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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스포라 문학의 안과 밖: 돌아보고, 내다보며

2024. 12. 1. 9호

표지에세이 「비행」 60cmx50cm, 캔버스에 유채,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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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스포라 한글 문예지의 어제와 오늘

2024. 9. 1. 8호

표지에세이 「꽃이 필 때면 - 가을」 50cmx40cm, 장지에 채색화,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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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 디아스포라의 존엄성과 정체성

2024. 6. 1. 7호

트레이시 임 作 「꽃이 필 때면」 140cmx120cmx2cm, 장지에 채색화,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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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스포라 문학과 장소의 상상력

2024. 3. 1. 6호

트레이시 임 作 「꽃이 필 때면」 140cmx120cmx2cm, 장지에 채색화,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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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의 쟁점과 디아스포라 문학

2023. 12. 1. 5호

트레이시 임 作 「꽃이 필 때면」 140cmx120cmx2cm, 장지에 채색화,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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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스포라 문학의 소통과 연대

2023. 9. 1. 4호

박미하일 作 「가을」 70х60cm 캔버스에 유채,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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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화시대의 디아스포라 문학

2023. 6. 1. 3호

박미하일 作 「여름」 70х60cm 캔버스에 유채,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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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스포라 한글 문학의 현재

2023. 3. 1. 2호

박미하일 作 「새」 70х60cm 캔버스에 유채,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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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스포라 한글 문학의 미래

2022. 11. 14. 창간호

박미하일 作 「겨울」 53х45cm 캔버스에 유채,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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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디아스포라와 세계문학: 그 '파괴적 성격'을 중심으로

김남일 한국

ⓒ 한국문학번역원 1. 들어가며: 한 팔레스타인 시인의 죽음 1950년생인 자카리아 무함마드는 팔레스타인 문인으로는 갓산 카나파니, 마흐무드 다르위시, 파드와 투칸 등에 이어 제2세대에 속한다. 그는 오슬로 협정(1993)이 체결된 직후 국경의 다리를 건너 마침내 요르단강 서안의 고향에 돌아올 수 있었다. 1)반백의 머리로. 무려 25년 만이었다. 따지고 보면 어처구니가 없었다. 처음 그 다리를 건널 때 그는 행복했다. 단 이스라엘 당국자는 2년 동안은 돌아올 수 없는데, 2년이 넘어도 안 된다고 경고했다. 무슨 말인가. 정확히 2년이라는 기간에 맞춰 돌아오라는 것. 문제는 그 2년 세월에도 그가 여전히 가난한 유학생이라는 데 있었다. 그는 돌아올 차표를 살 돈이 없었다. 어찌어찌 돈을 구해 다리 앞에 섰을 때는 시간이 지났다. 단 이틀. 그때부터 그는 꿈 많은 유학생에서 돌아올 기약 없는 망명자 신세로 전락했다. 그의 아내는 예루살렘 출신이다. 1967년 6일 전쟁 당시 이스라엘이 동예루살렘을 점령했을 때, 그녀는 마침 아버지와 함께 쿠웨이트에 있었다. 이스라엘은 그때 예루살렘에 없던 사람들은 시민으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일방적으로 선포했다. 아내의 가문이 600년간 그곳에 살며 내린 뿌리는 하루아침에 잘려 나갔다. 그때부터 망명지를 떠돌아야 했다. 나중에 요르단강 서안에 들어와 살게 되었지만, 그때도 예루살렘 방문은 허용되지 않았다. 친척이 죽었을 때 신청서를 내자 ‘당국’은 크게 선심을 썼다. 그녀는 단 이틀간이지만 예루살렘에 머물며 문상을 할 수 있었다. 이렇듯 경계를 넘는 일은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일상이 되었다. 버겁고, 끔찍하고, 수치스럽고,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 일상. 자카리아가 한국에 처음 온 것은 2004년 초여름으로, 민족문학작가회의 주최 제10회 세계작가와의 대화 겸 제1회 아시아청년작가 워크숍에 참가하기 위해서였다. 그때 나는 국제위원회 위원장이었다. 공항에서 그를 기다리는데, 꽤 시간이 지났는데도 도무지 나오지 않았다. 혹시나 싶어서 ‘높은 곳’에 줄을 댈 수 있는 후배를 통해 급히 좀 알아보라고 했다. 그러자 얼마 후 그가 겨우 게이트를 빠져나왔다. 그의 설명을 들었다. 세상에, 그는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의 여권을 가지고 ‘감히’ 대한민국 땅에 입국을 시도한 것이었다. 공항의 관리들에게 잘못은 없었다. 그들은 난생처음 보는 여권 때문에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을 터. 마침내 한국의 동료 작가들을 만나는 기자 회견장.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우리 대표가 건넨 인사에 자카리아가 소감을 밝혔다. “여기 오는 데 스물다섯 시간도 넘게 걸렸고 공항에서는 여권 때문에 또 시간을 꽤 허비했지만, 솔직히 힘들지는 않았습니다. 내가 사는 라말라에서 어머니한테 가는 것보다는요. 거긴 엎어지면 코 닿을 데지만 높이 9미터짜리 장벽, 그건 어찌할 수가 없거든요.” 말로만 듣던 팔레스타인의 현실을 실감할 수 있었던 순간이었다. 흔히 ‘이산(離散)’과 같은 뜻으로 쓰이는 ‘디아스포라’는 주로 바빌론 유수(幽囚)와 이후 로마 제국에 의해 팔레스타인을 떠나 세계 도처로 뿔뿔이 흩어졌던 유대인들에게 해당하던, 그래서 그들의 간난고초를 대신하던 용어였다. 지구화 시대인 오늘날에는 그 뜻이 확장되어, 이주 노동자를 비롯해 경제적 이익을 위해 국경을 넘는 이들까지 두루 포함하는 개념이 되었다. 하지만 디아스포라의 가장 고전적인 전형은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 용어의 출전과 관련 깊은 유대인들이 세운 근대 이스라엘 국가에 의해 쫓겨나거나 자기 땅에서 유배당한 팔레스타인인들이다. 안타깝게도 시인 자카리아 무함마드는 더 이상 우리 곁에 있지 않다. 지난해 늦여름, 갑자기 타계 소식이 날아왔던 것이다. “ 나의 개 키위가 죽기 한 달 전에 내게 물었다: “인간이 존재하는 이유는 무언가, 자카리아?” 나는 답했다: “잘 모르겠네. 그래도 존재의 조건에 대해서는 내가 말해 줄 수 있네. 인간은 눈물을 흘려서는 안 된다네. 눈물의 꼭지는 항상 잠겨 있어야 하네. 안에 차오르는 눈물을 흘려보내려면, 인간은 댓가지의 일곱 구멍에 손가락을 올려놓아야 하네. 그렇게, 댓가지가 그 대신 울 거라네. 시가 그 사람 대신 울 거라네.” 그렇다네, 키위, 인간의 손은 일곱 구멍 뚫린 댓가지 위에 있고, 그의 영혼은 쇠 꼭지처럼 잠겨 있다네. 2) ” 라말라에 있는 그의 집에 가서 봤던 개 이름이 키위였던가.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뒤늦게 안, 키위의 죽음에도 애도를 표한다. 2. 다와다 요코의 자발적 이산 유엔난민기구(United Nations High Commissioner for Refugees, UNHCR)의 발표(2024년 6월 13일)에 따르면, 지난해 난민이 1억 2,000만 명으로 전해에 비해 무려 600만 명이 늘었다고 한다. 가자 사태로 인해 추방당한 이들도 거기 포함됐을 것이다. 시리아 내전, 수단 내전, 우크라이나 전쟁 등으로 인해 발생한 ‘고전적’ 난민들에, 중남미 도처에서 미국만 바라고 무작정 죽음의 행진을 하는 이들, 미얀마의 군사 독재를 피해 밀림으로 숨어든 이들, 그리고 오늘도 여전히 쪽배에 몸을 싣고 인도양을 헤매고 있을 로힝야족 등등……. 이들에게는 ‘디아스포라’라는 말조차 사치로 여겨질 만큼 상황이 끔찍하다. 그런데 모든 이산이 다 슬프거나 참혹한 것만은 아니다. 다와다 요코의 경우, 1979년 스무 살도 채 안 된 그녀는 대학 졸업식에도 참가하지 않은 채 무작정 일본을 떠난다. 첫 기착지는 인도였고, 이후 1982년 스물두 살이 되었을 때 이번에는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 몸을 싣는다. 한 달여에 걸친 그 긴 기차 여행의 경험은 전율에 가까울 정도의 감동을 안겨 주었고, 그녀는 마침내 독일의 함부르크에 새로운 거처를 정했다. 그때 이후 그녀의 가장 큰 관심사는 언어였다. 하루빨리 독일어를 잘하게 되기를 바란 게 아니었다. 그녀는 무엇인가 두 개의 언어 사이에 존재하는 ‘도랑’과도 같은 것을 발견하여 그 안에서 살아 보고 싶었다. 3) 막연히 그렇게 생각했다. 그 첫 번째 도랑이 1987년 일본어와 독일어로 된 시집 당신이 있는 곳만 아무것도 없다(あなたのいるところだけ何もない, Nur da wo du bist da ist nichts) 와 1989년 출간한 첫 독일어 소설집 목욕탕(Das Bad) 이었다. 그때부터 독일에서 먼저 주목을 받았는데, 머잖아 일본에서도 군조신인문학상(1991)을 수상하고, 이어 아쿠타가와상(1993)까지 수상하며 일약 일본 문학계의 총아로 대두한다. 이후에도 그녀의 행보는 거침없었으니, 이제 우리는 독일어 작품집 20여 권과 그만큼의 일본어 작품집을 동시에 출간한, 실로 드문 이력의 한 작가를 마주하게 된다. 그 많은 저작 중에서 세 작품만은 작가가 직접 독일어와 일본어로 같이 집필했는데, 그 경우에도 독일어로 먼저 글을 쓰고 그것을 다시 작가가 직접 일본어로 옮겼다 한다. 4) 물론 독일은 낯선 땅이었다. 낯선 땅에서 낯선 사람들을 만나고 낯선 상황에 부닥치는 일이 그녀의 일상이 된다. 그러는 사이 ‘고국’은 점점 멀어진다. 실은 그녀 스스로 원했던 게 모어(母語) 밖으로 뛰쳐나가는 그런 ‘엑소포니(Exophony, エクソフォニ)’의 상황이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2011년 3월 11일 이후 더 이상 ‘초심’만 즐길 처지가 아니게 된다. 멀리 떨어져 있지만 마음만 먹으면 언제나 돌아갈 수 있던 고국이 이제는 없다. 가령 「불사의 섬」(2011) 5)에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쓰나미 이후 일본은 혼란에 휩싸였고, 2015년에는 Z그룹이라고 자처하는 일당들에 의해 완전히 민영화되었다. 그리고 2017년 연이어 발생한 태평양지진으로 인해 네 개의 원전이 더 폭발하자 일본은 이제 아무도 가지 않는 절해고도가 되었다. 민영화된 정부도 ‘쇄국’을 최고의 가치로 내세웠다. 그러는 사이 피폭된 노인들은 오히려 건강해지고, 젊은이들은 거꾸로 무기력해졌다. 노인들은 백 살이 넘도록 죽지 못하고 살아남아서, 일어서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고 먹지도 못하는 젊은 세대를 돌봐 준다. 열도 밖에 있는 ‘나’ 역시 곤란하긴 마찬가지다. 해외여행을 할 때마다 일일이 일본에 가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해야 하니까. “ ‘일본’이라는 말을 들으면 2011년에는 동정을 받았지만 2017년 이후에는 차별받게 되었다. 유럽 공동체의 패스포트를 받으면 국경을 넘을 때마다 일본을 떠올리지 않아도 좋을지 몰랐지만 왠지 신청할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이렇게 되어 버린 탓에 오히려 이 패스포트에 집착하고 있는 자신이 희한하기도 했다. 나는 빨간 표지에 핀 국화를 원망스럽게 노려보았다. 그 순간, 국화 꽃잎이 한 장 많아져 열일곱 장 있는 듯이 보여 오싹했지만 패스포트 표지에 핀 꽃의 유전자에 변화가 일어날 리는 없다.6) ” 자발적이든 아니든 디아스포라는 전 세계적인 추세가 되었다. 세계 각 나라와 민족, 또 각 민족어의 문학사 역시 이런 세태를 반영한다. 어떤 이유로든 모어의 자기장을 떠나 새로운 삶을 살게 된 이들이 구축하는 문학을 결코 홀홀하게 대할 수 없다. 그럼에도 그들의 문학을 모국의 문학사에서 받아들일지 말지 하는 것부터 시작해 실로 많은 문제와 의구심 또한 여전하다. 가령 『저지대』를 쓴 인도 이민자 출신의 미국 작가 줌파 라히리의 경우, 그녀는 ‘이민자 문학’이라는 범주 자체를 아예 거부한다. 만일 그런 게 있다면 ‘거주자 문학’도 있느냐고 반문하면서. 그렇듯 당당하게 말하는 줌파 라히리의 부모는 벵골인이었다. 그들은 미국에 건너가서도 딸에게 벵골어만 쓰도록 강요했다. 그녀는 유치원 때부터 영어를 배우기 시작해서 나중에는 퓰리처상까지 받았지만, 놀랍게도 이번에는 그녀 스스로 전혀 미지의 언어 속으로 횡단/모험을 감행한다. 그녀는 언젠가 피렌체를 방문했을 때 호텔에서, 길에서, 그리고 상점과 레스토랑에서 들은 이탈리아어의 아름다움에 홀딱 빠져 버린다. 마치 번개라도 맞은 것처럼! 7) “ 이탈리아어는 내가 관계를 맺어야 하는 언어 같았다. 어느 날 우연히 만났는데 금방 어떤 인연, 애정이 느껴지는 사람. 아직 알아야 할 게 많은데도 오래전부터 알아 온 것 같은 느낌. 이탈리아어를 배우지 않으면 날 채울 수 없고 내가 완성되지 않으리라는 걸 알았다. 내 안 빈 공간, 그곳에 이탈리아어를 편히 자리 잡게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8) ” 그로부터 그 ‘무분별하고도 말도 안 되는 열망’을 위해 20년간 꾸준히 이탈리아어를 공부하는데, 스스로 이탈리아어로 글도 쓰겠노라 다짐한다. 그 다짐은 마침내 현실이 되어 우리는 이제 이탈리아어로 쓴 작품까지 마주하게 된 것이다. 대체 그녀는 어째서 모어인 벵골어보다 익숙해진 영어를 놔두고 갑자기 이탈리아어로 글을 썼을까. 이탈리아어로 글을 쓸 때 솔직히 그녀는 자신을 믿지 못했다. 한 문장 한 문장 이어 갈 때마다 구속받고 제한받는 느낌이었다. 그런데도 이탈리아어로 글을 쓸 때 그녀는 더 자유롭다고 느꼈다. 어째서? 그건 “아마 이탈리아어에서는 불완전할 자유를 얻었기 때문”9)이었다. 그녀는 창작의 관점에서 봤을 때 안정감만큼 위험한 것은 없노라 말한다. 솔직히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 봤자 그녀는 다만 이탈리아어의 언저리만 맴돌 뿐 훨씬 더 안쪽으로 들어가 언어의 심장부에는 결코 도달할 수 없다. 그럼에도 왜? 그녀는 바로 그런 ‘거리’가 저로 하여금 무모한 도전을 하게 만든다고 말하는 것이다. “ 나와 이탈리아어 사이의 거리를 채울 수 있다면 난 더는 이 언어로 글을 쓰지 않을 것이다. 10) ” 다와다 요코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그녀는 자기가 그 속에서 살고 싶다고 말한, 무언가 두 개 언어 사이에 존재하는 ‘도랑’과도 같은 것을 좀 더 화려하게 표현해서 두 언어 사이의 ‘시적 계곡’이라고 말한다. 11) 그런 그녀에게 ‘떠돌이’라고 말하는 것은 더 이상 비난이 못 된다. 그녀는 ‘정처(定處)’가 아니라 “어디를 가도 깊이 잠들 수 있는 두꺼운 눈꺼풀, 여러 가지 맛을 알 수 있는 혀, 어디를 가도 주의 깊게 볼 수 있는 복잡한 눈을 지니는 것이 중요하다”12)고 말하는 것이다. 3. 디아스포라 문학의 파괴적인 성격 그녀의 이런 모험이 어떤 결과로 나타날까. 단편 「끝도 없이 달리는」13) 역시 앞서 언급한 「불사의 섬」처럼 3·11 이후를 다루는 일종의 재난 소설이다. 꽃꽂이를 배우러 다니던 미망인 아즈마다 이치코는 젊은 여성 다바다 토오코와 사랑에 빠진다. 그런데 두 사람이 커피를 마시려 할 때 커다란 지진이 왔고, 둘은 피난소로 가야 했다. 거기서 난민 생활을 하지만 둘은 행복했다. 하지만 어느 날 토오코의 가족이 그녀를 찾아오면서 그 행복은 일순간에 깨져 버리고 만다. 이 소설의 특징은 내용보다도 아주 정교한 ‘일본어 유희’에 있다. 가령 일본어 한자를 분절하여 새롭게 쓰는 것도 즐거운 놀이가 된다. “ 오염된 환경에서도 제초제 사용이 금지된 이래, 잡초(雜草)가 자라는 것은 빨랐고(早), 송곳니(牙) 형태의 날카로운 싹(芽)이 벼에 달라붙어 물어 댔다. 아무리 인간이 묘목(苗)을 공들여 키우더라도 논(田)은 마침내 잡초의 바다로 덮이고 말 것이다. 14) 텐쨩은 전혀(全然) 익센트릭한 점이 없는 여성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전혀(全然)의 연(然)에 불이 붙어 타기(燃) 시작했고, 혀가 화염(炎)이 되었다. 15) ” 일본을 떠나 자발적 디아스포라로 사는 작가에게 오히려 모어인 일본어에 대한 관심/무관심이 이렇듯 기발한 방식으로 표현된 것이겠다. 물론 일본이 당한 전대미문의 재난을 이런 식으로 말장난의 대상으로 삼아도 좋은가 하는 비판이 있을 수 있지만, 역자의 말마따나 다와다 요코의 실험이 “압도적인 재난 앞에서 침묵을 강제하는 사회적 압력과 금기를 넘어서, 어떤 식으로든 자유로운 상상력으로 ‘타자’를 만들고, 그들의 말들을 모으고, 대화의 활로를 뚫는 것이야말로 소설가의 길이자 사명임을 환기”시킨다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16) 주지하듯 일본어는 히라가나와 가타카나, 그리고 한자로 구성된다. 그중 가타카나는 주로 외래어를 표기하는 데 사용된다. 하지만 또 하나의 재난 소설이자 「불사의 섬」의 완성판이라 할 수 있는 「헌등사」에서는 대지진 이후 쇄국 정책으로 인해 외국과의 모든 교류는 물론이고, 인터넷도 외래어도 외국어 교육도 번역도 사라진 일본을 그린다. 그러다 보니 가타카나 또한 쓸 일 자체가 사라져 버린다. 더 정확히는 쓸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런데 어떤 빵집에 가면 ‘가타카나’ 냄새가 나는 묘한 빵 이름을 만나게 된다. 빵집 주인이 자신이 구운 빵에 ‘하노오바(刃の叔母)’, ‘부레멘(ぶれ麺)’, ‘로텐부로쿠(露天風呂区)’ 등 이상한 이름을 붙이고 있기 때문이다.17) 빵집을 찾은 손님(요시로)은 이렇게 말한다. “빵은 먼 나라가 존재한다는 것을 떠올려 주니 좋군요. 먹는 것은 밥이 좋지만, 빵에는 꿈이 있소.”18) 가라타니 고진에 기대면, 일본어의 3표기 체계(‘3중의 에크리튀르’)는 낯선 것, 외부에서 들어오는 것을 정확히 가려내는, 말하자면 일본 고유의 것과 아닌 것을 구별하고 결과적으로 외부적인 것을 차단하고 배제하는 기능을 수행해 왔다. “ 한자는 일본어 내부로 흡수되면서도 동시에 항상 외부적인 것에 그친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한자로 쓰인 것은 외래적이고 추상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그런 상황은 메이지 이후 일본의 문어(文語)에서 더욱 복잡해진다. 처음에 서양의 개념은 한자로 번역되었지만, 동시에 가타카나로 표기하는 방법이 이용되었다. 가타카나는 불전(佛典) 등 한문을 읽기 위한 보조 도구로 사용되어 왔기 때문에 외국어를 표기하는 데 적합했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에는 서양의 개념이 번역되는 경우는 좀체 없고 거의 가타카나로 표시된다. 외래어는 말해질 때는 외래어라는 사실이 그다지 의식되지 않지만, 쓰일 때는 가타카나가 외래성을 명시한다. 때로는 히라가나나 한자로 써야 할 일본어를 일부러 가타카나로 써 외래적인 낯설게 하기 효과를 줄 때도 있다. 다시 말해 한자나 가타카나로 표기되는 한 외래적인 것의 외래성이 언제 어디까지나 보존되는 것이다. 그런 점 때문에 한자나 가타카나로 표기된 것은 일정한 가치를 가짐과 동시에 일정한 반발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19) ” 이렇게 볼 때 다와다 요코의 언어 전략은, 의도했든 아니든 일본어가 천 년도 훨씬 넘게 지녀온 견고한 표기 체계, 그리고 그것에 바탕을 둔 ‘정신적 쇄국’―이것은 메이지 유신 이후에도 근본적으로 달라지지 않았다―에 대해 새삼 의문을 제기한다고도 볼 수 있겠다. 카프카는 분명히 독일 문학의 가장 중요한 작가 중 한 명이다. 그런데 그는 지금은 체코에 속하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수도 프라하에서 태어났고, 거의 평생 프라하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문제는 그 프라하에서 독일계 유대인 부모를 둔 그가 쓴 독일어가 지닌 소수성에 있다. 그것은 당연히 독일의 독일어와 달랐다. 카프카는 예외였지만, 주변의 독일계들은 체코어를 의식적으로 말하려 하지 않았다. 카프카는 일부러 표준 독일어를 흉내 내거나 화려하게 구사하려 애쓰던 그들과 달랐다. 그는 체코어 속의 소수적인 언어로서 ‘프라하 독일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 결과 “간결하고 차갑고 중립적이며 또한 어휘가 빈약한 카프카의 산문”이 완성된다. 20) 게토와 같은 프라하에서 고립된 삶을 영위하던 독일인을 그리는 데 이보다 더 훌륭한 무기는 없었을 것이다. 들뢰즈가 탈영토화된 독일어라 부른 그것! “ 자신의 것이 아닌 언어 안에서 사는 사람이 오늘날에는 얼마나 많은가. 자신의 언어조차 잘 모르거나, 자신이 사용해야만 하는 다수적인 언어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이는 이민자, 특히 이민자 아이들의 문제고, 소수자의 문제며, 소수적인 문학의 문제지만, 또한 우리 모두의 문제기도 하다. 즉 어떻게 자신의 언어로 소수적인 문학을 이룰 것이며, 언어 활동을 천착하여 간결한 혁명적 선을 따라 나아가게 할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자신의 언어에서 유목민·이민자·집시가 될 것인가. 카프카는 말한다. 요람에서 아이를 훔치라고, 팽팽한 줄 위에서 춤추라고.21) ” 다와다 요코에게 독자들은 굳이 왜 독일어와 일본어라는 두 언어로 글을 쓰는가 하고 흔히 묻는다. 이에 대해 그녀는 이런 답변을 내놓은 바 있다. “나는 독일어를 결코 잘하지 못합니다. 다만 나는 독일어를 모국어로 하는 사람과는 다른 독일어를 쓰려고 합니다. 이것이 내가 독일어로 쓰는 목적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글쓰기를 역으로 이용해서 나는 모국어로 쓸 때에도 잘 쓰는 일본어, 깨끗한 일본어(綺麗な日本語)의 생각을 무너뜨리고자 합니다. 즉 두 언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사람은 되고 싶지 않습니다. 또 하나를 버리고 다른 하나로 진입하려는 것이 아니라, 두 언어를 계속 가지고 있으면서 파괴해 가는 그런 작업을 부끄럽기는 하지만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22) 다와다 요코의 문학적 열망은 모어로서의 일본어, 즉 ‘깨끗한 일본어’를 의식적으로 배제하는 데 가닿는 것이다. 비슷한 이유로, 재일 시인 김시종의 일본어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그에게 시는 싫든 좋든 현실 인식의 혁명이고, 그러므로 시인은 일상에 익숙해져 완전히 무지러진 언어로부터 탈피하고 쇄신해야 하는 임무를 스스로 부여하지 않으면 안 된다. 23) 그는 고향인 제주에 와서 이렇게 말했다. “나의 ‘재일’ 생활은 유려하고 교묘한 일본어에 등을 돌리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정감 과다한 일본어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나를 키워 낸 일본어에 대한 나의 보복으로 삼아 문필 생활을 하고 있다.”24) 4·3 이후 거의 평생을 일본에서 살아왔어도 김시종의 일본어는 확실히 일본인의 그것과 다르다. 한 일본인 평론가는 “잔잔하고 아름다운 일본어임과 동시에 어딘가 삐걱대는 문체”, “장중하면서도 마치 부러진 못으로 긁는 듯한 이화감이 배어 나오는 문체”라고 평했다. 25) 한마디로 어딘가 홈이 파이고 흠집이 있다는 말. 하지만 그 ‘매끄럽지 못한 일본어’가 현실로부터 철저히 등을 돌린 일본 시의 압도적인 추세에 딴지를 건다. 그리하여 어쩌다 그의 시를 읽게 되는 드물기 짝이 없는 일본의 독자들에게―일본에서 시집은 거의 팔리지 않는다!―무언가 불편한 심정을 안겨 준다. 동시에 한 발 떨어진 채 자기들의 그 ‘깨끗한 일본어’와 비교해 보도록 만든다. 나아가 어째서 그런 불편함이 생기게 되었는지 그 역사(적 연원)까지 더듬어 볼 기회도 준다. 그런 언어로 시인은 가령 재일동포들이 모여 사는 오사카의 저 유명한 이카이노(猪飼野)를 이렇게 소개한다. “ 없어도 있는 동네./ 그대로 고스란히/ 사라져 버린 동네./ 전차는 애써 먼발치서 달리고/ 화장터만은 잽싸게/ 눌러앉은 동네./ 누구나 다 알지만/ 지도엔 없고/ 지도에 없으니까/ 일본이 아니고/ 일본이 아니니까/ 사라져도 상관없고/ 아무래도 좋으니/ 마음 편하다네.// (……) // 시끌벅적 툭 터놓고/ 호들갑을 떨어도/ 음침한 건 딱 질색/ 한물간 시대가 유유자적/ 관습 고스란히 살아남아/ 되돌릴 수 없는 것일수록/ 중히 여겨/ 한 주에 열흘은 줄줄이 제사/ 사람도 버스도 저만치 돌아가고/ 경관마저 드나들지 못해/ 한번 다물었다 하면/ 열리지 않는 입이라/ 가벼이/ 찾아오기엔/ 버거운/ 동네.// 어때, 와 보지 않을 텐가?26) ” 그의 시는 ‘지도에도 없는 동네’의 역사를 이렇듯 당당히 소환해 낸다. 일찍이 발터 벤야민이 말한 ‘파괴적인 성격’이라는 명명은 누구보다도 프란츠 카프카에게 어울릴 텐데, 한편으로는 줌파 라히리나 다와다 요코나 김시종 같은 이들에게도 유효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벽이나 산을 마주치는 곳에서 하나의 길을 보기 때문이다. 27) 디아스포라 문학의 가능성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 중 하나가 여기에 있다. 각주 1) 자카리아 무함마드, 오수연 편역, 「귀환」, 『팔레스타인의 눈물』, 아시아, 2006. 2) 자카리아 무함마드, 오수연 옮김, 「나의 개가 묻기를」, 『우리는 새벽까지 말이 서성이는 소리를 들을 것이다』, 강, 2020. 3) 西門保雪, 「다와다 요코 문학 연구: 여성·유랑·엑소포니」, 고려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2015, 15-16쪽. 4) 최윤영, 「다와다 요코의 탈경계적, 탈민족적, 탈문화적 글쓰기」, 《일본비평》 12, 2015, 330쪽. 5) 다와다 요코, 남상욱 옮김, 「불사의 섬」, 『헌등사』, 자음과모음, 2018. 6) 같은 책, 21쪽. 7) 줌파 라히리, 이승수 옮김, 『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 마음산책, 2015. 8) 같은 책, 21쪽. 9) 같은 책, 73쪽. 10) 같은 책, 81쪽. 11) 다와다 요코, 유라주 옮김, 『여행하는 말들』, 돌베개, 2018, 52쪽. 12) 같은 책, 48쪽. 13) 『헌등사』, 자음과모음, 2018. 14) 같은 책, 189-190쪽. 15) 같은 책, 204쪽. 16) 다와다 요코, 남상욱 옮김, 「역자 후기」, 『헌등사』, 자음과모음, 2018, 302쪽. 17) 다와다 요코, 남상욱 옮김, 「헌등사」, 『헌등사』, 자음과모음, 2018, 19쪽. 18) 같은 책, 23쪽. 19) 가라타니 고진, 송태욱 옮김, 『일본정신의 기원』, 이매진, 2006, 83-84쪽. 20) 김광규 엮음, 『카프카』, 문학과지성사, 1978, 24쪽. 21)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이진경 옮김, 『카프카: 소수적인 문학을 위하여』, 동문선, 2001, 51쪽. 22) 이한정, 「일본 현대 작가의 자국어 인식」, 《일본어문학》 40, 2009, 164-165쪽. 23) 김시종, 「시는 쓰이지 않고도 존재한다」, 《ASIA》 68, 52쪽. 24) 김재훈, 「재일시인 김시종 “나의 시쓰기는 소중한 일본어에 대한 보복”」, 《제주투데이》, 2019년 5월 31일자, https://www.ijejutoday.com/news/articleView.html?idxno=215142. 강조는 인용자. 25) 호소미 가즈유키, 오찬욱 옮김, 「세계문학의 가능성: 첼란, 김시종, 이시하라 요시로의 언어체험」, 《실천문학》 51, 303-304쪽. 26) 김시종, 유숙자 옮김, 『경계의 시』, 소화, 2008, 85쪽. 27) 발터 벤야민, 반성완 옮김, 「파괴적 성격」,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민음사, 1983, 29쪽.

한국계 독일·오스트리아 문학의 최근 발전: 안나 김 작품 속 전 지구적 쟁점들

비르기트 가이펠 독일

ⓒ 한국문학번역원 1. 들어가는 말: 초국가적 작가, 안나 김 “(……) 작가로서 당신은 노력해야 한다, 세계의 광활함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 우리는 동시성의 세계에 살고 있으며, 모든 존재는 다중의 존재다, 비록 보잘것없고 일시적인 자아라 하더라도, 해부해 보면 다중적인 자아이다.”1) 오스트리아 작가 안나 김(Anna Kim)은 2024년 강연 원고 『사실과 허구 사이(Zwischen Fakt und Fiktion)』(2024)에서 작가로서의 임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지난 20년간 안나 김은 수많은 작품을 발표하여, 독일어권 국가의 문단에서 비평가들의 호평을 받는 한인 디아스포라 목소리가 오래 부재했던 상황에 마침표를 찍었다. 이 논문에서는 아시아/한국계 미국 연구와 비교하여 아시아계 독일 연구의 진화 과정을 소개하고, 특히 아시아/한국계 독일 문학의 현재 상황에 주목해 보고자 한다. 그런 다음 안나 김 작품의 글로벌한 지향성이 디아스포라 문학과 그 작가들에게 종종 부과되는 좁은 국가적 한계에 어떻게 도전하고 있는지를 검토하고자 한다. 초국가적 작가로서 안나 김은 오히려 이러한 한계를 뛰어넘어 글을 쓴다. 2. 아시아계 독일(어권) 디아스포라 문학 찾기 독일계 아시아 연구는 아시아계 미국 연구가 이미 호황을 누리던 시기에는 부재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아시아 디아스포라 연구를 개척한 아시아계 미국 연구는 1960년대에 제도화되었고 1980년대 이후 상당한 인기를 얻었는데, 연구가 발화한 시점부터 지금까지 큰 변화를 겪어 왔다. 우선 미국의 백인 주류 사회와 인종주의에 맞서 아시아계 미국인의 정체성에 대한 자기 인식을 조명함으로써 소수자에 속하는 아시아계 미국인의 어려운 위치를 인지하는 데 도움을 주었으니, 이는 아시아계 미국인들을 둘러싼 환경을 자각하지 못해 개인의 주체성이 위협받는 상황을 헤쳐 나가는 데 도움을 준 것이다. 1990년대 이후 디아스포라 글쓰기는 탈식민주의 연구를 배경으로 이론적 깊이를 더했다. 새로운 세대는 자신들 혹은 그들 가족의 역사를 매우 논쟁적인 냉전 정치의 중심 혹은 그 여파 속에 위치시켜 바라보면서, 신제국주의 정치를 비판하고 역사적 불의를 직시하는 비판적 관점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아시아계 미국인들의 작품은 처음 나온 이후 많은 발전을 이루었다. 초기엔 백인이 헤게모니를 잡는 사회를 위한 ‘민족 정보원(ethnic informants)’이란 이름이 디아스포라 작가들에게 붙여졌다. 하지만 2000년대 이후에 아시아계 미국 문학은 더 넓은 독자층을 확보하고 대중의 호응을 얻고 있다. 1세대 한국계 미국 문학의 대표적인 예로 식민지 조선을 떠나 미국으로 피난 온 강용흘(Younghill Kang)을 들 수 있는데, 강용흘은 최초의 한국계 미국 소설인 허구적 회고록 『초가지붕(The Grass Roof)』(1931)과 그 속편 『동양 선비 서양에 가시다: 오리엔탈 양키의 탄생(East Goes West: The Making of An Oriental Yankee)』(1937)을 발표했다. 이 작품들은 당시 한국이 처한 궁핍한 상황과 이민의 어려움, 꿈과 현실의 충돌을 묘사하고 있다. 일레인 H. 김(Elaine H. Kim)의 설명에 따르면, “[『초가지붕』의 비평가들은] ‘죽음의 행성’으로 묘사된 강용흘의 한국에 대해 화려한 색채, 잊히지 않는 음악, 그리고 부패라는 ‘지옥 같은 황혼’ 속으로 사라져 가는 존재의 마법으로 찬사를 보냈다”라고 한다.2) 『동양 선비 서양에 가시다』가 더 비판적인 어조를 띠고 있지만, 두 작품 모두 두 개의 서로 다른 문화, 즉 작가의 모국과 거주국 사이의 문화적 중재라는 측면에서, 두 문화 간의 목적론적 이동에 대한 ‘진정성 있는’ 직접적 설명을 하고 있어서 거주국 독자들의 기대에 전반적으로 부합하고 있다. 한편 테레사 학경 차(Theresa Hak Kyung Cha)의 걸작 『딕테(DICTEE)』(1982)는 한국계 미국 문학의 패러다임을 바꾼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비평가 현이 강(Hyun Yi Kang)은 이렇게 말한다. “ 다양한 형식으로 된 이 텍스트는 한국이 연속적으로 식민 지배를 받으면서 내부적인 갈등을 빚어 온 역사를 차학경 자신의 문화적, 지리적 이주의 역사와 연결시키면서, 그 이전의 일련의 사건들, 즉 국가 분단 및 한국인의 다국적 이산의 역사를 같이 이어서 표현하고 있다.3) ” 따라서 여러 언어로 되어 있고 고도로 상호 텍스트적인 차학경 작가의 작품은 상당한 학계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차학경 이후, 한국계 미국인 작가들은 미국과 한국 사이의 복잡한 얽힘을 소재로 한 작품들을 활발히 발표했다. 그 대표적인 예로 이창래(Chang-Rae Lee)의 소설 『척하는 삶(A Gesture Life)』(1999)이 있는데, 이 작품은 표면적인 이민자 신화 이면에 식민지 시대와 한국전쟁의 트라우마를 그리고 있다. 또한 이민진(Min Jin Lee) 작가는 재일 한인 디아스포라 ‘자이니치’의 고난과 회복을 다룬 소설 『파친코(Pachinko)』(2017)로 세계적인 성공을 거두며 한인들의 경험을 또 다른 한인 디아스포라의 경험과 연결시킨다. 이처럼 한국계 미국 문학은 새로운 역사 의식과 공간 의식으로 디아스포라의 이분법에서 벗어나고 있다. 아시아계 미국 연구가 디아스포라의 경험을 비판적으로 다루는 분야로 일찌감치 발전해 온 것과 달리, 독일에서는 2000년대 초반에 들어서야 독일계 아시아학을 분과 학문으로 만들려는 움직임이 처음으로 시작되었다. 독일에서 이런 노력의 선두에 선 미타 배너지(Mita Banerjee)는 미국과 매우 다른 사회적, 역사적 배경을 가진 독일 아시아학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을지를 고찰하면서 “‘아시아 디아스포라 민족’의 정체성, 인종주의, 차별에 대한 질문을 활동가의 방식으로 연구”한다.,4) 5)역사적으로 볼 때, 서독과 동독에는 각각 남한과 북한 디아스포라를 포함해 다양한 국적의 아시아계 소수 민족이 존재해 왔다. 분단 독일의 많은 한국인 유학생들, 학자들, 예술가들의 삶뿐만 아니라, 박정희 시대에 양국 간 합의에 따라 서독으로 파견된 한국인 간호사들과 광부들의 운명은, 최근 몇 년 사이 구술사 프로젝트와 연구 주제가 되었다.6) 그러나 독일에서는 전통적인 게르만주의의 정전과는 다른 ‘문화 간(intercultural)’ 문학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미국처럼 방대한 방식으로 한인 디아스포라 문학을 발굴하지는 못했다. 1960년대 이후 한국계 독일 디아스포라가 상당한 규모로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출신 작가들은 독일 전통에서 비(非)원어민 작가가 쓴 문학에 대한 기여에 관한 한 주목할 만한 대표성을 부여받지 못했다”고 리 M. 로버츠(Lee M. Roberts)는 설명한다.7) 독일어를 말하는 문학계에서 한국계 디아스포라 문학이 보이지 않는 이유 중 하나는 한국계 디아스포라 경험을 그리는 많은 작품들이 유럽에 일정 기간 체류한 한인 작가(예를 들어 전혜린, 황석영, 공지영 등)에 의해, 즉 독일어권 국가에서 한국어로 글을 쓰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그렇게 발표된 작품이 많지만, 이들 작품 중 극히 일부만 최근에 독일어로 번역되었기에 유럽 내 한국학계 외에는 일반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사례가 적지 않다.8) 독일어로 출판된 작품 중 이미륵(Mirok Li)의 작품들은 한국에서의 어린 시절을 다룬 자전적 소설 『압록강은 흐른다(Der Yalu fliesst)』(1946)로 한국계 미국인 작가 강용흘의 작품에 필적할 만큼 한국계 독일 문학의 선구적 역할을 했다. 하지만 이미륵은 독일어권 국가에서 문화 간 문학의 정전에서 종종 누락되곤 한다.9) 로버츠는 최근까지 중국과 일본 등 동아시아 국가에 대한 일반적인 정보가 훨씬 많았기 때문에, 그 점이 다른 문화 간 작가들 사이에서 이미륵의 명성을 떨어트렸다고 짚고 있다.10) 안나 김이 독일 문단에 등장하기 전에 한국계 독일인의 정체성 탐색에 관한 짧은 산문을 주로 쓴 작가들이 몇 있었다. 1980년대와 1990년대에 발표한 윤순임(Soon-Im Yoon)11)과 칼 정(Carl Chung)12)이 대표적이다. 2008년에는 독일에서 한국인을 부모로 둔 마르틴 현(Martin Hyun)의 자서전이 출간되어 두 문화 사이에 놓인 정체성의 위치에 대한 질문을 다루었다. 이 질문은 린다 코이란(Linda Koiran)이 주장한 “한국과 독일 사이의 중재자로서의 역할”로 종결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런 작품들은 “두 문화 사이의 중재자”라는 개념이 만들어 낸 좁은 틈새에서 탄생한 것이 아니다. 독일과 독일어권 국가에서 ‘문화 간 문학(intercultural literature)’은 독일 다문화 문학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다작을 하는 튀르키예계 독일인 작가들을 연구하는 학자들에 의해 이론적인 연구로 이어졌다. 튀르키예계 독일인 1세대는 여러 나라의 이민자들과 함께 ‘게스트 노동자(Gastarbeiter)’ 프로그램을 통해 임시 노동자로 독일에 왔다. 1956년 시작된 이 프로그램은 1960, 1970년대에 걸쳐 연방 정부에서 노동자들을 모집했으며, 게스트 노동자로 온 이들 중 독일에서 생활하다가 정착하게 된 경우가 많다. 미국 및 다른 국가의 상황과 마찬가지로 소수 문학 작품은 국민 문학의 풍경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종종 호의적인 반응에도 불구하고 개념적으로는 국가의 주변부로 밀려났다. 레슬리 A. 아델슨(Leslie A. Adelson)은 주로 튀르키예계 독일 문학의 맥락에서 이민이나 이중 문화 배경을 가진 작가 그룹과 함께하면서, 이 작가들에 대해 이미 예상되는 견해를 제공하는 것 말고 그들의 작품을 평가하는 새로운 방법이 필요함을 역설한다. 이중 문화 작가들에 덧씌워지는 선의의 수사, 즉 “‘두 세계 사이를 잇는’ 가상의 다리는 서로 다른 세계를 하나로 묶는 척하는 것만큼이나 이질적인 세계를 분리하도록 설계되었다”라는 수사를 아델슨은 비판한다.13) 그녀는 이 작가들이 문화들의 의무적인 중재자라는 고정된 범주에 갇힌 채 “이 다리 위에 영원히 매달려 있는 것으로 상상되는” 방식을 묵직하게 비판한다.14) 실제로 다리를 놓을 수 있다는 것은 분리된 두 개의 명확한 실체와 긴장들이 있다는 것을 전제하는 동시에 연결, 즉 분리라는 가상의 현실을 지향하는 것을 뜻한다. 아델슨은 아시아계 독일 문학을 이야기하기 위해, 다와다 요코(Yoko Tawada)의 시학을 예로 든다. 그녀는 “사이”에 갇힌다는 부정적인 개념에 맞서 “과도기적 공간”이라는 다와다 요코의 츠비셴라움(Zwischenraum) 개념15)과 파울 첼란(Paul Celan)의 시를 일본어로 번역한 다와다 요코의 에세이 「첼란은 일본적이다」에 대한 성찰을 보여 준다. “일본 태생의 다와다 요코에게 파울 첼란 시의 ‘사이’는 서로 다른 두 세계 사이의 경계(Grenze)가 아니라 새로운 것에 대한 의식이 섬광처럼 떠오르는 문턱(Schwelle)을 의미한다.”16) 따라서 베티나 브란트(Bettina Brandt)는 “다와다 요코의 저술은 아시아 독일학의 이론적 난제라는 새로운 분야를 이해하는 데 중심이 되어 왔다”라고 말한다.17) 일본 국적이지만 1982년부터 독일에 거주하고 있는 다와다 요코는 일본어와 독일어로 다작을 하는 작가로, 두 나라에서 똑같이 작가로 성공했다. 그녀의 작품은 미국에서 테레사 학경 차의 작품이 촉발한 것과 유사한 패러다임 변화를 일으켰으며, 그녀의 글쓰기에 대한 방대한 학술 논문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18) 다와다 요코는 이주민 문학을 국경의 문학으로 피상적으로 분류하는 것에 저항하며, 따라서 문화적 매개자로서 이주민 작가를 규정하는 일반적인 진부한 상투적 표현에도 맞지 않다. 다와다 요코는 독일 독자들에게 일본/아시아의 역사와 문화를 설명하려 하지 않으며, 이전에 독일에서 독일어로 글을 쓴 다른 아시아 작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독일/유럽에서 외국인으로서 자신의 상황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지도 않는다.19) 일본어로 출간된 초기 에세이 「나는 다리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1997)는 이 이미지로 “강제된 유대”20)를 거부하고 싶어 하면서 아델슨이 비난했던 문구, ‘문화 간 다리를 놓는다’라는 진부한 문구를 해체하고 있다. 다와다 요코는 장난스럽게도 브뤼케(‘다리’)에서 뤼케(‘틈’)라는 단어를 혀의 미끄러짐으로 뽑아낸다. 말장난에서 발전한 이 틈새는 상상의 공간으로 묘사된다. “같은 틈을 두고 그리는 그림은 모두 다르다.”21) 안나 김이 그리는 그림 또한 그녀가 독일어권 백인 문학의 영역에서 문화적 ‘타자’로 읽히는 작가에게 할당된 좁은 공간에 나름의 방식으로 도전한다는 점에서는 이와 비슷하다. 3. 안나 김의 작품 속에 나타나는 전 지구적 쟁점들 1977년 한국에서 태어난 안나 김은 1979년 부모님과 함께 독일로 건너가 오스트리아 빈으로 이주했다. 연극과 철학을 공부한 후 “타자”로 인식된 경험에서 비롯된 정체성과 이방인에 대한 성찰을 담은 시와 단편들을 썼다.22) 첫 단편 소설을 발표한 후 네 편의 단편 소설과 에세이를 연이어 발표했다. 첫 소설 『그림의 흔적(Die Bilderspur)』(2004)은 아버지와 딸의 관계를 다루고 있는데, 고국에 대한 아버지의 그리움이 가족의 유대 관계를 복잡하게 만든다. 화자는 아버지의 언어인 ‘이미지’에서 벗어나 ‘말’을 사용함으로써 자기 목소리를 찾는다. 린다 코이란은 이 소설을 “안나 김이 자신만의 언어적 이미지를 창조한 일종의 예술가 소설”이라고 해석한다.23) 첫 데뷔작 이후 안나 김은 자기 작품이 순전히 개인적인 것의 한계 안에서 읽히지 않도록 하는 접근 방식을 만든다. 코이란은 이렇게 설명한다. “ 그녀는 세계화, 이주, 전쟁, 테러의 시대에 독일어권 역사 외의 사회적 주변부를 추적하고 개인의 재앙과 트라우마 경험을 포착한다. 목격하는 것에 국한되지 않고 장르의 경계를 넘나드는 킴의 접근 방식은 초국가적이고 초역사적인 것으로 볼 수 있다.24) ” 목격이라는 중요한 행위는 순수한 형태로는 개인에게는 비극적일지 몰라도 더 많은 (백인) 대중에게는 중요하지 않은 ‘소수’의 경험으로 냉소적으로 여겨질 위험이 있다. 안나 김의 초국가적 접근 방식은 이런 사유 방식에 도전장을 내민다. 안나 김은 이후 발표한 소설 『얼어붙은 시간(Die gefrorene Zeit)』(2008)에서 친밀한 1인칭 서술과 공적 문서를 재현하거나 인터뷰 상황을 제시하는 부분, 객관적인 역사 서술 방식을 대조하는 특유의 글쓰기 방식을 통해 더 많은 독자층을 확보하게 된다. 안나 김은 코소보 전쟁에서 사망한 아내에 대한 코소보 알바니아 남성의 마지막 기억을 적십자사의 ‘사후 자료’를 통해 재구성한다. 민족주의와 민족 간 갈등, 국가 간 전쟁으로 인해 분열된 삶을 묘사한 이 작품은 노동 이주자인 주인공을 “정지된 시간, 계산되지 않는 시간”25) 또는 “끝없는 반복” 속에 멈춰 있게 한다.26) 안나 김은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이나 아시아계 디아스포라가 아니라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소수 민족인 구유고슬라비아 국가들의 디아스포라 주체의 경험을 묘사한다. 한 개인의 ‘소수자 운명’은 다국적 분쟁과 그에 따른 국제적인 인도주의적 노력이라는 맥락에서 전 지구적인 틀 안에서 형성되는 것이다. 안나 김의 세 번째 소설 『어느 밤의 해부(Anatomie einer Nacht)』(2012)는 그린란드의 가상 도시 아마라크에서 하룻밤 사이에 일어난 여러 자살 사건에 대한 기록으로, 실제 사건에서 영감을 받아 집필되었다고 한다. 이 작품은 그린란드로 떠난 연구 여행 중에 수도 누크에서 진행한 인터뷰와 에세이를 함께 모은 안나 김의 에세이집(『사적인 침략』(2011))과 함께 읽는 것이 좋다. 소설과 에세이는 모두 덴마크의 그린란드 식민 지배의 후유증과 식민지 유산으로 인해 두 계층으로 나뉘어진 사회를 묘사하고 있다고, 작가는 『사적인 침략』에서 설명한다.27) 그녀는 인터뷰어의 말을 이렇게 인용한다. “우리는 여전히 가능한 한 덴마크인이 되려고 애쓰고 있으며, 부족함을 느끼기 때문에 부끄러움을 갖고 태어난답니다.”28) 이누이트 원주민 문화는 서서히 사라지고 있지만, 세대 간 트라우마29)가 덴마크인과 이누이트인 사이의 눈에 보이는 인종적 차이로 지속된다. 안나 김 에세이의 ‘나’와 소설 속 주인공인 독일인 저널리스트 엘라는 백인 식민지 또는 백인이 지배하는 문화에서 비슷한 차별에 노출되는 피부색의 차이를 통해 이누이트의 관점과 자연스럽게 일치한다. “ 오늘날 정체성은 다수에 의해 부여된 양자택일, 즉 법령이나 계명이다. (……) 분열과 얼룩으로 가득 찬 정체성을 부여받은 잡종들(hybrids)은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갖는 것을 거부당하고, 우리에게 허용된 일반화된 정체성에 만족해야 하며, 공동체의 정체성을 흔들지 않는 자아상(self-image)만 허용될 뿐이다. 내가 여기서 “우리”라고 쓰는 이유는 식민지의 자녀와 이민자의 자녀 사이의 유사성을 보기 때문이다.30) ” 이렇게 정렬함으로써, 원래 화자가 갖고 있던 ‘유럽인 관점’31)은 ‘탈중심화’32)되고, 식민지였던 이누이트의 주변부 관점이 중심을 차지하게 된다. 그로써 더 이상 주변부의 경험이 아닌, 인종을 기반으로 한 역사적 권력 구조의 영속화라는 글로벌 이슈가 재현되는 것이다. 안나 김은 식민화된, 혹은 추방된 다른 디아스포라들과 연대하고 나서야 네 번째 소설 『위대한 귀향(Die große Heimkehr)』(2017)33)을 통해 한국으로 시선을 돌린다. 이 소설에서 그녀는1960년대 한국을 배경으로 하여, 삼각관계에 얽힌 이야기를 당시의 역사적 사실과 엮어 낸다. 주인공 강윤호(Yunho Kang)는 가장 친한 친구 조니 김(Johnny Kim)의 여자 친구인 이브 문(Eve Moon)과 사랑에 빠지게 된다. 이들의 이야기는 4월 혁명으로 제1공화국이 무너지고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기 직전 서울의 불안정한 정치 상황 속에 진행된다. 이들은 위험한 정치적 긴장으로 인해 마침내 소설 후반부에 일본 오사카의 한인 커뮤니티로 망명하게 되고, 거기서 공정한 국제적십자위원회의 감독하에 시행된 일본 내 북한 송환 프로그램이라는 역사적인 사건을 목격하게 된다. 이 사건은 일본에서 북한으로 떠난 후 사라진 젊은 여성 에이코(Eiko)의 운명을 중심으로 서술된다. 과거 사건의 1인칭 화자인 나이 든 윤호의 기억을 젊은 여성이자 독일로 입양된 한나에게 전달하는 개별적인 이야기가 역사적 대목들과 함께 전개된다. 한나는 그사이 미국인과 결혼해 미국으로 이민 간 옛 연인 이브 문이 보낸 영문 편지를 번역하는 일을 돕는다. 따라서 소설 『위대한 귀향』은 두 번의 귀향에 관한 이야기다. 최전선에 있는 것은 북한으로의 송환으로, 테사 모리스스즈키(Tessa Morris-Suzuki)34)가 말했듯이 ‘자유 의지’와 ‘귀향’이라는 개념과 관련하여 “이주와 디아스포라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심오한 문제의식”을 제기한다.35) 실제로는 자발적인 대량 이주였지만, 실제로는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착각 속에서 정말로 모르는 나라로 건너간 일이었다. 이것은 한나에 대한 이야기 프레임과도 궤를 같이하는데, 한국전쟁 이후 한국 아동의 해외 입양이 전 세계적인 국제 입양 붐의 시작을 알렸고 이후에도 계속되었다는 점에서, 한나가 일본이 아닌 유럽으로 이주한 것은 냉전이라는 동일한 글로벌 역학 관계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이번 한국으로의 귀국 역시 낯선 곳으로의 귀향과 같다. 하지만 두 귀환 모두, 소수자라는 조건과 그에 따른 차별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열망에서 비롯된 것이다. 김은 이렇게 말한다. “ 2 세대와 3 세대의 자이니치의 역사는 특히 일본 출신인 척하는 통과(passing) 현상 때문에 저를 건드렸어요. 자이니치의 경우에요. 내 경험으로는 모르는 일이었어요, 물구나무서기를 해도 내가 오스트리아인으로 오해받는 일은 없을 테니까요. (……)36) ” 따라서 안나 김의 첫 번째 ‘한국 소설’과 관련하여 주목할 만한 이슈는 작가의 위치를 둘러싼 논의이기도 하다. 학계에서 크리스틴 귄터(Christine Guenther)와 린다 코이란은 안나 김이 독일어로 한국사를 ‘필사’37)하거나 ‘소설화’38)한 몇 안 되는 혹은 최초의 작가 중 한 명이라며 그 업적을 강조하고 있으며, 이를 김의 초국가적 접근 방식과 연결시킨다. “ 안나 김은 한국 역사를 독일어로 옮기면서 페르네충엔[Vernetzungen, 상호 연결]과 대화, 그리고 이것이 시간과 장소에 걸쳐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강조한다. ‘동양’ 지역에 대한 이 역사 소설에서 오스트리아/독일의 문학적 상상력은 세계의 역사들이 겹쳐지고 각각의 특이성은 유지하면서 우리 각자에게 영향을 미치는 독특한 방식을 강조하는 초국가적 현실을 향해 나아간다.39) ” 그러나 문단에서는 한국계 오스트리아 작가가 한국에 대해 글을 쓴다는 사실이 “민족 정보원”으로부터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기대감을 불러일으켰다. 이 점은 『사실과 허구 사이』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 어떤 이들은 내게 ‘교과서’를 썼다고 비난했고, 어떤 이들은 ‘역사책’을 썼다고 칭찬했지만 그 이유를 묻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저자는 왜 그렇게까지 한국의 전후 역사를 장황하게 서술했을까? 독일어를 사용하는 대중에게 강의하고 싶었기 때문일까? 적어도 행사장에서 나는 그렇게 비난받았다. 강의는 내 목표가 아니었다.40) ” 안나 김은 그녀로서는 역사야말로 소설의 주연 배우라고 힘주어 말한다.41) “개인과 집단을 결합하고, 작은 발전에서 큰 발전을, 큰 것에서 작은 것을 반영하는 것이 이 소설의 기본 취지다.”42) 그녀는 한국 역사를 직접 경험하지는 못했지만, 다른 책들과 마찬가지로 인터뷰와 자료 조사를 통해 공들여 연구를 진행해야 했다.43) 따라서 이 소설에 대한 박인원의 평가, 즉 “한국 현대사와 자신의 관계를 탐구하려는 작가의 고군분투가 바탕에 깔려 있다”라는 것이 한층 적절하겠다.44) 결국 작가의 입장은 윤호를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대신 습득하는 청자인 한나의 입장에 더 가깝다. “당신은 지금까지 불충분하고 피상적으로만 다루어졌던 당신의 역사, 어찌 보면 나의 역사가 당신의 역사(……)인 그 부분을 찾기 위해 여기에 있다.”45) 안나 김의 가장 최근 소설 『어느 아이 이야기(Die Geschichte eines Kindes)』(2022)에는 1950년대 미국에서 백인 어머니에게 입양된 혼혈 흑인 아이 대니 트루트먼(Danny Truttman)의 이야기가 그의 사회복지 기록을 통해, 한국인 오스트리아 혼혈 1인칭 화자의 개인적인 이야기와 점차적으로 섞인다. 마지막 소설은 이전 소설들 사이의 직접적인 암시와 주제적 융합으로 더 긴밀하게 짜인 상호 텍스트 모자이크를 제시하며 지정학적 사건과 구조적 문제 사이의 전 지구적 연결성을 그려 낸다.46) 이전 소설과 마찬가지로, 서술이 현재와 과거 즉,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재임 기간 중 한국계 오스트리아 작가 프란(Fran)이 작가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통해 그린베이 마을을 방문하고 집주인 조앤 트루트먼(Joan Truttman)을 만나는 시점으로 나뉘어 전개된다. 유럽계 이민자들이 주로 거주하는 백인들만 사는 마을에서 조앤은 백인 가정에 입양된 유일한 흑인 남성, 즉 현재 병원에 입원 중인 대니 트루트먼과 결혼해 살고 있다. 대니의 (흑인) 아버지가 누구인지 확인되지 않았기에 조앤은 오스트리아 사회복지사 마를린 윙클러(Marlene Winkler)가 작성한 대니의 사회복지 서비스 파일을 프란에게 맡겨 진실을 찾는다. 파일은 1953년부터 1958년까지 민권 운동 이전의 시대로 독자를 데려가 당시의 노골적인 인종차별적 표현을 보여 준다. 프란을 맡았던 담당자는 인종 간 입양을 적절하게 배치하기 위해 아버지의 인종이 흑인으로 추정됨을 증명하려고 안간힘을 쓰는데, 그 집착이 결국 젊은 미혼모를 자살로 몰고 간다. 사건 후 프란을 담당했던 사람은 오스트리아로 돌아가고, 비엔나로 돌아온 프란은 마를린 윙클러가 나치 인종 이론의 근거가 된 인종적 특성에 대한 사이비 과학 문서에 관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엄밀히 말해 자전적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안나 김의 작품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자전적인 요소가 많다. 『어느 아이 이야기』에서는 인종과 차별(이미 『어느 밤의 해부』에서 상당히 두드러지긴 했지만)이 초점이 되고 있다. 프란은 『위대한 귀향』의 한나(Hanna)와는 달리 단순히 내러티브에 활력을 불어넣는 캐릭터가 아니라 소설의 줄거리와 백인이 지배적인 오스트리아 사회에서의 인종 차별에 대한 자신의 경험, 즉 미국의 대니(Danny)와 대등한 위치에 있는 자신의 경험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는 인물이다. “명예로운 백인. 때로 우리는 여기에 포함되기도 하고 포함되지 않기도 하지. 확실한 것은 우리가 누구인지 스스로 결정하지 않는다는 것이지.”47) 두 사람 모두 나이와 지리적 위치에서 큰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본문에서 여러 번 강조한 것처럼 ‘가시성의 멍에(yoke of visibility)’를 짊어지고 있다. 최윤영 또한 이 점에 공감한다.48) 1인칭 화자인 프란의 불편함은 프란의 신체가 “인종 프로파일링”의 대상이 된다는 점에서 백인 주류 사회의 인종화된 시선이 얼마나 끈질긴지를 보여 준다.49) 나치 이데올로기를 이야기의 중심에 놓으면, 그것이 미국의 인종 차별을 처음으로 목도하게 하는데, 작가가 자기 소설에 대해 언급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 나는 인종 차별에 대한 개인의 경험에 일차적인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인종 차별의 배후에 있는 원리에 관심을 두고 있다.”50) 4. 글을 맺으며: 디아스포라 문학을 변방에서 중심으로 옮기기 전통적인 디아스포라 문학에서 개인의 경험에 초점을 맞추던 것에서, 안나 김은 글로벌한 주제로 나아간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는 의미에서 그녀는 디아스포라 문학을 해방시켜 주변부에서 중심으로 이동시킨다. 개인과 집단의 역사를 병치함으로써 겉으로 특수하게 보이는 문제가 전 세계적으로 상호 연결된 보편적인 문제임이 드러난다. 안나 김은 작가로서 ‘문화 간'이라는 개념의 한계를 벗어나 작품을 통해 디아스포라 문학의 발목을 잡는 개별 국가 또는 문화적 영역의 이분법을 깨고 초국가적 접근을 시도한다. 따라서 안나 김 작품의 글로벌한 지향성은 국가적 이분법의 한계에 단호히 저항하고 전쟁, 식민주의, 인종주의의 초국가적 층위를 드러낸다. 1차 참고문헌 Cha, Theresa Hak Kyung, DICTEE, New York: Tanam Press, 1982. Kang, Younghill, The Grass Roof, 1931, Reprint, Chicago: Follett, 1966. Kang, Younghill, East Goes West: The Making of An Oriental Yankee, New York: Charles Scribner’s Sons, 1937. Kim, Anna, Anatomie einer Nacht, Berlin: Suhrkamp, 2012. Kim, Anna, Die gefrorene Zeit, Graz: Literaturverlag Droschl, 2008. Kim, Anna, Die große Heimkehr, Berlin: Suhrkamp, 2017. Kim, Anna, Geschichte eines Kindes, Berlin: Suhrkamp, 2022. Kim, Anna, Invasionen des Privaten, Graz: Literaturverlag Droschl, 2011. Kim, Anna, Zwischen Fakt und Fiktion: Stefan Zweig Poetikvorlesungen Bank 10, Wien: Sonderzahl, 2024. Lee, Chang-Rae, A Gesture Life, New York: Riverhead Books, 1999. Lee, Min Jin, Pachinko, London: Apollo, 2017. Li, Mirok, Der Yalu fliesst: Eine Jugend in Korea, St. Ottilien: EOS Verlag, 1996. Tawada, Yoko, “Celan liest Japanisch”, Talisman, Tübingen: Konkursbuch Verlag Claudia Gehrke, 1996, pp. 125-138. Tawada, Yoko, “Ich wollte keine Brücke schlagen”, Aber die Mandarinen müssen heute Abend noch geraubt werden, Tübingen: Konkursbuch Verlag Claudia Gehrke, 1997, pp. 65-72. 2차 참고문헌 린다 코이란(Linda Koiran), 「Von Formen der Erinnerung zum postmemorialen Gedächtnis in ausgewählten Texten von Anna Kim」, 《독일어문화권연구》 32, 2023, 151-179쪽. 박인원, 「’고향’에 대한 탐색: 안나 킴의 『대귀향』에 그려진 재일조선인 귀국사업」, 《카프카 연구》, 41, 2019, 133-151쪽. 최윤영, 「인종의 가시성과 고독: 안나 김의 『어느 아이 이야기』 분석을 중심으로」, 《독어독문학》 164, 2022, 245-273쪽. 최윤영, 「National? Transnational oder transterritorial? Berlinbilder in koreanischen Romanen」, 《독일어문화권연구》 20, 2011, 347-370쪽. 함수옥, 「Transgenerationelle Traumatisierung durch den Kolonialismus: Anna Kims Anatomie einer Nacht」, 『독어독문학』 54(4), 2013, 219-234쪽. Adelson, Leslie A., “Against Between. A Manifesto”, Unpacking Europe: Towards a Critical Reading, edited by Hassan Salah and Iftikhar Dadi, Rotterdam: NAI, 2001, pp. 244~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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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 “Defining Asian American Realities through Literature”, A Companion to Asian American Studies, edited by Kent A. Ono (Blackwell Publishing, 2005), p. 198. 3) Hyun Yi Kang, “Re-membering Home”, Dangerous Women: Gender and Korean Nationalism, edited by Elaine H. Kim and Chungmoo Choi (New York and London: Routledge, 1997), p. 265. 4) Bettina Brandt, “What Is Asian German Studies? Asia, Fantasia, Germasia”, German Quarterly 93(1), 2020, p. 120. 5) 또한 2009년부터 시작된 미국 독일학 협회 학회에서 아시아계 독일학 패널이 새로 만들어진 것에서 알 수 있듯 이 분야는 미국 내 독일학 관련 부서에서도 주도하고 있다. 6) 예를 들어, 다음 글을 참고할 것. Heike Berner und Sun-ju Choi (Ed.), zuhause: Erzählungen von deutschen Koreanerinnen (Berlin/Hamburg: Assoziation A, 2006) and You Jae Lee (Ed.) Glück Auf! Lebensgeschichten koreanischer Bergarbeiter in Deutschland (München: Iudicium, 2021). 7) Lee M. Roberts, “Depictions of the Self as Korean in German- Language Literature by Mirok Li and Kang Moon Suk”, Transnational Encounters between Germany and Asia: Affinity in Culture and Politics since the 1880s.Transnational Perspectives since 1800, edited by Joanne Miyang Cho and Lee M. Roberts (Palgrave Macmillan, 2018), p. 237. 8) 최윤영, 「National? Transnational oder transterritorial? Berlinbilder in koreanischen Romanen」, 《독일어문화권연구》 20, 2011, 347-370쪽을 참고할 것. 최윤영은 독일의 문화 간 문학 분야에서 한국 독일어 작품에 대한 연구 공백에 대해 명쾌하게 대응한다. 최윤영의 논문은 독일을 소재로 한 한국 작가에 대한 몇 안 되는 독일어 자료 중 하나다. 9) 예를 들어 카민 키엘리노가 편집한 매우 포괄적인 핸드북인 『독일의 문화 간 문학(Interkulturelle Literatur)』에서 울리케 리그의 「아시아계 작가/이넨 아우스 데미트 컬쳐라움(Autor/innen aus dem asiatischen Kulturraum)」 섹션에는 이미륵에 대한 언급이 없으며, 핸드북의 다른 섹션에서도 그를 언급하고 있지 않다. 10) Roberts, “Depictions of the Self as Korean in German- Language Literature by Mirok Li and Kang Moon Suk”, p. 238. 11) Ulrike Reeg, “Autor/innen aus dem asiatischen Kulturraum”, Interkulturelle Literatur in Deutschland: Ein Handbuch, edited by Carmine Chiellino (Stuttgart: J.B. Metzler, 2007), p. 263. 12) 린다 코이란(Linda Koiran), 「Von Formen der Erinnerung zum postmemorialen Gedächtnis in ausgewählten Texten von Anna Kim」, 《독일어문화권연구》 32, 2023, 152쪽. 13) Leslie A. Adelson, “Against Between. A Manifesto”, Unpacking Europe: Towards a Critical Reading, edited by Hassan Salah and Iftikhar Dadi (Rotterdam: NAI, 2001), p. 246. 14) Adelson. 15) Adelson, p. 247. 16) Adelson. 17) Brandt, “What Is Asian German Studies? Asia, Fantasia, Germasia”, p. 121. 18) Brandt, p. 122. 19) 일본계 독일인 마츠바라 히사코와 앞서 언급한 한국계 독일인 이미륵과 같은 초기의 아시아계 독일 작가들은 독일의 독자와 학계에 유익한 정보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모국을 담아낸다. 20) Yoko Tawada, “Ich wollte keine Brüce schlagen”, Aber die Mandarinen müssen heute Abend noch geraubt werden (Tübingen: Konkursbuch Verlag Claudia Gehrke, 1997), p. 65. 21) Tawada. 22) 코이란, 「Von Formen der Erinnerung zum postmemorialen Gedächtnis in ausgewählten Texten von Anna Kim」, 154쪽 및 이후 내용 참조. 23) 코이란, 158쪽. 24) 코이란, 154쪽. 25) Anna Kim, Die gefrorene Zeit (Graz: Literaturverlag Droschl, 2008), p. 32. 26) Kim, Die gefrorene Zeit, p. 33. 27) Anna Kim, Invasionen des Privaten (Graz: Literaturverlag Droschl, 2011), p. 34. 참조. 28) Kim, Invasionen, p. 35. 29) 함수옥, 「Transgenerationelle Traumatisierung durch den Kolonialismus: Anna Kims Anatomie einer Nacht」, 『독어독문학』 54(4), 2013, 219-234쪽. 30) Kim, Invasionen, p. 104. 31) Kim, p. 32. 32) 코이란, 「Von Formen der Erinnerung zum postmemorialen Gedächtnis in ausgewählten Texten von Anna Kim」, 166쪽. 33) 안나 김의 소설 『위대한 귀향』은 연구 논문에는 ‘대귀향’으로 옮겨졌으나 옮긴이는 위대한 귀향으로 옮겼다. 이 귀향은 실은 대규모로 이루어지는 ‘거대한’ 귀향이기도 하고 디아스포라 주체의 선택과 의지가 개입되는 ‘위대한’ 귀향이기도 하다. 북송을 선택하는 자이니치들, 한국으로 다시 돌아오는 입양인들의 서사가 겹쳐지는 방식이라서 역자는 이 귀향의 아이러니를 살리기 위해 ‘위대한’으로 번역했다.―옮긴이 주 34) 역사학자 테사 모리스스즈키의 학술 작업과 연구도 안나 김이 소설의 주제를 선정하는 데 영감을 주었다고 그녀는 『사실과 허구 사이』 69쪽에서 설명한다. 35) Tessa Morris-Suzuki, “Freedom and Homecoming: Narratives of Migration in the Repatriation of Zainichi Koreans to North Korea”, In Diaspora Without Homeland. Being Korean in Japan, edited by Sonia Ryang and John Lie (Berkeley and Los Angeles: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09), p. 40. 36) Kim, Zwischen Fakt und Fiktion, p. 72.. 37) Christina Guenther, “Asia in the Austrian Imaginary: Anna Kim’s German Transcription of Korean History in Die große Heimkehr”, Journal of Austrian Studies 55(1), 2022, p. 3. 38) 코이란, 「Von Formen der Erinnerung zum postmemorialen Gedächtnis in ausgewählten Texten von Anna Kim」, 175쪽. 39) Guenther, “Asia in the Austrian Imaginary”, p. 20. 40) Kim, Zwischen Fakt und Fiktion, p. 74. 41) Kim, p. 75. 42) Kim, p. 73 및 이후 내용 참조. 43) Kim, p. 65 및 이후 내용 참조. 44) 박인원, 「’고향’에 대한 탐색: 안나 킴의 『대귀향』에 그려진 재일조선인 귀국사업」, 《카프카 연구》, 41, 2019, 134쪽. 45) Anna Kim, Die große Heimkehr (Berlin: Suhrkamp, 2017), p. 96. 46) 예를 들어 한국전쟁이 두 번 이상 언급되는데, 대니 어머니의 삼촌이 한국전쟁에서 실종된 경우 등이다. Anna Kim, Die große Heimkehr (Berlin: Suhrkamp, 2017), p. 96. 47) Kim, Geschichte eines Kindes, p.106. 48) 최윤영, 「인종의 가시성과 고독: 안나 김의 『어느 아이 이야기』 분석을 중심으로」, 《독어독문학》 164, 2022, 253쪽. 49) 최윤영, 「인종의 가시성과 고독」, 263쪽. 50) Kim, Zwischen Fakt und Fiktion, p. 101. 번역정보 번역 : 정은귀 (영 → 한)

흩뿌려진 것들은 기어이 이야기로 탄생한다: 코리안 디아스포라 영화 세 편을 중심으로

이주혜 한국

ⓒ 한국문학번역원 1. 들어가며 디아스포라(diaspora)가 ‘흩뿌리거나 퍼트리는 것’을 뜻하는 그리스어 단어 ‘διασπορά’에서 유래했다는 말을 들으면 어김없이 공중에 흩어지는 씨앗들이 떠오른다. 바람에 의해 들판에 흩날리는 나무의 씨앗도, 어린아이의 무구한 입김에 훅 날리는 민들레 씨앗도, 새가 몸으로 이동시키는 열매의 씨앗도 전부 내게는 디아스포라의 이미지로 수렴된다. 그것은 우선 디아스포라의 씨앗이 원주지에서 떨어져 나와 새로운 자리에 다른 문화와 전통, 언어를 뿌리내린다는 원래의 의미에서 발생한 이미지이겠지만, 내게는 방향성 없이 흩뿌려진 디아스포라의 씨앗이 어디서든 기어이 이야기를 탄생시킨다는 곡진한 인상으로 더 깊게 남았다. 디아스포라라는 씨앗이 어디선가 뿌리를 내린다면 그 열매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역사상 최초의 디아스포라 기록도 성경 「신명기」 28장 25절의 “그대가 이 땅의 모든 왕국에 흩어지고”라고 하지 않던가. 그 후 디아스포라는 유대인의 이야기, 그리스인의 이야기, 이른바 ‘집시’의 이야기, 아일랜드인의 이야기, 아프리카인의 이야기로 확장되면서 종교, 전쟁, 추방, 박해, 노동, 기근, 노예 제도 등 디아스포라 발생의 다양한 원인을 우리에게 전해 주었다. 역사와 시대, 문화권을 막론하고 전 지구적으로 진행되어 온 디아스포라 현상과 그것이 발생시킨 다양한 ‘이야기’를 들여다보면 인류가 자아를 스스로 인지할 수 없고 언제나 문화적, 상징적 매개를 통해 이해한다는 폴 리쾨르의 이야기 정체성(혹은 서사 정체성) 개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우리는 이야기를 통해 곳곳의 디아스포라를 만나고 이해의 시작을 경험한다. 성경에 처음 기록된 이후 디아스포라는 다양한 역사서와 구술 문학, 서사시, 소설 등을 통해 동료 인간에게 이야기를 전해 왔다. 그리고 이야기의 형태가 다양하게 전개되는 현대에 이르러 이야기는 영상 매체의 옷을 입고 더욱 생생하고 깊이 있는 디아스포라의 얼굴을 조명한다. 이 글은 다양한 방식으로 전달되어 온 디아스포라의 이야기 방식 가운데서도 이른바 코리안 디아스포라라고 부를 수 있는 이야기를 담아 최근에 제작·개봉된 영화 세 편을 중심으로 전개하고자 한다. 우선 북미 지역 이민 1.5세대의 만남과 이별, 언어의 교차 등을 ‘인연’이라는 화두로 담아낸 셀린 송 감독의 〈패스트 라이브즈(Past Lives)〉(2024), 그리고 코리안 디아스포라 가운데서도 어찌 보면 가장 가슴 아픈 이야기를 전해 온 해외 입양인 서사를 새로운 시각으로 담아낸 말레나 최 감독의 〈조용한 이주(The Quiet Migration)〉(2024), 마지막으로 분단이라는 외면할 수 없는 한국 근현대사가 발생시킨 디아스포라, 탈북민의 이야기 〈로기완(My Name is Loh Kiwan)〉(2024)이 그것이다. 이 중 〈패스트 라이브즈〉와 〈조용한 이주〉는 셀린 송 감독과 말레나 최 감독이 각각 이민 1.5세대이자 해외 입양인 당사자라는 사실이 이야기에 핍진성을 강화하고 또 〈로기완〉이 2011년 출간과 함께 “이방을 떠도는 탈북인의 운명에 대해 놀랄 만큼 차분한 공감을 자아내는 넉넉한 품과 세심한 결”이 돋보이는 작품이라는 찬사와 함께 한국 문학의 놀라운 성취로 인정받은 조해진 작가의 장편 소설 『로기완을 보았다』를 출간 13년 만에 영화로 새롭게 재구성한 작품이라는 점 등이 눈에 띈다. 이 글은 이 세 영화를 중심으로 코리안 디아스포라가 어떻게 재현되어 왔는지, 그리고 각각의 재현이 강조하는 디아스포라의 본질과 현상은 무엇인지를 미력하게나마 살펴보고자 한다. 2. 〈패스트 라이브즈〉: 상하좌우로 교차하는 선들 속에서 인연의 공간이 탄생하는 찰나 셀린 송 감독의 〈패스트 라이브즈〉는 〈미나리〉(2021), 〈성난 사람들〉(2023) 등 한국계 배우와 감독이 주축이 되어 제작되고 이른바 미국 주류 문화계의 주목과 찬사를 받은 ‘코리안 디아스포라’ 콘텐츠의 계보를 잇고 있다. 평단의 주목과 찬사가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방증하듯 이 작품은 뉴욕비평가협회상, 시카고비평가협회상, 전미비평가협회상, 런던비평가협회상, 미국감독조합상, 산타바바라 국제영화제 등을 말 그대로 휩쓸었다. 〈미나리〉가 한국 이민자 가족의 과거 정착기와 그 과정의 애환을 세심하게 들여다보고 〈성난 사람들〉이 정착을 향한 아시안 이민자들의 여전한 불가능성과 현실적 분노를 속도감 있게 그려 냈다면, 〈패스트 라이브즈〉는 12년 간격의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펼쳐지는 관계의 우연성과 선택의 문제에 집중함으로써 디아스포라의 끊임없는 유동성을 보여 준다. 열두 살 ‘나영’은 캐나다로 이민을 가 ‘노라’가 된다. 12년 후 스물네 살이 된 ‘나영’을 소꿉친구이자 첫사랑인 ‘해성’이 찾아낸다. 두 사람은 인터넷 영상 통화를 통해 지역과 시차라는 한계를 넘어 대화를 나눈다. 두 사람의 대화는 한국어로 이루어지는데, 이때 ‘노라’가 아닌 ‘나영’이 되어 전하는 한국어는 영락없이 열두 살 소녀의 억양과 목소리다. 어쩌면 각자 처지의 한계를 ‘무리해서’ 넘어야 겨우 가능한 두 사람의 대화는 12년 전으로 돌아가는 시간 여행에 가깝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초등학교 교실 안에서 늘 나영을 향했던 해성의 시선과 그런 해성의 시선을 의식하면서도 모르는 척 새침을 떨기도 했던 나영의 얼굴은 12년 후 영상 통화 스크린에서 고스란히 재현된다. 왜 이민을 가야 하느냐는 해성의 질문에 12년 전 나영은 엄마의 말을 빌려 대답했다. 한국에 있으면 노벨상을 받을 수 없다고. 둘이 함께 하교한 마지막 날 해성이 “야!” 하고 나영을 불러 본 다음 해성은 왼쪽 골목길로, 나영은 오른쪽 계단 길로 움직이는 장면은 각자의 수평 운동과 상승 운동을 통해 이후 두 사람의 행보가 갈라지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노벨상을 받으려고 이민을 간 나영은 스물네 살이 되어 퓰리처상을 욕망하는데, 해성과의 무리한 대화는 그 욕망에 방해가 된다. 희곡 작가로 성공하고 싶은 나영은 자꾸만 한국행 비행기표를 검색하는 자신이 겁나고, 결국 해성에게 그런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면서 둘의 대화는 중단된다. 다시 12년이 흘러 서른여섯 살이 된 해성은 인연의 끈을 붙잡기 위해 용기 내어 뉴욕의 나영을 만나러 간다. 두 사람은 실제로 24년 만에 만나 “와, 너다.”라는 말로 관계를 시작하는데, 이때 해성이 “너다.”라고 지칭하고, 포옹하고, 함께 산책하고, 눈을 마주치며 끊임없이 대화하는 ‘너’는 과연 누구일까 하는 질문을 던지고 싶다. 해성의 ‘너’는 서울에서 헤어진 열두 살의 나영일까, 영상 통화를 나누었던 스물네 살의 나영일까, 아니면 작가 레지던스에서 만난 백인 남편 아서와 함께 살며 영어로 글을 쓰고 영어로 대화하고 한국어로 잠꼬대하는 서른여섯 살 노라일까? 일본에서 태어나 독일에 거주하며 일본어와 독일어로 나란히 글을 쓰는 작가 다와다 요코는 『경계에서 춤추다』에서 이렇게 말했다. “ 이름이란 경계를 넘을 때 변모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언어와 언어 사이의 경계뿐 아닙니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서 법명을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양자로 들어가거나 결혼을 하거나 새로이 어떤 종교에 귀의하여 이름이 변하기도 합니다.1) ” 이름은 경계를 넘을 때 변모할 뿐만 아니라 호명의 순간 새로운 경계를 창출하기도 한다. 해성이 나영을 나영이라 부를 때와 아서가 나영을 노라라고 부를 때, 나영이자 노라는 각각 다른 사람이 되어 결계와도 같은 공간을 탄생시킨다. 그러니 해성이 한국으로 돌아가는 전날 밤 나영(노라)과 아서와 함께 바에 나란히 앉아 있을 때 대화의 공간은 중첩되어 열린다. 나영과 해성이 한국어로 대화하는 공간과 노라와 아서가 영어로 대화하는 공간, 그리고 가끔 해성과 아서가 어설픈 영어와 어설픈 한국어로 띄엄띄엄 대화하는 공간은 각기 다르다. 세 공간은 서로를 침투하지 못하지만 끊임없이 곁에 존재하며 서로를 간섭한다. 아서는 한국어를 하는 노라가 불안하고, 해성은 영어를 하는 나영이 서운하다. 언어의 다름은 이해의 불가능성과 오해를 만들어 내는데, 언어의 달라짐이야말로 디아스포라가 겪어야 하는 본질 중 으뜸일 것이다. 이탈리아 출생 작가이자 화학자, 아우슈비츠 생존자이자 증언자인 프리모 레비는 처음 수용소에 끌려갔을 때를 언어를 박탈당한 순간과 등치시켜 진술한다. 세속적인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이디시어를 배우지 않았던 프리모 레비는 수용소에서 주로 통용되는 독일어와 폴란드어, 이디시어를 하나도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에 직면하고 무한한 공포를 느낀다. 그에게 언어의 박탈은 생명의 박탈과도 같았을 것이다. 레비의 예처럼 디아스포라가 경험하는 최초의 박탈 중 하나가 언어일 텐데, 〈패스트 라이브즈〉는 디아스포라 경험이 어떻게 언어를 변화시키고 그 언어의 달라짐이 어떻게 관계의 다름으로 이어지는가를 섬세한 시선으로 포착한 수작이다. 해성은 한국어로 말하는 열두 살 나영이나 스물네 살 나영과는 잠시 만날 수 있어도 영어로 말하고 글을 쓰는 노라와는 절대로 만날 수 없다. 서른여섯 살 노라는 그러므로 전생이나 후생에서나 겨우 만날 수 있을 텐데 그나마 어떤 관계, 어떤 모습으로 만날지는 선택할 수 없다. 현생의 노라 곁에서 노라와 함께 사는 아서는 한국어로 잠꼬대하는 노라를 볼 때마다 두려움에 떤다. 아서의 공포는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곳으로 가버렸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기인한다. 해성에게 나영은 떠난 사람이고 아서에게 노라는 언제 떠날지 몰라 불안한 사람이다. 디아스포라의 얼굴인 나영이자 노라는 이렇듯 늘 떠나고 떠날 예정인 사람이다. 그러나 노라가 해성을 공항으로 보낸 후 밤길을 걸어 집 앞에서 기다리는 아서에게 당도했을 때, 그의 품에 안겨 어린애처럼 울음을 터뜨리는 걸 보고 우리는 깨닫는다. 늘 떠나고 떠날 예정이었던 나영이야말로 마지막에 홀로 남겨진 사람일지 모른다는 사실을. 자의건 타의건 한 번의 바람에 날려 흩뿌려진 디아스포라의 조각은, 마침내 뿌리를 내리더라도 당분간은 불안하게 흔들리며 또 어디로 향할지 알 수 없어서 홀로 남겨진 채 끊임없이 유동하는 외로운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3. 〈조용한 이주〉: 운석이 만든 싱크홀은 만남을 상상하게 한다 〈패스트 라이브즈〉의 나영이 현재 살아가는 뉴욕을 ‘내 종착지고 내가 있어야 할 곳’으로 명명하고 선택한 것은, 미국이라는 공간과 영어라는 언어가 남편 아서처럼 ‘자신의 세계를 넓혀 주는 존재’가 되어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비록 캐나다라는 처음 이주지와 영어라는 언어는 나영의 부모가 결정하고 선택했겠지만 이후 노라라는 영어 이름과 영어로 글을 쓰는 작가라는 직업, 그리고 함께 글을 쓰고 대화하는 아서와의 결혼은 노라의 선택이었다. 선택이 가능했던 노라는 노벨상과 퓰리처상을 거쳐 지금은 토니상을 욕망한다. 그러나 처음부터 선택이 아예 불가능한 사람도 있다. 1973년 한국에서 태어나 덴마크에 입양된 말레나 최 감독은 자신의 선택과 무관하게 덴마크의 농장 가정에 입양된 한국 태생 칼의 이야기를 〈조용한 이주〉에 담아냈다. 말레나 최 감독은 한국계 입양인의 처지를 어느 날 갑자기 농장 들판에 떨어져 깊은 구멍을 낸 운석에 비유한다. 운석과도 같은 이방인 칼은 낙농업 강국 덴마크에서 아버지의 농장을 물려받을 예정이다. 〈패스트 라이브즈〉의 나영이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며 상승 욕망으로서의 이주를 보여 주었다면, 〈조용한 이주〉의 화면은 광활한 공간과 수평 이동만을 반복해 보여 준다. 이중 유일한 수직 이동이 운석의 낙하, 즉 서지훈이라는 이름의 한국 소년이 덴마크로 입양되면서 칼이 되는 순간일 것이다. 그렇다면 서지훈이었던 칼은 입양과 함께 무리 없이 아버지의 후계자 자리로 이동할 수 있을까?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가능하기는 한가? 〈조용한 이주〉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들이다. 칼 앞에 펼쳐진 세계는 언뜻 광활하고 풍요로워 보인다. 아버지 한스가 꾸려 가는 농장과 어머니 카렌이 살뜰하게 가꾸는 집과 부엌은 언젠가는 칼의 몫이 될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칼이 원한다면’이라는 전제가 없다. 과연 칼은 아버지의 농장과 어머니의 집을 물려받을 의지가 있는가? 영상 속 칼의 표정만 보면 그에게는 농장을 물려받을 마음이 없어 보인다. 농업 학교를 나온 것도 그의 뜻은 아닌 것 같다. 아니, 애초에 덴마크에 와서 칼이라는 이름을 부여받은 것부터 그의 의지는 단 한 방울도 섞이지 않았을 것이다. 칼은 늘 아버지가 시키는 농장 일을 묵묵히 수행하지만 쉴 때나 놀 때는 언제나 혼자다. 상상인지 기억인지 모를 곳에서 어린 칼은 밤의 들판에서 불붙은 공을 이리저리 굴리며 놀고, 농장 일을 마친 후 혼자 마을 농구장에 가며, 식구들과 밥을 먹고 외식할 때도 혼자만의 상상의 공간을 만들어 낸다. 사실 상상은 칼의 유일한 취미이자 특기인데, 칼이 상상으로 만들어 낸 공간에서 자신의 생모일지 모르는 아시안 여성을 만나고 동네에서 유일한 아시안 또래 여성과 사귀는 것은 현실에 칼을 위한 공간이 부재함을 드러낸다. 칼에게 현실은 소외와 상처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아버지는 칼에게 오직 자신의 농장을 물려받을 대체 인력만을 원하는 것 같고, 어머니는 오래전 유산한 자신의 아이를 향한 그리움에만 몰두하는 것 같다. 친척들은 칼 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인종 차별과 혐오의 말을 내뱉는데(“네 고향으로 가 버려!”), 아버지와 어머니는 상처받은 칼을 위해 나서 주지 않는다. 칼의 상처는 운석이 떨어지며 만든 깊은 구덩이처럼 검게 파였다. 디아스포라 칼은 정착에 실패하고 이대로 싱크홀 속으로 꺼져 버릴 운명일까? 아버지 앞에서 또 한 번 심각한 혐오 발언을 접하고, 동시에 어머니가 오래전 잃은 아기에게 침잠하는 모습을 목도한 칼은 스스로 싱크홀 안으로 들어간다. 그런데 이 싱크홀은 추락과 실패의 구덩이만은 아니었다. 싱크홀을 통과한 칼은 현재의 한국으로 이동한다. 아파트 옆 정자에서 정답게 대화를 나누며 멸치 똥을 따는 할머니들 곁을 지나가고, 버스 정류장에서 자신과 외모가 비슷한 사람들 사이에 끼어 앉고, 시끌벅적한 재래시장 통로를 지나간다. 시장에서 전집 주인이 건네는 동그랑땡 하나를 받아먹기도 하고, 생선 가게에 진열된 생선들을 신기하게 들여다보기도 한다. 그러다가 자신의 생모로 짐작되는 여성을 만나는데, 그 여성은 칼에게 다정한 미소만 건넬 뿐 말을 건네거나 손을 내밀지는 않는다. 칼의 상상은 딱 그만큼인데, 디아스포라 환경이 제한했을 칼의 상상과 욕망의 한계를 생각하면 안타까운 동시에 애틋한 마음이 든다. 결국 칼은 한국의 서지훈으로 돌아가지 않고 덴마크로 돌아온다. 그러나 싱크홀을 통한 공간 이동을 경험한 후의 덴마크는 이전과는 다른 장소가 되어 있다. 아버지는 칼에게 혐오 발언을 한 동료에게 덤벼들고, 어머니는 유산한 아기의 태아 사진을 보여 주며 “너보다 더 멋진 아이는 가질 수 없었을 거야.”라는 진심 어린 사랑을 고백한다. 칼은 아버지에게 “아빠, 나는 농부가 되고 싶지 않아요.”라고 솔직히 말한다. 칼과 한스와 카렌은 영화의 막바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진짜 가족을 이루고 새로운 출발점에 선다. 어떤 영화는 끝남과 동시에 새로 시작하고, 어떤 이주는 도착과 함께 새롭게 출발한다. 칼은 운석처럼 불현듯 덴마크에 닿았고, 영원히 마찰하는 것만 같은 성장기를 거쳐 싱크홀보다 검은 상처를 키웠지만, 스스로 상처 속에 뛰어듦으로써 조용한 이주의 한 마디를 완수했다. 영화는 끝났지만, 칼은 또 이동 중일 것이다. 이제 그에게는 선택의 여지라는 것이 생겼으므로. 그가 상상의 프레임을 조금 더 넓힐 수 있을지, 상상을 현실로 끌어와 실제 만남을 도모할 수 있을지, 결국 그의 선택이 어떤 이름과 장소에 도달하게 할지 계속 생각하게 하는 것, 이런 질문들이야말로 이 한 편의 디아스포라 영화가 우리에게 조용히 던지는 가능성의 씨앗들이다. 4. 〈로기완〉: 끊임없는 자기 증명의 압박 속에서도 포기할 수 없는 권리 이민이 어느 정도 선택의 결과이고 입양에는 자신의 선택이 개입하지 않는다면, 난민은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내몰린 선택의 결과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코리안 디아스포라 난민 서사 중 탈북자 이야기는 참혹한 현실과 그 안에서 어지럽게 교차하는 한국사로 인해 우리에게는 어느새 ‘가깝고도 먼 이야기’가 되었다. 이런 배경에서 영화 〈로기완〉은 넷플릭스 공개작, 유럽 현지 촬영, 원작 소설과의 관계 등으로 화제를 몰고 우리에게 당도했다. 영화 〈로기완〉은 북한 출신 남성 로기완이 탈북 후 연길에서 사고로 어머니를 잃고, 어머니의 시신을 팔아 마련한 돈으로 벨기에 브뤼셀에 와 난민 지위를 얻으려고 분투하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EU 난민 심사관은 로기완에게 정착금을 노리고 난민 신청 중인 조선족이 아니라 진짜 북한 출신임을 증명하라고 하지만, 로기완에게는 확고한 증거가 없다. 끊임없는 자기 증명을 요구받는 한편, 로기완은 당장의 생존을 위해 쓰레기통을 뒤지고 공중화장실 바닥에 누워 밤을 보낸다. 설상가상으로 어머니의 죽음으로 마련한 돈을 도둑맞기에 이르는데, 이 사건을 계기로 불안정하고 위태로운 삶을 살아가는 한국계 이민자 마리와의 관계가 시작된다. 로기완에게도 마리에게도 삶은 지독하게 비참하고 희망 따위는 보이지도 않는데, 북한과 남한이라는 비슷하면서도 다른 두 사람의 출신지가 대변하듯 내일이 없는 두 청년의 삶은 코리안 디아스포라의 두 얼굴을 동시에 보여 준다. 앞서 말한 책에서 다와다 요코는 “집이란 가족도 건물도 아니고, 문화와 친구들로 이루어진 공간”이라고 말한다. 이 개념으로 다시 보면 로기완과 마리는 집 없는 사람들이다. 로기완은 연길에서 어머니를 잃는 순간 집도 잃었고, 마리는 어머니의 안락사 사실을 알게 되면서 스스로 집을 버렸다. 로기완이 집을 뺏긴 사람이라면 마리는 스스로 집을 불사르고 나온 사람이다. 이런 두 사람이 처음으로 서로에게 집이 되어 준 순간이 있다. 그 신기루 같은 공간에서 두 사람은 함께 밥을 먹고 사랑하며 짧은 시간을 보냈다. 로기완은 자신이 탈북자임을 증명할 서류가 없지만, 그가 탈북자임을 단번에 알아본 사람이 있다. 로기완이 생존을 위해 한국인이 운영하는 정육 공장에 조선족으로 위장 취업했을 때 만난 선배 직원이자 조선족 여성인 김선주는 로기완의 “이켔시오, 저켔시오.” 하는 말투만 보고 그가 북한 출신임을 알아본다. 말끝마다 ‘동무’를 붙이는 로기완에게 “너를 버린 곳이 뭐가 좋아서 계속 그곳 말을 쓰냐.”라고 타박하면서도 김선주는 로기완의 신분 증명에 도움을 주겠다고 약속한다. 김선주에게 한 사람을 증명하는 근거는 출생증명서 같은 서류가 아닌 그 사람의 몸에 밴 언어였던 것이다. 〈패스트 라이브즈〉의 나영과 해성, 노라와 아서가 달라진 언어로 인해 관계에 끊임없이 간섭을 받았던 것에 반해, 〈로기완〉의 기완과 마리가 만나자마자 서로를 알아보고 상대에게 집이 되어 주는 사랑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은 두 사람이 한국어라는 같은 언어를 쓴 덕분일 것이다. 이 생각을 조금 더 확장해 본다면 집 없는 디아스포라에게 집이 마련되는 시작점은 이해 가능한 언어가 생기면서부터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즉 언어가 이해를 시작하고 언어가 관계를 구축하며 언어가 잠시나마 집이 되어 준다. 여기서 언어란 단순히 발음 기관을 통해 조성되는 음성 언어만을 뜻하지는 않을 것이다. 지난한 심사 과정을 통과해 마침내 브뤼셀에 정착할 권리를 획득한 로기완은 정착할 권리가 생기자마자 떠날 권리를 향해 출발한다. 이때 정착할 권리, 떠날 권리의 대상은 집이라는 물리적 공간을 넘어 언어와 관계라는 공간으로 확장된다. 즉 로기완은 브뤼셀에서 쫓겨나지 않고 살아갈 권리를 손에 넣자마자 새로운 집, 달라진 언어, 다시 찾고 싶은 관계를 추구할 권리가 필요해진다. 투쟁은 계속되고, 이것이 디아스포라의 또 한 가지 본질이다. 5. 맺으며 디아스포라의 본질은 이동이다. 유동이기도 하고 변화나 변신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서울에 살던 열두 살 나영이 캐나다로 와 백인 아이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열두 살 노라와 같은 사람일 수 없듯이, 덴마크 백인 남성에게 혐오 발언을 듣고 운석이 뚫어 놓은 싱크홀로 들어가 버린 칼은 한국의 아현시장에서 전집 주인이 건넨 동그랑땡을 받아먹고 빙그레 웃는 칼과 결코 같은 사람일 수가 없다. 이들은 끊임없이 이동하며 디아스포라의 조각들을 씨앗으로 흩뿌리고, 이 씨앗들은 저마다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 새로운 이야기를 탄생시킨다. 이렇게 태어난 이야기들이 우리에게 떠난 사람이자 남겨진 사람인 나영(노라)의 울음을, 운석처럼 낯선 땅에 떨어진 칼의 막막함과 쓸쓸함을, 자기 증명의 압박 속에서도 언어와 관계의 끈을 놓치지 않는 로기완의 분투를 전해 준다. 그러므로 이동을 본질로 하는 디아스포라는 더불어 이야기의 전파를 창출하고, 이렇게 전달된 이야기는 우리를 이전과는 다른 세계로 데려간다. 다시 말해 이동과 변화의 동의어인 디아스포라 이야기는 우리까지 디아스포라의 한 조각으로 삼아 새로운 이야기의 씨앗을 도모한다. 요컨대 함께 이동하기 혹은 함께 달라지기를 창출하는 것이야말로 디아스포라 문화 콘텐츠의 수행 방식이라고 말하면 어떨까? 각주 1) 서경식·다와다 요코 지음, 서은혜 옮김, 『경계에서 춤추다』, 창비, 2010.

기억 노동자와 감정의 모범 시민

한나 미셸 영국

ⓒ 한국문학번역원 1. 서문   한국계 미국 시인이자 수필가인 캐시 박 홍이 『마이너 필링스(Minor Feelings)』에서 썼듯, 역사적으로 제한된 수로 미국에서 출판된 한국계 미국인의 소설은 주류에서 들을 수 있는 이민 생활의 ‘단 하나의 이야기’, 즉 민족의 문화를 이국적으로 그리고 이주의 혼란에서 야기되는 불행을 탐구하는 것을 의미했다. 종종 이런 이야기들은 문화적 충돌에 대한 은유로써 세대 간의 긴장을 불러일으켰지만 인종차별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피했다.   2023년에는 전례 없는 권수의 한국계 미국인의 소설이 출판되었다. 35권의 출판 도서 제목들은 다양한 장르를 대변한다. 신화적인 이야기부터[Sea Change, 지나 정(Gina Chung)] 사변 소설[Flux, 정진우(Jinwoo Chong)], 그림책[Goblin Twins, 프란시스 차(Frances Cha)], 로맨스[The Do-Over, 수잔 박(Suzanne Park)], 스릴러[Fortune, 엘렌 원 스테일(Ellen Won Steil)] 그리고 미스터리[What We Kept to Ourselves, 낸시 주연 김(Nancy Jooyoun Kim)]까지 있다. 이 도서 목록의 한층 풍부해진 다양성이 한국계 미국인의 경험을 다채로운 현실로 대변함과 동시에 형식적인 실험 모두 가능하게 했다.   2017년 이후로 ‘오스카는 백인 위주(#OscarsSoWhite)’ 캠페인과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 같은 운동이 할리우드와 출판계에 인종에 대한 인식을 불러왔다. 더 폭넓은 다양성과 포용력에 대한 필요성을 강조하며, 이런 운동들은 표현의 다양성과 전통적으로 백인 중심적이었던 문화 기관과 역사에 대한 비판적 재검토라는 요구를 북돋웠다. 이와 같은 백인중심주의는 자주 유색 인종의 이야기를 틀에 박히게 박제하고 대중에게 다가갈 서사의 범위를 제한시키는 방식으로 소외시키고 말살하고 말았다. 주로 백인의 경험과 시각에 집중한 이런 이야기들은 역사와 문화에 대한 좁고 왜곡된 이해를 낳는 데 일조한다.   이런 인식에 응해 아시아계 미국인의 경험에 집중된 몇 편의 영화들, 〈페어웰(The Farewell)〉(2019), 〈미나리(Minari)〉(2020),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2022) 같은 영화들은 관객을 사로잡았다. 일부에서는 동아시아 디아스포라 시네마의 황금기로 들어선 것이 아닌가 하는 관측을 낳기도 했다. 이 영화들의 돋보이는 가시성은 여러 이유에서 중요하다. 첫 번째, 오랜 고정 관념에 대항하여 더 섬세하고 다양하고 또 진정성 있게 표현된 아시아계 미국인의 삶을 담는 데 도움이 된다. 지나치게 단순화한 비유나 들러리로 아시아인 등장인물들을 국한하는 대신, 이 영화들은 풍부하고 다양한 경험을 겪은 복잡한 인물들을 보여 준다.   두 번째, 동아시아 디아스포라 시네마는 아시아계 미국인 창작자들이 그들 자신의 서사와 목소리에 대해 주도권을 갖도록 한다. 역사적으로 서구 미디어 속의 아시아인 등장인물들은 오리엔탈리스트의 시선을 통해 묘사됐고, 이들을 이국적으로 또 비인간적으로 그렸다. 아시아계 미국인 영화감독들과 배우들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직접 만들고 주연하는 일은 그들의 현실과 열망을 반영하는 사회를 표현하게끔 한다. 이런 변화는 문화 경관만을 향상시킬 뿐 아니라 다른 공동체에 걸쳐 더 큰 공감과 이해를 조성한다.   이 글에서는 미국 자본주의 통치 아래 살아가는 데 드는 정신적 및 경제적 삶의 비용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두 편의 영상 작품 〈성난 사람들(Beef)〉(2023)과 〈패스트 라이브즈(Past Lives)〉(2024)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이 작품들은 동아시아인을 묘사할 때 지배적이었던 ‘모범적인 소수 민족’ 신화에 도전하는 한편 이산된 인물들 간의 정서 표현을 확장한다. 이와 별개로 2023년에 출판된 세 편의 소설 『발굴(Excavations)』, 『해방자들(The Liberators)』, 그리고 퓰리처상 최종 후보에 오른 『동상이몽(Same Bed Different Dreams)』에 대해 논의하고자 한다. 이들 소설은 탈식민지화된 역사의 필요성에 대한 고조된 인식을 반영하고, 과거의 확고히 굳어진 진실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성난 사람들>   이성진 감독이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한 〈성난 사람들〉은 보복 및 난폭 운전 사건으로 시작된 이야기가 사회·경제적으로 다른 배경을 가진 두 명의 아시아계 미국인의 삶을 극적으로 변화시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극 중 대니 조는 힘든 상황에 놓인 도급업자이고 에이미 라우는 성공적인 사업가이다. 이 둘의 첫 충돌은 가중된 복수 행위로 이어지며 악화되고, 이를 통해 각각의 인물들이 개인적, 직업적 삶에서 직면하고 있는 스트레스와 절망을 보여 준다.   이 시리즈는 아시아계 미국인 출연진이 주축이 된 보기 드문 아시아계 미국인 제작물로, 인종 및 계급 배경이 다른 개개 인물들의 다양한 경험을 섬세하게 묘사한다. 역사적으로 ‘모범적인 소수 민족 신화’는 아시아계 미국인에 대한 묘사를 밋밋하게 만들었다. 민족성 혹은 계급에 기반한 구별을 제한하는 한편 조용하고 근면하며 사회 변화를 위한 캠페인을 위해 타인과 결집하기보다는 개인적 책임감을 수용함으로써 변화를 성취하는, 본래 성공적인 사람들이라는 획일적인 이미지를 고착화했다. 이런 이야기는 아시아계 미국인을 다른 인종 그룹과 비교하고 아메리칸드림이 순전히 노력과 결단력만 있다면 달성할 수 있다는 관념을 강화하는 데 이용되었다.   〈성난 사람들〉은 주인공들의 경제적 분투에 뒤따르는 감정적 대가를 조명하며 이 신화에 반기를 든다. 도급업자 대니는 노동 계급 이민자 부모가 아메리칸드림에 실패하고 한국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보았다. 반면 에이미는 수익성 좋은 계약을 눈앞에 두고 있지만 인수를 성사시키기 위해 입맛대로 하는 백인 사업주 곁에 남기로 한다. 가시적인 성공에도 불구하고 에이미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한계 이상으로 자신을 내몰며 분노를 억누르며 살아가고 있다.   〈성난 사람들〉은 사실상 ‘모범적인 소수 민족 신화’의 허상을 폭로하며, 자본주의 아래 성공에 대한 기대에 뒤따르는 정신 건강의 대가와 내재화된 분노를 드러낸다. 캐시 박 홍이 말하듯 “민족 문학 프로젝트는 늘 비백인 작가들이 본인들도 고통을 느끼는 인간임을 증명해야만 하는 인본주의적 프로젝트였다.” 아시아계 미국인 등장인물들이 무대 중심에 서게 되면서 모범적인 소수 민족 신화 아래 살아가는 이들이 직면한 정신적 비용과 극심한 압박은 정체성의 어떤 내재된 측면이 아시아계 미국인의 성공을 실현하게 한다는 생각에 문제를 제기한다.   아시아계 미국인 공동체와의 직접적인 관련성 이상으로, ‘모범적인 소수 민족 신화’에 대한 비판은 자본주의에 대한 더 광범위한 비판을 구성한다. 그뿐만 아니라 능력주의의 거짓 약속을 폭로하고, 경제적 불평등을 조명하고, 또 끝없는 성공 추구로 인한 감정적·정신적 건강의 대가를 드러낸다. <패스트 라이브즈>   셀린 송이 연출한 〈패스트 라이브즈〉는 가슴 아픈 로맨틱 드라마이다. 이야기는 어린 시절 친구 사이였던 노라와 해성의 관계를 탐구한다. 이 둘은 노라의 가족이 한국에서 캐나다로 이민을 가며 헤어졌다. 세월이 흘러 노라(현재 뉴욕에서 극작가로 활동 중인)와 해성(여전히 한국에 사는)은 온라인에서 다시 만나고, 그들 간의 유대감은 되살아난다. 둘 사이의 물리적 거리와 서로 다른 삶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사랑의 감정과 상황이 지금과 달랐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으로 고심한다. 영화는 유대계 미국인 작가 아서와 결혼 후 뉴욕에 사는 노라를 해성이 방문하는 데서 정점에 이른다. 이 방문으로 해성과 노라는 서로를 향한 감정에 직면하게 되는 만감이 교차하는 재회를 하게 되고, 서로 떨어져 지내며 이룬 삶에 대해 반추하게 된다.   〈패스트 라이브즈〉는 표면적으로는 한 여자가 자신의 어린 시절 연인과 있었을 법한 일을 상상하는 이야기지만, 영화는 그 이면에서 미국과 한국에 대한 그녀의 이중적인 애착을 들여다본다. 노라와 해성 사이의 교류는 노라의 소통 가능하지만 제한된 한국어 실력 때문에 피상적이다. 노라에게 해성이라는 인물도 여자 친구와 잠시 떨어져 시간을 갖고 있고 중국으로 유학을 갔다는 몇몇 사실 외에는 알 수 없는 존재이다. 하지만 그에 대한 전개의 부진함이 또한 중요한 부분일지 모른다. 해성이 얄팍한 인물로 느껴진다면, 그 이유는 서툰 노라의 한국어 실력으로는 그에게 피상적인 접근만이 가능하기 때문일지 모른다. 해성은 노라에게 표피적으로만 알 수 있는 어떤 친숙한 공간을 상징하는 존재이다. 하지만 이 공간은 또한 원시적이고 그녀에게 최초의 고향이었다. 한 대화 장면에서, 아서는 노라에게 그녀가 자주 잠꼬대를 한국어로 말한다고 이야기한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언어로 너는 꿈을 꿔……. 네 안의 한 곳은 내가 갈 수 없는 곳이야.” 이민자로서 노라의 존재는 구획화된다. 미국에서 그녀의 삶은 성공한 극작가로서 또 다른 많은 실질적인 기회라는 포부를 품게 했지만, 감정적인 측면에서는 그녀는 온전히 살지 못한다. 대신 그녀는 의식적으로 또 무의식적으로 한국을 향한 깊은 그리움을 느낀다. 그녀의 이런 부분은 그녀의 남편에게는 접근할 수 없는 영역이다. 더 정확하게는 그녀가 미국에 있는 한 그렇다.   해성을 떠나보내는 노라의 상실감은 정신적 상실과 기회 추구로 인한 애착의 단절을 잘 보여 준다. 미국이 자아실현의 장소일지 모르지만 감정적으로 노라가 진실로 살아 있는 곳은 아니다. 현실적 삶의 감정적 대가에 대한 생생한 묘사는 자본주의하에서 일어나는 끊임없는 노력이 한 개인을 무감각하게 만들고 인간 이하로 만들 수도 있음을 암시한다. 2. 기억 노동자로서 디아스포라 소설가 “   나라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몰랐다면 그들은 역사를 이해하지 못했다. 역사를 이해하지 못했다면 그들은 자신이 누구인지도 몰랐다. ―『발굴』 중에서 ”   민권 시대 동안 대두된 소수민족학의 목적은 전통적인 학문 영역에서 자주 간과하거나 왜곡된 유색 인종에 대한 이야기와 역사를 재구성하기 위한 것이었다. ‘오스카는 백인 위주’와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와 같은 운동의 출현은 주로 학계에 국한됐던 역사 탈식민지화의 필요성에 대한 담론을 주류 대화 속으로 가져왔다. 이런 운동들은 역사적 서사를 구축하는 권력 역학과 그간 무시되고 억압된 소수 집단의 목소리와 역사에 더 큰 관심을 불러왔다.   니콜 한나존스의 『1619 프로젝트』는 미국 기원 이야기 속의 건국 아버지들 영웅주의 신화가 어떤 식으로 흑인 노예 제도의 잔혹한 현실을 덮어 버리는지 잘 보여 준다.   그녀의 작업은 대중문화와 기념물들로 인해 오랫동안 가려진 역사적 관점을 드러내는 데 큰 관심을 불러왔다. 한나존스가 주장한 것처럼 “국가는 과거에 대한 시민들의 이해를 공유하며 국가의 형태를 유지하기 때문에, 국가는 국가적 기억을 통제할 필요가 있다.” 이 발언은 우리가 말하고 기억하는 이야기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한국계 미국인 작가들은 역사에 대한 비판적 질문의 필요성을 받아들였다. 한국계 미국인 작가 알렉산더 지(Alexander Chee)가 말하듯 한국사는 보통 학교에서 가르치지 않고, 이 때문에 한국계 미국인들은 한국사를 다른 방식으로 배워야 한다. “   가족이나 친구를 통해, 자주 복음주의 교회와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운영하는 한국 학교 프로그램과 그 교회들의 여름 프로그램에서, 동아시아 연구 및 아시아계 미국인 연구 학부 수업에서, 한국인과 한국계 미국인 소설, 논픽션, 시, 회고록 등에서 가족과 선생님들이 말해 줄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모든 것들을 배운다. ”   대학교 수준의 아시아계 미국인 연구 프로그램에서조차 한국사를 포괄적으로 다루는 경우는 드물다. 대신 그 프로그램의 교과목은 미국과 한국의 관계, 한국 전쟁, 미국 제국주의와 연관한 한반도의 분단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한국계 디아스포라 소설가들은 산재한 자료로부터 과거를 발굴할 뿐만 아니라 역사 기록물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권력 역학 관계, 정서적 감정가, 기억 및 구전 전통 등을 해석하는 기억 노동자로서의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나는 ‘기억 작업’이라는 시각을 통해 세 편의 소설 『발굴』, 『해방자들』, 『동상이몽』을 분석하고자 한다. 이 소설 작품들은 한국사에 대해 탐구하고, 동일한 역사적 사건을 다룰지라도 각각의 소설은 이 사건들의 의미를 묻고, 역사를 더 광범위하게 사고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새로운 물음을 제기한다. 그들의 탐구는 역사적 기억의 복잡성과 함께 과거를 이해하는 데 있어 다양한 이야기의 중요성을 밝히는 데 도움이 된다. 『발굴』   내 소설 『발굴』은 아시아계 미국인 연구에 대한 내 학문 작업에서 영향을 받았다. 한국에서 자라고 영국에서 공부를 한 나는 아시아계 미국인 역사에 대한 내 지식에 어떤 구멍이 있음을 깨달았다. 예를 들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계 미국인들의 수감 사실에 대해 나는 배운 적이 없었다. 곧 나는 미국 역사 교과목에서 보편적으로 배우지 않는 이 역사적 사건에 대해 사실 많은 학생들이 무지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로부터 기억 노동자로서 한국 현대사를 탐구하는 나만의 역사 기록 여정이 시작됐다. 나는 곧 서울에서 있었던 학생들의 정치적 시위에 대한 내 직접적인 기억과 한국사 담론 내 이 운동에 대한 상대적인 침묵 사이의 불협화음에 주목했다. 종국에는 내 소설 『발굴』이 된 프로젝트를 위한 리서치를 시작하며 나는 서대문형무소 박물관을 방문했다. 놀라웠던 점은 전시가 일본이 저지른 만행의 역사에 초점을 맞출 뿐 30년간의 독재 정치 동안 정치범들에게 일어난 일에 대한 가시적인 증거나 담론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기억과 역사의 정치성에 대한 내 인식은 급속히 확산되던 케이팝(K-pop)의 인기와 동시에 커졌다. 한류를 연구하는 학자로서 소프트 파워, 즉 정치적 화폐를 창출하는 수단으로써 문화라는 주제는 점점 더 피할 수 없음을 느꼈다. 한국에 대한 새로운 브랜딩의 한 축은 경제적 기적에 집중되었다. 이는 한국전쟁 후 세계에서 두 번째 가는 빈민국에서 반세기 만에 세계 10위의 경제 대국으로 부상한 점이다.   소설 『발굴』은 어머니이자 전직 기자, 전 학생 운동가인 한 여자의 여정을 따라간다. 그녀의 남편은 그가 일하던 고층 건물 야망 타워가 무너지고 실종된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빌딩 건축을 감독한 대기업 사장과 독재자의 압축 개발 정책과 권위주의적 관행에 대항해 시위한 한 여자 사이의 대화로 이어진다.   한국의 가부장적 문화 안에서 성별에 따른 노동 구조로 인하여 일반적으로 남자들이 한국 경제 성장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예를 들어 인기를 끈 영화 〈국제시장〉에서는 한국 경제에 기여한 남자들의 공헌과 희생은 강조되는 반면, 여자들의 경험과 공헌은 드러나지 않는다. 나는 가부장제와 압축 성장의 환경 속에서 한국 여자들의 경험을 밝히고자 『발굴』을 썼다.   이 소설을 쓰며 나는 우리들 개인의 삶과 인간관계, 그리고 우리 역사 안에 존재하는 사각지대를 살펴봐야만 한다고 느꼈다. 『발굴』은 사실상 한국에서 일어난 사건과 한국사를 다루지만, 이 소설은 트럼프 재임 기간 동안 집필되었다. 믿을 수 없고 부패한 사장과 가짜 뉴스가 만연한 트럼프 시대에 트럼프의 우선순위를 연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미국 청중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려는 뜻에서 썼다. 『해방자들』   『해방자들』은 회고록 작가이자 시인 고은지(E.J. Koh) 작가의 데뷔소설이다. 4대를 아우르는 소설은 1980년 대전에서 시작된다. 이야기는 군사 독재 시절 아버지를 잃고 남편 성호를 따라 미국으로 건너가는 인숙의 운명을 그린다. 『발굴』과 같이 소설은 한국사의 많은 중추적 사건을 다룬다. 일제 항복 후 한국인의 송환부터 5·18 민주화운동, 1988년 서울올림픽 개최, 그리고 근년의 세월호 참사까지. 한국을 배경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는 첫 몇 챕터에서 고 작가는 이민을 갈 수밖에 없게 만드는 폭력을 생생히 표현하며, 한국 이민자들이 그저 아메리칸드림을 좇기 위해 미국에 온다는 통념을 흐린다. 미국에 온 이후로도 등장인물들은 한국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 계속 영향을 받는다. 휴전 이후 남북 정상이 처음으로 만난 남북 정상 회담과 세월호 침몰과 같은 중대한 순간들을 미국에서 관심 있게 지켜보는 모습은 그들이 고국과 가지는 지속적인 연결감을 보여 준다.   고 작가의 산문은 지적이고 사정을 잘 아는 독자를 상대로 한 듯 시적이며 단출하다. 미국 독자들에게 사건들을 설명하고 전후 사정을 밝혀야 할 필요성을 느꼈을지 모를 이전 세대 한국계 미국인 작가들과 달리, 고 작가는 사건들이 등장인물들에게 개인적 차원에서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탐구하는 데 더 관심이 있다. 교도관들과 수감자들, 가해자들과 해방자들처럼 이 소설의 묘미는 다양한 관점을 표현한다는 데 있다. 이런 식의 다중의 목소리를 통한 접근으로 고 작가는 소설의 시각을 넓혀 주고, 권력자와 비권력자 모두의 관점에서 역사적 사건에 대해 공감할 수 있는 시야를 제공해 준다.   한 인터뷰에서 고 작가는 이 소설에서 의도한 바는 “파괴와 복구의 얽힘”과 개인적이고 집단적인 기억이 역사 안에 부호화되는 방식을 탐구하는 데 있다고 말했다. 소설 속 등장인물을 통해 고 작가는 역사를 현재에서 해결해야 하는 유산의 한 형식으로 접근한다. 이런 접근은 그녀가 개인과 공동체에 가해지는 역사적 트라우마와 회복력이 계속 이어지는, 세대 간 영향에 대해 탐구할 수 있게 한다.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다른 시간대를 넘나드는 소설의 구조는 분열되었지만 서로 연결된 등장인물들의 삶의 성격을 반영한다. 각 세대는 그 세대만의 고난과 업적을 살아 내지만, 그들 모두 자신들의 정체성과 운명을 규정하는 공통의 역사에 매여 있다. 고 작가는 한국사와 이민 경험에 대한 다면적인 관점을 제시하며 독자들에게 기억과 정체성, 그리고 유산의 난해함에 대해 헤아려 볼 자리를 마련한다. 『동상이몽』   에드 박의 야심 찬 소설 『동상이몽』은 역사의 복잡성을 탐구하기 위해 여러 장르와 서사의 실타래를 엮는다. 한편으로는 과학소설이면서 또 한편으로는 순 쉰(Soon Sheen)이라는 작가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소설은 쉰의 손에 우연히 들어온 미출판 원고라는 제3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 원고는 1919년 항일 독립운동을 위해 세운 실제 조직인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그린 “꿈”이라는 논픽션 역사 기록물이 주를 이루는 모음집으로 드러난다.   소설은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세 명의 학자들 간의 기획된 논쟁으로 시작한다. 그들 사이의 지적 대결 중에 청중 가운데 한 사람은 쏟아지는 잠과 씨름한다. 그 모습은 공식 기록에서는 삭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기록되어 조직 외부로 퍼지게 되고 역사의 한 부분이 된다. 도입부에서는 역사적 서사가 지워 버리는 것에 대한 소설의 관심을 드러내고 박 작가가 그리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해체된 적 없는 한 세계를 위한 무대를 설정하여 역사적 사건에 대한 관습적인 이해에 맞선다.   소설에는 나운규(한국 최초의 현대 영화로 알려진 영화 〈아리랑〉의 제작자)와 같은 실제 역사적 인물들과 예술가들이 짧게 등장하지만, 소설은 많은 역사적 사실들을 왜곡하며 독자들에게 그들 지식의 진위성과 완전성에 대해 심문하게 한다. 소설의 이야기를 관통하는 것들은 얼핏 보기에는 사소한 단편들과 세부 사항들이지만, 함께 모여 더 큰 그림을 보여 주는 직소 퍼즐의 조각들처럼 그것들은 이후에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   알렉산더 지는 이 난해한 소설이 “역사에 대한 실제적인 표현”이라기보다 “조국에 대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미국인과 한국계 미국인 독자들을 향한 도전”이라고 표현했다. 소설의 퍼즐과 같은 구조는 자주 총체적인 교육 과정의 부재 속에서 한국사와 한국계 미국인의 역사를 모두 이해하려고 애쓰는 많은 한국계 미국인들의 경험을 반영한다. 이런 서사 테크닉은 독자를 이야기 속으로 끌어들이면서도 역사 기록의 파편화되고 종종 불완전한 특성을 주변부의 관점으로 역설한다. 3. 결론   최근 인종에 관한 인식은 다양한 문화적 작업에 대한 더 많은 관심을 요구한다. 그에 호응해 우리는 이제 보다 입체적이고 감정을 담은 더 많은 이야기와 등장인물들을 만나기 시작했다고 믿는다. 또한 우리는 과거를 향한 다른 관점과 해석에 살을 붙이는 데 도움이 되는 역사에 대한 한층 복합적인 접근 방식들을 목격하고 있다. 다행스럽게도 동일한 역사적 사건을 단 하나의 이야기가 대신하던 시대는 복수의 해석이 환영받는 시대로 대체되었다. 『동상이몽』의 도입부에 나오는 ‘역사란 무엇인가?’ 하는 그 질문을 다시 한번 던져 본다. 이번에는 객관식으로 물어본다. 역사란 무엇인가?   ㄱ) 중대한 교훈   ㄴ) 심심풀이   ㄷ) 상징의 총합   ㄹ) 고통의 기록   역사가 무엇인지 묻는 질문에 다른 답변들도 덧붙이고 싶다. ㄱ) 우리 정체성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한 열쇠, ㄴ) 권력 시스템에 대한 의문, 또는 ㄷ) 오늘날까지 파급 효과를 미치는 유산. 아마도 정답은, 단 하나의 유일한 답이 존재하기보다는 ㅁ) 위의 모든 것이 아닐까. 번역정보 번역 : 김래이 (영 → 한)

너머의 새 글

너머의 한 문장

머지않아 두텁고 묵직한 어머니의 솜이불이 생각나는
계절이 눈과 함께 찾아올 것이다.

김재동 「 목화 꽃 」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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