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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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호

유학과 이민 사이

김지윤

  올해로 브라질에 온 지 칠 년이 됐다. 육 년이 되던 해에 박사과정을 마쳤다. 긴 시간 동안의 박사과정을 마치고 나니 한국에 있는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이 이제 한국에 돌아오느냐는 것이다.
  ‘글쎄요’라고 말하지만, 사실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정말 그런가……’ 복잡한 마음이다.
  몇 년 전 겨울, 오랜만에 한국에 갔을 때 예상치 않았던 낯설고 사소한 순간들에 여러 번 놀랐다. 나의 존재가 아직 한국에 절반쯤 남아, 한국 가면 먹을 음식 리스트를 꼼꼼히 만들어 놓았을 만큼 한국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득 차 있던 시절이었다. 비행기에서 내려 짐을 찾고 벅찬 마음으로 공항 철도에 올라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지하철 안의 숨막히는 고요가 만들어 낸 차갑고 낯선 공기에 상처받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했다. 지하철은 트렁크를 든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고 그렇게 많은 사람이 타고 있다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조용했다. 천장에서 나오는 히터의 따뜻한 바람이 텁텁하게 숨을 조여 오며 내는 소리가 들릴 지경이었다. 그 침묵은 서로가 서로에게 절대로 다가가지 마시오라는 경고 같았다. 감각적으로는 그 안에 있는 모두가 서로의 존재를 인지하고 있는 것이 분명한데, 사람들 사이에 얇고 투명한 유리 막 같은 것이 있기라도 한 듯, 서로가 서로를 예민하게 외면하고 있었다. 행여나 눈이 마주칠까 애써 무심한 시선들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호기심을 드러내는 것이 멋쩍어 감추려 하는 것 같기도 했고, 나도 당신에게 피해와 당혹감을 주지 않을 테니 당신도 그렇게 해달라는 엄중한 경고 같기도 했다.
  ‘아, 잊고 있었다.’
  출퇴근 시간 지하철 안에서 느껴지던 익숙한 공기. 서로가 서로에게 남이라는 걸 확실히 하려는 듯한 긴장감. 그날 공항철도 지하철에서 한때 익숙했던 그 공기에 나는 조용히 상처받은 채, 창 너머로 펼쳐지는 살풍경한 한국의 겨울을 멀리 바라보았고, 그런 나를 보면서 헛웃음이 나왔다.

  내가 살고 있는 이곳은, 네가 누구든 여기가 어디든 지금 이 순간 내 앞에 나타난 네가 있다는 것을 내가 인지했다는 것을 어떤 식으로든 반드시 표현하는 사회다. 브라질 사람들은 거의 언제나 너에게 말을 걸고 언제라도 네게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슈퍼마켓에서 줄을 서 있을 때, 조깅을 하다가 반대 방향에서 달려오는 사람과 잠시 스쳐 갈 때, 횡단보도의 신호 대기가 길어질 때, "줄 진짜 기네, 안 그래요?" "뛰기 딱 좋은 날씨죠!" "이 신호등 대기 진짜 길지 않아요?"라며 말을 건넨다. 상황만 듣고 보면 불쑥 건넨 말들 같지만 남들을 향해 늘 열려 있는 공기를 함께 숨쉬기 시작하면 모든 게 자연스러워진다. 침묵이 어색해질 때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으면 무례함이나 퉁명함으로 변해 버리는 일도 흔하다.

  브라질 사람들의 이런 서슴없음이 나를 힘들게 하던 시절이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맥락도 없이 건네 오는, 가끔은 무슨 뜻인지도 얼른 이해가 되지 않는 문장들에 깜짝 놀라며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어 당혹스러웠다. 그런 상황이 싫어 밖으로 나가고 싶지 않았던 날도 많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내게 건네진 그 문장들이 ‘아, 당신이 내 앞에 존재하는군요!’라는 말로 들리기 시작했고, 그 서슴없음에 익숙해져 갔다.

  사람이란 얼마나 간사, 아니, 신기한가. 몇 년이나 지났다고, 이제는 한국 땅에서 지하철 안 모르는 사람들과 한담을 나누고 싶은 마음이 들고, 아무도 모르는 사이 그 마음이 외면당하자 상처받는 모습이라니.
  한국에서 브라질까지는 가장 빠른 비행기 노선을 이용해도 스물여섯 시간 이상이 걸린다. 그러나 돌아보면 내가 한국에서 브라질로 이동해 온 시간은 그보다 훨씬 오래 걸렸던 것 같다. 상파울루의 지하철에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맥락 없는 대화가 소리에서 말로 바뀌는 시간만큼 걸려 나는 브라질에 도착했다. 아니, 여전히 도착하고 있는 중이다.
  얼마 전, 폴란드 작가 올가 토카르추크가 쓴 『다정한 서술자』라는 책을 읽다가 "오해라는 건 대체로 맥락에 대한 무지로 인해 겪는 외로움이자 일종의 거리감을 의미한다"라는 글귀에 한참을 머물러 있었다. 오해가 외로움이라는 걸 언어로 봐 내는 능력에 감탄하느라 시간이 걸렸다. 이 문장은 '헤르메스의 과업, 즉 번역가들이 날마다 어떻게 세상을 구원하고 있는가에 대하여’라는 제목이 달린 글 중, 번역가들이 우리 모두를 외로움과 거리감에서 끝없이 구원하고 있다는 결론으로 다가가고 있는 내용의 초반부에 있었다. 맥락에 대한 무지와 언어를 이해하지 못해 겪는 외로움이 해방감으로 변하는 상황이 바로 낯선 언어를 쓰는 낯선 나라에서의 여행이라는 부분을 거쳐서.
  이 문장들을 읽으며, 낯선 언어에 둘러싸여 있는 것이 더 이상 해방감이 아니라 외로움이 될 때 여행은 끝나고 낯선 곳에서의 삶이 시작되는 것은 아닐까, 나와 여기 몇 안 되는 내 한국 친구들이 느끼는 밑동 빠진 외로움은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온전히 이해하고 느낄 수 없는 이 낯선 언어 때문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브라질에 도착하고 대략 반 년쯤 지나고부터, 큰 문제 없이 포르투갈어로 혼자 일상을 영위할 만큼의 의사소통이 가능하게 됐다. 그 즈음 나는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했는데, 그건 내가 마치 유령처럼 부유하고 있고 사람들이 나를 ‘진짜로’ 보지 못하고 있다는 이상한 감각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땅에 발을 단단히 딛지 못하고, 누구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의 거리를 미세하게 유지하며 땅 위에 둥둥 떠 허공을 내딛는 시간들이 안겨 준 불안과 고립감. 이제는 많이 희미해졌지만 영영 사라질 것 같지 않은 그 감각들이 어쩌면 내가 아직도 브라질로 이동하고 있는 중이라는 증거일지도 모르겠다. 한국이 아닌 곳에서 사는 한 어쩌면 나는 끝끝내 이동 중에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종종 한다.
  몸 구석구석을 거쳐 나를 채우지 못한 채, 머리에서 입으로 직선으로 나갔다가 귀를 통해 다시 머리로 직진해 들어오는 이 낯선 언어 속에 사는 한, 내 몸은 매일매일 한없이 가볍고, 자꾸만 땅 위로 떠오르려 하는 나의 존재를 붙잡기 위해 애써야 할까.
  언젠가 이 낯선 언어가 내 몸 구석구석을 통과해 내게 중력을 되돌려 줄 때, 나도 모르는 사이 유학생에서 이민자가 되는 것인지, 아니면 이민자라도 내 나라 바깥에 있는 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 것인지, 나라 밖에서 나처럼 부유하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매일 낯선 땅을 디뎌내는지 잘 모르겠다. 다만 어디에도 답은 없고 몸소 살아봐야만 알게 되는 것들은 때때로 그 값이 좀 가혹하지 않나 하는 생각만 하릴없이 해본다.

필자 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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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전라남도 광주광역시에서 태어났다. 서강대 중국문화과 졸업, 한국외국어대학교 포문학 석사를 거쳐 2022년 브라질 상파울루 대학교에서 문학 번역 이론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브라질 상파울루 대학교 한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연합뉴스》 통신원으로 기사를 쓰고 있다.
* 사진제공_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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