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8호
남·북·일이 교차하는 재일 우리말 문예지
김계자
일본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온 우리 민족은 해방 직후에 문학자의 모임을 조직하고 문예지를 발간하여 탈식민과 새로운 민족문학의 창출을 도모했다. 그런데 초기의 문예지는 아직 변변한 인쇄 기술이나 우리말1) 활자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수작업으로 발간된 경우도 있고, 현재 서지의 상세 사항을 확인하기 어렵거나 원문을 확인할 수 없는 경우도 많다. 이 글에서는 박경식과 송혜원, 우노다 쇼야(宇野田尚哉)의 선구적인 연구 성과2)에 의지하여 우리말 문예지 발간의 주요 흐름을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해방 직후에 제일성(第一聲)으로 발간된 우리말 문예지에 《고려문예(高麗文藝)》(1945년 11월-1946년 7월)가 있다. 동시대 뉴스와 시, 평론 등 지면 구성은 간단하지만, 일제 치하에서 억눌린 우리 문화에 대한 갈구가 해방과 함께 분출된 모습이 ‘문화’를 거듭해서 강조한 창간사에 잘 나타나 있다. 시 전문지 《조선시(朝鮮詩)》의 간행도 확인되는데, 원문은 2호(1946년 3월)만 확인 가능하다(朴慶植, 388-400쪽). 편집인 길원성의 시와 시론을 비롯하여 창작시를 주로 싣고, 소설과 희곡도 한 편씩 게재했다. 「편집후기」에 “詩를 써서 살고 詩를 써서 죽으려는 熱情과 希望만은 겨우 그 慘憺한 絶望의 絶頂까지 가슴속에서 북밫이며 사라지々않엇다”고 일제강점기의 참담한 시간을 견뎌 온 민족 시인의 정신에 찬가를 보내고 있다. 해방 공간의 혼란은 조국으로 귀환하지 못한 60만 재일 사회에 어려움을 가중했지만, 그럼에도 우리말 활자에 와락 덤벼들어 붙들고 놓지 않으려는 생생한 목소리가 전해지는 듯하다.
본격적인 우리말 문예지 발간은 ‘재일조선문학회(在日朝鮮文学会)’(1948년 1월-1959년 6월)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재일조선문학회’는 ‘재일본조선문학자회(在日本朝鮮文学者会)’(1947년 2월 창립)가 개편된 조직으로, ‘재일본조선문학회(在日本朝鮮文学会)’로 불리기도 했다. 기관지로 일본어판 《조선문예(朝鮮文芸)》(1947년 10월-1948년 11월)를 발간하다 우리말 기관지《조선문예》(1948년 3월)를 창간했다. 그러나 《조선문예》뿐만 아니라 뒤이어 창간된 《우리文学》(1948년 8월)과 《봉화》(1949년 6월)도 후속 발간으로는 이어지지 못한 채 끝나고 말았다.
이와 같이 우리말 문예지 발간이 순조롭지 못한 데에는 당시의 재일 사회에 대한 탄압이 있었다. 1945년 10월에 결성된 ‘재일본조선인연맹(在日本朝鮮人連盟, 이하 조련)’은 일본 각처에 조선학교를 세워 민족 교육을 실시하며 대중적 지지 기반을 넓혀갔는데, 일본에서 사회주의 운동이 퍼질 것을 염려한 연합국 최고사령부(General Head Quarters, GHQ)가 1948년 초에 조선학교 폐쇄령을 내렸고, 이에 항의하여 4월에 오사카(大阪)와 고베(神戸)를 거점으로 우리말을 지키기 위한 한신(阪神) 교육 투쟁이 거세게 일었다. 마침내 조선학교 폐쇄령은 철회되었지만, 1949년 9월에 조련이 강제 해산을 당했다. 이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우리말 신문 《해방신문(解放新聞)》이 정간 처분을 받았고, 우리말 작품의 인쇄와 유통도 어려워졌다.
1951년에 조련의 후속 단체로서 ‘재일조선통일민주전선(在日朝鮮統一民主戰線)’이 결성되었고, 우리말 기관지 《군중(群衆)》(1951년-1952년)이 간행되는 가운데 정체되었던 재일조선문학회의 재건이 이루어졌다. 1952년 말에는 문학, 미술, 음악, 무용, 연극, 영화의 전문 단체 여섯 개로 구성된 ‘재일조선문학예술가총회(在日朝鮮文學藝術家總會)’가 결성되는데, 재일조선문학회도 여기에 편입되어 활동을 이어갔다. 이윽고 1953년 7월에 한국전쟁 휴전협정이 조인되어 다소 안정된 분위기를 되찾고 우리말 문예지 발간이 이어지는데, 재일조선문학회의 기관지 《조선문학》(1-2호, 1954년 3월-1954년 5월)과 후속 잡지 《조선문예》(3-9호, 1956년 11월-1958년 3월)가 발간되었다. 편집인 남시우를 비롯하여 허남기와 김민의 글이 자주 실렸고, 시와 소설, 에세이 등의 창작과 함께 문학회 관련 회의 내용 보고도 실렸다. 재일문학연구자 송혜원은 재일조선문학회를 일본에서 지속적으로 활동한 최초의 민족 문학 단체로 자리매김했다.3)
재일조선문학회의 우리말 기관지 《조선문학》에는 서클 운동에 대한 내용이 눈에 띈다. 1950년대 일본에서는 서클 문화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4) 서클 운동은 아직 공산주의 사상으로 조직화되지 않은 소수의 아마추어들이 중심이 되어 정치 운동의 기반을 넓힐 목적으로 활동하는 문화 운동을 가리킨다. 각 지역에서 운동에 동참하는 사람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기관지 성격의 ‘서클지’에 담아 운동의 저변을 확대해 간 소비에트 문화 정책 운동이 일본 사회에 들어온 형태라고 할 수 있다. 같은 시기에 재일 사회에서도 서클 운동이 활발히 전개된 것을 《조선문학》 창간호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데, “현재 각처에서 조선문학의 써-클(동인 조직을 포함한)이 조직”되고 “재일조선인 문학 운동의 새로운 전기(轉機)”를 맞이했다고 평가하면서 일본 문학자들과의 공동 전선을 강화해야 한다고 적고 있다. 당시의 서클지가 재일 사회의 대중적인 논의의 장이었으며, 나아가 다른 지역의 문학자들과 교류하는 연대의 장이었음을 알수 있다.
《진달래》 8호(1954년 6월)
서클지의 가장 대표적인 예는 ‘오사카조선시인집단(大阪朝鮮詩人集団)’의 《진달래》(1953년 2월-1958년 10월)이다. 시 같은 것은 써본 적이 없는 재일 청년들의 문화 투쟁의 장이 열린 것이다. 《진달래》는 김시종 시인이 편집 겸 발행을 맡았고, 시 창작과 비평, 르포르타주 등의 내용을 실었다. 일본어 글이 다수이지만, 우리말 작품도 실려 있는 것으로 봐서 표현 언어에 특별히 제한을 두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오사카의 재일조선인들이 지역별로 회합을 갖고, 모임이 끝난 한밤중에 다시 모여 경찰의 눈을 피해 등사판 종이를 긁어 매호 발간해 간 이른바 풀뿌리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다. 오사카 외에도 전국 각지에서 재일 서클지가 발간되었는데, 《대동강(大同江)》(가와사키), 《거센 파도(荒波)》(후쿠오카), 《청구(青丘)》(나고야)가 남아 있고, 특히 우리말로 발간한 서클지에 《수림(樹林)》(도쿄), 《신맥(新脈)》(도쿄), 《포뿌라》(고베), 《산울림》(아이치) 등이 있다. 그 외에 《시노다야마(信太山)》(오사카)처럼 조선인과 일본인이 함께 서클 활동을 전개한 기록도 남아 있다. 《조선문학》 창간호의 「편집후기」에서 “그동안 무엇보다도 우리들을 채쭉질한 것은 지역의 써-클동무들이다. 동무들이 밤낮으로 애써 키워내는 써-클기관지를 손에 들 때마다 우리는 몇 배로 힘을 돋구었다”며, “무엇보담도 써-클동무들의 좋은 벗으로 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고 다짐하는 내용이 있는데, 각 지역의 서클 운동을 연결하는 거점으로서 기능한 재일조선문학회의 취지가 나타나 있다.
《조선문학》의 제명을 바꿔 후속 발간된 《조선문예》에서 특기할 만한 것은 5호(1957년 1월)에 특집으로 실은 ‘오무라조선문학회’의 작품이다. ‘오무라조선문학회’는 일본 규슈(九州)의 나가사키(長崎) 현에 있는 오무라수용소(大村収容所)에 수용된 사람들을 중심으로 활동한 서클 운동 단체인데, 수용소 내에서 주로 북한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주도하고 도쿄의 서클 조직과 연계하여 기관지 《오무라문학(大村文学)》(1957년 7월)을 발간했다. 그런데 《오무라문학》은 일본어로 발간된 문예지이고 필진에도 일본인이 섞여 있는 반면에, 《조선문예》에 특집으로 실린 작품(시 4편, 수필 2편)은 모두 재일조선인이 우리말로 창작한 작품이다. 그중에서 정헌성의 시 「오무라 수용소의 하늘」은 두 잡지에 모두 실렸는데, 발간 시기가 《조선문예》(5호)가 《오무라문학》(창간호)보다 빨랐기 때문에 정헌성이 먼저 우리말로 쓴 시를 《오무라문학》이 창간될 때 일본어로 번역하여 전재(轉載)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문예》의 특집에는 오무라조선문학회가 성립된 초기의 정황과 《오무라문학》 발간에 이르는 과정이 언급되어 있다.
정헌성의 시 「오무라 수용소의 하늘」에는 “그곳은 일제와 피어린 싸움의 마당/ 탄압과 박해위해/ 오각별 공화국 깃발 내세우고/ 우리를 석방하라/ 자유를 달라/ 울분에 끓은/ 불꽃같은 넋시가/ 밤 하늘에도/ 별처럼 치솟는 곳”으로 수용소의 인권 탄압에 저항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오무라수용소는 일제강점기 이래 일본 사회에 저항 운동을 펼친 사상범이나, 제주 4·3 항쟁 혹은 한국전쟁 때 밀입국한 사람들을 강제 송환하기 위한 임시 수용소였는데, 수용자를 범죄자로 처우하고 탄압하여 인권 문제가 논란이 된 곳으로 악명이 높다. 정병수는 수필 「단결된 우리의 힘」에서 수용소 동포들이 벌인 운동을 “구체적 행동으로 실천하는 귀한 마당”이며 “남북의 평화적 통일을 달성하기 위한 민족적 단합 사업”이라고 평가했다. 김윤호의 「大村 수용소 동지들과 나」에도 수용소 내에서의 민족 교육 사업과 문학 운동에 힘쓰고자 하는 서클 활동이 그려져 있는데, 기관지 《오무라문학》 창간을 탄압하는 당국에 맞서 “끝까지 싸워 간행을 쟁취하리라”는 다짐도 보인다.
《조선문예》 7호(1957년, 발간 월 불명)와 8호(1957년 11월)에는 재일 문학의 창작 방법과 표현 언어를 둘러싼 논쟁과 토론 내용이 실렸는데, 논란의 핵심에 김시종의 문학이 있었다. 김시종은 일제강점기에 식민 교육을 받고 자란 일본어 세대로, 17세 때 맞이한 해방은 지금껏 일본어로 형성해 온 인식의 질서가 모조리 바뀌는 경험이었다. 이후 우리말을 다시 배우고 사회주의 운동에도 관심을 기울였는데, 해방 공간의 혼란 속에서 제주 4·3 항쟁에 관련되어 당국의 탄압을 피해 일본으로 밀항해 오사카에 살았다. 이러한 김시종이 주축이 되어 오사카에서 대중적 표현 기반을 획득한 서클지 《진달래》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1955년에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在日本朝鮮人総連合会, 이하 조총련)’가 결성되었고 재일조선인은 조선노동당의 지도를 직접 받는 상황으로 바뀌었다. 그에 따라 문학 창작에서 내용적으로는 북한의 교조적인 사상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게 되었고, 표현 언어도 ‘조선어’로 제한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주로 일본어로 문학 활동을 하고 있던 김시종에게 비난이 쏟아진 것이다.
《조선문예》 7호에서 허남기는 「김시종 동무의 일본문 시집 『지평선』에 관련하여」라는 글을 통해 “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서 있는 발의 위치고 각도에 있다”고 하면서, “국어가 아닌 다른 민족의 언어로써 할 때는 일각이라도 잊어서는 안 될 문제”라며 일본어로 창작하는 김시종을 비판했다. 김시종의 첫 시집 『지평선(地平線)』(1955)이 시기적으로 조총련이 결성된 무렵에 나온 데다가, 당시 주목받고 있던 오사카 조선 시인 집단의 서클지 《진달래》의 중심에 김시종이 있었기 때문에 비판이 쏠린 것이다. 허남기에 이어 홍윤표도 「누가 詩를 쓰는가―한 지역 써-클의 문제점에 대하여」에서 《진달래》 소속 회원 대부분이 일본에서 나고 자란 20대 청년들이어서 “일본적 요소가 너무도 많은 세대들”이라고 지적하고, “시의 발상 그 자체가 국어가 안이라 일본어로서바께 끄집어 내지 못하는 것은 국어를 모른다는 문제 뿐만이 안일듯하다”며, “국어 습득과 전통성의 계승”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조선문예》 8호에는 재일 문학의 표현 언어를 둘러싸고 재일조선문학회 회원들이 토론한 내용이 실렸다. 먼저 김시종이 자신에게 가해진 비판에 대하여 “일본어로 쓰는 작품들의 경향의 일면성만을 지적하고 있다”고 반박하자, 남시우는 일면적으로 평가한 것은 시정하겠으나 일본어로 창작하는 사람들이 조선어 작품에 대하여 좋지 못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며 응수했다. 일본어로 쓰는 것과 조선어로 쓰는 것이 서로 대치되고 있는 양상인데, 표현 언어가 작품의 내용과 창작자의 사상으로 연결되어 날카로운 설전이 오갔다. 김한석은 《진달래》에 실린 작품들에 대하여 “재일 동포들의 생활 모습, 또는 조국에 대한 감정을 옳바로 그려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류랑민적인 감정으로 페시미쓰틱한 작품들을 창작하는 데 그치고 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우리 문학 집단과 조직과의 옳바른 련계를 파괴하는 원인을 초래한다”고 조총련의 방침을 따르지 않는 일본어 창작을 비판했다.
그런데 내면으로 침잠하는 서정성을 부정하고 집단적인 결속과 연대를 다져야 한다는 논조는 기실 《진달래》의 취지이기도 한데, 일본어로 쓰면 감상적이고 조선어로 쓰면 주체적이라는 식의 이분법적 논의로 전화된 데에는 당시의 시대 상황이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조국이 남과 북으로 분단되고 재일 사회도 민단과 조총련으로 나뉘어 갈등이 있었는데, 한국전쟁의 포화가 멈춘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서 조총련이 결성되었고, 북한의 주체사상과 ‘조선어’ 글쓰기가 직결되는 조총련의 방침에 따라 일본어로 글을 쓰는 행위는 마치 조국을 배반하는 친일로 간주된 경향이 있다. 이러한 조총련의 경직된 사고가 오히려 우리말 글쓰기를 경원시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김시종은 “작품을 쓰기 이전에 튼튼한 사상성을 가져야 한다는데 나는 반대한다”며 사회주의 사실주의에 대한 인식의 문제를 지적했다. 그리고 “「진달래」의 시인들은 처음부터 무슨 고상한 목표를 앞에 내걸고 시를 쓰기 시작한 것은 아니다. 자기에게 더욱 충실하며 그 앞에 제기되는 고민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쓰기 시작했다. 그런 점에서 재일조선 청년들이 놓여 있는 위치를 더욱 명백히 할 필요가 있으며 그 평가와 방향성을 밝혀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조총련의 경직된 사상과 이념보다는 재일 청년들의 실존적 현실과 고민을 문학에 담아야 한다는 김시종의 생각이 잘 나타나 있다.
재일 문학의 표현 언어 논란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 잡지에 《불씨》(1957년 1월, 8월, 11월)가 있다. 3호 발간에 그친 단명한 잡지이지만, 《조선문예》(8호) 지상에서 재일 문학의 표현 언어 토론회가 펼쳐졌던 바로 그때 ‘조선어’ 쓰기 방침에 저항이라도 하듯 2호까지 ‘조선어’로 발간하던 것을 3호에서는 일본어판으로 발행한 것은 상징적이다.
《불씨》 2호(1957년 8월)
《불씨》 3호의 「편집노트」를 보면 일본어판 발간에 기탄없이 비판해 달라는 당부와 함께, 재일 문학 《불씨》 2호(1957년 8월) 중에서도 특히 시 분야에서 ‘재일’의 역사적이고 문학적인 의미 내용을 깊이 있게 파고드는 새로운 기운이 나타나고 있다고 말했다. 즉, 안일한 노스탤지어의 서정이나 관념적인 슬로건을 타파하려는 움직임이 있고, 경멸과 조소의 대상이었던 ‘반쪽발이(半日本人)’ 재일 2세의 문제에 진지하게 임하는 모습이 보인다는 설명이다. 조국 지향의 1세대와는 달리, 일본 정주의 현실 속에서 정체성 문제가 화두가 되고 있는 재일 2세대를 주목한 것이다. 서클지로 시작한 《진달래》가 점차 소수 문예 동인지 성격으로 변모한 것도 이러한 재일 사회의 변화를 말해 준다. ‘재일’이라는 말이 본래 전후 일본 사회에서 집단으로 소환된 개념이고, 일본 사회에 대한 대항적 의미를 생래적으로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재일의 언어가 반드시 ‘조선어’로 ‘조국’을 대리해야 하는 것은 아닐 터이다. 《불씨》 3호의 일본어판은 ‘조선어’ 대신에 일본어를 선택했다는 양자택일의 접근보다는, ‘조선어’의 틀 속에 한정된 동시대의 경직된 사고를 벗어나려는 재일 사회의 주체적인 의미 표명으로 봐야 할 것이다.
1960년대 재일 사회의 조직 개편과 문예지 발간의 중심 이슈는 재일조선인 북한 ‘귀국 사업(The Repatriation Project)’이었다. 귀국 사업은 1959년 12월 14일에 일본 니가타(新潟)에서 북한의 청진을 향해 첫 배가 출항하여 1967년까지 88,467명의 재일조선인이 북한으로 건너갔고, 3년여 기간 중단되었다가 1971년에 재개되어 1984년까지 약 25년간 총 93,339명이 북한으로 이주한 일을 가리킨다. 한국에서는 ‘북송’으로 알려져 있는데, 대다수가 한반도의 남쪽이 고향인 재일조선인이 북으로 이주한 것이기 때문에 엄밀히 말해 ‘귀국’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여기에서는 당시 국제사회의 문서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던 ‘귀국(repatriation)’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결국 이 사업으로 재일 사회 구성원의 약 15퍼센트가 북으로 이주했고, 여기에는 일본 국적을 가진 아내나 자식들도 6천여 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귀국 사업 당시의 기록이 재일 문예지에 남아 있다.
해방 직후부터 1950년대까지 재일 문학의 중심에 있던 ‘재일조선문학회’는 1959년 6월에 ‘재일본조선문학예술가동맹(在日本朝鮮文学芸術家同盟, 이하 문예동)’으로 개편되었는데, 문예동은 조총련 산하의 다양한 문화 예술 단체가 연합한 조직이다. 우리말 기관지로 《문학예술》과 《조선문예》를 발간했는데, 《문학예술》은 중앙 기관지이고 《조선문예》는 가나가와(神奈川) 지부에서 발행한 것이다. 귀국 사업이 시작되었을 때 사업에 대한 지지와 독려를 위해 귀국을 둘러싼 재일조선인의 동시대적 상황과 목소리를 생생하게 담아냈다. 특히 《문학예술》 창간호의 목차에는 귀국선의 모습을 삽화로 그려 넣어 귀국 사업의 고양된 분위기를 표현했다.
《문학예술》 창간호(1960년 1월) 표지와 목차
위의 《문학예술》 창간호를 보면, 첫 페이지에 조총련 초대 의장 한덕수의 「공화국 대표 환영가」를 싣고, 이어서 「권두언」에 “일제의 가혹한 착취 밑에 오랜 세월을 이국 땅에서 신음하던 재일 동포들의 력사상에 새로운 페지가 시작된다”고 적었다. 그리고 「편집후기」(김민)에 “배는 줄곳 조국에로 향하고 동포들은 더욱 조국을 향하여 가슴을 펴고 일어선다. 오늘의 현실은 고생스러우나 우리의 앞길은 영광에 찼다”, “귀국 운동이 더욱 전진 될 새해에 우리 「문학 예술」도 더욱 발전 시켜야 할것이다”고 흥분된 어조로 귀국의 감격을 전했다.
「귀국시초」 면에 ‘귀국’의 감격을 노래한 시도 다수 실렸는데, 허남기는 「조선과 일본과의 사이의 바다」에서 조국 상실자의 아픔과 귀국의 감격을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
거기 놓여있는 것은/ 현해탄/ 거기 놓여있는 것은/ 동해 물결/ 거기 놓여있는 것은/ 조그마한 바다에 불과하건만// 그러나 우리와/ 조국과의 사이는/ 그러나 이 현실의 일본과/ 조선과의 사이는// 너무나 멀다/ 너무나 넓다// 조국이여 우리에겐 당신의 목소리가 들리고/ 우리에겐 당신의 가슴의 고동까지 뚜렷히 울려오는데// (……) // 지난날 우리 가슴에서 조국을 빼앗고/ 지난날 우리 손아귀서 논밭과 고향을 빼앗고/ 사람으로서의 일체의 권리마저 강탈해간 그놈들이/ 아직 죽지 않고 살아 남아// 조선과 일본과의 사이의 바다를/ 한없이 멀게만 할랴고들고/ 리를 언제까지나/ 조국 상실자의 위치에 얽어매 둘랴고 발광한다// 조국이여 우리가 웨치는 소리가 당신의 가슴을 울리고/ 당신이 부르는 말씀이 이렇게도 가깝게 들리는데// (……)
”
허남기의 시는 일제강점기 이래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일본에 사는 재일조선인을 “조국 상실자”라고 하면서 조국으로 돌아가는 재일조선인의 격정적인 감정을 노래했다. 그런데 리수웅의 소설 「아버지와 아들」을 보면, 귀국 문제를 놓고 공화국으로 빨리 돌아가자는 아들과 조국이 통일되면 돌아가자는 아버지의 의견이 엇갈려 갈등을 빚고 있는 상황이 그려진다. 결국 조국의 통일을 위해서라도 귀국을 서둘러야 한다는 아들의 말에 아버지가 수긍하며 귀국을 결심하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나지만, 분단된 조국의 현실과 전쟁에 대한 경계심을 드러내는 아버지의 발언을 통해 ‘귀국’을 둘러싼 재일조선인의 복잡한 속내를 엿볼 수 있다. 일제강점기에 한반도의 남쪽에서 일본으로 건너와 분단과 전쟁을 겪은 재일 1세대가 북으로의 귀국을 앞두고 분단된 조국을 바라보는 심경이 투영되어 있다.
한편, 김민의 「바닷길」에는 당면한 귀국 사업이 또 하나의 ‘귀국’에 대한 기억을 불러내고 있는 것이 흥미롭다. 김민의 소설은 징용으로 일본에 강제 동원된 조선인을 태운 일본 해군 수송선 우키시마마루(浮島丸)호가 1945년 8월 24일에 아오모리(青森) 현을 출발해 부산으로 향하는 도중에 교토 마이즈루(舞鶴)항에 정박했을 때 폭발하여 침몰한 사건을 그리고 있다. 폭발의 원인이나 피해자 파악 등 지금까지도 진상이 규명되지 않은 사건을 언급하며 희생된 동포의 넋을 기리고 있다. 북한 귀국 사업이 시작되었을 때 나온 이 소설은 해방 직후 한반도의 남쪽으로 귀국했던 기억을 불러내어 1960년대에 한반도의 북쪽으로 귀국 아닌 귀국을 해야 하는 재일조선인에게 ‘귀국’이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 보게 한다. 재일조선인의 귀국에 대한 열망 속에는 해방 이후에도 이어진 일본에서의 차별받고 힘든 삶을 청산하려는 기대와 함께 분단된 조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현실적인 문제, 그리고 해방 직후 심해(深海)로 유실된 귀국의 기억이 중첩되어 재일조선인의 디아스포라적 삶의 초상이 담겨 있다.
안타깝게도 귀국 사업 초반에 일본의 미디어까지 합세하여 ‘지상의 낙원’으로 선전했던 북한의 허상이 귀국자를 통해 조금씩 일본에 알려지면서 귀국자 수는 급감했는데, 여기에는 「한일협정」(1965) 체결 전후의 한일 관계의 변화와 고도 경제성장을 구가하던 일본 국내 사정의 변화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이 한일·북일 간의 변화에 영향을 받아 1960년대 재일 우리말 문예지 발간에도 달라진 양상이 나타났다. 조총련 산하의 문예동 오사카 지부 기관지 《문예활동》(1960년 7월)과 도쿄 본부 기관지 《군중문예》(1964년 5월)가 창간되는 한편, 조총련과 관련 없이 한국과 민단에 연계된 우리말 종합 문예지 《한양(漢陽)》(1962년 3월-1984년 3월)이 발간되었다. 한반도의 남북 분단이 재일 사회의 분단으로 이어진 형국이지만, 관점을 달리하면 어느 하나의 조직과 방침의 제한된 틀에서 벗어나 우리말에 좀 더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는 자장이 만들어진 측면도 있다.
이상과 같이 해방 직후부터 1960년대 초까지의 우리말 문예지가 재일 사회의 치열한 삶의 투쟁을 기록해 왔다고 한다면, 이후의 문예지는 비교적 안정된 분위기에서 재일 사회의 현안과 다양한 지향점을 보여 주고 있다. 식민과 냉전의 시대를 지나며 한반도의 남과 북, 일본을 연결해 온 재일 사회의 기록과 기억을 통해 남·북·일(南·北·日)을 아우르는 포괄적인 층위에서 분단과 이산을 넘어 교류와 소통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이 중요하다.
1) 재일 사회는 한반도의 남과 북, 일본이 교차하는 공간이기 때문에 ‘한글’ 대신에 세 지역을 아우르는 통칭으로 ‘우리말’을 사용한다. 단, 동시대의 문헌 인용이나 문맥을 반영하는 경우에는 ‘조선어’나 ‘재일조선인’ 등 ‘조선’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2) 朴慶植 編, 『在日朝鮮人関係資料集成〈戦後編〉: 朝鮮人刊行新聞・雑誌(3)』第10卷, 不二出版, 2001; 宋恵媛, 『「在日朝鮮人文学史」のために: 声なき声のポリフォニー』, 岩波書店, 2014; 宇野田尚哉 編, 『在日朝鮮文学会関係資料 一九四五~六〇』全3卷, 緑蔭書房, 2018.
3) 宋恵媛, 「解説」, 宇野田尚哉 編((1卷), 2018), ii쪽.
4) 宇野田尚哉 外, 「サークルの時代」を読む─戦後文化運動への招待─, 影書房, 2016.
한신대학교 평화교양대학 부교수. 고려대학교 일어일문학과에서 석사를 마치고 일본 도쿄대학 인문사회계연구과에서 일본문학으로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일제강점기부터 해방을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일 문학이 관련된 양상을 통시적으로 살펴보고, 한국인의 일본어 문학이 전개된 전체상을 밝히는 연구를 하고 있다. 주요 저서에 『일본에 뿌리내린 한국인의 문학』(역락, 2020)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