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픽션
8호
《깍뚜스》 꽃이 필 때까지
허지영
지나간 시각을 지금으로 사는 사람들이 있다. 판타지가 아니다. 멕시코에 먼저 가 있던 남편과 통화하기 위해서 나는 열네 시간 뒤를 계산해야 했다.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 문법은 가상이고 개념적 범주였다. 2016년 멕시코에 도착했을 때 가장 먼저 한 일은 시간 뒤로 돌리기. 물론 한국 시간이 기준이었을 때 이야기이다. 시차는 빠르게 적응했지만 멕시코의 일상은 여전히 새로운 집에 풀어놓은 이삿짐 같았다. 뒤죽박죽되어 제자리를 잡기까지 어느 하나 당연한 것이 없었다. 일상 같은 여행, 여행 같은 일상이라는 풋내기 이민자가 올린 SNS 프로필은 얼마 가지 못했다.
집 밖으로 나가는 일은 용기가 필요했고 길을 걷는다는 건 위험한 행동 같았다. 생필품을 사기 위해 마트만 겨우 다녔다. 남편이 괜찮다며 바람 쐬러 가자 해도 가는 길 내내 불안했다. 지금 생각하면 우스운 일인데 아직도 한국에 있는 지인들은 물어온다. 위험하지 않냐고. 멕시코도 사람이 사는 곳이다. 치안이 그때보다 좋아진 것도 있지만 달라진 체감 탓도 있겠다. 이웃들이 번갈아 하는 주말 파티에 마리아치 악단이 새벽까지 연주하는 소리는 한국의 층간 소음에 비할 바 아닌데 괜찮다.
창밖으로 오랜만에 바람이 분다. 기분 좋은 바람이지만 도로 위의 빽빽한 차들을 밀어내지 못한다. 차들은 바람 앞에서 앞뒤 눈동자만 끔뻑끔뻑할 뿐이다. 내 눈동자가 그랬다. 마트에서 잘못 받은 거스름돈을 몇 개 아는 단어의 조합으로 돌려받지 못하고 기다리는 줄에 밀리면서 자존감이 바닥까지 떨어졌다. 뜨거운 한류와 높아진 나라의 위상이 든든한 보호막이었다. 나라가 힘이 없어 잘살아 보려고 멕시코에 왔던 첫 이민자들이 겪었을 서러움이나 아픔은 짐작조차 힘들다. 캐나다에서 멕시코 미초아칸까지 매년 수천 킬로미터를 날아오는 모나크나비가 있다. 은행잎 같은 날개로 얼마를 가야 하는지 모르고 한겨울 추위를 피해 따뜻한 곳으로 떼 지어 이동한다고 했다. 멕시코 이민 역사와 닮았다.
유카탄 주 메리다에 있는 ‘한인이민박물관’을 찾아간 적이 있다. 한국의 어느 시골길에서 지나칠 것 같은 할머니가 골목 의자에 앉아서 손가락으로 가리킨 박물관은 집과 집 사이에 미닫이문 하나 열려 있는 작고 붉은 집이었다. 방에는 이민자들의 사진이나 그림 또는 신문 스크랩 등의 기록물들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멕시코 한인 100주년을 맞아 2005년에 설립되었다고 하는데 한쪽 벽에 1905년 유카탄에 온 한국인 이름들이 금색 명찰로 네모반듯하게 걸려 있었다. 김영하 작가의 소설 『검은 꽃』의 인물들이 각각의 다른 사연을 품고 일포드호에 올라타는 장면이 떠올랐다. 얼마나 가야 그 따뜻한 나라에 이르게 되는 것일까. 누구도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 없었1)던 1905년 4월 인천항에서 영국 상선 일포드호를 타고 유카탄에 도착한 1,033명이 멕시코 이민의 시작이었다.
당시 《황성신문》은 “북미 묵서가는 미합중국과 이웃한 문명 부(富)강국이니 수토가 아주 좋고 기후도 따뜻하며 나쁜 병질이 없다. 부자가 많고 가난한 사람들이 적어 노동자들을 구하기 극히 어려우므로 근년에 일·청 양국인이 단신 혹은 가족과 함께 건너가 이득을 본 자가 많으니 한국인도 그곳에 가면 반드시 큰 이득을 볼 것이다”2)라고 모집했다. 고통스러운 4년을 겨우 버티고 계약이 만료되었으나 1910년에 돌아갈 고국은 없었다. 대한제국 정부가 발행한 조악한 여권들은 이로써 무용지물이 되어 버렸다.3) 이민자들은 척박한 땅에서 강제 노동으로 번 돈을 독립을 위해 기부했고 생도 양성을 위한 승무학교 외에도 진성학교, 해동학교 등을 세워 민족정신 및 한글 교육에도 힘썼다.4) 그러나 단절된 역사 속에서= 세대교체와 한국어 교육의 부재로 이민 사회는 현지화되었다. 1964년 한국과 멕시코의 수교가 이루어진 이후에야 멕시코 이민은 비로소 조금씩 다양해졌다.
멕시코 한인 사회는 한인 후손회와 교민, 그리고 주재원으로 구분된다. 한인 후손회는 1905년 메리다를 중심으로 농장에 취업한 한인들의 후손이며 현재 약 3만 명 정도 거주하고 있다. 최근의 교민들은 상업 및 무역에 종사하거나, 주재 상사, 투자 업체 직원과 가족, 유학생들까지 합해 멕시코 전체 약 1만 여 명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5) 내가 사는 곳은 멕시코 북부 누에보레온 주의 몬테레이다. 기아자동차, LG전자 등 대기업들과 협력사들이 들어와 있고 한국 마트는 물론 식당, 게스트하우스, 미용실, 교회, 성당, 학원이나 키즈 카페까지 한국인들이 운영하는 사업체들이 늘고 있어서 한국인들이 살기에 점점 편해지고 있다.
멕시코 한인 사회는 한인회나 교회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편이다. 웹진 《너머》의 ‘디아스포라 현장’을 위해 찾은 ‘한인문인협회’는 부재중이었다. 오래 거주한 지인들에게 연락했으나 아는 사람이 없었다. 멕시코시티에 있는 ‘주멕시코 한국문화원’에 문의했으나 한인만을 위한 모임은 없다 했다. 인터넷에서 자료를 찾아 들어가 보니 《멕시코한인신문》의 보도 일지를 통해 멕시코에 한인문인협회가 존재했고 활발한 활동을 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멕시코한인신문》과 ‘한인회’에 문의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멕시코한인신문》에서 답을 보내왔다. 멕시코 한인문인협회는 창립 후 왕성한 활동을 했으나 약 2년간 활동하다가 여러 가지 문제로 활동이 중단됐으며 지금은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한인문인협회를 주도했던 이는 페루에서 멕시코로 이주했다가 몇 년 전 다시 미국으로 이주했고 이미 세상을 떠난 이도 있다 했다. 문예 잡지 《깍뚜스》가 있었으나 역시 발행되지 않고 있다고도 했다.
2008년 11월 16일 《깍뚜스》 창간호 기념식 사진이 《멕시코한인신문》에 남아 있었다. 강당을 가득 채운 사람들 속에 멕시코인들도 앉아 있다. 축하 화환이 보이고 무대 위에서는 피아노 연주에 맞추어 노래하거나 시를 낭송하는 듯한 사진이 있다. 한인문인협회 회원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한 줄로 서서 인사하는 순서도 보인다. 멕시코 한인문인협회 행사 사진은 몇 장 더 있는데 2008년 12월 1일 문학 강좌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열 명 남짓한 사람들이 긴 탁자에 둘러앉아 안경 너머로 글을 읽기도 하고 받아 적기도 하는 일요일 늦은 밤의 모습은 이국땅에서 놓지 못하는 문학에 대한 열의가 느껴졌다.
한인문인협회의 제3회 문학작품 공모전은 2009년 8월 15일에 마감했다. 수상작은 정의한의 시 「하루」가 대상이었고 안태심의 시 「두더지 게임」이 우수상, 조홍란의 시 「버스 안」과 김경희의 수필 「베사메 무초」가 나란히 장려상을 받았다.6) 발표 후 9월 12일 토요일 밤 7시 30분 명동회관에서 시상식이 있었다. 수상작들은 이방인의 정서가 두드러지는 작품들이었다. 정의한에게 ‘하루’는 ‘눈을 떠보면 결국 이곳은 하얀 벌판’이다. 안태심은 ‘두더지 게임’처럼 ‘불평이/ 불쑥 고개 내밀고/ 절망이/ 따라 머리 내민다’, ‘자꾸만/ 자꾸만 얼굴 내민다’라고 말한다. 조홍란은 ‘버스 안’에서 바라보는 ‘바깥 풍경’이 ‘생경스러워’도 ‘따스한 두근거림’이 있으니 ‘억울하거나/ 지루하지 않았으면’ 했다.
《깍뚜스》는 멕시코 한인문인협회가 남긴 유일한 기록물이 되었다. ‘깍뚜스’는 멕시코 사막에서 자라는 둥근 기둥선인장의 이름이다. 2008년 가을 창간호 표지는 사막에 서 있는 깍뚜스가 장식했다. 몬테레이에서 토레온으로 가는 길 양쪽 사막에는 선인장이 가득하다. 하얀 꽃을 머리에 피운 선인장들이 군집으로 햇빛을 향해 서 있는 모습을 달리는 차 안에서 마주하면 마을 전체가 팔 벌려 하늘에 기도하는 듯한 결핍의 간절함이 보인다. 《깍뚜스》 창간호 기념식 기사는 《재외동포신문》에서 찾을 수 있었다. “멕시코 ‘한인문인협회’는 2008년 11월 16일 멕시코문화센터에서 멕시코에 사는 한인 문인들의 문학작품을 수록한 《깍뚜스》 창간 기념식을 개최했으며 이날 행사에는 대사 및 전 현직 한인회장과 문학 애호가 등 3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문학의 밤’ 행사도 동시에 진행됐다”7)고 보도했다. 김환기는 「멕시코 코리안 이민사회의 형성과정과 문학의식」에서 《깍뚜스》는 ‘문인협회’ 회장의 발간사를 시작으로 축사, 축시, 공모전 당선작, ‘문인협회’ 회원들의 시, 소설, 수필, 평론 등을 차례로 소개했는데, 특히 수록된 시와 소설, 수필과 독후감은 그들 이민 사회의 생활 현장을 깊이 있게 얽어내기도 했지만 넓은 의미에서 가족 공동체, 인류애와 휴머니즘, 실존적인 가치, 시공을 초월한 세계관, 인간과 자연의 공생을 형상화했다는 점에서 유의미하다8)고 분석했다.
한인문인협회의 부재와 함께 멕시코 한인 사회의 유일한 잡지였던 《깍뚜스》는 2010년 제2호 발간을 끝으로 중단되었다. 기록 문화의 부재가 결국 공동체의 구심점 상실과 정체성 약화로 귀결된다9)고 김환기는 결론을 맺는다. 멕시코 한인 사회를 그려 내는 다양한 기록물이 다시 이어지기를 바란다. 유동적인 삶을 살아가는 이민자의 삶이 소재가 된 문학은 이민자들의 거울이 되어 정체성은 물론 앞으로 나아가는 방향키 역할도 해낼 것이다.
한인문인협회의 2009년 12월 6일 사물놀이 정기월례회 사진에는 흰옷에 빨간 띠, 검은 옷에 노란 띠를 어깨에서 내려 반대편 허리에 묶은 청년들이 꽹과리·징·장구·북을 치고 있었다. 정기 월례회에 사물놀이가 있었던 멕시코 한인문인협회의 민족정신과 문학 의식이 이어지지 못해 아쉽다. 다른 나라 이민과는 결이 또 다른 멕시코 이민의 역사 속에서 2024년을 살아 내는 멕시코 이민자들의 삶은 훗날 어떻게 남아 있을까. 가치관이나 정신이 녹아 있는 문학의 기록이 뒷받침되지 않는 사실 전달은 조각일 뿐이다. 한인문인협회의 김원배 회장은 《깍뚜스》 창간사에서 미래가 보이지 않는 캄캄한 땅에서도 꿈을 꾸고 희망을 노래하는 것이 이민자들의 삶이고 문학인들의 정신이라고 썼다. 멕시코 안에서 조금씩 꿈틀대는 문학의 샘이 있다면 넘쳐흐르기를 그리하여 다시 큰 물줄기를 이루기를 바란다. 《깍뚜스》 제3호를 기다리면서.
멕시코에 들어온 지 한 달 정도 되었을까. ‘몬테레이 한글학교’에서 자원봉사 할 교사를 모집한다고 했다. 토요일 수업이 부담됐으나 나라 밖에 있는 우리 아이들이 우리 말과 글을 배운다는데 당연히 해야 할 것 같았다. 몬테레이에서는 차가 없으면 이동 자체가 힘들고, 한글학교는 우리 집에서 강을 건너 한참을 가야 하며, 교통 체증이 심한 길이라는 기본 정보가 전혀 없을 때였다. 토요일마다 남편 차와 동료 교사 차를 번갈아 탔다.
몬테레이 한글학교는 2004년 9월 1일 학생 20여 명과 교사 다섯 명 정도의 규모로 ‘몬테레이 한인교회’에서 출발했으나 기아자동차의 현지 진출로 인한 한인 수 급증으로 지금은 150여 명의 학생과 보조교사 포함 20여 명의 교사들이 있다. 교장 선생님은 매 학기 교사 충원도 문제지만 교육관이 없어 도서관은 물론 교실 수조차 부족한 형편이라고 했다. 내가 근무했을 당시는 멕시코 현지 중고등학교를 빌려 사용 중이었는데 토요일 아침 풍경이 한국의 여느 학교와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만만치 않은 임대 비용은 물론 시설 관리와 안전이 늘 민감한 문제였을 것이다. 지금은 다시 교회 건물을 사용하고 있다. 몬테레이에 사는 한국인들의 구성이 이민으로 정착한 교민과 근무 기간 거주하는 주재원이듯이 한글학교에도 멕시코에서 태어나 이미 이중 언어를 사용하는 아이들과 몇 년 후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아이들이 함께 있다. 같은 나이, 같은 학년이라도 한데 묶기 어려운 경우가 자주 있지만 크게는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성인 외국인을 위한 한국어반으로 구분하고 있다.
기억나는 일이 있는데, 초등학교 2학년 수업이었다. 한 아이가 ‘메히꼬’를 한글로 어떻게 쓰는지 묻길래 칠판에 ‘멕시코’라고 써주었다. 질문을 듣고 있던 옆자리의 아이가 제 공책에 또박또박 ‘멕시코’를 쓰면서 어떻게 우리나라 이름도 한글로 못 쓸까 답답해하는데 내 가슴은 먹먹했다. 멕시코에서 태어나 멕시코 학교에서 멕시코 역사를 배운 아이가 생각하는 ‘우리나라’는 멕시코일 수 있다는 생각을 처음 했다.
멕시코 유카탄에는 핑크빛 호수를 볼 수 있는 곳이 있다. 호수 입구로 들어가려면 누구든지 주민의 안내를 받아야 한다. 사진을 찍어 주고 에스파냐어로 설명을 시작하던 작은 여자는 우리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반색하며 뜨겁게 안아 주었다. 엄마의 할머니가 한국인이고 이모 딸은 누가 봐도 한국인의 얼굴이라면서 핸드폰까지 열어 사진을 보여 주었다. 헤어질 때는 손으로 하트를 만들고는 ‘안녕히 가세요’ 했다.
유카탄에 온 이민자의 후손들은 나라와 단절된 삶을 살아내느라 한국어를 배울 필요도 기회도 없었다. 모습은 한국인이나 한국어로는 몇 마디 대화조차 이어갈 수 없는 현지화된 이들이 대부분이다. 비단 유카탄뿐만이 아니다.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접할 기회 없이 어른이 된 멕시코의 한국인은 한국인에게도 멕시코인에게도 혹 이방인으로 살고 있지 않은지 조심스럽기만 하다. 한국어와 한국 문화 그리고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교육하는 한글학교가 우리 아이들에게 중요한 학습의 장이 되어야 하는 이유이다.
세계는 지금 한국어 열풍이다. 몬테레이도 예외가 아니다. 누에보레온 주립대학에서는 제2외국어를 어느 수준 이상으로 이수해야 졸업할 수 있다. 에스파냐어와 영어를 기본으로 하는 학생들은 한국어를 배우기 위해 누에보레온 주립대학 아시아연구센터(CEA)를 찾는다. CEA의 한국어 수업은 세종학당에서 시작했지만 내가 들어간 2016년 12월에는 자체적으로 운영하고 있었다. 당시 초급반 위주 수업이었는데 한류 열풍과 한국 기업의 진출이 맞물려 한국어를 배우려는 학생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면서 네 개의 강의실이 부족해 교사 회의실까지 수업 장소로 사용해야 했다. 수업은 중급, 고급까지 이어져서 매년 12레벨 졸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짧게는 4년 길게는 6년 이상 공부한 학생들이다. CEA는 한국어 수준을 평가하는 한국어능력시험 ‘토픽’의 시험 장소로 지정되기도 했다.
토픽 시험 당일 아침, 새가 전선을 쪼아 짙은 암흑이 되어 버린 수험장은 두고두고 잊을 수 없는 일이 되었다. 임기응변으로 네 개의 강의실에 있던 책상들을 태양 빛이 들어오는 강당 크기의 복도에 재배치했다. 144명의 수험번호 순서대로 자리 잡은 책상이었고 수험생 입실 30분 전의 일이었다. 2020년 토픽은 3월 코로나19가 전파되기 시작하며 접수가 끝나자마자 취소되었다. 몬테레이의 모든 학교는 정해지지 않은 기간 동안 문을 닫았다. 계획대로라면 월요일 아침 교실에 있는 학생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할 중간고사 시험지는 교무실 책상 위에서 무용지물이 되었고, 나는 주말 내내 각 반의 말하기, 듣기, 읽기, 쓰기 출제 문항들을 급하게 온라인 시험 환경으로 옮겨 놓는 작업을 해야 했다. 생각지 못했던 온라인 강의는 거리나 이동 시간 또는 차편이 문제였던 학생들에게는 오히려 기회가 되었다.
한국어를 배우는 이유와 동기들은 다르지만 역시 한류 열풍이 강했다. 좋아하는 가수 노래를 부르기 위해서, 한국 드라마를 이해하고 싶어서가 가장 많은 편이었다. 한국 식당에서 한국어로 주문하고 싶어서 배운다는 친구도 있었다. 졸업한 학생들은 한국 회사에 취직하거나 한국어 교사가 되었다. 한국어학원도 많이 생겼다. 한국어를 배우는 학생들은 한국 문화를 비롯해 많은 것을 궁금해한다. 책 수업 호응이 좋아서 전래동화, 그림책, 시 텍스트를 수준에 맞게 교재로 만들어 함께 읽었다.
마침 학생들이 한국 그림책을 만나는 좋은 기회가 있었다. 2020년 ‘주멕시코 한국문화원’과 ‘KBBY 국제아동청소년도서협의회’가 공동 주최하는 제1회 ‘한국-멕시코 그림책 번역대회’이다. 한국 아동·청소년 문학의 세계화, 한국과 멕시코 양국 그림책의 상호 이해와 교류, 행사의 지속적인 발전을10)위해 첫해는 멕시코에서 한국어를 배우는 학생을 대상으로 한국 그림책 번역대회가 열렸다. KBBY에서 책을 선정해 주멕시코 한국문화원에 보냈고 문화원에서는 한국어를 공부하는 학생 중 희망자들에게 수준별로 그림책을 나누어 주었다. 누에보레온 주립대학 CEA 학생들도 신청서를 제출한 후 수준에 맞는 책을 받아 참가했다. 『동구관찰』을 번역한 카렌이 장려상을 받았다.
제2회 한국-멕시코 그림책 번역대회는 한국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멕시코 거주 한국 교민들도 참여할 수 있었다. 15종의 한국 그림책과 5종의 멕시코 그림책이 번역되었고 심사는 양국에서 진행했다. 당선된 멕시코 그림책 번역 3종 중에 내가 번역한 『비밀』이 있었다. 함께 나간 스테파니는 한국 그림책 『어느 늙은 산양 이야기』의 스페인어 번역으로 장려상을 받았다. 시상식은 멕시코시티에서 마스크를 쓴 채 진행되었다. 코로나 기간에도 한국과 멕시코에서 동분서주한 관계자들의 땀이 이루어낸 대회였다. 스테파니는 이후에도 연이어 참가했고 제4회 대회에서는 송선옥 작가의 그림책 『딱 맞아』를 번역해 대상을 받았다. 번역대회에 참가한 학생들은 한국 그림책은 물론 한국 소설에도 관심을 보인다. 몬테레이에도 세계 책 도서전이 열리는데 올해는 한국 책이 많이 들어와 소개되면 좋겠다.
멕시코 날씨는 지역마다 다르지만 내가 사는 몬테레이는 한 해의 4분의 3이 덥다. 겨울이 있는데 하루에 사계절을 느끼는 날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밖은 냉장실 집안은 냉동실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춥다. 매서운 한기를 히터만으로 견디고 있으면 온돌이 그립다. 밖에서 오들오들 떨다가 현관문만 열어도 포근하게 감싸 주는 집 안의 온기는 행복이었다. 온돌 없이 지내는 겨울에는 허기진 추위가 있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없을 때 오는 허기다. 온돌이 그랬고 책이 그랬다. 책은 가격보다 무게가 부담스러워서 한두 권이 아니라면 캐리어에 넣어 오기 쉽지 않다. 가득 채워 와도 갑자기 읽고 싶어지는 책은 또 다르다. 요즘은 인터넷 서점의 해외 배송이 잘되어 있지만 운송료가 비싸서 꼭 필요한 책이 아니라면 대부분 전자책을 읽다가 만다. 종이책의 향수가 있어 현지 서점을 가기도 하지만 바다에서 놀던 인어가 육지에 올라와 허우적거리는 꼴이다.
직장인이 아니라면 몬테레이의 삶은 의외로 단순하다. 특히 엄마들은 도시락을 싸서 아이를 학교에 데리고 갔다가 데리고 오면 하루가 간다. 식료품을 사기 위한 마트나 지인을 만나러 가는 익숙한 곳이 아니라면 스포츠나 종교 활동 정도가 전부이다. 그마저 긴 이동 시간과 교통 혼잡이 주는 피곤함을 견뎌내야 한다. 한국 도서 구하기가 쉽지 않은 몬테레이에 살면서 책과 문학에 갈급한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몬테레이는 지금 책 읽기 모임이 활발하다. 그중 책 모임 ‘몬테레이’는 어학당에서 만난 여덟 명이 처음 시작했는데 2기, 3기 새로운 모임들로 퍼져나가고 있다. 리더를 계속 세우는 이유는 회원들이 주로 주재원 가족이라 리더가 갑자기 떠나더라도 흔들리지 않기 위함이다.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 몬테레이에 머무는 동안 ‘나를 찾는 시간’으로 만들어 가고 있다.
나는 책 모임 ‘별숲’의 ‘숲지기’이다. 여덟 명의 ‘별숲’ 회원들은 둘째, 넷째 주 화요일에 책을 들고 모인다. 아침 일찍 누군가 올려 주는 시 한 편 감상하거나 일 년에 한 번 책 여행 계획도 나눈다. 발제문과 후기는 ‘별숲’ 카페에 기록 중이다. 다양한 시선으로 함께 읽은 책이 쌓여 갈수록 갈증이 해갈되는 듯하다. 몬테레이 어느 작은 카페에 가면 한국 작가의 소설책을 펴놓고 모여 있는 한인들을 만나게 될지 모른다. 이국 생활에서도 책을 통해 소통하고 성장하려는 몸부림의 현장이다. 꿈틀거리다 보면 어느 샘과 만나 물줄기가 될 것이다. 《깍뚜스》에 꽃이 필지 모른다.
1) 김영하, 『검은 꽃』, 복복서가, 2020, 14쪽.
2) 《황성신문》, 1904년 12월 17일자.
3) 김영하, 앞의 책, 275쪽.
4) 김환기, 「멕시코 코리안 이민사회의 형성과정과 문학의식」, 『한민족문화연구』 59(59), 75쪽.
5) 주멕시코 대한민국대사관 이민 정보(2021 외교부 자료 기준).
6) 제3회 문학작품 공모전 수상작 문학작품, 2009년 8월, https://www.haninsinmun.com/lma.
7) 이석호 기자, 「멕시코한인문인협회 『깍뚜스』 창간식」, 《재외동포신문》, 2008년 12월 4일자.
8) 김환기, 앞의 글, 96쪽.
9) 같은 글, 99쪽.
10) KBBY 국제아동청소년도서협의회, 「한국-멕시코 그림책 번역대회」, https://kbby.org/한국멕시코-그림책-번역대회/.
1972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현재 멕시코 몬테레이에 살고 있으며 2016년부터 누에보레온 주립대학 아시아학연구센터(CEA)에서 한국어를 가르쳐 왔다. 1994년 《문예연구》에서 시로 당선했고, 2015년 근로자문학제 시 부문에서 수상, 2022년 그림책번역대회에서 수상했다. 『비밀이 들려요』 그림책 번역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