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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호

왕십리 전철역, 소시장에서

전은주

왕십리 전철역

저녁 열 시가 지나면
중앙선을 기다리는
무채색 사람들
옷깃에 지친 하루를 숨긴다.
이번이 덕소행이라면
다음 전철까지 기다려야 한다.
객실에서는 모두 눈을 감고
전철의 흔들림에다
저녁의 졸음을 싣는다.
원주로 가는 급행을 만나면
아무리 바빠도 기다려야 한다.
왜 누구도 항의하지 않나요?
그것도 지쳐버렸어요.
모두 인생의 어두운 터널로
더 빨리 가고 싶었을까?
마스크로 증오를 감추고
재빨리 스치는 급행열차를 본다.
어서 빨리 지나가세요!
다시 전철이 출발하면
잠에 고개를 떨군 이들도
제 하차장은 놓치지 않는다.
북한강 철교를 지나면
옆자리가 비어 깜짝 잠을 깬다.
양수리를 지나면
그래그래, 허리를 비틀며
잠에서 깨어나
양평의 저녁 시간을 궁리한다.
아, 이제야 왔구나!
차들만 모인 장터도 지나
어둑한 시장통 끝머리
구수한 양꼬치 냄새도 나지만
서둘러 집으로 간다.
오늘 밤 생각에다 지을
넓은 마당과 나무가 있는 집.
꽃은 언제 피울까?
비바람은 언제 불게 할까?



소시장에서

장에 내다 팔
황소 두 마리
컨테이너에 실었다.
그놈들은 타지 않으려
울며 용을 쓰지만
경운기로 코뚜레를 끌면
충혈된 눈으로 끌려온다.
읍내 신작로 뒤편 소시장에는
아침 술에 취해 쌈질하는
늙은이들의 욕설이 질펀하다.
너덜 부려 거간꾼에 넘기면
이젠 이별이란다!
고삐 넘기기 전
그 눈빛 애잔해
목덜미를 두어 번 쓰다듬으면
그렁그렁 충혈된 눈!
쩔렁쩔렁 워낭소리!
버티며 끌려가는 그 모습
난 고마 안 볼란다.
어여 가, 어여 가!
이런 이별 좋을 게 없다.
우리 다시 만나봐야 뭘 하겠노?
뒤돌아서서 바지 털털 털면
그 울음, 그 눈물
이자뿔란다!
값이나 잘 받을란가?
불쑥 막걸리 생각이 나
주막 문을 탁 연다.

필자 약력
전은주 프로필 사진.jpg

연세대학교 글쓰기 강사로 재직 중이며 ‘디아스포라 시치료연구회’ 대표를 맡고 있다. 연변대학교, 숭실대학교 석사학위와 연세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8년 《창작21》 신인상으로 등단했고, 2021년 혜산박두진문학제 아시아시선상을 수상했다. 시집으로는 『빈집에서 겨울나기』(천년의시작, 2024)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