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title_text

8호

시어머니의 디아스포라

이은지

시어머니의 디아스포라

10년 전, 보르도에서 열렸던 한인회 설날 행사에서 지금 나의 남편을 처음 만났다. 나는 당시 교환학생이었고, 대부분이 한국인이었던 그 모임에서 나의 남편은 몇 안 되는 ‘외국인’ 중 한 명이었다. 백인도 아니고 내가 아는 동양인의 외양도 아닌 그를 보고 도대체 어느 나라에서 온 사람일까 하고 궁금해했던 게 내가 그에게 가진 첫인상이었다.   남편의 부모님은 두 분 다 라오스 몽족으로 1970년대에 난민 자격으로 프랑스에 이민을 왔다. 몽족은 중국의 먀오족에서 분화되었다고 하는데, 중국 외에 베트남, 라오스, 태국 등 동남아시아 국가에도 약 200-300만 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그들만의 고유 언어를 가지고 있다. 그중에서도 라오스 몽족은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을 도와 비밀부대로 활동했는데, 미국이 전쟁에서 지고 라오스가 공산화되자 자국 내에 살지 못할 정도로 큰 핍박을 받았다. 결국 다수의 라오스 몽족은 태국의 난민 캠프를 거쳐 미국, 캐나다, 프랑스 등 난민 자격을 인정해 주는 나라들로 이민을 떠났다. 본인이 국가를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민 허가만 떨어진다면 그 나라가 어디든 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남편의 어머니는 캐나다와 미국으로 이민을 간 가족들과 떨어져 프랑스에 왔고, 아버님과 함께 난민들에게 지원되는 공공 임대 주택에 터를 잡았다. 

  하루는 파리 외곽으로 드라이브를 갔다가 베르사유 궁전을 본떠 만들었다는 공공 주택 단지를 본 적이 있다. 커다란 인공 호수가 고전 양식으로 설계된 건축물들을 두르고 있는 독특한 구조였다. 임대 주택에도 아름다움을 더하고 싶었다는 설계자의 의도와는 다르게, 관리가 잘 안 된 인공 호수는 건물 전체를 음습하게 했다. 남편은 그 동네를 걸으며 자기가 유년기를 보냈던 임대 아파트 이야기를 꺼냈다. 건물에는 대부분 자기와 처지가 비슷한 난민 가족이 살고 있었다고 했다. 자세한 이야기는 없었지만, 그간 내가 막연히 상상했던 것보다 더 고달픈 유년기를 보냈을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인도차이나반도의 전쟁 이후, 약 20년 동안 라오스 몽족의 30퍼센트 정도가 탄압을 견디지 못하고 라오스를 떠났다. 남편의 부모님 두 분 모두 온 식구가 라오스를 떠났기에, 이제는 라오스에 가도 만나볼 친지 한 명 남아 있지 않다고 했다. 라오스에 남은 몽족은 이주를 떠난 사람들보다 사정이 더 좋지 않다. 대부분 고산 지역에 남아 농사를 짓는데, 지금까지도 차별적인 대우를 받으며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한다. 모국이라고 부르기에는 라오스가 이들에게 준 상처가 너무 큰 것 같은데, 남편의 아버지는 돌아가실 때까지 프랑스로 귀화하지 않고 라오스 난민으로 남기를 택하셨다.

  어머니는 프랑스에 온 지 30년도 넘은 2000년대 중반에 프랑스로 귀화했지만, 여전히 몽 문화와 언어에 대한 강한 애착을 가지고 계시다. 프랑스어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나에게 기회가 될 때마다 몽어도 배워보지 않겠냐는 말을 넌지시 던지시고, 어린 손자들에게는 몽어로 숫자 세는 법을 알려준다. 마음속 한편으로 어머니도 이미 알고 계실 거다. 며느리와 사위, 그리고 손자들과 몽어로 이야기할 일은 없을 거라는 걸. 다양한 민족이 섞여 사는 프랑스에서 살아남기에 몽족의 언어는 너무 작고 연약하다는 것을.

  어머니는 여섯 남매가 몽 사람을 만나서 결혼하기를 바라셨다고 한다.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는 그 이유를 몰랐는데, 나 또한 해외 생활이 길어질수록 나와 같은 말을 쓰고 같은 음식을 그리워하는 동지가 요원하다. 그런데 간절히 바랐던 게 오히려 독이 되었는지, 미혼인 두 형제를 포함한 여섯 자식 중 아무도 몽 사람과 연이 닿지 않았다. 첫째 언니의 백인 파트너에는 엄청나게 반대하셨다는데, 이제는 모든 문제에 ‘C’est pas grave.(괜찮아, 별일 아니야.)’라고 말씀하신다. 그저 받아들여야 하는 것들도, 체념해야 하는 것들도 많은 삶이셨을 것이다.

  혈혈단신으로 프랑스에 와, 몇 해 전 남편을 먼저 떠나보낸 어머니는 텃밭에서 고수와 토마토 같은 채소들을 가꾸며 소일거리를 하신다. 궁전 같은 저택은 아니지만, 햇볕이 좋을 때면 아들, 딸, 손주들과 함께 정원에서 고기를 구워 먹을 수 있는 예쁜 집에 사신다. 

  얼마 전 성탄절에는 남편의 둘째 누나네 집에 온 식구가 모였다. 산처럼 쌓인 선물들을 서로 나누고 보드게임을 하며, 한국의 설날 같은 시간을 보냈다. 저녁으로는 화이트 와인에 훈제 연어와 굴을 전채로 먹고, 식사로는 양고기와 오븐에 구운 도미를 밥과 곁들여 먹었다. 어머니가 파키들(몽어로 프랑스인을 의미한다) 먹으라며 빵과 치즈를 놓고 가시는 바람에, 테이블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깔깔 웃었다. 이런 농담은 이 집에서만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올해 어머니는 큰누나, 작은누나 가족과 함께 각각 태국과 캐나다를 다녀오셨다. 태국 여행에서는 큰누나의 서프라이즈로 라오스도 방문하셨다고 들었다. 어머니가 기념품으로 사 오신 라오스 티셔츠를 받고, 남편에게 우리도 내년에는 어머니와 어디든 함께 놀러 가자고 말했다. 모쪼록 그녀의 험했던 삶이 위로받는 나날을 만드시기를. 이방인으로 겪었던 아픔들이 모두 잊힐 만큼 행복이 가득 쌓이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이 작품은 웹진 《너머》에 투고되어 선정된 작품입니다.
필자 약력
이은지 프로필 사진.jpg

1990년 12월생. 연세대학교 학사, HEC 파리 MBA 졸업. 한국에서 화장품 마케터를 거쳐 현재는 프랑스에서 식품 마케터로 일하고 있다. 틈틈이 글을 쓰며 언젠가 작가가 되는 꿈을 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