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작
제2회 《너머》 신인문학상 시 부문(「체리 토마토를 위한 망원경」 외 4편, 이원정)
2024. 09. 02 00:00
알맹이들이 줄기 따라 방울방울 깜빡이는구나 애썼네 이제 시원한 물을 아낌없이 뿌려 까치발 동동대던 시간 멀리 흘러가게 해줄게 한 손 말고 두 손으로 너의 얼굴은 토마토 그런데 너의 이름은 체리 체리나무에 올라가 보았니 하늘을 만져본 적이 있었기를 꿈에라도 밤나무도서관 사다리를 빌려줄 테니 나무 틈에 한소끔 잠든 바람의 긴 이야기에 볼을 대보렴 갈릴레오 망원경이 필요할지도 몰라 별을 만나려면 그래도 다행이야 천둥 치는 대항해의 밤바다보다는 우리동네 나무 위가 한결 포근할 테니 나는 너의 꿈같은 이름이 적힌 이 상자를 피아노 손가락 끝으로 기억할 거야 별과 함께 영근 체리 토마토 모험담을 노래하고 싶어서 오늘따라 언 땅을 딛은 보드라운 맨발이 시리지 않다고 잊지 말고 써두어야겠네 망원경을 품에 안고 있으니까 꿈에서도
그런 날이 있지 깜짝 선물로 아이스크림이 있었으면 하는 날 동생이 아버지 손 잡고 나비춤을 추고 나는 이름표를 한번 더 읽어 보았어 처음 불러보는 너의 큰 숟갈로 한입 그러자 입안 가득 미시시피 강 위 별이 떠올랐지 하늘 별의 개수를 구십삼까지 세다가 길을 놓쳤는데 이제 그만 고개를 내려 허클베리 덤불을 따라가야겠다고 생각했어 그 많은 별의 깜박이는 눈동자 말을 다 기억하지 못해 미안할 뿐이야 뗏목에 가까이 가려면 아이스크림을 한입 더 먹어야 했어 조금 떨렸으니까 십구세기 허클베리 핀과 짐에게 말을 걸어보았지 그네들이 이십세기 목련꽃 야속한 강의실 무대의 주인공이었고 지금 나는 이십일세기 연필 든 이라는 걸 알까 허클베리 맛 아이스크림이 무슨 색인지 맞춰봐 하양도 빨강도 깜장도 아니고 라벤더빛이 도는 바닐라크림색이더라 학교에서 배운 적은 없었지만 일기장 모서리에 잘 적어 두어야 할 것 같아 머나먼 허클베리 맛 별이 보내는 눈빛을 이 다음에 또 만날 때는 주사위를 두 개 가져올게 조금 더 오래 얘기를 듣고 싶으니까 백을 셀 때까지만이라도 노를 젓던 손을 멀리 뻗어보면 공평한 땅에 허클베리 열매가 가득일 거야
찰스 강이 엄마의 발자국을 달님 두레박에 따독따독 안아 담는 걸 알고 있었어 기숙사에서부터 따라오던 달님의 입가가 점점 묵직해지고 있었으니까 두 손을 오무려 강 위로 떠오른 빛비늘 사이사이 기도 방울들을 모아 길어올렸지 차오르는 기도 줄기가 엄마의 얼굴에 흘렀어 몇백 년 동안 공부를 한 덕에 생각열매가 가득 달린 사과나무로부터 뉴튼의 붓을 선물 받았지 찰스 강에게 아침인사를 하러 가길 잘한 것 같아 별호주머니에 붓을 담아 집으로 돌아오는 블루 제트 안에서 구름과 바람에 대해 쉼없이 셈을 하지 않을 수 없었어 사과나무의 성의를 생각해서 우리집 뒷마당으로 함께 날아온 달님 두레박 속에 별을 닮은 노래가 찰랑이고 나는 노래줄기에 붓을 적셔 사과 그림을 그렸어 몇 개를 그렸는지 셀 수가 없도록 가득
낮에 누가 오려나 대답 없는 흙바닥에다 손가락으로 그린 물음표에 걸린 햇님 손을 잡고 온 화분 얼른 물음표를 지우고 검지손가락 흙을 바지에 닦은 다음 악수를 했지 길고 고단했던 은머리타래를 흙가슴에 묻은 파뿌리 화분한테 달밤으로 들어가 소곤소곤 실을 짜서 뜨개옷을 만들어줄거래 놓칠세라 별님한테 발꿈치를 들고 그 얘길 해주었어 우주시제문법에 어긋나지 않게 있는 힘껏 까치발 총총 파뿌리가 빗방울을 마디 마디 채워 허리 꼿꼿한 피리가 되었네 추운 밤에도 끄떡없는 도톰한 진초록 망토가 참 맘에 들더라 단추를 두 개 달아주었어 흙에서 멀찍이 떨어진 자리에다 타닥타닥 다가닥다가닥 엄마의 베개에서 파 피리가 그려준 노랫말 소리가 났지 밤새껏 말달려 누나의 창문에 노랫방울이 도착하면 누나가 알람 시계를 끄면서 편지를 읽어볼 거야 이 피리 말소리를 귀에 두르고 우리집을 잘 찾아오세요 크리스마스가 다가올 때쯤
잠 안 자고 비바람 한 권 다 읽던 밤이 뭘 두고 갔을까 네모 마당에다 돋보기 안경을 써야 해 공책에 연필로 쓰는 걸 잊지 마 소나무잎 바늘을 주고 갔구나 한 쌈이나 한 달에 둘씩 일년이나 쓰겠네 유클리드 공리를 자작나무에 걸어 두었으니 동그라미를 꿰매야지 선물받은 바늘로 중심점을 잡는 일은 염려 마 햇님이 있잖아 둘레길이는 소숫점 여섯째자리까지면 충분할걸 라벤더가 왔다는 건 눈을 감고도 알 수가 있지 침착한 향이 말해 주고 있잖아 산 후앙 아일랜드 한 바퀴 날아 이십 년 실타래를 실어왔다고 엄마의 세모난 어깨에 수를 놓을 수 있겠네 동그라미 대칭으로 타이거 릴리에서 할아버지 편지가 피어날 거야 꼭 봄이 아니어도 좋아 주머니를 하나 달아둘까 동그라미 한쪽에 비오는 날 편지가 젖으면 보고 싶던 말이 너무나 작게 들릴 테니 동서남북 총기 반짝이는 로즈마리가 딱 네 그루라서 맘이 놓여 모서리를 야무지게 당겨 벌새 오는 시간에다가 창구멍을 만들기로 했어 말없이 기다리던 돌멩이는 반가운 별이 되겠지 동그라미 한가운데 눈꽃이 차올라 피는 날에는
새벽 여섯 시 스위스 인터라켄역을 떠나 프랑스 파리역으로 향하는 기차를 기다리는 바젤역 플랫폼에서 이메일 알람이 울렸다. 기차에 올라 스트라스부르역을 지날 때 편지를 열어보니 신인문학상을 받게 되었다는 선물이 담겨 있었다. 아! 내가 탄 이 기차가 하늘을 나는 루돌프의 꽃마차였구나 생각했다. 감사와 기쁨의 말빛이 창문 가득 열렸다.
이십 대에 한국을 떠나 오십 대가 되도록 우리말로 채워지지 않은 땅 위를 걸으며 숨길을 잃지 않으려면 마음속 세밀화 지도기록을 그리며 살아야 한다고 믿었다. 시를 쓰는 일은 외롭고 그리운 씨앗을 심는 찬바람 부는 길 위에서 따뜻한 족등이 되어주었다.
내가 나고 자라며 생각의 숨을 심을 수 있도록 우리말글 집을 정성껏 지어주신 부모님께 감사드린다. 그리고, 나의 어머니로부터 이어받은 우리말글 집에서 자라나 길잡이 별빛을 채워준 딸에게 고맙다.
손을 꼭 잡고 이 길을 함께 걷는 가족에게 감사하다.
1973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역사학과 영어영문학을 공부하고, 미국에서 응용언어학과 박물관학을 공부했다. 시애틀문인회에서 동시 부문 우수상을 받은 뒤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한국학교에서 외국인과 한인 2세들에게 한국 역사와 한국어를 가르쳤다. 현재 워싱턴주에서 중학교 교사로 일하며 학생들과 함께 생각하고 감사하는 하루하루를 써 나가고 있다.
* 사진제공_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