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를 넘는 작가들
8호
경계를 가르고 넘나들고자 했던 자유로운 이방인 홍세화
하상복
▲ 홍세화 © 이상엽
1999년 6월, ‘빠리의 택시 운전사’ 홍세화(1947-2024)가 들어왔다. 1979년 3월 한국을 떠나 프랑스에 정착한 지 정확히 20년 만이다. ‘한국을 제외한 모든 나라’를 여행할 수 있다는, 너무나도 기묘하고 역설적인 여행 증명서를 지니고 살아온 망명자의 귀국은 무엇보다 한국의 정치적 진보를 말해 주는 드라마틱한 표상이었다. 오랜 반독재 투쟁의 시간을 지나 민주화된 한국이, 박정희에서 전두환으로 이어진 군부 체제에 의해 입국을 거부당한 그의 귀국을 환영한 것이 그러하고, 2002년 1월에 영구 귀국해, 1987년의 민주화로 탄생한 《한겨레》의 기획위원으로 입사해 언론인 활동을 하게 된 것이 그러하다.
아주 우연히 떨어지게 된 타지 파리, 30대 초반부터 20년 동안, 삶을 꾸려 나가고, 아이들을 교육하고, 여러 사람들과 사귀며 관계 맺어 온 곳, 그리하여 이제 몸과 영혼이 익숙해진 그 땅을 떠나기로 마음먹은 것은 선택이면서 선택이 아니었다. 그 고통스러운 결정에 대해 그는 “꼬레는 나의 땅이며, 우리들이 사는 땅”, “그 땅이 자꾸만 나를 부른다. 시간이 지나갈수록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더 부른다”1)고 답했다. ‘굳이 고국으로 돌아가야 하는가’라는 프랑스 벗의 질문에 그는 역시 ‘땅이 부른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고향으로 돌아갈 자신을 그는 ‘이방인’으로 묘사했다. “우리의 하늘과 땅, 산과 들판과 강물과 논둑길에서 함께 어우러져 사는 우리들 속으로 하염없이 파묻히고” 싶지만, “그 기쁨이 티 없는 기쁨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진회색의 앙금이 영영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2) 느껴야 하는 이방인이었다.
프랑스에서의 홍세화는 피부, 언어, 역사 등으로 직조된 이국의 민족적 정체성을 공유할 수 없는 존재라는 점에서 이방인이었고, 한국에서의 홍세화는 원초적 동질성을 함께하는 한국인이었음에도 자신의 정치적 영혼을 채우고 있는 이념과 가치에서 너무나도 이질적인 사람이었다는 점에서 이방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어느 쪽에도 속할 수 없는 ‘불행한’ 경계인적 운명을 체념의 길로 몰아가지 않고, 자신의 젊음을 구원해 준 나라, 프랑스의 이념적 거울에 비추어, 자신의 삶이 새롭게 영위될 땅을 개혁하는 쪽으로 나아가기로 한다.
한국을 방문한 홍세화에 관한 기사를 실은 프랑스의 좌파 신문 《뤼마니테(L'Humanité)》는「고국의 예언자가 된 한국의 망명자」라는 표제 아래 그가 “자신의 나라에서는 알려지지 않은 언어, 똘레랑스(tolérance)를 전파”하고 있었음을 기사화했다.3) 2000년대 초반, 필자가 프랑스에서 돌아왔을 때 한국에는 관용이라는 도덕적 언어가 유행하고 있었다. 명백히 그것은 한국의 미래에 관한 예언자적 외침의 결과였다. 그는 자신의 존재를 한국에 알린 너무나도 유명한 책,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에서 똘레랑스를 이야기했다. 그는 책의 보론(「프랑스 사회의 똘레랑스」)을 통해 관용을 아주 길게 설명하고 해설해 나갔다. 프랑스에서 살아가면서 그의 ‘가슴에 가장 깊게 각인된’ 원리였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분단을 극복하고 통일을 실현해야 할 한국 사회에서 가장 시급히 요청되는 정치사회적 덕목이 바로 똘레랑스라고 판단한 까닭이다.
30대의 청년 홍세화가, 해외 근무차 들어온 프랑스를 떠나지 못하고 정치적 망명자 신분으로 살아야 했던 것은 유신 체제에서 벗어나고 제국주의로부터 해방되어 민주적이고 자주적인 나라를 만든다는 목표로 조직된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남민전) 구성원들이 구속되는 사건 때문이었다. 1979년 10월과 11월 언론에 알려진, 이른바 국가 전복을 기도한 반체제 공안 사건으로 그는 귀국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프랑스에 정치적 망명을 신청했다. 혁명의 나라 프랑스는 그를 받아들였다.
자신을 파견한 회사가 문을 닫는 상황 속에서 홍세화는 택시 운전을 하며 생계를 해결해야 했다. 운전사는 그의 선택이었겠지만, 흥미롭게도 그것은 스스로 규정한 자신의 존재성인 ‘삼중의 이방인성’을 드러내 주는 상징적 직업이었다. 자기 마음대로 정착할 수 없는, 자기 바깥의 영향력을 따라 부유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방인의 속성을 지닌 노동자인 것이다.
그러나 홍세화는 택시 운전이라는 이방인적 유동성 속에서 프랑스라는 사회를 넓고 깊게 알아갈 수 있었다. 이방인 운전사는 택시 안과 밖에서 느껴야 했던 답답함, 고독, 외로움, 절망 등 여러 감정들을 대가로 프랑스에 관한 인식과 영감을 지닐 수 있었고, 그 지적 자산을 영구 귀국한 한국 사회를 해석하고 비판하고 개혁하는 데 사용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그는 삶이 다할 때까지, 한국 정치의 패권주의와 무원칙, 한국 노동 시장의 반인권과 반민주주의, 한국 교육의 폭력성과 무비판주의를 소리 높여 외쳐 왔다. 그 점에서 그는 ‘앙가주망(engagement)’을 실천한 지식인이었지만, 진보 정당의 일원으로, 지도자로, 대표로, 보수화되고 기득권화된 한국의 정당 체제에 맞서 줄기차게 싸워 온 운동가적 정치인이었다.
한국 사회에 관한 비판적 진단을 담고 있는 2000년대 초반의 그의 책들을 읽어 보면 20여 년이 지난 지금의 이야기로 착각하기도 한다. 그럼, 한국 사회를 개혁하고자 한 그의 지적․정치적 실천들은 실패했을까? 그가 통찰한 것처럼 한국 사회의 기득권 구조는 생각보다 더 강고하고 집요하다. 그 두껍고 딱딱한 구조는 이런저런 변명으로 자신의 변신을 정당화하는 지식인들과 정치인들을 적잖이 양산해 왔다. 지식인-언론인-운동가-정치가 홍세화의 한국에서의 근 25년의 삶은, 그들의 반대편에 서서 프랑스에서 깨달은 사회민주주의라는 유토피아를 실천하기 위해 꿋꿋이 버텨 온 순도 높은 인간의 모델을 보여 주었다. 파리의 한 식당에서 낭만적 망명객으로 나타난 그는, 대한민국 남도의 한 강당에서, 병마와 싸우면서도 한국 사회의 개혁을 외친 그는 지리적, 지적, 정치적, 문화적 경계를 가르고 넘나들고자 했던 예외적 인간의 모델이었다. 그리고 이 세상을 떠나기 전 그의 마지막 말이 ‘자유’였는 바, 홍세화는 자유인이 되고자 했다.
1) 홍세화,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창비, 2006. 초판은 1995년 간행.
2) 홍세화, 『빨간 신호등』, 한겨레출판, 2003.
3) “PAROLES SAIHWA HONG, Un exilé coréen”, L'Humanité, 13 avril 2000.
1966년 서울 출생, 파리도핀(Paris-Dauphine) 대학을 졸업하고, 목포대학교에서 정치학을 가르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야누스로 그려진 근대』, 『권력의 탄생』, 『죽은 자의 정치학』, 『광화문과 정치권력』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