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아스포라 깊이읽기
8호
귀향 수첩
평론: 이은란
‘흑인적인 것’ 너머, 만인의 네그리튀드를 위하여:
에메 세제르의 『귀향 수첩』 읽기
이은란
“
네그리튀드는 이제 더 이상 두개골의 지표도
혈청도 체세포도 아니다.
우리는 고통이라는 잣대로만 잴 수 있는
인간이다. 1)
”
2023년, 앙틸레스 제도의 일간지 중 하나인 《프랑스-앙틸레스 마르티니크(France-Antilles Martinique)》에는 에메 세제르(Aimé Césaire, 1913-2008)의 탄생 110년을 기념하는 각종 낭독회와 전시회의 정보가 실렸다. 에메 세제르는 2008년 작고하기까지 ‘세제르 할아버지’ 또는 ‘세제르 아버지’로 불리며 고향 마르티니크(Martinique)의 주도인 포르 드 프랑스(Fort de France)의 시장직을 무려 50년 이상 수행해 왔다. 그는 마르티니크를 대표하는 정치인일 뿐만 아니라 시인, 희곡 작가, 마르크스주의자, 그리고 ‘네그리튀드(Négritude)’를 처음으로 주창한 사상가이기도 하다. 하지만 세제르의 사상과 문학이 가진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국내에 번역된 그의 저작은 2011년부터 그린비 출판사에서 간행한 네 권의 선집이 거의 유일하다. 몇몇 연구자들이 지적해 왔듯이 세제르에 대한 연구는 그의 제자이기도 한 프란츠 파농(Franz Fanon, 1925-1961), 에두아르 글리상(Édouard Glissant, 1928-2011)에 비해 상대적으로 빈약한 편이다.
그중에서도 에메 세제르의 첫 시집이자 장편 서사시인 『귀향 수첩』(1939)은 마르티니크 섬에 유입된 흑인 디아스포라의 역사와 더불어 네그리튀드 운동에 대한 그의 초기 사유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
굶주리고, 천연두 딱지가 닥지닥지 내려앉은, 술에 절은 서인도제도인들. 돌다 돌다 떠돌다 이 부두의 진창에, 이 도시의 속진에 좌초한, 속절없이 가라앉은, 서인도제도인들.2)
자시가 끝나갈 즈음에, 좌초한 자들의 표정 없는 해변과 부패한 것들이 풍기는 악취, 주인장과 도살업자들이 벌이는 한바탕의 광란, 벗겨버릴 수 없는 편견과 무지의 뱃머리, 매춘, 위선, 음탕, 배신, 거짓, 사기, 멱살잡이, 소심함의 극치, 은밀히 터져 나오는 열정, 탐욕, 히스테리, 성도착, 비참한 광대, 절름발이, 가려움증, 서두름, 뜨뜻미지근한 퇴행의 그물침대.3)
자시가 끝나갈 즈음에, 납작하게 가라앉은 얼굴의 생과, 유산된 꿈, 이 꿈을 치울 장소의 부재와, 가망 없는 침대에서 무기력하게 흐르는 생명의 강, 오르지도 내리지도 않고, 어디로 흘러야 할지조차 잊어버린, 애석하게도 텅 비어 있고, 무거운 무료함의 그림자가 공히 만물의 평등 위로 골고루 퍼져 흐르는 생명의 강, 한 마리 새의 눈부심에도 결코 위축되지 않는, 상한 공기.4)
”
1502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2차 항해와 함께 ‘발견’된 마르티니크는 루이 13세 치하인 17세기에 이르러 프랑스의 영토가 된다. 이후 유럽인들이 이곳에 플랜테이션 농장을 운영하면서 함께 유입된 흑인 노예에 대한 가혹한 착취가 시작되었다. 인용한 대목으로부터 쉽게 포착되듯이 『귀향 수첩』의 초반부에 묘사된 마르티니크 흑인들의 삶은 질병, 악취, 범죄, 광기, 무지, 퇴행, 부패 등의 요소와 마구 뒤섞여 있다. 세제르가 보기에 오랜 굴종과 오욕의 역사에 짓눌린 마르티니크 흑인들은 저항의 동력을 상실했다. “말라리아 피가 흐르는 이 고원은, 근심의 신발을, 순종의 신발을 신은 채, 속에서 타오르는 뜨거운 맥박의 태양을 거꾸로 돌리고 있다”5)라는 이 시집의 한 대목을 보자. “속에서 타오르는 뜨거운 맥박”을 가득 머금은 화산섬 마르티니크는 정열과 혁명의 정신이 잠재한 이곳의 흑인들과 동궤에 놓인다. 그러나 ‘근심’과 ‘순종’에 발을 붙잡힌 마르티니크 흑인들의 피에는 ‘말라리아’로 환기되는 병적인 절망만이 흐를 뿐이다. 이 시집에서 꾸준히 반복되는 ‘자시(子時)’는 화자가 미구(未久)에 올 아침, 즉 흑인들의 저항과 해방을 기다리는 시간적 배경이다. 이들은 밝은 태양이 뜰 아침을 향해 진보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퇴행 속에 침묵하며 안주한다. 이러한 마르티니크 흑인들의 모습은 “퇴행의 그물침대”와 “가망 없는 침대에서 무기력하게 흐르는 생명의 강”과 같은 부정적인 묘사로 이어진다.
“
이자가 내 동포이다.
백인성이라는 감옥에 갇힌 오직 이자만이
백색의 죽음을 부르는 백색의 외침을 거부하는 오직 이자만이
(투생, 투생 루브루튀르)
백색의 죽음을 수반하는 백색의 송골매를 현혹하는 이자
백사(白沙) 깔린 부패한 바다에 홀로 남은 오직 이자만이
수평선을 등지고 꼿꼿이 일어선 한 늙은 흑인
죽음은 이자의 머리 위로 빛나는 원을 그린다.
죽음은 이자의 이마 위로 빛나는 부드러운 별이다.6)
”
세제르는 비참과 무기력에 빠진 흑인들의 정신을 일깨우기 위해 아이티 혁명을 주도했던 흑인 지도자인 투생 루브루튀르(Toussaint Louverture, 1743-1803)를 ‘동포’로 호명한다. 마르티니크처럼 프랑스에 의해 지배되던 흑인 노예들의 섬. 투생은 노예 제도를 철폐한 최초의 흑인 혁명가가 되어 “백인성이라는 감옥”에 갇혀 홀로 쓸쓸한 죽음을 맞는다.7) 이 시에서 백인에 의해 지배되는 세계를 암시하는 “백사 깔린 부패한 바다”에서 “백색의 외침을 거부하”며 끝까지 저항하던 투생은 머리 위에 그려진 ‘빛나는 원’과 이마 위의 ‘빛나는 별’로 암시되듯이 성자(聖者) 혹은 순교자로까지 격상된다.
이처럼 『귀향 수첩』은 아이티 혁명의 ‘유산’되어 버린 꿈을 마르티니크 내부에서 소생하려는 에메 세제르의 강렬한 의지가 담긴 시집이자, 백인들에게 “부드러운 사탕수수와 비단 같은 면화를 제공하겠다고 비굴하게 약속하는 노예” 8)
의 상태에 머무르는 마르티니크 흑인들의 정신을 일깨우려는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귀향 수첩』을 읽어나가다 보면 한 가지 물음에 봉착하게 된다. 에메 세제르는 왜 이 시집뿐만 아니라 모든 작품을 프랑스어로 발표했던 것일까? 세제르는 1931년 파리의 루이 르 그랑 고등학교(Lycée Louis Le Grand)에서 만난 레오폴드 세다르 상고르(Léopold Sédar Senghor, 1906-2001), 고향 친구인 레옹 콩트랑 다마스(Léon‐Gontran Damas) 등과 함께 잡지 《흑인 학생(L’Étudiant noir)》을 창간하면서 본격적인 네그리튀드 운동을 펼치게 된다. 네그리튀드 운동은 그 어원에도 이미 함축되어 있듯이 흑인 고유의 주체성과 고유성을 부활시킴으로써 백인의 착취와 지배에 저항하려는 시도이다. 그런데 정작 에메 세제르는 마르티니크의 언어인 크레올어(créole)가 아닌 프랑스어로 작품 활동을 했다는 점, 그리고 초현실주의라는 난해한 장르를 구사했다는 점에서 많은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이와 관련하여 식민주의 이론가인 프랑수아즈 베르제(Françoise Vergès)와의 대담에서 그는 프랑스 초현실주의와 네그리튀드 운동의 만남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
마르티니크 출신 시인들의 작품을 읽는 것, 그것은 12세까지 손가락으로 셈을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12음절 시 형식인 알렉상드랭(alexandrine)을 알게 되는 것이죠. 그들은 알렉상드랭으로 아주 멋진 시를 썼습니다. 이른바 두두이즘(doudouisme)이 그것입니다. 초현실주의는 정확히 이와 같은 문학에 대한 거부를 표명했습니다. 초현실주의 운동은 우리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이 운동을 통해 이성과 인공 문명과 결별할 수 있게 되었고, 또 인간의 내면의 힘에 호소할 수 있는 길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9)
”
세제르 이전의 마르티니크 시인들은 알렉상드랭이라는 가장 ‘프랑스적인’ 시형(詩形)을 통해 이국적인 정서(두두이즘)를 표현했다. “12세까지 손가락으로 셈을 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는 표현으로부터 유추되는 것처럼, 마르티니크를 비롯한 서인도제도의 시인들은 프랑스 서정시를 모방해 백인의 취향에 맞는 진부한 시들을 썼던 것이다.10) 반면 세제르는 인간의 무의식과 광기를 중시했던 초현실주의를 통해 ‘흑인/백인’을 야만과 문명의 이분법으로 구별하는 유럽의 합리적 이성을 철저히 거부했다. “내 그대를 그대와/ 그대의 이성을, 증오하기에, 나 천명하노라/ 정신분열증이 불붙은 광기가,/ 말 없는 카니발이 내 친족임을” 11)이라는 구절에 드러나듯이, 시인은 광기적이고 추한 것, 원시적인 것, 혐오스러운 것, 야만적인 것으로 범주화되어 이성과 철저히 구별되어 왔던 ‘흑인적인 것’을 자신의 ‘친족’으로 여기고 재발견하고자 했다.
“
오 자비의 빛이여
오 그 빛의 신선한 근원이여
화약도 컴퍼스도 만들지 못한 사람들
증기도 전기도 길들이지 못한 사람들
바다도 하늘도 탐험치 못한 사람들
그러나 이들 없이는 땅이 땅일 수 없는 사람들
땅이 자신을 버리면 버릴수록
우리는 점점 더 낮게 자라는 혹
우리는 헛간
이 땅에 속하는 모든 것들을
무르익도록 저장하는
나의 네그리튀드는 돌이 아니다.
한낮의 소란을 등지고 앉은 귀먹음도 아니다.
나의 네그리튀드는
이 땅의 죽은 눈가를 흐르는
죽은 바다에 뜬 하얀 반점이 아니다.
나의 네그리튀드는 탑도 성채도 아니다.
붉은 흙살을 파고드는 것
하늘의 붉은 살점을 향해 돌진하는 것
나의 네그리튀드는 너덜너덜 구멍이 나 있다
너덜너덜 의미 있는 인내심이 심히 마모되어 있다. 12)
”
위 대목에서 ‘화약’과 ‘컴퍼스’는 과학을, ‘증기’와 ‘전기’는 산업 자본주의를, ‘탐험’은 식민제국주의를 각각 상기시킨다. 반면 “화약도 컴퍼스도 만들지 못한”, “증기도 전기도 길들이지 못한”, “바다도 하늘도 탐험치 못한” 흑인들은 자연을 개발의 대상으로 도구화하는 유럽의 문명과 한참 동떨어져 있다. 이에 세제르는 문명화되지 않은 네그리튀드의 자연적 생명력을 예찬한다. “그러나 이들 없이는 땅이 땅일 수 없는 사람들”이라는 구절이 암시하는 것처럼 ‘사탕수수와 면화’로 대표되는 흑인들의 노동은 생명을 배양하는 땅을 가꿈으로써 자연의 존립을 가능하게 만든다. 또한 “땅이 자신을 버리면 버릴수록/ 우리는 점점 더 낮게 자라는 혹/ 우리는 헛간/ 이 땅에 속한 모든 것들을/ 무르익도록 저장하는”이라는 구절에 깃들어 있는 리좀(rhizome)적 상상력은 어둡고 깊은 곳에서 더욱 강력하게 뿌리를 내리면서 ‘붉은 흙’과 ‘하늘의 붉은 살점’을 향해 돌진하듯이 전 세계로 뻗어나가는 흑인 디아스포라의 생명력을 암시한다. 또한 세제르의 네그리튀드는 ‘돌’이 암시하는 멈춤과 침묵, “한낮의 소란을 등지고 앉은 귀먹음”, ‘하얀 반점’이 암시하는 부유의 상태를 거부한다.
그런데 그의 네그리튀드가 ‘탑’과 ‘성채’의 견고함 내지는 고립성이 환기하는 인종주의와 본질주의로부터도 이탈하고자 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나의 네그리튀드는 너덜너덜 구멍이 나 있다”라는 구절에서는 네그리튀드를 ‘흑인 고유의 본질적인 것’으로만 규정하지 않으려는 그의 의지를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시인의 태도는 마르티니크 흑인 특유의 복잡한 정체성과도 긴밀하게 연관된다. 앞서 언급한 프랑수아즈 베르제와의 대담에서 세제르는 자신이 속한 ‘유색인 프티 부르주아 계급’에 대한 환멸을 느꼈으며, 상고르와 함께 끊임없이 ‘백인 사회에서 우리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졌다고 고백한다. 백인 상류 계급과 베케(Béké)로 불리는 혼혈인들, 이를 모방하는 프티 부르주아 흑인 계급, 그리고 하층민인 흑인들이 위계화된 사회가 바로 마르티니크였던 것이다.13) 흑인이면서도 백인을 모방할 수밖에 없었던 그의 정체성이 가진 특수함 속에서, 세제르는 자신의 구멍 나고 마모되어 버린 ‘네그리튀드’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깊이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다시 말해 『귀향 수첩』에 나타나는 ‘다공질(多孔質)의 네그리튀드’가 가진 독특함은 백색 인종과 프티 부르주아의 언어에 대해 저항하면서 동시에 흑인 민중의 비참하고 절망적인 현실을 고발하고자 했던 세제르의 치열한 정체성에 대한 의식으로부터 탄생했던 것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귀향 수첩』은 오랜 식민 통치로 인해 무력감에 빠진 마르티니크 흑인들의 주체성과 고유성을 되살림으로써 혁명 정신을 일깨우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럼에도 세제르는 네그리튀드를 타 인종에 대한 혐오나 배척이 아닌, 전 세계에서 핍박받는 흑인들의 ‘우주적이면서도 끈끈한 결속’으로 확장한다. 가령 “나의 박해는/ 다른 인종에 대한 증오 때문이 아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이것뿐이다./ 우주적인 궁기와// 우주적인 갈증을 해결하는 것./ 마침내 이 인종에게 해방을 처방하는 것,/ 그들의 끈끈한 결속에서/ 달콤한 과즙을 짜내는 것.”이라는 부분에서 ‘우주적인 궁기와 갈증’은 다만 마르티니크의 흑인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유럽의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에 의해 이산과 착취의 아픔을 겪어야 했던 모든 흑인들의 것이기도 하다. 특히 시인은 유럽식 합리적 이성과 과학 중심주의에 의해 미개의 영역으로 소외되어 왔던 아프리카의 주술적 힘을 복원하여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의 폭력 속에서 고통받는 모든 인종과 계급을 소환한다.
“
떠날 바에야.
하이에나 같은 인간이나 표범 같은 인간이 있듯이,
나는 유태인이 되겠다
카피르 족이 되겠다
콜카타 출신의 힌두교도가 되겠다
투표권이 없는 할렘 사람이 되겠다 14)
내게 무당들의 원시적인 신앙을 돌려주기를
내 손아귀에 악력의 힘을 돌려주기를
내 영혼에 칼의 정기를 넣어 주기를.
나 튼튼히 서오리다. 내 머리를 뱃머리로 만들어주기를
나 자신은 아비도 아니고
형제도 자식도 아니기를
아비이자 형제이자 동시에 자식이기를
남편도 아니기를, 단지 이 특별한 사람들의
진정한 연인이기를.15)
”
‘마르티니크의 아버지’로 불리던 세제르의 삶은 이미 그의 첫 시집에서 예견되었는지도 모른다. “떠날 바에야/ 하이에나 같은 인간이나 표범 같은 인간이 있듯이,”라는 인용문의 첫대목에서처럼, 시인은 자신의 고향을 떠나는 대신 ‘유태인’, ‘카피르 족’, ‘힌두교도’, ‘할렘 사람’과 같이 흑인뿐만 아니라 소외된 모든 인종과 계급을 끌어안고, ‘하이에나’, ‘표범’처럼 끊임없이 유동하는 정체성을 가진 디아스포라의 삶을 자처한다. 나아가 시인은 스스로 ‘튼튼한 뱃머리’가 되어 지상의 모든 고통 받는 이들을 저항의 길로 인도할 수 있기를, 그러면서도 자신이 이들의 “아비이자 형제이자 동시에 자식이기를”, “단지 이 특별한 사람들의/ 진정한 연인이기를” 소망한다. 이러한 결속과 연대는 “무당들의 원시적인 신앙”, 즉 영혼의 고통에 접속하고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영혼의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아프리카의 주술적 힘을 통해 가능해진다. 이제 세제르는 만인의 우주적 결속을 이루는 아프리카 특유의 신성한 힘으로써 ‘악력의 힘’과 ‘칼의 정기’로 표상된 투쟁과 혁명의 의지가 소생하기를 기도한다.
이제까지 살펴본 것처럼 『귀향 수첩』에 드러난 에메 세제르의 네그리튀드는 흑인 중심주의나 본질주의 등으로 쉽게 규정되지 않는다. 그의 네그리튀드는 ‘흑인적인 것’에 대한 예찬 및 혁명 의식과 더불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치열한 고민과 수치심, 소외된 민중 계급을 향한 애정 등이 복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의 서두를 연 『귀향 수첩』의 마지막 대목을 다시 읽어 보자. 세제르는 “네그리튀드는 더 이상 두개골의 지표도/ 혈청도 체세포도 아니다./ 우리는 고통이라는 잣대로만 잴 수 있는/ 인간이다.”라고 말한다. 이산과 굴종, 착취의 고통을 공유하는 모든 인간의 것이 바로 네그리튀드라는 것이다. 이는 그의 네그리튀드가 ‘흑인적인 것’이면서 동시에 ‘만인의 것’이 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1) 에메 세제르, 이석호 옮김, 『귀향 수첩』, 그린비, 2011, 60-61쪽.
2) 같은 책, 8-9쪽.
3) 같은 책, 12-13쪽.
4) 같은 책, 17쪽.
5) 같은 책, 11쪽.
6) 같은 책, 25쪽.
7) 투생 루브루튀르는 1802년 나폴레옹이 파견한 군대에 의해 체포되어 쥐라 산맥의 한 감옥에 송치되었고 1803년 사망한다.
8) 에메 세제르, 앞의 책, 40쪽.
9) 에메 세제르·프랑수아즈 베르제, 변광배·김용석 옮김, 『나는 흑인이다, 나는 흑인으로 남을 것이다: 에메 세제르와의 대담』, 그린비, 2016, 27-28쪽.
10) 이석구, 「마르티니크 네그리튀드 운동과 초현실주의 문제」, 《한국아프리카학회지》 44, 2015, 184쪽 참조.
11) 에메 세제르, 앞의 책, 27쪽.
12) 같은 책, 49-50쪽.
13) 이러한 마르티니크 사회의 특질은 이후 에메 세제르가 마르티니크의 독립 대신 ‘자치’를 추구하게 되는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세제르는 프랑스로부터의 독립이 오히려 마르티니크의 경제를 악화시킬 수 있다고 판단했으며, 프랑스에 속하는 대신 동화되는 것이 아니라 “마르티니크 섬 고유의 특수성, 고유한 제도, 고유한 이상(理想)”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 바 있다. 에메 세제르·프랑수아즈 베르제, 앞의 책, 44-45쪽 참조.
14) 에메 세제르, 앞의 책, 19-20쪽.
15) 같은 책, 52쪽.
《오늘의 문예비평》 2022년 겨울호에 「‘감응의 페티시즘(fetishism)’을 위한 제언」으로 비평 활동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