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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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호

수수께끼

정수남

아들은 모든 게 수수께끼 같다고 했다. 지금까지 통일이 되지 않은 것도, 40년 동안 할아버지와의 약속을 붙들고 살아가는 나도…….
영상통화지만 아들의 목소리는 다른 때와 달리 또렷하고 분명했다. 면도하지 않은 탓일까, 수척한 얼굴이 아프다는 말도 사실인 것 같았다.

갈 수 없다고, 아들은 머리를 흔들었다. 그래도 나는 고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무리 자식이라도 다른 생각을 가질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또 그 나라가 가까운 데 있는 게 아니잖은가. 더구나 인건비를 아끼기 위해 종업원도 두지 않고 부부가 아침부터 저녁까지 뜨거운 불판 위에서 빵조각을 굽고 10여 가지가 넘는 재료를 매일 준비해야 하는 장사라는 걸 아는데, 무슨 할 말이 더 있겠는가, 못 올 수도 있지……. 나는 그걸 알면서도 공연히 연락해서 아들의 심사만 건드린 것 같아 오히려 미안하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아내의 반응은 의외였다. 내 말을 듣자마자 아내는 예상했다는 듯 단박에 입을 비죽이 내밀었다. 그럴 줄 알고 벌써 두어 달 전부터 며느리에게 몇 차례 다짐을 주었는데, 그럴 적마다 말꼬리를 흐리더니 결국 우려하던 대로 되었네, 했다. “멀긴 뭐가 멀어요, 요즘이 어떤 세상인데. 하루면 오가는 거리잖아요. 그까짓 하루 이틀 식당 문 닫는다고 망한대요? 문제는 마음인데, 떨어져 사니까 걔 마음도 이젠 뜬 거예요. 결국은 할아버지가 중요하지 않다는 거잖아요?”
“아프대. 얼굴이 정말 안 좋아 보였어.”
“아프긴, 우린 아프지 않아요?”
아내는 또 상철이 어미가 들볶아댄 모양이구먼, 하며 작년에 며느리가 친정아버지 기일에 다녀간 것을 다시 끄집어내었다. 나는 눈을 돌렸다. 12층 아파트 거실 통유리창을 통해 바깥을 내려다보았다. 눈이 침침한 탓인지, 아니면 혈당 수치가 떨어진 탓인지, 주차장 옆으로 심어놓은 몇 그루 조경수 우듬지가 희뿌옇게 보였다. “그러니까 일찍 단속했어야죠. 겨우 사흘 앞두고 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난 재작년에도 왔다 갔으니까 금년에도 올 줄 알았지.”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그럴까. 머리가 다시 어지러웠다.
어렸을 적부터 나는 아버지에게 약속이란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거라고 배웠다. 아버지는 힘들고 버겁더라도 그것을 지켜야 하는 게 사람의 도리라고 일러주었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아버지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줄곧 한 길을 걸어온 나는 모범생이라고 할 수 있었다.

매년 5월이 되면 나는 습관처럼 달력을 확인하고는 했다. 잠시 가라앉았던 약속에 대한 굴레가 다시 나를 욱죄기 시작했다.
5월 17일. 그날은 아버지가 이 세상을 떠난 날이었다. 그러니까 그게 벌써 40년이 되는 셈이었다. 내가 그날을 지금까지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은 아버지와의 약속 때문이었다. 그날 아버지는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도 말만큼은 멈추지 않았다. 숨이 차올라 한마디를 내뱉고는 다시 한참을 쉬었다가 또 한마디 내뱉으면서도 잡은 내 손목을 놓지 않았다. 가래가 끓어 말소리는 귀를 바짝 세우지 않으면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나는 아버지가 온몸을 뒤틀며 마지막 힘을 다 짜내어 뱉어내는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분명히 알고 있었다. 통일이레…… 되믄, 내…… 뻬다구레 반드시 페양…… 우리, 선산에다가…… 묻어달라우, 알갔디? 그러니까 아버지는 눈을 감으면서도 고향을 떠올리고 있던 것이었다. 나는 머리를 크게 끄덕거렸다. 걱정하지 마세요, 아버지. 제가 꼭 선산에다 모셔드릴게요. 나는 자신이 있었다. 통일? 아무렴 그때까지야 되지 않겠어? 그때 나는 내 나이가 마흔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을 너무 과신하고 있었다.
내 말을 듣자 아버지는 비로소 안심했다는 듯 손목을 놓아주었다. 그러고는 잠시 뒤 가쁘게 쉬던 숨도 멈추었다. 나는 그때 아버지의 얼굴에 떠오른 희미한 미소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아버지가 힘들게 살았던 이 세상의 끈을 이윽고 놓으셨구나, 하는 사실만을 중요하게 여겼다. 그런 뒤에는 며칠 동안 아버지를 보내드리는 데 정신을 쏟느라고 잠시 약속을 잊어 버렸다. 부음을 알리고, 빈소를 차리고, 문상객을 맞고, 장지를 정하고, 하관하고, 봉분을 세우고, 석물을 주문하고……. 사실 나는 아버지의 선산이 어디인지도 알지 못했다. 아버지가 가르쳐준 주소가 전부였다. 그런 까닭에 통일이 된다고 하더라도 찾아갈 수나 있을지 의문이었다. 더구나 전 국토를 국유화했을 뿐만 아니라 개발까지 했을 터인데 보존이나 되어 있을까 알 수 없었다.
그런 나에게 약속을 다시 일깨워준 사람 역시 아버지였다. 삼우제를 지낸 뒤 며칠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한밤중 꿈속에 나타난 아버지는 나에게 그것을 다시 각인시켜 주었다. 알갔디, 닏디 말라우. 페양시 남산리 사십구번지. 거게가 이 아바디 고향 주소야. 알디? 하얀 두루마기를 입은 아버지는 그때에도 내 손목을 꼭 잡고 놓지 않았다. 나는 머리를 끄덕거렸다. 그러니까 그때부터 아버지와의 약속은 나를 사로잡았고, 5월이 되면 나를 더욱 욱죄곤 했다. 그래, 아무튼 다시 꼭 모셔야지……. 나물을 다듬다 말고 아내가 나를 쳐다보며 지나가는 말투로 한마디를 던졌다.
“어쩌면 걔는 지금 이런 걸 다 부질없다고 여기고 있는지도 몰라요.”
“그게 무슨 소리야?”
나는 눈을 사납게 치켜세웠다.
“그렇지 않아요? 이게 어디 하루 이틀이래야 말이지요.” 조금 전 아들이 내뱉은 말을 되새기던 나는 그러나 꼭 그렇지는 않을 거라고 여겼다. 어렸을 적부터 속이 얼마나 깊었던 아이인데……. 어릴 때는 효손이라고 동네에서 소문까지 났던 아이 아닌가.

**

누이동생의 생각은 아내와 달랐다. 제사 당일 딸기가 담긴 스티로폼 상자 두 개를 안고 들어온 동생은 곧바로 쭈그리고 앉아 제수 준비를 돕다가 아내가 흉을 보듯 아들 부부가 오지 못한다고 하자 웃음으로 받아넘겼다.
“언니, 그게 꼭 동현이 잘못만은 아니잖아요. 또 상철이 엄마 잘못도 아니고요. 얼마나 힘들겠어요, 낯선 땅에서. 그래도 거기에서 자리 잡고 이젠 자기들 힘으로 버거 가게까지 열었다는 게 얼마나 대견해요. 우리가 오히려 고맙게 여겨야죠.”
“고모는……. 그래도 그렇지요. 할아버지가 자기를 얼마나 사랑했어요. 그 사랑을 백분지 일이라도 알고 있다면 나 몰라라 해서는 안 되지요.”
아내도 지지 않았다. 고모가 그렇게 말씀하면 안 되지요. 사흘이 지났으나 아내는 분이 삭지 않은 듯 투덜거렸다. 나는 아내가 왜 투덜거리는지 잘 알고 있었다. 아내는 그게 모두 며느리 탓이라고 여기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러니까 왜 동현이 하나만 달랑 낳았어요? 더 낳지.”
“누가 아니래요? 그때 늑막염만 걸리지 않았어도 더 낳을 수 있었는데…….”
동생이 농담을 건네자 아내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아내와 누이동생이 주고받는 말소리를 듣는 것도 1년 만이었다. 나는 슬그머니 동생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보면 볼수록 동생은 생김새뿐만 아니라 말투까지도 아버지를 닮은 데가 많았다. 여자이긴 해도 눈매와 콧날, 그리고 두툼한 턱선과 불거진 뱃살을 볼 때면 아버지를 그대로 떠올리게 했다. 그런 점에서 보면 나는 아버지를 닮은 데가 거의 없다시피 했다. 깡마르고, 매사 깐깐한 성격 등, 아버지보다는 오히려 어머니 쪽에 더 가까운 편이었다.
기름 냄새 때문일까. 머리가 또 어지럽기 시작했다. 의사는 그것을 두고 악성 빈혈 초기라고 하면서 노인층에 흔히 나타나는 노화 현상과는 다르다는 것을 주지시켰다. 한마디로, 비타민B12 결핍이라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들으며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나이 팔십에 내가 앓고 있는 데가 어디 한두 군데인가. 녹내장에 당뇨에 이젠 악성 빈혈이라고? 의사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듯한 나에게 처방 약 복용을 강력히 권했다.
그런데 딸아이는 왜 여태 도착하지 못하는 걸까. 시어머니가 오늘내일한다더니 혹시 그사이 나쁜 일이 생긴 건 아닐까. 나는 티브이 윗벽에 걸려 있는 시계를 올려다보았다. 시침은 벌써 9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조금 있으면 제사 시간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이번에는 아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고모는 그래도 아들하고 함께 사니까 외롭지 않지요?”
“외롭고, 외롭지 않은 걸 생각할 겨를이 어디 있어요? 하루하루 먹고살기 바쁜데.”
“홍범이 엄마가 그래도 고모한테는 아주 살갑게 하잖아요.”
“그럼, 언니는 외로워요?”
동생이 이마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물었다.
그러자 아내가 정색했다.
“맞아요. 나는 늘 외로워요. 하나밖에 없는 아들은 외국에 나가더니 아주 거기에 눌러앉아 돌아올 생각도 하지 않죠, 또 남편 직장 따라 지방에 내려가 사는 딸은 코빼기도 보기 힘들잖아요. 그러니 내가 외롭지 않겠어요?”
“그러니 어떡하겠어요. 그 아이들은 그 아이들 나름대로 살아가기 바쁜데. 그래도 언니는 오빠가 늘 곁에 계시잖아요?”
동생이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그 눈빛에서 동생 역시 아무렇지 않은 척해도 말하지 못할 무언가를 가슴에 꽁꽁 담고 있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왜 아니 그렇겠는가. 20여 년 전 아이엠에프로 인해 잘 나가던 사업이 도산하자 그것을 회복한다고 백방으로 뛰어다니던 남편이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난 뒤부터는 아들네 집에 얹혀사는 처지인데……. 아무리 제 속으로 낳은 자식이라도 함께 산다는 게 생각처럼 쉽지 않다는 건 능히 알 수 있는 일 아닌가, 내 아들처럼. 그래도 동생은 가끔 내가 전화하면 그런 내색은 하지 않고, 오히려 밝은 목소리로 내 건강부터 채근하고는 했다.
“동현이랑 영상통화는 해보셨어요?”
동생이 그거라도 해봐요, 하며 뒷말을 덧붙이자 아내가 머리를 흔들었다.
“해봤죠. 그런데 그런 거 백 번 하면 뭘 해요? 손목 한 번 잡는 것보다도 못한데. 감질만 더 나더라고요.”
나는 다시 벽시계를 올려다보았다. 9시 15분. 나는 몸을 일으켰다. 오래 앉아 있었기 때문일까, 이번엔 허리가 또 켕겼다.
잠시 뒤, 동생이 나에게 물었다.
“오빠, 시장하지 않아요?”
나는 손사래를 쳤다. 배가 고파도 당장 먹을 수 없다는 건 동생도 알고 있을 터이었다. 제사를 지낸 뒤에야 비로소 온 식구가 둘러앉아 식사하는 건 아버지 때부터 내려오는 우리 집안의 관습이었다. 무엇 때문인지는 몰라도 아버지는 해가 저물면 그때부터는 물도 마시지 않았다.
티브이에서는 또 북에서 미사일 실험을 했다고 떠들고 있었다.
제수 준비가 얼추 끝난 모양이었다. 아내가 일어나 주먹으로 허리를 두드리자 동생도 손바닥으로 무릎에 떨어진 부스러기들을 툭툭, 털며 일어나 식탁 의자에 올라앉았다.
“그런데 얘는 왜 이렇게 늦어. 빨리 와서 좀 도와주지 않고…….”
아내가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중얼거렸다.
“걱정하지 말아요. 제수도 다 끝났겠다, 뭐가 걱정이에요.” 저러다가 유미가 정작 문을 열고 나타나면 반가워서 야단도 치지 못할 걸 뭘 그러냐고, 동생이 지청구를 던졌다. 벌써 몇 년째인가. 이와 같은 제사는 아버지가 작고하신 뒤부터 한 해도 거르지 않고 계속된 일이었다. 그런데도 사실 나는 늘 서툴고 낯설었다. 지방을 쓰고, 메를 올리고, 과일과 생선, 떡과 적을 진설하는 순서를 가끔 잊어버려 당황할 적도 있었다. 그럴 때는 눈을 흘기면서도 아내가 곁에서 도와주고는 했다.
다른 때와 달리 내가 이번 제사에 더욱 신경을 쓰는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아직 누이동생이나 아내, 아들에게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이번을 마지막으로 아버지의 산소를 이장하는 게 어떨까, 한번 의논해 볼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산소는 함부로 건드리는 게 아니라는 건 잘 알고 있었다. 잘못하면 동티가 난다고도 하지 않는가. 또 거기에 따르는 파묘 일시 정하는 것과 격식도 갖추어야 하므로 결코 쉽게 볼 일이 아니었다.
유택이 있는 장호원이 멀다고는 할 수 없었다. 따라서 그게 이유가 될 수는 없었다. 다만 차를 몰고 네 시간이 걸리는 거리를 일 년에 서너 차례씩 왕복하는 게 버거운 건 사실이었다. 한번 다녀오면 며칠 동안 자리에 드러누울 정도로 삭신이 쑤시고 아팠다. 이태 전 동맥경화증 때문에 심혈관에 스텐트 두 개를 시술한 뒤부터는 더 그랬다. 그래도 이장은 꿈도 꾸지 않았다. 그런 나를 흔든 결정적 계기는 공원묘지 관리사무소 직원의 전화 한 통이었다. 며칠 전 그는 내년이면 관리 기간이 만료된다고, 까맣게 잊고 있던 나를 일깨웠다. 어떻게 할까요? 더 연장하실 수도 있습니다만……. 그는 그것을 원하는 것 같았다. 벌써 그렇게 되었나, 나는 잠시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리면서 그럼 그렇게 할까, 생각했다. 그게 순리일 듯했다. 그러나 잠시 뒤 나는 직원에게 유보해 달라고 말했다. 가족들과 의논해 보겠다는 단서를 붙이기는 했으나 사실은 이장도 한번 고려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40년 전과는 달랐다. 곧 될 것으로 믿었던 통일은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을뿐더러 갈수록 점점 더 멀어지고 있잖은가. 더구나 그것을 기다릴 만큼 이제는 나에게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다는 게 나를 망설이게 했다.

나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은 유난하고 각별한 데가 있었다. 어쩌다 동네 아이들과 싸우다가 맞고 들어오면 아버지는 잘잘못을 가리려고 하지 않았다. 단박에 누가 우리 삼대독자를 이렇게 만들었느냐고, 그 집으로 달려갔다. 그러고는 그 아이의 부모를 붙들고 자식을 어떻게 가르쳤길래 이 모양이냐고 종주먹을 들이대며 으름장을 놓았다. 그래서 동네에서는 아버지가 지나가면 모두 고개를 외로 돌리기 일쑤였다. 그러나 아주 가끔이지만, 때리고 들어오는 날이면 아버지는 다른 얼굴로 나를 맞았다. 잘해서, 내 새끼. 고롬 기래야디, 우리가 어떤 집안인데, 기딴 놈덜이 함부루 뎀비네, 뎀비길…….
내가 그런 행동을 보이는 아버지를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된 것은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난 뒤였다. 그러니까 그것은 타의에 의해 어쩔 수 없이 피난은 왔으나 뿌리 없는 집안이 아니라는 것을 동네에 선포하고, 또 우리에게 각인시키고, 그렇게 하므로 당신 자신도 다시 한번 일깨우는 아버지만의 방법이라고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나에 대한 아버지의 일방적인 사랑은 거기까지가 끝이었다. 아들이 태어나자 그 사랑은 하루아침에 아들에게로 옮겨갔다. 그때 나는 직장 관계로 분가해 살고 있었는데, 매주 일요일이면 싫든 좋든 아들을 안고 아버지 집을 찾는 게 일과처럼 되어 있었다. 회사 업무 관계로 가지 못하는 날에는 아내만이라도 보내야 했다. 만약 이를 어기면 당장 불호령이 떨어졌다. 와 날레날레 오디 않는 거이가? 그러니까 우리는 아버지가 뇌출혈로 쓰러지기 전까지 늘 아들을 안고 의무적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의 아들 사랑 역시 유별난 데가 있었다. 겨우 걸음을 옮기는 어린아이를 데리고 어느 날은 낚시터에 다녀오기도 했다. 모두가 나서서 만류했으나 아버지의 황소고집을 꺾을 사람은 집안에 아무도 없었다. 시장에서 독일 병정이라는 별명을 얻었던 어머니도 어쩌지 못했다. 내깔레 두라우. 데 영감을 누구레 막간.

딸은 밤 11시, 제사를 지낼 시각이 임박해서야 나타났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뛰어 들어온 딸은 미안하다면서, 오늘내일하는 시어머니를 두고 쉽게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고 했다.

**

제사는 자시 정각에 시작했다.
깨끗하게 손을 씻은 나는 먼저 병풍을 두르고, 지방을 중앙에 모셨다.
아내와 동생, 겨우 한숨을 돌린 딸이 5열로 제수를 진설하자 나는 창문을 모두 열어 놓은 뒤 향로와 향합, 모사를 상 앞에 놓았다. 제주는 소주를 주전자에 담아 사용하기로 했다. 그것은 평소 아버지가 즐기던 술이었다. 물론 알코올 도수는 그때보다 훨씬 낮지만.
아파트에 살면서부터 제사도 많이 간소화된 건 사실이었다. 옛날 아버지가 드리던 때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서툴러도 격식만큼은 그대로 따르려고 노력했다. 마음이 중요하지, 그게 뭐 대수냐고 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으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물론 아버지의 혼백이 꼭 온다고 자신할 수는 없지만, 격식을 지키려고 노력할 때 마음도 따라간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내가 눈총을 주어도 제수만큼은 과하다고 할 정도로 준비시켰고, 또 진설도 옛 방식을 고수했다. 즉 메와 갱은 물론, 면과 혜, 삼채, 탕, 전, 포, 과일 등을 진설할 때도 동과 서를 가려 하도록 고집했다.
강신과 참신을 마치고 초헌, 독축, 아헌, 종헌까지 마쳤으나 시간은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약식으로 드린 게 아닌데도 제사는 언제나 30분이면 충분했다. 그러니까 제사 시간보다 준비하는 시간이 몇 배 더 긴 셈이었다. 그런 까닭일까. 제사를 지낸 뒤에는 늘 허망한 느낌이 가슴 가득 밀려오고는 했다. 그런데 무엇 때문일까. 음복하기 위해 아내와 동생이 식탁에 상을 차리는 것을 기다리면서 소파에 올라앉은 나는 웬일인지 그날은 그 위에 슬픔 같은 것까지 쌓이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허망하다는 것과는 또 다른 것이 분명했다. 아들 때문일까, 생각해 봤으나 그게 전부는 아닌 듯했다.
“옮겨 앉으세요.”
수저를 식탁에 올려놓으며 아내가 불렀으나 나는 대꾸를 미룬 채 잠시 그냥 더 앉아 있었다. 도대체 무엇 때문일까. 그러나 나는 곧 그게 내 문제에서 야기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죽으면 누가 장사 지내줄까. 아들이 제사인들 지낼까, 하는 따위가 갑자기 떠올라 내 머리를 어지럽힌 게 원인이었다.
“어서 오시지 않고 왜 거기 앉아 계세요?”
이번에는 동생이 재촉했다. 식탁에 앉아 나를 건너다보는 동생과 아내, 딸의 얼굴에는 시장기와 피곤함이 가득 묻어 있었다. 하긴, 저물녘부터 내내 굶었으니 오죽 배가 고프겠는가. 나는 식탁으로 건너가면서 나도 종일 굶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식탁은 제사상에서 물린 제수로 풍성했다. 아버지 혼백이 와서 정말 잡숫고 갔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정성을 다한 음식인 것만큼은 틀림없었다.

우리가 아버지의 얼굴을 그나마 자주 볼 수 있는 때는 장마철과 겨울철뿐이었다. 다른 때는 일주일에 사나흘씩, 아버지는 늘 집을 비우기 일쑤였다. 어디를 다니는지는 몰라도 낚시가방 하나를 둘러메고 아버지는 늘 바람처럼 바깥으로 떠돌았다. 며칠씩 집을 비웠다가 비린내를 풍기며 들어온 아버지를 어머니는 그냥 놔두지 않았다. 강철 긁는 소리를 연신 질러댔다. 이거 보라요, 이거이 어데 사람 사는 집입네까. 살자는 겁네까, 죽자는 겁네까. 와 안즉까디 정신 채리디 못하구 떠돕니까, 떠돌길……. 어데 입이 있으믄 말 좀 해보라우요. 그러나 아버지는 그럴 적에도 그냥 씨익 웃을 뿐, 대거리하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 날이면 또 낚시가방을 둘러메고 어딘가로 사라졌다. 아버지가 그렇듯 집에 들어오지 않는 날 밤이면 어머니는 우리 남매를 앉혀놓고 혀끝을 차며 말했다. 네 아바디 정신 차릴래믄 안즉 멀어서, 야. 피난 내레 온 거이 어데 우리뿐이가. 그런데 안즉까지 와 마음 잡디 못하구 떠돌구 있네, 반네미처럼…….
나는 그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다만, 어머니의 말처럼 아버지가 어디에도 정을 붙이지 못하고 있다는 것만 어렴풋이 짐작할 따름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렇게 떠돌다가도 할아버지 제삿날이 다가오면 어김없이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고는 마치 다른 사람처럼 제수를 준비시키고, 손수 밤도 깎고, 병풍도 손봤으며, 향로도 꺼내 재로 닦았다. 이걸 소홀히 하는 놈이레 사람 새끼라구 할 수 없디. 이 세상에서리 조상 없이 태어난 놈이레 어데 있간?
나는 그때도 역시 그 말의 뜻을 잘 알지 못했다. 다만, 곁에 서서 제사를 준비하는 아버지를 도울 뿐이었다. 아버지는 꼼꼼했다. 순서와 진설이 조금만 틀리고 어긋나도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청소하고 몸을 깨끗이 씻지 않아도 잔소리를 퍼부었다. 야, 좀 똑바루 하라우. 기케 하믄 조상 할아바디 혼백이레 찾아왔다가 얼마나 서분하갔네. 그럴 적마다 나는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하나도 빼놓지 않고 순순히 배우고 익혔다.

오랜만에 술을 입에 댄 탓일까. 몇 잔 마시지 않았는데도 취기가 슬슬 올라왔다. 호흡이 가빠지면서 속이 메슥거렸다. 의사가 술은 입에도 대지 말라고 주의 주었는데……. 건너편에 앉은 딸과 아내의 윤곽이 흐릿하게 보였다.
“내일 아침 함께 산소에 올라갈 사람?”
나는 성묘도 성묘지만, 관리사무소에 볼일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동행할 사람을 찾았다. 그러나 금방 나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잠시 건너다보며 뜸을 들이던 나는 맥이 풀렸다. 갑자기 뭔지 모를 찬바람이 가슴을 할퀴고 지나가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혼자 갈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데……. 나는 할 수 없이 이번엔 한 사람씩 지목해 가며 다시 물었다. 먼저 지목한 사람은 딸이었다. 그러나 딸은 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나는 안 돼. 시어머니 때문에 내일 아침 일찍 내려가 봐야 해요.” 나는 어이가 없었다. 아내가 김 서방과 교대하면 되지 않느냐고 따지듯 물었으나 딸의 대답은 똑같았다. 안 돼. 그 사람 바빠. 오늘도 억지로 앉혀놓고 도망치듯 올라온 거야.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동생은 내가 묻기 전에 먼저 따라나서겠다고 머리를 끄덕거렸다. 피곤한 듯 하품을 빼물던 아내도, 나는 말하지 않아도 알지요, 했다.
“됐네, 그럼.”
두 사람이 따라가겠다고 나서자 딸은 비로소 짐을 덜었다는 듯 밝게 웃었다. 나는 다시 잔에 술을 가득 부었다. 아내가 걱정하는 눈빛을 보냈으나 아랑곳하지 않고 명태포를 찢었다. 비로소 억누르고 있던 숙제를 꺼낼 시간이 다가왔다는 것을 느꼈다. 아들이 없다는 게 유감스럽기는 했으나 마음에 두지 않았다.
“그럼, 성묘는 됐고……. 이제 내가 뭘 하나 물어보려고 하는데, 어때?”
시작은 그렇게 꺼냈으나 사실 나는 어디부터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잠시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관리사무소 직원에게 받은 전화 이야기부터 꺼내는 게 먼저일까, 아니면 내가 안고 있는 숙제부터 이야기하는 게 순서일까, 또 과연 이것이 아버지와의 약속을 지속시키는 방법일까, 나의 이기적인 생각은 아닐까, 하는 것 등등이 나를 잠시 혼란스럽게 했다. 동생이 뭔데, 그렇게 심각해요, 하며 얼굴을 바투 디밀었으나 말을 꺼내놓고도 나는 쉽게 뒷말을 잇지 못했다. 결국 한참이 지난 뒤에야 그럴 적에는 내 의견부터 꺼내는 게 순서라는 걸 깨달았다.
“다른 게 아니라 아버지 산소 문제인데, 아무래도 이젠 옮겨야 할 때가 되지 않았나, 해.”
나는 잠시 말을 멈추고 식구들을 둘러보았다.
“그동안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일 년에 서너 차례 산소를 찾아 성묘했다는 건 모두 알지? 사실 건강할 때도 그걸 지키기가 쉽지 않았는데, 그런데 이젠 나도 늙었어……. 몸도 아프고……. 세월이 좋아서 그렇지, 옛날 같으면 벌써 뒷방에 물러앉았을 나이잖아. 그래서 내가 없어도 그 약속을 지키는 방법을 찾다가…….”
나는 숨을 한 차례 몰아쉬며 동생을 건너다보았다. 동생의 얼굴은 긴장한 듯 굳어 있었다. 그러나 그 옆에 앉은 아내의 눈빛은 달랐다. 졸음을 쫓아버린 듯 반짝거렸다. 그래서 얘기인데, 나는 다시 말을 이었다.
“이제는 단안을 내릴 때가 되었다고 생각해. 이러다가 자칫 잘못하면 제사는 물론이고, 산소조차 지키기 힘드니까.”
왜 그럴까. 거기까지 빠르게 말하던 나는 갑자기 눈물이 나올 것 같아 잠시 입을 닫고 마른기침을 몇 차례 뱉어냈다. 약속을 파기하겠다는 건 분명 아닌데, 식구들이 그쪽으로 듣는 것 같아 나는 몇 번 숨을 골았다. 그러자 외로 앉아 잠자코 듣고 있던 딸이 답답하다는 얼굴로 물었다.
“그래서? 그래서, 아빠 생각은 어떤데? 그것부터 말해 줘야 우리가 가타부타 말할 것 아니에요?”
“그래서 내 생각은…….”
나는 쫓기듯 조금 더 빠르게, 내 속에 깊숙이 담고 있던 것들을 끄집어내었다.
“이젠 그만 이장을 해서 납골당에 모시는 게 어떨까 해. 어때? 납골당도 요즘은 규모나 시설이 현대식이어서 안심해도 된다고 하더라고. 물론 사후 관리도 잘하고 있고…….”
나는 이윽고 공원묘지 관리사무소에서 걸려 온 전화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자 왼손바닥으로 턱을 괸 채 내 이야기를 듣던 동생이 걱정스럽다는 듯 끼어들었다.
“제사는? 그럼 제사는 어떻게 할 건데요?”
“글쎄…….”
나는 잠시 대꾸를 미루었다. 그러자 아내가 눈을 반짝거리며 나섰다.
“제사도 보낼 수 있으면 보내야지요. 이참에.”
“어디로요?”
동생의 눈이 커졌다. 그러나 아내는 개의치 않는다는 듯 큰 소리로 계속했다.
“어디긴 어디예요, 동현이네밖에 더 있어요?”
그러자 동생의 목소리도 아내 못잖게 커졌다.
“맡긴다고 해서 걔가 맡을지도 모르지만, 설혹 맡는다면 내년부터 아버지 제사는 그럼 그 나라에서 지낸다는 거예요?”
“그렇지요. 그 나라에서 지내게 되는 거지요, 내년부터는.”
아내는 혼백이란 시공을 초월한다니까 그 나라라고 가지 못할 리 없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 그래도 동생은 의문이 가시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그럼 제사에 참여하려면 우리 모두 거기까지 가야 하는 거예요?”
“꼭 참석하겠다면 그렇게 해야겠지요.”
두 사람의 말이 길어지자 딸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오빠가 과연 맡을까?”
“안 맡겠다고 하면 억지로라도 맡겨야지.”
나는 그쯤에서 아내와 동생, 딸의 설전을 중지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대로 방치하면 길어질 뿐만 아니라 자칫 말싸움으로 번질 우려까지 있다고 느낀 탓이었다.
“제사 문제는 내가 나중에 동현이와 의논해도 되니까 서두르지 말자. 급한 건 내일 성묘 갔다 내려올 때 관리사무소에 어떻게 할 것인지, 통보해야 한다는 거야. 이장하겠다든가, 아니면 연장하겠다든가…….”
내가 몇 번 더 물었으나 그 문제에 대해서는 대꾸하는 사람이 없었다. 한참 기다리던 나는 결국 그 문제는 내 생각대로 해도 되겠느냐고 다시 물었다. 그래도 괜찮겠어? 그러나 여전히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한 핏줄이지만 생각이 각각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나는 마음 한구석이 갑자기 허물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럴 수도 있구나, 허물어진 그 자리를 뚫고 또 다른 슬픔이 밀려들었다. 그 슬픔의 하나는 통일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현실과 또 하나는 그런데도 시간은 머물지 않고 흘러 어느새 나를 여기까지 올려놓았다는 것이고, 마지막은 그런데도 아들을 비롯한 내 가족은 내가 아버지와 맺은 약속을 이해하기보다 자신의 주장을 먼저 앞세우고 있다는 것이었다.

밤이 늦도록 결론은 나지 않았다. 조금 지나면 동이 틀 시각이었다. 나는 모두에게 그만 잠자리에 들 시간이라는 것을 알렸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하품을 길게 빼물고 있던 딸이 먼저 일어났다. 잘 자. 딸이 일어서자 식구들도 모두 일어나 방으로 들어갔다. 그들의 뒤를 따라 나도 방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나는 눈을 쉽게 붙일 수가 없었다. 아버지에 대한 회한이 자꾸만 떠올라 모잡이로 누워서 몸을 수십 차례 뒤척였다. 약속이란 무엇일까. 아들은 언제부터 그런 생각을 가졌을까. 선산은……. 이런 내 마음을 안다면 아버지는 뭐라고 하실까. 아파트 뒷산 어딘가에서 소쩍새가 쉬지 않고 울어대고 있었다. 소쩌쩌억, 소쩌쩌억, 가깝게 또는 조금 멀리서 들려오는 그 소리를 들으며 나는 밤새 한숨을 내쉬고는 했다.

**

내가 잠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딸은 벌써 가고 없었다. 아내는 내가 곤히 자길래 깨우지 않았다고 했다. 나는 아쉬웠지만 입을 굳게 다문 채 내색하지 않았다.
거실로 나온 나는 핸드폰을 열었다. 뜻밖에도 문자창에는 아들의 메시지가 들어와 있었다. ‘할아버지 제사는 잘 마쳤어요?’ 그러나 미안하다는 문구는 보이지 않았다. 그럴 수도 있지, 나는 폴더를 접으며 하품을 길게 뽑아냈다. 아내가 서랍에서 처방 약 여섯 알을 꺼내주면서 누구냐고, 턱짓으로 물었으나 나는 말해 주지 않았다.
“오빠, 잘 주무셨어요?”
동생이 인사를 건넸다. 현관 앞에는 벌써 산소에 가지고 갈 플라스틱 상자 두어 개가 나와 있었다.

다행히 날씨는 쾌청했다. 중부고속도로를 지나 장호원으로 꺾어 들면서 나는 핸들을 쥔 채 하늘을 가끔 올려다보았다. 파란빛이 너무 맑았다. 잠이 부족했으나 피곤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어제와 달리 뒷좌석에 앉은 아내와 동생은 소풍 나온 어린아이처럼 재잘재잘 이야기꽃을 피우다가 함박웃음을 터트리고 있었다. 시간은 생각보다 많이 걸리지 않았다. 아침을 늦게 먹고 1시 반쯤 출발했는데 4시 전에 도착했으니까.
공원묘지 입구는 변한 게 하나도 없었다. 유난스레 커서 볼 적마다 낯선 ‘진달래 메모리얼파크’라는 간판도 여전했다. 다른 것이 있다면 한식 때는 보이지 않던 철쭉꽃이 어느새 길가에 활짝 피어 있다는 것뿐이었다.
입구를 지나 아버지 유택이 있는 산 중턱까지 나는 멈추지 않고 올라갔다. 공원묘지에 들어선 이상, 성묘가 우선이라는 것은 당연했다. 7-2구역 앞에 차를 멈춘 나는 짐을 내린 뒤 산소에 오르는 돌계단을 천천히 밟고 올라갔다. 다른 때 같으면 왜 이렇게 높은 곳에 모셨느냐고, 불평을 늘어놓던 아내도 그날은 웬일인지 아무 말이 없었다.
산소도 변한 건 없었다. 산소 뒤로 병풍처럼 서 있는 도래솔도 여전했으며, 육 년 전에 심은 향나무의 푸른 빛도 여전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누워 있는 쌍분의 떼도 갓 이발한 상고머리처럼 말쑥했다.
“사십여 년 동안 아버지와 어머니는 변하지 않고 이곳에 누워 계시는데, 우리만 변했네요. 할머니 할아버지가 다 되었으니, 안 그래요, 오빠?”
상석 위에 가져온 술과 과일, 육포와 식혜를 진설하며 동생이 혀끝을 찼다.
“그렇지, 벌써 그렇게 되었구먼.”
나는 향로와 향을 상석 아래 놓고, 돗자리를 펴면서 머리를 주억거렸다. 비석 위에 싸놓은 산새의 오물을 물수건으로 닦던 아내가 나를 흘끔 돌아보았다.
왜 그런지는 몰라도 아버지 산소에 올라오면 나는 마음이 이상스럽게 편안해졌다. 북쪽으로 탁, 트인 전경이 약속이라는 억압이나 굴레 같은 것도 잠시 잊게 했다.
아버지는 향년 일흔둘에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그 후 이태를 더 사시다가 9월에 가셨다. 향을 부쳐 향로에 넣은 나는 술을 따라 상에 올리고는 두 번 절을 하고 물러났다. 내가 물러나자 이번엔 아내가 시접 위에 젓가락을 올렸다. 그러고는 동생과 함께 손을 머리 위에 올려 네 번 절을 했다. 10여 분 뒤 아내가 다시 돗자리에 올라가 시접 위에 놓인 젓가락을 내려놓는 것으로 성묘는 모두 끝난 셈이었다.
“생각해 봤어요?”
상석에 올렸던 과일과 육포, 식혜를 주섬주섬 거두며 동생이 물었다. 나는 머리를 끄덕거렸다.
“생각했지…….”
“어떻게?”
나는 그러나 입을 다물었다. 아직은 발설할 단계가 아니었다.
“그래도 아버지는 행복한 사람이에요. 오빠 같은 아들을 두셨으니…….”
내가 대꾸하지 않자 동생이 슬그머니 말머리를 돌렸다.
동생과 아내가 음식을 수습하는 동안 나는 산소 주위를 한 차례 둘러보았다. 동생의 말대로 산소는 지금까지 변한 게 없었다. 굳이 변한 것을 들자면 봉분을 덮은 잔디가 지난 세월만큼 조금 더 두터워졌다는 것과 주변에 심은 향나무와 사철나무의 기둥이 굵어졌다는 것뿐이었다.
성묘 시간은 짧았다. 산소를 내려온 나는 곧바로 관리사무소로 향했다. 내가 들어서자 관리사무소 직원은 누군가, 하는 눈빛이었다. 그러나 내가 곧 고 장준석 님의 아들 장영근입니다, 7-2구역에 있는, 하고 말을 건네자 그는 비로소 알겠다는 듯 얼굴을 활짝 폈다. 아, 며칠 전에 저와 통화하셨지요? 그래, 의논은 하셨어요? 그는 빠르게 물으며 명함을 내밀었다. 나는 머리를 주억거리고 데스크 앞에 놓인 플라스틱 의자에 앉았다.
“그래, 결론은 어떻게 내렸습니까?”
“말씀하신 대로 연장할까, 하는데요.”
나는 주저하지 않았다. 그것은 지난밤 내가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면서 내린 결정이었다. 그럴 수는 없었다, 내가 숨을 쉬고 있는 동안에는. 그것은 스스로 약속을 깨는 일이었다. 그러자 그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은 채 여전히 빠르게 말했다.
“잘하셨어요. 연고자들 대부분이 다 그렇게들 합니다. 말이 그렇지, 이장이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 몇 년 연장할 건가요?”
나는 잠시 대답을 미루었다. 어젯밤에는 분명히 20년으로 정했지만, 갑자기 욕심이 아닐까 하는 마음이 솟구친 까닭이었다. 20년이라면 내 나이가 100살이 되지 않는가. 그때까지 내가 과연 생존할 수 있을까. 그러나 그뿐, 나는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이십 년.”
“아, 이십 년이요? 알겠습니다.”
빠르게 말을 마친 그는 곧바로 일어나 책상 뒤에 있는 서류함에서 용지 몇 장을 꺼내왔다.
“연장 신청은 아주 간단합니다. 먼저 여기에 서명해 주시면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기록하겠습니다. 주민등록증은 가지고 오셨지요? 그리고 참, 오늘 연장에 필요한 관리비를 가지고 오지 않으셨으면 모레까지 아래 계좌로 입금해 주시면 됩니다. 금액과 계좌번호는 안내장에 기록되어 있으니까, 참고하시면 되고요. 서류가 다 끝나면 댁으로 한 부는 우송해 드리겠습니다.”
나는 그가 사무적으로 내뱉는 소리를 들으며 잠자코 서명한 뒤 서류를 건넸다. 그는 그것을 서랍에 넣으며 또 얼굴 가득 미소를 띠었다. 그러고는 늘 그랬다는 듯이 공원묘지에 대해 늘어놓기 시작했다.
“성묘를 다녀오셨다니까, 그럼 보셨겠네요. 깨끗하게 잘 되어 있지요? 저희 공원묘지는 고인의 산소 하나하나를 자기 부모 유택처럼 정성껏 관리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의 말을 등 뒤로 받으며 일어섰다. 마음이 바빴다. 20년. 그러니까 아버지는 앞으로 20년은 여기 더 머무를 수 있게 된 셈이었다. 물론 그때까지 내가 생존한다는 보장은 없었다. 그렇다면 아버지는 나보다 더 오래 여기 머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어젯밤 내가 죽으면 누가 아버지 산소를 맡을까, 하는 걱정 따위를 하지 않기로 한 것을 다시 한번 되새겼다. 물론 그 안에 통일이 된다면야 더할 나위가 없을 테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상관하지 않기로 했다. 거기부터는 내 몫이 아니니까…….
바깥으로 나오자 5월의 밝은 햇살이 침침한 내 눈을 따갑게 찔러댔다.
차에서 기다리던 동생은 궁금하다는 얼굴로 내가 운전석에 오르자마자 물었다.
“이장하기로 했어요?”
“아니.”
나는 간단히, 그러나 단호하게 잘라 말하고 시동을 걸었다. 아니, 그럼? 아내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크게 떴으나 나는 쳐다보지도 않고 출구를 향해 힘있게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삭신이 쑤시고, 머리가 다시 어지러워지기 시작했으나 나는 개의치 않았다.

**

저물녘, 나는 아들에게 할아버지 산소에 다녀왔다는 것과 관리를 20년 연장했다는 걸 문자로 알렸다. 답신은 곧 오지 않았다. 아들이 답신을 보낸 시각은 그로부터 한참이 지나 내가 또 북이 미사일을 동해로 시험 발사했다는 소식을 티브이를 통해 보고 들으면서 미간을 찌푸리고 있을 때였다. 아들은 유미에게 벌써 들었다면서 어제 이야기를 간략히 되새기고는, 산소 문제는 아버지 마음대로 하셔도 상관없지만, 제사는 지금 당장 자신이 맡기 곤란하다고 말했다. 딸이 우려했던 대로였다. 그러나 마음이란 항상 변할 수 있으니까 뒤는 어찌 될지 자신도 모르겠다면서, 나에게 할아버지와의 약속에 너무 매달리지 말라고 했다. 또 자신은 나처럼 자기 안에 자신을 가두고 살고 싶지 않다고도 했다. 그러나 한 가지 나를 위로한 것은 이장하게 된다면 그곳은 알려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아버지도 이젠 그만 훌훌 털어버리세요, 자신에게 자유를 좀 주면서 사세요. 약속이 뭐가 그렇게 중요해요? 통일이요? 누가 그걸 지금 중요하게 여기기나 한대요? 아버지 같은 사람이 아니면……. 나는 이해해 달라는 아들에게 답신을 보내지 않았다. 아픈 게 궁금했으나 묻지도 않았다. 비로소 아들의 본심을 읽은 것 같았다. 아들은 할아버지와 나처럼 걱정하며 기대하며 사는 것보다는 자신의 길을 가겠다는 것이었다. 아들은 언제부터 그런 생각을 가졌을까. 왜, 무엇 때문에……. 아쉽기는 했지만 나는 잠자코 듣고 있었다. 굳이 따질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아들이 아니었다. 아들이 그렇게 생각한다고 나까지 흔들려서는 아니 될 일이었다. 아들과 나의 길은 다르지 않은가.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잠시 답신을 보내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아들이 다시 문자를 보냈다.
-근데, 아버지. 우린 정말, 왜 이렇게 살아야 해요?

필자 약력
정수남 프로필 사진.jpg

1984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 저서로 소설집 『분실시대』, 『타성의 새』, 『길에서, 길을 보다』, 『시계탑이 있는 풍경』, 『앉지 못하는 새』, 『아직도 그대는 내사랑』, 『아주 이상한 가출기』, 『생명의 기원』, 장편소설 『행복아파트 사람들』과 시집 『병상일기』, 『너, 지금 어디 있니?』, 산문집 『시 한잔의 추억』(1, 2) 등 20여 권이 있다. 대한민국장애인문학상, 자유문학상, 한국소설문학상, 문학저널창작문학상, 전영택문학상, 경기도문학상, 이범선문학상, 시선문학상 등 수상. 현재 한국소설가협회 이사. 고양작가회의 고문. ‘정수남 문학 공작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