다. 《북향》은 비록 짧게 존재했지만 그 문학사적 의의와 문학적 가치는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일송정》 제4기 부록에 《북향》 4호 영인본 수록 (출처: 오케이서적 제공) 2. 조선족 문학의 탄생과 《연변문예》 식민지 시기 조선인들에 의해 애써 건설되었던 문단은 해방과 함께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해방은 급작스럽게 도래했고, 그것은 한반도에 있어서나 만주에 있어서나 마찬가지였다. 해방과 함께 만주국은 사라졌고, ‘재만 조선인’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 대부분의 조선인들은 조국으로의 귀환을 선택했고, 문인들 역시 예외는 없었다. 재만 조선인 문학의 대표 작가로 언급되었던 염상섭, 박영준, 현경준, 김조규 등을 비롯한 대부분 작가들이 각자 한반도의 남과 북으로의 귀환했고, 안수길과 같은 일부 작가들은 북의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월남을 감행했다. 일부 사람들만이 중국 동북에 남는 것을 선택했는데 그들이 훗날 중국 조선족이 되었고, 조선족 문학의 선구자들이 되었다. 종전과 함께 한반도와 중국은 모두 해방을 맞이했지만 두 나라는 각자 다시 이데올로기 전쟁을 겪어야 했다. 그 과정에 한반도는 남북으로 분단되었고, 중국은 국공 내전을 겪으면서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을 이끌어냈다. 중국에 남았던 조선인들은 ‘중국 조선족’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새 나라 국민으로 편입되었다. 이는 중국공산당의 소수민족 정책 덕분이었는데, 중국공산당은 각 소수민족이 자신들의 언어와 문자를 발전시키고, 풍습과 종교 신앙을 유지, 발전, 개혁해 나갈 수 있는 자유를 보장해 줌과 동시에 각 소수민족의 문화와 교육 사업을 적극 협조해 줄 것을 보장했기 때문이다. 이런 취지하에 설립된 것이 연변조선족자치구였고 해방 후 조선족 문학은 연변을 중심으로 한 동북 지역에서 재건되었다. 해방 후 조선족 문단은 주로 두 부류의 문인들에 의해 재건되었다. 하나는 동북항일연군과 조선의용군 선전대 출신의 간부들이었고, 다른 하나는 교사 출신의 문인들이었다. 4)최채, 정길운 등과 같은 인물들이 첫 번째 부류의 혁명가 문인들이었고, 두 번째 부류가 김창걸과 같이 식민지 시기 《만선일보》를 통해 등단한 교사 문인들이었다. 그러나 혁명성과 당성이 무엇보다도 강조되었던 당대의 배경에서 문단의 건설은 자연스럽게 혁명가 문인들에 의해 주도되었고, 이러한 환경 속에서 연변에서 처음으로 결성된 문학예술 단체가 연변문예연구회(延邊文藝硏究會)였다. 이 단체는 1950년 1월 15일 최채, 현남극, 김동구, 이홍규, 임효언 등의 발기하에 연길에서 결성되었고, 산하에 문학, 연극, 미술, 음악, 무용 등 5개 분과를 두었다. 이 단체는 문학과 예술을 사회주의 문예로 개조하기 위하여 소집되었던 단체였던지라 연변 지역 문예 사업을 지도하고 새 시대의 민족문학을 건설하는 것을 그 주요 목적으로 삼았다. 이를 위해 1951년 4월 23일에는 더 많은 조선족 문화인들을 결집하기 위한 연변문학예술계련합준비위원회를 결성했고, 6월에는 기관지 《연변문예》를 창간하기에 이른다. 《연변문예》는 새 중국 설립 이후 연변에서 최초로 발행된 문예지였고, 이 문예지의 발행을 통해 비로소 문인들이 작품을 발표할 수 있는 지면을 확보함과 동시에 문학의 장을 마련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시기의 《연변문예》의 핵심은 문학을 통한 반혁명 진압과 애국주의 사상의 선전이었다. 이는 사실 중국에서 ‘항미원조(抗美援朝)’라 불렸던 한국전쟁의 발발과 무관하지 않다. 《연변문예》는 연변 각지에 있는 “창작 간부”(직업 문인)와 일반 문예인(지식 청년층), 초중등학생을 대상으로 당정(黨政) 정책을 군중 속에 널리 관철시켰고, 그 과정에 전형을 창조하고 우수한 문예작품을 널리 소개하는 데에 주력했다. 5)중국 조선족에게 있어서 이 시기는 재중 조선인에서 중국 조선족으로의 과도기였고, 동시에 소수민족으로서의 조선족의 정체성을 확립해 나가는 시기이기도 했다. 이 시기의 문학은 《연변문예》를 통해 이러한 조선족들의 내면과 한국전쟁에 대한 입장, 그리고 반혁명투쟁에 임하는 자세 등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연변문예》는 1951년 11월까지 6호를 발간하고는 정간되었다가 1954년 1월 연변문학예술계연합회의 기관지로 재창간된다.6) 1954년 창간된 《연변문예》는 기존의 《연변문예》의 복간은 아니었다. 1954년 창간된 《연변문예》는 연변문학예술계연합회, 즉 연변문련의 기관지로 출발하게 되는데 1953년 7월에 결성된 이 단체는 1956년 8월 중국작가협회에 가입하고, 《연변문예》는 중국작가협회연변분회 기관지로 재탄생한다. 중국작가협회연변분회는 중국의 소수민족지구에서는 가장 처음으로 조직된 중국작가협회의 직속 분회였다. 7) 전기의 《연변문예》가 반혁명투쟁, 애국주의 사상의 선도를 우선시했던 것과는 달리 재창간된 《연변문예》는 “국가 과도시기의 총로선과 총임무의 요구에 근거하고 인민군중 주로는 로농군중의 요구에 근거하여 규정지으며 관철시켜야 할 것” 8)이라는 중국공산당의 기본 방향을 수용하면서 출발하고 있다. 이러한 취지는 문학 창작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당국에서 제시하고 있는 중국 문학의 기본 방향을 전제한 조건하에서 《연변문예》가 해야 할 일은 중앙의 문예지에 발표된 당정(黨政) 관련 논설과 우수한 작품들을 적극 번역 소개하고 연변 지역의 젊은 작가들을 발견하여 양성하는 것이었다. 이는 소수민족문학으로서의 조선족 문학이 적극적으로 중국 문학으로 편입되어 가는 한 과정이기도 했으며, 이러한 취지 속에서 조선족 문학은 사회주의 문학으로 거듭나기 위해 적극 노력할 수밖에 없었다. 《연변문예》는 1956년 말까지 총 35호를 발간했고, 1957년 1월 1일부터 《아리랑》으로 개제되었으며, 1959년부터는 다시 《연변문학》으로 개제되었다. 그러나 대약진운동이 시작되고 문화대혁명이 가열화되면서 연변은 물론 전 중국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3. 특수 시기의 통폐합 종합지 《연변》 중국 역사에서 1956-1977년의 20년은 특별한 시기이다. 대약진, 반우파투쟁, 문화대혁명으로 대표되는 이 시기를 문학사에서는 흔히 ‘정치공명 시기’라 부른다. 1945년부터 시작되는 이 시기 문학의 중요한 특징은 마오쩌둥의 연안문예좌담회 연설을 기반으로 하는 사회주의 문학의 건설이다. 이 시기는 마오쩌둥의 문예사상과 당의 문예 정책에 따라 문학이 정치와 보조를 맞추어 발전했던 특별 시기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사회주의 문학 건설이라는 기치 아래 문학이 정치 선전 도구로서의 역할을 착실히 수행해야 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문학의 이러한 경향은 특히 문예지의 창간사에서 더욱 뚜렷하게 드러났다. 《아리랑》의 창간사는 문화대혁명 발발 전의 문학의 방향성을 명확히 제시하고 있다. “ 《아리랑》은 창작상 가장 좋은 방법의 일종인 사회주의 사실주의 창작 원칙에 입각하여 연변 및 국내 각지의 조선족인민들이 전국 각 형제민족인민들과 함께 진행하는 사회주의 건설의 줄기찬 노력적 생활모습을 반영하며 그들을 교육하여 사회주의 건설의 더 큰 위훈에로 불러일으킨다. 《아리랑》은 문학의 신생력량을 양성하며 창작대오를 부단히 확대하는 일을 자기의 중심과업으로 여기며 적극적으로, 열정적으로, 대담히 신생력량을 발견 배육한다. 《아리랑》은 당의 ‘백화만발 백가쟁명’의 방침을 관철집행하기 위하여 제재와 체제범위를 확대하면서 각종 류파, 각종 형식, 각종 풍격의 예술 작품들을 대담히 선택, 게재하며 간행물의 독특한 풍격과 특색을 수립하기 위해 경상적인 노력을 기울인다. 《아리랑》은 적극적으로 고전작품을 정리, 소개하며 민간문예를 발굴, 정리, 소개하는 사업을 진행하며 한족을 비롯한 국내 각 형제민족의 문학성취 및 세계문학의 정화들을 소개함으로써 연변문학으로 하여금 민족문학의 우량한 전통을 계승 발양하며 민족풍격이 농후한 우수한 사회주의문학으로 되게 하며 조국의 사회주의 문학건설의 위대한 사업에 이바지 한다.9) ” 창간사에서 보는 바와 같이 사회주의 건설 시기 문학의 최우선 전제는 사회주의 사실주의 창작 방법을 습득 준수하는 것이다. 사회주의 사실주의 창작 방법의 실현을 위한 “창작 대오”의 발굴·양성과 상호간 문학의 소개 및 교류가 제기되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눈에 띄는 부분은 ‘백화만발, 백가쟁명’의 문예 방침이다. 여기서의 ‘백화만발 백가쟁명’이란 문학의 다양성을 말하는 것인데, 이를테면 소재의 다양성, 양식의 다양성뿐만 아니라 각종 유파, 형식, 풍격 등을 포함한 문예 비평의 적극성까지도 포함하고 있었다. 사실 이 문예 방침의 취지는 나쁘지 않았다. 문제는 다양성을 강조했던 ‘백화만발, 백가쟁명’의 비평 논쟁이 결국 특정 이익과 사상·이념에 저촉되면서 많은 문학인들을 반동분자로 몰아가는 후폭풍을 초래했다는 사실이다. 당의 문예 방침에 따라 적극적으로 창작과 비판/비평에 뛰어들었던 작가들 대부분이 반우파투쟁에서 반동분자로 비판받았고 정치적으로 수모를 당해야 했다. 날로 가열화되었던 사상비판과 계급투쟁 과정에서 문학은 더 이상 본연의 문학일 수 없었다. 정부 차원에서의 각종 잡지와 문예지에 대한 통제가 실시되기 시작하였고, 그 과정에 탄생한 것이 종합지 《연변》이었다. 《연변》은 순수 문예지는 아니다. 《연변》은 정치잡지였던 《학습》, 《지부생활》, 《연변청년》과 문예잡지 《아리랑》의 후신인 《연변문학》이 통폐합되어 1961년 5월에 새롭게 출발한 정치문예 종합지10)로서 당시 발행부수만도 1만 2천여 부에 달했던 가장 영향력 있는 잡지였다. 이 잡지는 1966년 5월 문화대혁명이 시작되면서 같은 해 9월 65호를 끝으로 정간되었지만 정치 이론과 사상 교양을 위주로 하면서도 문학예술을 부차적으로 취급하고 있었다.11)창간호 목차를 살펴보면 ‘정책 강좌’, ‘당의 건설에 관한 강화’, ‘공작 작풍과 공작 방법’, ‘노래하자 공산당’ 등 난으로 구성되고 있는데 이중 ‘노래하자 공산당’란이 문예란이다. 대부분이 시(詩)였고 간혹 단편소설과 평론 한두 편이 게재되기도 했다. 크게 문학과 비문학이라는 두 파트로 구성되고 있었고, 이러한 잡지의 구성 취지는 정간까지 이어졌다. ‘노래하자 공산당’이라는 타이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시기의 문학은 당을 위한 문학이었고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문학이어야 했다. 이는 다음과 같은 창간사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 《연변》 잡지는 중공연변주위 선전부에서 주최한다. 그의 임무는 모택동사상의 붉은기를 높이 추켜들고 맑스-레닌주의 기본리론을 선전하며 당의 로선, 방침 정책을 선전하며 사회주의 혁명과 사회주의 건설 중의 선진 경험을 총결, 보급하며 연변 여러 민족 인민의 혁명투쟁생활을 반영하며 여러 민족인민에게 공산주의와 공산당에 대한 기본지식을 줌과 동시에 당의 민족정책과 민족리론을 주는 것이다. 즉 그는 당의 맑스-레닌주의를 선전하고 군중을 교양하며 각항 공작을 추동하며 계급투쟁을 진행하는 유력한 무기이다.12) ” 《연변》은 중국공산당연변주위원회 선전부에서 간행되었던 기관지였던 만큼 오로지 마오쩌둥 사상을 선전하고 당의 방침과 정책을 선전하며 혁명투쟁 생활을 일반에 홍보하는 것을 최우선의 목적으로 삼았다. 이러한 정책 잡지에서 문학의 역할은 오로지 사상, 정책의 선전 도구 역할뿐이었으며 이러한 상황은 문화대혁명의 본격화로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문화대혁명이 가열화되면서 거의 모든 잡지들이 정간되었기 때문이다. 4. 문예지의 전성시대와 조선족 문학의 본거지 《연변문학》 10년 동안의 문화대혁명이 막을 내리고, 개혁개방 시대가 시작되면서 중국 동북에서는 한글 잡지들이 우후죽순처럼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문학예술연구》, 《아리랑》, 《도라지》, 《시내물》, 《개간지》, 《봄노래》, 《북두성》, 《은하수》, 《송화강》, 《장백산》, 《연변문학》 등을 비롯한 다수의 잡지들이 새롭게 창간되거나 복간되었다. 현재도 발행되고 있는 잡지 《장백산》은 중국작가협회연변분회에서 1957년 4월에 창간한 부정기 문예지였고, 제5호부터 연변문련 기관지로 발행되었다. 1959년부터는 음악, 무용, 희곡, 미술, 사진 등 다섯 개 예술 단체에서 공동으로 발간했는데 이를 계기로 《장백산》은 《연변문학》과 역할을 분담해 《연변문학》은 주로 문학작품을, 《장백산》은 주로 음악, 미술, 무용 관련 예술작품과 희곡, 비평을 게재했다. 《장백산》 역시 1966년 문화대혁명이 시작되면서 정간되었다가 문화대혁명이 끝나고도 10년이 지난 1987년 8월에야 《예술세계》라는 제명으로 복간되었다.13)《도라지》 역시 현재 발행되고 있는 문예지이다. 1977년 길림에서 창간되었고, 창간 당시의 제호는 《대중문예》였다. 1979년부터 계간으로 변경되었고, 1984년부터는 격월간으로 발행되었다. 1985년 8월에는 동북삼성 30여 명 청년 작가들이 참석한 도라지문필회를 소집하기도 했다.14) 한편 여성을 대상으로 한 《연변녀성》의 창간도 주목을 요한다. 《연변녀성》은 연변조선족자치주부녀연합회 기관지로서 1983년 11월에 창간된 여성지이다. 조선족 여성들에게 애국주의, 공산주의, 민족단결 등에 관한 교육을 진행하고, 여성과 어린이들의 합법적 권리와 이익을 수호하고자 했으며, 연애, 혼인, 가정 문제를 올바르게 인도하는 데 목적을 둔 사상성, 지식성, 예술성, 오락성을 두루 갖춘 여성 종합지였다. 1980년대 현재 매호 발행부수가 4만 부에 달할 정도로 대중적인 인기가 두터웠던 잡지였으며 특히 잡지 구성 중 일부 지면을 문학에 할애하고 있는 것도 중요한 한 특징이었다.15)《연변녀성》은 지금도 발행되고 있는, 많은 독자들을 확보하고 있는 대표적인 한글 대중지이다. 한편 조선족 문학의 발전을 추동하는 데에 있어서 중요한 지면을 제공했던 전문지 《문학예술연구》를 들 수 있다. 이는 1980년 1월 연변문학예술연구소에서 창간한 격월간 잡지였고, 잡지를 창간한 연변문학예술연구소는 조선족 문학의 조직적인 연구를 목적으로 설립된 기관이라는 데에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특히 평론을 중심으로 한 학술적인 글들을 상재했던 《문학예술연구》는 문예평론가들과 문학인들에게 교류의 장을 마련해 주었고, 조선족 문학의 발전을 추동하는 데 있어서 문예지와는 또 다른 중요한 역할을 발휘했던 중요한 학술지였다. 이 외에도 1981년 12월 연변인민출판사 소년아동문예편집실에서 창간한 아동문학 잡지 《시내물》(1986년 9월 《별나라》로 개제)16)과 1980년 10월 북경에서 창간된 무크지 《아리랑》, 그리고 1981년 심양에서 창간된 《갈매기》17)등을 비롯한 다수의 문예지들이 있었다. 그러나 상기와 같은 많은 문예지 중에서도 단연 핵심을 차지하는 것은 최장수 문예지 《연변문학》이었다. 앞서도 살펴보았듯이 《연변문학》의 전신은 《연변문예》이다. 1951년 6월과 1954년 1월 두 번에 걸쳐 같은 제호로 창간되었고 후에 《아리랑》, 《연변문학》, 《연변》, 《천지》, 다시 《연변문학》으로 제호를 바꾸어가면서 정간과 복간을 반복하는 과정에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18)1980년대 중반 한때에는 발행부수가 3만 부에 달할 정도로 인기가 많았지만 최근에는 호당 겨우 1,200부를 찍어내고 있다. 2024년 8월 《연변문학》은 통권 제761호를 상재했다. 문화대혁명이 막을 내리고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조선족 문학에서 발견되는 가장 큰 변화는 다양성의 측면이다. 이 시기 문학은 극단적인 정치주의에서 벗어나 다원적인 가치관을 추구하는 양상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비록 여전히 사회주의 사실주의 창작이 주류를 이루긴 했지만 적지 않은 작가들이 모더니즘을 비롯한 새로운 문학 사조를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적극적으로 새로운 창작 양식을 실험했다. 특히 시문학 분야에서는 이미지즘, 주지주의, 상징주의 등의 수법이 적극 도입되었다.19)198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는 이데올로기적 굴레에서 완전히 벗어나기 시작했고, 이를 계기로 조선족 문학은 전례 없는 전성기를 맞이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문화대혁명을 기록한 상흔문학(傷痕文學)으로부터 시작하여 반성문학, 개혁문학 등으로 한때 풍성한 성과를 거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개혁개방 정책의 실시와 함께 집단주의가 해체되고 기존의 가치 체계가 전복되는 과정에서 문학 역시 큰 변화를 맞이했다. 전문 문예지들이 하나둘 폐간되기 시작한 것이 그 시작이라고 하겠다. 《북두성》, 《갈매기》가 폐간되었고, 《은하수》, 《송화강》 등의 잡지들은 상업 종합지로 방향을 틀지 않으면 안 되었다. 2000년대 들어서면서부터 문학은 전연 다른 모습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정치적인 공명’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고 대신에 무주류, 무방향의 성격이 강해지면서 문학은 오히려 다원화와 개성화의 특징을 크게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보편적인 인간의 삶에 관심을 돌리기 시작했고, 세속적인 삶을 즐겨 기록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것을 두고 문학사에서는 “세속인문주의가 과거의 정치이상주의를 대체”20)했다고 평가했다. 조선족 문학이 이러한 성과를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은 문학 창작과 교류의 장이 마련되어 있었기 때문이며 무엇보다도 수많은 잡지들이 창간과 폐간을 반복하는 과정에서도 꿋꿋하게 자리를 지켜낸 《연변문학》, 《장백산》, 《도라지》 등을 비롯한 문예지들 덕분이었다. 《연변문학》이 70여 년의 세월 속에서 폐간되지 않고 지속적으로 발행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안정적인 지원 덕분이다. 중국작가협회연변분회의 기관지라는 성격으로 하여 《연변문학》은 꾸준한 지원을 받을 수 있었고, 동시에 기관지로서의 역할도 병행해야 했다. 정부 기관지로서 정책적인, 사상적인 측면을 적절하게 대변해야 했고 당과 정부의 정책을 뒷받침해야 했지만 한글 문예지가 희소한 상황에서 《연변문학》은 조선족 문학의 발전에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지면을 제공했다. 무엇보다도 수많은 작가들이 《연변문학》을 통해 등단했고, 실질적으로 많은 문학인들에게 문학 교류의 장이 되었다. 문학작품을 발표할 수 있는 지면이 없었더라면 조선족 문학은 유지, 존속하지 못했을 것이며, 이런 측면에서 《연변문학》의 가치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다. 5. 오늘날 재중 한글 문예지와 조선족 문학 오늘날 조선족 문단에 있어서 《연변문학》의 위상은 확고부동한 것이다. 현재 동북에서 발행되고 있는 순문예지로는 《연변문학》을 비롯하여 《장백산》, 《도라지》 등이 있다. 《연변문학》이 핵심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그 외의 잡지들은 지역 대표 잡지로서의 위상이 강하다. 《도라지》는 장춘을 근거지로 발행되고 있으며, 《장백산》은 장춘시 민족사무위원회의 기관지적 성격이 강하다. 한글 문예지는 개혁개방의 시작과 함께 한때 전성기를 맞이했지만, 한중수교를 시점으로 한 1990년대를 넘어서면서는 점차 쇠퇴기에 접어든다. 적지 않은 문예지들이 경제난으로 폐간되었고, 극히 일부 잡지들이 정부의 지원 없이 힘겹게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경제적인 어려움보다 더 힘겨운 것은 기고가 점차 줄어들고 있는 현실이다. 사실 이는 조선족 사회의 상황과 직결되는 문제로서 인구 유실과 무관하지 않다. 중국 조선족 사회의 중심지인 연변에서 조선족 인구가 전체 인구의 50퍼센트 미만이 된 지도 이미 20년이 넘었다. 개혁개방과 한중수교를 거치는 과정에 농촌을 떠나 도시로 진출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도시화가 급격하게 추진되었다. 여기에 코리안 드림을 안고 한국으로 입국한 조선족이 수십만을 넘어서면서 중국 내 조선족 인구는 급격하게 줄어들기 시작했고, 현재도 진행 중이다. 한 연구기관(다문화 사회와 신학 연구소)의 통계자료에 따르면 2024년 4월 기준 현재 한국 내에 거주하고 있는 한국계 중국인 인구는 63만을 넘어섰으며 이는 현재 중국 연변에 남아 있는 조선족 인구와 거의 비슷한 수치라고 한다. 2023년 중국측 통계에 따르면 연변 지역 조선족 인구는 70.58만 명이며, 이는 연변 전체 인구의 35.8퍼센트에 불과했다. 인구의 유실과 함께 또 하나의 심각한 문제는 언어 환경의 변화이다. 주지하는바 중국의 조선족은 민족학교를 가지고 있고 민족어 교육을 진행할 수 있는 훌륭한 언어 문화적 환경을 가지고 있었다. 조선족 문학이 지금까지 존속할 수 있었던 것 역시 조선어를 배우고 사용하고, 조선어로 창작할 수 있는 절대적인 환경이 뒷받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존의 이러한 언어 환경이 위협을 받고 있다. 민족학교의 공식 언어가 중국어로 치환되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기존의 조선족 학교들에서는 조선말을 공식 언어로 사용했지만 최근에는 모든 과목을 중국어로 교수하고 있다. 말하자면 앞으로의 조선족들은 더 이상 지금과 같이 우리말을 자연스럽게 구사하지 못할 것이며, 한글 창작은 더더욱 어려워질 것이라는 사실이다. 현재 중국의 장춘에 거주하면서 활발한 문학 활동을 하고 있는 조선족 작가 금희가 스스로를 칭하여 “조선어로 창작하는 중국 내 마지막 세대”라고 했던 것은 중국의 이러한 실정을 두고 한 말이었다. 조선족 문학은 코리안 디아스포라문학의 한 부분이자 소중한 유산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러한 조선족 문학이 또다시 새로운 전환기에 당면해 있다.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분들의 관심과 노력을 필요로 하는 시기이다. 중국(연길)문학아카데미 회원 작품이 실린 신문, 잡지와 작품집 (© 시인 석화) 각주 1) 전광하 편저, 『세월속의 룡정』, 중국 연길: 연변인민출판사, 2000, 9쪽. 2) 서대숙, 『김약연: 간도 민족독립운동의 지도자』, 역사공간, 2017, 28-29쪽. 3) 안수길, 「龍井·新京時代」, 강진호 엮음, 『한국문단 이면사』, 깊은샘, 1999, 256쪽. 4) 이광일, 『해방 후 조선족 소설문학 연구』, 경인문화사, 2003, 61-63쪽. 5) 정영진, 「중국 조선족 문예규범의 수립과 《연변문예》」, 《겨례어문학》 59, 겨레어문학회, 2017, 288쪽. 6) 차배근·오태호, 『중국조선민족언론사』, 서울대학교출판부, 1997, 217쪽. 7) 같은 책, 388쪽. 8) 배극, 「《연변문예》 창간에 제하여」, 《연변문예》 창간호, 1954, 2쪽. 9) 「친애하는 독자 여러 동무들에게」, 《아리랑》 1957년 1월호, 1쪽. 10) 차배근·오태호, 앞의 책, 386쪽. 11) 최상철, 『중국조선족 언론사』, 경남대학교 출판부, 1996, 308쪽. 12) 「《연변》 잡지 창간사」, 《연변》 창간호, 1961.5, 1쪽. 13) 같은 책, 313쪽. 14) 같은 책, 312쪽. 15) 차배근·오태호, 앞의 책, 636쪽. 16) 최상철, 앞의 책, 313-314쪽. 17) 이화·오상순, 「요녕 조선족문학이 걸어온 발자취에 대한 통시적 고찰」, 《한중인문학연구》 55, 한중인문학회, 2017. 18) 김성수, 「연변 문예지의 역사와 ‘코리아 문학’ 재구성」, 《국제한인문학연구》 29, 국제한인문학회, 2021. 19) 오상순 주필, 『중국조선족문학사』, 민족출판사, 2007, 253쪽. 20) 같은 책, 339쪽.

너머의 새 글

너머의 한 문장

‘-같은’이라는 단어 안에 내포된 섬세하고 미묘한 뜻은 설명해줄 수 없었다.
비슷하다는 것일 뿐 온전한 그것이 아닌 것.
그래서 어떤 것이 되고자 하는 열망이 느껴지는 단어라는 말을.

황영은 「 나비같은 나비야 」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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