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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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호

영어완전전복 오디세이

정동순

영어완전전복 오디세이1)

어느 날, 교장으로부터 이메일을 받았다. 전날 학교 비전 미팅에서 있었던 발언에 대해 해명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정신을 가다듬고 교장이 지적한 단어를 검색해 보았다. 한숨이 터져 나왔다. 미팅에서 소그룹으로 나누어 각종 데이터를 보고 각자의 생각을 말하는 순서였다. 막대그래프가 있었다. 화이트, 블랙, 히스패닉, 아시안, 기타. 학생의 인종 구성비가 눈에 띄게 달랐다. “우리 학교는 워싱턴 주나 우리 교육구보다 화이트의 비율이 높고, 유색 인종 비율이 좀 더 낮습니다.” 유색 인종이란 뜻으로 나는 무심코 ‘컬러드 피플(colored people)’이라 말했다. 인터넷 검색 후, 주변 사람들에게도 물어봤다. ‘colored people’이란 표현은 인종차별을 담고 있단다. 인종차별은 중대한 해고 사유가 될 수 있다. 입안이 바짝 말랐다. 미팅에는 교육청 관계자도 있었고 나와 친한 몇몇 선생님도 있었다. 누군가 “선생님이 말하려는 건 ‘people of color’죠?”라고 말해 주었더라면……. 내가 인종차별을 하려는 의도로 그 말을 쓰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을 텐데 모두 조용했다. 교사 아무개가 그런 단어를 썼으니 주의시키세요. 미팅에 있었던 사람 중 한 명이 교장에게 전달한 것이리라.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바닷가처럼 마음이 뒤죽박죽되었다. 「영어완전정복」이란 영화가 있다. 영어를 수단으로 멋진 남자를 사로잡는 꿈을 가진 여자와 영어를 이용해 여자를 꼬시는 남자가 등장한다. 영어를 배우는 과정에서 영어는 사건을 일으키는 도구로 사용되었을 뿐, 영어 완전 정복은 없는 유쾌한 코미디다. 이 영화 제목은 나의 영어 학습기를 돌아보게 한다. 영어의 바다에서 살아남으려면 헤엄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항해에 필요한 영어 실력이란 보트가 필요하다. 그런데 아직도 튼튼한 동력 보트를 갖추지 못해, 먼바다에는 나가지 못하고 해안선 근처에서 매일 열심히 노를 젓다 집에 돌아오는 형국이다. 내 영어는 노를 젓는 힘으로만 나아가야 하는 카누 같다. 조그만 풍랑이 일어도 뒤집혀 나를 물에 풍덩 빠뜨려 놓곤 한다. 그때마다 살아남으려면 뒤집힌 카누를 수습하여 다시 배 위에 올라타야 한다. 가끔은 요트를 시도해 보기도 한다. 그때마다 영어는 나를 자유롭게 항해하게 해주는 돛이 되기도 하지만, 한 번도 가보지 않는 어느 좌표에서 돛을 조정하는 줄 하나가 끊어져 얼굴을 때릴까 조마조마하다. 줄 하나가 끊어지고, 바람도 역풍을 받아 기우뚱기우뚱 배까지 물에 빠지기 직전인 날이 있다. 이름하여 ‘나의 영어 완전 전복기(정복기가 아니다)’, 이제부터 아직도 도전 중인 내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한다. 영어 실력을 늘리기 위한 몸부림(현재 진행형이다)은 나의 직장을 향한 항해일지이기도 하다. “와, 어쩜 손이 이렇게 작고 귀여워요.” 탁자 건너편에 앉은 남자가 말했다. 내게는 천동설이 지동설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손이 예쁘다는 소리를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손가락이 길어서 게으르다는 엄마의 지청구를 떠올리며 남 앞에서 탁자 아래로 손을 감추고는 했다. 남자는 이렇게 나의 약점을 장점으로 바꿔 주며 다가왔다. 매일매일 새로운 나를 만나는 느낌이었다. 한국어를 배운다고 깨알같이 해석을 단 단어장을 가지고 다니며 질문해 대던 남자에게 내가 가난한 시골 출신인 것도, 상급 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장사를 하는 형제들 도움으로 연탄을 때는 단칸방에서 대학에 다니고 있는 것도, 아무것도 감출 것이 없었다. 영어 회화를 배우는 재미가 있었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긍정해 주는 사람과의 만남을 기다리게 되었다. 그러니 7년 후, 내가 소위 말하는 국제결혼에 이른 것은 순전히 내 손 때문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88 꿈나무 학번이다. 올림픽 무렵, 해외여행이 자유화되었다. 대학 졸업 전에 유럽 배낭여행, 이것이 나의 대학 시절 목표였다. 방과 후에는 과외로 돈을 모으고, 아침에는 학교 수업이 시작되기 전에 영어 학원에 가서 두 시간 동안 영어 회화 수업을 들었다. 남편은 대학을 갓 졸업하고 한국어도 배울 겸 돈도 벌 겸 한국에 온 영어 강사였다. 나는 남편의 첫날 첫 수업 학생이었다. 초등학교 교사였던 내가 무거운 이민 가방 두 개를 들고 시애틀에 내린 것은 2000년 9월이다. 생존 영어를 향해 출격한 날이기도 하다. 남편은 미국에서 살 준비를 위해 나보다 먼저 입국했고, 나는 서울에서 직장과 집 문제 등을 정리하고 나중에 뒤따라오게 되었다. 긴장되는 입국 심사를 무사히 통과하고 짐을 찾았다. 입국장 밖에서 남편이 기다리다 손을 흔들었다. 선선한 날씨에 임산부용 긴 통 원피스가 나풀거렸다. 이민 날짜는 나에게 중요한 기념일이 되었다. 이후, 한국의 지인들 사이에 ‘미국으로 시집간’은 내 이름 앞에 붙는 수식어가 되었다. 학창 시절에 영어를 잘했던 경험은 딱 한 번 있다. 중학교 1학년 때, 학교까지 5킬로미터쯤 되는 길을 걸어 다녔다. 심심하니까 작은 영어 단어장을 쥐고 다니며 단어와 문장을 암기했다. 그해 도내 영어 듣기 평가가 있었는데, 내가 만점을 받았다고 했다. 아마도 등하굣길에 무료함을 달래려고 교과서를 거의 외우다시피 한 덕분이었으리라. 중2 때, 도시로 전학한 후에는 문법과 독해 위주의 수업을 따라갈 수 없었다. 내신에서 제일 좋지 않은 성적은 수학과 영어였다. (지금은 수학 선생으로 영어로 밥을 먹고 사니 이런 아이러니가 없다.) 영어 단어를 억지로 욱여넣고 다시 꺼내 사용할 일이 없으니 깨진 독에 물 붓기처럼 곧 독 밑으로 주르륵 새버렸다. 영어 문법은 집단으로 나를 왕따시켰다. 관사 녀석은 끈질기게 나를 괴롭혔다. to 부정사와 동명사는 번갈아 가며 나에게 네가 감히 우리와 놀겠다고 하느냐며 앞을 막았다. 완료형은 너는 집안이 형편없다고 놀렸다. 해서 나는 이들을 피해 샛길로 다녔다. 수포자, 영포자로 다른 모든 과목에서 거의 만점을 맞으며 대학에 입학했다. 기초 실력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유럽 배낭여행 때문에 다시 영어 공부를 시작했다. 기초 회화라도 몇 마디 할 줄 알아야 여행에서 만난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지 않겠는가. 원어민 강사만 있던 학원에서는 영어 이름을 지으라고 했다. 그때 지은 이름이 에이프릴(April)이다. 에이프릴은 화사하고 귀엽고 사랑스러운 이름이라 생각되었다. 내가 태어난 달과는 상관이 없다. 이렇게 무지했다. 영어 학습기를 항해기에 빗대고 보니 이민 초기는 뗏목을 엮던 시기다. 새로움에 대한 기대로 잔뜩 부풀어 있지만 언어와 문화적 충격이란 강풍에 뒤통수를 가격당하는 시기다. 강풍에 부러진 가지들을 모아 뗏목이라도 엮어 올라타야 허우적거림을 면할 수 있다. 모든 것을 바닥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을 받아들이기가 만만치 않았다. 언어와 문화가 다르고 수많은 인종이 어우러진 타국에서 사는 일은 잠시 여행하면서 느끼는 경험과는 천양지차다. 이민자로서 생활은 내 안에 있는 나 자신과 현실의 나 사이의 치열한 모순을 극복하는 과정이다. 의사소통을 제대로 못 하니, 사람들은 나를 생각하는 것도 모자라는 사람으로 취급하는 것 같았다. 내가 힘들어하니, 남편도 부담스러워하는 눈치였다. 매사에 어린아이처럼 자기에게 의존하는 상태에서 어서 빨리 벗어났으면 했을 것이다. 남편도 다시 미국 사회에 적응하고 직장을 잡는 일이 수월치 않았다. 우리 가족의 결혼 허락 조건은 남편의 한국 생활 10년이었다. 한국에서 오래 살아야 한국의 관습을 잊지 않고 나를 버리지 않을 거라고 큰오빠가 단언했기 때문이다. 그 사이 한국은 IMF 구제금융 위기를 겪었다. IT 붐이 일던 시기라 남편이 관련 자격증을 따서 직장을 찾고 있을 때, 9·11 사태가 났다. 그 충격으로 경제가 얼어붙고 좋은 일자리 찾기가 쉽지 않았다. 직장이 안정이 안 되니 한국에서 가지고 왔던 얼마간의 돈으로 집을 사지도 못했다. 우리는 물살의 흐름을 한 박자씩 놓치고 늘 힘겹게 노를 저어야 했다. 영어를 잘하려면 ‘영어의 바다에 빠져라’는 말이 있다. 언어가 쓰이는 상황에 직접 부딪치며 배워야 내가 쓸 수 있게 된다. 미국에 산다 해도 사회 활동을 하지 않으면 영어가 늘기 어렵다. 입국 당시 임신 중이었던 아이가 태어났다. 공부를 다시 하고 싶었지만, 학비 융자금만 빚으로 남으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이 앞섰고, 아이를 맡기는 비용은 내가 시간당 벌 수 있는 돈과 맞먹었다. 아이를 돌보며, 엄마로서 누리는 이 시간을 고맙게 생각하자고 다짐했다. 그래도 미래에 대한 불안과 공부에 대한 갈증은 컸다. 내 이름 석 자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친구 딸에게 선생님이란 말 대신에 ‘아줌마’란 말을 처음 듣던 날은 충격이었다. 매월 17일이 되면 월급날인데 하는 생각이 절로 떠올랐다. 아이를 데리고 다니면서도 나는 고독했다. 신은 나에게 어떤 소명을 주려고 나를 이 낯선 땅에 오게 했을까? 한번은 소아과에 갔다. 환자 이름을 말하라고 했다. “윌리엄.” “Can you say that again?” 내 아들 이름인 윌리엄을 발음하니 상대편이 못 알아들었다. 두어 번 반복해도 못 알아들으니 환장할 노릇이었다. “W-i-l-l-i-a-m” 내가 스펠링을 불러주자 직원이 말했다. “오우, 윌이엄!” 내 이름 Dongsun을 말할 때 얼마나 조심해서 D를 발음해야 하는지도 알게 되었다. 내 이름을 들으면 거의 Tongsoon으로 적었다. 상대방이 못 알아들으면 스펠링을 불러 주는 것이 일상화된 사회에서 이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의사소통의 한 방편이란 걸 나중에 알게 되었다. 《월스트리트 저널》, 맥도날드 등 한국에서 영어라고 알고 안심하고 썼던 단어들을 죄다 쏟아 버려야 했다. 영어는 강세가 중요한데 한국식으로 발음하니 통할 리가 없었다. 기본적인 대화도 원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지 않을 때, 멘탈이 탈탈 털렸다. 어느 날은 버스를 타고 가는데, 앞자리에 탔던 어떤 여자가 운전기사에게 쉴 새 없이 떠들었다. 운전기사는 아무런 대꾸도 없고, 자세히 들어보니 횡설수설하는 것이 약간 정신이 없는 여자 같았다. 그런데 문득, 나도 저 여자처럼 영어를 잘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부러운 생각이 들어 깜짝 놀랐다. 영어라는 장애물 때문에 붙잡을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다. 언어 장벽으로 인해 학력에 맞는 직장을 구할 수 없고, 언어가 덜 필요한 곳에서는 ‘오버퀄러파이드(Overqualified)’라고 퇴짜를 맞곤 했다. 영어만 잘하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커뮤니티 칼리지에서 이민자를 대상으로 하는 무료 직업 준비 클래스에 등록했다. 남편이 아이를 봐줄 수 있는 토요일 수업이었다. 거기서 직장에서 필요한 기본 회화와 이력서 쓰는 법, 인터뷰하는 법을 배웠다. 이민자들에게 성경 공부와 함께 영어를 가르쳐 주는 교회 프로그램에도 다녔다. 엄마들이 공부하는 동안 교회 놀이방에서 아이를 맡아 주었다. 교회의 자원봉사자들은 정말 천사 같았다. 직접 쿠키를 구워 오고, 어려움을 말하면 기꺼이 필요한 정보를 주려고 노력했다. 수업 외에도 가끔 공원에서 플레이 데이트를 주선해 주기도 했다. 이즈음은 꿈을 영어로 꾸고는 했다. 그러나 여전히 말하려면 한국어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를 생각해 내려고 끙끙대는 때가 많았다. 아이가 한해 한해 자라며 말이 느는 속도만큼 나의 영어도 함께 늘었으면 하고 생각했다. 좀 더 열심히 영어 공부를 하기로 결심했다. 《타임스》나 《월스트리트 저널》 같은 텍스트는 내용도 어려울뿐더러 토론이나 학교 수업 등에서 배우는 단어로 일상어에서는 쓰임이 많지 않았다. 『매직 트리 하우스(Magic Tree House)』 같은 초등학교 2, 3학년 학생들이 읽는 시리즈물을 빌려다 읽었다. 문장이나 어휘가 구어체에 가깝고 문맥 안에서 단어의 쓰임이 쏙쏙 들어왔다. 내가 받고 싶은 연봉을 적어 보았다. 그리고 연간 근무 일수로 나누고 근무 시간을 나누었다. 한 시간에 20불을 받는 것이 목표였다. 영어 한 시간을 공부하면 20불을 적립했다. 이렇게 해서 3만 불이 적립될 무렵에는 영어 실력이 어느 정도 올라 있을 거라 확신했다. 나에게 이 방법은 효과적이었다. 지금 공부하는 한 시간에 실제로 20불의 돈이 적립된다고 생각하니 더 열심이었다. 나의 생계에 필요한 항해를 위해서 카누든 요트든 좀 더 나은 배가 꼭 필요했다. 둘째의 임신을 안 것은 시애틀의 우기인 겨울 무렵이었다. 첫째가 좀 커서 얼마 있으면 유치원에 가니 뭔가 일을 해볼까 준비하고 있던 차였다. 앞으로 다시 몇 년 더 아이를 돌봐야 한다고 생각하니 우울했다. 아이를 가진 엄마가 우울하면 안 되는 거였다. 첫째가 어린이집에 가 있는 두 시간 반 동안은 내가 뭔가를 할 수 있는 최적의 시간이었다. 도서관 자원봉사를 신청했다. 아이를 어린이집에 내려놓고 도서관에서 두 시간 봉사하고 아이를 데리러 갔다. 내 일은 필요한 책을 찾아주거나 사서들이 필요한 복사지를 순서대로 묶는 일이거나, 종이를 자르는 일 등 영어가 별로 필요 없는 일이었다. 집에서 남편과 사용하는 영어는 한정되어 있었다. 밖에서 사람을 만나 영어를 사용하니 많이는 아니어도 그들의 호의로 영어가 조금씩 늘었다. 첫째가 다니던 어린이집 방학도 다가오고 둘째 출산이 임박해, 6개월 정도 다녔던 도서관 자원봉사를 그만두었다. 1년 후, 도서관 사이트에 들어가 보니 페이지(Page)를 구하는 공지가 있었다. 한 번에 4시간씩 일주일에 16시간씩 일하는 자리였다. 남편이 집에 있는 저녁 시간이나 주말에 일할 수 있겠다 싶었다. 20년 된 고물차를 운전하는 생활에서 벗어나려면 내가 돈을 버는 수밖에 없다는 절실함도 있었다. 자원봉사자와 페이지를 담당하던 다이앤이 나를 알아봤다. 처음에 멋모르고 시작했는데, 자원봉사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느꼈다. 내가 첫 직장의 발판이 되었다. 직장을 구할 때 대개 2-3개의 추천서를 요구한다. 친구나 가족이 아닌 관계자에게 추천서를 받아야 한다. 나 같은 주부가 어디서 추천서를 받겠는가? 자원봉사 담당자나 동료가 추천서를 써주기도 하고 나중에 관련 직종에 자리가 나면 직원으로 뽑아 주기도 한다. 미국에서 직장을 구할 때, 추천서는 그 사람의 경력이나 이력 못지않게 막강한 역할을 한다는 것도 차츰 알게 되었다. 이제 나는 여럿이 노를 젓는 카약에 올라탄 기분이었다. 페이지란 직종은 쉽게 말하면 대출되었다 반납된 책을 정리하여 서가에 다시 꽂는 일이다. 듀이 데시멀 시스템(Dewey Decimal System)에 맞춰 서가에 책이 있어야 할 곳에 정확하게 꽂아 넣고, 도서관 이용자가 찾는 책을 찾아 놓기도 하고, 여기저기 어질러진 책을 정리한다. 근무 시간이 16시간으로 제한된 것은 20시간 이상 일하면 의무적으로 의료보험 등 복지 혜택을 줘야 하는 법 때문이다. 주 정부가 정한 기본급보다 살짝 더 받는 보수였지만 도서관 근무는 유급 교육 기회가 많았다. 내가 들을 수 있는 직무 관련 연수는 적극적으로 찾아다녔다. 이메일을 읽는 시간도 15분씩 주었는데 돈을 받으며 영어연수를 한다고 여겼다. 파트타임 근무지만 자격증을 따거나 학위를 받을 경우, 직원들에게 주는 장학금 혜택도 받을 수 있었다. 그 장학금으로 수학 교사 자격증을 따는 과정을 공부했다. 혹시 미국에서 다시 교사를 한다면 교수 용어가 비교적 한정되고 국제 공통적인 내용인 수학이 제일 가능성이 높아 보였기 때문이다. 마흔이 넘어 다시 수학 공부를 시작해 보니, 그땐 왜 이런 원리를 몰랐을까 깨닫게 되는 것이 많아 참 재미있었다. 1년 반 동안 받은 장학금이 내 월급보다 훨씬 많았다. 물론 장학금 수혜 후에 2년간 의무적으로 근무해야 하는 조건이 있었다. 도서관은 직원을 실무에 투입하기 전에 직무 훈련을 아주 잘 시켜 주었다. 도서관에서 근무하는 동안 읽은 많은 매뉴얼과 이메일은 영어 실력 향상에 큰 도움이 되었다. 누군가 직장을 떠나며 쓴 작별 인사나 새로 온 직원이 쓴 소개 인사, 사람들의 댓글 등에서 좋은 문구가 있으면 베껴 써보고는 했다. 몇 년간 근무했을 때 도서관 시스템에 익숙해졌다. 도서관 이용자들을 돕는 데스크에는 중국말을 하는 직원, 일본어를 하는 직원도 여럿 있는데, 한국말을 하는 직원이 없었다. 그 역할을 내가 해내고 싶었다. 나의 항해에서 혼자서 카누를 움직이며 조금씩 나가 보고 싶었다. 킹카운티 도서관 시스템은 데스크 직원을 채용할 때, 인력 은행제를 시행하고 있었다. 먼저 이력서와 지원서를 심사한 후에, 2단계로 전화 인터뷰를 통과하면, 3단계에서는 두 시간에 걸쳐 면접관 인터뷰, 그리고 마지막 4단계로 현장 실무 능력 평가가 있다. 이들 점수를 합산해서 인력 은행에 들어간다. 개별 도서관에서 직원 채용을 공지하면, 인력 은행에 있는 사람들이 지원하고, 지원자 중에서 점수가 높은 다섯 명에게 인터뷰 기회를 주었다. 다행히 나는 인력 은행 점수가 높은지, 원하는 지역 도서관에 자리가 날 때마다 인터뷰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인력 은행에 들어갈 때와는 달리, 직접 채용하는 지역 도서관의 인터뷰 결과는 늘 신통치 않았다. 영어가 문제였다. 어느 날은 인터뷰 직전에 한국 가게에 갔는데 우황청심환이 번쩍 눈에 띄었다. 청심환을 먹으면 긴장이 덜해 편안하게 말할 수 있으려나? 청심환을 집어 들었다. 잘 아는 가게 아저씨가 왜 청심환을 사느냐고 물었다. 사연을 듣더니, 아저씨는 남의 속도 모르고 껄껄 웃었다. “아니, 그 나이에 뭘 떨고 그래요? 편안하게 해서 되면 되고, 안 되면 안 되는 거지. 속 편하게 생각하세요.” 그러나 우황청심환을 먹고 차분하게 인터뷰를 했는데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내 영어 때문인가? 삼십 대에 이민 온 내가 어떻게 이곳에서 대학을 졸업한 사람처럼 영어를 완벽하게 한단 말인가? 의사소통에 문제가 없을 정도면 다른 장점을 보아서라도 좀 뽑아 주지. 그 면접관은 아시안을 안 좋아한다는 소문이 있던데, 정말인가? 아니다. 그 사람도 자기가 생각하는 최고 적임자를 뽑으려고 했을 뿐, 나를 싫어할 리가 없어. 기도를 열심히 하지 않아서일까? 인터뷰 후에 받은 거절 편지가 쌓여갈 때마다 이렇게 잡다한 생각으로 얼굴이 화끈거리고 마음이 일그러졌다. 정말 성실하게 잘할 수 있는데, 왜 나를 몰라주나? 대답 몇 번 잘하는 걸로 어떻게 사람을 다 알아본다는 것일까? 이제는 영어를 하며 밥을 먹고 사는 일은 포기해야 하는 것일까? 뭐 거대한 일에 도전하는 것도 아니고, 가족에 도움이 되도록 일정한 수입을 가져오고, 여가 시간에는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내 작은 목표인데 좌절의 연속이었다. 어느 날은 출퇴근하기에 다소 먼 거리까지 인터뷰하러 갔다. 인터뷰를 잘하고 나서는 이번에 되면 어쩌나 하는 걱정까지 하면서 나왔다. 결과는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다. 오기가 생겼다. 나의 가치를 알아줄 사람이 있을 거란 믿음을 버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내게 가장 알맞은 직장을 아직 못 만났을 뿐이라고 믿었다. 채용이 안 되었다는 편지들도 버리지 않고 차곡차곡 모아 두었다. 이 일은 이제 내가 꼭 이겨야 하는 게임이 되었다. 지금 고비를 넘기지 못하면 이 좌절감을 가지고 평생 이민 생활을 할 것이란 생각에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이력서를 새로운 스타일로 작성하고, 내가 일할 수 있는 거리의 도서관에 부지런히 대체 근무를 다녔다. 누가 결근을 했을 때, 대신 근무하는 일이었지만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잠재적으로 나를 고용할 사람들이었다. 부지런히 일하고, 모르는 것은 열심히 배웠다. 다양한 사람들에게서 일을 배우니 좋은 점도 많았다. 특히, 사람들과 어색하지 않게 대화를 이끌어 가는 법을 알게 되었다. 식물 가꾸기가 취미인 사람들과는 올해 화단에 무엇을 심었는지, 개를 키우는 사람들에게는 개에 대해 궁금한 것을 물어보고 개 키우는 이야기도 들어주고, 자녀가 있는 사람들과는 아이들 교육 이야기, 미혼인 사람에게는 요리 이야기나 맛집 등에 관해 이야기하다 보면 금방 친해지고 같이 일하는 것이 즐거웠다. 누군가가 나에게 말을 걸어 주길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다가가니 사람들도 나를 기억해 주었다. 한국에서 온 사람들이 생각할 때 저 사람은 맨날 잡담만 하고 다니는데, 승진은 제일 빨리한다는 불만이 있을 법하다. 미국 직장에서 이러한 대화는 잡담이 아니라 서로의 긴장감을 풀어주고 서로 신뢰하는 분위기를 만들어 준다. 유머가 있는 사람은 더 좋은 평가를 받는다. 우리 집의 닭도 직원들 사이에 유명해졌다. 닭을 키우는 이야기 말문을 여는 좋은 소재였기 때문에 늘 단골 메뉴로 써먹었다. 드디어 사람들이 싫어하는 숫자 열세 번째 도전을 하는 날이 왔다. 하필 그날은 금요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어느 날 고속도로에서 본 택시 뒷면에 적힌 전화번호를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한국 사람들이 보면 기절할 444-4444가 택시 회사 전화번호였다. 불행한 ‘13일의 금요일’이 될 것인가, 통념을 뒤엎게 될 것인가? 다른 때보다 더 열심히 준비하고, 면접관들이 권하는 의자에 앉았다. 살아오면서 가장 큰 실수는 무엇이었나요? 당신이 이룬 가장 큰 성취는 무엇인가요? 팀원이 일에 대해 불평할 때는 어떻게 할 건가요? 당신은 우리 기관의 다양성에 어떻게 이바지할 수 있나요? 스트레스는 어떻게 해소하세요? 왜 이 직장을 원하시나요? 이 인터뷰는 어떻게 준비했나요? 마지막으로 질문 있나요? 침착하게, 가끔은 미소를 지으며 또박또박 대답했다. 마지막 질문에는 면접관들에게 물었다. 여러분은 무엇이 좋아 이 직장에 몸담게 되었나요? 제가 앞으로 일하게 된다면 무슨 조언을 해주고 싶으세요? 인터뷰가 끝났을 때, 앉아 있던 면접관이 일어나 눈을 마주치며 악수를 청했다. 나도 손에 힘 을 주어 악수를 했다. 며칠 후에 마침내 채용됐다는 전화를 받았다. 아, 이제는 인터뷰를 하지 않아도 되는구나! 무엇보다도 나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은 것이 제일 좋았다. 몇 번 실패하다 보면 그 일을 포기하기 쉽다. 상처받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열두 번이나 불합격 통지를 받았다. 그때마다 몰려드는 열패감과 싸우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 그러나 잘 이겨내었다. 포기하지 않고 열세 번이나 도전한 것은 나에게 부끄러운 이야기가 아니다. 도서관 안내 데스크에서 전화를 받는 일은 초기에는 매번 가슴 두근거리는 일이었다. 근무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였다. 어떤 할머니가 blue 어쩌고 하면서 뭔가를 찾았는데, 도대체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데스크에 근무하면서 그 말을 못 알아듣는 것도 당황스러운 일인데, 못 알아들었다고 하면 할머니가 항의할 것 같았다. 잠깐만요, 하고 다른 직원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나중에 복기해 보니, 그 잡지 이름이 내게 너무나 생소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 후에 도서관 잡지 코너에 가서 잡지나 신문 이름을 죄다 머릿속에 스냅 사진처럼 저장했다. 직장 일에 익숙해지고 영어를 조금씩 늘려가는 일은 자괴감을 극복하고 자존심을 세우는 자신과의 지난한 싸움이기도 했다. 실수를 통해 크게 배운다. 다행인 것은 그렇게 배운 것은 절대 잊히지 않는다는 점이다. 한편,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이용하는 도서관은 소셜 스킬을 배우기에 더없이 좋은 직장이었다. 곤란한 요구를 하더라도 상대방의 핵심을 이해하고 공감한 다음, 규칙에 맞지 않으면 거절하되, 대안을 제시한다. 예를 들어, A 도서관 미팅룸을 이용하려는 사람이 있는데, 벌써 다른 이용자가 예약을 했다면, 가능한 곳을 검색해서 B 도서관은 가능하다고 추천해 준다. 나의 영어 약점을 덮을 수 있는 친절함, 성실함, 정확함 등 장점을 갖추는 일도 중요했다. 아이러니하게 내가 영어로 의사소통을 잘하게 되었을 때는, 본토박이 화자들로부터 ‘영어를 잘한다’는 말을 더 이상 듣지 않을 때였다. 우리끼리 한국말을 하면서 ‘한국말을 참 잘하시네요’라는 말은 하지 않는다. 영어를 잘하시네요, 하는 말은 영어를 잘할 조건이 아님에도 기대보다 영어를 꽤 하시네요, 당신의 말을 이해하니 걱정하지 마세요, 정도로 이해하면 좋을 듯하다. 2014년에 공립학교 교사가 되었다. 내 직업이 공립학교 교사라고 하니, 사람들은 영어를 잘할 거라 짐작한다. 실상은 글의 서두에 쓴 경험처럼 나의 교직 경력은 해일과 폭풍이 난무하는 영어 전복기로 점철되어 있다. 살면서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표현을 생각해서 말해야 하는 때가 많다. 학교는 영어가 좀 부족해도 직원의 다양성을 존중해 주는 도서관과는 달랐다. 교사는 한 교실의 항해를 책임지는 선장인데 배가 우왕좌왕 갈 바를 모르면 어찌 되겠는가. 잠잠하던 바다에 갑자기 돌풍이 불어 순식간에 작은 배가 뒤집히기도 한다. 몇 해 전, 여러 번의 경고에도 공부를 지독히 안 하는 노아(가명)라는 아이가 있었다. 노아는 다른 학교에서 9학년 때 들었던 대수(Algebra) 1에서 F를 받아 내 수업이 재수강 과목이었다. 배우는 내용은 대부분 온라인 커리큘럼으로 올려져 있어 내가 직접 설명하며 수업할 일은 드물었다. 어느 날, 노아의 엄마가 전체 교사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나를 콕 찍었다. ‘노아는 수학을 가르치는 미시즈 볼의 설명을 알아듣기 힘들어 공부가 어렵다고 합니다.’ 수치심으로 온몸이 붉어지는 것 같았다. 즉각 답장하면 실수하기 쉽다. 이런 일이 닥치면 마음이 안정될 때까지 심호흡이 가장 중요하다. 손을 덜덜 떨며 이메일의 초안을 썼다. ‘귀한 피드백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악센트가 학생에 따라 수업 내용을 이해하는 데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 맞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다양한 악센트를 가진 사람들이 사는 사회 현실을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합니다. 노아가 미스 윌리엄스의 사회 수업이나 미시즈 앤더슨의 영어 수업에서도 낙제점을 받는 것이 그 선생님들의 영어 악센트 때문일까요? 제 영어 악센트로 인해 공부를 못한다고 단체 메일에 지적한 부분에 대해서는 다시 생각해 주시기 부탁드립니다.’ 이렇게 써 놓고 여전히 마음이 울렁거려 남편에게 SOS를 쳤다. 남편에게 영어 문장을 봐달라고 하는 일은 내게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어서 아주 중요한 일이 아니면 부탁하지 않는다는 룰을 세워 둔 터였다. 남편이 오케이 사인을 주었을 때 노아의 엄마가 한 것처럼, 나도 단체 이메일로 답장을 보냈다. 이 일은 앞으로도 발생할 수 있는 무수한 사건의 하나에 불과했지만, 나의 바다에 지진이 발생하고 큰 해일이 덮친 사건이었다. 나는 빠져 죽지 않고 겨우 헤엄쳐 근처에 있는 나무를 붙잡았다. 노아의 사건은 내가 영어 성경을 한 번 필사하기로 결심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2년에 걸쳐 영어 성경을 필사했다. 매일 저녁 한 시간에서 한 시간 반 정도의 시간을 썼는데 그 과정을 무사히 마쳤을 때는 영어 실력뿐만 아니라 영적으로 크게 성장했음을 느꼈다. 나는 지금도 처음 듣는 말일 경우, F, V, R을 구분해 내는 청력도 별로고, 발음도 좋지 않다. 자막을 함께 보며 시각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도움이 될 때도 있다. 신기한 것은 내 발음이 별로여도 강세를 적절하게 두고 발음하면 학생들이 상황을 통해 내 말을 이해하는 것이다. 팬데믹 이후로 화상 수업을 하고 녹화하여 올리는 일이 일상화되었을 때, 스트레스가 컸다. 학부모나 학교 관리자가 내 수업을 듣고 뭐라 할까? 신경이 쓰이곤 했다. 직원회의 때 채팅을 통해 토론하는 문화도 나를 괴롭혔다. 타이핑이 다른 교사들보다 빠르지도 않고, 써 놓고 문법적으로 맞나 다시 읽어 보고 있으면 이미 상황이 정리된 후였다. 동료 교사들은 미팅 내용을 기록하는 서기 일을 내가 꺼리는 것을 이해해 주었다. 다행히 노아 이후에 내 영어를 탓하는 사람은 없었다. 영어가 일정 수준에 이르면, 다음은 독서를 통해 전문 용어를 익히고 말하는 것에 익숙해져야 한다. 나는 교육계에서 쓰는 핵심 단어들을 사용하여 토론하고 자신을 표현하는 방법을 배워야 했다. 교사로서 나의 부족함을 채우고자 방학 때면, 다른 교사 친구와 교육학 관련 책 한 권을 골라 함께 소리 내어 읽는 모임을 계속하고 있다. 유튜브 강의를 들으며 다른 교사들이 어떻게 가르치고 학생들을 지도하는지 많이 배운다. ‘영어 완전 정복’은 영어를 외국어로 배우는 사람에게 꿈같은 말이다. 그러나 영어를 쓰는 나라에서 태어난 본토박이에게도 엄밀히 영어 완전 정복이란 없다. 우리가 자신에게 물어보자. 한국어를 완전 정복하고 사나요? 아직도 맞춤법, 띄어쓰기, 경어법 등등 매일매일 얼마나 많이 틀리게 쓰고 사는가? 영어 바다에서 나의 항해는 계속되고 있다. 머지않아 동력 보트를 타고 바다에 나가고 싶다. 나의 두 번째 수필집 『그림자의 반어법』이 출간되었을 때, 어느 분이 덕담과 함께 조언해 주셨다. 미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된 『H 마트에서 울다』처럼 미국 독자에게 다가가 보세요. 미국 독자들이 듣기 원하는 이야기를 선생님은 많이 가지고 있잖아요. 영어라는 망망대해에 모험을 찾아 나아가야 할 다른 목표가 생겼다. 영어 독서와 글쓰기가 한국어처럼 편해질 그날을 향해 나아간다. 학교에서 내가 가르치는 과목에도 변화가 생겼다. 다음 학기부터는 수학이 아니라, 고등학교 ELL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수업을 맡게 되었다. 또 다른 도전이다. 새 학교 교장 선생님은 수학을 가르칠 수 있는 ELL 선생님이 꼭 필요했다고 나를 환영해 주었다. 이민자로서 내 경험이 갓 이민 와 심리적으로 위축되고 두려운 마음으로 교실에 앉아 있을 학생들의 마음을 편하게 다독이며 공부하도록 하는 도구가 되었으면 한다. 마침내 미국이 내게 진정한 환영의 손짓을 보내왔다.

각주

1) 이 글 중 두어 가지 에피소드는 필자의 수필집 『어머, 한국말 하시네요』에서 일부 내용을 가져왔다.

필자 약력

《수필과 비평》으로 등단, 미주중앙신인문학상 수필 대상(2012). 수필집 『어머, 한국말 하시네요』, 『그림자의 반어법』 등을 펴냈다. 수필U시간 동인, 한국문인협회 및 시애틀문학회 회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