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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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호

거기 그녀가 서있는 것을 보았네

지동식

   1. 낮 그리고 밤

   “이게 다 너를 처벌하라는 진정서에다 고소장이야! ‘글로리’ 가게 주인 알지? 변호사까지 하나 데리고 왔던데. 뭐 많아. 위력에 의한 영업 방해, 공갈 협박, 사문서 위조, 업무상 배임에 불법 행위 교사. 또 뭐가 있었는데.”
   “…….”
   “정석이, 너네 구역 일이니 어서 알아봐. 검찰 영감한테까지 가면 피곤해지니까, 빨리 소취하 시키는 게 좋을 거야. 한창 바쁠 때 이런 일로 조사받는다고 왔다 갔다 하면 너만 손해야.”
   “…….”
   “정석이, 아침 안 먹었지? 해장국 시켜줄까?”
   어제저녁 ○○서 강력반장 우 형사의 전화를 받고 정석은 날이 밝는 대로 경찰서를 찾았다. 치열한 전쟁 끝에 구중앙시장파를 몰아내고 중앙시장의 이권을 차지한 정석의 일당을 경찰에서는 일찌감치 신중앙시장파로 이름을 지어놓았다. 정석은 수감 중인 두목 동삼을 대신하여 중앙시장 상인연합회를 이끌며 최근 인가받은 재개발 사업을 진행 중이었다. 그러나 최근 시장 안으로 들어온 은영이 조합에도 가입하지 않고 재개발에 동의할 수 없다며 상인연합회에 맞서고 있었고 고소를 남발하여 적잖이 신경 쓰이던 중이었다.
   “내가 왜 댁들의 조합에 억지로 가입해야 하는데요? 난 안 할 거고요, 전 주인에게 지불한 권리금에다 이전보상비까지 배로 물어주시면 나가렵니다. 됐어요?”
   은영은 몇 달 전에 중앙시장 한편에 액세서리 가게를 열었는데 전 주인에게 속아서 왔다고 했다. 곧 재개발이 시작되는 것도 몰랐고 처음에 계약한 자리가 아니라 시장 입구에서도 한참 들어간 점포라 사실상 사기를 당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후로 상인연합회에도 가입하지 않은 채 드러내놓고 재개발에 반대해 왔다. 성격이 억세 상대하기가 쉽지 않은 인물이었다.
   “제가 상인연합회장으로서 부탁드립니다. 모든 조합원이 동의한 사업이니 결정에 따라주시고 곧 가게를 비워주셔야 철거 작업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철거를 하든 말든 난 조용히는 못 나가니까, 그렇게 아세요. 그러고 보니, 상인연합회라는 데가 적당히 전 주인들하고 작당해서 점포도 바꿔치기하고 그러는 곳 아니에요? 도대체 당신들 뭐 하는 사람들이에요?”
   은영은 정석과 덕기를 한참 노려보다가 성큼성큼 사무실을 나갔다.
   “형님, 저거이 완전 꼴통입니다요. 울 아그들도 이제 글로리 앞으로는 지나가지도 못하게 했습니다. 아, 툭하면 영업 방해니 협박이니 하며 신고를 해대니 관리 대상에 올라가 있는 애들은 골치 아프다고 저기로는 가려고를 안 혀요.”
   “…….”
   덕기는 정석이 소년원에 수감되었을 때 만났던 동기이자 오른팔이다. 출감하고 나서도 계속 정석의 곁을 지킨 우직한 인물이기도 했다. 사람의 그런 우직스러움은 종종 어리석음을 동반하여 미움을 살 수 있는데, 덕기의 그런 어리석음은 오히려 한 인물의 매력으로 변하여 그 인물이 귀엽게 느껴지도록 재창조할 수 있게 했다. 덕기는 정석에게 그런 동생이었다.
   “정석이 잘 지냈는가? 사무실은 별일 없고?”
   “예, 동삼 형님. 사업관리자까지 선정을 마쳤고 이제 곧 철거 예정입니다.”
   “애썼다. 시방, 정석이 동생이 다 알아서 하니 나가 맘이 편해요, 인자 동생 세상이여, 좋을 때잖여?”
   “…….”
   “정석아, 누나한테 종종 연락드리고. 인사도 가고 혀, 알겄제?”
   “네, 형님.”
   “나, 요즘 주일마다 신부님을 만나고 있어야. 곧 세례도 받기로 했는디, 세례명은 요한으로 하려고, 하하.”
   “영치금 넣어두고 갑니다. 몸 건강하십시오, 형님.”
   동삼은 손을 흔들며 웃음을 지어 보였다. 정석이 큰절을 올리고 면회를 마치고 나갔다. 동삼은 신중앙시장파의 두목으로 구중앙시장파와의 전쟁 중에 입건되어 수감 중이다. 입감 직전에 구중앙시장파의 습격을 받고 나서 불구가 되어 수감 생활을 하던 중 자신의 조직을 정석에게 물려주고 그들의 세계를 사실상 떠났다. 이 세상의 무엇이든 그것이 보통 사람들의 평범한 것이라면 쉽게 주고받을 수 있겠지만, 양지에 있는 것이 아닌 음지에 속해 있는 것이라면 그 주고받는 ‘거래’는 남들 모르게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거래’ 후에도 어떤 식으로든 누군가는 그 은밀한 대가의 몫을 치러야 하는 것이 그 세계의 이치였기에, 정석은 그 몫을 감당하고 있는 동삼을 볼 때마다 마음이 무거웠다.
   “형님, 큰성님 얼굴이 많이 편안해지신 것 같은디요. 울 큰아덜도 성당에서 복사인지 뭔지를 최근에 한다고 하던디요. 아, 맞다. 긍게 보니, 형님도 성당 다니신다고 하셨지라.”
   “…….”
   “사무실로 가겠습니다요.”
   “…….”
   덕기는 운전대를 잡고 연신 뭐라 떠들어댔는데, 정석이 말이 없자 곧 조용히 운전만 한다. 차창 밖으로는 눈발이 어지럽게 날리고 있었다.
   사무실에서 정석은 커피를 마시며 며칠 전 누나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정석아, 고맙다. 누나가 너한테 도움만 받네. 매형은 건강이 좋아졌어. 이제 배달도 나가곤 한다. 그래, 너네 시장 일은 어떠니?”
   “…….”
   “상인연합회장이니 상인들 눈에 피눈물 나게 하면 안 돼, 알았지?”
   “…….”
   “그리고 정석아. 다음주에 너 생일이니, 누나 집에서 저녁하자.”
   “…….”
   정석의 누나 정희는 지방 도시의 전통시장에서 작은 가게 하나를 운영 중이다.정희는 부모를 여읜 후 집안의 가장으로 생활을 책임져 왔는데, 고교 때 사고를 치고 소년원에 수감된 정석이 출소 후에도 검정고시로 고등학교 졸업 자격을 취득하도록 뒷바라지했던 단단한 사람이다. 더 이상의 공부는 의미가 없다고 판단한 동생 정석이 스스로 대학을 포기하고 나서 성인이 된 후에도 끊임없이 세심함으로 보살펴주는 누나 정희는 정석에게 또 다른 의미에서의 어머니, 대모이기도 했다.
   가끔씩 정석은 지금 자기들 남매의 모습을 보며, 하늘이 짓궂은 장난을 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같은 하늘 아래 각자의 시장 안에서 정석은 수많은 정희들과 부대끼며 살아가는데, 그 삶의 모습이 마치 아스팔트 위의 잡초와도 같이 질기어 누구도 쉽게 꺾지는 못한다. 누나 정희는 시장 안에서 또 다른 정석이들과 부대끼면서 자신의 삶을 지키며 살아갔다. 흙탕물 속에서도 꽃을 피워내는 연꽃처럼 강한 생명력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서, 정석은 그들의 삶이 마치 하늘의 장난처럼 느껴졌다.
   남매의 치열한 삶의 기억들을 떠올려보며, 정석은 은영이 자신의 누나 정희와 닮은 점이 많을 것 같다는 생각을 최근 들어 종종 한 적이 있었다.
   정석이 살고 있는 동네 골목 입구에는 작은 가로등이 있어 밤길이 외롭지 않았다. 한참 거세게 내린 눈발이 그친 후 얼어붙기 시작해 길은 미끄러웠다. 정석이 골목에 들어설 무렵 어디에선가 많이 본 여인의 모습이 보였다.
   “은석아, 미끄러우니 길 조심하고 다음 달에 또 올라와. 졸업식 하기 전에 양복도 사러 가자.”
   “응, 누나. 다음 달에 또 올게. 고마워. 누나도 힘들 텐데, 무슨 용돈을 이리 많이 넣은 거야?”
   “그냥 줄 때 받아, 없으면 못 준다. 하하!”
   “응, 고마워. 그럼 갈게.”
   은영은 동생 은석이 떠나는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았다.
   은영이 등을 돌려 움직이려는 찰나, 정석과 마주친 은영은 약간은 놀란 듯했으나, 곧 애써 무덤덤하게 정석을 바라보며 입가를 씰룩이면서 물었다.
   “어? 우리 상인연합회 회장님 아니신가요? 이런 동네에 사시나요?”
   여인네들 특유의 아리송한 말투. 궁금해서가 아니라 비꼬고 있음을, 그런 말투임을 정석이 모를 리가 없었다.
   “…….”
   누군가 어떤 식으로든 도발해 올 때 감정 없이 차분하게 응대하는 것이 상책인 것을 정석은 그만의 인생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었다. 특히 상대가 내게 악감정을 품고 있을수록 이쪽에서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아야 일단 유리한 위치에 선다는 것을 체험적으로 익혀왔기 때문이다.
   “동생입니까?”
   “네, 제 잘난 동생이에요. 댁들하고는 근본적으로 다르답니다.”
   “…….”
   “혹시라도 내 동생 나중에 보게 되면, 아는 척한다거나 행여 겁줄 생각은 아예 마세요. 그때는 가만 안 둘 거예요. 우리 함께 병풍 뒤에서 나란히 누워 있을 테니. 아시겠어요? 아, 지금도 동네 이웃이니 그것도 나쁘지는 않겠네요.”
   “아따, 이것이 형님한테 말하는 것 보소!”
   벼락처럼 큰 목소리는 덕기의 그것이었다. 정석은 그제야 덕기가 자기를 따라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무슨 일이야?”
   “아, 형님. 차에 전화기를 두고 내리셨소. 요 앞에 급히 차 세워놓고 이렇게 갖다 드리러 나가 열불 나게 왔는디. 차마 못 볼 것을 보니, 그만.”
   “…….”
   “어? 꼬마 하나 데리고 저 겁주시나요? 뭐, 어떻게 하실 건데요?”
   “뭐시라? 아, 시방, 이것이 헛소리를 하면서 시비를 거는 것이여?”
   “뭐? 이것들이 진짜? 여기서 한판 붙어봐, 그럼?”
   “그만 해.”
   정석이 상황을 정리하자, 덕기는 붉으락푸르락, 노기가 안 풀린 얼굴로 정석에게 인사를 하며 총총걸음으로 사라진다. 가면서도 연신 뒤를 돌아다보며 남겨진 둘을 바라보았다.
   “아유, 두 분이서 깡패 영화 찍네요. 하하하, 재미있습니다!”
   “…….”
   정석은 그런 은영의 도발에 시종일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날 밤 내내 정석은 은영과 그 동생을 떠올려보았다. 동시에 오래전 자신의 기억도 함께 떠오르는 것이 내심 의아했다. ‘그게 언제였지? 그때도 추운 겨울날이었는데, 어둠이 막 깔리기 시작한 시간이었을 게다.’ 정석이 검정고시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던 그 저녁, 집 앞 골목에서 자신을 마중 나와 기다리던 누나 정희. ‘또 몇 년 후, 그게 언제였더라?’ 서울로 취직이 되었다고 밤차로 올라가던 날 그 저녁, 자신을 배웅하며 골목길에 서 있던 누나 정희. 그때 누나 정희의 모습이 오늘 집 앞 골목에서 동생 은석을 대하던 은영의 모습과 너무도 닮았기에 정석은 순간 흠칫 놀라고 말았다. 아까 그 은영은 자신의 누나 정희, 동생 은석은 정석 자신이 된 것 같은 착각에 정석은 그날 밤 내내 잠자리를 뒤척여야 했다.
   새벽녘에야 잠깐 잠이 들었다 깨어난 정석은 다음날이 일요일이라 중앙동성당 미사에 가기로 했다. 어젯밤에 누나 정희가 토요 특전미사에 다녀왔다는 문자를 보내와, 오늘 너도 미사를 다녀오면 좋겠다고 한 것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그날 미사 중반, 주임신부는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를 찾아다니는 장면에 관해 강론했는데, 그 장면에서 정석은 어릴 때 누나 정희가 오락실 혹은 당구장이나 동네 만화방을 돌아다니며 자신을 찾아다니던 기억이 얼핏 떠올라 입가에 피식 웃음을 지어 보였다.
   “율리오 형제님, 오랜만입니다.”
   주차장에서 마주친 신부 유상은 정석에게 따뜻한 말투로 반가이 아는 척을 했다. 사람에게 풍기는 따뜻함은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는 것임을 정석이는 그의 거친 삶 속에서 항시 느껴왔기 때문에 종종 그런 따뜻함과 대면할 때면 무척이나 낯선 어색함을 안겨주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어색함은 결국엔 정석의 말라버린 마음밭을 촉촉하게 적시는 습기로 변해 왔기에 정석은 자신도 모르게 꽤나 그런 습기를 갈망하던 사람이었다.
   그래서일까? 정석은 신부 유상에게는 거룩한 척하는 종교인 특유의 가식이 없다고 생각해 왔다.
   “신부님, 잘 지내셨는지요?”
   “덕기, 인사드려. 본당 신부님셔.”
   “처음 뵙겠습니다. 신부님, 식사는 하셨습니까?”
   주차장에서 정석을 기다렸던 덕기는 신부 유상에게 꾸벅 허리를 굽히며 건달들의 인사 방식으로 식사했느냐고 물으니 신부 유상은 대답 대신 그냥 빙그레 웃었다.
   “근데, 형님 세례명이 율리오이십니까?”
   “…….”
   정석은 한동안 침묵하다가 피곤하다며 차 안에서 그대로 눈을 감았다. 눈을 감은 채 다시금 오늘 신부의 강론 속에 아들 예수를 찾던 성모의 모습을 떠올려보았다. 그 성모의 모습은 어릴 때 골목길에서 자신을 기다리거나 찾아다니던 누나 정희랑 꽤나 비슷했을 것 같다는 생각을 얼핏 해보았다. 그리고 정석이 자신도 모르게 어젯밤 동생 은석을 배웅하던 골목길에서의 은영의 모습이 다시 생각이 났다.

   2. 성탄 전야

   정석은 오랜만에 누나 정희네에 내려가 생일 밥상을 얻어먹었다. 정희는 정석에게 반찬을 한가득 반찬통에 싸주면서도 연신 동생 걱정을 했다.
   “성탄절 때 다시 내려와. 하루 자고 가고, 성탄미사도 오랜만에 같이 가자.”
   “…….”
   “올라가면 연락해. 전화 못 받을 때는 문자라도 남기고.”
   “…….”
   누나 정희는 언제나 그랬듯 자신이 떠날 때까지 배웅을 했다. 멀어져가는 누나의 모습을 얼핏 뒤돌아볼 때 또다시 은영, 그녀의 모습을 생각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차 안에서 운전대를 잡으며, 또 여러 대의 담배를 연신 피워대면서 정석은 어떤 해답을 찾듯 무엇인가를 아주 오랫동안 생각했다.
   
   “무엇을 그리 골똘히 생각하십니까, 형님?”
   다음날 사무실에서 정석을 쳐다보는 덕기가 불쑥 물었다.
   “덕기, 나가서 여기로 송금해. 나머지 반은 가게 비우는 대로 해준다고 하고.”
   작은 종이에 적힌 글자와 숫자를 보더니 덕기는 다소 놀란 듯 물었다.
   “어? 글로리 주인입니까요? 알겠습니다요.”
   덕기는 연신 고개를 갸우뚱하면서도 인사를 꾸벅하고 사무실을 나갔다.
   
   그 주간의 주말을 보낸 후, 월요일 아침, 정석은 사무실에 들어가면서 시장 상인들과 연신 인사를 주고받았다.
   “어이. 정석이 왔는가?”
   “흐매, 정석이 얼굴 보기 힘들구먼, 차 한잔 따시게 하고 가지?”
   정석은 상인들의 인사를 뒤로하며 발길을 재촉해 은영의 점포에 들러 보았다. 그러나 그곳은 이미 빈 자리였다.
   ‘이번 달까지는 장사를 하기로 했는데, 무슨 일이지?’
   사무실로 돌아와 보니, 덕기는 서류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형님, 그 글로리 주인 가시나. 그거이 형님 앞으로 해서 사무실로 택배 우편을 보내놓고 주말에 가게를 비웠습니다요.”
   정석이 봉투를 건네받아 보니, 그 안에는 조합원 가입 동의서와 조합장에게 의결권을 위임하는 위임장 그리고 은영의 자필 편지가 함께 들어 있었다.
   “회장님께서 생각지 않게 가게 비용을 보전해 주어서 저도 재개발에 동의하기로 하고 조합원 권리를 위임하며 가게를 비웁니다. 그간 고집을 많이 부린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없지는 않네요. 각자 잘 먹고 잘 살면 좋겠고 앞으로 상인들 위해서 애써주세요. 은영 드림.”
   ‘…….’
   편지를 읽고 난 정석은 어떤 허탈함이 밀려드는지 꽤 오래 멍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날 정석의 퇴근길 저녁, 하늘에서 내리는 눈발이 곧 다가올 성탄을 예비하듯 하얗게 동네를 덮고 있었다. 정석의 집 앞 골목길에는 가로등 하나가 여전히 어둠을 밝히고 있었는데 그 골목에 들어설 무렵 우 형사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정석은 잠시 주저하다 받았다.
   “어이, 정석이. 그 글로리 주인 여자가 변호사 통해서 내용증명을 보냈는데. 너한테 한 모든 고소, 진정을 취하한다고 하더라고. 뭐 어떻게 한 거야? 너한테 주는 성탄 선물인가벼? 하하! 메리 크리스마스다.”
   “…….”
   정석은 전화를 끊은 후에 잠깐 골목길 어귀에 서 있었다. 은영은 아마 이 동네에서도 이사를 갔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녀를 다시 볼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과 함께 얼마 전 이 골목길에서 그녀와 그녀의 동생과 마주친 광경도 떠올려보았다.
   그때 누나 정희에게서 문자 메시지가 도착했다.
   “메리 크리스마스! 정석아. 누나가 조금이지만 너한테 용돈 보냈다. 없으면 못 주니까, 줄 때 받아. 호호호.”
   ‘어디선가 들어본 말이었는데, 어디서였지? 아, 은영. 그녀가 바로 이 자리에서 동생 은석에게 용돈을 쥐여주면서 했던 말이었지.’
   정석은 그때의 장면이 눈앞에서 생생하게 떠오르는 듯, 마치 그녀가 주변에서 자신을 보고 있는 느낌이 들어 몇 번이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바로 그때, 정석의 눈에는 많이 보던 여자 두 명의 모습이 똑똑히 보였다. 그 가로등 밑에는 누나 정희, 그리고 은영이 서 있었다. 그 둘은 분명히 다른 두 사람이었건만 정석의 눈에는 하나의 형체 안에 같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모습은 너무나 익숙한 모습이기도 했는데, 오래전 어느 날 저녁 동네 어귀에서 자신을 기다리던 누나 정희의 모습이었으며 또 얼마 전 동생을 배웅하던 은영이기도 했다. 점점 거세게 내리는 눈발이 그 둘의 형상을 정석의 시야에서 희미하게 만들어 갔음에도 그럴수록 이상하게 그들의 형상이 더 또렷하고 분명하게 보였다.
   그 시각에 성당에서 성탄 전야 미사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은은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이번 성탄엔 누구나 각자 원하는 선물을 얻을 수 있기를 바란다는 듯 그렇게 은은하면서 힘 있는 울림이 있는 소리, 자애로운 성모께서 아기 예수를 품에 안고 흥얼거리는 허밍으로 들려주시는 것 같은 신비로운 종소리였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 종소리가 조용히 잦아들 즈음, 정석에게 보이던 그녀들의 모습도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무엇인가에 홀려 있는 것 같았던 정석의 표정은 환하게 밝아지며 입가에는 살짝 웃음기가 보였다. 그리고 정석은 전화기를 들어 누나 정희에게 문자를 보냈다.
   ‘내일 내려감. 메리 크리스마스!’

필자 약력
프로필_지동식.jpg

1976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1996년 캐나다로 이민했다. 틴데일대학교에서 B.R.E 종교교육 학사, M.T.S 신학연구 석사학위를 받았다. 서치펌 GIHON NETWORKS 대표이사로 있고, 충청남도 홍성군 투자유치 자문관으로 활동 중이다. 「장군의 아들: 김좌진 장군에 대한 소고」로 2020년 캐나다 애국지사 기념사업회 보훈문예작품 공모전 입상, 「만리재의 봄」으로 2021년 캐나다 한국문인협회 제42회 신춘문예공모전 단편소설 부문에 입선했다.
* 사진제공_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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