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8호
한강 스케치와 정체전선, 깊은 어둠
박형준
한강 스케치와 정체전선
오늘은 비가 잠시 멈춘 날이다. 햇빛이 얼마나 더 오래 비칠까? 노트북을 들고 강가로 나와 코끼리 떼를 본다. 상류에서 나뭇잎을 물고 내려온다. 다리 앞 벤치에 앉아 있는 외국인은 무릎 위에 펼쳐진 스케치북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우연히 그 옆 벤치에 앉게 되었다. 다리 아래를 날아다니는 하루살이 떼를 바라보며, 나도 가끔 스케치북으로 시선을 돌린다. 노트북을 켜고 비로 불어난 강 위의 다리를 바라보며 시를 쓴다. 상류에서 내려오는 코끼리 떼가 나뭇잎을 물고 있다. 온몸이 허물어질 듯 다리를 두드리고 있다. 강은 넘쳐흐른다…… 고속도로와 시골, 가난한 사람들과 상류층을 잇는 다리에 대한 시를 어떻게 쓸 수 있을까? 외국인은 다리를 바라보다가 마침내 스케치북에 무언가를 쓰기 시작한다. 비로 불어난 다리 아래로 하루살이 떼가 날아오른다. 비가 잠시 멈춘 여름날, 한강 다리와 그 너머의 고층 건물들이 하루살이 떼처럼 아련하게 햇빛에 비친다. 스케치북에 글을 쓰는 외국인은 가끔 볼펜으로 각도를 재듯 하며 비 그친 한강의 풍경을 자신의 언어로 그림을 그리듯 적어 내려간다. 나는 정체전선이 가로지르는 한강 다리 아래를 지나가는 코끼리 떼의 발걸음 소리를 듣는다.
깊은 어둠
그때 나는 가장 더운 여름날의
가장 깊었던 어둠을 보았다
항문으로 튀어나온 내장을
달고 다니던
여름날의 개
소나무에 매단 개를
몽둥이로 후려 패는
웃통을 벗은
내 이웃집 형들의 번들거리는 등짝에
맺혀 있는 땀방울
더위에서 나는 냄새
햇빛에서 튀는 개 울음
몽둥이질과 울음소리로
자그마한 솔숲이 공명하고
소나무 아래로
목줄에서 축 늘어진 개를 그을리는
불이 지펴지고 있다
이윽고 이웃집 형들이
다 익은 줄 알고
소나무에 매달린 개의 목줄을 풀자 그 순간
재를 온몸에 뒤집어쓴 개가 벌떡 일어나
총알보다 빠르게 솔숲을 빠져나간다
그 뒤로 개는
모래펄에 머리를 처박은 채 죽었다고 한다
불에 그을린 몸을 식히려고
강으로 전속력으로 달려가
뜨거워진 머리를 어쩌지 못해
모래 속에 넣고 울부짖는 개
죽었다고 여기는 순간에야
간신히 목줄에서 풀려났던,
솔숲에서 달려 나가는
찰나에 마주친
불에 탄 검은 개의
검은 눈동자
199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 『나는 이제 소멸에 대해서 이야기하련다』, 『빵 냄새를 풍기는 거울』, 『물속까지 잎사귀가 피어 있다』, 『춤』,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 『불탄 집』, 『줄무늬를 슬퍼하는 기린처럼』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