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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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회 《너머》 신인문학상 수필·논픽션 부문(「꽃을 넣은 쿠키」, 안미혜)

2024. 09. 02 00:00

꽃을 넣은 쿠키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마음은 집으로 당장 뛰어가고 싶은데 절차가 많이 남아 있었다. 공항 직원들은 마스크에 방호복을 입고 업무를 보고 있었다. 피로에 지쳐 비행기에서 내린 승객들은 평소처럼 공항 도착에 안도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차례대로 줄을 서서 모든 서류를 검토받았다. 어머니의 직계가족이란 점, 서울에서 지낼 주소가 있다는 것과 가족들과 일주일간 격리할 수 있다는 사실을 검증받아야 했다.
  입국 수속이 끝나자마자 한 사람씩 체온을 재고 자국에서 준비해 온 백신 증명서를 꺼내 또 다른 줄을 찾아 섰다. 증명 서류 검사와 건강에 관한 질문과 몇 가지 애플리케이션 설치 요구 등 도무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내 전화기에도 한국에 있는 동안 동선을 추적할 수 있는 앱이 설치됐다. 마지막으로, 나는 한국에서 체류할 주소의 가족과 통화를 확인한 후에 공항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바이러스 감염 걱정에 비행기 안에서 커피 한 잔 마셨을 뿐인데도 배가 고프지 않았다. 택시를 타고 가는 고속도로가 한밤중처럼 텅 비어 있었다. 다리 위로 낮게 펼쳐진 회색 하늘은 다른 행성에 온 것처럼 낯설었다. 하얀 마스크를 쓴 택시 기사와 나는 백미러로 눈을 한 번 마주쳤을 뿐 가는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친정집 파란 대문 앞에서 초인종을 누르고 대답을 기다렸다. 몇 초가 몇 시간이나 되는 것 같았다. 인터폰으로 ‘왔구나’ 하는 어머니의 목소리와 대문 열리는 소리가 동시에 들렸다. 어머니가 현관문을 열고 나오시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마당이 눈에 들어왔다. 이 년 남짓 사이 어머니는 작아져 있었다. 내가 결혼 전 평생을 보낸 집도 덩달아 작게 보였다. 오십 년 넘게 사신 단독주택의 작은 마당은 여전히 정성껏 가꾸어져 있었다. 어머니는 가족들이 다 떠나고 노견 하늘이와 함께 사는 동안에도 온 가족이 다 함께 살 때처럼 철마다 꽃나무를 가꾸셨다.
  아버지의 장례식 후 처음 온 친정집이었다. 대장암 판정을 받으신 아버지는 삼 개월 만에 세상을 떠나셨다. 그리고 일 년 후 전 세계는 팬데믹으로 얼어붙었다. 어머니는 남편을 잃은 슬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세상과도 고립되었다. 자식들은 홀로 되신 어머니를 찾아뵙지도 못하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영상통화만 했다. 어머니는 자식들의 마음을 훤히 아시고 항상 잘 있다며 웃어 주셨다. 미국에 살면서 아버지의 일주기에 한국행 비행기를 타려던 나의 계획도 나중으로 미뤄졌다. 어머니도 세상이 이렇게 된 걸 어쩌니 하시며 속상한 마음을 감추셨다. 보통 미국 저녁 시간에 영상통화를 많이 하는데, 그날은 어머니와 며칠 통화 못한 게 문득 생각나 아침에 전화를 걸었다. 한국은 어머니가 보통 잠자리에 들 밤 열 시가 지난 시각이었다.
  “웬일이야, 밤중에.”
  “엄마, 잠든 거 깨운 건 아니지?”
  침대에 누워 전화를 받은 어머니 얼굴이 작은 핸드폰 화면에도 드러날 만큼 핼쑥하고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아니야.”
  “엄마, 괜찮아? 얼굴이 안 좋아 보이네. 어디 아파?”
  “괜찮아. 안 아파.”
  어머니는 나와 시선을 마주치려 하지 않으셨다. 의식적으로 다른 데로 자꾸 눈을 돌리려는 엄마가 이상했다.
  “엄마 정말 아무 일 없어? 밥은 잘 드시는 거야?”
  다시 물었을 때 어머니는 울고 있었다. 소리는 나지 않았다. 한 손으로 핸드폰을 쓰다듬으며 말을 삼키고 눈물을 흘리고 계셨다.
  “엄마, 엄마. 나 좀 똑바로 봐봐!”
  그럴 때 금방 달려갈 수 있는 거리에 살면 얼마나 좋을까. 친정집에 가려면 하루 넘겨 가야 하는 이역만리에 사는 것만으로 나는 불효녀라는 생각이 들었다. 딸의 얼굴을 어머니는 애써 피해 울고 계셨다. 나는 돌덩이 하나가 가슴팍을 누르는 것 같아 한숨을 한번 얕게 쉬고 어머니를 보며 말했다.
  “내가 갈까? 엄마 보러 가?”
  물기가 묻은 내 목소리가 가늘게 흔들렸다. 그제야 어머니는 화면의 나를 다시 바라보며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거리셨다. 생전 자식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인 적 없는 어머니였다. 멀리 떨어져 산 이후에도 보고 싶다는 말조차 속으로만 삼키시는 분이셨다.

  지난 영상통화에서 본 대문 옆 빨갛게 흐드러진 장미 나무는 꽃을 다 떨어뜨리고 가지만 늘어져 있었다. 마당 한가운데 연분홍 봉숭아와 분꽃이 가지런히 피어 있고 방울토마토와 깻잎, 고추나무는 화분에 심겨 풍성하게 자라나고 있었다. 밖에 나가지도 못하고 어머니 혼자 마당에 앉아 꽃밭을 만드느라 애쓰신 흔적을 보니 마음이 숭고해졌다.
  “엄마, 마당 너무 예쁘다. 며칠 시장 안 가도 먹고 살겠네.”
  “올해는 쥐새끼들이 없어서 고추나무도 잘 자랐어.”
  “뭐? 쥐가 있었어? 악…….”
  나는 어려서부터 쥐라면 경기가 나서 말도 꺼내기 싫어했다. 어머니는 웃으며 쥐구멍을 벽돌로 다 막고 끈끈이를 놓았더니 이제 한 마리도 없다고 말했다.
  “엄마, 근데 왜 하늘이가 안 짖어?”
  “나를 기억 못 하는 건가? 지난번에 왔을 때는 반갑다고 막 짖었잖아?”
  “하늘이 수술했다.”
  어머니가 마당을 쓸다가 바닥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낙엽을 떼어 내는 표정으로 덤덤하게 말했다.
  “하늘이가 어딜 수술해?”
  어머니의 표정이 대수롭지 않으니 내 목소리도 강 건너 불구경하는 것처럼 나왔다.
  “하늘이 성대 수술했어. 이제 못 짖어.”
  “뭐? 성대를 없앴다고? 왜?”
  “세상이 변했어. 삭막해. 내가 너무 오래 살았나 봐.”
  어머니가 현관문 앞에 서서 이웃집을 바라보며 숨죽여 속삭였다. 새로 이사 온 이웃 남자가 낮에 개 짖는 소리가 시끄럽다고 세 번이나 경찰에 신고했다는 것이다. 번번이 어머니가 개를 조용히 시키겠다고 사과하고 몇 주 잠잠했는데, 하루는 그 남자가 밤에 술 마시고 찾아와 어머니에게 으름장을 놓고 동네 시끄럽게 소리를 질러서 또 경찰이 왔다고 했다. 어머니는 한바탕 소동을 벌인 얘기를 하다 또 속이 상한지 계단에 앉아 하늘이를 보며 눈물을 훔쳤다.
  “하늘이가 원래 밤에는 잘 안 짖는데, 왜 그런데?”
  “그래, 안 짖어. 얼마나 착한데. 낮에 동네 배달 기사가 너무 많이 다니니까. 그때 잠깐씩 짖잖아. 이웃집 남자가 자기는 밤에 일하고 낮에는 잔대. 낮에 하늘이 때문에 잠을 못 자서 일을 못 한다고. 그러면서 개를 안에서 키우든가 없애라고 하잖아.”
  “그래서. 경찰은 뭐래?”
  “경찰이 와서 그래. 요즘 마당에 개 풀어놓고 키우는 집 없다고. 우리가 해결하래. 세상이 변했대.”
  “아빠도 개는 마당에서 키워야 건강하다고 하셨잖아. 사람 편해지라고 밖에서 키우던 개를 집안에서 키워?”
  “그게 요즘 법이란다. 법.”
  “어머머, 그런 법도 있었어? 그럼 다른 데 주거나 하지, 짖지 못하면 개가 답답해서 어떻게 살라고…….”
  하늘이는 건강하고 영리한 개였다. 사람으로 치면, 말할 줄 알면서도 말을 속 시원히 못 하면서 평생을 살게 한 셈이다. 나는 하늘이의 마음을 조금 알 것 같아 소리 내지 못하는 하늘이가 더 안쓰러웠다.
  “시골이고 어디고 아는 데 다 물어봐도 요즘 개 키운다는 집 없어. 있는 개도 다 귀찮대. 특히 저렇게 큰 개는 안 키운대.”
  “그래서 목소리 없애는 수술을 한 거야?”
  “그럼 어떡해. 죽일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고. 내 살다가 개 때문에 잠을 설쳐보긴 처음이다.”
  어머니는 한숨을 푹 쉬며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셨다. 아버지 없이 혼자 지내면서 가족처럼 여기는 하늘이와 함께 그 고통을 감당하느라 얼마나 힘드셨을까. 하늘이는 내 바지에 앞다리를 척 올리면서 반갑다고 컹컹 짖고 있는데 ‘허억헉’ 하고 폐 앓이 하는 노인의 기침 소리로 들렸다.
  ‘세상에. 얼마나 마음껏 나를 부르고 싶었겠니?’
  나는 하늘이 머리를 계속 쓰다듬다가 오래전 언어 때문에 겪었던 일들이 생각났다.

  내가 처음 이민 간 나라는 뉴질랜드였다. 큰아이는 여덟 살, 작은딸은 다섯 살 생일을 막 앞두고 있었다. 언니와 남동생이 이미 뉴질랜드에 살고 있었기에 관광으로 몇 번 방문하면서 아이를 낳으면 넓은 초원에서 뛰어놀게 하며 키우고 싶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남편이 컴퓨터 계열 일을 해서 직장도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었다. 가족의 도움으로 이민은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아이들 학교도 입학 신청을 해두었다. 뉴질랜드에서는 다섯 살 생일이 지나면 다음 날부터 바로 학교에 다닐 수 있다. 입학식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생일 다음 날 집에서 가까운 초등학교에 자동으로 입학되어 부모의 손을 잡고 학교에 가면 된다.
  큰아이는 한국에 사는 동안 유치원에서 알파벳도 익히고 몇 마디 영어를 듣기도 해서인지 학교생활에 잘 적응했다. 반면에, 둘째는 모습도 다르고 말도 다른 사람들과 바로 어울리지 못하고 주위를 맴돌며 보기만 하는 것 같았다. 학교에 입학하고 처음 며칠은 아이 손을 잡고 교실에서 함께 아이를 지켜보다 집으로 왔다. 수업 다 마칠 때쯤 교실 앞으로 데리러 가면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달려와 안겨서 안심이었다. 아이들은 쉽게 적응할 거라고 스스로 위로하며 나도 학원에 다니며 열심히 영어를 배웠다. 뉴질랜드 초등학교 첫 학년은 책상에 앉아서 공부하는 게 아니다. 카펫에 자유롭게 둘러앉아 장난감을 가지고 놀기도 하고 선생님이 책을 읽어주면 듣다가 그대로 누워 잘 수도 있게 작은 쿠션들이 놓여 있다. 교실에서 작은딸 로즈는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는, 새로 온 작은 동양 아이였다. 일주일에 한 번, 학교에서는 학부모들 앞에서 아이들에게 상을 하나씩 나눠 준다. 일주일 동안 잘한 것을 칭찬하며 사탕을 하나씩 주는 작은 상이다. 로즈는 말하지 않았으므로 가장 조용한 학생에게 주는 상을 도맡아 받았다. 말은 안 했지만, 눈치로 아이들과 어울렸다. 다른 아이들이 도시락을 꺼내면 자기도 꺼내 점심을 먹고, 친구들이 장난감을 치우면 자기도 정리하며 학교생활을 제법 잘 따라서 했다.
  로즈가 학교에 다닌 지 한 학기가 지나 처음 방학하는 날이었다, 담임선생님은 그날 로즈가 상을 받을 예정이니 부모가 꼭 참석해 달라는 이메일을 보냈다. 우리 부부는 어리둥절한 마음으로 학교에 갔다. 학부모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로즈는 사람들 앞으로 나가 교장선생님에게 상을 받았다. 교장선생님은 사탕 한 알 대신 예쁜 그림 동화책을 선물로 주셨다.
  “로즈가 얼마나 조용한 학생이었는지 아시죠? 그런 로즈가 육 개월 만에 처음 손을 들고 ‘선생님, 저 화장실 다녀오고 싶어요.’라고 크게 말했어요. 용기 있는 로즈의 행동에 모두 크게 손뼉을 쳐주세요.”
  교장선생님은 로즈 행동을 칭찬하면서 상을 받는 로즈의 어깨를 꼭 안아 주었다. 로즈를 지켜보던 학부모와 학생들은 크게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상을 받은 로즈가 뒤돌아서서 나를 찾아 활짝 웃는 순간 나도 모르게 기쁨의 눈물이 터져 나왔다. 한편으로 아이가 ‘선생님, 저, 화장실에 다녀오고 싶어요’라는 말을 하기까지 부모로서 별로 도움을 주지 못했다는 생각에 가슴이 아팠다. 나는 영어로 하는 대화를 의식적으로 피했는지도 모른다. 아이들은 그곳에서 점점 작은 소리로 말하는 엄마에게 기댈 수 없어 더 외롭지는 않았을까.

  “안 들어오고 마당에서 뭐 해?”
  거실에서 어머니의 목소리가 나왔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도 어머니는 편한 아파트로 이사 가길 원하시지 않았다. 어머니는 아파트가 답답해서 싫다고 하셨지만, 집 안에 고스란히 배어 있는 아버지의 체취를 느끼고 싶기 때문인 것 같았다.
  아담한 마당이 있는 집에서 미국에서 온 중년의 딸과 늙은 어머니의 조용하고 단조로운 생활이 시작됐다. 결혼 전 한국에 같이 살 때는 어머니 가슴을 아프게 하는 말들도 막 했던 내가 이민한 후 방문했을 때는 둘도 없이 사이좋은 딸처럼 지냈다.
  일주일 격리가 끝난 후부터는 매일 어머니와 함께 세끼를 해 먹고 텔레비전을 봤다. 뉴스에서는 연일 코로나19 확진자와 중증 환자와 사망자 숫자가 발표됐다. 초기에는 한 자릿수의 확진자에도 온 나라가 깜짝 놀라 모든 사람의 동선을 감시했었다. 백신이 개발되고 이 년째에 들어선 다음부터 확진자가 십만 명에서 칠십만 명까지 솟았다 다시 감소하는 추세가 되자 한국 정부는 격리와 자영업자의 업무 시간 제한을 완화했다. 거리에는 마스크를 착용한 사람들이 조금씩 다니기 시작했다. 나도 어머니와 오후에 잠깐씩 집 근처를 산책했다. 하늘이는 내가 마당으로 나가려는 것을 기가 막히게 알아차렸다. 시장에 가든지, 밥을 주려고 나갈 기미를 보이면 현관 앞에 쪼그려 앉아서 까만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하늘이가 큰 소리로 컹컹! 짖고 꼬리를 재게 흔들면서 앞다리를 번쩍 들어서 안기던 모습이 떠올랐다. 하늘이는 짓지 못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예전처럼 팔짝팔짝 뛰지도 않았다. 사람이 말을 못 하면 생기가 없어지는 것처럼 하늘이도 짖지 못하니까 기운도 줄어든 모양이다. 나는 현관을 오가며 짖지 못해 ‘쇅쇅’거리는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더욱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교장선생님께 상을 탄 이후, 말문이 트인 로즈는 친구들과 조잘대며 행복하게 학교생활을 했다. 작은 단풍잎 같은 손을 잡고 오가는 등하굣길에 내게 영어를 가르쳐주기도 했다.
  “엄마, 오늘은 학교에서 쿠키를 구웠어.”
  “그랬어? 어떻게 만들었는데?”
  “그게 처음에 그릇에다 꽃을 넣고 물을 넣고 손으로 반죽해야 해. 그다음 초콜릿 칩을 넣고 오븐에 넣으면 돼. 아주 쉬워.”
  “꽃을 넣어? 진짜 꽃을?”
  로즈는 선생님께 들은 밀가루 flour를 꽃 flower로 알아들은 것 같았다. 내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번졌다. 그렇게 로즈는 틀려도 상관없이 계속 말하면서 빠른 속도로 영어를 배우고 있었다. 나도 되도록 소리를 내서 영어를 배우려고 연습했지만 자꾸 움츠러들어 슈퍼마켓이나 도넛 가게에서 겨우 물건 살 정도만 말했다. 원어민과 마주칠 때는 되도록 말은 안 하고 눈으로만 인사했다. 머릿속에서 빙빙 도는 단어를 입 밖으로 내는 게 쉽지 않았다. 나는 점점 사람들 눈 마주치는 것도 피하게 되었다.
  이민 후 이 년 정도 지나면 아이들 영어 걱정은 내려놓게 된다. 그 후로는 어른이 더 문제였다. 아이들의 인지능력이 어른들보다 빠른 탓도 있겠지만, 영어를 접하는 기회가 어른들의 몇 배나 많기 때문이다. 나는 원활하게 소통 못 한다는 느낌이 싫어서 가급적 영어가 필요한 학부모 모임이나 관공서에 가는 일은 피하고, 편하게 한국 사람들끼리만 어울리고 싶어 했다. 공부할 때는 잘 되던 말도 사람을 만나 말을 하다 보면 막힐 때가 많아서인지 자신감이 줄어들어 입을 닫고 지냈다. 나는 영어로 꼭 해야 하는 상대방과 대면하기 전에 항상 마음속으로 예행연습을 해본다. 그러다 마치 물속에 있는 물고기가 물방울을 토해내며 숨을 쉬는 것처럼 한숨을 크게 내쉬고 말을 꺼낸다. 할 말을 다 끝내기는 해도 그때 과연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왔는지 돌아보면 알 수 없을 때도 많다. 나는 그럴 때마다 로즈가 처음 상 받았을 때의 모습을 기억하려고 애쓴다. 또 처음 그 작은 목소리에 귀 기울여주고 큰 박수를 보내준 그 선생님을 생각한다. 나 또한 그 자리에서 큰 용기를 얻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나는 영어에 자신 없지만 이제 상대방이 내 말을 이해하든 말든 생각나는 대로 말을 한다. 때로는 끝까지 소통되지 않고 어물쩍 넘어가는 일도 있다. 나는 아이들이 보여준 용기를 발판 삼아 무너지고 작아질 때도 다시 일어날 수 있었다. 친절한 사람들이 언제나 내 주위에 있었고 어려움을 이겨낼 힘을 주었다. 소통이 막힐 때마다 어디선가 도움의 목소리가 들렸다. 때로는 상점 뒤에 줄 서 있던 사람이 도와주기도 했고, 아이 친구 엄마는 내게 필요한 정보들을 넌지시 전해주기도 했다. 물가에서 발을 들일까 말까 망설이는 겁쟁이에게 고귀한 손을 내미는 친절한 사람들이 많은 세상이었다.
  세상은 하고 싶은 말을 꼭 소리를 내서 해야 소통하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 눈빛으로 몸짓으로 또는 마음으로도 하고 싶은 말들을 다 할 수도 있다. 살다 보니 인간은 함께라면 어떠한 환경에도 적응할 수 있는 놀라운 힘을 가진 존재였다.

  우리 가족은 그렇게 뉴질랜드에서 육 년 동안 살다가 남편의 직장 때문에 다시 미국으로 이주했다. 살던 곳을 또 떠나게 되어 아이들에게 미안했지만 적어도 언어로 인한 어려움은 없을 거라는 생각에 처음보다 안심됐다. 아이들이 그때 언어보다는 친해진 친구들과 선생님과의 이별을 더 아파했다는 사실도 나중에 알게 되었다. 아이들을 잘 헤아리고 보살펴야 하는 게 부모의 역할인데 나는 내 부모님처럼 자식들에게 강하고 든든한 부모가 못 되었다. 어려운 순간에 움츠러들고 벅차 하는 모습을 보여준 나약한 엄마였다. 그런 점이 아이들에게 두고두고 미안했다. 시간이 지나고 생각해 보니 부모라고 해서 언제나 강한 것은 아니었고, 아이들이라고 해서 부모보다 나약한 것만도 아니었다. 부모는 아이들에게 더 잘해주지 못해 미안한 것만 생각나고 아이들은 자기들을 있는 그대로 봐주지 않던 부모에게 서운했던 게 생각나는 모양이다. 어머니와 지내는 긴 시간 동안, 미안함과 서운함은 다 접어두고 서로 하지 못했던 새로운 얘기 보따리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팬데믹이 생각보다 오래 지속되자 전 세계 사람들은 하루빨리 마스크와 시간제한과 격리에서 벗어나길 간절히 바랐다. 각국 정부들은 더 이상의 제한보다 점진적 완화를 선택했다. 어머니는 계속 같은 것만 반복하는 뉴스를 매일 시청했다. 눈과 귀가 어두워진 어머니는 아나운서가 한 꼭지 내용을 다 말하면 그제야 자막을 따라 읽기 시작한다.
  ‘전 세계의 확진자가 백만 명이…….’
  ‘말세야. 말세. 때가 온 거야.’
  텔레비전 화면은 때로는 현실과 떨어진 뉴스를 쏟아낸다. 공원이나 바닷가는 오랜만에 쏟아져 나온 사람들로 가득 찼다. 그 와중에 전쟁도 시작되었다. 한국 전쟁을 직접 겪은 어머니는 그 소식에 크게 한탄하며 전쟁 주동자를 비난했다.
  ‘전쟁이 얼마나 무서운 건데. 전쟁이 뭔지도 모르니 저렇게 아무렇지 않게.’
  화면 속에 비친 아이들의 참혹한 모습에 엄마는 자기 일처럼 아파했다. 어머니는 열 살에 한국 전쟁을 겪고 북한에서 남한으로 피난 나온 가족 중 둘째 딸이었다. 어머니의 본가는 이북 황해도에서 평화롭게 농사를 짓는 평범한 가정이었다. 그곳은 같은 성씨를 가진 친척들이 모여 위 아랫집 할 것 없이 함께 집안의 큰일들을 치러내는 씨족 공동체 같은 곳이었다고 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째깍째깍 시계 소리가 들려. 그때는 집마다 시계가 있던 시절이 아니었거든. 그 시계 소리가 들리면 아! 또 할머니 집에서 잠들었다는 걸 알아차려. 할머니 댁 마루에 서 있던 괘종시계 소리가 그렇게 크게 들릴 수가 없어. 난 쓱 일어나 바로 윗집인 우리 집으로 건너가서 어머니가 해 놓은 아침밥을 능청스럽게 먹곤 했어.”
  어머니는 반세기가 넘는 세월 동안 가슴속에 담아 두었던 말들을 하나하나 꺼내기 시작했다. 어머니의 유년 시절의 추억은 색이 변하지 않도록 앨범에 끼워놓은 사진들처럼 선명했다. 어느 때는 어머니가 하는 말이 바로 어제 있었던 일처럼 느껴졌다.
  “엄마가 어렸을 때는 서로 애들을 봐줘서 편했겠다. 요즘은 애들 낳아 키우는 게 큰일인데. 일하려면 아이를 남한테 맡겨야 하고.”
  “맞아 그랬지. 그때 엄마들은 바쁘니까 밥만 해서 먹였지. 애만 보고 살 수가 없었어. 할머니들이 돌아가며 업고 있다가 아랫집 엄마가 오면 젖도 물리고 그러던 시절이었어.”
  “어머나. 어떻게 남의 엄마 젖을 먹어. 거짓말.”
  “그땐 그랬어. 있는 집에선 유모를 따로 두고 젖 먹여 키우고 그랬는데.”
  어머니와 지내는 한여름, 안방에는 밤늦도록 에어컨이 돌아갔다. 나는 어머니의 침대에 자매처럼 함께 누워서 잠들기 전까지 매일 두런두런 얘기했다. 이야기하는 쪽은 주로 어머니였고 나는 어머니의 기억에 상처가 나지 않도록 보듬어 주며 듣는 역할을 했다.
  “명절에 음식을 장만하려면 밤을 새워서 할 때도 있었는데 맷돌을 돌리다가 꾸벅꾸벅 조는 외숙모를 보고 얼마나 웃었던지.”
  어머니가 마치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활짝 웃었다. 어머니는 전쟁이 끝나면 다시 모여 살게 될 거라고 굳게 믿었다. 며칠만 지나면 돌아올 수 있다는 사람들 말에 걷기가 힘든 할머니와 어린 동생 둘은 고향에 남겨두고 피난길을 떠나왔다고 했다. 어머니는 줄곧 고향과 두 동생을 그리워했다. 동생들을 두고 집을 떠나는 것이 무섭고 힘들었지만, 남한으로 내려가야 살 수 있다는 어른들의 말에 따라야 했다. 힘없고 약한 사람들은 왜 그래야만 하는지 따지고 원망할 대상은 없었다. 아무 목소리도 낼 수 없었다. 목표는 오직 사는 것이었다. 여기저기 폭탄이 터지고 추위와 굶주림에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만 생각하고 걸어왔던 시절에 관한 이야기를 처음으로 세세하게 들을 수 있었다.

  가족에 대한 내 감정은 담담한 편이었다. 식사 때가 되면 어머니가 차려 준 밥을 함께 앉아 먹고, 졸업식이나 입학식에 꽃다발을 들고 가서 다 함께 사진을 찍고 자장면을 먹으러 가는 것이 가족의 전형적인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언젠가 아버지가 동네에서 생판 모르는 사람과 사소한 싸움이 났을 때 가족 모두가 나서서 아버지 편을 드는 것을 본 날, 가족은 남보다는 끈끈한 혈육이라는 생각을 처음 했던 것 같다.
  어머니는 어머니, 아버지는 아버지, 오빠나 언니, 동생 모두 서로에게 특별한 사랑을 내색하지 않았다. 각자의 영역에서 자기 일을 하며 조용히 살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처음으로, 어머니의 약한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고 위로해 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어린 시절의 나에게 어머니는 강한 이미지의 엄마였다. 어머니도 다정하게 사랑받고 보호받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해본 적 없었다. 한 가정을 물 흐르듯 잔잔하게 지켜내기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내가 결혼하고 가정을 꾸리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한구석도 놓치지 않도록 정신을 똑바로 차려 열심히 집안일을 해야 했고 시부모와 남편, 자식들 모두의 건강을 살펴야 했다. 어머니의 자리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숭고한 것이었다. 내 어머니는 그 역할을 넘치게 다 하셨다. 자식들이 장성하고 남편도 떠나 이제는 더 이상 누구를 지키지 않아도 되었을 때, 어머니는 자신을 지키기 시작했다. 자식들에게 짐이 되지 않을까 걱정하며 정신을 꼭 붙드시려고 애썼다. 뭐든지 배워서 혼자 할 수 있도록 틈만 나면 전화해서 물었다. 전화기 다루는 법부터 태블릿 사용법, 말로 텔레비전을 켜고 끄는 것도 익혔다. 주변 여기저기 수소문해서 요양보호사를 이용하는 방법까지 알아내고 혼자 신청도 다 해내셨다.
  하늘이가 시대의 변화에 따라 어머니에게 고통을 주었을 때도 어머니는 최고의 방법을 선택했다. 결국 어머니는 하늘이도 지켰다. 어머니는 자신의 마지막을 위한 마음의 준비도 단단히 하고 계셨다. 안 입는 옷을 정리하기 시작했고 가끔 은행에서 현금을 찾아와 손주들 용돈을 주라고 건넸다. 가전제품이 고장 나면 작고 싼 제품이 아닌 오래 쓸 수 있는 좋은 것으로 바꾸셨다. 혹시 나중에 자식들의 집에서도 쓸 수 있게 크고 최신형의 예쁜 디자인을 고집하셨다. 자라면서 본 어머니는 항상 고단해 보였지만 어머니는 그때가 행복했다고 말씀하셨다. 어려서 피난 생활을 겪고 난 후, 생활력 강한 아버지를 만나 결혼한 것도, 꽃이 피는 작은 마당도, 제비처럼 모여 밥 달라는 어린 자식들도 다 고마웠다고 했다. 나는 어머니가 아침마다 반질반질하게 닦으시던 마룻바닥조차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어머니가 해주신 지나간 인생 이야기들은 형형색색의 그림엽서 수천 장이 영화처럼 돌아가는 것같이 생생하고 아름다웠다.
  “나는 더 바라는 게 없다. 죽어도 여한이 없어.”
  “무슨 소리야. 구십 넘기고 백 살까지 살아야지.”
  “자식들 다 결혼시키고 안 아프고 바르게 살면 됐다. 아버지도 맨날 그렇게 말했어. 이 정도면 잘 살았다고.”
  “그래, 엄마는 정말 잘 살았지. 풀 한 포기 쌀 한 톨도 하찮게 버리지 않고 다 지켜내면서. 우리 엄마 대단해.”
  특히, 어머니가 피난 오기 전 이야기를 할 때는 마치 소녀 시절로 돌아간 것같이 목소리가 들떠 있었고 얼굴조차 빛나 보였다. 하루 이틀에 멈출 줄 알았던 어머니의 추억 이야기들은 한국에서 머물고 있던 두 달 동안 내내 이어졌다. 그토록 많은 즐거움과 아픔과 아름다움이 뒤섞인 이야기들을 어떻게 마음 깊은 곳에 다 간직하고 계셨는지 신기할 정도다.
  “엄마는 그동안 엄마 어릴 때 이야기를 왜 잘 안 했어?”
  “말을 하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지. 힘든 얘기도 많으니까. 내가 고향 이야기를 하면, 듣고 속상해할 것 같아서 안 했어…….”
  어머니가 쓸쓸하게 웃으며 하는 말에 내 가슴이 먹먹해졌다. 말을 실컷 못 하고 사는 나와 상황은 달랐지만 비슷한 아픔이 전해졌다.
  “너는 나처럼 살지 말고 할 말은 다 하고 살아야 한다.”
  “응…….”
  얘기를 나눌수록 어머니가 새롭게 보였다. 나에게는 마냥 편안한 둥지였던 어머니가 이제 함께 나이 들어가는 한 여인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한편 그동안 내가 얼마나 이기적으로 살았는지 후회가 됐다. 아버지가 떠나시고 내 나이가 오십이 넘어서 처음 어머니의 인생을 보기 시작한 게 너무 죄송했다.
  “엄마가 살아온 걸 보면 산 넘어 산이라는 말이 이해돼.”
  “너는 남편과 딸들 있는 미국도 가고 엄마 보러 한국도 올 수 있지만, 나는 걸어서라도 갈 수 있는 거리를 칠십 년 넘는 세월 동안 못 가고 있어. 참으로 원통해. 세월은 또 얼마나 빠른지 눈 깜짝할 새야. 이제 좀 편하게 사나 했더니 아버지는 저렇게 떠나가 버리고.”
  나는 나도 모르게 어머니를 꼭 껴안았다. 내가 먼저 어머니를 안아 준 것은 태어나서 처음인 것 같았다. 단단한 기둥 같았던 어머니의 몸은 내 두 팔에 쏙 들어오게 놀랍도록 여리고 작아져 있었다.

  친정집 근처에는 내가 자랄 때부터 있었던 재래시장이 있다. 서울 변두리에서는 몇 안 되는 오래된 시장이다. 다른 동네에서도 찾아오는 사람이 많아서 오후에는 항상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꾸물거리던 비가 그치고 햇살 좋은 날, 어머니와 걸어서 시장에 갔다. 한국도 최근에 다른 나라에서 온 이민자들이 많이 늘었다는 것을 재래시장에 가면 느낄 수 있다. 외모도 다르고 한국말이 어눌한 사람들이 물건 사러 다니는 모습을 종종 본다. 그날도 정육점에서 국거리를 사는데, 앞에 키가 훤칠한 금발 미녀가 정육점 주인과 뭔가 소통이 안 되는지 손짓으로 뭔가를 가리키며 얘기하고 있었다. 두 사람 뒤에 서서 가만히 들어보니 그녀가 원하는 것은 스튜에 넣을 고기라는 걸 알았다. 정육점 주인은 스튜라는 단어를 국거리 고기와 연관하기 힘들었던 모양이다. 계속 삼겹살이며 등심 같은 고기를 번갈아들고 여자를 쳐다봤다. 그 광경을 보던 나는 용기를 내서 그녀 뒤에서 도와주겠다고 말을 걸었다. 영어로 간단하게 스튜에 넣을 어느 고기를 원하는지 얼마만큼 살 건지 물어보고 정육점 주인에게 말해 주었다. 러시아나 동유럽 쪽에서 온 사람인지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나와 그럭저럭 말이 통했다. 그녀는 고기를 사 가면서 나를 보고 머리 숙여 고맙다고 한국식 인사를 했다. 그녀 곁에 부끄러운 듯 숨어 있던 대여섯 살로 보이는 여자아이가 얼굴을 삐죽 내밀고 고개를 숙이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감사합니다.”
  조그만 여자아이의 모습에서 쿠키에 꽃을 넣는다는 로즈의 뉴질랜드 시절이 겹쳐 보였다. 그리고 그때 내가 들었던 따뜻하고 친절한 목소리들이 함께 들려오는 것 같았다. 돌아오는 길에 가여운 하늘이에게 줄 간식을 샀다. 우리가 도착해 대문을 열자 마당에서 하늘이가 반갑게 맞아주었다. 개들은 성대를 없애는 수술을 받아도 예전처럼 자기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 줄 안다고 한다. 간식을 주니 하늘이가 고맙다고 또 ‘컹컹’ 짖는다. 어머니와 나는 하늘이를 보며 웃다가 여름꽃이 만발한 마당에 앉아 삶은 옥수수를 나눠 먹었다. 어머니가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나시면서 말씀하셨다.
  “저녁에는 콩국수 먹자. 네 아버지가 참 좋아하던 건데.”
  “콩국수 좋지. 나도 좋아해. 내가 아버지랑 입맛이 똑같잖아.”
  보라와 연분홍빛 나팔꽃이 하나둘 고개를 숙이는 어느 여름날, 늦은 오후였다.

수상소감

  수상 소식을 들은 전날 꿈속에서 돌아가신 아버지가 활짝 웃으시며 제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꿈이 유난히 생생해서 좋은 일이 있으려나 복권이라도 한 장 살까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마침 지인들과 약속이 있어 커피숍에 앉아 메일함을 열었는데, 예기치 않은 수상 소식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 환희의 순간이 아직도 믿기지 않고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저의 이민 생활은 어느덧 이십 년 가까이 되었습니다. 

  어릴 때 외갓집 근처에 작은 개울이 있었습니다. 몇 개의 돌다리만 건너면 길 저쪽에 도달하는 그리 깊지도 물살이 세지도 않는 개울인데도 항상 움찔대며 조심조심 건넜던 기억이 납니다. 저에겐 고국을 떠나서 사는 삶이 그랬습니다. 눈앞에 깊은 수렁도 세찬 바람이 보이지 않아도 아슬아슬하고 조심스러운 삶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나에게 용기를 내라고 내미는 작은 손길들이 있었습니다. 그 손길들을 통해 사람은 관계 안에서 살아가는 힘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사랑은 시간과 공간과 모든 세대를 초월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도 우리의 아름다운 한글로 따뜻한 이야기들을 쓰고 싶습니다.

  먼저 해외 이민자들에게 한글로 응모할 수 있는 장을 열어주신 한국문학번역원에 큰 감사를 전합니다. 또한 저의 이야기를 읽어주시고 뽑아주신 심사위원분들께도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항상 저의 글쓰기를 응원해 주는 가족과 친구들 모두 고맙습니다. 

  이 상은 앞으로 좋은 글 많이 쓰라는 격려로 받아들이고 계속 글 쓰는 사람으로 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필자 약력


1971년 서울에서 태어나 2006년 뉴질랜드, 2012년 미국 캘리포니아, 2021년 미국 워싱턴주 시애틀로 이주했다. 경희사이버대학 미디어문예창작과에서 2년간 공부를 했으며 2023년 제25회 재외동포문학상 체험수기 우수상, 2024년 제17회 시애틀문학신인문학상 단편소설 부문 우수상을 수상했다.
* 사진제공_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